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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꺄, 기어. ――네 발로 기라고!!”
퍼억, 상쾌한 소리가 공기 중에 터져나간다.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는 쬐그만 녀석 하나가 벌벌 떨면서 엎드렸다.
그 앞에서 나는 다리를 벌리고 선 채 쇠파이프로 내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내뱉었다.
“가랑이 사이로 기어나가 봐, 멍멍 짖으면서.”
주변에선 킬킬 웃는 소리도 들렸고, 약해빠진 놈 붙잡고 뭐 하는 거냐고 핀잔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아무도 진지하게 날 말릴 시늉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놈들도 다 마찬가지인 데다 알지도 못하는 놈 하나 때문에 나랑 싸우려 드는 바보 놈은 없다.
엉망으로 쥐어터져 부어오른 얼굴로 그 쬐그만 놈은 내 가랑이 사이를 기어 빠져나갔고, 나는 그런 녀석의 엉덩이에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원래 살점이 있는 데라 크게 상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엄살쟁이 녀석은 악 소리를 지르며 또 바닥을 뒹군다. 나는 그놈 위로 몇 번이나 발길질을 했다.
“기어가라고 정말 기냐, 사내새끼 주제에 배알도 없는 놈, 달고 나온 거 그냥 떼 버려라, 새끼야.”
발끝에 걸리는 감촉이 경련을 하며 움츠러든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쇠파이프를 아예 던져 버리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발 하나만 가지고 그놈을 마구잡이로 걷어찼다.
금세 녀석은 엉엉 울면서 몸을 둥글게 굽힌 채 바닥을 나뒹굴었고, 곧 흥을 잃어버린 나는 흙바닥에 피며 먼지 따위가 묻은 신발을 닦아내며 침을 뱉었다.
“야아, 정상헌, 애를 잡는구만, 잡아. 멀쩡히 잘 지나가던 놈은 왜 잡아와서 줘패고 그러냐? 불쌍하게.”
벽돌더미 위에 올라앉아 담배를 물고 있던 녀석이 낄낄거리며 중얼거렸다.
난 코웃음만 치고는 잠자코 녀석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갑째 빼들어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왜, 난 저놈 지나갈 때부터 잡혀오겠구나 싶었는데. 정상헌이, 저런 놈 우라지게 싫어하잖아. 멀끔하고 가늘게 생겨서는 공부 잘할 것처럼 보이는 놈. 게다가 좀 싸늘―하니 싸가지 없게 생겨먹으면 직빵이야. 상헌이, 그런 놈 무지무지하게 싫어해. 보이기만 하면 꼭 괴롭히더라.”
“닥쳐, 인마.”
난 연기를 폐 깊이 들이쉬며 녀석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어이쿠 무서워라, 라고 장난스레 중얼거리며 녀석이 어깨를 움츠린다.
여전히 부들부들 떨면서 바닥에서 일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놈을 아무 감흥 없이 내려다보며 난 혀를 찼다.
제기, 저놈도 아니다.
좀 더 차가운 눈으로 서늘한 얼굴로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경멸이 확연하게 깃든 어조로 조용하게 말을 내뱉는, 그런 놈이 아니다. 진짜로 밟아 주고 싶은 건 바로 그런 놈인데.
약골을 쥐어패고 나서 기분만 더러워졌다.
“어지간히 센 놈도 코웃음 치면서 쳐다보지도 않는 주제에, 왜 꼭 저렇게 생겨먹은 약골은 죽어라고 찔러 보냐? 아픈 과거라도 있어?”
뒤쪽에 앉아 아까부터 계속 빙글거리는 놈을 짧게 일별하고 난 한마디 중얼거렸다.
“그 이상 지껄이면 너도 저놈 꼴 날 줄 알아.”
“…….”
그래, 조용히 있는 게 네놈 사는 길이다.
예부터 혀 함부로 놀렸다가 망한 놈이 한둘이 아니다.
난 칫, 하고 중얼거리곤 담배를 짓씹었다.
아픈 과거.
아픈 과거라고까지 과장스레 말할 건 아니지만, 이 갈리도록 미운 놈은 있다.
벌써 그것도 몇 해만 지나면 10년이 되고, 따지고 생각해 보면 그놈이 그렇게 지독한 짓을 했던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때는 그놈이나 나나 다 철모르는 꼬마아이였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과 감정적인 결론은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게 사람이라는 짐승의 특징이다.
그놈을 만났던 게 초등학교 4학년 때, 8개월 정도 같은 집에서 살고는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이제 잊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 냉정하고 조용한 표정 같은 게 어린애고 어른이고를 막론하고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던 탓인지 유독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나는 몇 년을 줄곧 어머니와 둘이서만 살았었다.
그러던 차에 새아버지와 형이라는 사람이 생긴다고 하니 조금 들떴던 것도 같다. 새아버지야 예전에 몇 번인가 본 적 있으니 그렇다 쳐도, 두 살 위라는 형이라는 게 어떤 사람일지 몹시 궁금했었다.
나보다 강한 놈일까? 그렇겠지? 6학년이라면 틀림없이 무진장 세고 강한 놈일 거야. 하지만 그래도 나는 지지 않아. 초반에 기를 눌러 버려야지.
그렇게, 학교에서 전학년 통틀어 나에게 이길 놈이 없다는 의기양양함으로 나는 녀석을 만난다는 저녁 자리에 어머니와 함께 나갔다.
그러나 내 기대를 판판이 깨고 눈앞에 나타난 놈은, 도무지 싸움이라곤 주먹 휘두르는 것도 못할 것처럼 생긴 샌님 녀석이었다. 어린 마음에 품었던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그 순간의 실망이란.
‘안녕, 만나서 반가워.’
새아버지의 옆에 서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 꼬맹이는 약간 떨떠름하게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고, 나는 그조차 맘에 들지 않았다. 조용조용 속삭이는 듯한 그 태도조차 같이 뒹굴며 놀고 싸울 수 있는 형제로서는 실격이었다.
그래도 옆에선 어머니가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어머니를 무척 좋아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어머니에게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짐짓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어, 반갑다. 나는 정상헌.’
순간, 뭐가 잘못됐는지 녀석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가 조금 더 떨떠름하게 웃으면서 윤해신, 하고 짧게 제 이름만 밝혔다.
아무래도 이놈도 내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은 모양이다. 뭐 나도 그러니까 피장파장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새 형제에 대한 기대는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찌감치 기대를 버리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놈은 정말 샌님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늘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책이나 읽고 있었다. 도중에 만화방이나 오락실에 들르는 일 따위 한 번도 없었다. 친구도 없는 모양인지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일도 없었고, 그저 늘상 책만 읽었다.
그렇기만 했으면 별 상관없었다.
그놈의 경우 좀 정도가 지나치기는 했지만 책 좋아하는 놈이야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점점 그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가끔 친구들과 떠들고 놀고 있는 나를 볼 때의 그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사는 곳도 같고, 몇 달간은 학교도 같은 곳에 다녔으니 마주칠 일도 많았다. 어린애의 행동반경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럴 때마다 으레 나는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고, 녀석은 혼자 책을 보거나 혹은 친구 한둘 정도와 조용히 이야기나 하면서 걷고 있었다. 그럴 때 가끔 눈이 마주치면 녀석은 은근히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날 보곤 했다.
늘 조용하고 고분고분한 놈이 드물게 그런 시선을 할 때면 유독 얄밉게 느껴져, 난 영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계집애라도 그러지 않을 정도로 그 녀석은 순하고 예의발랐다. 집에서 물 한 컵 떠다 줘도 꼭 고마워, 라고 인사를 일일이 했다(나는 물론 태연하게 녀석에게 내 할 일을 맡기고 눈썹 하나 까닥 안 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녀석과 싸우거나 다투지는 않았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샌님 따위는 싸울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보기만큼이나 실제로도 몸이 건강하지 못해, 걸핏하면 앓아눕기 일쑤였다.
날이 더우면 덥다고 비실거리고, 날이 추우면 춥다고 감기에 걸렸다. 뿐만 아니라 조금 신경 쓰이는 일만 있어도 열을 내면서 이불 속에 들어앉았다.
그런 놈이랑 싸우는 건 내 자존심으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고양이처럼 얌전한 척하고 있던 그 녀석도, 결국은 앙큼맞게도 잘 갈아 놓은 발톱을 드러내는 날이 왔다. 유감스럽게도―라는 게 나을까 다행이라는 게 나을까―, 그건 녀석과 내가 마주친 마지막 날이었다.
녀석의 아버지, 즉 과거의 내 새아버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다정하고 성실한 태도로 대했다. 가짜로 꾸며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건 같이 살고 일주일도 안 되어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을 금세 아버지로서 좋아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에 걸맞은 대우는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을 잘 듣고, 존중하고.
하지만 그에게는 유일하고도 중대한 결점이 하나 있었는데, 손을 쓸 수가 없는 여성편력이 그것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만은 도무지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이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 경우 피해자가 된 건 내 어머니였고, 그리 달갑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당연하다.
그의 여성편력을 이유로 어머니와 그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이혼을 하게 되었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친구처럼 잘 지내면서 간간이 만나서 놀러 다니곤 하는 모양이지만, 그 당시 어머니는 꽤 힘들어했다. 나도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많이 시무룩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이유 때문에 녀석을 은근히 괴롭히기도 했다. 아마 녀석도 조용히 견디고는 있었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거다.
녀석을 괴롭히면서도 내심 조금은 미안하다고 아주 약간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도 마지막 날 단번에 날아갔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장수하늘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그 곤충은 그때에도 보기 힘들었던 건 마찬가지라, 어른들이 어릴 때 수놈을 잡아 싸움을 붙이고 놀았다고 전해 듣기만 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뭘 잘못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크기를 좀 과장해서 말했지 싶다.
조금 전부터 조용히 침대에 파묻혀 내 말을 듣고만 있던 녀석이 낮게 코웃음을 치며 쌀쌀맞게 중얼거렸다.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거, 꼴사나우니까 적당히 해 두지 그래.’
나는 멍해졌다. 멍하니 녀석을 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녀석을 같이 사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그 녀석은 힘없고 조용하고 움츠러들어 있는 겁쟁이 샌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감히 나한테 대고 저런 말을 한 거다. 표정에는 비웃음을 담고서.
‘너……?’
어이가 없어 그 말 한마디를 던지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내게 그 녀석은 차가운 시선을 줄 뿐이었다.
일시에 나는 잠에서 확 깬 기분이었다.
이 녀석, 얌전하게 있는다 했더니 이런 식으로, 헤어질 때가 되니까 사람 뒤통수를 친다. 조용한 샌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악하고 음흉한 놈이었다.
난 금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책 좀 봤다고 잘난 척은.
녀석은 이때다 싶었는지, 예전부터 내가 말해 왔던, 조금씩 틀린 상식들을 일일이 되짚어나가기 시작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런 걸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냐, 보통. 이거 완전히 사람 물 먹이려고, 예전부터 작정하고 있었단 거잖아.
녀석의 입에서 말 한마디 한마디 나올 때마다 내 혀는 얼어붙었다. 황당함과 닮은 분노가 확확 치밀어올라 말도 안 나왔다.
녀석은 장장 10여 분에 걸쳐 한참을 지껄인 후에야 겨우 입을 다물었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도 다른 놈들이 보았더라면 몸을 움찔거리며 도망칠 만한 눈빛으로 녀석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태연하게 날 쳐다보았다. 뭐 할 말 있어? 라는 표정으로.
‘너…….’
뿌드득, 이 가는 소리가 내 입에서 새어나왔다.
‘너 같이 겉 다르고 속 다른 놈이랑은, ……같은 공기도 마시고 싶지 않아! 여태껏 얌전한 얼굴 하고 있더니 이 새끼가, 이렇게 나와?! 너 같은 놈이랑 여태껏 같은 공기 마시고 살았다니, 폐가 썩는 것 같다! 구역질 나!’
아마 조금만 더 그 자리에 머물렀다면 난 녀석을 때렸을지도 모른다. 녀석이 침대 속에서 앓고 있건 말건 마구잡이로 녀석의 그 반반한 낯짝에 주먹을 박아넣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 큰 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가 하고 어머니가 문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고, 나는 녀석을 향해 휘두르려던 주먹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도무지 분은 풀리지 않아서, 이따위 녀석과 같이 있기도 싫어서, 나는 어머니를 질질 잡아끌고 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어머니를 막무가내로 잡아끌며, 저런 녀석이랑 같이 있기 싫다고만 하면서 무작정 끌고 나왔다.
그날은 마침 어머니가 짐을 정리해 나오는 날이었고, 나는 아직 미처 뒷정리를 다 하지 않은 어머니가 마저 집에서 이것저것 정리하는 동안 계속 대문 밖에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두 번 다시 그놈이 있는 집 안으로는 들어가기 싫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지금껏 한 번도 녀석을 보지 못했다.
……사실, 웃기다. 생각해 보면 유치하고 웃긴 일이다.
어릴 적에 다툰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가슴 속에 품고 이를 갈고 있다고 하면 다 비웃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지금까지도 싫다.
어린애가 잘난 척하는 거야 그렇다고 봐줄 수 있다고 쳐도, 얌전한 척 사람 약점 잡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그 음흉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지금쯤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저기 뒹굴고 있는 놈이랑 비슷할까. 반반하고 싸가지 없는 얼굴로 여전히 사람을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걸까. 그렇겠지.
지금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한 방 크게 먹여 주고 싶은데.
하지만 난 거기까지 생각하곤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만날 일도 없다. 그런 놈과 일부러 만날 일도 없거니와 만나고 싶지도 않다.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툭 뱉어내고 한 개비 더 갈취하며 중얼거렸다.
“아……이제 사람 조지는 것도 질렸다. 뭐 재밌는 거 없나.”
“정상헌이가 그런 말도 다 하냐. 하긴 질릴 때도 됐지, 네 손에 인생 망친 놈이 어디 한둘이냐.”
“이제 싸움은 너무 해서 지겨워.”
“그래? 그럼 너, 돈이나 벌래? 부자 아줌마랑 잠 좀 자 주고 밥 좀 같이 먹어 주면 꽤 돈 두둑하게 뜯어낼 수 있다고, 승구가 루트 하나 가르쳐주던데.”
“헤에?”
별 흥미는 없었다.
하지만 늘상 싸움의 연속이었던 나날도 이제 지긋지긋해질 무렵이었고, 거기다 지금은 싸움에도 이골이 나서 나와 주먹을 맞겨룰 만한 놈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심심풀이 여흥의 종류를 바꿔 보는 것도 괜찮겠지, 싶었다.
그래서 나는, 반 호기심으로 매춘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 * *
아까부터 줄곧 작은 손이 가슴에서 복부 근처를 더듬으며 움직였다.
간지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조금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짜증스레 눈을 떴다. 흘긋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유나가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밝히기는.
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누우며 웅얼거렸다.
“귀찮아, 건들지 마.”
“어머, 차가워라. 부잣집 마나님한테는 안 그러면서?”
“흥, 알 거 다 아는 년이 지껄이긴.”
유나와는 고교 때부터 알게 되었다. 그래, 아직 내가 한창 싸울 때다. 매춘에 발을 들여놓을 그 무렵 우연히 알게 되었다.
딱히 도와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내가 조져 놓은 놈 하나가 그때 마침 이 계집애를 조지겠다고 날뛰고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내가 그녀를 도와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이렇게 가끔 만나 욕구나 풀곤 하게 되었다.
계집애가 끈질긴 데가 있다고 할까, 탐색하는 걸 좋아한다고 할까, 내가 할망구들한테서 돈 받는다는 거에서부터 미친개처럼 싸우고 돌아다녔던 때의 일까지, 나에 대해선 훤하게 꿰고 있다.
뭐, 그래도 귀찮게 들러붙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 편하긴 하다. 하기야 한때 그렇게나 나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다녔으니, 자칫 들러붙으려고 했다간 정말로 인생 조져먹게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일단 눈을 떠 버리자 잠이 달아나서, 나는 눈을 껌뻑인 채 멍하니 빛바랜 커튼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 고등학교 때 꿈을 꿨었구나.
한창 싸우고 돌아다닐 때, 할망구들한테 몸 팔기 바로 전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놈과 비슷하다 싶은 놈들이 눈에 띄면 무조건 잡아놓고 패고 봤었는데.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일이 되었다.
등뒤로 유나가 살짝 달라붙었다. 다짜고짜 들러붙으면 혼쭐이 난다는 걸 알기에, 눈치를 본 후에 등뒤로 몸을 바싹 붙였다.
“상헌아, 나 배고파. 뭐 먹으러 나가자, 응?”
시계를 보았다. 벌써 아홉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체크아웃 시간도 되었다.
이 러브호텔이야 곧잘 오곤 하니까 조금 정도는 시간을 오버해도 별말 없이 넘어갈 수 있지만 이대로 누워 있기도 싫었다. 욕구 해소는 다 했는데 계속 호텔방에 계집애랑 누워 있는 것도 답답해서 싫다.
“가서 씻고 와. 나가게.”
무뚝뚝하게 한마디 던지자 뒤에서 뭐라고 투덜거리며 일어선 유나는 욕실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난 그제야 등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알몸을 드러낸 채 욕실로 가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은, 역시 비쩍 곯은 노인네라도 벌떡 설 정도로 잘 빠졌다. 앞모습도 제법 볼 만하지만 유나는 뒷모습이 더 흥을 돋운다.
……뒷모습이라……. 뒷모습은 그놈도 제법 괜찮지. 계집애 같지는 않고, 가늘긴 해도 근육도 적당히 잘 붙어서 꽤 보기 좋은 몸을 하고 있는 그놈도, 뒷모습은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색기를 풍겼다.
그래, 그건, 처음 다시 만났을 때도 얼핏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놈을 다시 보게 될 일이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대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관광 안내 관련 일을 한다고 했을 때에도, 경주에 내려가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은 요만치도 하지 않았다. 어디 적당히 집 얻어 하숙이나 자취하면서 살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머니가―여기에 대해서만은 처음으로 어머니를 원망하고 싶어졌었다―마음대로 일을 진행시켜, 마침 집에서 나와 혼자 살고 있다고 하는 그놈의 집에 날 하숙시키려고 했던 거다.
나는 당연히 싫었다.
벌써 10년이 넘도록 만난 적도 없고, 게다가 헤어질 때에도 그렇게 껄끄러웠다. 인성이 딱히 쉽게 바뀌지 않는 것임을 감안할 때, 그런 음흉한 성격을 가진 놈이랑 같이 살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는 그만큼 마이페이스인 데도 있으셔서, 무작정 일을 진행시켜 버리셨다. 급기야는 그놈과 새아버지를 함께 만나는 자리에 몇 시까지 나오라는 말만을 남기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외출을 하기에 이르렀다.
갈까 보냐, 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어머니에겐 약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어릴 적부터 자식을 여자 혼자 몸으로 키워내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렸던 나도 그걸 생생하게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더욱 어머니를 홀대할 수가 없었다.
아, 가기 싫다, 라고 백 번을 되뇐 후에야 나는 느지막이, 약속 시간도 지나서 그 자리에 나갔다. 은근히 그들이 자리를 옮겼거나 이미 헤어졌기를 바라며.
그러나 한 시간 여를 늦게 나갔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빌어먹을.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들어갔는데, 그러고 보니 그놈의 모습은 없었다. 제일 보기 싫었던.
설마 고작해야 10여 년 지났을 뿐인데, 이미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남자분이 그놈일 리는 없고―새아버지는 10년 전과 변한 게 없었다―, 커피잔이 앞에 놓인 빈자리가 하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반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자 새아버지가 눈을 크게 뜨며 인사를 받았다.
‘아, 그래, 상헌이구나. 이거 정말 많이 컸는걸. 이제 몰라보겠어. 허허, 이 녀석. 키가 몇이냐?’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어른들이 묻는 건 으레 그렇다. 키가 몇이냐, 몇 살이나 되지, 조금 더 나가면 여자친구는 있냐 등등.
적당히 대답하고 앉자, 물어보지 않아도 먼저 대답이 돌아왔다.
‘해신이는 지금 전화 좀 받으러 갔거든. 곧 올 게다.’
‘아, 예.’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그놈.
전화 받으러 갔다, 라. 그럼 곧 돌아오겠군.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했으려나. 뭐 대충 짐작은 가지만.
적당히 커피를 시키고, 난 정답게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옛부부들 사이를 가르고 일어섰다. 잠시 화장실이요, 라고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떴다.
실제로 화장실에 가고 싶기도 했고 담배 한 대의 생각이 간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수는 외나무다리라고(아니 조금 틀린가).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놈과 눈이 마주쳤다.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거울을 앞두고 있었던 터라 거울 속으로 시선이 딱 마주친다.
핸드페이퍼로 손을 닦으며 지그시 이쪽을 바라보는 그놈을, 나는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다.
어릴 적에 비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키가 훌쩍 컸다. 그때처럼 비리비리하지도 않고, 적당히 근육이 붙어 보기 좋을 정도다. 표정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조개처럼 입을 다문 채 조용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뭐랄까, 생각했던 것처럼 싸늘하고 칼 같은 무표정이 아니었다. 혹자가 보면 다정한 청년이구나, 라고 할지도 모를 인상을 하고 있는 그놈의 표정이 어딘가 멍해 보이기까지 해, 나는 그놈을 못 알아볼 뻔했다.
거 참 뭐라 말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로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이유도 없이 번뜩 알아차렸다. 그놈이구나.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마주쳐 뚫어지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도 녀석은 딱히 동요하지 않고 찬찬히 나를 훑어보았다. 전체적인 생김새에서부터, 세세한 손이며, 어깨 같은 곳까지.
그러곤 마찬가지로 전혀 동요 없이,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어색해서라기보다는 관심이 떨어졌다는 듯이.
그 순간 기분이 상해 버렸다.
이놈은 예전이랑 똑같군. 제 본위로 주위 사람을 살피고, 판단하고, 멀어지는 것까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역시나, 재수없는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성큼성큼 변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10여 년간 잊고 지내자 생각했던 분노가 새삼 치밀어 올랐다. 그 계기를 끄집어내기에는 그놈의 그 태도를 눈앞에 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저런 놈이랑 어디 같이 살까 보냐, 라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이다.
……라고는 해도 사람의 의지라는 게 주위 상황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거지만.
그래, 생각해 보면 재회 후의 첫인상은 그랬다.
차갑거나 싸가지 없다는 건 잠깐 있다가 생각한 거고, 처음에 그냥 마주쳤을 때엔 참 묘한 인상이다 싶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동안에 다시 졸음이 왔다.
난 흘끔 욕실 쪽을 보았다. 물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거기에 맞춰 콧노래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유나는 한번 욕실에 들어가면 반 시간이고 한 시간이고, 어딜 그렇게 꼼꼼하게 씻는지 내처 몸을 씻고 앉아 있으니까 아직 나오려면 멀었다. 시간이야 조금 오버해도 괜찮을 거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눈을 붙이기로 했다.
옆에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사라지니까 한결 편했다.
* * *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아아, 이놈이랑 살기를 잘 했다, 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다.
이를 악물고 새하얘진 얼굴로 뚫어지게 날 노려보는 그 얼굴이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녀석이 올 시간을 가늠해서 유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질펀하게 침대에서 뒹굴 때, 예측했던 대로 녀석이 돌아왔다.
어디 얼마나 참나 보자. 아니면 저도 흥분해서 화장실로 달려갈지도.
평소라면 대충 내 욕구만 풀고 끝낼 것을, 이번만큼은 성심성의껏 유나도 만족시켜 줬다. 그녀가 좋아하는 곳을 애무하고 자극해 주자 그녀는 아낌없이 교성을 내질렀다.
그런 종류의 신음은 귀에 거슬리기만 해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마음껏 지르라고 부추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밖에서, 녀석이 일부러라는 게 확연하게 창문을 소리 내어 여닫거나, 바깥을 왔다갔다거리며 욕실 문도 쾅 소리 내어 닫곤 했다.
유나가 좀 불안한 눈치를 보였지만 난 웃으며 괜찮아, 라고 중얼거렸다.
‘또, 뭔가 일 꾸미는 거구나?’
이 눈치 빠른 여자는 배시시 웃으면서, 뭐 좋아, 라며 행위에 열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 거실에서 담배 피우는 것도 담배 냄새 밴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이 결벽증 환자 놈이 이런 질펀한 소리를 듣고 얌전히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놈 불능인가. 요염하게 내지르는 여자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 휴지를 집어 들고 화장실로나 달려갈 것이지, 왜 방해를 하려 드는 건지.
짐짓 짜증스레 문을 열자 딱딱하게 굳은 녀석의 얼굴이 문 바로 앞에 있었다.
같이 산 지 몇 주, 이놈은 정말 결벽증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병적이라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혼자 사는 일반적인 남자보다는 확실하게 깔끔을 떤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내 그걸 알 수 있었다. 규칙이라고 첫방에 지껄인 것도, 청소 따위 잘 하고 조용히 하고 등등 같은 거였다. 그리고 물론 나는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시끄러운 건 나도 싫어하고 편히 쉴 집은 당연히 조용한 편이 좋지만, 일부러 녀석이 있을 때면 시끄러운 음악도 틀고 거실도 어지럽히고 했다.
그럴 때마다 녀석은 저런 표정을 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분해죽겠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시선만 위로 들어올려 지그시 노려본다. 가끔 좀 더 화나게 하면 얼굴이 파랗거나 하얗게 질리기도 해 더욱 보기 좋았다. 삐죽거리는 입술 같은 걸 보면 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럴 때마다 싸늘한 비웃음으로 표정을 포장하느라 조금 애쓰기도 한다.
이런 표정을 보면 애 같은 구석도 있는데 말이야, 왜 이리 뻣뻣한 얼굴만 하고 있는지. 웃긴 녀석.
‘30분. 30분 내로 손님 보내. 남의 집에 얹혀사는 주제에 뭐하는 짓이야.’
꾹꾹 화를 눌러 담은 목소리로 녀석이 중얼거렸다. 난 가볍게 대답했다.
‘싫어.’
‘너―….’
녀석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색깔을 바꾸었다. 붉으락푸르락한 게 말이 턱 막히는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자 가슴 속 깊숙이에서부터 환희가 끓어올랐다.
사람을 조질 때에도, 파이프를 휘두를 때에도, 여자와 뒹굴 때에도,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긴 원래 크게 기쁜 감정을 느껴 본 기억이 없긴 하다. 크게 화난 적도 없었다. 좀 울컥하면 그 대상을 걷어치워 버리면 그만인 일이고.
오랜만에 만난 증오스런 대상이 내게 기쁨을 주니, 인생 알 수 없는 거다.
난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왜, 경찰 부르시게?’
그래, 예전에 네놈, 시끄럽다고 경찰을 부르겠다는 둥 지껄였었지. 한 번 불러 보시지.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팍 얼굴을 굳혔다. 허연 얼굴 위로 난감함과 분노와 울화가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난 녀석을 마주보며 다시 한 번 빙긋 웃어 주곤 녀석의 코앞에서 탁, 문을 닫았다.
통쾌했다.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저 얄미운 녀석이 저렇게 끙끙거리면서 골치를 앓는 걸 구경하는 게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사실 요즘 들어서는 그 표정이며, 화를 억누르려고 노력하지만 은근히 부글거리는 목소리 같은 게 재미있어 일부러 녀석을 더 약 올리기도 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도로 침대로 들어가자 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괜찮아? 집주인이잖아, 저 사람?’
‘괜찮아, 괜찮아. 아하하하, 저 표정 봤어?’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의 위로 몸을 던지며 가볍게 어깨를 덥석 물었다.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그녀가 허리에 다리를 감아 왔다.
요즘은 저 녀석의 저런 표정이며 목소리 같은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기운이 솟는 것 같다. 그리 회가 동하지 않는 여자를 안을 때에도 녀석의 저 밉살스럽다는 얼굴이며 화를 품은 목소리 같은 걸 생각하면 금세 기분이 좋아져 훌륭하게 밤일을 해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쓸모가 있는 녀석이다.
나는 유쾌하게 유나를 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엔 또 어떻게 해서 저놈의 저런 표정을 볼까, 궁리하는 것이었다.
그래, 그래서 사실은, 그 다음날이었던가, 녀석이 현관문을 잠그고 들어가 이불을 덮어쓰고 잤을 때, 머리끝까지 화가 난 척했지만 내심 즐겁기도 했다.
애초부터 덜렁거리면서 붙어 있던 문 따위야 망가뜨리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이 이렇게 요란하게 망가지고 있는데 나와 보지도 않다니, 어지간히 깊이 잠들었거나 아니면 일부러 안 나오든가, 둘 중 하나다.
대답은 전자였다. 정확히 하면 성능 좋은 귀마개 탓이었지만.
침대에 웅크리고 쌔근쌔근 잠자고 있는 녀석을 봤을 때, 이걸 어떻게 할까 몇 초 정도 고민했다.
물론 깨우는 게 어차피 나게 될 결론이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자는 얼굴은 꼭 어린애 같다.
뭐, 신사도니 기사도 운운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여자랑 어린애를 괴롭히는 건 영 안 내킨다. 이 녀석은 여자도 어린애도 아니었지만 이런 얼굴로 자고 있는 걸 보니 조금 찝찝한 기분도 든다.
난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팔을 턱 걸치고 물끄러미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자는 얼굴만큼은 꽤나 천진스럽다. 거실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비쳐 들어오는 탓인지, 볼따구도 보송보송해 보여 더 애 같다. 이 녀석 혹시, 솜털도 아직 안 빠진 거 아냐?
볼을 쿡 찔러 보았다. 폭신하다. 녀석이 자면서도 눈살을 찌푸렸다. 우웅, 하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그 덕에 더 찌를 수가 없게 되었다. 조금 아쉬웠다.
난 손가락을 꾸물꾸물 쥐었다 폈다 하다가 일어섰다. 그리고 이불 끄트머리를 잡고 홱 잡아당겼다. 녀석이 뒹구르르 침대 위를 눌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불이 쿠션이 되어 줬으니 그리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나 녀석은 자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다 깬 얼굴도 애 같군. 꼭 어릴 적 같이 살았을 때, 아직 이놈이 얌전한 척하고 있을 때의 모습이라도 보는 것 같다. 아니 그때는 침착해 보이기라도 했지, 이건 멋모르는 애다.
‘문 잠그고 자 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불쑥 말했다.
맞아, 말하고 보니, 조금 전까지 좀 화가 나 있던 게 그 이유였다. 지금은 그렇게까지 화가 나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자연 무뚝뚝하게 나갔다. 녀석의 표정에 어렴풋이 당혹감이 어리는 걸 보자 은근히 재미있어졌다.
‘어떻게, 들어왔어?’
아마도 이 녀석, 확실히 잠이 덜 깨었던 것 같다. 그렇게 멍청하게 입 밖으로 중얼거리다니. 이거야 나 못 들어오게 하려고 문 잠갔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문짝 하나 믿고 그렇게 넋 놓고 자고 있냐? 너 바보야?’
녀석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놈 주변에는 문 떼 버리고 집에 난입해 들어오는 놈은 여태껏 하나도 없었나 보다.
가끔 민재 형님을 따라 움직일 때면, 사채 빌려 쓰고 배 째라는 놈들 집에 들이닥치는 작자들을 볼 때가 있었다. 문 하나 떼어내 버리는 건 예사다. 벽도 헐어 버린다, 그런 치들은. 고작 문 하나 뗀 건 양반이지, 암.
사실은, 뭐 그리 화나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운동한 셈치고 그냥 그대로 내 방에 들어가 자도 괜찮았다. 그런데 굳이 녀석의 앞에 버티고 선 건, 늘 침착하고 조용한 얼굴이 그렇게 당혹스레 찌푸려지는 건 좀처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을 갈구는 다른 때에도 녀석은 화난 표정을 하긴 하지만 당황해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냥 잔소리만 좀 하고 갈 작정이었던 게 녀석을 앞에 앉혀 놓고 한 시간이 넘도록 갈구게 되었다.
아주 좋은 장난감이라도 생긴 것 같아서 즐겁기 그지없었다. 매일같이 녀석이랑 같이 집안에만 들어 있고 싶을 정도였다.
녀석과 살게 된 후 얼마간 나는 더없이 즐거웠다.
처음에는 저런 놈과 같이 살다니 운운하며 얼굴을 우그리고 지냈지만, 내가 거실 한 번 어지르고 담배 한 대 태울 때마다 저놈의 표정이 찌푸려지는 걸 보자니 점점 그놈을 괴롭히는 게 쾌감으로 바뀌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완전히 심술쟁이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 생활에 매우 만족했다.
문제의 발단은 녀석이 현장을 목격했다는 거였다.
그날, 돈줄 중 하나가 잡지에서 괜찮은 칵테일바를 봤다며 거기서 만나자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내가 돈 많은 아줌마랑 자 주고 제법 많은 대가를 받는 짭짤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건 이미 몇 년이나 전의 일이다. 군대에 갔다 온 후에는 몸도 더 좋아져서 호응도도 그만큼 올라갔다.
뭐, 내가 곧잘 어울리는 무리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고, 나도 굳이 숨길 생각은 없다. 여자 잘 후려서 돈 우려내는 것도 능력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한테 알려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아들 하나 믿고―는 아니다, 어머니는 설령 내가 감옥에 간다고 해도 꿋꿋이 잘 살 분이다―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런 마음의 짐까지 주고 싶지는 않은 게 일반적인 상식선에서의 생각이겠지. 나도 그 상식선 안에는 들어 있다.
그런데 이 비열하고 치사한 놈이, 그걸 들고 협박이라고 나온 거다.
이걸 정말로 죽여 버릴까.
일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예전, 어릴 적 헤어지던 그 마지막 날, 사람의 뒤통수를 치며 조목조목 말하던 그 얄미운 얼굴이 그놈 얼굴 위로 오버랩되면서, 요 밉살스러운 녀석의 목이라도 조르고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공으로 돌아가고―비록 반병신 만든 놈들은 수두룩해도, 정말로 인간 숨통까지 끊어 놓은 적은 없었다―, 나는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 망할 새끼가 사람을 가정부로 부려먹을 생각인지 빨래며 설거지며 청소 따위를 시키곤 하는 걸 하루에 몇 번이나 갈아 마셔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며 따랐다.
하지만 아마 그대로만 갔으면 어느 순간인가 빡돌아서 녀석을 정말로 반죽여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간신히 억눌러진 건, 이중의 금제.
……제기, 이놈이 만든 음식은, 꽤나 맛이 좋았다. 아니 사실은 무척 맛이 좋았다.
맛있는 음식이 맛없는 음식보다 낫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음식에 환장한 놈이 아닌 이상 그까짓 밥 때문에 지조를 버리고 똥개처럼 허덕거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밥이 아무리 맛있어 봐야 어차피 몸에 영양 조금 주고 배설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그런 걸 다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고개를 주억거릴 정도로, 녀석이 만든 게 입에 맞았다. 내 입맛을 각고의 노력을 거쳐 연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던 중이었다.
민재 형님이 어느 땐가, 너 누구네 집에 들어갔다며, 어떤 집이냐, 라고 물은 게 시초로, 그네들을 다 집에 부르게 되었다. 부르면서 물론 나는 그 녀석을 생각하면서, 너 겁 좀 먹어 봐라, 라는 생각을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 그날이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자각이 일어난 건 그 빌어먹을 날이었다.
사실은 굳이 그날이었다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그 얼마 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뭐가 이상했냐고 하면, 날 보는 그놈의 눈이 묘하게 틀려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단순히 내 착각일 뿐일까.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에 대해 눈치는 꽤 좋은 편이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 헤쳐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 얼마간 녀석이 좀 이상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부턴가, 어째 날 대하는 게 좀 서먹한 것 같기도 하고 우물쭈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태도에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그랬다.
하지만 그러면서, 간혹 날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녀석의 표정이 순간 순간 상당히 맘에 들 때가 있어서, 이거 좀, 하고 눈살을 찌푸리던 차였다.
저 빌어먹을 얍삽한 놈이 날 보고 있는 표정이 마음에 들어서야 될 말이냐고 내심 중얼거리면서도 어쨌거나 마음에 드는 건 드는 거다. 가끔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얼른 이를 악문 적도 몇 번이나 된다.
그럴 때, 형님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당연히 녀석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하긴 그야 화도 났을 테지.
나도 좀 놀랐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맞부닥뜨린 게 바스 가운 하나만 달랑 입고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고 있던 녀석의 모습이었다니.
조금은, 아차 싶었다. 물방울이 얼굴 위로 똑, 똑 떨어지는데도 얼굴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나와 형님들을 보는 그놈의 허를 찔린 표정에, 내심 혀를 찼다. 갑자기 등을 돌려 그놈을 사람들 시야에서 가려 주고 싶은 측은지심까지 생겼을 정도로. 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간략한 인사만 하고 당장 방으로 들어가 버린 녀석은 그 이후 제 손으로 방문을 여는 일은 없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내가 먼저 녀석의 방안에 고개를 비죽이 들이밀고 들여다볼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야, 틀어박혀서 뭐해?!’
슬쩍, 어째서인지 녀석을 보이면 형님들이 불러내라고 할 것 같아서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인상이 험상궂어서 타인들의 두려움을 많이 사는 사람들인데, 이 신경 약한 놈에게 그 험상궂은 사람들 가운데 앉게 하는 건 조금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꼭 호랑이 떼거리 가운데 놓인 희고 작은 토끼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녀석은 토끼는커녕 독사처럼 사나운 눈으로 날 노려봤다.
‘……너, 친구들 데리고 오는 것까지는 좋아. 질 나쁜 대화나 중얼거리면서 낄낄거리는 것까지도 봐준다 치자. 시끄러운 것도 백 보 양보한다 쳐.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리는 그놈에게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풀죽어 있는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하긴 이놈이 바르르 떠는 건 그림이 떠오르지 않긴 하다.
갑자기 이 상황이 재미있어지고, 이 녀석 독을 품고 화내는 걸 보고 있으려니 즐겁기도 했다.
뭐라고 더 알알거리나 한 번 두고 보자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때였다.
녀석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왜 그런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매운 말을 잘도 지껄이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눈썹을 치켜올리면서 흘끔 보니, 꼭 쥔 주먹은 부르르 떨리고 있고 녀석의 목덜미며 귓불까지가 천천히 달아오른다.
갑자기 뭘 떠올린 건지 모르지만, 설마 새삼 바깥의 형님들이 무서워진 건……아닐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야 그 외의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다. 역시 이놈도 폭력배는 무서운 건가.
머리 뒤통수만 보이는 그놈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난 고개를 기웃하며 쭈그리고 앉아 버렸다. 그리고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녀석이 부지불식간에 주먹을 날렸다.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난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감싸쥐었다. 일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서 난 잠시 눈을 껌벅거리고만 있었다.
지금 이놈이 날 때렸지? 아니, 그 전에, 내가 뭘 봤더라. 뭔가 아주 진귀한 걸 본 것 같은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금세라도 울 것만 같은 어린애처럼 처량한 얼굴을 하고 울먹이는 것 같던 그 귀엽……아니 그게 아니라, 그, 어딘가 민망하고, 가슴 속에서 불이 확 치솟는 듯한 기묘한 표정을 본 듯싶다.
잘못 본 건가. 그렇겠지.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이놈뿐이잖아. 누가 그런 표정을 했겠어. 그렇다고 이놈은 아닐 테고.
하지만 분명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당황스레 들떴다. 심장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벌렁거리는 가슴이 좀체 진정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시선을 돌려 봤지만, 녀석의 얼굴은 여전히 내가 아는 대로, 사납고 냉정맞은 얼굴 그대로였다.
나는 심장을 직격당한 듯한 느낌을 애써 가라앉히려 하며 짐짓 화를 벌컥 내어 버렸다. 안 그러면, 잘 모르지만 어쩐지 녀석이 알아선 안 될 것 같은 이 동요가 녀석에게까지 전해질 것 같았다.
‘아프잖아, 이 새끼야! 갑자기 왜 때리고 지랄이야!’
이놈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무서우면 그냥 무섭다고 할 것이지, 왜 폭력을 쓰고 난리를 부리는 거야.
하지만 정말로 무섭긴 한가 보다. 여전히 얼굴이 벌게서는 허둥거리는 걸 보니.
그러나 내 말에 녀석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무섭긴 뭐가 무섭냐며 반박한다.
이를 갈면서 어이없이 사람을 쳐다보다가, 하,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잇새로 거칠게 내뱉었다.
‘무서운 거 좋아하네……. 그래도 동생이라고 있는 게 형 코앞에 폭력배 데려다놓고 협박이나 하고 있다는 거 정희 씨가 알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자식아! 나이가 몇이냐? 나이가 몇이야?!’
멱살까지 쥐고 짤짤 흔들면서 말하는 폼이, 화가 치민 모양이었다.
난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냐, 역시 조금 전의 그 희한맞은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제법 볼 만해서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기분도 들었는데, 그냥 화난 얼굴만 보여 줄 심산인가 보다.
뭐 화내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다. 이놈 화내는 얼굴은 보면 즐거워지니까. 화를 꾹꾹 눌러 담거나 혹은 폭발시키면서 소리치는 목소리도 유쾌하고.
하지만 어째, 뭐랄까.
눈을 세모꼴로 뜨고 정면으로 날 올려다보면서 소리를 치는 게 꽤나 신선하게 보였다. 내가 알고 있던 그놈이 분명한데, 꼭 그놈이 아닌 딴놈으로 바뀐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그렇게나 밉살스러워했던 그놈 본인이라는 것도 확실했다.
문득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가운데 멱살을 쥔 채로 지그시 날 노려보고 있는 게, ……굉장히, 이뻐 보였다.
귀여운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아니고, 이쁘다.
‘너, ……?’
불쑥 입 밖으로 말마디가 튀어나갔다.
혹시 화장이라도 했냐? 라고, 얼간이 같은 물음을 던질 뻔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놈 얼굴에 화장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스킨 로션도 제대로 안 바르는 것 같은 놈인데 화장은 무슨.
하지만 보통 여자들이 화장하면 맨얼굴보다 이뻐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형님들이랑 마신 술이 좀 도나 보다. 술에 취했을 때 특유의 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데도, 이놈이 반짝거리는 게, 아무래도 술이 단단히 돌았나 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조용히 이 방에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몸은 머리의 말을 듣지 않았다.
시선이 조금 내려가 녀석의 입술께로 갔다.
새치름하게 다물고 있는 불그스름한 입술이 보기 좋고 분명한 선을 그리며 약간 뾰족였다.
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철렁, 하고.
녀석의 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약간 풀어 녀석의 턱을 들어올렸다. 순순히 고개를 들면서 정면으로 날 쏘아보는 그 얼굴이 야릇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할짝, 잇새를 혀끝으로 핥았다. 알 수 없는 갈증이 문득 치밀어 올랐다.
물기 서린 입술이 자꾸 눈에 띈다. 마치 저걸 가볍게 깨물면 갈증은 없애고도 남을 만큼의 과즙이라도 나올 것만 같다.
……―!
순간, 이를 악물고 녀석의 목을 놓는 것과 동시에, 나는 내 얼굴을 손바닥으로 철썩 후려쳤다. 절로 신음이 나올 정도로 세게,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윽……하는 신음과 함께,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마치 주박에 걸렸던 몸이 풀려난 것처럼 나는 가슴을 들썩이며 큰 숨을 쉬었다.
괜찮아, 괜찮다, 지금은.
조금 전은, 마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녀석이 녀석 아닌 걸로 보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 ‘내가 아닌 나’ 자신이 바랐던 것.
――그것을 떠올리자, 가슴 속이 선뜩해졌다.
바보 아냐, 너. 제정신 아니지.
찬물을 끼얹은 듯 가슴이 서늘해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정상헌? 하고, 녀석이 의아스레 불렀을 때에도, 나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리고 흘끔 시선만 올려 녀석을 쳐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날 쳐다보며 고개를 기웃하고 있다.
……아, 그래, 평소와 같다.
난 왜, 라고 짐짓 부루퉁하게 대답하며 아직껏 얼얼한 얼굴을 문질렀다.
미심쩍게 날 쳐다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쉬는 녀석의 옆에서 나도 한숨을 쉬고 싶었다.
대체 나란 놈은 뭘 생각한 건지, 스스로도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이봐, 이건 좀 아니야, 아니라구.
녀석과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입씨름을 하면서도 난 내심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정직하게 말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몰아쳐 머리를 꽉 채웠던 것이다.
잊자, 잊자, 잊는 게 최고다.
녀석의 집은 제법 괜찮았다.
특히 거실 베란다 창을 열어 두고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흘러들어와 선선하게 낮잠을 자기에는 딱이었다.
졸업을 앞둔 복학생이 듣는 강의 시간표라는 게 어차피 10여 학점 정도로 듬성듬성하게 짜여 있는 터라 학교에 죽치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하루에 두세 시간 수업을 듣는 걸로 충분하다.
그 외의 여유시간엔 보통 동아리방에 가서 쉬거나 놀거나 혹은 뒷거리나 헤매면서 시시덕거리곤 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얌전히 집으로 직행했다.
돌아다녀 봐야 덥기만 하고 그저 조용히 집에서 뒹굴며 쉬는 게 제일 편했다.
어젠 술 마시느라 밤 샜으니 피곤한데 오후에는 늘어지게 잠이나 자야지, 라고 생각하고 연신 하품을 하며 집에 오면 늘 그렇듯 그놈이 있었다.
정확히 뭘 하는지는 몰라도 늘 컴퓨터를 붙들고 집에서 일하는 그놈은 거의 나가는 일이 없었다.
처음 내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늘 문을 꽁꽁 닫아 놓고 제 방에만 틀어박혀 있기에 자기 방을 무지하게 좋아하나 보다고 생각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지나치다가도 내가 눈에 띄는 게 싫어서 방에만 들어앉아 있었던 걸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즉 그 말은, 지금은 좀 나아졌다는 건지도 모른다.
녀석이 주로 자리잡고 있는 곳은 거실 소파 앞이었다. 웃긴 게, 이놈은 멀쩡한 소파 놔두고 거기엔 안 앉고 소파 앞에 앉아서 소파 몸체에 등을 기대어 다리 뻗고 바닥에 앉곤 했다. 저럴 거면 소파는 대체 왜 산 건지 모르겠다.
덥다 더워, 라고 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소파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었다.
난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신 후 웃통을 훨훨 벗어던지고 녀석의 근처에 가 벌렁 드러누웠다. 시원한 바람이 피부 위를 스치고 가 썩 기분이 좋았다.
이 집도 그리 나쁘지 않다니까. 집주인이 좀 마음에 안 드는 면이 없잖아 있긴 해도, 뭐 세상에 좋기만 한 것이 어디 있으려구.
‘오늘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냐, 넌?’
‘……땀냄새 나. 샤워나 하지?’
동문서답도 일품이다. 이놈은 이제껏 사근사근하게 대답한 역사가 없었다.
늘 냉랭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말이란 게 저렇다.
‘야, 아침에 조깅한 다음에 샤워했어. 무슨 사람을, 씻지도 않는 놈처럼 말하고 있어.’
‘찔리는 데가 없으면 조용히 하시지.’
저놈의 입, 확 물어뜯어 버렸으면 딱 좋겠구만.
언짢은 눈으로 가만히 노려보는데, 녀석은 문득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소파 위에 책을 올려두고 피곤한 듯 안경을 벗더니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 위에 머리를 올렸다.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두더니 눈을 감는 폼이, 잠깐 눈이라도 붙이려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렇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들어오면 기분 좋게 잠이 오기도 할 거다. 나만 해도 슬슬 졸려오는 참이니까.
팔베개를 하고 뒹굴다가 녀석의 옆으로 슬슬 다가갔다. 이놈, 정말로 기분 좋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니, 실제로 자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정말 기분 좋은 것 같았다.
난 잠시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픽 웃곤 쭉 뻗은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고 푹신하지도 딱딱하지도 않아서 베기에 딱 좋았다.
요즘은 이놈이 신경질을 부리는 게 한결 덜했다. 신경질이라기보다는,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독설을 지껄이는 밉살스런 행동이라는 게 옳겠지만.
아니, 그뿐 아니라 요즘은 이놈이 개과천선을 했는지 인간성이 바뀌었는지, 가끔 웃기도 했다.
처음에 봤을 땐 꽤나 놀랐다. 내 눈을 의심했을 정도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하다못해 어릴 적의 기억까지 헤집어도 녀석이 웃는 얼굴은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예의상 입 끝을 약간 올리는 정도라면 몇 번인가 본 적 있지만, 피식, 하고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 같은 웃음은 본 적 없었다.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의외로 그 웃는 얼굴이 잘 어울려서 보기 좋았다. 그래서 몇 번인가는 녀석이 웃을 때 나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체, 웃는 모습이 생각보다 볼 만해서 봐 준다고 해도 성질이다, 이놈은.
하기야 생각해 보면 별로 안 웃는다고 해도 이해는 간다.
나야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몸이 약해서 늘 골골거리는 쓸모없는 육체를 가졌다면 늘 화가 나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원하는 걸 마음껏 하고 돌아다닐 정도로 건강한 몸이 없다면 늘 인상 사납게 냉랭한 것도 이해는 가는 바다.
이놈은 오히려 아플 때가 더 유순한 얼굴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 번 앓아누웠을 때, 그래도 인간적으로 걱정이 조금은 되어서 죽도 좀 사다 주고, 밤에 물도 떠다 주고, 약도 사다 주고, 물수건까지 갈아 주고, 그러면서 봤다.
열 때문에 반쯤 맛이 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몽롱하고 멍한 얼굴을 발갛게 해서 쌕쌕거리며 숨을 쉬는 게, 이것도 꽤 볼 만하구나 싶었다. 얌전히 내 가슴팍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고 약을 받아먹는 게 꼭 강아지 새끼 하나 돌보는 것 같아서 재미도 있었다.
아마 그때, 그놈이 좀 더 맛이 갔었던가 혹은 내가 맛이 갔었더라면, 아프지 뽀삐야, 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마에 쭈욱 뽀뽀를 해 줬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게까지 맛이 가진 않았지만, 하여간 그랬다.
녀석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사이에 나까지 기분 좋게 옅은 잠에 빠져들었다. 간간이 멀리서 자동차 소리, 사람들 다니는 기척이 들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잡음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그렇게 둘이서 낮잠이나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그 상대가 저 얄미운 녀석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 탓일까, 잠결인 듯 녀석이 내 가슴 위에 팔을 걸쳐서 선잠에서 깨었을 때도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평소라면 주변 사람 기척 때문에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어 버리면 당장 신경질부터 날 건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자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냥 픽 웃음이 나왔다. 잘 때 남의 손이나 몸이 내 몸에 닿아 있는 건 싫어하지만 이 녀석 팔은 뭐,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난 나른한 한숨을 쉬며 도로 눈을 감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키지 않는 인간과의 동거는 잘 흘러가고 있었다.
……아. 딱 하나만 빼고.
녀석이 하라고 윽박을 지르는 몇 가지 가사일은, 귀찮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하고 있었다. 가끔 세탁기를 돌리거나, 바닥을 밀대로 슥슥 밀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그런 건 귀찮아도 어쨌거나 대충 해결을 했다. 하지만 딱 하나, 장 보는 것만은 도무지 몸에 익지가 않았다.
일단 물건 사는 것도 그렇고―사람이 기껏 물건을 사오면, 이건 시들었네 저건 싱싱하지 못하네 그건 어디표가 맛있네 등등 토만 달았다―, 마트 특유의 그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싫었다. 비록 아줌마뿐 아니라 아저씨에 할아버지까지 오간다 해도 그런 분위기는 싫다. 그 시장판 속에 있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다.
그래서 딴 건 별 불평 없이 해도 도무지 장 보는 것만은 그렇게 안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놈이 조금 괜찮다고 느끼는 게, 이런 거다.
‘야, 정상헌. 너 오늘 장 보러 가야 돼. 벌써 저녁이다, 너.’
봐, 봐. 잘 자는데 깨우는 이런 몹쓸 놈이지만.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눈을 뜨자 녀석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파에 걸친 팔에 턱을 괴고 물끄러미 날 들여다보고 있는 얼굴이 어째 재미있는 거라도 구경하는 표정이라, 난 손을 들어 집게손가락 마디로 살짝 녀석의 볼을 두드렸다.
‘장도 좋지만, 그렇다고 자는 걸 깨우냐.’
녀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난 오기도 나고 이놈 반응이 재미도 있어 다시 집요하게 손가락 마디로 녀석의 뺨을 슬슬 쓰다듬는다. 결국 끝까지 피하는 건 포기하며 녀석이 부루퉁하게 말했다.
‘너 나중에 일어나서 밥 없으면 또 난리를 칠 거면서 뭘 그래. 장 안 보면 밥도 없어.’
밥……거 인생의 활력소다. 게다가 이놈이 만드는 게 제법 꽤 퍽 맛이 있어서 한 끼 거르는 것도 아깝다고 여겨진다.
좀 더 잠을 잘 것인가 일어나서 밥을 위해 뛸 것인가 생각해 보다가 녀석의 눈총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딱 베고 눕기 좋았는데 좀 아쉽다.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러나 일어나 앉아서도 저 시장바닥에 갈 엄두가 들지 않아 머리만 긁적이고 있으려니, 한가롭게 책장을 넘기던 저놈이 흘끔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였다.
짐짓, 일부러 좀 처량맞게 보이도록 어깨도 움츠리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잠시 후 녀석이 슬쩍 중얼거린다.
‘……그러고 보니 A4 용지가 다 떨어졌었지. 사러 나가야 하는데.’
‘아, 그럼 나 나가는 길에 같이 나가지 뭐.’
‘……너 나가는 길에 사다 주겠다고는 안 하지?’
녀석이 픽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선선히 몸을 일으킨다.
그래, 이놈은 그래도 이런 거는 괜찮았다.
적당히 사람 형편을 봐서 도움의 손길 비슷한 걸 뻗어 주곤 한다.
수틀리면 당장 휙 돌아서는 이놈의 마음이 틀어질세라, 난 냉큼 일어서 웃옷을 챙겨 입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은 제법 맘에 들었다.
싸우고 돌아다니던 때의 짜릿한 흥분보다, 이렇게 안락하게 낮잠을 즐기고, 집에서 뒹굴고, 가끔 저놈을 방패 세워 장 보러 가서 먹고 싶은 거 장바구니에 챙겨 넣고, 그런 생활들도 의외로 꽤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폭탄 맞았다.
딱 그 기분이었다.
태연한 척 물컵을 한손에 들고 내 방에 유유자적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난 물컵을 책상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침대 위에 쓰러졌다.
오늘은 만난 여자가 갑자기 변덕스럽게도 그만 돌아가겠다고 해서 생각보다 일찍 헤어졌다. 하기야 호텔만 안 가도 두 시간은 버는 거니까 나야 좋다.
느긋하게 집에 돌아와 보니 이 녀석도 어디 나갔는지 집이 껌껌해서, 피곤하기도 한 차에 그대로 불 끈 채 방에 들어앉아 자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이놈이 드디어 들어왔나 보다 싶어 졸린 눈을 비비며 나갔다. 욕실에 불이 켜져 있기에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벌컥.
그리고 폭탄을 맞았다. 잠이 순식간에 다 달아나 버렸다.
설마 거기서 한창 자위를 하고 있던 놈과 딱 맞닥뜨릴 거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태연하게 놀려먹는 척하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문을 닫자마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 버렸다. 아니, 반대인가.
문을 연 순간의 녀석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마 평생 지워지기 힘들 것 같다.
딱딱하게 얼어붙어서, 속내가 있는 그대로 드러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겁먹고 놀란 애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움츠린 몸의 가슴께에 간 손이며, 아래쪽을 더듬던 손, 약간 비틀고 있던 허리선 같은 것이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굳어 버린 채로도 서서히 벌겋게 물들어 가던 몸이 이윽고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을 때야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너,’
당황해서 막 말을 꺼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뭐라고 할지 몰라 버벅거리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문을 퍽 닫아 버렸다. 그 덕에 코를 퍽 소리 나게 부딪혀 버렸지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나도 정신이 없었다. 내가 뭘 봤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잠깐 사고회로가 끊겨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부엌에서 컵에 물을 뜨고 있었고, 둥실거리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겨우 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녹아웃.
……솔직히 말하면,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서 버렸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침대에 풀썩 쓰러져서도 녀석의 그 표정이며 행동 따위를 생각하면 아랫도리가 뻐근해 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황당할 데가 다시없었다.
결국 잠도 안 오는데 이를 악물고 침대 속에 틀어박혀 자야 해, 자야 해, 라고 연신 외치다가, 적당히 외국 무삭제판 누드사진집을 보면서 한 발 뽑았다. 그러지 않아도 뽑을 수 있을 것 같긴 했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널 것 같았다.
글래머러스한 서양 미인을 머릿속에 계속 그리면서 쉽사리 욕망을 풀어내고는 얼른 침대에 누워 눈을 붙였다. 잠드는 데에도 한참 걸렸다.
그리고 겨우 잤다가,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폭탄을 맞고 말았다.
까까머리 중학생도 아니고, 나이도 스물을 훨씬 넘어서 서른을 향해 꺾어지는 주제에, 그 나이에, 여자도 부족하지 않으면서, 몽정을 해 버렸다.
그것도 실제 현실에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새디스틱한 꿈이 되어 버려, 하룻밤 내도록 신음을 내지르며 울고 몸을 비트는 녀석을 억지로 잡아 눌러 마구잡이로 해 댄 끝에, 녀석의 몸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핥아내리고 녀석에게도 내 사타구니를 강제로 핥게 만드는, 정말로 빌어먹을 꿈이었다.
새벽녘에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듯 헉헉거리며 눈을 뜬 나는 속옷을 흠뻑 적실 정도로 질척하게 쏟아져 나온 감촉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몰래 욕실로 빨래를 하러 가야만 했다.
* * *
“또 자? 아이 참, 상헌아. 벌써 시간 지났다구. 우리 안 나가?”
옆에서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잠들었냐 싶게 눈을 뜨자 유나가 머리를 빗으면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워 다 했어?”
“응. ……상헌이 너, 한 번 더 하고 싶은 거야?”
야릇한 눈길로 내 하반신을 보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가, 나는 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하필 그놈의 꿈을 꾼 탓이다.
난 얼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즘 이놈의 자식이 제대로 진정이 안 된다. 그 녀석에 대한 걸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줏대 없이 발딱거리며 일어설 때가 종종 있어, 곤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입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난 욕실로 갔다.
차가운 물줄기 아래서 머리를 식히며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그런 꿈을 꿨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욕실에서 처량맞게 속옷을 빨면서 이를 갈았다.
다 저놈이 욕실에 틀어박혀 이상한 짓이나 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이 꼴이 된 게 아니냐고 터무니없는 불평을 하며 이를 갈았지만, 그래봐야 해결되는 건 없었다.
더욱 안 좋은 건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그런 꿈을 꿨다는 거다.
잠에서 깰 때마다 당혹스럽고 미칠 것 같았던 감정이, 점점 횟수를 거듭하면서 허탈하고 어이없는 걸로 변해 갔다. 더욱 질이 나쁜 건, 젠장 또 꿈이었어, 따위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이봐, 이봐, 정상헌. 꿈이 아니라면 정말로 최악이잖아. 저 깐깐한 놈을 억지로 쓰러뜨려서 덮쳐 눈이 벌게지도록 울리는 꿈이나 꾸고 있는데 그게 현실이 된다면 넌 범죄자 되는 거다.
처음엔, 혹시 워낙 오랫동안 싸움을 안 한 탓에 욕구불만이 이상한 쪽으로 가 버렸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민재 형님에게 부탁해서 싸움판에 끼어들기도 했다.
하지만 세 번째였나, 네 번째였나, 이놈의 머리, 차라리 터져 버려라 주문을 외면서 미친 듯이 싸우고 피투성이가 되어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왔던 때가 있었다.
마침 일하는 중이었는지 자지 않고 있던 그놈이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니까 나와 본 모양이다.
설마 새벽이 되어 가는 시간인데 이놈 자겠지 싶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녀석이 고개를 내밀어, 난 엇, 하고 굳어 버렸다. 녀석도 굳어 버렸다. 피투성이인 내 몰골을 보고 기겁을 했던 것 같다.
‘정, ……정상헌……?’
그렇게나 싸우고 왔는데도, 정상헌, 보다는 상헌아, 라고 한 번 불러 봐 주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거 싸움하는 걸로 고쳐지진 않을 모양이다.
현관에서 멍청히 서 있자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다가왔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이 피는. ……어디, 다쳤어?’
녀석이 당황해하는 얼굴도 참 드물게 보는 거다.
난 멀뚱멀뚱 녀석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좀 싸웠어. 난 별로 안 다쳤어. 긁힌 상처나 약간 났을 뿐이지.’
녀석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날 들여다보다가 손을 들어 살짝 내 이마를 훔쳐내었다. 그 손에 피가 묻어나는 걸 보고, 제기, 피는 다 닦아 버리고 오는 건데, 라고 잠깐 생각했다.
녀석은 그 피가 내 상처에서 난 게 아니고, 나는 그럭저럭 멀쩡하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갑자기 주먹으로 얼굴을 세게 후려쳤으니까.
우락부락한 놈들이랑 맞싸우다가 왔는데 그깟 주먹 한 방 맞았다고 끄떡이나 할 나도 아니지만, 좀 과장스레 으으윽, 하면서 뒷걸음질치고 휘청였다. 그러자 다행히 그 이상은 때리지 않았다.
‘넌 어딜 가서 또 사람 패고 온 거야. 가서 얼른 피 씻고 와! 소독약이 아직 남아 있었던가.’
녀석이 중얼거리며 거실로 갔다. 약통을 찾아 서랍장을 뒤적이는 동안 나는 멀쩡한 몸으로 욕실로 들어갔다.
사실은 정말로 긁힌 정도의 상처뿐이지만 어쨌거나 엄살은 부린다. 그래야 나오는 떡이 더 많다. 밥도 좀 더 진수성찬으로 해 주고, 성질이 나도 목소리를 좀 죽이고, 재수 좋으면 청소도 녀석이 해 준다.
같이 사는 동안 그런 요령만 늘었다.
저놈, 그런 면에서 무른 데가 있어서 조금만 약한 척하면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디어디, 하고 돌봐 준다.
쯔쯔,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놈.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흐흐 웃었다.
하지만 그런 놈을 보고 발정하는 나도 웃긴 놈이다. 그래, 요즘 이건 완전히 발정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이상야릇한 생각이 떠오르면 절로 녀석의 얼굴이 연상되고, 그럼 어김없이 서는 거다.
정말이지 환장할 지경이다.
그렇게 잠시 씁쓸한 상념에 젖어 있던 나를 욕실 노크 소리가 현실로 이끌어 왔다.
유나, 준비 다 한 모양이다.
난 느긋하게 몸을 닦고 나갔다. 이미 나갈 채비 완전히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유나가 나를 말끄러미 보고 있었다.
태연하게 드러낸 알몸에 하나씩 옷을 걸치기 시작하는 걸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상헌아, 사랑해.”
“시끄러워. 그런 소리 듣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알지. 그래서 침대에서 말 안 하고 지금 하는 거잖아.”
살살 눈웃음치며 말하는 그녀에겐 화낼 기력도 안 났다.
영화를 볼 때도 그렇지만, 섹스를 하고 나서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사랑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 질색이다. 그 말 자체만으로 구속당하거나 혹은 구속하려는 느낌이 들어 꼭 뭔가 찝찝한 걸 뒤집어쓴 것 같다.
다리를 동동 흔들며 기다리는 그녀의 옆에서 5분도 안 되어 나갈 채비는 다 마쳤다. 사실 채비랄 것도 없는 게, 옷 입고 지갑만 챙기면 끝이었다.
웃옷을 입기가 무섭게 그녀가 옆에 달라붙으며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아무 데나 너 가고 싶은 데로 가 보라고 하면서 나는 별 흥 없이 방문을 나섰다.
어딜 가건 마찬가지다.
저놈이랑 살게 된 후 몇 주도 채 되지 않아 느껴 버린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이거였다.
어디 음식이건 입에 안 맞다.
예전에는 맛있다고 하면서 먹었던 음식점엘 다시 가도, 그 음식점 맛이 변한 건 아니라고 다들 그러는데도 어딘가 미진했다. 예전과 같이 맛있지가 않았다. 어딘가 감칠맛이 부족한데 그게 뭐지, 뭐지 하면서 집에 가서 밥을 먹으면, 내가 찾던 맛이 거기 있었다.
그래, 그놈이랑 살면서 난 입맛 버렸다. 뭘 먹어도 도무지 맛이 없으니 이거 야단날 노릇이다.
한숨을 쉬면서, 이미 낯을 익히고 지내는 사이인 호텔 카운터의 종업원에게 가벼운 손짓만으로 오버 차지를 무시하고 호텔에서 나왔다.
시간은 벌써 아홉 시를 넘어 열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 저녁이라도 할 수도 없이 밤이 되었는데도 이 거리는 불야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이 켜져 대낮처럼 훤하다.
이 동네야 늘 그렇다. 워낙 번화가라 자정이 지나도 사람들이 잔뜩 오간다.
이런 데서 쓸데없이 걸어 다니느니 그냥 조용히 집에 들어가서 그놈이랑 같이 거실에서 뒹구는 게 훨씬 나을 텐데.
흘끔 유나를 내려다보곤 한숨을 쉬었다. 얼른 대충 밥 먹는 척하고 집에나 가자. 가서 그놈한테 밥 차려내라고 해야지.
“아, 삼계탕 먹으러 갈까? 근처에 잘 하는 집 있어. 얼마 전에 잡지에 나와서 가 봤는데 정말 맛있더라.”
“그러든지.”
별 관심 없이 대답하는 나를 샐쭉하게 쳐다보던 유나는 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섰다. 난 시계를 보고는 따분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따라 걷다가, 문득 들어올린 시선 끝에, 보았다.
보았다. 그놈.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면서 다소 빠른 걸음으로 걷는 두 남자가 있었다. 앞서 성큼성큼 걷는 건 저거 분명 뭔가 운동하는 놈이다, 하고 금세 알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좋은 놈, 그리고 그놈에게 팔뚝을 잡혀 질질 끌리다시피 해 걸어가는 건, 평균 이상의 몸은 되는, 여자들이 보았을 때 썩 괜찮은 놈.
나는 후자 쪽을 알고 있었다. 안다기보다는 본 적이 있는 거였지만.
그래, 바로 얼마 전에 봤다. 집에서. 나랑 같이 살고 있는 놈과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걸 봤었다.
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서둘러 걷던 그놈이 이쪽을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일순 놀란 듯한 얼굴을 하다가 싱긋 웃었다. 짐짓 여유로운 척 살짝 손까지 흔들어 보인다.
……저걸 그냥……!
순간적으로 속이 확 뒤집어져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그리로 한 발짝 옮기려고 하는데 하필이면 그때 타이밍 좋게도 작은 손이 내 팔을 잡아당긴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자 유나가 이상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머, 하고 놀란 척 소리친다.
“왜 그래, 무섭게. 누굴 그렇게 노려보고 있는 건데?”
“…….”
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때는 이미 녀석과 그 일행은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뒤쫓아 가서 때려눕히는 것도 우스워 나는 그저 사나운 눈으로 놈의 뒷모습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기분이 팍 나빠졌다.
옆에서 연신 유나가 왜 그래, 왜 그러는데, 하는 것도 무시하고, 나는 거칠게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밥집이나 얼른 가, 라고.
삐죽이는 입을 다물고 총총히 앞서 걸음하는 그녀를 따라가며 나는 일시에 나빠진 기분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제길, 생각나 버렸다. 생각만 해도 그 속 뒤집어지는 광경이 떠올라 버렸다.
재영이라고 했던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게 아마, 카레였던가, 그래, 그거 나눠주겠다고 전화할 때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맘에 안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해신이 놈이 뜬금없이 소개팅을 한다고 나갔을 적에도 겨우겨우 헤매다 찾아갔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저놈이었다.
그때는 좀 황당했다.
얌전히 잘 있던 놈이 갑자기 소개팅을 한다면서 집에서 나가려는데, 어찌나 어이가 없었던지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야 그 얼마 전에 그놈이 욕실에서 자위하는 걸 보고 나도 좀 정신이 왔다갔다하던 참이라 일부러 녀석을 좀 골려먹곤 했다. 혼자서 딸쳐먹는 놈이니 뭐니 했지만, 나로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그놈을 그냥 보고만 있으면 그때 일이 생각나면서 내 아들놈이 고개를 들 판이니, 이거야 그놈을 화나게 만들어서 그 얼굴을 보면서 유쾌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냥 둘이 가만히 있기만 하는데도 벌떡거리는 아들놈 때문에 나도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놈이 소개팅을 나간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렇게 많이 놀려 먹었냐……? 너 혼자 집에서 쉬는 거 좋아하잖아? 괜히 애인 만들어서 귀찮게 끌려 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서 쉬어.
그렇게 말을 하면 좋았을 건데, 말할 새도 없이 그놈은, 내가 학교에서 그 말을 해야지 다짐하고 괜히 급한 마음이 들어 오후 수업도 째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휑하니 나가 버렸다.
덕분에 나만 죽을 고생했다.
그냥 조용히 집에서 홀로 느긋하게 쉬려고 누워도 계속 속이 뒤틀려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개팅? 그 성깔머리에 어지간히도 괜찮은 여자 만나겠다. 나중에 어떤 여자 데리고 와서 보여 주는가 어디 한번 두고 보자.
연신 애꿎은 tv만 껐다 켰다 하다가, 물만 벌컥거리며 들이켜다가,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옷을 꿰입고 있었다. 제기, 결국 직접 내 눈으로 구경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문제는, 홍대, 그 넓은 바닥에서 어느 가게에 그놈이 들어 있는지 알 게 뭔가.
홍대거리에 막상 도착해서야 난 머리를 긁었다.
전화를 수없이 해도 이놈이 안 받는다.
이거야말로 환장할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홍대에 있는 카페란 카페에는 다 전화해서 그놈 인상착의를 말하고 찾아보라고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전화하는 동안 날 저물겠다는 게 결론이었다.
정처 없이 뛰어다니다가 문득 녀석의 친구가 일한다는 그 칵테일바가 생각이 나 그리로 뛰어들었던 게 정답이었다.
사실은 그 친구라는 놈을 잡아 족쳐서 어떻게건 그놈이 있을 만한 가게를 알아내라고 할 셈이었지만, 그 가게가 빙고였던 거다.
……그래,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소개팅 한다고 해 놓고 사내 놈 셋만 덩그러니 앉아 있을 때부터, 여자는 먼저 자리를 뜬 건가 어쩌고 하는 생각 말고 그때 바로 알아봤어야 했다. 저 망할 놈이 그런 족속이라는 걸 그때 알아봤어야 했던 거다.
그러나 그때는 날 흥미로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저 재영인가 뭔가 하는 놈이 맘에 안 들어서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못했다. 사람을 요모조모 구석구석 관찰하는데 기분이 상해 버렸다.
그때부터 그놈은 맘에 안 들었다. 묘하게 해신이 놈에게 붙어서 친한 척하는 것도 그렇고, 멀끔하게 생겨서 슬슬 눈웃음치면서 해신이 놈에게 귀엣말을 속닥거리는 것도 그렇고, 어쨌거나 맘에 안 들었다.
화를 푹푹 내면서 이를 갈고 있는데, 여기야, 라며 앞서가던 유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골목에 골목을 돌아들어 가정집처럼 보이는 집 앞에 서 있었다.
가게는 제법 번듯하게 괜찮았다. 깔끔해 보였고, 작게 꾸며 놓은 정원도 단아했다.
이 정도 가게라면 그놈 데리고 와도 좋아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음식점에 올 리가 없지. 제가 만든 음식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큰소리치는 놈인데.
과연 가게는 무슨무슨 잡지에 났다고 할 만큼 맛이 좋은 건지 이 늦은 시간에도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지금은 사람 적은 편이야, 식사 시간에 맞춰 오면 여기 못 들어와, 라면서 적당히 빈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는 그녀를 따라 앉으며 나는 흐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얼마나 맛이 괜찮은가 한번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난 테이블 바로 옆에 야트막하게 난 창 너머의 정원을 보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 * *
망할 새끼. 얼른 가 버리고 오지 말라고?!
그날 새벽, 침대에서 일어나 앉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놈이 전날 버럭 내뱉은 한마디였다.
아무리 기분이 상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에게 돌아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어. 거기에 대답해서 나도, 이따위 집 두 번 다시 올까 보냐, 따위의 말을 하긴 했지만.
굳이 사람이 M.T. 가기 전날 밤에 그런 말을 해서 불편한 마음으로 떠나게 해야겠냐.
평소보다 한 시간은 이른 시간에 묵묵하게 조깅을 하고 와서도 기분은 영 개운치 않았다.
……저놈 진짜로 나 오지 말라고 저런 소리 한 건가?
놈의 방문을 열었더니 저놈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침대 옆에 버티고 서서 녀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한껏 사나운 눈으로 매섭게 노려봐도 녀석은 꿈쩍도 않고 잘도 잔다.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잠자고 있는 게 예나 지금이나 애 같다. 쌔근쌔근 숨소리라도 들려올 것만 같았다.
제기, 보고 있는 사이에 또 기분이 풀려 버렸다. 뿐 아니라 이놈 등뒤에 찰싹 붙어 누워서 끌어안고 자면 참 기분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들이 왜 테디베어 따위를 안고 자는지 알 것 같은 심경이었다.
물론 이놈이 테디베어처럼 작달막하고 폭신폭신하지는 않을 테지만, 분명 그거보다 더 따뜻하긴 할 거다. 어쩌면 더 보드랍고 감촉 좋을지도 모른다.
……제기랄, 또 아랫도리가 후끈해졌다.
이제 네놈이 미쳤구나, 아들. 시도 때도 없이.
어이없이 한숨을 쉬며 나는 한 발을 들어 녀석의 등을 꾹꾹 밟았다. 금세 깨어나 졸린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는 녀석에게, 밥, 한마디만 중얼거리곤 난 얼른 그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가는 곳은, 욕실일 수밖에.
사실은 난 알고 있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알 수밖에 없다. 녀석만 떠올리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금세 욕구가 솟는 걸.
더욱이 몸만 보고 군침을 흘리면 그냥 미친놈이 되었다고 쳐 버리고 적당히 남창굴에나 찾아가면 되겠지만, 그게, 저놈 표정이 아니면 또 안 되는 거다.
웃는 것도 이쁘고, 화내는 것도 귀엽고, 멍한 얼굴도 깨물어 주고 싶다.
나란 놈은 왜 이리 몸과 정신이 같이 돌아가는지.
이거 아무래도……저놈이 좋은 것, 같지?
여태껏 여자랑 어울릴 때면, 척 보고 마음에 들면 자러 가자, 가 주요 순서였던 탓에―잠자리를 거부하는 여자는 아예 어울릴 대상에서 젖혀 놓았던 탓에―, 이런 식으로 누구를 보고 벌떡거리면서도 같이 안 잤던 건 처음이다. 그래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저놈이 단단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여차하면 수차례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엎어서 눌러 놓고 억지로 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저놈, ‘이쁘다’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만큼 화낼 것 같아―당연하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씨, 생각할수록 골이 빠개질 것 같다. 그냥 차후 생각 말고 다짜고짜 덮쳐 버릴까.
제기. 전에 보니까 서랍장에 로터도 가득 있는 것이, 예전에는 엄청난 여자랑 사귀었던 적도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야 사내놈에게 관심 갖기는 무리겠지, 저런 놈이.
한숨을 쉬곤 욕실에서 나가자 어느새 일어난 그놈이 벌써 아침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불고기라니, 아무래도 나 오늘 산 타러 간다고 이랬나 보다.
말없이 앉아 젓가락을 들자 녀석은 신문을 펼쳤다.
밥을 다 먹도록 시선 한 번 돌리지 않는 녀석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나, 토요일 날 돌아온다.’
‘……아아, 그래, 토요일.’
녀석은 갑자기 이놈이 뭔 소린가 하는 얼굴로 날 보다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허탈해졌다.
이놈이, 어제 나가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한 주제에 왜 그렇게 쉽게 대답을 하는 거야.
난 녀석을 노려보며 다시 한 번 조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온다고, 토요일!’
‘……그래, 와.’
녀석은, 대답했는데 왜 또 그래, 라는 얼굴로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이번에야말로 기운이 빠졌다.
이놈, 어제 제가 했던 말은 기억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했던 말도.
대체 난 어젯밤 내도록, 오늘 아침에도, 왜 그렇게 머리 싸매고 기분상해 했던 건지.
난 돌아올 거라고 다시 한 번 못 박고는 몇 숟갈 남지 않은 밥을 마저 먹었다.
그때, 드디어 신문에서 시선을 떼 지그시 날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푹 웃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갑자기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난 갑자기 이 녀석이 왜 웃나 싶어 한쪽 눈썹만 치켜올리고 미심쩍게 물었다.
‘왜 웃어.’
그러면서 나도 물끄러미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서늘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이, 마치 꽃봉오리가 일시에 터지는 것 같았다. ……나도 내가 이런 표현을 쓸 날이 오리라곤 설마 생각지도 않았지만, 어쨌건 그랬다.
녀석은 웃음기가 잔뜩 담겨 있는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아니, ――아냐. 잘 다녀와, 조심해서.’
연신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던 기분이 금세 풀려 버렸다.
아아, 제기랄. 이놈 하는 짓마다 왜 이리 이뻐 보이는지.
젠장, 역시 다짜고짜로 그냥 안아 버릴까.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지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에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하지만 역시 집에서 나갈 때까지 옆에 붙어서 이건 챙겼냐 저건 챙겼냐 하나하나 챙겨 주는 그놈을 보면서, 금방이라도 덥석 안아 버리고 싶은 팔을 자제하느라 나는 무지 애써야 했다.
빌어먹을, 이 밉살스러운 녀석을 도대체 왜, 라고 수없이 소리쳤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면 그 말들은 허무하게도 스르르 사라질 따름이었다.
현관에서 머뭇머뭇 하다가 입을 꾸욱 다물곤 무뚝뚝하게 말했다. 갔다 올게, 라고.
그러자 녀석이 빙글 웃으며 응, 몸조심하고, 라고 대답한다.
M.T. 괜히 간다 그랬나, 그냥 집에서 편하게 뒹굴 걸, 하고 잠깐 후회했지만, 녀석의 머리를 부비고 싶은 손을 간신히 거두어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나는 집에서 나섰다.
아아, 제기랄. 내가 미쳤지.
그 말을 수없이 되뇌어도, 역시나 미친 데에는 약도 없었다.
……그래, 오죽했으면, 산에서 후배 하나가 병신같이 다리를 접질려서 도중에 산에서 내려와야만 했을 때, 짜증스러운 마음은커녕 오히려 기쁘기만 했을까.
그래서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너울너울 달려올 때만 해도, 난 오랜만에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푹 몸 담갔다가 그놈이 해 주는 맛있는 밥 먹고 푹 자야지, 라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집에서, 설마 후두부를 강타하다 못해 날려 버릴 정도의 충격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생각도 안 했다.
김재영, 이라는 이름이었었지.
만일 내가 그때 꿈에도 상상치 못한 현실에 맞닥뜨려 얼이 빠지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그놈은 지금쯤 구천을 맴돌고 있었을 거다.
몸에서 핏기가 싸악 가시는 게 어떤 느낌인지 나는 그날 처음으로 체험했다.
집에 들어섰을 때, 여느 때라면 고개라도 내밀고 왔냐고 할 녀석이 나올 생각을 않아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는가 싶었다. 하지만 못 보던 구두도 있고 해서, 무슨 일인가 녀석의 방을 기웃거렸다.
그 결과 본 게, 그거였다.
어이없이도, 아랫도리를 벗고서 침대에 엎드려 발간 얼굴로 끙끙거리고 있는 녀석과, 그 뒤에서 녀석의 엉덩이를 들여다보며 손으로 휘젓고 있던 저 빌어먹을 놈.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 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점차 눈앞이 벌겋게 물들어 가면서, 벌어진 입은 도무지 말 한마디를 뱉어낼 수가 없었다.
야, 윤해신. 왜 네가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건데……? 라고, 머릿속에서는 제법 다정하게 말을 걸고 있었는데, 행동은 그렇게 나오지 못했다.
웬 빌어먹을 새끼가, 그놈을 건드리고 있다. 아주 태연한 얼굴로, 놈의 엉덩이를 찔러 대고 있었다. 그리고 윤해신 저놈도 별 저항 없이 얌전히 그놈 하는 대로 있기만 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 녀석이 날 본 순간의 표정은 아마 내 표정을 그대로 거울에 비춘 거나 매한가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반쯤 넋을 잃은 듯 들떠 있던 시선이 날 포착한 순간,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문턱에 발을 걸치고 선 채 멍하니 둘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안 나는 투명한 정신 위로 먹물이 한 방울 똑, 떨어졌다. 그 먹물은 삽시간에 자욱하게 번져 온 정신을 까맣게 물들였다. 그리고 나는 폭발했다.
몇 마디 말을 앞서 했던 것 같지만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나는 녀석의 다리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얼굴을 날려 버리고, 놈이 다리 사이에서 꺼낸 물건을 빼앗아들었다.
어이가 없었다. 황당했다. 화가 났다. 울화가 치밀었다.
――왜?
이놈이 누구랑 무슨 짓을 하건 내 알 바 아니지만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생각 같아선 바보같이 퍼렇게 질려서 굳어 있는 윤해신 저놈까지 싸잡아서 두들겨 버리고 싶었다. 게다가 하는 말이라는 게, 다 저 재영이란 놈을 감싸고 있다.
사내자식들끼리 뭐 하는 거야, 더럽게!
남들 눈 피해 그렇게 몰래 얽혀 있기나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새끼들!
그렇게 잘난 척 고고한 척하더니, 겨우 이거였냐, 윤해신?!
수없는 욕설과 매도가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말조차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였다.
그날 녀석과 한바탕 싸우고 내 방으로 들어가, 나는 명확한 이유도 알 수 없이 그저 치밀어 오르는 울분과 분노를 삼키면서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자고 뒤척이기만 했다.
그리고 낸 결론이, 그놈을 따라다니면서 또 그따위 짓을 못하도록 감시한다――였다.
물론 이유 따위 생각도 안 했다.
남의 연애사에 네가 무슨 상관이냐거나, 무슨 오지랖이 그렇게 넓냐거나, 그런 건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급박하고 다급하고 초조한 기분만으로 가득 찼을 뿐이다.
이유는 나중에 가서야 천천히 생각해 보게 되었지만.
‘또, 열 나냐……?’
방문을 슬쩍 열고 어두컴컴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난 혀를 차며 불을 켜고 방으로 들어갔다.
코끝까지 이불을 끌어당겨 덮고서 벌건 얼굴을 하고 눈을 감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이놈은 도대체가 무슨 몸이 이렇게 약한지(아니, 신경이 약하다고 해야 하나).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 싶으면 꼭 이렇다. 열을 내면서 침대에 드러누워서 사람 속 타게 만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오늘은 좀 과로하긴 했다.
아침에 웬 회사 면접 보러 간다고 갔다가 오후에는 내도록 나랑 같이 우리 학교에 갔다가.
난 침대 옆으로 다가가 입매를 찌푸린 채 가만히 녀석을 들여다보았다. 이불을 살짝, 녀석의 턱 아래까지 걷어내려 얼굴을 드러내었다.
미간에 주름지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아프다고 호소하다가 잠든 애 같아서 영 마음이 편치 못하다.
괜히 오후 내도록 끌고 다녔나. 그냥 집에서 쉬게 할 걸. ……아니지, 하지만 그랬다가 또 어느 놈팽이나 만나러 나갔더라면, 내 성질에 이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을 거다.
‘제길…….’
혼잣말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땀에 젖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머리맡에 전자 체온계가 눈에 띄어 녀석의 입에 물렸다. 우응, 하고 언짢은 신음을 내었지만 얌전히 체온계를 입에 문 채 눈도 뜨지 않았다.
난 침대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놈이야 지금 아프다고 침대에 누워 있고, 좀 측은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 오늘 난 꽤 즐거웠다.
점심때부터 그랬다.
면접을 꽤 오래 끌었는지, 혹은 단순히 기다리기를 싫어하는 내가 초조해졌던 건지, 좀처럼 내려오려 하지 않는 녀석을 기다리며 연신 시계를 보고 있는데 녀석이 카페 안으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는 게 눈에 띄었다. 갑자기 느긋한 기분이 들어 팔짱을 끼고 녀석을 뚫어져라 보고 있자 녀석이 이내 날 발견하곤 약간 손을 저으며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
그 말을 듣자 문득 기분이 푸근해졌다.
오래 기다렸어, 라.
마치 약속이라도 하고 바깥에서 만난 것 같은 기분이다(실상은 녀석이 인터뷰한다는 회사까지 따라와서 밑에서 기다린 거지만).
‘굉장히 오래 기다렸어. 여태껏 대체 뭘 한 거야?’
짐짓 부루퉁하게 대답하면서, 나는 결정했다.
사실은 그대로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 오후 내도록 같이 있을까 했지만 그대로 녀석을 데리고 학교로 가기로 했다.
더 이상 수업 빼먹었다간 학점 받는 게 아슬아슬하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좀 더 이놈을 끌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계집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끌고 나란히 손잡고 쇼핑하러 가고, 놀러 가고, 먹으러 가고, 뭐 그렇게 무리지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계집애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일순 스스로가 한심해졌지만, 그래도 이성이 그렇게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감정은 녀석을 끌고 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해서 즐거웠다.
처음엔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며 팔을 잡힌 채 질질 끌려 다니던 녀석도 오후 느지막해져선 기분이 많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곧잘 웃기도 하고 가끔 농담도 했다. 요 며칠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터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들을 보면서 내 기분도 슬슬 풀려 버려, 이거 정말 야단났군,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놈의 감정에 내 감정까지 따라가다니, 이거야 정말 곤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아프면 이불 덮고 한숨 푹 자면 된다고 내팽개쳐 두면 될 걸 굳이 이렇게 방까지 찾아와서 신경쓰는 것도 도무지 나답지가 않다. 왜 이런 변태 호모 놈을 걱정하고 신경써야 하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제기, 모든 게 다 마음을 무겁게 한다.
엉망진창으로 급격한 희비곡선을 그리는 내 정신 상태도, 언제 어디서 뭘 할지 모르는 이 녀석의 성향도, 도대체가 깔끔한 결론이 나오질 않는 모든 얽히고 꼬인 문제들도.
……어쩌면 아주 간단하게 결론이 나올지도 모르는 문제였지만, 내게는 세상 어떤 수학자가 붙잡고 끙끙거리는 불가해한 문제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그때 문득 체온계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났다.
복잡한 상념이 가득 찬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체온계를 뽑아 보자 이거야 39도에 가깝다. 감기도 아닐 텐데 무슨 열이 이렇게나 나는 거야, 이놈의 자식은. 땀도 아주 바가지로 흘리는구만.
혀를 차며, 녀석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뜨끈뜨끈하다.
그때 녀석이 어렴풋이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약간 눈살을 찌푸린다. 그리고 속삭였다.
‘헌, ……아.’
순간 몸을 움츠렸다.
이거 아무래도 내 이름을 부른 것 같다. 아니, 아무래도가 아니라 맞다. 이 녀석이 이렇게 조용하게 내 이름을, 성 빼고 이름자만 부른 적이 있었던가.
묘한 감개에 젖어 녀석을 바라보는데, 녀석이 메마른 호흡의 숨결마다 간신히 말마디를 실어 중얼거렸다.
‘힘들, 다……후우……, 물 좀 줄, 래?’
정말로 지쳐죽겠다는 듯 힘없이 그렇게 속삭이는 녀석의 말에 나는 두말없이 따랐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떠다 준 물을 얌전히 받아 마시는 녀석의 지친 얼굴을 보면서 나는 약 같은 거 없나 머리를 굴려 보았다.
이내 생각이 났다. 있긴 있었다, 해열제가. 녀석이 달리 쓰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남아 있을 거다. 그리고 녀석이 다른 약을 사다 놓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거밖엔 없겠지.
예전에 한 번 약통 안에서 보았다가 고이 넣어 둔 해열제, 좌약을 떠올리며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 열이 심한데, 그거라도 쓰는 게 나으려나. 아니면 그냥 얌전히 이불 덮어 재워 둘까.
‘……야, 너 해열제 좀, 쓸래?’
일단 물어보자 싶어 슬쩍 의견을 떠 보았지만, 녀석은 물만 마시고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추운 듯 몸을 움츠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녀석을 보며 난 혀를 차다가, 열 더 오르기 전에 미리 낮춰 두는 게 나으리라는 결론을 얻어 약통을 가지러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 생각 없었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었다. 정말이다.
약통에서 해열제를 꺼내어 도로 녀석이 누워 있는 침대 옆까지 갔을 때까지도 그랬다. 그저 이놈 열 높은데 이거나 내려 줘야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막상 해열제의 종이곽을 열면서,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좌약의 사용법.
로켓형으로 생긴 작은 캡슐을 꺼내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표정도 설핏 굳었다.
순간적으로 마치 동상이 되어 버린 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열에 들떠 벌건 얼굴로 가쁜 숨을 내쉬면서 눈을 꼭 감은 채 사경을 헤매는 녀석을.
……그만둘까.
……아냐, 하지만 열이 높은데.
……그래도, 먹이는 약도 아니고, 게다가 자고 있는 사내놈 옷 벗기는 것도 꼴이 우습잖아.
……자는데 뭐 어때. 게다가 사내놈이니까 더 문제없잖아.
머릿속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소리를 높였다.
어우……하고 중얼거리곤, 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흘끔 녀석을 보았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 자고 있는 녀석이,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메마른 입술이 갈라진 게 눈에 띈다.
그래, 일단 열이나 내리게 하고 보자.
별로 가렵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목 뒷덜미를 긁적이며 난 이불을 걷어내었다. 춥다고 몸을 웅크리는 녀석을 발랑 뒤집고 바지를 휙 잡아내려 버렸다. 또 주춤거리며 망설일까 싶어 일부러 속옷까지 같이 잡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사내놈 엉덩이를 보고 바로 설 정도로 맛이 가진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안도의 숨을 쉰다는 것부터가 이미 비정상이라는 걸 애써 생각지 않으려 하며, 난 캡슐의 개별포장을 뜯었다.
후우, 하고 다시 한 번 녀석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죄지은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데도 일순 흠칫하며 난 움직임을 멈추고 녀석을 보았다. 눈을 뜨는가 싶었던 녀석은 힘없이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훔치곤 그대로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제기, 꼭 자는 놈 엎어 놓고 강제로 외설이라도 하는 기분이잖아. 얼른 끝내 버리고 나가야지.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중얼하면서 나는 녀석의 엉덩이를 턱 잡았다. 열 때문에 뜨끈한 피부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별로 손 타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유달리 매끄러운 것 같다.
괜히 당황해 버렸다.
사실 이럴 때야말로 제일 당황하면 안 되는 때인데, 당황했다.
녀석의 열이 나에게로 옮겨 오는 것 같았다.
이를 질끈 물고 난 초조하게 손에 힘을 주었다. 살짝, 입구가 입을 벌린다. 새빨간 속살이 얼핏 보였다.
……빌어먹을. 엉덩이 보고 발기하지 않았다고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오산이었다. 서 버렸다(하긴 이 정도의 정경을 눈앞에 두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팽팽하게 당겨 오는 아랫도리의 감각에 낮은 신음을 흘리면서, 난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사내놈을 두고 뭐 하는 거야. 게다가 아파서 늘어져 있는 놈이잖아. 이봐, 이봐, 이봐, 정상헌.
머릿속으로 쓸데없이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를 세다가 나는 다시 한 번 신음을 삼키곤 눈을 떴다. 그리고 다른 생각들을 머리에서 싹 몰아내고자 무진 애를 쓰며, 약을 녀석의 몸속으로 밀어넣었다. 내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 묻히도록.
이물감을 느꼈는지 녀석이 조금 거칠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따끈하게 손마디를 감싸고 있던 벽이 조여든다.
겨우 손가락 두 마디의 자극에 나는 가슴이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우와……, 정신이 아찔해질 것 같다. 이미 아래쪽은 잔뜩 당겨서 아플 지경이었다.
정상헌, 정상헌! 안 돼, 너 지금 여기서 바지 벗어 버리면 끝장이다. 얼른 이놈 바지부터 입혀!!
자기 자신의 빌어먹을 이성을 닦달하면서, 나는 간신히 녀석에게서 손가락을 빼내었다.
내 평생 이렇게 인내심을 시험당했던 건 처음인 것 같다.
녀석의 옷을 입혀 주는 대신 내 옷을 벗어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녀석의 옷을 끌어올려 주는 데에는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
그나마 녀석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추워……, 라고 중얼거렸기에 가능했다.
흠칫 정신을 차리곤 얼른 녀석의 옷을 입혀 주고 이불까지 도로 목까지 덮어 준 후, 이젠 안 춥겠지, 라고 녀석의 얼굴을 걱정스레 들여다보다가, 나는 이내 나의 바보짓을 깨닫고 스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여전히 일어서 있는 아들놈과, 뜨끈하게 조여 오는 감촉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손가락 같은 것이 사람을 환장하게 만든다.
하지만 더 웃긴 건, 그렇게나 미치도록 욕정이 치달아 눈이 벌게졌었는데도, 녀석의 ‘추워’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이불을 덮어 준 내 행태다.
난 무릎에 걸친 팔에 이마를 묻고 주저앉아 있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쿡쿡 웃었다.
일단 화장실에 가서 스스로 처리를 하긴 해야겠지만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놈을 변태 호모라고 실컷 욕해 놓고,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 정상헌. 인마.
난 계속 당기는 아랫도리를 문지르며 눈살을 찌푸린 채 일어섰다. 일단 약도 넣어 줬으니 얼른 화장실에나 가자.
방에서 나가려다가 그 전에 한 번 더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바싹 마른 입술로 쌕쌕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너무도 지쳐 보이고 피로해 보여 마음이 언짢았다.
난 저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좀 그만 아파라, 자식아……차라리 내가 대신 아플 테니까.’
그 말을 하면서, 이미 예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던 걸 절실하게 느껴 버렸다.
빌어먹을. 역시 이 녀석이 좋다. 무진장 맘에 들어 버렸다.
도저히 이놈에게는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맘에 들었다.
난 물끄러미 녀석을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녀석의 눈꺼풀에 살짝 입술을 갖다 대었다.
사실은 눈꺼풀뿐 아니라 이마며 뺨이며 입술이며, 그 외의 여기저기에도 그렇게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이대로 고이 화장실로 물러서지 못할 것 같아서 얼른 몸을 펴고 서둘러 방에서 나와 버렸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오며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젠장, 또 생각나 버렸다. 그 망할 놈.
김재영, 김재영이었지. 아마 평생 그 이름은 못 잊을 것 같다.
태연한 얼굴로 저 녀석의 엉덩이를 헤집고 있던 그놈을 떠올리자 일시에 가슴이 울컥했다. 어느새 숨결이 거칠어지고 주먹엔 힘이 들어갔다. 나도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도 악물고 있었다.
“상헌아, 너 왜 그래? ……아까부터 자꾸.”
어느새 현실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무서운 눈으로 테이블을 노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나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날 살피면서 말한 탓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난 시선만 들어올려 흘끔 그녀를 보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아직까지도.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사이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뚝배기에 닭 한 마리가 고스란히 담겨 나온다.
여기 거 맛있어, 라며 반색을 하며 숟가락을 드는 그녀를 따라 나도 별 흥 없이 젓가락을 들어 닭을 찔렀다. 적당히 헤집어 뱃속의 찹쌀을 흩어 놓고 숟가락을 든다. 그러나 국물을 떠 마시곤, 역시나, 라고 내심 중얼거렸다.
역시 이 집도 아니다. 그놈이 만든 게 더 낫다.
제길, 그놈 때문에 입맛 버렸다. 이제 어지간한 음식점을 가도 맛있는 줄을 모르겠다. 다 네놈 탓이라고, 윤해신. 그 주제에 넌 웬 놈팡이랑 그렇게 놀아난단 거지.
난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래, 변태 호모 새끼가 다 그런 거지 뭐.
아무나 그저 붙어먹을 수만 있으면 좋은 거다. 빌어먹을.
봐, 좀 전의 그놈도, 바로 얼마 전에 해신이 놈이랑 그렇게 좋다고 침대 위를 뒹굴던 주제에 아까는 딴 놈에게 잡혀서 질질 끌려가지 않던가. 그것도 그리 저항하는 기색도 없었다. 지금쯤은 어느 호텔방에서 난잡하게 뒹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신이 그놈은 알고 있나, 그런 거. 설마 그 녀석은 멋모르고 저 망할 놈에게 순정을 바치고 있는데 저놈만 바람피우고 돌아다니는 건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에 쥔 게 쇠젓가락이 아니었다면 벌써 부러졌을 거다.
화가 났다. 정말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따위 놈이랑 뒹굴었던 것도, 그놈이 딴 놈이랑 또 뒹굴고 다니는 것도, 변태 호모란 것들의 작태가 다 그런 건가 하는 것도, 화가 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해신이 놈, 어차피 변태 호모는 아무나랑 붙어먹는 거 아니냐고 했던 내 말에 별 반박은 하지 않았었다. 얻어맞긴 했지만.
그러면 혹시 그놈도 아무나 적당히 마음 맞으면 침대로 직행한다는 건가. 그럴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요전에 사내놈이랑 소개팅한다고 나가기도 했었잖아.
그럴지도 모른다.
금욕적인 얼굴을 하고 늘 냉정한 척해도, 저 녀석도 이놈저놈과 진즉에 붙어먹었을지 어떻게 알아.
그래, 서랍 안에 있던 그 로터들을 봐도 그렇다. 난 또, 여자들한테 쓰는 건 줄 알았더니 제가 제 스스로 쓴다고 하질 않나.
이미 전립선을 자극해서 쾌락을 찾는 거에 익숙해져 있다는 거다.
입에서 씹히는 닭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통이 터지고 부아가 나서, 보이는 것도 없었고 들리는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항의하고 들고 일어선다.
――그런 주제에, 왜 난 안 되는데!
그 목소리를 인식한 순간 난 흠칫했다.
이봐, 왜 나는 안 되냐니,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럼 설마 내가 저놈이랑 뒹굴어야 한다는 거냐? 무슨 웃긴 소리를.
그러나 붕붕 고개를 저어 봐야, 한번 소리 지른 목소리는 수그러들지를 않고 계속 바락바락 악을 질러댄다.
――왜 딴 놈들이랑 뒹구는 거야! 네놈 그 더러운 성깔을 알고도 같이 살 수 있는 게 나 말고 또 있을 줄 알어?!
성질이 났다. 먹던 닭도 뱉어 버리고 상을 때려 부수고 싶을 정도로(여태껏 상 엎은 적은 없었지만, 빙충맞은 놈들이 화나면 상 뒤엎는다는 그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상헌이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러는 건데?”
결국 유나가 조용히 수저를 놓더니 턱을 괴고 날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난 여전히 사나운 빛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한참 보다가 불쑥 되물었다.
“유나 너라면, 어떤 놈팡이를 네 애인 삼고 싶으면 어떻게 할 거냐?”
그녀는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으음, 하고는 날 뚫어지게 바라보는 채 고개를 갸웃한다.
“꼬시지.”
“꼬셔도 안 넘어올 놈이면?”
그러자 갑자기 유나가 왁 웃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가볍게 상을 쳐가면서 웃다가 연신 깔깔거리며 말한다.
“뭐야, 너. 여자 문제야? 웬일이니~. 정상헌이가 여자 문제로 골 썩일 때가 다 있구. 뭐, 이미 결혼한 사람인데도 그렇게 좋으면 가정 파토내 버리고 꿰차는 거지. 애인 있는 사람이면 그냥 뺏어 버리구.”
농담조로 말하는 그녀의 말을 나는 사뭇 진지하게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그녀는 다시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웬일이니……, 상헌이 진심인가 봐. 어떤 여자야, 어떤 여자?”
금세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바짝 다가앉는 그녀에게서 조금 물러서며 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저 그래. 성깔 더럽고, 잘난 척하고.”
“헤에, 도도한 타입이 상헌이 취향이었어? 몰랐네. ……너 밤기술 좋잖아. 그걸로 휘어잡아보지 그래? 너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리도록 몸을 길들여 버리는 거야!”
어디까지고 농담을 하는 어조로 깔깔거리는 그녀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를 포기하고 나는 다시 숟갈을 들었다.
제길, 그따위 건 왜 물어서.
나는 그놈을 애인 삼고 싶은 건 아니다.
늘상 옆에 있는 놈을, 뭐가 좋아서 매일같이 데이트하고, 밥 먹으러 나오고, 영화 보고, 호텔가고 할 것인가. 내가 바라는 건 그냥, …….
그렇게 생각하다가, 다시 입맛이 떨어져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애인이잖아.
웃는 얼굴도 독살스러운 말도 요리 솜씨도 다 날 위해서만 드러내는 그런 거.
……아아, 그래, 그래, 그냥 솔직하게 다 말해 버리면, 그러고 싶다.
같이 뒹굴고 싶고, 같이 밥 먹고 싶고, 같이 놀러 다니고 싶다. 같이 자고도 싶다. 솔직히 말하면, 요전에도 집에서 저 재영이란 놈을 쫓아낸 후 그 자리에 대신 내가 자리잡고 싶었다. 발그스름하게 잘 익은 몸을 내가 대신 따먹고 싶었다는 생각 안 했다고는 말 못한다.
끌어안고 싶고, 울리고 싶고, 입 맞추고 싶다. 내 목을 끌어안아 오는 녀석의 팔의 감촉을 느끼고도 싶다.
망할, 정말 맛이 가도 단단히 갔다.
실상 그놈이 변태 호모 짓을 했다고 화를 내는 건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눈앞의 이 유나 계집애도 성적 취향이 좀 희한해서 매저키즘적인 변태 플레이를 좋아한다. 내가 사드가 아니니 그 취향에 응해 줄 생각은 요만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유나를 이상하게 본다거나 그것 때문에 구박하는 일은 없다. 나한테 자신의 성적 취향을 강요하지만 않으면 누가 어디서 무슨 짓을 하며 굴러먹건 내 알 바 아닌 일이다. 설령 내 십년지기 친구 놈이 걸레급 호모라고 해도 나는 아무 상관없었다.
요는, 그놈에게 화낸 건, 딴 놈이랑 뒹굴어서 그런 거다. 로터를 달고 살 정도로 욕망에 허덕이는 놈이 나한테는 한 번도 말 안 하고 그놈이랑 그렇게 짝짜꿍 잘 놀아난 거다.
유나는 내 고민거리가 뭔지 안 탓인지 더 이상은 무서운 눈치도 보이지 않고 혼자서 삼계탕을 잘도 먹어 대었다.
나는 뚫어져라 그녀를 노려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몸을 길들여 버린다, 라…….”
코웃음치고 넘겼지만, 생각해 보면 안 될 일도 없잖아.
그놈은 십여 년이 넘도록 로터 등등을 써 온 모양이고, 뒤쪽 자극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어쩌면 욕망에 무척 약한 성격인지도 모른다. 아니, 대체로 어릴 적부터 성적인 자극을 받아 온 인간은―그것이 강제적 외설이 아닌 경우―그런 쾌락에 약한 구석이 있다.
몸으로 사로잡아 버리는 거, 그거 의외로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여태껏 수많은 여자를 상대해 봤지만 밤기술이 딸린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고, 오히려 이제 나 없으면 못 자겠다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사람이 여럿 되었다.
그래, 차라리 우선 몸부터 길들여 버리면.
그러면 얼마든지 다정하게 대해 주고 아껴 줘서 잘 꼬셔낼 자신 있다.
난 멍하니 숟갈을 들어 입에 물고 창밖을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놈이 알아서 스스로 답삭 안겨올 리가 없다. 그렇다고 다짜고짜로 자자, 라고 하고 침대로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기랄, 갑자기 몸을 길들이자는 결론을 내어 버리자 무진장 하고 싶어졌다.
잠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달라붙어 오는 것 따위 귀찮기 이를 데 없지만 그놈에게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위 후에 바로 욕실로 가 버리는 게 오히려 섭섭할 것 같다.
……하고 싶어. 하고 싶어. 하고 싶다.
꼭 발정기의 짐승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고민하는 내게 그녀가 답을 주었다. 역시나 농담처럼 아무렇지 않게.
“약이라도 써 봐, 그럼. 정숙한 아가씨라면, 거기다 증거 사진까지 찍어서 협박해 보지 그래?”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이 계집애도 참 사악한 족속이다. 농담처럼 말하면서 실제적으로 그런 상황이 되면 태연하게 써먹을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할 게 못 된다.
약이라.
……그걸 써도 안 되면 그땐 어쩌나, 라고 고민을 하면서, 나는 일단 고민에 일시적이나마 결론을 보았다.
미지근해진 삼계탕 국물을 떠먹으며, 난 체, 하고 혀를 찼다.
이거야 정말로 입맛 버렸다. 그놈과 살면서 난 망했다. 이젠 다른 데서는 뭘 먹어도 맛있다고 느껴지지가 않으니.
이것저것 다 네놈 탓이라고, 윤해신. 그러니까 좀 억울하더라도 네놈이 책임은 져 줘야겠어.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말 따윈 수백 가지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난 유나가 맛있다고 먹고 있는 삼계탕을 맛도 안 보고 퍽퍽 떠먹으면서 그렇게 결론지었다.
돌아갈 때는 적당히 아는 놈 하나 찾아가서 약 얻어가자. 센 걸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을 살짝 품에 안고, 보듬어 주고, 다정한 말을 속삭여 주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나는 이 망해 버린 입맛도 그렇고, 그놈이 없으면 삶이 영 곤란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공평하게 놈도 나 없인 못 살도록 만들어야지.
제기, 그래, 슬슬 여자들도 정리하고 그동안 모아 둔 돈까지 다 녀석에게 떠밀면 저놈 성격상 쌀쌀맞게 내칠지언정 나중에는 결국 한숨을 쉬면서 손짓해 줄 거다.
뭐 생각해 보니 이미 범죄에 가까운 짓들도 예전에 다 저질렀던 적이 있다. 이제 와서 새삼 뭘 움츠러들고 있어, 정상헌.
여차하면 정말로, 약을 써서도 안 되면 다음엔 이런저런 사진 따위를 찍어서 협박이라도 할 각오를 굳혀야겠다. 그 정도 안 하면 인간 하나 손에 넣는 건 의외로 어려울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상헌아……, 그 얼굴 보니까, 또 뭐 나쁜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유나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얼른 삼계탕 그릇을 비웠다.
얼른얼른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놈이 고개 비죽이 내밀고, 왔어? 라고 중얼거릴 거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