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머리가 멍했다. 눈을 뜨고도, 나는 내가 눈을 뜨고 있다는 의식조차 한동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우습게도, 엉망진창인 집 치워야 하는데……였다.
거실 구석에 박혀서 썩어 가는 저놈의 양말이며, 매캐한 공기, 지저분한 바닥, 쌓인 빨래에 산더미 같은 설거지거리. ……아니다, 설거지는 했었지.
그 다음에야 떠오른 게, 끔찍스러울 정도로 환상적이었던 지난밤이었다. ‘끔찍스러울 정도로’가 포인트다.
아, 제기랄. 역시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니, 힘이 안 들어가는 것뿐 아니라 아예 허리 아래가 없는 것 같았다. 감각조차 없――는 건 아니다. 의심스러워서 다리를 힘없이 꼬집어 보았더니 감각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그래, 마치 하반신만 가위에 눌린 것 같았다. 도무지 발가락 하나 꼼짝을 못하겠다.
침대에 엎드린 채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늘어져서 눈만 깜빡였다. 머리에선 서서히 잠기운이 물러갔지만 몸의 피로는 정신이 깬다고 해서 물러가는 게 아니다.
그때, 턱, 하니 등 위에 묵직하고 기다란 덩어리가 얹혔다. 팔이다.
잠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지만, 팔도 마찬가지다. 등 위를 감싸듯 올려진 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고개를 돌리면 아마도 얼굴 하나가 보일 테지만 고개를 돌릴 엄두가 안 났다.
한참이나 지나도 전혀 움직이는 기척이 없어서 슬슬슬 멈칫거리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
코앞에서 녀석이 자고 있었다. 한 뼘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녀석이 곤히 잠들어 있다.
생각해 보면 녀석의 자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 이렇게 보니, 어릴 적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래, 꼭 먹던 사탕 빼앗긴 것처럼 부루퉁한 어린애 같은. 약간 벌어진 입술이며,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는 표정 같은 건 자면서도 변하질 않는다. 그래도 무례천만의 말들을 뱉어내진 않으니 자는 게 더 나을지도.
난 피식 웃으며 지그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몸을 약간 일으켰다. 일으켰다기보단 상체만 조금 들어 움직인 거지만.
살짝, 얼굴을 가까이 했다.
허리가 지끈, 하고 아팠다. 감각이 한 번 느껴지자마자 맹렬하게 회오리치는 그 고통이란.
절로 신음이 흘러나올 것만 같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허리에 댄 손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소리 없이 한숨을 쉬고 다시 녀석의 자는 얼굴로 가만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제 탓에 사람은 허리가 끊어지도록 아픈데, 이놈은 신나게 잘도 자고 있었다.
그 얼굴이 갑자기 무진장 귀엽게 보여서, 나는, 녀석의 입술에 살짝 내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깨물었다……콱.
“……악!!!”
상쾌한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이 벌떡 일어났다.
제길, 그 통에 치아가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순간 앞니가 뽑혀나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팠다. 기분 탓인지 피 맛까지 나는 것 같다.
사실 녀석이 잘못한 건 아니었지만, 난 눈살을 찌푸리며 가만히 녀석을 노려보았다.
녀석은 잠에서 덜 깬 눈으로 피맺힌 입술을 문지르며 방 안이며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여기가 어딘가 싶은 눈이다.
“어, ……아.”
어눌하게 중얼거리는 어투며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왜 자기가 여기 있나 머리를 굴리다가 기억을 되살린 모양이었다.
멍하게 날 쳐다보던 녀석이, 약간 시선을 떨어뜨리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머쓱하게 눈만 깜빡이는 게, 이놈 지금 당황해하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그야 그렇겠지. 이 상황에서 멀쩡한 얼굴하고 태연하면 그게 인간이냐.
……라고 하면서 나도 멀쩡하고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몇 분이나 침묵이 흐르고, 녀석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도, 입을 열 생각도 없는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내가 몸을 일으켰다.
일으킨 순간, 나는 몸을 움직인 걸 후회했다.
……우와, 이렇게 아픈 건 또 오랜만이다.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허리가 픽 꺾여, 도로 침대에 엎어지고 말았다.
허리 아래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절로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얼른 몸을 앞으로 굽힌다.
“야, 괜찮……냐?”
이렇게 아픈 원흉이 이놈이다.
“……너, 홍두깨 하나 사다가 네 거기에다가 손잡이 부분까지 백 번만 넣었다 뺐다 해 봐, 괜찮을지.”
홍두깨는 조금 과장이지만. 굵기야 그렇다 쳐도, 길이는 홍두깨만 하지는 않았다(그랬다간 난 필경 죽었겠지).
서리서리 한 맺힌 목소리로 이를 갈며 중얼거리자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아……, 원수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난 독기 어린 눈으로 녀석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꼭 야단맞은 강아지 같이 처량한 얼굴로 가만히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한숨이 나오도록 귀여웠다. 몸과 함께 정신도 망가진 게 틀림없다. 이제 이놈이 그저 귀엽기만 하다.
한숨을 폭 쉬곤, 난 눈을 질끈 감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삐걱이는 몸은, 이번에도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녀석이 더럭 날 눕히고 이불을 덮어 톡톡 두드려 주기까지 하면서,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물, 마실래? ……목말라서 그런 거지?”
맞았다.
갈증이 일었다.
하지만 그때 내 머리를 스친 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던 것들.
난 슬쩍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물도 마시고 싶지만, 난 집 더러운 꼴은 못 봐. 거실도 엉망일 거고, 세탁기는 빨래로 가득 찼는데. ……후우……. 어서 일어나 움직이다 보면 몸도 좀 움직여지겠지.”
말을 하면서도 설마, 하고 반신반의했는데, 놀랍게도 녀석은 당장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인상을 찡그리며 평소와 같은 어조로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너는 몸도 안 좋은 놈이 꼭 사서 일을 하냐. ……야, 야. 일어나지 말고 얌전히 있어. 그러다가 또 기절하지 말고.”
“……응?”
“응? 너 어제 기절했잖아.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 겨우 두 번밖에 안 했―….”
녀석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나도 말을 잃었다.
그런가. 그렇구나. 도중에 기억이 끊겼다 싶었더니, 정신을 잃었었나 보다.
이 짐승 같은 놈이 어찌나 해 대는지, 이젠 정말이지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한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고맙게도 내 몸은 내 정신의 바람을 들어주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방안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조용한 침묵이 무겁게 내리깔려, 녀석과 나 사이를 메운다.
별 거 아닌데, 별일 아닌데도 천천히 얼굴에 열기가 올랐다. 슬쩍, 이불을 코 위까지 끌어당겼다. 녀석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칫, 하고 혀를 차며 성큼성큼 방 밖으로 나갔다.
텅,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몇십 초 후, 문이 빼꼼 열리더니 녀석이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한마디 말도 없이 물컵을 내밀었다. 나도 말없이 팔을 뻗어 받아들자 휙 돌아서 나간다. 다시 문이 텅, 닫혔다.
몇 분 후, 드르륵, 하고 창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윙――하는 청소기 소리가 닫힌 문을 넘어 들려왔다. 물을 꼴깍거리며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려니 얼마 안 있어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린다.
……푹.
웃었다.
이불을 두드리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식, 미안하긴 한가 보지. 그렇게나 하기 싫어하던 집안일을 제 스스로 다 하고.
나는 빈 물컵을 내려놓고는 도로 침대에 몸을 뻗고 엎드려 픽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기웃했다.
그런데 나야 그렇다 쳐도 저놈은 왜 약 따윌 쓴 건지.
……아아, 맞아, 그거였다. 약점을 확실하게 굳히려고 수 쓰려다, 저도 약을 먹어 버려서 물 건너간 거지.
……가, 아닐지도, 라고 문득, 아주 어렴풋이, 생각하려던 참이었다. 어쩌면 저 녀석도, 노말이라고는 해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가졌을지도. 그래, 반드시 불가능한 법은 없는 일이니까.
그런 생각이 막 떠올랐을 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서 나는, 저 녀석의 폰 소리.
청소기 소리가 사라지고 대신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목소리만 듣고 있으니 꽤 들을 만한 목소리다. 아니 상당히 괜찮다. 눈뿐 아니라 귀에도 콩깍지가 씐 건지도 모르겠지만, 낮고 굵고, 어딘가 거친 느낌이 나는 게 상당히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고 있던 내 얼굴은 점점 부루퉁하게 바뀌어 갔다. 반토막만으로도 전화 내용을 알 수 있었던 탓이다.
‘……응, 그렇죠, 선미 씨. 오늘 점심? 괜찮아요, 물론. 그럼……한 두어 시간 있다가 볼까요? ……예, 맞아요. ……응, 사랑해요.’
결정적으로 기분 나빠진 건 마지막 말이었다.
사람 하나는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 놓고 저는 점심 약속 만들어 나가 버리는 것도 모자라, 사람을 제멋대로 안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저렇게 뻔뻔하게 다른 사람에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조금 전 생각했던 모든 희박한 가능성들이 판판이 머릿속에서 부스러져 내렸다. 거기에 비례해 기분도 점점 나빠졌다. 우울해졌다, 는 편이 옳을까나.
멍청이랑 같이 살더니 너까지 멍청이가 된 거냐, 윤해신.
정신 차려.
너 약점 잡으려고 약까지 몰래 먹인 인간 말종이 저거다(나도 약을 먹이긴 했지만, 원래 인간은 제가 나쁜 짓 한 건 덮어 두려는 습성이 있는 고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대체 뭘 바라는 건데. 지금 집 청소 조금 해 주고―다 제가 어지럽힌 걸―, 빨래 좀 해 주고―3분지 2는 제 빨래에―, 정리 좀 해 주는―역시 제 탓에 그렇게 된 걸―것 때문에 우습지도 않은 감동을 받은 것도 아닐 거고, 정신 차려.
천천히, 마음이 우울해졌다. 그러면서 동시에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고, 화도 났다.
그래, 생각해 보면 이건 우울해지기보다는 화를 내야 할 일이다.
지금 내 몸과 정신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건 전적으로 저놈 책임이다. 피로로 절어 있던 몸을 꼼짝도 못하게 된 것도 저놈 탓이고, 정신이 불안정하게 왔다갔다하는 것도 저놈 때문이다. 어딜 가나 이성적이라는 소리를 듣던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한 기분으로 누워 있어야 하는지, 화가 나야 마땅하다.
나는 엎드린 채 집게손가락을 질근질근 깨물면서 묵묵히 베갯잇을 노려보았다.
청소를 다 했는지 청소기 소리가 완전히 멎고, 녀석이 문을 삐걱 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자냐?”
조심스런 물음에 나는 차갑게 시선만 돌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녀석은 뭐야, 안 자네, 라고 중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나, 나갔다 올게. 너 집에 있을 거지? 올 때, 뭐 사 올까?”
“됐어.”
쌀쌀맞게 대답하자, 녀석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화났냐?”
그래도 기본 눈치는 있으니 먹고는 살겠다.
“아니.”
역시나 짧은 대답.
녀석은 묵묵히 날 내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시계를 보곤 어, 하고 중얼거렸다.
“늦겠다. 야, 그럼 나 갔다 올게. 문은 잠그고 갈 테니까 자고 있어. ……아, 물이라도 한 컵 떠놓고 갈까.”
도로 부엌으로 가는가 싶었던 녀석이 새로이 물 한 컵과 빵 따위를 들고 돌아왔다.
일어나기 힘들 테니까 배고프면 먹고, 라면서 손닿을 거리에 그것들을 놓아두고, 녀석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은 그냥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잠시 후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자물쇠 잠기는 소리까지 났다.
나갔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고 엎드려, 녀석 때문에 화가 치밀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녀석이 내 집에 처음 들어와 한동안 염장을 있는 대로 질렀던 때들은 물론, 저 어릴 적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활보하고 다녔던 밉살스러운 시절까지.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저놈이 싫었다.
아마,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고까지 하면서 날 싫어했던 저놈보다, 내가 더 저놈을 싫어했을 거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었던 어린애의 완고함과 잔인함 같은 것을 어릴 적의 나는 정말로 싫어했다. 지금도 싫어하긴 하지만 그때는 더욱 싫어했던 것 같다. 그 기억만 가지고 자랐으니 당연히 지금에 와서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어른이 되어서 만나고 나서도 저놈을 좋아하진 않았다.
고교 때는 깡패와 어울려 다니며 주먹질을 하고 다녔고, 대학 와서는 아르바이트로 원조교제나 하고 있으며, 성격 더럽고 치사하고 못됐다.
재영이같이 희한한 취향을 가지지 않은 나는, 당연히 그런 인간은 안 좋아한다. 아니 딱 잘라 말해 싫다.
그러니까 저놈도 당연히 싫어해야 한다. 좋아할 구석이라곤 어디 한 군데 없는 놈이다.
그런데도,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좋다. 그러니까 더 분하고 속이 상하는 거다.
제길, 스스로가 한심해질 정도로.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생각은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만 돌아가 결국에는 자기혐오와 비슷한 감정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받고 싶지 않아 그대로 엎드려 꼼짝도 않고 있었더니 전화는 곧 끊어졌다. 그러나 몇 분 있지 않아 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다소 짜증스러웠지만, 결국 팔을 뻗어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러는 순간에도, 이 전화를 건 게 혹시 방금 전 집에서 나간 그놈이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는 게 갈 데까지 갔다는 증거다.
“……여보세요.”
‘안부전화입니다―.’
장난스레 말을 거는 건, 오랜 악우.
“아, 재영이구나.”
귀찮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너 좀 괜찮아?’
어렴풋이 걱정스런 기색과 함께 녀석이 말을 했을 때, 일순 나는 뜨끔, 하면서 말을 잃었다.
괜찮냐니, 지금 내 몸 상태가 어떤지 이 녀석이 어떻게 아는 거지.
마치, 상헌이 녀석과 했던 이런저런 일을 훤히 본 것처럼, ‘너 괜찮냐’라니.
조금 당황해서, 어……, 아……, 라고 중얼거리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그냥 화를 내는 척해 버렸다.
“너 인마, 그 약, 그렇게 독한 거면 말을 해 주지 그랬어.”
미안, 재영아. 말 안 한 게 네 탓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애꿎은 너라도 탓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도 조금만 이해해 주라.
그때, 잠시 수화기 저편이 조용해졌다.
“……김재영?”
‘응? 아, 아니 너, 그 약 썼어? 내가 두고 온, 그 갈색 병?’
“……응.”
‘……그래서 혹시, 그놈이랑 한 거야?’
“――아아 그래, 그랬어, 제길.”
반 자포자기의 상태로 중얼거리자 다시 수화기 저편의 침묵이 한동안 이어졌다.
껄끄러운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경우 길을 뚫어 주는 구세주는 역시 재영이다.
‘몸, 괜찮아? 아하하, 너 지금 죽을 맛이겠다.’
완전히 장난스레 말하는 그놈에게, 나는 그제야 맘 편히 앓는 소리를 냈다.
“말 마. 죽을 거 같다. 그 빌어먹을 놈이, 약 탔어.”
‘……응?’
녀석의 목소리가 일시에 ‘재미있겠다’로 일변했다.
이내 소리 내어 웃으면서 녀석이 말했다.
‘해신아, 움직일 수 있겠어?’
“……왜.”
말하는 걸로 보아하니 나오라고 하거나 찾아오겠다고 할 것 같은데 어느 쪽이나 사양하고 싶다.
움직이려면야 움직일 수야 있겠지만, 그러기엔 몸이 너무도 노곤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어제 길에서 네 동생 봤었다.’
나오라고 하면 싫어, 라고 즉각 대답해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녀석이 꺼내는 말이 그거였다. 그 순간 기억이 확 떠올랐다.
“아, 너, 그러고 보니까 그놈도 그 말 하더라. 너 웬 우락부락한 놈에게 끌려갔다며?! 누구야, 그건. 기민이는 어떻게 되고?!”
‘어――음……, 나올래? 전화로 얘기하긴 귀찮은데.’
……이런 망할.
남의 일,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았다. 뭐 지금 이놈 목소리 그리 나쁘지 않으니 이야기야 다음에 만났을 때 들으면 되는 거고.
막 거절하려 하는데, 녀석이 한마디 덧붙였다.
‘차 가지고 마중 갈게. 오늘 나, 복덕방 돌아다녀야 되거든, 하루 종일.’
“복덕방?”
‘아, 나 집 팔기로 했어. 좀 더 작은 집으로 옮기려고.’
“……왜.”
‘기민이 빚 갚는 데에 보태기로 했지롱.’
어디까지나 장난스레 말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다시 열불이 솟았다.
“정신 나갔어, 김재영?! 왜 네가 그놈 빚을 갚으려고 집까지 팔아?!”
‘아――역시 전화기는 오래 잡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 끊는다. 30분 후에 너네 집으로 갈게.’
녀석은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탁 끊어 버렸다.
따라랑, 하고 끊어진 전화기를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나는 욕설을 바가지로 쏟아내었다.
이 자식, 몸도 노곤해 죽겠는데 끝끝내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있어, 망할 놈!!
나는 삐걱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겨우 침대에서 기어 나와, 어떻게건 나갈 준비를 했다. 뭐, 움직이다 보니 그럭저럭 살 것도 같았다.
말한 대로 재영이 녀석은 온종일 복덕방만 돌아다녔다. 나는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녀석이 운전하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복덕방에 들어간 동안은 조용히 차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다렸다. 착하게도 조수석에 미리 푹신한 쿠션을 깔아 놓아,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때로 복덕방 주인을 태우고 집도 보러 가고 하는 사이에, 몇 군데 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해가 넘어가면서 노을을 이루는 게 차창을 통해 보일 무렵, 마지막으로 한 군데 집을 보고 나온 재영이는 그럭저럭 만족했는지 웃으며 운전석에 올랐다.
“오래 기다렸지.”
“봤어? 이번 집은 어때?”
읽던 책을 덮으며 묻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내일 하루 더 다닐까 싶다.”
“흐응.”
문득, 나도 집이나 보러 다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노곤하고 정신이 피로하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생각해 보니 예전, 초기에 상헌이 녀석이 한참 속 썩일 때 여차하면 집을 구해 줘서 나가게 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정말 그래 버릴까. 집 하나 구해 주고, 그냥 쫓아낼까. 저 망할 녀석.
우울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데, 차를 출발시키며 재영이가 흘끔 나를 보았다. 나도 시선을 느끼고 녀석을 보았다.
이놈, 아까 처음 만나자마자 어제의 자초지종을 묻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었다. 나까지 약을 먹고 난감했다는 상황을 듣고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래서 나는 짐짓 화를 냈다.
이 자식, 누가 그렇게 약효 센 약 놓고 가래?!
종일 부루퉁하게 녀석과 함께 인근의 동네를 답습하다가 마지막 집을 보고 나서야 나는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 팔려구? 기민이 때문에? 그놈 지금 어딨어?”
그러자 재영이가 웃음 담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왜, 네가 때려 주려고?”
“내가 왜.”
녀석이 웃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짧게 말한다.
“됐어. 10년이 넘도록 골치 아팠던 인연, 돈푼으로 해결되어서 다행이지.”
“……기민이랑 10년이나 알았던 건 아닐 거고, ……그러고 보니, 어제 너 끌고 갔다는 사람은 누구야?”
그러자 녀석이 아아,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금세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다.
“맞아, 어제 너네 동생 봤었지. 길에서 스쳐갔는데,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날 쳐다보더라. 아마 그쪽이나 나한테 동행이 없었더라면 나 무사하지 못했을지도 몰라.”
“――말 돌리지 말고, 누군데, 그 남자는.”
“뭘 그렇게 궁금해하냐. ……빚쟁이. 어제는, 잡혀온 기민이 만나러 가던 길이었어. 어제도 그 집 애 봐주다가 기민이 서울 도착했다는 말에, 질질 끌려갔지 뭐.”
난 미심쩍은 눈으로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싱글싱글 눈웃음치면서 왜? 라고 날 쳐다보는 폼이, 역시 이놈 걸려도 더러운 인생한테 걸린 것 같다.
뭐라고 막 입을 열려다가 포기하고 체, 하고 한숨 쉬어 버렸다.
“그래, 네 인생 알아서 잘 해 봐라. ……정말이지, 나도 집이나 하나 얻어 버릴까.”
“집? 넌 뭐하게.”
“그놈 쫓아내어 버리게.”
재영이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묘하게 웃으면서 내게 시선을 주었다.
“윤해신, 정말 쫓아내게? ……자알 생각해 봐.”
느물한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을 보았지만, 녀석은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운전만 했다.
아무래도 밥집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아 그냥 내 집으로 가자고 했다. 몸 상태도 더는 돌아다니기 싫다고 칭얼거리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그랬다. 재영이는 순순히 차를 돌려 내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침묵이 잦아든 차 안에서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창밖만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다. 녀석을 쫓아내기 위해 내 돈 쓰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구.
생각해 보면 사람 약을 먹여 놓고 (물론 나도 먹였지만 나는 정말로 덮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약 때문이긴 해도 어쨌거나 덮친 건 그놈이고, 내 살림 부순 것도 그놈이고, 내게 정신적으로 격심한 스트레스를 준 것도 그놈이다. 심지어는, 내가 그놈을 좋아하게 된 것도 사실은 다 그놈 탓이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간간이 귀여운 모습을 보여 주라고 했냔 말이다.
다 그놈이 나쁘다.
그래놓고는 저는 아파서 사경을 헤매는 날 두고 여자 만나러 휑하니 나가 버리고, 집에 들어와 봐야 고함이나 지르고, 성질이나 부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에 안 맞는다.
정말, 그놈 인생이라도 상납받지 않으면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니 또 속이 부글거렸다.
그놈 인생이라도 상납받지 않으면, 그놈 인생이라도, 그놈 인생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천천히 그게 진지한 고민거리로 바뀌었다.
나는 가만히 재영이를 돌아보며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재영아. 네 생각에는, 내가 아――주 더럽고 치사하고 비겁한 방법을 취하면, 딴놈 인생 하나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냐?”
그러자 재영이는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척했다가 입을 열었다.
“음…… 이를테면, 원조교제 하는 거 다 까발리고, 혹여 그 ‘딴놈’이 너 변태라는 거 맞소문 내어 버리면 그놈이 너 억지로 덮쳐서 그렇게 된 거라고 뒤집어씌우고, 에이즈설 같은 걸 퍼뜨려 그놈 주위의 이성관계 다 떨어뜨려 버리고, 그래서 그걸로 그놈이 너 패기라도 하면 당장 병원에서 진단서 끊어서 소송 걸어 재산 빼앗아 그놈이 네 집에서 나갈 재력도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뭐 그런 방법 말하는 거야?”
가끔 난 내가 왜 이 녀석과 친구하기로 했는지 스스로의 판단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벙한 얼굴로 녀석을 보다가, 난 한숨을 쉬곤 차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진 아니고…….”
……아니, 정말 그렇게 해 버릴까.
정말로 저대로의 방법을 답습하지는 않겠지만, 어쨌거나 멀쩡한 인생 하나 망쳐 놓는 건 내 경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후에 폐인이 되어 있는 걸 주워서 가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물론 나도 인간이니 그렇게까지 악랄한 수를 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역시 분한 건 분한 거고, 좋은 건 좋은 거고, 갖고 싶은 건 갖고 싶은 거다.
천천히 머릿속에선 어렴풋한 결론이 났다.
이대로 얌전히 보내 주긴 싫다. 어차피 최악의 결론은 녀석이 집에서 나가고 영영 안 보게 된다, 라는 거라면, 기왕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한 바에는 어떻게건 묶어 버리고 싶다. 적어도 그런 시도조차 안 하기는 내 마음이 너무 가엾다.
녀석이 아무리 싫다 싫다 고함을 질러도, 협박하고 어르고 달래서 손에 넣도록 노력해 보는 거다.
이판사판으로 나가기로 결심하면 협박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이렇듯 진지하게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해 본 건 무척 오랜만이었고, 그런 욕구를 이루기 위해 방법을 가릴 정도로 나는 훌륭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건, 얽어매어나 보자.
그렇게 깔끔하게 결론지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울적해져, 집에 도착할 즈음 내 얼굴은 꼭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의 어린애 같았다.
싫다는 놈을 협박해서 붙잡아 놓으려는 내가 조금 가엾다. 그래도, 악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같이 있고 싶었다.
“재영아…….”
“응?”
“다른 사람이랑 줄곧 같이 있고 싶다는 건, 정말 어렵고 힘든 바람이구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재영이는 잠시 날 바라보다가 말없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골목만 돌아서면 집이다.
이미 날은 어둑어둑해져 골목 구석구석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집 앞에 차를 세운 재영이는, 흐음……하고 고개를 기웃하다가 중얼거렸다.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하지만 네 경우는 그렇게 힘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는걸.”
“……?”
“가끔은 말야, 주위에서 보는 게 더 잘 보이는 경우도 있어서 말이지.”
녀석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힘들지 않을 거라고 건투를 빌어 주는 모양이다. 그래도 친구라고, 이런 음울한 계획이나 짜고 있는 인간을 위로해 주다니 조금 고맙다.
난 픽 웃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녀석은 곧 일하러 가야 할 시간이니 들러서 쉬다 갈 여유는 없었다.
녀석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집으로 향하는데, 막 움직이려던 차가 갑자기 서더니 녀석이 차창을 열고 내게 손짓했다.
“아, 맞다. 까먹을 뻔했다. 해신아, 너한테 해 줄 얘기가 있는데.”
묘하게 싱글 웃으면서 손짓을 하는 게 어딘가 미심쩍었지만, 난 눈썹을 약간 찡그리면서도 녀석에게 다가갔다.
“뭔데.”
녀석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빙글거리다가 속삭였다.
“그 약 말이야. 네가 쓴, 갈색 병에 들었던 거.”
“……? 응.”
“그거 쓰지 말라고 했던 거, 네가 생각한 거랑은 이유가 달라.”
……약이 독해서 쓰지 말라고 한 거 아니었어?
“설마 부작용이라도 있는 거야?”
더럭 걱정이 밀어닥쳐서 녀석에게 얼굴을 들이대고 말하자, 녀석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거, 나 전에 손님들한테 몇 병 돌렸었는데 욕먹었었어. 약효 거의 없다고.”
“…………응?”
일순, 녀석의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거, 먹고 나면 몸이 좀 이상하다는 건 느낀다더라. 하지만 그래봐야 엄청나게 자극적인 영화 같은 거나 보면서 마시면 발기가 아주 약간 빨리 되는 것뿐이지, 최음제로서의 효과는 거의 없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쓰지 말라고 했던 건데.”
녀석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더니, 시계를 보곤 아, 하고 중얼거렸다.
시간 됐다, 나 그만 간다, 라면서 휑하니 가 버리는 녀석의 차가 멀어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면서, 나는 눈만 깜빡였다.
……어? ……아? ……응?
녀석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하려고 머리는 절로 풀가동되고 있었지만, 좀체 이야기의 맥락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지금 그 말, ……설마하니――.
막 뭔가 떠오르려고 하는데, 그 생각을 칼같이 썩둑 끊어 버린 건 서늘하게 등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잘 놀다오셨나……?”
생각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려와,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흠칫 몸을 움츠리며 돌아보자 집 옆의 담벼락에 팔짱을 낀 채 기대어 그 녀석이 서 있었다. 발치에는 담배꽁초를 수두룩하게 뿌리고, 정상헌이 지그시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 ……왜 여기 있어? 아직 너 들어오던 시간 되려면 멀었잖아.”
아까 웬 여자 만나러 나갔었잖아. 그럼 보통 밤늦게야 들어오는 녀석이, 왜 아직 초저녁인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건지.
그러나 나의 순수한 의문은 유감스럽게도 녀석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눈을 번쩍이는 녀석의 목소리가 더 음산해진다.
“호오. 나 몰래 나 들어오기 전에 그놈 만나고 와서 싹 입 씻고 모른 척할 작정이었다……? 그놈이랑 뭐했어? 어디 갔다 온 건데.”
일순 나는 어이없이 녀석을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가끔 저놈, 저렇게 뻘소리를 잘 하게 됐단 말야.
그런데 지금 보니 이 녀석, 얼굴이 부어 있다.
부루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아니 그것도 맞지만―뺨이 슬며시 부어 있었다. 어디서 되게 얻어맞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약간 크게 뜨고 고개를 가까이 해 들여다보려 했더니, 녀석이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
것보다, 열쇠도 있는 주제에 왜 밖에 서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 혹시 담배 피우러 일부러 바깥에 나온 건가――라기엔 저 꽁초의 숫자가 심상치 않고.
“……급한 볼일이라도 있으면 전화를 하지 그랬어.”
“하아, 전화―? 전화 꺼 놓고 뭐했는지도 물어볼까?”
그제야 난 아, 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세 시 정도였던가, 배터리가 다 되어서 전원이 꺼졌었다.
하지만 전원 꺼져서 미안, 하는 것도 웃기다.
“……왜 그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넌 네 여자들이나 잘 관리하고 다녀.”
쌀쌀맞게 대답하자, 이놈이 주먹으로 벽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벽……이야 설마 아무리 녀석의 주먹이라도 무너질 리는 없었지만, 저렇게 후려쳤다간 주먹이 남아나지 않을 텐데.
내가 안색을 바꾸며 녀석에게 다가가려는 차에 녀석이 거칠게 소리쳤다.
“너 지금 사람 가지고 노냐?! 네가――.”
그때, 옆집 문이 삐걱 열리면서 한 사람이 고개를 내밀었다. 워낙 고함을 지르고 하니까 무슨 일인가 싶었나 보다.
길거리에서 남자 둘이 소리 높여 싸우는 것만큼 추한 것도 보기 드물다(뭐 여자끼리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난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의미로 까닥 목례해 보이곤 서둘러 녀석을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거기서 뻗대는 짓까지는 하지 않고 적당히 끌려 들어왔다.
그러나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기가 무섭게, 녀석은 손목을 쥔 내 손을 휙 뿌리치더니 도리어 내 멱살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퍽 소리가 나도록 밀어붙이며 코앞에 얼굴을 가져다대었다.
“전화까지 끄고 어딜 갔다 왔는지 말이나 좀 해 보시지.”
이 행패를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면서, 나는 멱살을 쥔 녀석의 손목을, 손가락을 세워 제법 아플 정도로 꾸욱 쥐었다.
“이거나 놔.”
“대답부터 해.”
“……그럼 나도 하나 묻겠는데, 그 얼굴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
가까이서 보니 확실하다. 얼굴이 부었다. 자세히 보니 눈 옆이며 턱 같은 데에 가느다란 생채기도 나 있다.
여자 만나러 간다더니 어디서 싸움박질이라도 하고 온 건가. 하지만 싸웠다고 보기에는 상처가 너무 약소한데.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마이동풍 격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디 갔다 왔냐니깐, 그놈이랑! 그 몸을 해갖고서 그놈을 불러내서, 어딜 간 건데?! 아니면 그놈이 널 불러냈냐? 쉬고 있지 왜 나갔어!”
“야, 시끄러워, 귀 울려. 좀 닥치고 말해!”
녀석만큼 용량이 크지는 않았지만 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일침을 박자 녀석이 이를 갈며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두 손을 펴 보이며 나직이 말한다.
“너――. 좋아, 됐어, 됐다구. 어디 갔다 온 거야?”
평소와 같은 정도로 목소리를 낮춰 묻는 녀석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웃옷을 벗고 소파로 가 앉았다. 녀석은 가만히 날 노려보고만 있다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섰다.
“네 얼굴이 왜 그 짝이 났는지를 말해 주면, 나도 어디 갔다 왔는지 말해 주지.”
녀석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잠시 후, 칫, 하고 내뱉더니 말했다.
“알았어. 네놈부터 말해 봐.”
“……복덕방에 갔다 왔어.”
“……복덕방?”
녀석은 확 소리칠 준비를 하다가 일시에 김이 빠진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날 보고 있다가 앵무새처럼 그 말을 따라했다.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지.
난 눈살을 찌푸리며 코웃음 쳤다.
“너처럼 여자 끌고 호텔이라도 갔을까 봐? 어제 네놈한테 그렇게 당하고 또 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이 좋은 줄 알아, 내가? 난 금방 여자와 2라운드 뛰러 가는 네놈 같은 괴물은 아니거든.”
말하다 보니 또 성질이 난다.
네놈은 여자와 실컷 놀다 와 놓고, 왜 나는 집에 묶어 두려고 해?! 웃기지도 않는 놈 같으니.
그러나 녀석은 그런 건 조금도 생각지 않는 듯, 뭐가 잘났는지 계속 큰소리다.
“내가 무슨 2라운드를 뛰어! ――잠깐, 복덕방, 거긴 왜?”
녀석이 소리를 치다가, 문득 인상을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난 소파등에 기댄 채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소리치는 걸 보면 또 참 밉살스러운데 말이야.
새삼 내가 미쳤다는 생각이 든다. 뭣 때문에 저놈이 좋아졌을까.
그러고 보니 옛말에 상사병에는 약도 없다는 말도 있었고, 미친 데엔 약도 없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다. 상사병과 미친 게 비슷한 맥락이라는 말인지도, 라고 잠깐 진지하게 고찰했지만, 그쪽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니까 적당히 머릿속에서 지운다.
난 녀석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집 찾으러.”
“집? 집은 뭐하게.”
“뭐하긴, 나가 살 집이지.”
“……나가 살아?”
그래, 네가.
――라고 말하려 했는데,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하던 녀석의 표정이 일시에 일그러졌다.
“하아. 아예 집 버리고 나가서 그놈이랑 살림을 차리시겠다?!”
잠깐,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말하려고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더니, 녀석이 벽에서 떨어져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내 팔을 힘껏 잡아 일으켜 세우고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대더니 사납게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꿈도 꾸지 마, 윤해신. 어딜 멋대로 나가 살려 그래? 그놈이랑 오순도순 사시겠다고?”
갑자기 녀석이 내 다리 사이에 오른다리를 끼워 넣어 벌리며 몸을 바싹 붙여 왔다. 이마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온 입술이, 뜨거운 입김과 함께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뱉어낸다.
“바로 어제잖아. 바로 어제, 내 물건을 박고서 좋다고 허리를 흔들어 댔으면서, 그렇게 싹 모른 척 하고 새살림자리를 구해? ――웃기시네, 누가 가만히 본대?”
확, 머리에 피가 솟았다.
“……정상헌. 너는 언어순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확실히 있어.”
이를 갈며 중얼거린 나는 녀석의 턱에 그대로 주먹을 올려붙였다. 컥, 하고 뒤로 반걸음 물러서는 그놈을 이연타로 명치까지 후려갈기며, 난 서슬 퍼렇게 말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사람을 약 먹여서 약점 쥐려고 한 비겁하고 치사한 놈이, 이젠 그따위로 사람을 비하시키냐? 새살림 같은 소리 하네, 그럼 넌 헌살림이야? 내가 언제 너랑 살림 차렸냐?!”
한마디 한마디 하는 동안, 녀석은 명치를 얻어맞은 순간의 자세 그대로 몸을 약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말을 마치자, 그대로 음산하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말 다 했냐……? 사람을 무슨 동네북처럼 후려갈기고, 이젠 말까지 그 따위로 한단 말이지, 너……?”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순간 난 아차 싶었다. 요즘 이놈을 내가 좀 많이 때렸었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사람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보다니.
“그래, 한 번 차려 봐라, 새살림.”
이를 갈며 말하는 소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퍼억, 하는 소리가 내 가슴팍에서 울렸다. 아니, 등이다. 소리는 제법 크게 울렸지만 아프지 않았던 건, 뒤에 있던 게 소파인 탓이다.
녀석은 온몸으로 밀어붙여 나와 함께 좁은 소파 위에 뒹굴듯 쓰러졌다. 소파 팔걸이의 모서리에 어깨를 부딪혀 이를 악무는데, 녀석이 내 배 위에 올라탔다.
“집을 나가? 누구 맘대로 집을 나가?”
목이라도 조를 기세로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상체만 질질 끌려올라가 근육이 땅겼다.
“내 집에서 내 맘대로 왜 못 나가?! 얼른 비켜!”
“――어제, 네가 침대에서 정신없이 울면서 사랑한다고 소리친 게 스물네 번이야, 스물네 번!”
그걸 세고 있었냐……, 아니 그 전에,
“――네놈이 그렇게 말하라고 윽박을 질러 놓고 무슨 소리야! 비켜, 무거워!”
지난밤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 빌어먹을 놈이, 그렇게 말 안 하면 사정 안 시키겠다고 협박한 게 누군데 지금 와서 뻔뻔스럽게 저런 소리를 하고 있어! ……뭐 그야, 나중에 가서는 그 결에 진심을 담아 말하기도 했지만.
“그래 놓고 당장 오늘 딴살림을 차릴 집을 보러 나가……?”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좌악 끼친다.
멱살을 쥐고 코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녀석이 입술을 물어뜯을 기세로 덮쳐왔다.
“……!!”
소리소리 지르려던 목소리가 녀석의 입안에 갇혀 버렸다.
숨이 막혀 고개를 돌리려고 했지만, 멱살을 쥐고 있던 양손 중 한 손이 턱을 단단히 잡고 안 놓아준다.
숨막혀, 제길, ……이 새끼, 얼마나 많은 여자로 얼마나 많이 연습을 했으면 사람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만들어. ……빌어먹을.
나도 미쳤지만, 이놈도 미쳤나 보다. 여자가 모자란 건 아닐 텐데 갑자기 이딴 짓이라니, 아니면 어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 괴롭히는 데에 재미라도 들린 건가.
제기랄, 너 이딴 식으로 해 봐라, 네 인생 저당 잡힐 약점만 늘어나, 이놈아.
입속으로 우라지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녀석의 몸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었다. 내 등은 다시 소파에 부드럽게 닿았고 이놈은 완전히 위에 엎드리게 되었다.
산소 결핍에 가까운 상태로 몽롱해져 있는 와중에, 녀석의 입술이 귓가를 거쳐 목덜미로 내려갔다.
“……한다.”
잔뜩 쉰 거친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나는 뭘……? 하고 넋 없이 대답하려다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사타구니에 와 닿는 질량감은 차치하고, 아직 나는 아파죽을 지경이다. 그야 움직이기는 하지만 잔뜩 부어오른 게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지금 이놈이 나을 새도 안 주고 말하는 게 저거다.
이 상황은 내게 과히 나쁘지 않았다. 말마따나 이놈 인생을 묶어 놓을 거리가 되는 일이 하나 늘어나는 거고, 이왕 버린 몸 두 번 버리는 것 정도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 맘대로 하게 해 줄까 보냐 하도록 화가 난 건, ――네가 ‘한다’면 나는 두말없이 하게 해 주는 사람이냐?! 이게 어디서 이따위 못된 장난을 배워서 장난질이야!
위로 올려 더듬거리던 손에 뭔가 잡혔다. 아마도 책이지 싶었지만, 보지도 않고 그걸로 녀석의 등을 내리쳤다. 으억, 하는 외마디 신음과 함께 녀석이 빙그르르 굴러 소파에서 떨어졌다. 흐트러진 옷을 그러쥐며 일어나 손에 쥔 걸 보자, 곽에 든 영영사전이었다. 모서리로 맞았으니 제법 아팠을 거다. ……아, 머리를 안 때려서 다행이다. 사전 모서리로 머리 쳤더라면 지금쯤 과실치사의 위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씩씩거리면서 고이 녀석을 노려봤더니, 녀석이 으으으윽, 하고 중얼거리면서 손이 닿지도 않는 등에 손을 뻗으려 노력하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눈초리에 눈물이 한 방울 맺힌 녀석이 번뜩 날 노려보았다.
“왜 자꾸 때리고 그래, 이 새끼야!”
“너야말로 왜 헛짓을 하고 난리야, 이 미친놈아!”
“네놈이 그 몸을 해갖고도 새살림을 차리겠다고 지껄이고 있는데,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적반하장이 점입가경이다.
“새살림? 새살림 같은 소리 하네. 너 되게 웃긴다. 네가 언제 나랑 살림 차렸었냐?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가 집 세간을 부수면 부쉈지 차린 적이 어딨어?! 아아, 그래,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네놈한테 그 말 듣고 보니까, 얼른 살림 차려 나가야겠다! 너 같은 놈이랑 누가 같이 살겠냐?! 누군지 몰라도 네놈이랑 같이 살 인생 참 불쌍하다!!”
드디어 녀석이 미친 모양이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고래고래 소리치더니 벌떡 일어나, 본격적으로 세간 부수기를 시작했다.
tv 선반에, 장식장에, 책장에, 보이는 대로 다 엎고 망가뜨리는 게, 완전히 집구석을 뒤집어놓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
나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멍하니 보기만 할 뿐이었다.
성질 더러운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지랄맞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분노로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갈고 있는 내 눈 앞에서 삽시간에 집안은 초토화가 되어 갔다.
사람의 말소리라곤 하나 없이 물건 부서지는 소리만 왁자하게 들리고 있던 그때.
보다 못해, 정말로 사전 모서리로 저놈의 뒤통수를 내리칠 기분이 들어 난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녀석에게로 성큼 다가선 순간.
“――!”
신음도 내지르지 못하고 입을 악물었다. 녀석이 난장판을 벌여 놓은 거실 바닥에 깨어져 널브러져 있던 와인글라스 조각이 발바닥 정중앙에 푸욱 박혀 버렸다.
“……으…….”
난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그 자리, 유리조각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았다. 발바닥을 보자 다행히 유리조각은 큼직한 것 하나만 박혀, 살 속에 자잘한 조각들이 파고들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제법 피가 많이 나긴 했지만 그럭저럭 적당히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면 힘줄이 끊긴다거나 하는, 영 큰 상처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제길, 하지만 병원까지 가는 건 싫은데.
세간 부수는 소리에 묻혀 내 조그만 신음 따위는 안 들렸을 텐데도, 녀석은 부수는 와중에 또 그걸 본 모양이다.
순식간에 시끄러운 소리가 딱 멎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더니 녀석의 시선이 내 발에 와 닿아 있다.
벽에 걸어 놓았던 액자를 뜯어내어 머리 위로 들고 있던 손을 내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곤, 녀석이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내 발목을 잡아 확 들어올렸다. 그 탓에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지만 이 무식한 놈은 신경도 쓰지 않고 발바닥만 들여다보았다.
잠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상처만 살피고 있던 그놈은, 그럭저럭 괜찮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발에서 시선을 떨어뜨려 날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었다.
그러나 5초 후, 벽력같은 고함 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멍청아! 얌전히 소파 위에 앉아 있을 것이지 왜 내려와서 괜히 다치고 그래!”
앞으로 네 별명은 적반하장이다.
“왜 네가 소리를 질러?! 내 물건 네 멋대로 부수는데 나더러 가만있으라고?! 네가 다 물어낼래?”
소리를 버럭 지르다가, 발목을 쥔 녀석의 손에 힘이 들어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녀석은 혀를 차며, 얌전히 있으라고 엄포를 놓고는 엉망이 된 거실을 뒤적뒤적하더니 약상자를 찾아왔다.
무뚝뚝한 얼굴로 한마디 말도 없이 발을 낚아채어 자기 무릎 위에 올리고 약상자를 여는 그놈의 손에 발을 맡기며 난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소리를 내면서 온 집안 살림이 거덜나고 있었는데, 그게 일시에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린다.
왜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문득, 맥락도 없이 아까 재영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청나게 자극적인 영화 같은 거나 보면서 마시면 발기가 아주 약간 빨리 되는 것뿐이지, 최음제로서의 효과는 거의 없다고 그러더라구.
그 말이 떠오르면서, 어쩐지 묘한 생각이 들었다. 묘한 생각, 이라기보다는 마음속에 걸리던 것이 조금씩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지만.
유리 박힌 근처를 살핀 후 조심조심, 오히려 나 자신보다 더 아픈 얼굴을 하며 유리를 뽑아내는 녀석의 표정이며, 세심하게 소독액을 바르는 손놀림이며, 발목을 단단하게 잡은 커다란 손아귀며, 그런 것들이 문득 마음을 파고든다.
그래, 이러니까 이놈이 이렇게 지랄맞은 성격을 하고 있는데도 싫어하게 될 수가 없는 거겠지.
하지만.
……너 말이야, 지금에 와서야 다시 돌아온 이성을 동원해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네 행동들의 결론은 하나라구.
단순히 사람 괴롭히기 위해 섹스를 하는 치졸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고, 거칠게 고함을 질러도 네놈이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두근거렸다. 부풀어 갔다, 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물끄러미 녀석을 보고 있는 걸 녀석도 알았을 텐데 시선 한 번 안 돌렸다. 그저 부루퉁한 얼굴로―어쩐지 낙심한 것도 같다―열심히 발에만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녀석의 전화가 울렸다.
녀석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들어 전화를 보더니, 다시 나를 보고, 내 발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전화를 집어 들러 갔다. 그리고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아 발을 제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여보세요.”
음량을 크게 해 놓은 건지 혹은 가까이 붙어 있는 탓인지, 전화 안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전해졌다.
민재 형님인 것 같다.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오늘밤에 간소하게 사람들 모여서 회식이나 할 거라고, 시간 괜찮으면 너도 와라, 라는 내용이었다.
녀석은 우울하게 거절한다.
난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까지 우울해질 것 같다.
“다쳤어요, 이놈.”
중얼거리는 게, 아무래도 내 얘기인 듯.
귀를 쫑긋 세우고 녀석을 보면서, 이놈이라고 하면 그게 누군지 민재 형님이 어떻게 알아, 라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알아들은 모양이다.
‘많이 다친 거 아니면 그놈도 데리고 나오지? 전에 너네 집 갔을 때 보고, 그놈 호감 간다고 하는 녀석 여럿 같이 있는데.’
사람이 다쳤다는데,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도 묻지 않고 태평하게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내가 어이없이 혀를 차기도 전에 녀석이 부루퉁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싫습니다. 제 거예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유리조각이 발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보다 충격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다.
저게 과연 동문서답으로 히트를 친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어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녀석을 보는데, 녀석의 시선이 흘끔 날 향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린다. 여전히 전화에선 태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하, 그래, 오늘 너 돌아가면서 여자들한테 따귀 맞고 다녔다더니, 그래서냐? 거참, 재영이 놈이 잘못 전해준 모양이네,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더니. ……알았다, 알았어. 간호 잘 해 줘.’
그러곤 몇 마디 더 인사 비슷한 말이 오가고, 전화는 뚝 끊겼다.
조금 전보다 더한 침묵이 한참 주변을 감쌌다.
녀석은 이미 약도 바르고 붕대까지 감은 발을 언제까지고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너 뺨 부은 거, 그래서냐……? 바보냐? 따귀는 왜 맞고 다녀?”
짐짓 싸늘하게 불쑥 말을 꺼내었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휙 돌렸다. 마치 심통 난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날 지그시 노려보더니, 부아가 치미는 듯 잡고 있던 내 발을 팽개쳤다. ……팽개쳤다고는 해도, 바닥에 조심히 내려놓은 거지만.
그러곤 일어나 저 너머에 던져놓은 웃옷을 집어 들어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내 앞에 뭔가를 내팽개쳤다.
발치에 철썩, 소리를 내며 바닥을 치는 그것은 통장이었다.
난 통장에 시선을 주었다가 의아한 눈으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등을 돌린 채 부루퉁하게 말했다.
“전에 말했지, 집 수리비며 뭐며 내놓으라고. 줄 테니까, 이제 잔말 마. 오늘 부순 거까지 포함해서 집 수리비 다 냈으니까, 난 앞으로 계속 여기서 살 거다. 나가라고 해도 소용없으니까 그런 줄 알아. ――물론 너도 못 나가.”
난 벙 쪄서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한창 싸우다가, 네놈 때문에 나간 세간이며 기물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고 그랬었지. 하지만 설마 정말 받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물론 오늘처럼 대대적으로 이렇게 망가뜨려 놓은 거라면 당연히 받아내야 하긴 하겠지만.
“……집 수리비?”
“그래. 여태껏 모은 돈 다 들어 있으니까 모자라진 않을 거다.”
“이걸 다 주면, 너 귀여운 부인에게 사 줄 집은 어쩌고?”
일순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 뭐라고 입안으로 우물거리다가 조금 더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여기서 살 거라고 했잖아.”
아, 아주아주 조금이지만, 녀석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난 빤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니 아무래도 이거…….
“부인 데리고 들어와서 살겠다고, 여기서?”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그러니까 계속 이 집에서 너랑 같――.”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녀석은 덜컥 입을 다물고 휙 고개를 돌렸다.
난 손 안에 든 통장만 만지작거리면서 멍하니 녀석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 안 되는데, 자꾸 입에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가슴 속이 두근거린다고나 할까, 떨려 와서, 애꿎은 통장만 틀어쥐었다.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며……?”
소근, 중얼거렸다. 녀석이 사나운 눈으로 흘끔 날 보았다.
난 참을 수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내가 왜 웃는지도 정확히 몰랐다. 그저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그렇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 없다. 발은 잘못 짚으면 여지없이 다시 상처가 벌어져 피가 철철 날 정도로 다쳤고, 집안은 엉망이다. 성한 물건이 제대로 없을 지경이다. 더욱이 피로에 전 몸은 금세라도 넉다운 될 것 같았고, 정신도 너덜너덜해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유쾌한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웃다가, 나는 묘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는 녀석에게 손짓해 옆에 불러 앉혔다.
녀석은 내 손짓을 보곤 얼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다시 옆에 앉았다.
“너, 내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돈으로 환산하면, 이걸론 턱없이 모자라.”
웃으면서 통장을 설레설레 흔들자 녀석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로 모자라긴 왜 모자라?!”
모자라지, 모자라고말고. 부유한 마나님 등쳐서 벌었다고 해 봐야 기껏해야 몇천일 텐데, 그걸로 네가 부순 것들을 다시 채워 넣을 수는 있다고 해도, 남은 돈으로 정신적으로 입은 피해를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정도로 내 정신은 싸지가 않단 말씀이야.
난 입에서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막으려고도 않고 통장을 펼쳤다. 그러나 기장된 마지막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잠깐,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정상헌.”
“왜.”
“너 조만간에 경찰 신세 지는 거 아냐……?”
어이없이 중얼거리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등쳐먹었으면 이 정도 금액이 통장에 있는 걸까.
난 일십백천……하고 하나하나 숫자의 자릿수를 헤아려 보고 입을 벌렸다.
녀석은 펄쩍 뛰면서 엄연히 노동의 대가야, 라고 외쳤지만, 이놈 조만간에 사기죄로 들어가는 거 아닐까. 아무리 원조교제가 잘 벌리는 업이라고는 들었지만, 역원조교제는 그보다 더 잘 벌린다고는 들었지만, 이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녀석은 피땀 흘려 모은 거라고 아우성을 치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어, 그 정도면 모자라단 소린 못하겠지, 라며 날 쳐다보았다.
물론 결코 모자랄 수가 없는 액수였지만, 난 짐짓 태연한 얼굴로 통장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턱없이 모자라다니까.”
녀석이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 고민에 빠진 눈치였다.
과연 이놈이 뭐라고 하나 보자 싶어 기다리는데, 대답이 나왔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네가 정신적 피해를 받건 말건, 난 내 좋을 대로 하는 수밖에. 어쨌거나 난 여기서 살 거고, 넌 여기서 못 나가.”
과연 정상헌이다.
그 거만했던 태도가 어디 가는 게 아니라, 고개를 당당하게 들고서 중얼거리며 옆에 버티고 앉은 녀석을 보면서 나는 잠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기묘하게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 머릿속과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기쁨이 과도해 불안감 쪽으로 기울 지경이다, 에 가까우려나.
통장을 꼭 쥔 채 떨리고 있는 손은 금방이라도 녀석의 어깨를 틀어쥐고 ‘확실한 것’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굳어져 있는 혀끝은 내 마음을 토로하고 싶어한다. 녀석을 향해 열려 있는 귀는 녀석의 마음을 듣고 싶어한다.
상황이 가리키고 있는 결론은 하나인데도, 확인하는 게 두렵고, 설렌다.
“여기서, 살게 해 줄 수도 있지.”
불쑥 말하자 녀석이 뭐, 하고 쳐다본다. 난 녀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난, 문어다리로 원조교제 하는 놈이랑은 같이 살기 싫어.”
“……. 정리했어.”
잔뜩 긴장한 얼굴에서 일시에 긴장이 풀리며, 녀석이 맥 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응?”
“오늘, 내가 왜 나가서 따귀나 얻어맞으며 다니다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기 얼굴을 쓰다듬으며 불쾌한 듯 중얼거리는 녀석의 말이 천천히 귀로 흘러들어온 후로도 한참 후에야 그 말이 이해가 갔다.
미동조차 않고 눈만 깜빡이며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뭐, 됐어. 나도 귀여운 부인 얻어서 집 선물할 정도의 돈은 모았고.”
“아니, 너 그런 문제가 아니라――. ……돈? 이 통장에 있는 게 다라며?”
“응, 그러니까 줬…….”
녀석이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길게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이번에도 나였다.
사정보지 않고 주먹으로 녀석의 머리를 후려갈긴 시원한 소리가 집안에 퍼졌다.
“아! 또 왜 때려!”
“단어 선택 제대로 해. 누가 뭐라는 거야. 그리고, 말했잖아, 이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이 집에서 계속 살게 한다며.”
녀석이 눈을 부라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 이 녀석 한계치에 슬슬 가까워졌구나. 이 이상 하면 폭발하겠다.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젠 사소한 눈짓 같은 것만 봐도 알 것 같다.
난 지그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푹 웃었다. 녀석의 표정이 조금 바뀐다.
“……집안일, 착실하게 나눠서 하는 동거인이 좋은데, 나는.”
“할게.”
두말없이 당장 나오는 즉답에 나는 다시금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입가엔 웃음이 새어나와서 난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고함 지르고 성질 부리는 놈을 동거인으로 둬서, 또 무슨 스트레스를 받으라고.”
슬쩍 말하자 녀석이 안색을 바꾸었다. 그러곤 꾹꾹 목소리를 억눌러 나름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네가 화나게만 안 하면 나도 조용해. 나도 너랑 있을 때 외엔 언성 높이는 일 한 번도 없다고.”
조금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게, 그것마저 웃음보를 자극하는 것 같다.
난 녀석의 얼굴을 구석구석 새삼스레 쳐다보며 마지막 패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턱없이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마지막으로 필요한 거 하나가 남았네.”
“……뭐.”
녀석이 흘끔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난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 녀석을 얽어매려고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냥 웃고만 있다가, 나는 어느 순간 녀석의 멱살을 콱 낚아채어 끌어당겼다. 허를 찔린 모양, 녀석이 휙 끌려온다. 나는 녀석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네 평생.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내놔야 겨우 수지가 맞아.”
말을 마치고, 천천히 얼굴을 뗐다.
한 뼘 정도 앞에 있는 녀석의 얼굴이 천천히 희한한 표정을 이룬다.
가만히 날 마주보던 녀석은 갑자기 내 양 뺨을 턱 감싸쥐더니, 인상을 찌푸린 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난 그 시선을 그대로 마주보다가 속삭였다.
“같은 공기 마시고 살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러자 녀석은 뭘 생각했는지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도 먼 옛날 언젠가의 그 성대한 선언이라도 떠올린 모양이다.
그러나 이내 녀석의 표정에도 픽, 웃음이 번졌다. 그러더니 불쑥 되물었다.
“그럼, 네 인생도 주는 거냐?”
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난 입을 다물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안 주겠다고 하면 어거지로 뺏어 버릴 녀석이 묻긴 뭘 물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런 말을 했다간 정말로 녀석이 아, 그래? 하곤 어거지로 나올 것 같아서 목까지 치밀어오른 말을 꿀꺽 삼켰다.
“……너 하는 거 보고.”
그렇게 말을 하며, 녀석의 멱살을 놓으며 가볍게 밀었다.
“야, 치사하게.”
그러나 녀석이 웅얼거리며 불평의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놓았던 녀석의 멱살을 재빨리 다시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만큼이나 급작스럽게, 확 끌어당겼다.
아까는 네놈이 내 입술을 뜯어먹으려는 기세로 탐했지만, 늘 당하고 사는 건 적성에 맞지 않다.
뜯어먹으려는 기세가 아니라 정말로 뜯어먹을 작정으로 콱 깨물었더니, 물린 입술 사이로 아, 하고 신음을 낸다.
난 피식 웃으며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녀석을 밀어 버렸다.
가슴이 저릿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화가 나고 우울하고 침울했는데, 지금은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고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가슴이 심장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두근거리면서 지끈지끈 아프다는 것. 입가에서는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웃음이 새어나온다는 것. 눈앞의 저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내 눈치를 보고, 내가 웃자 표정을 슬그머니 풀어 버린다는 것. 그 정도일까.
“너 하는 거 보고, 라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
녀석의 불평 섞인 목소리에 나는 잠시 천장을 보았다.
녀석과 해야 할 일은 많다. 아직 덜 나눈 대화들도 산처럼 쌓였다.
이 녀석이 품고 있을 오해도 풀어야 하고, 내가 미심쩍게 생각했던 것들도 낱낱이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아직은 어설픈 짐작에 그치지 않는 감정들도 확실하게 확인을 해 봐야겠지.
지금이야 얌전한 척하고 있다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저 지랄맞은 성격도 어떻게 해 봐야 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기란 생각만큼 만만한 게 아니다.
그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도는 걸 정리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우선 나는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을 말하기로 했다.
웃으면서,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속삭였다.
“글쎄, 우선은……네가 부수고 어지럽힌 것부터 깨끗하게 치운 다음에 얘기할까.”
일순 녀석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씻은 듯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고, 주위를 살펴보고, 어디 하나 손 안 댈 수가 없도록 처참한 상태인 거실을 샅샅이 둘러본 후, 천천히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정말로 유쾌해져서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