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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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후회했다.

김치볶음밥을 프라이팬째로 식탁 위에 탁 내려놓자, 녀석이 욕실로 쪼르르 달려가 손 씻고 와서 식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거였다.

“아, 오랜만이다. 네가 만든 거. ……이젠 호텔 음식도 맛이 없어서 말이야. 제길, 네놈 때문에 입맛 버렸어.”

아, 마음이 풀려 버렸다.

――라고 하면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조금은 마음이 풀렸다. 풀렸달까, 머쓱해졌다에 가깝지만.

말없이 녀석의 앞에 앉아, 지금이라도 저 의문의 김치볶음밥, 먹지 말라고 할까 잠깐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재영이 녀석, 그 약은 안 쓰는 게 좋겠다고 나중에 덧붙였었지. ……왜 그런 거지? 저 약, 무슨 부작용이라도 있는 건가.

난 약간 안색을 바꾸었다.

역시, 나중에 원인 모를 일 치느니 조용히 여기서 접는 게 낫겠다.

하지만 여기서 고민 하나.

지금이라도 막 먹을 폼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는 저놈에게, 무슨 말을 하고 프라이팬을 빼앗아야 하나. 여기에 약 탔으니까 먹지 마, 라고? ……그랬다가 무슨 난장판 벌어지려구.

그러나 그 인간적인 고민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끝나 버렸다.

“나 먹는 동안 너는 설거지나 좀 하지? 물 마시려고 해도 이제 컵도 없더라.”

손을 휘휘 저으며 지껄이는 그놈의 입이 재앙을 부른다. 그러게 예부터 그런 말이 있었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며, 혀는 제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이를 갈며 녀석을 노려보는데, 녀석이 날 보고 히죽 웃더니 갑자기 의자 등에 걸쳐 놓은 웃옷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그 안에서 뭔가 꺼내 툭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들고 보니 플라스틱 통에 든 600원짜리 오렌지주스.

“오다가 보이기에 샀어. 열나는 데에는 오렌지주스가 좋다며?”

감기에 좋은 거겠지, 열나는 데가 아니라.

사람 염장을 지를 대로 질러 놓고 달랑 주스 하나 던지다니.

제 딴에는 착한 척한다고 사온 거겠지만 그것마저 밉살스러워 보였다.

녀석의 손에서 확 낚아채어 주스를 따 주욱 마시다 보니, 좀 이상했다. 딸 때의 감촉이.

의아한 눈으로 주스와 녀석을 번갈아보자 녀석이 뻔뻔하게 말했다.

“실은 목말라서 나 마시려고 산 건데, 한 모금 마시니까 먹기 싫더라. 버리긴 아까워서.”

마신 걸 도로 녀석의 얼굴에 뱉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녀석이 약물 섞인 김치볶음밥을 먹도록 방치했다.

녀석의 말에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확실히 녀석의 말마따나 이젠 성한 접시가 없었다. 물도 못 따라 마실 지경이다. 결국 소매 걷어붙이고 개수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는 사이에 녀석은 게눈 감추듯 밥을 다 먹어 버렸다. 아직 설거지는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프라이팬 가득한 밥을 다 먹어치웠다.

하긴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 녀석의 평소 식탐에, 속도에, 쌓여 있던 설거지 양을 비교해 보면.

……제길, 하지만 더 성질나는 건, 이렇게 일껏 설거지를 해 봐야 엉망으로 흐트러진 집은 여전히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엉망이란 거다.

입속으로 욕을 짓씹고 있는데 녀석이 식탁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러더니 어깨 너머로 빈 프라이팬을 넘겨준다.

“설거지 하나 추가.”

저 프라이팬을 받아서 녀석의 안면을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놈은 얼마 있지 않아 몸의 이상을 느끼고 사색이 될 테지.

흘긋, 말없이 녀석을 노려보았다. 녀석이 흠칫하더니 어깨를 약간 움츠린다.

조용히 프라이팬을 받아 옆에 내려놓고 마저 설거지를 했다.

약효는 어느 정도 있어야 나타나는 걸까. 최음제 따위 써 본 적이 없으니 알아야지. 하긴 그것도 약에 따라 다른 거겠지만.

하지만 조금 신경 쓰였다. 재영이가 그 약은 안 쓰는 게 나을 거라고 했던 말이 조금 전부터 계속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이상한 부작용이라도 있어서 이 녀석에게 두고두고 해 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때, 문득 녀석이 바싹 다가서는 게 느껴졌다. 등에 녀석의 가슴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깝다.

순간, 어쩐지 등줄기에 스윽 소름이 돋았다.

……아?

고개를 갸웃하며 묵묵히 설거지거리로 시선을 떨어뜨리는데,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녀석의 턱이 닿는다.

다시 한 번, 등골이―아니, 목덜미인지도 모르겠다―선뜩한 느낌이 든다.

흠칫, 몸을 움츠리는데 녀석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몸, 괜찮아?”

“응? 아아, 열은 많이 내렸어. 거의 평열에 가까워.”

“……그건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한밤중에 병자를 침대에서 끌어내어서 밥 지어내라고 횡포를 부리는 짓이나 그만두지.

하지만 몸 괜찮냐는 건 내가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다.

원래 최음제라는 게 약효가 늦게 도는 건가.

흘끗 녀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녀석이 지그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워. 왜 붙어 서서 그래. 저리 가, 떨어져.”

난 녀석을 어깨로 가볍게 밀쳐내며 중얼거렸다.

딱 달라붙어 있으니 움직이기도 힘들고,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덥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덥다. 열이 있는 탓에 서늘하니 추워야 할 텐데도 어쩐지 몸속에서 무더운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더웠다.

좀, 많이, ……이상하다.

어깨 너머로, 뭐가 재밌다고 설거지 하는 손을 들여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닿지도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민감하게 느껴져 열기가 오른다. 아니, 소매를 걷어붙인 옷자락이 닿는 것조차 미묘하게 살갗을 자극한다.

“몸,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녀석이 낮게 속삭였다.

속삭이는 소리가, 평소와 별 다름없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소름끼치도록 매끄럽게 귓불을 쓸어내려서 등골이 오싹했다.

그제야 난, 이건 좀 많이 이상하다고, 확실하게 결론지었다.

이상하다. 아까 약을 섞은 건 분명 녀석이 먹어치운 김치볶음밥 안이었고, 그건 이놈 혼자 다 먹었다. 설마 그 약, 먹은 사람이 아니라 그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약이 있을 리는 없고. 설마 그거 바르는 약이었나 생각해 봐도, 음식에 약 섞으면서 손가락 끝에도 한 방울 안 묻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이상하게 몸이 달아오르고 섬칫섬칫한 것은 가시지 않아, 나는 결국 찬물에 손을 헹구고 개수대 앞에서 비켰다. 뒤에서 녀석이 가로막듯 서 있었지만 내가 노려보자 생각보다 선선히 비켜 준다. 어쩐지 입매에 흐릿하게 웃음이 걸려 있는 듯도 싶었지만, 녀석의 얼굴 따위를 들여다보고 있을 판이 아니었다.

녀석을 밀고 당장 욕실로 가 찬물을 틀었다. 거울에 비치는 내 얼굴은 완전히 익어 있었다. 귓불에서 목덜미까지도. 당황스런 마음은 그대로 표정에 떠올라 있다.

뜨거운 피부를 찬물에 식히면 나을까 싶어 얼굴과 목, 팔 등등 옷자락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물을 적셨다.

어느새 녀석이 욕실 문턱에 기대어 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 아까 길에서 그놈 봤다. 요전에 너랑 뒹굴던 놈. 칵테일바에서 일하는 그 자식.”

남의 친구한테 왜 놈에다가 자식이라는 명사를 붙이는 거야.

사납게 노려보자 녀석은 모른 척 느물느물 중얼거린다.

“어떤 놈한테 끌려가던데. 한 덩치 하는 놈이 손목 붙잡고 질질 끌고 가더라. 그놈도 끌려가면서도 별로 반항은 안 하고 얌전히 가던데. ……원래 변태 호모는 그렇게 잘 바꾸나 보지, 애인?”

난 잠시 멍하게 녀석을 보았다.

저거 아무래도 재영이, 를 말하는 것 같은데. 끌려가다니.

덩치가 크다면 기민이는 아니다. 벌써 몇 년을 못 봤지만, 20대 초반에 이미 성장은 멈춰 고만고만한 신장인 놈이었다. 그런 게 갑자기 덩치가 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그러고 보니 아까 기민이를 잡았다던데 지금은, ……아, 그게 아니다. 지금 내가 화를 내야 할 포인트는 다른 데 있었다.

“여자 여럿 문어발 걸치고 돈 긁어내는 놈이, 애인 잘 바꾼다고 뭐라 할 건 아닐 텐데.”

싸늘하게 말하자, 녀석이 울컥한 듯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날 노려보았다. 거울 속으로 팽팽한 시선이 마주친다.

문득 녀석이 흐리게 웃었다.

“너도 애인은 곧잘 갈아치우지 않아? 그놈이랑 뒹군다고 해서 그놈이랑만 그 짓 하는 건 아닐 것 아냐.”

이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저놈이 사람을 뭐 취급하는 건지, 정말로 갈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얼른 돌아라, 약기운. 이젠 약에 어떤 부작용이 있건 말건, 네놈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면서 난 웃을 테다.

거칠게 수건을 낚아채어 얼굴을 부비면서, 난 분노로 인해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려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 깨달았다.

숨이 거칠어진 게, 아무래도 화난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얼굴이며 목에 닿는 수건의 감촉마저 묘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아, 제기랄, 이거 아무래도, 온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확확 열이 나는 듯한, 이 느낌, 조금 더 있으면 사타구니까지 번질 것 같았다.

확, 당혹감이 밀어닥쳤다.

수건에 얼굴을 묻고 멍하니 서 있다가, 난 여전히 문간에 서 있는 녀석을 확 밀치고 내 방으로 거의 뛰다시피 해 들어갔다.

이상하다. 몸이 가렵……아니 뜨거운 건가. 피부를 긁어 보았지만 피부 자체의 가려움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그 느낌과 비슷하다. 사정하기 전, 흥분할 때의 그 들뜬 느낌과.

이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래서야 마치, 약 먹은 게 꼭 나인 것 같잖아.

침대 위에 누워만 있어도 이불이 피부에 스치는 것조차 민감하게 느껴져 몸이 달아올랐다. 혹여 재영이가 말한 ‘그 약은 안 쓰는 게 좋아.’라는 게 이런 의미라면 이해가 간다.

……라지만, 난 한 입도 안 먹었다구, 그 밥. 내가 먹은 거라곤 열받아서 마신 물 한 잔이 고작인데. 아, 그리고 저 빌어먹을 놈이 먹다 남겨 줬다는 오렌지주스.

………….

뭔가,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 순간.

방문이 부서져라 녀석이 문을 열어젖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주자 녀석이 험악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너 이 새끼, 김치볶음밥에 뭐 넣었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저 당황한 얼굴을 보니, 슬슬 저놈, 약이 돌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더 신경 쓰이는 건.

“……거기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내가 마신 주스, 제대로 된 거 맞아?”

녀석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난 침대 위에 늘어져 있다가 겨우 일어나 앉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금세 입에서는 얕은 신음이 새어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며 안간힘을 썼다.

녀석과 나는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심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었다.

이 망할 놈의 자식! 약점을 대충 잡았으면 그대로 살 것이지, 그걸 굳히려고 약까지 먹이다니,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섬뜩하고 소름끼치는 침묵을 깬 건 그 녀석이었다.

“너, 어쩔 작정으로 이런 짓을 한 거야.”

쇳소리가 섞여나는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마치 목소리가 물질화되어서 목덜미에서 등까지 더듬어 쓸어내리는 것 같아, 몸속이 지끈거렸다.

“――누가 할 소릴 하고 있어, 누가 할 소릴.”

녀석의 목소리가 저렇게 바뀐 것처럼, 내 귀에 들려오는 내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간간이 끊겨서 입 밖으로 나오는 목소리가 가쁜 숨결을 담고 퍼진다. 그래서 나는, ……자기 목소리에 자기가 얼굴을 붉히는 얼간이 짓까지 해 버렸다.

더 이상 말 한마디 하면 안 되겠다 싶어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이쪽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꼴좋군, 윤해신. 너랑 뒹굴던 놈은 딴 놈한테 잡혀갔고, 넌 약 먹고 헤롱거리고 있고, ……또 혼자 딸잡으셔야겠어……?”

이 상황에서도 저런 소리나 하는 그놈을, 난 시선만 들어 노려보았다.

끝까지 염장을 긁어라.

나란히 같이 약 먹은 사이에, 뭘 잘났다고 저놈의 혀는 죽지도 않는지.

“……네 걱정이나 하시지. 그래, 네 말마따나 나는 변태 호모니까 마스터베이션도 할 수 있고 서랍 안에 쌓여 있는 로터로 해결을 볼 수도 있는 문제지만, 넌 어떻게 할래? 처량하게 혼자 오른손을 애인 삼고 싶지 않으면 얼른 여자나 만나러 나가시지. ――흥, 처음으로 섹스의 대가로 여자한테 돈을 받는 게 아니라 줘 보겠네, 정상헌.”

마지막 말이 히트를 친 모양이었다.

순간 녀석의 시선이 차갑게 굳었다.

열에 들뜬 얼굴로 눈만 차갑게 식은 것이 나름대로 스산해, 나까지 서늘한 바람을 맞은 것 같았다.

“하아, 그러셔……?”

녀석이 한쪽 입매만 비틀어올렸다. 입술을 일그러뜨리는 듯 짓는 미소가, 마치 맹수의 것 같아서 섬뜩하다.

녀석은 입을 꽉 다물더니 말없이 서랍장으로 걸어갔다.

요전, 밑이 빠져서 아직 고치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서랍의 바로 아래, 두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로터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녀석은 서랍째로 뽑아들었다.

“던지지 마! 나중에 정리하는 건 나란 말야!”

저 서랍마저 작살낼 작정인지, 녀석은 그걸 던지려는 기세로 움켜쥐었다. 그러나 내가 버럭 소리치자 날 흘끔 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대로 방의 창문 쪽으로 걷더니 창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창밖은 바로 집밖의 골목과 이어져 있었다.

“너――.”

망설임 없이, 녀석은 서랍째 바깥에다 인정사정없이 내던졌다. 한밤의 골목에서 빠각, 하는 소리가 바깥으로부터 들려왔다.

졸지에 서랍과 로터들을 잃은 나는 어이가 없어져 입을 벌리고 멍하니 녀석을 쳐다보았다. 창문을 도로 닫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보는 녀석의 표정은 사악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얘기가 달라졌지, 윤해신. 둘 다 마스터로 해결한다손 쳐도, 네놈은 구멍 속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을 텐데 어쩌시려나.”

“남의 걸 왜 네 멋대로 버려!”

“언제까지 저따위 장난감 가지고 놀래!?”

내 목소리 따위 묻혀 버릴 정도로 큰 소리로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성큼 다가서 어깨를 틀어쥐고 절레절레 흔드는 녀석의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피부 속을 파고든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콱 깨물었다.

아픈 것보다, 손가락이 피부 위를 누르는 감각 쪽이 더 진하게 전해진다.

“……! ……놔.”

쉰 목소리로 낮게 속삭이고 녀석의 손을 뿌리쳤다. 바싹 다가선 녀석의 체온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숨이 막힌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환장할 것 같았다.

혹시 이놈이 내게 먹인 게 강심제는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 뛰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숫제 지끈거린다. 아프리만치 세게 뛰어, 이러다가 어느 순간 덜컥 멈추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탓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계속 밭은 호흡만 뜨겁게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아마 옆에서 봤더라면 ‘숨넘어갈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실제로도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아예 숨통을 조여 죽일 작정인지, 뿌리쳤으면 뿌리친 대로 얌전히 물러나 주면 좋을 걸 다시 팔을 꽉 잡았다. 이젠 뿌리치기도 힘들도록 힘주어 잡는다.

더럭 조급한 마음이 들어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도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싹 메마른 입술을 가끔 혀로 축이며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다.

이마에 닿을락말락하게 내려온 입술이,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췄다. 그때 문득 한 손이 뒷머리를 가볍게 잡는다. 그 손은 천천히 목에서 등, 허리를 타고 내렸다.

“……!!”

무심결에 녀석의 팔에 손톱을 박았다. ……라고는 해도 지저분하게 손톱 따위를 기르는 취미는 없으니 그리 아프지는 않았겠지만.

이젠 숨을 삼키려고 입술을 깨물 여유도 없었다.

아래가 완전히 흥분해 슬슬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에,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 버렸다.

“……놔! 놔! 놔!”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리면 이렇게 되어 가는 게 내게는 형편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녀석은 제 말마따나 ‘변태 호모’의 길로 빠져드는 거고, 나 역시 그러지 않아도 몸속이 즈끈거리는 차에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던 놈과 한 판 뛸 수 있으니 좋다.

하지만 뭔가가, 이건 좀 아니다, 라고 경고를 울렸다.

휘두른 주먹에 어퍼컷으로 턱을 얻어맞은 녀석은, 윽, 하면서 한걸음 물러섰다. 혀라도 잘못 깨물었는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입을 감싸쥐고 있는 게 제법 아픈 모양이다. 그러나 난 완전히 달아오른 몸을 추스르는 데에 바빠, 헉헉거리면서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고서 녀석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녀석이 번쩍 내게 시선을 돌리더니, 심통 난 어린애처럼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야! 네가 약을 먹여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무슨 소리야, 너도 먹인 주제에!”

“그러니까 난 책임지려 하잖아!”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이놈이 하는 말은 영 어불성설이면서 묘하게 조리에 맞는 척해, 가끔 이렇게 사람을 어지럽게 만든다.

“야, 너…….”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 중얼거린 말은, 내가 생각해도 멍청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럼 너도 변태 호모 된다……?”

그러자 녀석은, 역시나 조금 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허를 찔린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가, 잇새로 칫, 하고 내뱉었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틀어쥐고 시비라도 거는 것처럼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얌전히 할 거야, 말 거야. 어차피 네 장난감은 지금쯤 누가 다 주워갔을 거고, 넌 봐, 숨도 못 쉴 정도로 헉헉거리면서 뭘 뻗대고 있어.”

“숨도 못 쉬는 건, 너잖아!”

“제길, 약도 무식하게 센 걸 썼겠다, 이 빌어먹을 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로 위험스럽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녀석이 중얼거렸다. 난 마음 속 깊이 애꿎은 재영이를 욕했다.

대체 얼마나 약효가 센 걸 넣어 놨기에 애가 이 모양이 되어서 정신도 못 차리는 거야!

그러나 내가 뭐라고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녀석은 내 손목을 뒤로 돌려 잡아 못 움직이게 미리 수를 쓰고는, 먹어치우기라도 할 기세로 내 목덜미를 덥석 베어 물었다.

“빌어먹을……. 하고 싶어, ……터질 것 같다구.”

그릉거리는 목소리가 귓불을 씹어 삼킨다.

터지다니 뭐가, 라고 물을 사이도 없이, 불룩하게 일어선 녀석의 바지 앞섶이, 거의 비슷한 상태인 내 허리 아래에 와 닿았다. 무의식적인 듯 허리를 비벼 대면서, 허리에서 놀던 커다란 손 하나가 내려와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나는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몸속에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간간이 피어오르던 불꽃이 일시에 폭발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성의 끈 따위 놓아 버렸다.

어느 때였던가, 뭐가 뭔지 알 수 없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던 머리로 어렴풋이나마 주변 상황을 인식한 것은, 갑자기 몸이 서늘해지는 걸 느끼면서였다.

몸속에서 난쟁이들이 춤을 추며 장작불을 지피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동화 같은 상상마저 떠오를 정도로 온몸이 확확 달아오르고 있던 차에, 갑자기 몸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조금 정신이 들었다.

가느스름하게 열에 들뜬 눈을 뜨자 녀석이 셔츠를 벗어던지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보자 이미 나는 벗을 대로 거의 다 벗고 있어, 그런 와중에서도 혀를 찼었다. 이놈, 어느새 나는 다 벗기고 저만 옷 다 챙겨 입고 있잖아.

그러나 그런 불만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녀석이 자신의 옷까지 허겁지겁 다 벗어던졌을 때에는 이미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도 없었다. 서로 나란히 벗고 있는데 무슨 불평을 말할 수 있으리.

열로 멍하니 정신까지 들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몸은 극도로 민감해서 시트 스치는 것에도 몸을 움츠릴 지경이 되어 있었다. 즉, 어깨에서 팔을 가볍게 쓸어내리는 정도로도 한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내심 숨을 들이켰다.

내 위로 조심스레 엎드려 커다란 손으로 눈을 덮어 가린 그놈이 몸을 겹쳐 왔을 때, 사타구니에 닿는 느낌이 참 당혹스러웠다.

뭐랄까, 맨살갗끼리 맞닿는 그 느낌이 무척 쑥스럽다고나 할까, 민망하다고나 할까, 그런 기분이었다. ……그것도 지금 회상이나 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거지, 안 당해 본 사람은 그 순간의 당혹스런 기분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자동적으로 연상된 건, ……이거 단단히 앓아눕겠는데, 였다.

직접 보지 않고 감각만으로 판단하는 데야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지만, 이거 아무래도 평균 사이즈 이상은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놈 성급하게 귓불을 깨물고 다소 우악스레 가슴팍을 더듬어 오는 손길 같은 게, 섹스를 거칠게 하는 스타일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내가 로터로 길들여진 몸이라고는 해도, 그 로터들 중 남자의 일반 성기 사이즈만큼 커다란 건 없었다.

이를 어쩌나. 설마 출혈 과다 같은 걸로 죽거나, 병원에 실려 가는 건 아니겠지. ……병원에 실려 가서 만방에 알려지느니 차라리 조용히 죽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아냐, 하지만 이놈은 송장 치르기 싫으니까 병원에 보내 버릴 거야,

그런 잡다한 생각들이 쉴 새 없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도 길게 가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연이어 목이며 쇄골 부위가 따끔따끔한 게, 이 녀석이 계속 물고 빨고 있었다. 나중에 거울 보면 참 볼 만하겠다 싶었지만, 쇄골에서 가슴팍으로 내려온 녀석의 입술이 간지럼 태우는 것처럼 가슴 부근을 헤매었다. 몸은 달아올라 죽을 지경인데 약 올리기라도 하는 듯, 혀끝으로 살짝 살짝 핥다가, 때로 살점을 약간 집어 앞니로 가볍게 깨문다.

몸이 달아올랐다. 조금 전부터 연신 몸이 흠짓거리며 요동쳤다. 심장이 미친 듯 뛰어, 이대로 멈추는 건 아닐까 싶다.

그때, 계속 가슴 근처를 지분거리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그 가운데, 유두를 살짝 씹었다. 허리가 튀어올랐다.

“……아! ……!! ……!!!”

외마디의 신음을 토해낸 나는 부들거리는 입술을 깨물고 반사적으로 녀석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 손은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척추를 타고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그 기묘한 감각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쳐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당혹감과 두려움은 얼른 그 손을 잡아당겨 버리라고 속삭이는데, 몸속 깊은 곳 심지에 불을 붙이는 뜨겁고 급작스런 맥박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고 보채고 있다. 한층 더 몸이 근지러워진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녀석의 머리를 안듯이 잡은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부들거리며 간혹 뒤로 도망치는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붙잡고 있던 손이 슬슬 내려갔다. 피부 위를 흘러내리는 견딜 수 없는 감각에, 깨물었던 입술은 한심하게도 신음을 흘려 대고 있었다. 녀석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간간이 뜨거운 입김을 피부 위에 쏟아놓는다.

때로 움직임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번 길게 하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잇새로 거칠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길, ……정신이 없잖아. 빌어먹을, 대체 어떤 약인지, 효과 한 번 끝내주는군.”

녀석이 혀를 차며 그 말을 할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이놈이나 나나 약에 취해 정신이 없지.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약에 취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정신없이 흐트러졌을지도 모른다, 라는. ……그래도, 적어도 지금보다는 조금이나마 단정한 모습을 보였겠지만.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상상은 소용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녀석과 나는 약에 절어서, 이렇게 맨몸을 부대끼고 있으니까.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때,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던 손이 그 사이로 미끄러져 내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물기 없는 손가락 하나가 안쪽을 파고들었다. 비록 녀석의 손이 큼직하고 손가락 마디가 굵었다고는 해도 손가락 하나 정도야 별 거 아니지만 물기 없이 뻑뻑한 탓에 조금 저릿했다.

하악, 하고 밭은 숨을 내쉬며, 난 어느새 녀석의 등을 더듬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일시에 살점을 꼬집혀 꽤나 아팠을 텐데도 녀석은 다시 목 근처를 더듬고 있던 입술로 내 턱을 살짝 쪼면서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자, 착하지…….”

아마 제정신일 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일시에 야차의 형상을 하고 녀석을 줘팼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녀석의 그, 완전히 애 취급하는 말에 정상적인 반응을 보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네, 놈이나 괜찮지, ……난 안 괜찮아……!”

생리적인 눈물이 눈초리에 배었지만, 그런 것도 아랑곳 않고 잔뜩 노려보며 녀석에게 속삭이자 녀석이 픽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가시기도 전에 녀석은 내 목덜미를 한 입 깨물며 두 번째 손가락을 넣었다.

“윽……!”

이 자식이 또 메마른 걸 그대로!

일순 울화가 치밀었지만, 뻑뻑해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기 전에, 안을 더듬던 녀석의 손가락이 한 점을 짚어내었다. 순간 난 확 허리를 끌어당기고 말았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아, 여기로군.”

녀석이 즐거운 듯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속삭이는 녀석의 얼굴도 잔뜩 상기되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어, 녀석도 꽤 더운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손끝이 같은 곳을 찔렀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난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사리물고, 허리를 굽혀 눈앞에 보이는 녀석의 어깨에 이를 세웠다. 녀석은 제법 아픈 모양인지 얼굴을 찌푸리고 신음을 흘렸지만 심통이 난 듯―혹은 재미 붙인 듯―,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안쪽을 긁어대었다.

아……정말 미칠 것 같았다.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마치 플래시가 터지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눈 아플 정도의 세찬 불빛이 번쩍였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몇 초, 혹은 몇 분 정도나 지났을까, 나는 미친 사람처럼 허덕이며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집요하게 몸안을 더듬으며 한편으로는 허벅지 안쪽을 깨물어 잇자욱을 남기고 있었다.

나도 녀석도 이미 앞은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이젠 아플 지경이었다.

어느새 셋까지 늘어나 들어와 있던 손가락이 잔뜩 젖어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쪽을 헤집고 있었다.

이제 제발, 적당히 끝을 맺었으면 좋겠다.

한계까지 몰린 몸이 탈출구를 찾아 허덕였다.

녀석의 어깨를 쥐어뜯고 있던 손을 떼, 잔뜩 성을 내며 일어서 있는 사타구니의 살덩이를 쥐었다. 두세 번만 훑어도 금세 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처 제대로 쥐기도 전에 녀석의 다른 손이 쉽사리 내 손을 쥐더니 손등에 입맞춘다. 그리고 나직이 속삭였다.

“뭐야, 로터를 그렇게나 오래 써 왔다면서, 아직 뒤를 자극해 주는 것만으로는 사정을 못하는 모양이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확 익어 버렸다.

그 말마따나, 뒤쪽에 전해지는 끊임없는 자극 탓에 아프도록 일어선 물건에서 새어나오는 애액으로 조금씩 살덩이가 젖어 가기 시작해도, 애타고 흠짓거리는 느낌만이 이어질 뿐 결정적인 순간을 맞을 수는 없었다.

난 녀석의 어깨를 틀어쥐고 있던 손을 떼 녀석의 얼굴을 가볍게 후려쳤다. 녀석이 윽, 하고 내 무릎 안쪽에 얼굴을 박았다. 맞은 뺨을 문지르며 눈을 부라리는 녀석에게 나도 똑같이 눈을 부라려 주며 좀 거칠게 말했다.

“할 거야, 말 거야……! 염장, 지르고 있어……!”

녀석은 일순 욱하는 얼굴을 했지만, 무릎을 가볍게 깨물며 내 몸속에 들어와 있던 손가락을 끄집어내었다. 일시에 비어 버린 몸속이 욱신거리며 채워 달라고 보챈다.

곰쑤시는 몸을 비틀며 이를 악물고 있으려니, 녀석은 내 다리 한쪽을 들어 어깨에 걸치더니 몸을 숙였다. 굳어 있는 몸의 근육이 소리를 내지른다.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텅 빈 채 숨쉬는 곳에 뜨끈한 살덩이가 와 닿았다. 숨을 들이쉬며 난 눈을 꾹 감았다. 조금 전에 얼핏 본 걸로는 상당히 흉흉스러워 보였다. 제발, 병원에만 안 가고 끝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안 하기에는 욕정을 호소하는 몸이 도리질을 치고 있고.

그러나 잔뜩 각오하고 눈을 감고 있는데, 아무리 지나도 몸을 벌리고 들어오는 느낌은 없고, 입구 근처에서만 물건 끝을 부비고 있어, 난 가늘게 눈을 떴다. 녀석이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지그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귓가며 가슴께를 연신 간질이는 손가락이, 절정 직전의 그 초조한 감각으로 몰고 간다.

‘왜……?’

입모양만 움직여, 그렇게 물었다.

왜, 사람 애만 태우고 그러고 있는 거지. 너도 아플 정도로 잔뜩 발기해 있으면서, 왜.

그러나 입 밖으로 내어 묻기에는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그렇게 입모양만으로 속삭였다.

땀이 배어오른 얼굴로 녀석이 웃었다. 입매를 약간 틀어올리며, 어딘가 묘한 느낌으로.

그리고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더니, 속삭였다.

“나 말야, 예전부터 여자를 안을 때엔 늘 규칙이 있었어. 그 여자랑 내가 어떤 관계건, 어쨌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 않으면 끝까지는 하지 않는다는 주의라고. ……넌 여자는 아니지만, 말이야.”

몽롱한 머리로, 얼핏 녀석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가 뭐라고? 여자가 아니라서 어떻단 말이지? 규칙?

그러나 어렴풋이 들떠 있던 눈은, 아주 약간 정신이 들어 버렸다.

――잠깐, 이거.

내 눈빛을 보고 내가 그 말을 이해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녀석이 피식 웃으며 뺨을 살짝 깨물었다.

“별 의미 없는 말이지. 하지만 예전부터 지켜 오던 규칙은 규칙이니까. ……아니면, 이대로 그만할까?”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이 유두를 잡아 비틀었다. 다른 손이 입구 근처를 간질이며 애태운다.

“너, ……그, 무슨, 헛소리를――!”

기를 쓰고 밭은 소리를 내지르자, 녀석은 잠시 침묵하다 중얼거렸다.

“싫어? 뭐……그럼 오늘밤은 내도록 계속 이 상태로만 있겠다는 거지?”

녀석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열기로 달아올라 있는 표정이 조금 싸늘해져 있었다.

여전히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녀석의 물건은 허벅지를 외설스레 찌르고 있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 저도 마찬가지로 흥분해 있는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사랑한다……니, 농담으로도 해 본 적 없다, 그런 말은. 그런 걸 욕구를 돋우기 위한 도구로 마구 지껄여 대라니, 맘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서 욕구를 해소하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몸을 겨우 묶어 두고 이를 악물었다. 녀석이 칫,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녀석이 내 손을 잡더니 손목을 그러쥐었다. 부자유스럽게 구속된 손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핥으며 녀석은 몸속에 다시금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밭은 숨을 내쉬며 허리를 뒤트는 것도 아랑곳 않고, 잔인하게도, 쾌감점만 찾아 긁어대었다. 새하얗게 눈앞도 보이지 않고, 귀가 멀어 버릴 듯한 파도도 수차례 밀려왔는데도,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쾌락의 절정에 닿을 수가 없었다. 나중엔 이성이고 뭐고 다 달아나 엉엉 울었던 것도 같다(그러는 와중에도 이 빌어먹을 자식, 망할 놈 같으니, 라고 욕설을 중얼거렸다고, 나중에 녀석에게 들었다).

어느샌가 녀석은 내 눈가를 핥으며 속삭이고 있었다.

“울지 마, 울지 말고……응? 어떻게 하면 서로 좋게 좋게 즐길 수 있을지, 알지……? 울지 마……착하지.”

……내가 정말로 ‘착하지’ 따위의 말을 들을 만한 나이였더라면 이 녀석, 미성년자에 대한 음행죄로 잡아넣을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은 나중에야 들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말을 맺으며 살짝 입술에 입맞추는 녀석의 입술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해, 반쯤 정신이 나간 머리로 훌쩍이면서 녀석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 ……랑해.”

잠깐, 녀석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몸속을 헤집는 손가락을 살짝살짝 움직이며, 되속삭인다.

“잘 못 들었는데.”

“사랑해.”

“한 번 더.”

“사랑해.”

“……이름까지, 붙여서 다시 말해 봐.”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대신 조금 전처럼 단단한 질량감이 입구를 가볍게 눌렀다.

“사랑, 해, 상, ……상헌, 아.”

녀석이 웃는 기척이 들렸다.

한 번 더, 라고 속삭이면서, 동시에, 밀고 들어왔다.

눈앞이 확, 하고, 일순 시야가 멀어버렸다. 별이 반짝이는 것도 같았다.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일시에 몸속을 빡빡하게 채운 살덩이가 한계를 모르고 몸을 꾸역꾸역 벌려든다.

허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은 팔이며,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닿은 가슴이 뜨거운 체온을 전해왔다.

적당히 놈이 자리잡을 때까지 나는 개처럼 밭은 숨만 내쉬며 눈을 크게 홉뜨고 있었다.

“제길……, 힘 좀, 빼 봐. 버티기 힘들잖아, 바보야.”

녀석이 힘겨이 중얼거리며 허리를 당겼다. 몸속에서 끈적한 소리를 내며 그의 것이 빠져나온다. 그러나 거의 다 빠져나왔나 싶을 무렵, 다시 푸욱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숙이 찔러 온다.

어쩌면 그때 나는 비명을 질렀는지도 모르겠다. 안 질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상관없는 게, 녀석은 계속 허리를 움직여 댔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돌려, 시들려고 하는 내 물건을 쥐고 능숙하게 훑어올려 다시 발기시킨다.

“계속 말해 봐, ……그럼, 하게 해 줄 테니까.”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서 으르렁거린다.

난 일순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정신으로 속삭였다.

“사랑해, 정상헌, ――사랑한다구, 이 빌어먹을 자식아……!”

유감스럽게도, 이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일단 한 번 입 밖으로 말하자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연신 터져 나온다.

만족스런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다 싶더니 몸속을 후벼내는 움직임이 갑자기 가속을 붙여 거세어졌다.

뇌수가 으스러져 버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되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니 무리도 아니다.

녀석이 반쯤 미친 맹수처럼 거칠게 몸을 움직여 대는데도 저지하지 못한 것도.

녀석의 귀에 그 낯 뜨거운 고백을 계속 해 댄 것도.

한 라운드를 마치고, 겨우 끝이구나 싶어 넋을 잃고 늘어져 있는데 다시 몸 위로 타고 오르는 녀석에게 시달리다 시달리다 못해, 결국은 정신의 끈을 놓아 버리고 기절해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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