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어쩌면 세상에는 내가 몰랐던 반(反)동성애 단체 같은 게 있는지도 모른다. 동성애자―혹은 이상 성애 기호자―의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사생활은 속속들이 파고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모든 인간관계를 토막토막 끊어내어도 무방하다는 단체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정상헌 저놈은, 하룻밤 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단체에서 뭔가 한자리 꿰찬 모양이었다.
그리 늦은 오후는 아니었는데도 침대 속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고, 일어나니 벌써 아침이 되어 있었다.
일곱 시 되기 조금 전인 시계를 보고, 나는 일어나자마자 되살아나는 지난날의 기억에 우울한 기분으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자마자, 빌어먹을, 이라고 중얼거렸다.
저놈이 집안에서 오소리를 잡을 작정이었는지 나가자마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후각을 찔렀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조깅 간 거겠지만.
베란다 문을 열어젖히고 돌아서는데, 그때 눈에 띄는 건 개수대에 쌓인 설거지거리.
어라, 하고 그리로 걸어가 보니 개수대에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 정도로 설거지거리가 나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냉장고는, ……아, 역시 비어 있었다.
밥통은 물론이고 반찬통에 김치통까지, 깔끔하게 비어 있었다.
이 녀석, 설마 열받으면 먹어서 푸는 타입인가. 그렇다고 해도 설거지는 왜 쌓아 둔 거야.
우울한 기분이 불쾌한 기분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역시 조깅을 다녀왔는지 운동복 차림으로 땀을 흘리며 들어오고 있던 녀석과 딱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무뚝뚝한 녀석의 표정이 금세 험악하게 바뀌었다.
“뭘 봐, 변태 호모.”
첫마디가 그거였다.
나는 절로 악물어지는 이와 틀어쥐고야 마는 주먹을 의식하며 조용히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이 예전에는 오른손 애인 딸치기 운운하며 사람 속을 뒤집더니, 이젠 단어를 바꾸려나 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그때는 장난기가 묻어나는 웃음기와 함께 저 단어들이 날아들었다면, 지금은 얼음장 위로 칼날이 흘러내려오는 듯한 삭막함과 함께 다가온다.
“……먹었으면 설거지해야지. 쌓아 두는 거 싫으니까 나중으로 미뤄 두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설거지? 내가 그런 걸 왜 해?”
녀석이 코웃음을 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웃통을 훌훌 벗고 샤워기로 목덜미에서 머리까지 물을 쏟아부으며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다.
그런 와중에도 넓고 탄탄한 등을 보며 감탄하는 나란 인간도 한심스럽다.
“왜 하냐니.”
어째 매우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연하게 머리를 감고 땀을 씻어낸 녀석은 돌아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난 안 할 테니까, 네놈이나 하시지.”
“너――.”
“동네방네 알리려면 알려봐, 나 원조교제 하는 거. 양다리 세다리 네다리 걸리는 것도 다 말해 보라고. 나도 네놈 주변사람에게 퍼뜨릴 말, 아주 많으니까.”
나는 숨을 삼켰다. 말을 마치면서 녀석이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는 게 보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이 경우 조금 틀리겠지만, 예전 녀석이 집으로 굴러들어와 보내었던 첫 몇 주간, 지독하게 혹사당했던 내 불우한 정신의 기억이 새로이 떠올랐다.
지그시 녀석을 노려보는데,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던 녀석이 거만하게 말했다.
“밥 차려.”
“……네 입장을 너무 대단하게 보는 것 같은데.”
“하지만 서로서로 꺼림칙한 일이 밝혀졌을 때, 누가 더 데미지가 클지는 아주 잘 알고 있지.”
슬쩍, 냉소를 비치는 녀석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이 맞다.
문어다리로 원조교제를 하는 놈과, 동성 상대로 욕정하는 놈, 사회적인 데미지의 수준이 어느 쪽이 치명타인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이런 놈을 좋아하는 내가 한심하고 분하고, 그러고도 계속 좋아하는 게 억울했다.
난 녀석을 남겨두고 그대로 돌아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밥 같은 소리 하네. 네놈이 만들어 먹어.
설혹 만들어 주려고 한다 해도, 냉장고가 텅 비도록 싹싹 긁어먹어서 새로 음식을 만들 재료도 없다. 장을 보러 가야 하고, 지금은 녀석이 장 보기 당번인 주간이지만, 저 꼴을 봐서야 저놈이 장 보러 순순히 갈 리도 없다.
같잖은―아니, 사실은 꽤 효과적인―협박거리를 쥐고 흔들려고 하는 녀석에게 화가 불같이 타올라 같이 있기도 싫었다. 지금 잠깐,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는 녀석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일곱 시 남짓.
오늘은 일주일 전부터 약속이 잡혀 있었다.
선배네 거래 회사에 두 달 정도 계약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도무지 도움을 줄 줄 모르는 저 선배라는 인간이 멋대로 날 추천한 모양이다. 회사에 매여서 일하는 것 따위 정말 싫었지만 일단 면접 약속은 잡히고 말았으니 적당히 얼굴만 내밀고 와야겠다고 결론지었다.
그게 오늘 오전 열 시.
아직 시간은 세 시간이나 남았지만, 세 시간이면 적당히 때울 수 있다.
책 하나 들고 나가서 큰길가 카페에라도 들어가 모닝 세트를 먹으면서―맛없는 걸 먹으면 기분은 우울해지지만 이 집에 저놈과 둘이서 들어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탐독을 하면 시간이야 금방 갈 거다. 예전 대학생 때 가끔 기분이 우울할 때면 몇 번인가 해 본 일이다.
……나가자.
당분간은 저 녀석 얼굴,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다. 안 보면 멀어진다는 말도 있고 하니, 이러다가 금세 마음도 멀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아침 댓바람부터 나가는 건 매우 오랜만이었지만 어쨌건 나는 과히 유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면접 마친 후엔 국립 중앙도서관에라도 가서 박혀 있다 올까 싶다. 하지만 이 계절이면 거기, 오후 다섯 시였던가 여섯 시가 폐관일 텐데 그 이후엔 뭐하나.
왜 내가 멀쩡한 내 집 두고 다닐 데가 없어서 고민해야 하는지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때, 이글거리는 속에 기름을 뒤엎으려는 기세로 커다란 목소리가 방문을 두들겼다.
“밥 내놓으라니까!”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는데 노크도 없이 덜컥 문이 열렸다. 문 앞에 버티고 선 무례만땅인 그놈은, 옷을 갈아입고 있는 나를 보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쑥 물었다.
“어디 가.”
“……사람 만나러.”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 있어? ――라고 하고픈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일단 대답은 해 주었다.
순간 녀석의 눈빛이 스산하게 바뀌었다. 목소리까지 낮아진다.
“누구.”
이쯤 되면 나도 조금 전 하려다 삼킨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수밖에.
어이없는 눈으로 녀석을 쳐다보다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알아서 뭣하게.”
“누구 만나러 가냐고.”
대답 안 하면 목이라도 붙잡고 짤짤 흔들 얼굴을 하고서 물어온다.
“……회사.”
“회사?”
녀석의 표정이 희한해졌다.
“만날 집에서 컴만 붙들고 있으면 돈 들어오는 놈이 회사는 무슨 회사를 가?”
“2개월 계약직 면접.”
귀찮아서 대답을 하면서 나는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번복했다.
어쩌면 그 2개월이나마 회사를 다니는 게 나을지도.
그래, 갈 곳 없어 폐관이 다섯 시인지 여섯 시인지도 확실치 않은 국립 중앙도서관에 가자는 비참한 생각을 하느니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2개월 정도면 사람들과 어울리려 신경써야 할 일도 없을 거고.
“무슨 놈의 면접을 새벽부터 해? 아직 7시야, 7시.”
“……좀, ……산책이나 하다가 가려고.”
내가 생각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둘러대었다.
녀석은 잡아먹을 듯 나를 노려보다가 빙글 돌아서 거실로 나갔다.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는군,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옷을 마저 입고, 적당히 챙길 것 챙겨서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거기서 보았다.
녀석이 나갈 채비를 하며 옷을 챙겨 입고 있는 걸.
……이 아침부터 이 녀석, 수업이라도 있었던가. 아닌데. 분명 오늘은 오후 수업밖에 없을 건데.
내심 의아해하면서 현관 쪽으로 가는데, 뒤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야! 어딜 혼자 가! 기다려!”
“……?”
걸음을 멈추고 눈살을 찌푸리며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어느새 옷을 다 입은 녀석이 지갑과 폰만 들고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넌 어디 가는데.”
“네놈 감시하러 간다.”
“…………뭐?”
그 순간의 황당함과 어이없음이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멍하니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먼저 현관에 가서 신발을 구겨 신고 있던 녀석이 흘끔 돌아본다.
“안 가?!”
“네가 왜 가?!”
“……야, 변태 호모.”
녀석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쪽 입매만 슬쩍 올려 픽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네가 어딜 가서 어떤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 면접? 댓바람부터 면접 보는 회사가 세상 천지에 어딨어? 산책? 산책 같은 소리 한다. 남들 다 출근하고 학교 가는 이 시간에 어딜 산책할래? 공원 후미진 곳에 가서 멀거니 앉아 있을래? 웃기네. 보나마나 이상한 놈이나 만나러 가는 거겠지. 앞장서 보라고. 이번엔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한 번 보자.”
그리고 그놈의 말이 끝난 순간―아니, 뭐라고 더 말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지만 말을 떼기 직전에―내 서류 가방은 녀석의 머리를 그대로 후려갈겼다.
“이 새끼가, 사람 가만히 있었더니 어디다 대고 자꾸 변태 호모 거리면서 삽질하고 있어. 너랑 맞춰서 날뛰지 않아 줬더니 사람이 물로 보이냐? 나 포함해서 내 주위에 너보다 성깔머리 덜한 놈 없어. 적당히 짖어, 이 새끼야.”
육두문자는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써야만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써야만 하는 상황이란 건 TPO에 따른 게 아니다. 내 가엾은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잇새로 싸늘하게 한마디 한마디 내뱉던 나는, 적당히 짖어, 까지 했을 때, 녀석이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걸 보았다.
나는――나름대로 상황 판단을 잘 한다.
물론 내가 했던 말은 모두 사실로, 유유상종을 증명이라도 하는 건지 내 주위엔 그렇게 성질이 유한 인간이 없었다. 하나같이 성격이 은근히 뭣같다. 자주 상종을 안 해서 조용히 지내는 거지, 일단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인간들은 대체로 그렇다. 나도 사실,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다. 아마 눈앞의 이 야수의 형상을 하고 있는 놈보다 좋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딱 잘라 말해 완력은 이놈이 월등하게 우월하고,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반쯤 광기가 흐르는 저놈의 눈을 본 순간, 나는 다음 순간 내가 어떤 행동을 택해야 할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잡히면 결코 곱게 끝나진 않을 거다. 욕설에 구타까지 당한 저놈이 얌전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사람을 태워죽일 듯 새파란 불꽃을 내뿜는 저 눈이 그걸 확실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큰길로만 나가면 만사 오케이다. 설마 사람 많은 데서 저놈이 노상살인을 벌이진 않을 거고, 일단 사람 있는 곳으로만 가자.
심각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달려나선 나의 시도는, 유감스럽게도 공으로 돌아갔다.
다섯 발짝을 채 떼기도 전에 큼직한 손이 뒷덜미를 턱 잡았다.
“윤해신. 너 최근에 폭력이 많이 늘었다……? 이제 드디어 그 잘난 입으로 욕설까지 지껄이셔……? 같이 진지하게 얘기 좀 해 보자.”
“야, 이거 놓――.”
선뜩하게 소름이 끼쳤다.
늘상 고함만 지르던 녀석이 조용하게 울분을 안으로 담고 낮게 얘기하는 게, 생각보다 더욱 박력이 있었다.
녀석은 정말로 말 그대로 사람을 ‘질질 끌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부서질세라 현관문을 때려 닫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당황한 기색을 감출 사이도 없이 녀석은 거실로 들어가 날 휙 내던졌다. 균형 감각을 잃은 내 몸이 풀썩 쓰러진 건 소파 위였다.
반쯤 비뚤게 누워 눈살을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녀석이 옆에 앉았다. 가방 모서리에 되게 맞았는지 광대뼈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이놈이 거울을 안 봐서 다행이다. 거울 봤더라면 얼굴에 멍 만들어 놨다고 또 길길이 뛰었을 거다.
눈을 부라리며 아무 말도 않고 사람 얼굴을 노려만 보고 있는 녀석이 입을 열 기색이 보이지 않아, 마주 녀석을 노려보던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켜. 나가야 돼.”
“어딜. 누굴 만나려고.”
“누굴 만나면 왜!”
녀석이 손을 뻗더니 내 얼굴을 쥐었다. 손이 어찌나 큰지 얼굴 거의 반이 다 들어간다.
“……윤해신, 얘기해 볼까? 나 어제 잠도 못 잤어. 성질이 나서. 꼬박 밤 샜다고. 알아?”
듣는 동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네가 성질이 왜 나?”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성질을 내야 할 건 나다. 내 집에서 내가 나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있으니 스트레스는 내가 더 받아야 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러나 이놈은 적반하장, 주객전도를 완전히 꿰찰 모양인지 신경질이 나 죽겠다는 듯 내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너 그렇게――. 야, 너 안 되겠다. 오늘 나가지 마. 너 오늘 못 나가.”
“뭐?! 너――.”
놀라긴 놀랐나 보다.
나는 녀석에게 대고 삿대질을 하려다가 헛숨을 삼켜 사레들린 것처럼 미친 듯 기침을 했다. 폐가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코앞에 다가와 있던 녀석의 멱살을 쥐고 쿨룩쿨룩 연신 기침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데, 멈칫거리면서 등에 커다란 손이 와 닿았다. 천식하는 어린애 등이라도 쓸어 주는 것처럼 어색하게 슬슬 등을 쓸어내리는 체온이 옷감 너머로 전해져 온다.
문득 녀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이러고 있나 궁금해져, 기침이 계속 터져나오는 입을 한손으로 막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 맺힌 눈으로 녀석을 흘끔 보자 어색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던 놈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손도 금방 등에서 떨어진다. ……좀 아쉽다.
“……어쨌건, 나가지 마.”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러나 여전히 무뚝뚝하게 녀석이 중얼거릴 때 즈음, 나도 겨우 기침이 좀 멎어 가고 있었다. 나는 목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녀석에게 반박했다.
“열 시에 면접 있다니까. 이미 약속 잡혔어. 그런데 뭐. ――내가 나가건 말건 신경쓰지 말고 넌 학교나 제대로 가.”
녀석은 울컥한 듯 갑자기 눈을 번쩍 빛내며 내 멱살을 틀어쥐고 잡아당겼다.
“너 계속 이럴 거냐?”
코끝에 얼굴을 들이대니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번쩍이는 눈만이 언뜻언뜻 보였다.
기껏 기침 멎었더니 이제 목을 조르냐.
문득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멱살을 조여 잡히다 못해 거의 목이 졸리다시피 하는 나도 마찬가지다.
……어째……좀…….
눈이 제대로 마주치지도 않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숨결이 바로 전해질 정도다.
뜨거운 입김이 얼굴 위에 와 닿아 섬칫한 느낌이 든다.
녀석도 내가 움칫한 걸 느꼈는지 조금 얼굴을 뗐다. 이제 눈이 겨우 마주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하지만 녀석은 눈을 마주볼 생각 않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코……아니 입이다. 그 결에 나도 저도 모르게 녀석의 입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입술선이 뚜렷한, 상당히 섹시하다고도 볼 수 있을 만한 입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잠시 혀끝이 나와 입술을 살짝 핥는다. 꿀꺽,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얼굴이 다가오는 듯.
깨달은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어느 사이엔가 코끝이 맞닿고 있었다. 등골을 따라 차가운 물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가는 것 같았다.
난 저도 모르게 녀석의 멱살을 다급하게 콱 쥐면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 ……거기서 1센티만 더 오면 변태 호모라는 말 그대로 돌려줄 테다.”
딱.
녀석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나, 둘, 셋.
정확하게 3초의 시간이 지난 후, 갑자기 녀석이 나를 확 밀쳤다. 소파 위에 도로 나동그라진 나는, 테이블 모서리에 팔꿈치를 찧어 낮은 신음을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모서리에 찍히니 더럽게 아프다.
절로 눈물이 핑 돌 것 같아 이를 악물고, 팔꿈치를 문지르면서 도로 일어났다.
너 왜 그래――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던 나는, 1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곤 입을 도로 다물었다.
여지없는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나를 쳐다본다.
……변태 호모……는 아니겠지만, 이 녀석 좀 이상하다. 내가 스트레스 받는 만큼 녀석도 받았는지, 아무래도 이거 정신 불안정인 것 같다.
손잡고 나란히 병원이나 가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난 얼른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일어섰다. 동시에, 눈을 크게 뜬 채 이마에 ‘당황’이라고 떡하니 쓰고 있던 녀석이 금세 표정을 무뚝뚝하게 바꾸며 따라 일어섰다.
난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예상했던 대로 녀석이 뒤를 따른다. 조금 전과 다르다면, 말 한마디 없다는 게 다를까.
……좀 전의 그거(뭐라고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나도 놀랐지만 녀석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그러게 뜬금없는 짓을 왜 해.
난 구두를 신으며 흘끔 녀석을 곁눈질했다.
우울하고 부루퉁한 얼굴로 뭔가 생각에 잠겨 내 뒤를 따라오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휙 돌려 버린 건 내 쪽이었다.
어쩐지 매우 거북하다.
뭐라고 한마디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것조차 거북하게 느껴져서 결국 나는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녀석이 설마 정말 제가 말한 대로 날 감시하겠다고 따라다니지는 않을 거고, 적당한 선에 물러나겠지. 조용히 무시하고 있으면 어련히 안 그러려고.
그렇게 결론짓고, 복잡하고 알 수 없는 사념들이 수없이 소용돌이치는 머리를 붕붕 저었다.
……그렇게 결론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난 처절하게 깨달았다.
정말로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반동성애자 단체가 있어서,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파기시키려는 의향을 실행에 옮기고 있고, 이놈은 십중팔구 그 단체의 일원으로서 이번 타깃을 나로 잡은 거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이럴 수가 없었다.
‘……그놈 정신병 아니냐?’
설마 설마 하고 의심하고 있던 말이 재영이 입에서 나온 순간, 나는 탄식하고 말았다.
‘무슨 편집증 같은 거 있는 거, 아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힘없는 손으로 서너 번 두드리곤 입에 물고 있던 체온계를 뺐다.
아, 37도 5부. 아까보단 좀 내렸다. 새벽에 한때는 사경을 헤맬 정도로 열이 올랐었다.
“알 게 뭐야……. 아침부터 그 망할 놈이, 사람은 침대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열구덩이 속을 헤매고 있는데 계속 변태니 뭐니 지껄이고. ……제길, 그 입을 시원하게 쫙 찢어 줬으면 원이 없겠는데.”
귀에 대고 있는 전화까지 뜨끈뜨끈해서 기분 나쁘다. 그러던 참에 그 녀석을 떠올리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어제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하루종일이었다.
열 시에 면접 때문에 상대 회사로 찾아갔을 때, 회의실―에서 면접을 봤다―까지 막무가내로 따라오겠다는 녀석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서 건물 지하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대로, 면접이 끝나자마자 혼자 냉큼 돌아가 버려야 했는데,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녀석이 기다리는 곳으로 간 게 잘못이었다.
적당히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운 후, 나는 거의 납치당하다시피 해 녀석의 학교로 끌려갔다. 빼먹으면 안 되는 강의가 있어서 가야 한다면서, 나를 거기까지 끌고 갔다. 네 강의를 왜 내가 듣느냐고 백 번 말해도 헛수고였다.
‘변태 호모가 어디 가서 뭘 할지 어떻게 알아.’
그놈은 모든 일에 그 말을 무슨 절대적인 무기처럼 휘두르고 나섰다.
이 나이에 대학까지 끌려가 녀석이 듣는 강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오후 늦은 시각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종 팔꿈치를 단단히 틀어쥐고 있어, 기껏해야 화장실 갈 때 정도에나 녀석에게서 두 걸음 이상 벗어날 수 있었다.
웃긴 건 그렇게 나를 질질 끌고 제멋대로 다니면서 녀석은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기색이었다는 거다.
오전,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무뚝뚝하게 말 한마디 없이 노려만 보던 게 오후에 다시 집으로 들어설 때에는 도대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즐겁게 장까지 봐서 귀가했다.
내 기분은, 좋았을 리가 없다.
하루 동안 잡힌 팔을 빼려고 하거나 좀 놓으라고 말하거나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을 때마다 들은 ‘변태 호모’ 소리를 헤아리면 아마 수백 번은 될 거다.
그런 변태 호모를 왜 그렇게 달고 다니는 건데. 너 정말로, 이상한 반인권 단체에 가입한 거 아냐!?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그 말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그 말을 내 입으로 하면 정말로 스스로를 변태 호모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 결국 말은 못했다. 말했다시피, 변태는 맞을지언정 호모는 아니다, 난. ……요즘에 와선 그 정체성도 조금 미심쩍어지긴 했지만.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아주 조금은 좋았다. 아주 조금은.
생각해 보니 집 밖에서 함께 다닌 적은 장 보러 갈 때 외에는 거의 없었다. 더욱이 녀석의 학교생활까지 곁눈으로나마 구경할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팔꿈치를 쥐고 신나게 학교 안을 활보하는 녀석의 모습을 지척에서 보면서, 녀석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큼 나도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는 것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녀석의 친구라는 놈들과도 마주쳐 인사 겸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그런 끝엔 꼭 ‘변태 호모’ 소리를 또 듣고 기분이 나빠지는 거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의 반복이 수없이 거듭되었다.
종국에는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평소의 수백 배는 될 법한 감정 소모로 피로에 지쳐 나가떨어질 지경이었다.
오후, 흐느적거리면서 겨우 집에 들어와 옷도 안 갈아입고 침대에 풀썩 쓰러졌을 때부터 기미가 보였다. 열이 끓어오를 기미가.
저녁이 되어 영란 씨인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돈줄 중 한 명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저녁 약속을 잡는 녀석의 대화를 곁귀로 들으며, 나는 몸속에 번져 가는 불안감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설마 여자―그것도 돈줄―를 만나러 나가는데, 거기까지 달고 나가진 않겠지.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녀석은 고민스러운 눈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이, 나 나갈 거니까 너도 나갈 채비해.’
‘……. 너 설마, 돈줄 만나러 나가는데 외간남자 달고 가려고……?’
‘아니면 너, 얌전히 집에 있을 거냐?’
역시나 녀석도 여자 만나러 가는데 다른 놈 데리고 갈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는지, 미심쩍게 물어본다.
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갈 기운도 없다. 이미 이마는 뜨끈뜨끈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좀체 녀석은 내키지 않는지 약속 시간이 다가오도록 왔다갔다거리더니, 결국은 몇 번이나 얌전히 집 안에만 있으라고 다짐―이라고 쓰고 윽박이라고 읽어야 한다―을 하고는 서둘러 집에서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겨우 아침부터 줄곧 휘둘려 끌려 다닌 피로에서 벗어나 홀로 침대에서 조용히 뻗을 수 있었다. 씻지도 않고 옷도 안 갈아입었지만 그대로 그냥 푹 잠 속에 빠져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저놈은 역시 내 행복은 끝끝내 방해를 해야만 할 모양인지, 나가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부터 계속 전화를 해 대었다. 잠도 못 자게 행패를 부린 거다.
조금 잠들 만하면 전화를 하고, 다시 잠들 만하면 또 전화를 해서 번번이 사람을 깨우는 그 작태에 결국은 잠결에도 화가 치밀어, 여섯 번째부터인가는 아예 전화 전원을 끄고 침대 밑으로 던져 놓았다.
그리고 겨우 나는 한숨을 쉬며 방해 없는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고 생각했지만, 한 시간도 안 되어 집까지 달려온 이놈이 왜 전화 껐냐고 꽥꽥거리는 걸 자다 깨어서 들어야만 하는 내 심정은,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이놈이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 먹었다. 혹은 그 의문의 단체―저놈이 가입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가 사람 하나 아주 잘 길들여 놓은 거든가.
그렇게나 시달렸으니, 멀쩡하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아니 멀쩡하고 건강한 인간도 그 정도로 시달리면 결코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다.
열이 펄펄 끓어서 사람이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까 저도 조금 양심은 있었는지 아침에는 별 말없이 어설프게 흰죽을 끓여다 주곤 묵묵히 학교에 갔다. 그러면서도 꼭 한마디 던지는 건 잊지 않았다.
‘어이, 변태 호모. ……그 몸을 해 갖고 어디 나갈 생각 꿈에도 하지 말고 얌전히 푹 잠이나 자고 있어. 올 때 제대로 된 죽 사다줄 테니까. ……잣죽이었지? 너 좋아하는 거.’
‘……전복죽. 오늘은 전복죽이 좋아.’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중얼거리자, 녀석은 어이없다는 듯 날 보다가 픽 웃고는 알았다며 손을 저었다.
아,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저놈, 또 변태 호모라고 했지. 화를 내야 할 텐데도 머리가 멍해서 생각도 거기까지 안 미쳤다.
녀석이 문 닫고 나가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멍한 눈을 깜빡거리다가 머리맡의 체온계를 습관적으로 물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어제부터의 경험이 있는 만치,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또 그놈이 전화질을 하는 건가.
“……여보세요.”
체온계를 입에 문 채, 내키지 않는다는 게 확연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식사 중이야?’
아, 재영이다.
“아냐, 체온계 물고 있어서 그래. 열이 좀 나서.”
‘열. ――하아, 스트레스성 발열?’
“응, 스트레스성.”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열로 인해 몽롱했던 정신이 천천히 궤도를 찾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그저께부터 줄곧 제일 많이 들었던 단어, 변태 호모.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에도 들었다. 열 때문에 기진맥진해서 늘어져 있는 사람을 붙잡고 욕이나 하고 나갔다, 그놈. 그것도, 그 열의 원인을 만든 장본인인 주제에.
뜨끈하게 온몸을 잠식하고 있는 열이 갑자기 몇 도는 더 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든 내가, 전화를 싫어하는 재영이를 붙잡고 어제의 그놈의 횡포를 풀어 놓은 것도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닐 거다.
사람을 종일 내처 끌고 다니고, 전화로 감시하고, 꼬박꼬박 욕까지 하는 데야 당할 수가 없다.
체온계를 입에 문 불편한 상황에서도 분한 심경을 토로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영이가 불쑥 한 말이 그거였다. 그놈 정신병 아니냐, 라는.
“재영아, 정말 이상 성애자 탄압 단체라도 있는 거 아냐?”
‘그야 있기야 하겠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거 공공연하게 활동했다간 인권 문제로 돌 맞아.’
“……나, 적게 잡아도 백 번은 들은 것 같다, ‘변태 호모’.”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그래, 그 말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은 것도 같다. 사람을 경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모욕까지 퍼부으려는 의도를 확실하게 담고 있다. 내 평생, 그런 기본소양이 부족한 놈에게 모욕을 당하리라고는 결단코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생각하니 또 이가 갈렸다.
‘변태와 호모를 동일시하다니, 기초 지식부터 부족한 놈이잖아, 그거.’
재영이가 어떻게 들으면 재미있다는 듯, 또 달리 들으면 불쾌하다는 듯 묘한 어조로 말했다.
문득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재영이 녀석,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떠올랐다는 투로 하는 말이란 게 이거였다.
‘해신아, 그놈, 덮쳐 버리지 그래. 그놈도 ‘변태 호모’ 되게. 그럼 그 소리는 못할 거 아냐.’
하마터면 전화를 놓칠 뻔했다.
난 어이가 없어져 귀에서 폰을 떼고 한참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열도 없을 놈이 갑자기 웬 헛소리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보고도 나더러 덮치란 소리가 나오냐?”
그 전에, 분명 난 변태였을지언정 호모는 아니었는데 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걸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면 저 입버릇 더럽고 성격 뭣 같은 놈을 그래도 좋아한다고 이러고 있으니 이성애자라고 할 수도 없는 거겠지.
‘왜. 어쨌건 그놈이 그렇게 진저리치는 ‘변태 호모’로 만들어 버리면 되는 거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나 너희 집 들렀을 때 네 냉장고에 최음제 한 병 넣어두었다가 까먹고 그냥 왔는데, 아직 있나?’
이놈이 완전히 장난기가 한 바퀴 돌았는지, 빙글빙글 웃으면서 말했다.
“……그 엄지손가락만 한 갈색 병 말이지? 있어. 얼른 가져가.”
‘그거나 슬쩍 먹여서, 그 김에 그놈도 ‘변태 호모’ 만들어 봐. 아하하, 재미있겠다. ……아,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안 되겠군, 그 약은. 그건 안 쓰는 게 좋겠다. 내가 다른 약 준비해 줄 테니까, 한 번 해 보지 그래.’
“필요 없어.”
난 약간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이 녀석, 갑자기 웬 약 타령이야. 약 먹여 놓고 나더러 그놈을 덮치라구? ……아, 지금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었다. 역시 난 뼛골까지 호모가 될 가능성은 없는 게, 안을 바엔 귀여운 여자애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변태 호모’라. 말버릇이 몹시 고약한걸, 그래.’
두말하면 잔소리다.
난 앓는 소리 섞인 한숨을 쉬다가, 그만 이 화제를 돌리고 싶어 말을 바꾸었다.
“넌 좀 어때? 괜찮아?”
‘응, 아아. 기민이, 잡혔대.’
열에 들뜬 머리가 갑자기 확 깨는 것 같았다.
“잡혔어?!”
‘응, 전주에서, 여수 가는 버스 타려던 차에 풀려 있던 사람들한테 딱 걸렸다던데. ……오늘 아침에. 지금 서울로 오는 호송차 안에 있을걸. 도망이나 좀 잘 가지, 바보.’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이 녀석 속내를 모르겠다. 위험한 치들에게 애인이 붙잡혀서 걱정을 하는 건지, 엿 먹이고 달아난 놈 잡아서 후련해하는 건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덜컹, 하고 현관 열리는 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더니 정오 조금 안 되었다.
이 시간이라니, 저 녀석 강의 끝나고 눈썹이 휘날리게 뛰어온 모양이다.
“야, 그놈 왔다. 끊을게.”
전화하고 있는 거 보면 분명 그놈은 그 말 또 할 거다. 변태 호모, 누구랑 전화하고 있는 거냐고, 요렇게 노려보면서.
다급히 전화를 끝내고 막 종료 버튼을 누르는 순간, 방문이 열렸다.
“어이, 죽 사왔――. ……뭐야, 변태 호모. 누구랑 전화한 거야.”
역시 봤다. 눈도 좋은 놈.
이왕 보인 거, 난 태연하게 전화를 사이드 테이블에 놓으며 천천히 녀석을 돌아보았다.
“왔어? 일찍 왔네. 전복죽 사 왔지?”
아무렇지 않게 녀석의 말을 무시하며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아버지 귀가했을 때 아이스크림 사왔죠, 라며 매달리는 어린애처럼 해맑게 웃어 보이며.
녀석은 잠시 움칫하더니 입속으로 뭐라고 불평을 중얼중얼거리며 날 쳐다보다가, 다행히 그 이상은 더 말 안 했다.
“……침대에서 먹을 거야?”
“아니. 이불에 쏟으면 처치곤란이다. 부엌으로 갈게.”
만으로 따져 하루의 반이 넘도록 누워 있던 침대에서 겨우 몸을 떼고 일어섰다. 열이 가시지 않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도로 침대에 앉아 녀석에게 손짓했다. 눈치 빠르게도 조용히 옆으로 다가오는 녀석의 팔을 붙잡고 일어섰다.
또 뭐라뭐라 불평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녀석은 조용했다. 허리를 바싹 감아 부엌까지 부축을 해 주는 굵은 팔이 든든하기도 해 난 쓰게 웃었다.
심한 말만 안 하고 이렇게 입 다물고만 있으면 괜찮은 놈인데. ……아, 남의 일에 꼬치꼬치 간섭 안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흘끔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녀석이 눈동자만 돌려 날 쳐다보며, 무뚝뚝하게 뭐, 하고 한마디 내뱉는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화가 났었는데, 이렇게 아주 약간 다정한 척을 해 준다고 해서 마음이 풀려 버리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 건지. 아니면 이런 게 반한 쪽의 약점이란 건가.
녀석이 막무가내로 내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 아직 뜨거운 전복죽을 떠서 후후 불어 내 입가에 들이대었을 때엔 좀 많이 당혹스러웠지만, 어린애처럼 얌전히 받아먹으면서 내심 생각했다.
그래, 이놈도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 같이 지내던 사람이 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당황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실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 응, 생각보다 좋은 인간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녀석이 떠먹여 주는 전복죽 한 그릇을 깨끗이 다 비웠다. 열이 좀 내려가는 듯도 싶었다.
……라고 한순간이나마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난 그놈이 그대로만 가 주었더라도, 결코 비겁하게 약을 써서 녀석을 나락에 떨어뜨리려거나 하는 생각 따윈 절대 안 했을 거다.
‘남자는 우는 게 아니다.’
‘남자는 일생에 세 번만 울어야 한다.’
그 따위 말, 누가 했어.
보나마나 남존여비적 유교사상에 물든 영감들이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야기겠지만.
그 말이 옳다고는 요만치도 생각지 않고, 실제로 남자라고 해서 일생에 세 번만 우는 인간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을 거다.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건 세 번 울기도 전에 황천으로 뜬 가련한 어린 영혼이겠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거나.
나도 어릴 적엔 꽤나 울었고, 지금 와서 새삼스레 남자는 울면 안 돼, 라는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마음이 정화된다.
……라고는 해도, 지금만큼은 결코 울 수 없었다. 울고 싶은 마음이 눈물샘 속을 태운다 해도, 이놈을 눈앞에 두고는 결코 눈물 따위 보일 수 없었다.
“……왜, 또.”
피로에 잠긴 목소리로 지쳤다는 걸 확연히 드러내며 한숨 섞어 중얼거렸다.
녀석이 오늘도 저녁 약속이 있다며 집에서 나간 게 해질 무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부터 또 잤다. 아플 땐 자는 게 상책이다. 그 덕에 지금은 열도 거의 내린 것 같고.
하지만 도대체 왜, 멀쩡하게 조용히 잠 잘 자고 있다가 갑자기 저 불한당 같은 놈 손에 침대에서 질질 끌려 나와야 하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울고 싶다.
논문 발표를 일주일 앞두고, 백업조차 받지 않은 상태에서 무시무시한 양의 프로젝트 소스가 통째로 다 날아갔던, 대학원 시절의 그 끔찍스런 마지막 추억도 이처럼 괴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그때는 일정한 시한이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 고충이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는 처지다.
시계를 보니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다.
이 시간에 넉살좋게 들어왔으면 얌전히 씻고 잘 것이지 왜 조용히 잘 자는 사람을 두들겨 깨운 거냐는 의문이 새삼 떠올랐다.
피로로 늘어지는 눈꺼풀에 힘을 주고 녀석을 노려보자 녀석은 실로 어이없는 한마디를 대답이랍시고 던졌다.
“밥.”
“…………뭐?”
“밥이 없잖아. 얼른 차려 내.”
나는 멍하게 녀석을 한참 바라보았다.
밥? 지금 밥이라고 했나? 그, 먹는?
탁상시계로 새삼 눈을 돌렸다. 여전히 시계바늘은 자정 조금 넘은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고, 창밖이 시커먼 걸로 봐서는 정오가 아닌 자정인 게 확실하다.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1초도 되지 않아 씻은 듯 사라졌다.
오른손 엄지와 중지로 양 관자놀이를 세게 누르며, 난 녀석을 보지도 않고 부드럽게, 다정하게 말했다.
“그런데 너, 지금이 몇 시인지는 알고 있어?”
“그런 거 일일이 따져야 밥 먹을 수 있냐? 이놈의 집구석에 들어온 건 따지고 보면, 네놈이 나 밥 해먹이라고 그런 거잖아, 그럼 그거나 제대로 해 둬야 할 것 아냐.”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울고 싶었던 기분이 일시에 열화 같은 분노로 바뀌었다.
사람더러 어디까지 참으라는 거야. 마더 테레사라면 저세상에나 가서 찾아봐! 난 스스로가 힘겨움을 느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줄 정도의 정신적 여유 따위 없단 말이다!
난 베개를 냅다 놈에게 집어던지면서 (그 순간 손닿는 곳에 흉기가 될 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은 내 최고의 행운이자 불행이었다) 이를 갈았다.
“너 아픈 사람 붙잡고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 돈줄 잘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왔을 거 아냐?!”
녀석은 베개를 가볍게 쳐내면서 흥, 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손을 쭉 뻗어, 내 이마를 턱 짚었다.
“열도 다 내렸네, 뭐. 얼른 밥. ……뭘 노려봐, 변태 호모 주제에.”
억지로 사람을 단잠에서 두들겨 깨우고, 한다는 말이 저따위다.
난 부들부들 떨면서도, 녀석에게 끌려나오다시피 해 부엌에 섰다. 방안 따뜻한 공기 속에만 있다 나오니 서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조차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분노의 열이 온몸에 퍼졌다.
밥? 밥?! 그 잘난 입으로 한다는 소리가 밥?!?!
“더러운 변태 새끼가 하는 밥, 먹어 주겠다는 것만도 고마운 줄 알지 뭘 그러고 섰어. 아, 칼칼하게 김치볶음밥이 좋겠다.”
“김치볶음밥이면 네놈도 만들 수 있잖아!”
다섯 살짜리를 갖다 놓고 만들라고 해도 만들 수 있는 걸, 일부러 사람을 여기까지 끌고 나와서 주방에 세우는 저 심보가 예전 어느 때보다도 괘씸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말하는 것하곤, 더러워? 먹어 주겠다? 고마운 줄 알라고?
머리에서 핏기가 싹 가실 정도로 치를 떠는 그 순간, 아까 재영이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친 건 악마의 간교였는지도 모른다.
――예전에 나 너희 집 들렀을 때 네 냉장고에 최음제 한 병 넣어두었다가 까먹고 그냥 왔는데, 아직 있나? 그거나 슬쩍 먹여서, 그 김에 그놈도 ‘변태 호모’ 만들어 봐. 아하하, 재미있겠다.
아, 그래, 정말 재미있겠다, 재영아. 저 독날 같은 입으로 그렇게 변태변태 지껄이던 저놈이, 제가 그 처지가 되면 과연 뭐라고 할까.
분노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 되어서도 나는 그럭저럭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물론 약을 썼을 때 어떤 경로를 거쳐 저놈이 변태가 될 건지는 알고 있었다.
보통의 정상적인 남자에게 최음제를 먹여 봤자 눈이 뒤집혀서 여자를 찾거나 열심히 마스터베이션을 할 뿐, 일반적으로 옆에 서 있는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지는 않겠지.
요는, 저놈이 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닐 때에 내가 저놈을 덮쳐야 한다는 거다.
하루 전만 해도 생각지도 않았다. 생리적 혐오감――까지는 안 갔지만 절대 내키지 않았다. 지금도 물론 내키지 않는다. 아무리 내가 저놈을 좋아한다고 해도, 저 성깔머리를 깔고 덮칠 생각은 정말이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분노가 머리를 지배하는 상황에서도 나는 일말의 망설임을 품고 녀석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악마는 뒤에서 손쓰길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말을 벗어 거실 구석에다 아무렇게나 던지는 만행을 저지르면서 녀석이 흘끔 날 보았다. 그리고 밉살스레 이죽거린다.
“왜? 맘에 안 들어? 네 집이니까 네놈이 정리해야지.”
그때야 나는 내 집의 참상이 다시 한 번 재현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담배 냄새가 은은히 떠도는 공기, 곳곳에 어질러진 거실의 상황, 설거지거리는 쌓일 대로 쌓여서 이젠 깨끗한 접시가 없을 정도의 부엌.
결정타를 날린 건 물 마시러 정수기 있는 쪽으로 가려 내 뒤를 스치던 녀석의 작태였다.
변태 새끼, 라고 픽 웃으며 속삭이면서, 손등으로 엉덩이를 가볍게 치고 갔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말로 호모니 변태니 듣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도록 모욕감을 느꼈다.
어쩌면 여자가 치한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보다 강도는 더 높을 거다. 동성에게 그런 식으로 모욕당한다는 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애무하는 것도 아니고, 저건 의도부터 아예 조롱하려는 거다. 최악의 기분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주먹을 틀어쥐었다. 얼굴에 핏기마저 가셨다.
거기서, 나의 모든 상식적인 사고 회로는 끊어져 버렸다.
……그래, 너 오늘 한 번 죽어 봐라.
설령 내가 네놈을 덮치지는 않는다 해도, 네놈도 자위 한 번 해 보시지. 그럼 나도 두고두고 말해 줄 테다, ‘여자도 널린 주제에 여자와 자는 것보다 자위를 더 좋아하는 성적 미숙아’ 등등, 할 말이야 백 가지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난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통을 꺼내었다. 냉장고 문 구석에 옛날부터 박혀 있던 병도 슬쩍 손바닥에 감춰 꺼내었다.
사람은 늘 자신의 재앙을 스스로 부른다. 깊이 유념하고 살아가는 게 장수의 비결이다.
나중에 승리자의 웃음을 지으며 녀석에게 반드시 또박또박 말해 줘야겠다고 가슴 속에 다짐하며, 나는 묵묵히 요리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