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7)

11

한가로운 일요일이었다.

그러나 기분은 과히 좋지 않았다.

어제 하루 종일 일하느라 컴 자판을 두드리고 앉아 있었더니 어깨 근육이 굳어 뻐근하고 아팠다.

간간이 어깨를 두드리며 거실 바닥에 앉아 낙락하게 신문을 넘기고 있는데, 설거지를 마친 상헌이 녀석이 젖은 손을 아무렇게나 바지에 닦으면서 다가왔다.

옆에 우뚝 서 앉을 생각을 않고 있는 녀석을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녀석이 갑자기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야, 돈 좀 줘.”

난 순간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며 지그시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돈 좀 달라니까, 만 원만.”

설마 이 녀석이 내게 돈을 뜯어낼 생각은 아닐 거고, 뭐하자는 수작일까. 늘 지갑에 현금을 빼곡하게 채워 넣고 다니는 녀석이.

미심쩍은 눈으로 가만히 그 빈손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그제야 녀석이 머쓱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어제 지갑 쓰리당했어. 제기랄, 어느 틈에 빼갔는지.”

“소매치기.”

난 녀석의 말을 정정해 주면서, 테이블 위에 두었던 내 지갑으로 손을 뻗었다.

“카드는 다 막아 놨지?”

“응. 재발급 받으려고 해도 은행 안 하니까, 지금 당장 돈을 빼 쓸 수가 있어야지.”

“만 원으로 돼?”

“어. 내일 은행 가서 현금카드부터 일단 발급받을 거니까.”

그러면 처음부터 빌려 달라고 할 것이지, 달라고 하긴.

만 원 정도라면 그냥 줘도 되긴 하지만 잘 먹고 잘사는 놈에게 이유 없는 적선은 안 한다.

지폐를 집어 주며 내일 그대로 갚아, 라고 중얼거리자 녀석은 얻어가는 주제에, 쩨쩨하긴, 하고 타박을 한다.

도로 빼앗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면 정말 쩨쩨한 인간이 되어 버리니까 참고 넘어갔다.

“어디 나가게?”

“만 원 갖고 나가긴 어딜 나가.”

말도 참 이쁘게 하는 놈이다.

고이 노려보자 녀석이 그제야 또 덧붙였다.

“비디오라도 빌려 보려고.”

“지금 나갈 거야?”

“어, 요 앞 비디오집에 잠깐.”

“아, 그럼 갔다 오는 길에 파스 하나 사다 줘.”

파스? 하며 녀석이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다치지도 않은 놈이 파스는 왜, 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근육이 뭉쳤어. 어깨 아프다.”

“그거야 주물러서 풀면 되지, 파스는 뭘. 있어 봐, 얼른 갔다 와서 주물러 줄게.”

대수롭잖게 손을 휘휘 저으며 말한 그 녀석은 일어서 트레이닝복 차림 그대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건달 같은 폼으로 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난 혀를 찼다.

저 녀석에게 홀려 있는 여자들은 저런 모습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겠지. 눈에 보이는 대로, 잘 때에도 늘 깔끔하고 세련된 옷만 차려입고 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세상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근본적인 인식의 오류를 여기서 다시 한 번 느끼며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 하지만 정말 뻐근하다. 몰아쳐서 일을 하면 꼭 이렇다.

이래서 갑작스레 들어온 일은 맡기 싫은데.

어제도 또다시 ‘토끼 같은 자식들과 여우 같은 마누라’ 타령에 걸려서 꼼짝없이 일을 덮어써 버렸다.

하루 종일 일에 매여 버리면 몸이 뻐근한 것도 그렇고 피곤한 것도 그렇고, 다음날까지 후유증이 남아 그리 좋지 않다.

자리에 앉은 채로 목을 좌우로 까닥거리거나 어깨를 돌리거나 목덜미를 두드리거나 하고 있는데, 쏜살같이 갔다 왔는지 녀석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었음직한 비닐봉지가 달랑거리고 있다.

녀석은 내가 어깨를 주물주물하고 있는 걸 보더니 곧 이리로 다가와 비닐봉지를 소파 위에 던져두고 내 뒤에 앉았다.

“손 치워 봐. 그렇게 살살 주물러서야 어디 뭉친 근육 풀리겠냐.”

말하는 걸로 봐서는 어지간히도 세게 주무를 생각인가 보다.

악력이 꽤 되어 보이는데 이놈에게 어깨 주물러 달라는 건 그냥 관둘까, 생각하던 내 시선은 비닐봉지로 향했다.

“뭐 빌려왔어?”

“보려던 게 없더라구. 오랜만에 과거의 명작 탐방.”

“흐응? 뭔데?”

“나인 하프 위크.”

“…….”

순간적이나마 닥터 지바고 내지는 바람과 함께……같은 걸 떠올린 내가 바보였다.

하지만 뭐, 그 영화는 나도 그리 싫어하진 않았다. 내용 같은 건 다 떠나서, 거기에 나오는 킴 베이싱어가 유달리 매혹적이라, 그 영화는 나도 몇 번인가 봤다. 본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DVD도 가지고 있다.

“나 원판으로 가지고 있는데 왜 빌렸어, 아깝게.”

“뭐, 정말? 너 그런 소리 한마디도 안 했잖아.”

“형․님.”

아주, ‘너’가 입에 붙었다, 붙었어.

그러나 내 말은 아랑곳도 않고, 녀석은 어깨에 올렸던 손으로 갑자기 목을 조를 기세로 세게 붙잡고 절레절레 흔들었다.

“원판이라면 무삭제지. 야, 보자. 그걸로 보자.”

“원판이라 자막도 영어인데? 아, 불어 독어 선택 자막도 있었던 것 같다. 볼 수 있어?”

녀석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내 등을 텅텅 두드렸다.

“야, 영화는 마음으로 보는 거야, 마음으로! 어딨어?”

네 경우는 하반신으로 보는 거겠지.

한숨을 쉬며 손짓해 준 대로, 낮은 장식장 서랍을 뒤적여 DVD를 꺼낸 녀석은 희희낙락 플레이어에 넣어 돌린다.

벌써 20대도 중반을 넘어서는 주제에, 더욱이 여자라면 직업적으로 달고 사는 주제에 아직도 빨간 영화 보고 좋아하는 원숭이가 내 주위에 있을 줄은.

하지만 콩깍지가 씐 눈에는 그것마저 귀여워 보여 픽 웃고 말았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목덜미를 꾹꾹 눌러 문지르는데, 녀석이 옆으로 돌아와 다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돌아앉아 봐. ……아니다, 그럼 비디오 보는 게 불편하고, 그렇다고 널 앞에 앉히면 시야가 가리고. ……엎드려 봐.”

잠시 고민하던 녀석이 등을 밀며 재촉하는 바람에 난 tv 쪽으로 머리를 두고 쭉 뻗어 버렸다.

서늘한 바닥에 배를 깔고 눕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불평을 하기도 전에 묵직하다 못해 허리가 끊어질 정도의 체중이 몸 위에 얹혀, 헉, 하고 숨을 들이쉬고 말았다.

이 녀석이, 사람을 엎드리게 하더니 허리를 올라타고 앉았다.

“야, 너 네가 굉장히 가벼운 줄 알지……? 무거워, 내려가!”

키가 190에서 몇 센티미터 모자라고 무게는 80킬로그램을 넘어서는 놈에게 방석 대용으로 깔려서야 허리뼈가 남아날 리가 없다. 으지직하는 환청마저 귀에 들리는 듯싶었다.

헐떡거리며 띄엄띄엄 말하자 녀석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옆에 비스듬히 앉아서 마사지하는 거 힘들단 말이야.”

“허리 부서져! 차라리 하지 마!”

“어깨 결린다고 타령을 하던 놈이 목소리 하나는 쌩쌩하구만.”

녀석은 혀를 차더니 몸을 조금 아래쪽으로 비켰다. 그래봐야 엉덩이 위에 올라앉는 거였지만.

좀 낫지? 라고 하면서 녀석이 목 부근을 텁 잡았다.

확실히 살이 쿠션이 되어 주는 만큼 허리 위에 올라앉은 것보다는 훨씬 견딜 만하지만, 엉덩이라고 해도 배기는 건 마찬가지다.

역시 근육 무게가 지방보다 더 나간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군살도 없는 놈이 무겁기가 한량없다.

“아, 맞다. 아까 비디오 빌리러 가다가 생각났는데, 6만 원만 더 줘.”

“6만 원? 왜.”

“이번 주에 M.T.가는 거, 내일까지 돈 내야 되는데 혹시 몰라서.”

“무슨 M.T.가 그렇게 비싸?”

난 툴툴거리면서도, 나중에 지갑에서 꺼내 가,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이번 주에 3박 4일인가로 등반 M.T. 간다고 했었다.

오랜만에 집이 비겠군.

…….

그러니까, 미친 거 맞다.

좀 적적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어차피 엎드린 사람을 깔고 있으니까 내 얼굴이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팔베개를 하고 얼굴을 묻었다.

찬 바닥에 닿은 몸의 서늘함이 팔에 닿은 뺨과 이마에서 약간의 온기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따뜻한 체온이 어깨에서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힘차서 아플 정도로 어깨며 목덜미를 꽉꽉 주무르고 있다.

아직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지만 스포츠 마사지가 퍽이나 아프다던데, 그게 이런 느낌 아닐까.

마사지라고 하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편안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악스러운 손이 고문이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를 붙잡고 비트는 것 같다.

이거 설마, 쌓인 원한을 이런 식으로 푸는 건 아니겠지.

“……아. ……야, 아퍼. 아! ―아, 아, 아!”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해, 좀 참고 있어 봐.”

녀석은 건방지게도 내 등덜미를 철썩 때리고는 일부러인 듯 더 세게 주물렀다.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 아파죽겠잖아!

입속으로 잔뜩 욕을 하면서도 아픈 가운데 뻐근한 게 풀리는 듯 시원한 느낌도 들어 아픔을 참고 그대로 있었다.

녀석은 습관적으로 어깨를 주물거리면서 시선은 tv 화면에 박아 넣고 있다. 나도 덩달아 한숨을 쉬며 tv를 보았다.

……아, 역시 오랜만에 다시 봐도 킴 베이싱어는 멋지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때는 나도 꽤 느껴 버려서, 보고 나서 화장실로 갔던 소싯적 기억도 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몇 번이나 본 탓인지 혹은 나이가 드는 만큼 성욕이 떨어지는 건지, 아아, 느낄 때의 얼굴이 정말 매력적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미키 루크 역시, 저 끈적한 연기라니 근사하다. 남자를 보고 흥분하는 취미는 없기에 아깝게도 젖혀 놓았지만.

하지만 엎드린 채로 고개를 들어 정면의 화면을 보려니 목이 아파, 다시 팔베개를 하고 엎드렸다.

사람 몸 위에 올라앉은 거한은 조금 전부터 기계적으로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tv 화면에 정신을 푹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 나오는 장면도 장면이다.

난 푹 웃으며 말했다.

“멋지지, 두 사람. 화면도 근사하게 잡혀서 꽤 좋아했어, 이거.”

녀석의 시선이 뒷덜미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보거나 말거나, 나른하게 잠이 쏟아져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아아, 편하다.

익숙해진 탓인지 이제 몸 위에 올라앉아 있는 무게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목덜미에서 어깨, 팔까지 힘주어 주무르는 커다란 손이 기분 좋은 휴식을 이끌어 준다.

“……하아……, 좋아…….”

절로 입에서는 만족스런 한숨이 새어나왔다.

순간, 잠깐 녀석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목줄기 바로 아래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른 채 딱 멈추니, 꾹 눌린 부분이 점차 아파왔다.

“……왜?”

고개를 반쯤 돌리며 약간 불평스레 중얼거리자 녀석이 도리질 쳤다.

“아니, 저어, 응, 너 자세 바르다.”

“뭐?”

“척추가 곧게 쭉 뻗었잖아. 앉는 거나 걷는 자세가 똑바르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는데, 등줄기에서 허리가, 봐.”

어째 조금 당황한 눈치처럼 느껴졌지만, 녀석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등 가운데를 짚어내렸다. 꼭꼭 힘줘 누르면서 내려가는 손가락의 감촉이 기분 좋아 난 또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렸다.

아아, 역시 기분 좋다.

난 다시금 살금살금 다가오는 잠기운에 몸을 맡기며 중얼거렸다.

“그럼 넌 뭐, 척추 휘었냐?”

“나야 매일 운동을 하니까 괜찮지만, 보통은 자세가 그리 좋은 놈이 요새 별로 없어서, 이렇게 똑바르게 곧은 놈이 오히려 적거든.”

큼직한 손이 등줄기에서 허리를 쓸어내린다.

어쩐지 서늘―하다고 할까 오싹하다고 할까, 그 비슷한 느낌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허리 근처에서 움직이는 손이 어째, 마사지라고 부르기엔 좀 미묘한 터치로 움직인다. 오히려 이건 더듬거리는 데에 가까운…….

“야, 정…….”

눈살을 찌푸리며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tv 화면에서 그야말로 멋들어진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목덜미가 선뜩해질 정도로 요염한 목소리가 내 말을 끊어 버렸다.

녀석의 손이 딱 멎었다.

넓은 손바닥으로 허리를 감싸쥔 채 조용히 움직임을 멈춰 버린 게, 아무래도 tv 화면으로 마음을 돌린 것 같긴 한데.

안 보이니 나야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이내 잠자코 다시 목덜미에서 어깨, 등줄기를 꾹꾹 누르면서 주물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편안하고 기분 좋기는 했지만, 한마디 말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만 공간을 채우고 있으니 좀 그렇긴 하다.

내 탓은 아닌데도 민망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고 팔에 이마를 파묻었다.

문득 생각이 든 거지만, 이렇게 기묘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마 상대가 이놈이기 때문이겠지.

어깨를 주무르는 것 정도야 고교 때나 대학 때, 가끔 서클 활동에 나갈 때면―등록만 해 놓았을 뿐 결석률 80% 정도의 기록을 보였지만―몸을 풀기 위해 서로 몸을 주물러 주곤 했었다. 사내놈 손에 자극을 받았던 건 맹세코 한 번도 없었다. 예전, 그래, 재영이 녀석 일하는 이태원 쪽에 갔다가 웬 술 취한 양키 놈이 다짜고짜로 사타구니에 손을 밀어넣었을 때엔, 그야말로 혐오감으로 소름이 끼쳐 토할 것 같았다. 아마 사타구니가 아니라 어깨에 손만 올렸어도 그리 좋은 느낌은 들지 않았겠지.

그게, 이 녀석 손은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게다가 묘한 자극까지 느껴져 안 좋은 방향으로 점점 불편해질 정도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만두고 싶지 않은 게, 단순히 마사지라는 의미에서 볼 때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뻐근한 어깨가 풀리고 등과 허리를 누르는 적당한 손가락의 압력이 찌뿌듯해 있던 몸을 시원하게 풀어 준다. 절로, 간간이 입에서 신음 소리 비슷한 한숨이 새어나올 정도다.

문득 꿀꺽, 하고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낸 건 분명 아니었다. 난 기분 좋은 한숨을 쉬기에도 바빴으니까.

…….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등뒤에 올라앉아 있는 놈이었다.

흘끔 시선을 들자 tv에선 킴 베이싱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미키 루크의 얼굴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빨간 영화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저기서는 연기를 잘 한 건지 화면을 잘 잡은 건지 확실히 색기가 있었다.

……라고는 해도.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조금 굳어 있는 손동작도 그렇고, 어색하게 비벼 대고 있는 하반신도 그렇고, 이 녀석, …―아무래도 저거 보고 느낀 모양이다. 녀석의 사타구니와 맞닿아 있는 엉덩이에 낯설고도 익숙한 감각이 전해진다. 천 몇 겹을 사이에 두었지만 여실히 알 수 있는, 묵직하게 맞닿아 오는 살덩어리의 감촉이란.

목에서 허리까지, 찬물을 주르륵 뿌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의 엉덩이 위에서 발정하지 마.

혀끝까지 비어져나온 그 말을 차마 입 밖에까지 못 끌어낸 건 혀가 뻣뻣하게 굳은 탓이었다.

분노와 난감함과 민망함이 뒤섞인 심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동안 나까지 천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돼, 이건 안 된다.

영화 보다가 흥분했다고 둘러댈 수야 있겠지만, 사내놈 둘이 엎치락거리다가 발정해 버리는 그 머쓱함은 어떻게 감당하라구.

내 머릿속의 그 난처하고 당황스런 상황을 녀석도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어쩌면 녀석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굳어 버린 걸 깨달았는지 녀석도 느릿하게 움직이던 손을 아예 멈추고 말았다.

얼마 안 있어 화면은 바뀌어 그리 낯뜨겁지 않은 장면이 나왔지만 여전히 녀석과 나는 굳은 채였다.

짧은 시간 동안 억겁의 무게만큼 고민하던 나는 태연한 척하며 그대로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면 엉덩이에 걸터앉아 있던 이놈, 뒤로 넘어가거나 비키거나 하겠지 라는 계산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내 어깨를 가볍게 잡은 그 녀석은 뒤로 넘어가지도 비키지도 않았다. 자세만 더 민망해졌을 뿐이다.

“…….”

“……야.”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목소리로 녀석이 귓가에 속삭였을 때, 나는 얼굴에 불이 붙어 버렸다.

“좀, 비키지……? 무거워.”

“너, 어깨 결린다며.”

“아……이제 괜찮으니까.”

녀석이 미적미적 비켰다. 난 녀석이 비키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수 한 잔 마시고 내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여러 모로 이롭겠다는 판단이 선 탓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나는 방에 들어가고 저는 비디오나 계속 보면 서로 좋을 걸, 꼭 불러 세운다.

“야.”

“……왜.”

평소보다 낮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전처럼 선뜩한 목소리는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난 돌아보지도 않고 부엌으로 걸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디 가.”

보면 모르냐, 부엌 가잖아.

난 그제야 조용히, 최대한 싸늘한 눈빛으로 보이길 기도하며 녀석을 돌아보았다.

녀석도 어딘가 못마땅한 눈으로, 사나운 얼굴을 하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그렇게 묵묵히 노려보고만 있던 그 이상한 침묵이 끊긴 건,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였다.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녀석에게서 난 소리는, ‘쿡’.

짤막한 소리였지만, 언뜻 보이는 입매가 경련하듯 비슬비슬 올라가는 것도 그렇고, 저 소리를 울음소리로 잘못 들을 리는 없다.

“뭐가 우스워.”

쌀쌀맞게 말하자, 녀석이 이내 소리 내어 웃으면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전에 욕실에서 부닥쳤을 때도 생각했는데, 너 포커페이스인 척하면서, 당황하면 의외로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거 알고 있냐?”

“뭐?”

“거, 거울 봐라, 으흐흐.”

정말 거울 보기 싫었다.

난 조용히 녀석을 노려보다가 내 방으로 서걱서걱 걸어갔다.

물 안 마셔? 라고 뒤에서 중얼거리는 녀석을 문 안에 들어서서야 휙 돌아보며 서슬 퍼렇게 한마디 한마디 말했다.

“너야말로 사람더러 혼자 성욕 처리하니 뭐니 했지만, 요즘 욕구를 영 못 푼 거 아냐? 무겁디무거운 놈이 엉덩이 위에 올라앉아서 벌떡 세우고 있는데 네놈 같으면 기분 좋게 허허거리고 있을 수 있겠어? ―그런 취미 있는 거 아니겠지, 설마.”

녀석의 표정이 금세 굳었다.

정곡이라도 찔린 건지, 시퍼런 눈을 하고서 날 쳐다보는 게 여차하다간 사람 치겠다.

“취미는 무슨 취미! 네놈은 혀 안에 칼날을 키우냐?! 영화 보다가 진한 장면이 나오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네놈이야말로 뭘 얼굴을 벌겋게 해선 당황하고 있어!”

난 지그시 이를 사리물었다.

이놈에게는 수없이 많은 단점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저거다. 시작을 제가 해 놓고는 뒤에 가선 마치 상대가 잘못한 것처럼 목청 높여 고함지르는 것.

난 주름진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너, M.T. 언제 간다고?”

“……? 수요일.”

“아아, 그래. 빨리 가. 얼른 가 버려. 가서 오지 마.”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하곤 문을 닫아 버렸다.

닫힌 문 너머로 녀석이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안 갈 줄 아냐, 이 따위 집 얼른 나가 버리고 말 테다, 저놈이랑 같은 집에 살다가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따위의 말들이었다.

마지막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처음부터 저놈이랑 같이 사는 게 아니었다.

설마 이렇게, 외부적 고민이 아닌 내부적 고민으로 사경을 헤매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거 퍽이나 치명적이다.

난 문에 기대어 스르륵 주저앉으며 소리 없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스스로의 몸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건 처음이다.

저놈의 말버릇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다.

아까 엉덩이에 와 닿았던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끈해진다.

저 녀석 기분 상했을 텐데 내가 괜한 말을 했나 후회스런 맘이 든다.

조금 전, 소리 내어 웃었을 때의 목소리며 표정 같은 걸 떠올리면 낙락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이쯤 가면 정신분열이다.

“누가 나 좀 어떻게 해 줘…….”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처럼 혼잣말을 속삭이다가, 문득 정면의 옷장에 붙어 있는 거울에 시선이 갔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싸 쥐고 끙끙거리고 있는, 실로 진귀한 모습의 나 자신이 그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

점차 약해지는 나른한 진동이 몸속에 전해져, 여운에 젖은 노곤한 정신이 졸음으로 덮여 갔다.

처음 써 보는 모델이었지만 애용하는 핑키 2호와는 또 다른 맛으로 맛깔스럽다. 처음에 약한 진동으로 시작해서 점차 강해져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허리가 욱신거릴 정도지만, 차차 진동이 잦아들어 거의 끝날 무렵에는 꽤 마음에 드는 안온한 떨림을 전해 준다. 이 모델은 그럭저럭 성공이다.

오늘 아침 갑자기 소포가 왔을 때는 뭔가 싶었다. 발신자는 김재영.

오지랖이 넓은 성격을 가진 놈답게 이유 없이 남에게 퍼주는 짓도 잘해 가끔 이렇게 뜬금없이 물건을 보내곤 하지만, 한마디 언질도 없이 이렇게 물건이 덜렁 날아오는 건 드물다.

자그마하고 가벼운 상자.

……뭔지 짐작이 갈 것도 같았다.

포장을 뜯어 보자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진갈색의 로터가 하나 고이 들어앉아 있었다. 아마도 최근에 새로 나온 모델이리라.

로터의 새 모델이 나오면 이 녀석은 이렇게 가끔 나한테 보내어, 써 보고 감상을 들려달라고 하곤 했다. 이태원 쪽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손님들이 간혹 물어보면 유효적절한 대답을 들려줄 수 있도록 자료를 모으는 거란다.

나야 그런 모니터링을 해 줘서 나쁠 것도 없고, 공짜로 로터 하나 생기는 거니까 기꺼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에 한해선, 하마터면 곤란할 뻔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저 상헌이 녀석은 내 앞으로 온 물건을 뜯어보는 짓은 하지 않지만 뭔가 택배나 소포 따위가 오기라도 하면 비상히 관심을 가져, 뭐냐고 계속 캐어묻는 것이다. 만에 하나 녀석이 있을 때에 소포가 오기라도 했더라면 정말 곤란했을 거다.

다행히도 녀석은 어제 아침, 등반 서클의 M.T.를 떠나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래, 어제, 수요일.

요전 비디오 때의 일로 틀어진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 가, 어제 아침까지 줄곧 냉전이 이어졌다.

아니, 냉전이라고 하기도 뭣하다.

어차피 녀석과 나는 애초부터 활동시간대가 그리 겹치지 않아, 식사 시간이나 밤에 잠깐씩 외에는 같은 집에 있어도 거의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사이 역시 돈독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니, 마주쳐도 말 한마디 안 하고 싸늘한 시선만 주고받는 것도 비단 새삼스러울 건 없다.

하지만, 역시 근래 들어 요 얼마간 내가 너무 마음을 풀었던 탓인지, 혹은 일상처럼 되어 버린 저 녀석의 성질에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새삼 위가 지끈거리고 미열이 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덕분에 미간에선 주름이 떠날 날이 없었다.

어제, 그래도 등반하러 떠난다는 놈인데 제대로 챙겨 먹여 보내야지 싶어 아침부터 고단백 식단으로 차렸다.

조깅 갔다 온 녀석은 샤워를 하고는 식탁으로 와 무뚝뚝한 얼굴로 앉았다.

짐은 이미 전날 다 싸 두었고 이제 슬슬 다가오는 약속 시간에 늦지 않도록 출발하면 그뿐이었다.

이젠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녀석이 밥을 먹는 동안 난 그 앞의 의자에 앉아 조간신문을 넘겼다.

밥이 한 두어 숟갈 정도 남았을 때, 녀석이 갑자기 불쑥 말했다.

‘나, 토요일날 돌아온다.’

‘……?’

시선을 들어 녀석을 보았다. 여전히 쌀쌀맞은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단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말해 둘 생각인가 보다.

‘아아, 그래, 토요일.’

별 흥미 없이 대답하고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녀석이 탁 소리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사이에 남은 두 숟갈, 다 먹은 모양이다.

‘나, 온다고, 토요일!’

‘……? 그래, 와.’

시비라도 거는 어조로 거칠게 내뱉는 녀석에게, 나는 이놈이 뭘 잘못 먹어 아침부터 이러나 하는 시선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다.

토요일에 무슨 일이라도 있던가. 특별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녀석에게 약속이 있었다거나, 정희 씨가 온다는 말도 못 들었다.

그런데 조금 전부터 왜 저렇게 거듭 말을 하는 건지.

미심쩍게 보고 있으려니, 녀석은 평소의 그 거만한 표정으로 흥, 하며 다시금 말했다.

‘말했다. 돌아올 거라고.’

난 그제야 신문에서 완전히 시선을 접어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검지를 들어올려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약간 고개를 기웃해 뚫어져라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녀석이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이거 혹시, 중점이 되는 단어가, 토요일이 아니라 돌아온다, 라는 건가.

……그게 뭐?

라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그 직전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천천히 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눈만 깜빡이며 녀석을 바라보고만 있던 내 얼굴에 서서히 웃음기가 떠올랐다. 녀석이 그걸 보곤 더더욱 눈살을 찌푸린다.

―이 따위 집, 얼른 나가 버리고 말겠다며.

그 말도 하고 싶었지만, 입 다물고 말았다.

이거 아무래도 녀석 나름의 화해 신청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둡고 황량한 기분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시에 기분이 나아졌다.

쿡쿡 웃고 있으려니 녀석은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불쾌감이 뚝뚝 흘러넘치는 목소리로 한마디 던졌다.

‘왜 웃어.’

난 그제야 녀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웃음기가 떠오른 눈으로 녀석을 흘끔 보니, 머쓱한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아니, ―아냐. 잘 다녀와, 조심해서.’

손을 두어 번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의 표정도 조금 누그러진다.

나쁘지 않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았다.

분명 아침까지 미열이 끊이지 않아 피로하고 짜증스러웠는데도, 얼른 이 녀석을 보내어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도, 일시에 기분이 바뀐다.

설거지를 하고 찬거리를 냉장고에 넣어둔 후에야 시계를 보며 나설 채비를 서두르는 녀석을 이것저것 거들어 주며 나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녀석도, 즐거운 여행을 앞둔 탓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웬만한 어린애 하나쯤은 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큼직한 가방을 가볍게 걸머메고 현관을 나서는 녀석이, 날 보곤 갔다 올게, 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몸조심해서 갔다 와, 라고 대답해 줬다.

녀석이 머쓱한 얼굴로 나가고, 이윽고 집에는 홀로 있는 정적만이 남았다.

혼자 살았던 게 몇 년인데 고작 근래 얼마간 녀석과 둘이 살았다고, 일순이지만 조금 적적한 기분이 들었다.

……아아, 정말, 알겠다. 나, 저 녀석 정말로 좋아하나 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에 내 기분이 이렇게까지 휘둘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기묘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렇게 깨끗하게 인정해 버린다고 해서 무엇 하나 해결되는 일은 없다. 마음만 조금 더 무거워질 뿐.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머리를 붕붕 저었다.

기껏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신모델을 얻어 기분 좋은 쾌락에 젖어 있는데, 굳이 이럴 때에 어두운 생각을 해서 마음을 우울함에 담글 필요는 없겠지.

그래, 녀석도 며칠 집을 비우고 해서 모처럼 편한 기분으로 로터의 안락함을 맛보게 된 지금 말이다.

파블로프의 반사라고 해야 할까.

예전부터 늘 한가로울 때에 로터를 넣고 침대 속에서 쾌감을 충족스레 맛보고 나면 늘 그 기분 좋은 아련함에 감싸여 그대로 자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욕구를 충족시키면 자연스레 잠이 온다.

지금도 그렇다. 얼핏 잠이 쏟아졌다.

이번에도 최근 들어 줄곧 그렇듯, 절정을 맞는 순간은 당연한 것처럼 그 녀석의 얼굴을 떠올려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쾌감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부터 계속, 이다.

잠자리 상대에게 그 녀석은 아마도 이런 표정을 하겠지, 이런 목소리로 속삭이겠지, 이런 손길을 주겠지, 혀의 감촉은, 살갗의 감촉은 아마 이럴 거야.

멋대로 망상에 치달으면서 몸도 고양되어 가는 거다.

종래에 가서는, 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리 없는 녀석과의 행위를 터무니없이도 머릿속에 그리면서 정신없이 탐욕스럽게 쾌감의 탈출구를 찾는다.

마치 개구리가 서서히 익어 죽어가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이젠 절정에 달하고 난 후 이성을 되찾은 뒤에도, 예전처럼 그렇게 어이없고 당혹스러운 혐오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현실이 아닌 망상이라는 허무감이 덮쳐올 뿐.

깜빡, 깜빡, 졸음이 왔다.

아련하게 포근한 잠에 빠져들며 조금 슬퍼졌다.

짝사랑이라는 거, 꽤 슬픈 거구나. 여태껏 나에게 고백하고 거절당했던 몇몇 사람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미안한 일을 해 버렸구나.

질척하게 젖은 속옷을 처리하고 몸을 씻고 로터도 꺼내야 할 텐데,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잠결 앞에선 무엇도 소용없었다.

한숨 잔 다음에.

……응, 지금 자면 어쩌면 그 녀석 꿈을 꿀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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