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7)

10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소개 자리는 그리 만족스런 결과를 내지 못했다.

소개받으러 나간 자리에서 자신의 이상에 딱 맞아떨어지는 인간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았다.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할 이상을 그려낸 듯이 뽑아낸 인간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률부터가 기적에 가까운데, 그런 인간을 의도적으로 기획한 자리에서 만나리라는 건, 기대하는 쪽이 무리다.

물론 그건 상대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상대는 내 맘에 안 들지만 나는 상대의 이상에 딱 들어맞는 인간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가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인간이 있다).

아침,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퉁퉁 부은 얼굴로 밥을 꾸역꾸역 먹고 나서도 미적거리다가, 학교 안 가냐고 한 소리 듣고 나서야 상헌이 녀석은 꾸물꾸물 집에서 나섰다.

그 뒤에야 재영이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그날 바로 만날 수 있긴 한데 그 상대가 저녁엔 볼일이 있다고, 다른 날 만나거나 혹은 바로 점심 때 만날 수 없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재영이는 멋대로 점심 때로 약속을 잡아 버렸다.

“왜 그랬어. 그냥 다른 날로 하지.”

사실 내키는 마음보다는 안 내키는 마음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내가 떨떠름하게 말하자 재영이가 으응, 하면서 곤란한 듯 말했다.

“나도 요즘 시간이 좀 빡빡해서 내기가 힘들거든.”

아, 그러고 보니 이놈 요즘 남의 빚 갚느라 바빴지.

입맛이 조금 떫었지만 내 입으로 꺼낸 일이니 지금 와서 싫다고 할 수도 없고, 이성을 굴려서 생각할 때 역시 애인을 하나 만드는 게 앞으로의 원만한 생활을 위해서도 나으리라 싶어, 그냥 나가기로 했다.

정오가 되기 조금 전, 적당한 차림으로―평소보다 거울을 한 번 정도 더 보고―집에서 나서는데, 마침 집에 들어오는 참이던 상헌이 녀석과 딱 마주쳤다.

“…….”

“…….”

나도 그 녀석도, 서로를 꽤 희한맞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왜 벌써 와. 너 분명히 오후 강의도 있지 않았어, 오늘?”

“저녁 약속인 녀석이 왜 벌써 나가고 있어.”

거의 동시에 말을 꺼내고, 다시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끝에 녀석이 못마땅하게 먼저 입을 뗐다.

“그냥 기분 안 내켜서 쨌어.”

나는 당장 도끼눈을 떴다.

“너, 너네 학교 수업료를 시간당으로 나누면 얼만지 알기나 해? 학기당 강의 시수로 수업료를 대충 나눠도 시간당 반올림해서 만원이야, 만원.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그 돈이?”

학교마다, 학기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현재 저 녀석의 강의 시간과 수업료로 계산하면 그렇게 나온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다른 말이긴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세금 및 학비로 나가는 돈이 무진장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에는, 학교에서 주는 돈은 뭐든지 받아먹고 나라에서 받아낼 수 있는 돈은 어떻게건 받아내겠다는 일념만으로 꼬박 장학금 수여 혜택을 받은 건 물론 국비 장학생 시험까지 통과했었다(늙어서 위험한 다리로 세금 빼돌릴 생각 말고 공(公)돈을 합법적으로 긁어낼 수 있는 다채로운 방안들을 모색하는 게 인생의 득이다).

그래서 나는 피 같은 돈을 내고서 수업을 땡땡이쳤다는 소리를 들으면 내 일이 아니라도 화가 난다.

녀석은 내 눈치가 사나운 걸 금방 알아차렸는지, 잠깐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우물쭈물 덧붙였다.

“……어차피 더 이상은 빼먹으면 출석일수 부족으로 낙제라서 더 빼먹지도 못해. ―너야말로, 오늘 소개팅 저녁이라며. 왜 벌써 나가.”

다소 초조한 듯 말을 돌리는 녀석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말 돌리지 말고 수업이나 제대로 나가라고 쐐기를 박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는 얌전히 녀석의 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약속이 그렇게 잡혔어. 그렇게 늦게 들어오진 않을 거야.”

“어, ―어딘데.”

덥석, 녀석이 내 어깨를 잡더니 물었다.

아플 정도로 세게 쥔 어깨를 흘끔 보고, 난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의 손을 떼어냈다.

“어디면 뭐하게. ……할 일 없으면 도로 학교 가서 수업이나 들어.”

“아, 어딘데.”

“어디면 왜.”

녀석은 울컥 짜증이 솟는 듯 일순 눈을 사납게 빛냈다. 그러더니 거칠게 소리쳤다.

“너 들어올 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해서 사 오라고 하려 그런다! 어딘지를 알아야 대충 시간 가늠하고, 네놈이 아직 거기 있을지 오는 중일지 짐작이라도 할 것 아냐!”

“내가 무슨, 네 심부름꾼인 줄 알아?!”

어이가 없어 매몰차게 소리치자 녀석이 어우, 하며 이를 갈았다.

약속시간까지 그리 넉넉하게 남은 것도 아니고, 집 앞에서 실랑이하는 것도 웃기고 해서, 난 대충 녀석을 집안으로 밀어넣으며 짧게 대답했다.

“홍대 근처야. 그리 멀지 않으니까 먹고 싶은 거 생기면 나 돌아오기 전에 얼른 전화해.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전화하지 말고.”

“―흐응. 홍대.”

녀석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척 만 척하고 나는 큰길가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약속 장소를 향해 떠나는 순간 문득 예감이 들었다. 아―주 재수없는.

……먹을 거? 먹을 거를 사 오라고 한다고? 요즘은 직접 만든 거 아니면 입에 안 맞는다고, 배부른 소리를 지껄이면서 늘상 이거 만들어 달라 저거 만들어 달라 타령을 하는 놈이?

어쩐지 매우 미심쩍고 마뜩찮은 기분이 들어 찝찝해하고 있는데, 말마따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홍대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기분 탓이다, 기분 탓.

저놈을 떠올려서 여태껏 상쾌한 기분이 드는 결론을 지은 게 몇 번이나 된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재영이와 만날 때면 으레 그렇듯 녀석이 일하는 가게로 갔다. 평소라면 낮에는 영업을 하지 않아 굳게 문이 잠겨 있을 가게는 재영이 하나만 달랑 들어앉은 채 열려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을 걸자 녀석은 읽던 책에서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자마자 웃음 지으며 당장 본론부터 꺼내었다.

“야아, 왔어? 아직 그놈 오려면 시간도 남았는데, 얘기나 좀 들어 보자.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사람을 소개시켜 달란 소릴 다 한 거야, 윤해신이.”

난 눈살을 찌푸리며 말없이 녀석의 앞에 앉았다.

“……그거 하는데, 그 빌어먹을 놈한테 걸렸어.”

잠깐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끝에 이 눈치 빠른 녀석은 ‘그거’가 마스터베이션이며 ‘빌어먹을 놈’이라는 게 현재의 동거인이라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단박에 녀석의 표정 위로 흥미진진이라는 네 글자가 떠오른다.

“보아하니 들킨 것도 적정수위에서 그친 것 같고……, 엉덩이 안에 넣고 있는 것까지 들킨 건 아니지?”

“아냐!”

“응, 아님 됐고. 뭘 새삼스레 흥분을 하고 있어. 그런데, 그거랑 애인 만드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 녀석이, 그 뒤로 사람 얼굴을 볼 때마다 ‘변변찮은 애인도 없어서 혼자 딸이나 치는 놈’이라고 비아냥거리잖아.”

말하려니 또 그놈의 작태가 떠오른다.

표정 위로 불쾌감이 선연하게 떠올랐는지 재영이 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가슴 속에 번져 올라와, 나는 입매를 찡그리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애인을 만드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슬슬 들기도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는데, 이놈은 어찌나 멋진 청력을 가졌는지 그걸 또 어떻게 알아들었나 보다. 왜, 하는 눈으로 빤히 날 쳐다본다.

난 지그시 녀석을 마주 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놈과의 인연도 참 오래되었다.

고교 때, 그래, 쓰레기 비우러 갔다가 울고 있는 녀석과 마주친 이후 몇 년이었는지. 이놈의 장난기 가득한 성격 때문에 머리끝까지 뿔 받은 적도 여러 번 있었고, 때로는 이놈을 당장 죽이지 않으면 내가 먼저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화가 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껏 이렇게 만나면서 친구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건 그런 것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겠지.

난 씁쓰레하게 웃었다.

“좀 민망하긴 한데, ……요즘, 그걸 할 때마다 꼭 막판에 가서는, ……그놈 얼굴이 떠오르거든. 그래선지, 최근엔 기분이 영 불안정하기도 하고.”

“……하아?”

“욕구불만인가 싶어서 말이지. 스테디한 상대가 생기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역시 암만 뭐라고 해도, 그놈을 상대로 그―끝까지 가는 건, 뒷맛이 씁쓸하잖아.”

사실, 재영이에겐 더 이상 못할 말이 없다. 오래 전, 로터를 어떻게 쓰는 건지도 제대로 몰라 끙끙거렸을 때에는 보다 못해 재영이 저놈이 직접 밀어넣어 주기도 했었다. 내 집을 사설 호텔로 사용하곤 했던 녀석의 적나라한 성교 현장을 그대로 봤던 적도 여러 번이다. 이쯤 가니, 서로 못 볼 것도 말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역시 말하는 게 꺼림칙했다.

성욕을 느끼는 대상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여태껏 개 원숭이 보듯 했던 정상헌이다.

민망하지 않을 수가 없어 살짝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재영이가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 말야…….”

머리를 긁적이며, 재영이가 미심쩍은 듯 입을 열었다.

“나, 아무래도 소개팅 잘못 시켜 주는 건 아닌가 싶다. 술 석 잔은 못 마실망정 뺨 석 대는 싫은데.”

“응? ……그 상대 남자, 그렇게 아니냐?”

얼핏 묻자, 재영이가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자식아, 너 말이야, 너. 마음에 담아 둔 인간이 있는 놈을 소개팅 시켜 주는 게 어딨어? ―아, 아무래도 취소해야겠다. 제길, 나중에 그놈한텐 밥이라도 사야겠네.”

“어, 잠깐만, 김재영.”

머리를 벅벅 긁으며 전화기를 집어 드는 녀석을 만류하며, 나도 멍한 얼굴을 했다. 김재영도 나를 희한쩍은 얼굴로 봤다.

내 표정이 어지간히도 우스웠는지, 녀석은 한동안 뭣 씹은 얼굴로 날 보다가 전화를 도로 내려놓았다.

“……해신아. 보통은, 성행위를 할 때 싫은 얼굴을 떠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어. 그야 물론 가끔 엄청나게 도도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얄미운 여자를 보고 이를 갈면서, 다리 아래 깔아 울리고 싶다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조차도 순수하게 밉다는 감정만으로 그런 건 아니라구. 게다가 너는 어떤 경우에건 정말 싫은 놈은 두고두고 씹는다기보단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스타일이잖아. ……너 말야…….”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면서 계면쩍은 듯 말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나도 서서히 뭣 씹은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아아, 알고 있다.

어느 모로 보나 짜증나고 건방지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저런―절대로 취향이 아님은 물론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했었던―놈이 요즘 들어 부쩍 귀여워지고 멋있어지고 다정해졌다고 느끼게 된 건, (대체로 어떤 사람을 변했다고 느꼈을 때 알고 보면 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관점이 변한 것일 경우가 많은 것처럼) 녀석이 변한 탓이 아니라 내 심경의 변화 때문이다.

어머니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마음.

……이라고 해 봐야, 세상 어느 어머니가 아들을 보며 xxx한 생각을 할까.

복잡한 생각이 가득 차 점점 무거워지는 머리가 조금씩 수그려졌다.

결론을 내면 낼수록 비참한 방향으로 치닫는 무거운 생각들 때문에 침통한 얼굴로 말없이 테이블을 내려다보는데, 재영이가 한숨을 쉬었다.

“야, 어쩌다 그렇게 됐냐.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며.”

“……그 말 한 건 내가 아니라 그놈.”

그래, 그것도, 나랑은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고 할 정도로 날 밉살스러워하는 녀석이다.

생각이 한 치 앞으로 나갈 때마다 가슴 속에 한 근 돌덩이가 쌓여 간다.

무거―운 분위기로 나와 재영이가 우울하게 앉아 있는데, 그때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내 전화다.

재영이는 받아 보라고 손짓하며 냉장고 쪽으로 갔다. 전화를 받으면서 녀석의 하는 양을 보아하니 깔루아 밀크라도 만들어 줄 모양이다.

“여보세요.”

‘어떤 여자야?’

인사도 뭣도 없이 난데없이 날아오는 한마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퍽이나 애달픈 심정으로 떠올리고 있던 녀석인데도,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심통이 나는 건 무슨 심경일까.

“데이트 중이니까 바빠, 끊어.”

‘야, 야, 잠깐, 거기 어디―.’

탁.

매몰차게 덮어 버리자, 재영이가 흘끔 이쪽을 보았다. 퍽이나 기묘한 표정이다.

“혹시 동생?”

“동생 아니랬잖아…….”

갑자기 모든 것이 다 한심해지고 어이없어져, 화낼 힘도 빠져서 중얼거리자 재영이는 점점 더 기묘한 표정을 한다.

어렵잖게 깔루아 밀크를 만들어 내오면서―그야 깔루아에 우유를 탈 뿐인데 무슨 시간이 걸리겠냐만―녀석이 고개를 기웃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전화래냐, 그놈은.”

“알 게 뭐야. 아까도, 어디서 만나냐고 꼬치꼬치 묻더니만.”

“―오늘 소개받는 자리에 나간다고 말했어?”

“어제 너랑 전화할 때 옆에 있었어. 그 녀석이 하도 갈궈 대서 열받은 김에 전화한 거였거든.”

“……어째 나 점점 더 소개시킬 맘이 사라지고 있다.”

이번엔 또 왜, 라고 말하려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난 진동으로 바꾸고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받나 봐라.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가게에 들어서는 폼도 그렇고, 재영이 기색도 그렇고, 아무래도 지금 들어오고 있는 저 남자가 오늘 나와 만나기로 한 그 사람인 모양이다.

적당한 키에 적당한 체격에 적당히 호감 가는 얼굴이다.

모든 게 알맞게 중상.

성격도 인상과 다를 것 없이 적당히 호감 갈 정도라면 그리 빠지는 인간은 아닐 텐데, 왜 이런 중상은 가는 남자가 게이가 됐을까.

잠시 그런, 재영이가 들었다면 편견이라고 소리칠 생각을 하다가 이내 머리에서 지우고, 흘끔 재영이 눈치를 보며 내 앞자리에 앉는 그에게 웃음지어 보였다.

그 사람도 마주 웃음지어 주는 게, 역시나 사교적 예의도 적당한 정도로는 갖춘 것 같다.

하지만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가 이 남자에 대해 ‘모든 게 적당히 중상’이라는, 썩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남자도 나를 첫눈에 그렇게까지 맘에 들어하는 건 아니다.

뭐 그런 거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연애 대상 후보를 소개받는다는 건, 기대에 부풀어서 나갈 만한 건 아니다.

아아, 아무래도 재영이가 했던 말도 있고, 오늘 소개받는 자리는 괜히 나왔다.

재영이는 못마땅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다가, 결국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사말을 꺼내었다.

“진호야, 이쪽은 윤해신.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 해신아, 이쪽이 박진호. 저쪽 클럽에서 알게 된 사람.”

인사말을 꺼낸 이상은 인사할 수밖에.

그냥저냥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쪽이나 나나 서로 관심이 그다지 없다……고나 할까, 서로에게 회가 동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느끼면서, 내 머릿속은 딴생각으로 가득했다.

대체 이 빌어먹을, 어긋난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 건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저 녀석은 여전히 같은 공기도 마시기 싫다고 머리를 붕붕 내저을 정도로 날 싫어하는 건지, 요리로 잘만 길들이면 조금은 날 따르게 되는 건 아닐지 따위의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아, 상당히 심사가 복잡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 마주보고 앉아 있는 남자도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나오거나 내게 첫눈에 호감을 품거나 한 건 아닌 눈치로, 역시나 마음은 콩밭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는 거다.

적당히 매너도 있고 성격도 그럭저럭 유순해 보이는 게, 내 마음도 덩달아 콩밭에 가 있지만 않았더라도 시험삼아나마 사귀어 볼 만한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 역시 안 내킨다. 난 역시 동성애 취미는 없었다.

별로, 눈앞의 남자가 빼어난 미남이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다. 상대방 얼굴에 재영이나 혹은 tv에서나 볼 법한 인간들의 얼굴을 대치시켜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사귄다―라는 그 어감부터가 영 등골이 서늘하다.

그런데도 문제는, 저 얼굴을 상헌이 녀석의 얼굴로 대치시키면 말이 달라진다는 거지.

중증이다.

이거야 빼도 박도 못하게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중증이다.

……우와……,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이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할 따름이다. 그나마 유일하고 무난한 해결책이라면, 조용히 깨끗하게 잊어버리는 걸까.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나 보다.

앞에 있던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봐요?”

“에? 아아……아닙니다, 조금.”

적당히 웃으면서 얼버무리려는데, 소파에 던져 두었던 전화가 부르르 온몸을 흔들며 자기주장을 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이렇다. 끊어졌다 싶으면 또 오고, 또 오고.

“전화, 안 받으세요? 조금 전부터 계속 오고 있는 것 같은데.”

“……별로 받고 싶지 않은 전화라서요.”

먹고 싶은 게 생각났더라도 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이놈은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꼭 이럴 때에 ‘맛있는 거 사 와’라는 따위의 전화를 해야겠는지.

돌아가면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전화를 아예 쿠션 아래에 밀어넣었다.

역시 인간의 마음은 이율배반적이다.

―랄까,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생각이 공존할 수 있다.

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고, 옆에 있고 싶고, 웃는 얼굴 보고 싶고,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건 확실한데도, 동시에 밉살스러워서 볼을 주욱 잡아당겨 주고 싶은 생각도 드는 것 역시 사실인 거다.

……정신분열의 초기단계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혹여 이런 거라면, 그리 달갑지 않다.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날 가만히 보고 있던 재영이 녀석이 한숨을 쉬며 테이블을 통통 두드린 건 그때였다.

“어이, 그만두자, 그만둬. 내 입맛만 씁쓸해지겠다, 이거야.”

동시에,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상대 남자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재영이에게 시선을 모았다.

재영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상대 남자 쪽으로 넙죽 상체를 엎드렸다.

“야, 미안하다, 진호야. 이 망할 녀석이, 사람 소개시켜 달라고 한 주제에 알고 보니까 좋아하는 놈이 있댄다. 나도 좀 전에 알았어. 정말 미안. 죽이려면 이놈을 죽여라.”

아예 탁 까놓고 말하자 남자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재영이를 보다가 이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사과할 수밖에.

머쓱한 얼굴로 그를 흘긋 보며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조금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서도 허허 웃었다.

상대가 날 썩 맘에 들어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생에 몇 되지 않는 순간 중 한때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소개받으러 나온 자리에서 그런 뜻밖의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을 만큼, 남자는 좀 황당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저어…….”

일단 미안하다고 말은 꺼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웅얼거리고 있으려니 그 남자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거라면 할 수 없죠 뭐. 사람 마음이 제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선선하게 대답해 주는 걸 보면 재영이 녀석 말마따나 성격이 좋은 모양이긴 하다. 미안하기도 하고 약간은 아쉽다. 다행이라는 안도감 쪽이 더 크긴 했지만.

“그런데, 그분이랑은 싸우셨나 봐요. 이런 자리엘 다 나오시고.”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난 그저 웃기만 했다.

싸우는 거야 매일의 일과다. 게다가 아마도 이 남자는 ‘그분’이라는 놈과 내가 서로 이차저차하고 사는 사이지만 잠깐 사이가 틀어져서 내가 여기에 나온 걸로 오해한 모양이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그것까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어서 그냥 적당히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우습게도, 이렇게 자리가 파장이 나고 나자 오히려 분위기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좋아져, 재영이까지 포함해 셋이서 죽이 척척 맞는 친구라도 된 분위기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남자는 사귀는 상대로서뿐 아니라 친구로서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금세 친해지는 사교성에, 앞서 말했듯이 전체적으로 중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너무 괜찮은 조건을 가진 인간보다는 이런 쪽이 차라리 낫다.

재영이, 고르긴 잘 골라 줬구나. 미안하고 고맙게도.

시간은 그럭저럭 흐르고, 슬슬 자리를 옮기거나 혹은 이대로 헤어지거나 할 만할 정도의 시간이 되었다.

시계로 시선을 주는 그의 눈치를 알아차린 나는 아까 얼핏 들은 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오늘 점심으로 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약속 있으시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예? 아, 예. 그냥 동창회이긴 한데 두 달 전부터 잡혀 있었던 데다, 제가 간사라서요.”

아아, 그럼 슬슬, 하고 막 말을 꺼내려는데, 그때였다.

문이 덜컹 열리며, 한 사람이 꽤 요란하게 들이닥친 것은.

이 가게는 아직 영업 시작하려면 시간이 남아 있었고,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오기에도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런 탓에, 라는 이유도 있었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니까 반사적으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쨌건 셋의 시선은 그리로 몰렸다.

그리고 나는, 인상을 굳혀 버렸다.

콧잔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으며,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거기 서 있는 놈은, 요즘의 내 모든 고민의 근원이었다.

가게 안에 한 테이블, 세 사람밖에 없었으니 당연하지만, 녀석의 시선은 당장 이쪽 테이블로 와 꽂혀, 이내 날 찾아내었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 그놈을 보면서, 난 우습게도, 정말 내가 이놈에게 맛이 간 모양이라고 새삼 깨달아 버렸다.

어떻게 생각해도 결코 즐거운 기분으로 넘길 수는 없는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놈을 본 순간 일시적으로 모든 걸 잊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절망이다.

반갑고 뭐고 떠나, 이런 자리에 녀석이 난입해 든 건 절대로 쾌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게 아니었다.

평범하고 단순한 소개팅이었다면 모를까, 이건…….

“너…….”

“이―….”

녀석은 이를 악물고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테이블 옆에 서자마자 당장 소리부터 질러 댔다.

“왜 전화 안 받아!”

“TPO를 생각지도 않고 전화를 해댄 네가 잘못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소란을 부리는 거야. 조용히 못해, 정상헌?!”

내심의 동요를 어떻게건 숨기고 싸늘하게 중얼거리자 녀석이 주먹을 틀어쥐는 게 보였다. 저 성질머리에 테이블이라도 내려칠 기세다.

“너 그 주먹 날리기만 해 봐. 당분간 밥은 없다.”

가게 기물 파손이라도 했다간 돈으로 물어 주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재영이에게 민폐다.

재빨리 일침을 박았더니 다행히도 예상이 주효하게 맞아들어 녀석이 슬그머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나 사나운 얼굴은 그대로다.

인왕상처럼 테이블 옆에 버티고 선 녀석은 그제야 부리부리한 시선을 나 외의 사람들에게 돌렸다.

저놈이 나한테만 행패를 부리면 됐지 이제는 나 아는 사람들에게까지 패악을 부릴 셈인가 싶어 마음이 편치 못했다. 더욱이 유감스럽게도 나머지 두 사람은―녀석이 알 리야 없지만―동성애자.

“……여자는?”

갑자기 녀석이 불쑥 중얼거린 말이 그거였다.

처음엔 조금 놀란 모양이었지만 이내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있는 남자며, 지그시 일 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는 재영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뭔 소린지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녀석 역시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본다.

“데이트 중이라며. 소개팅한 여자랑. ……그런데 왜 사내놈 셋이서 머리 맞대고 있어?”

화장실이라도 갔나 흘끔 화장실 쪽으로 시선을 주는 녀석의 말에, 그제야 나와 재영이는 상황을 재빨리 캐치했다. 저 남자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한 눈치였지만.

식은땀이 흘렀다.

남자랑 소개팅하러 나왔지, 라고는 죽어도 말 못한다.

“……마음이 안 맞아서 먼저 보내고, 친구들 만나는 중이야. ……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말도 돌릴 겸, 조금 전부터 궁금했던 걸로 화제를 바꾸었다.

아니, 그 전에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인지도.

그러나 이 녀석은 여기서 순순히 화제를 돌리게 해 주지 않았다.

“너 아까, 데이트 중이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때, 내 앞에서 아까부터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고개만 기울이고 있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아, 하고 주먹을 탁 치더니 웃으며 입을 여는 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당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일수록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난 그가 말을 시작할 틈도 주지 않으려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상헌이 녀석을 보며 짐짓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너, 가라는 학교는 안 가고 여긴 또 어떻게 찾아온 거야. 그렇게 내가 하는 일에 훼방 놓고 싶어? 대체 뭐하자는 거야, 정상헌! 얼마 전부터 너, 사람 약점이라도 잡았다고 생각하고선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니, 정말 끝장을 보고 싶어서 이래?”

평소보다 더 싸늘하게 말하며 녀석을 노려보자, 땀에 젖어 씩씩거리던 게 언제냐는 듯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약간 몸을 움츠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내가 말해 볼까? 어떤 여자가 나오는지 구경하고, 수준 미달인 사람이면 나중에 비웃고 수준 이상인 사람이면 네가 끼어들어서 파장 내려고 한 거겠지. 그렇지 않아? 너는,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다 훼방을 놓고 싶어할 정도로 날 마땅찮아 하고 있으니까.”

말할 타이밍을 놓쳐 다시 입을 다무는 남자를 곁눈질로 보며, 난 눈치 빠른 재영이에게 눈짓을 하고는 그대로 가방을 집어 들고 휭하니 자리를 떴다. 물론, 뜨기 전에 짧게나마 그 남자에게 인사를 하는 정도의 예의는 잊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가게에서 나오며, 나는 지끈거리는 가슴을 억눌렀다.

그렇지 않아도 막 자리를 파하려던 차에 생각지도 못한 마(魔)가 끼어 버렸다.

어떻게건 재영이가 잘 둘러대어 주겠지.

오늘은 본의건 아니건, 재영이가 완전히 덮어쓰는 날이다. 이거야 나중에 거하게 한 턱 낼 수밖에 없겠다.

빚을 만들어 버렸다는 생각을 씁쓸하게 하면서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가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묵직한 걸음이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지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야, 잠깐, ―야, 윤해신!”

금세 따라잡아 어깨를 틀어쥐는 그 우악스런 손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시선만 들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좀 머쓱하게 날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쥔 손은 놓을 생각도 않고 다른 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 손에는 잊어버리고 그냥 나온 내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말없이 핸드폰을 받아들려니, 녀석이 입을 연다.

“나오는데, 네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전해 주라더라.”

재영이에겐 오늘 하루에 실로 많은 죄를 지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야, 화났냐?”

“……거긴 어떻게 알고 왔어?”

그러자 녀석이 한숨을 푹 쉬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아직껏 미처 마르지 않은 이마의 땀을 닦아낸다.

“넌 전화를 안 받지, 홍대에 널리고 깔린 게 소개팅할 만한 가겐데, 그건 또 어떻게 일일이 뒤지고 앉아 있어. 그래서, 예전에 그 칵테일 바, 네 친구가 아르바이트 하는 데라고 했었던 게 기억나서 무턱대고 가 봤지. ……뭐.”

“그렇게까지 하면서 왜 찾아왔는데? 그렇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나더러 사오라고 하지 말고 네가 사 먹지.”

“어?”

먹고 싶어? 뭘?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녀석을 보며 난 인상을 찌푸렸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먹을 건 핑계였다.

이 녀석 단순히, 내가 소개팅 한다니까 파장내 버리고 즐거워하고 싶었던 거다.

심통맞은 녀석 같으니.

“아깝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도 어떤 가엾은 여자가 네놈이랑 만나게 되는지 구경할 수 있었는데. ……맘에 들었어?”

흥미본위로 물어보는 녀석에게 나는 시선도 주지 않고 걸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니라고 했잖아.”

“흐응. 그러면, 새로 소개팅 할 거냐, 너?”

“알 게 뭐야. 귀찮아.”

그렇게 대답하면서 걷다가 문득 나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생각해 보니 이 녀석, 조금 전부터 계속 반말이다.

원래 그러긴 했었고 이젠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지금 상황에서는 뭐든지 꼬투리 잡을 기분이 들었다.

녀석에게 싸늘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어쩐지 기분 좋은 얼굴로 유들유들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웃음도 곧 사그라들었지만.

“……기분 퍽이나 좋아 보이는군, 정상헌 씨.”

오늘 자리 파장났다는 게 그렇게 즐거운가 보지. 심술덩어리야.

못마땅하게 말하자 녀석이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며 날 흘긋 보았다.

“뭐 좋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어차피 네놈 그 성깔머리에 어떤 여자랑 제대로 사귈 수 있겠냐. 파장 날 거란 건 예상했었는데 뭘.”

“그럼 얌전히 집에 있을 것이지 왜 그렇게 기를 쓰고 구경하러 찾아와.”

“……폭탄 맞을 가엾은 여자 구경하러 왔다, 왜.”

이 망할 녀석을 때려눕히고 싶다고 생각한 건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알면 알수록 정말 심통맞은 녀석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심통맞고 심술궂은 녀석을 떠올리면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나도 참 가엾다.

정말이지 어디가 좋은 걸까. 성질 더럽고 무식하고 험상궂고 생긴 것도 우락부락에 하는 짓이라곤 여자 돈 뜯어먹기라니.

난 마뜩찮은 눈으로 유심히 녀석을 다시 한 번 관찰해 보았다. 그러나 역시, 이성적인 결론에 변화는 없었다.

반한 게 죄라더니, 망할 어머니의 마음, 변질된 어머니의 마음.

난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밥이야 집에 찬거리 가득 있고, 간식거리가 떨어졌지? 적당히 사 가자. 지금 집에 들어갈 거 맞지?”

피곤한 목소리로 한 풀 꺾여 중얼거리자 녀석이 반걸음 옆으로 다가섰다.

“응. ―들어가는 길에 닭똥집이나 사 가서 볶아먹자. 술안주로 곧잘 먹었는데 갑자기 먹고 싶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발전을 하긴 했다.

‘볶아서 내놔’가 아니라 ‘볶아먹자’다.

예에, 예, 하고 중얼거리며, 택시를 잡았다.

서슴없이 앞자리에 타, 뭐가 그리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녀석을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다가, 난 고개를 돌렸다.

됐다, 됐어. 어차피 이놈이 심술덩어리였던 게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니, 그렇게 나쁜 것만도 아니다.

소개받은 남자에게 무난히 거절하는 것도 해결되었고, 그 자리에 들이닥친 이 녀석에게 적당히 둘러대어 넘기는 것도 성공했다. 진실이랄까, 본심을 직면해 버린 내 심경은 매우 복잡했지만 이 녀석은 기분 좋은 것 같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그 생각이 굳어진 것은, 그날 밤, 오후부터 그때까지 한 번도 ‘애인 없어 혼자 딸이나 잡는 놈’ 운운하는 소리를 녀석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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