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재영이와의 짧은 만남 후 집에 돌아왔을 때는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분노로 울컥거리는 마음이 좀체 진정되지 않는 걸 느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기민이 놈, 빚을 졌으면 제 스스로 갚을 것이지 왜 엉뚱한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 재영이 놈도 마찬가지다. 제가 무슨 사람 좋은 호인이라고 그놈 빚을 제가 갚을 작정을 하냔 말이다!
우울한 기분을 풀러 갔다가, 분노의 기분이 되어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했던 대로 사채까지 끌어다 쓰던 기민이 놈, 빚을 된통 졌다는 거다. 그것도 단순히 몇 천 정도의 돈이 아닌 모양이었다. 자세한 금액은 얘기 안 하지만 억 단위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애인이랍시고 웃으며 보증을 서 줬던 재영이는, 도끼날에 발등 찍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눈처럼 불어나는 빚덩이만 남겨 놓고 행방이 묘연해진 애인 놈 때문에 제가 빚 갚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그것 때문에 바쁘다고, 오늘도 마침 겨우 짬이 났을 때 내가 전화한 거라고 그러는 재영이의 얼굴이 조금 야위어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긴 하다.
자세히는 몰라도 재영이 놈, 부자다. 한창 거품이 왕성하게 올라 있을 때 주식을 해서 떼돈을 벌었던 적이 있는 데다(그때 나도 같이 했기 때문에 안다) 돈 굴리는 법을 아는 놈이라, 속이 쓰리긴 하겠지만 아마 기민이 놈 빚을 못 갚아 줄 건 아닐 거다.
그런데 스스로 몸 바쳐 빚 청산을 위해 일한다니, 대체 어떤 사정이 꼬여든 건지 알 수가 없다. 뭔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내가 녀석에게 캐물어야지, 하고 있을 때 전화가 왔었다.
인간관계 좁은 건 녀석이나 나나 마찬가지라, 평소에 흔히 그러듯 대신 전화를 받았다.
‘예, 김재영 핸드폰입니다.’
‘……당신, 누구지?’
대뜸 무례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거칠게 내뱉어 왔다. 멍하니 수화기를 들여다보다가 나도 꼭지가 돌아서 사납게 대답했다.
‘댁이야말로 누구야.’
그러나 그 이상 말하기도 전에 화장실에서 돌아온 재영이 놈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내 손에서 전화를 빼앗아갔다. 여보세요, 라고 말하던 녀석의 얼굴 위로 찡그린 표정이 잠시 스쳐간다.
아아, 친구, 지금? 지금은 좀 곤란……, ……알았습니다, 라며 전화를 끊은 재영이는 바닥을 바라보며 두어 번 한숨을 쉬고 있더니 피곤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나 좀 나가 봐야겠다, 라고.
오늘은 정말이지, 상헌이 저놈도 전화 받고 쏜살같이 나가 버리고, 재영이도 금세 돌아가 버리고, 사람 만날 날이 아닌 모양이다.
결국 나갔다가 기분만 잔뜩 상해 돌아온 나는 새카맣게 불이 꺼진 내 집에 들어서자 그제야 조금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재영이 저놈도, 잘 모르겠지만 인생 더럽게 꼬인 모양이다.
나만 정신이 불안해서 인생 망가진 건 아니라니 이거야 안심해야 하는 일인지 어쩐지.
시간이 벌써 자정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녀석은 아직 안 들어온 모양이었다.
불씨 하나 없이 썰렁하고 어두운 공기가 날 맞는다.
기분이 우울해서, 나는 거의 습관처럼 내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장식장을 뒤적여 손에 잡히는 대로 로터를 꺼내었다. 오늘은 넣고 자자. 따끈한 이불 속에 묻혀. 그러면 기분이 조금 나아지겠지.
지금쯤 여자를 대동하고 즐거이 데이트를 하거나 혹은 호텔에 있을 밉살스런 얼굴을 떠올리며,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방비해 현관문을 단단히 잠갔다. 자물쇠만 채워 놓으면 열쇠로 열고 들어올지도 모르니 체인까지 채워 놓는다. 체인은 열쇠를 가지고 있건 말건 밖에서는 따고 들어올 수 없으니, 만일 한창 넣고 있는데 녀석이 들어온다고 해도 태연히 주변 정리를 한 후 현관으로 가면 되는 거지(설혹 녀석이 술에 취해 문을 뜯어 부순다 해도, 문 부수는 동안 주변 정리 하면 되는 거고).
욕실로 간 김에 샤워까지 하자는 생각에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성을 찾고 차분하게 생각하면 이 빌어먹을 정신 상태도 해결책이 생각날 거야.
저 밉살스런 녀석이 귀엽게 생각되는 것이며, 여자 만나러 나간다고 하면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이며, 이런 식으로 로터를 쓸 때면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어김없이 녀석이 떠오르는 것이며, ……결론은 어떻게 생각해도 하나였지만, (그리고 절대 그렇게 나서는 안 되는 결론이었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숨 푹 잔 다음에 생각해 보면 해결책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오늘은 조용한 마음으로 자는 게 좋겠다.
크게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로터를 아래로 가져갔다.
욕실 바닥에 무릎 끓고 있어 차가운 타일의 딱딱한 감촉이 무릎에 배겼지만, 그런 감각 따윈 느껴지지도 않았다. 엉덩이 안쪽에, 가느다란 진동을 전해 주며 닿아 오는 자그마한 기계에 온 신경이 다 갈 뿐.
로터가 좁은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몸속이 확 달아올랐다. 뜨거운 물을 쏟아내고 있는 샤워 탓에 욕실에 따뜻한 김이 가득 차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온몸이 달아오르며 입에서는 신음 섞인 한숨이 새어나온다.
장의 점막에 부드러운 진동을 일으키며 착 달라붙은 듯 속으로 파고드는 그 작은 물체가 자리를 잡자, 나는 손가락을 빼내어 반쯤 일어서고 있는 앞쪽으로 가져갔다. 다른 손은 이제 성적인 자극을 받으면 자연스레 일어서게 된 붉은 유두를 저도 모르게 어루만진다.
그러면서도 멍한 머리 한쪽으로는 아련한 망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그 여자와 호텔에라도 들어갔다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어차피 정조 관념 같은 건 없는 녀석이니까, 여자 하나쯤 능숙하게 침대 위에서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닐 거야. 이미 관계 맺는 것 따윈 익숙할 만큼 익숙하겠지.
어떤 식으로 그녀들을 만지고 애무하는 걸까.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말을 속삭이는 걸까.
아마도 그건―….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에, 기분 좋을 정도로 잔잔하게 전해져 오고 있던 진동이 점차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수위까지 높아진 성욕을 이끌어내었다. 언제부터 자신의 입에서 애타는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욕실 안을 울리는 거친 숨소리, 간간이 섞여드는 울음 섞인 신음, 그것만이 청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때.
……아마 얼음물을 머리 위에서 끼얹는다 해도 그런 기분은 들지 못했을 거다.
“언제 들어왔어……?”
끼익, 하고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잠시 환청인가 싶었다. 위치로 보아, 상헌이 놈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던 탓이다.
문은 잠갔는데. 분명히 현관문을 잠그고 체인까지 걸어 놨었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비면서 패닉 상태로 치닫고 있는데, 하암, 하고 하품을 하며 욕실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던 발소리가 멈추고, 문고리가 망가진 욕실 문이 휙 열렸다.
그리고, 한참 자다가 깬 듯 부스스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잠이 덜 깬 눈으로 욕실 앞에 선 녀석의 모습과, 그 뒤로 문 열린 녀석의 방 안에, 깜깜한 어둠 속에 바로 직전까지 사람이 자고 있었던 듯한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나보다 훨씬 먼저 집에 돌아와서 신나게 자다가 지금 인기척을 느끼고 깨어났을 그의 눈앞에서, 새파래진 얼굴을 하고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며 그를 망연자실 올려다볼 따름이었다.
“뭐야……, 샤워하던 중…이…냐……?”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던 녀석의 눈에서, 천천히 졸음기가 가셨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굳어 있었다.
양손 다 말하기 민망한 곳에 멈춘 채, 휘둥글 크게 뜬 눈은 멍하니 녀석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어…….”
녀석의 얼굴에서 졸음기가 다 가시고 그 눈끝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눈이 내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가 가슴께에 매달려 있는 한 손을, 그리고 거기서 천천히 더 내려가 아래쪽의 나머지 손을 훑은 후 다시 서서히 도로 기어 올라왔다. 이번에는 허리 근처며 가슴팍, 쇄골, 어깨 따위를 기묘한 눈으로 훑다가, 마지막으로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그때 즈음, 내 얼굴은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민망함을 담고 익어 있었다.
꿀꺽, 하고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내 목에서 났는지 저놈 목에서 났는지 분간도 안 갈 정도로, 나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너.”
이윽고, 녀석이 희한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동시에.
“나가!!!”
마치 가위에 눌려 있던 차에 갑자기 깨어난 듯, 발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혀끝이 덜덜 떨려 왔다. 온몸도 따라서 떨리기 시작한다.
“야, 너…….”
“나가랬잖아!!!”
욕조 안에 기세 좋게 뜨거운 물을 뿌리고 있던 샤워기를 집어 들어 냅다 녀석에게 집어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 샤워기는 길이 탓에 그놈의 면상에 작렬하진 못했지만, 바닥에 떨어져서 반 바퀴 빙글 돌며 온 곳에 물을 뿌려 댄 탓에 녀석까지 젖어 버렸다.
으와, 라고 낮게 혀를 차며 한걸음 녀석이 물러선 틈을 타 난 얼른 문을 인정사정없이 닫아 버렸다. 쾅, 하고 커다랗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마 녀석의 얼굴이라도 문에 박아 버린 걸 테지.
아으우……하고 낮은 신음 소리가 문 저편에서 들렸다.
“야! 뭐하는 짓이야! 아프잖어!! 어, 씨, 코피 난다.”
녀석이 욕설을 내뱉으며 중얼거리는 폼이, 제법 아팠던 모양이다.
문을 등으로 막고 뻗대고 있으려니 녀석이 부아가 치미는 듯 문을 미친 듯 두드린다.
“야, 인마! 이것 좀 열어 봐! 이 새끼가 잘 자던 사람을 후려 패 놓고……!”
“끝까지 잘 잘 것이지 왜 자다 말고 나와서 남 샤워하는데 문을 열어젖히고 난리야, 난리가!”
그 전에, 문은 열어서 뭣 하게! 조용히 들어가, 도로 들어가 버려, 제발!
내심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녀석이 문을 두들기며 그 이상으로 사람 가슴에 결정타를 내리친다.
“웃기네, 네놈이 샤워하고 있었냐! 야, 이거나 좀 열어 보라니까!”
가슴에 팔뚝만 한 대못을 박힌 것 같은 느낌이란, 필경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심장을 우악스런 손이 쥐어짜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즈끈, 하고 조여들었다.
그래, 역시 본 거겠지. 샤워하고 있던 게 아니란 거, 보고도 모르면 바보다.
일말의 아주 조그마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게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등뒤의 문은 연신 덜컹거린다.
“열라고 몇 번 말해야 알겠어!”
“열어서 뭐하려고!! 들어가서 자던 잠이나 마저 자!!”
“―좋은 말로 해선 안 듣겠단 거지.”
네놈이 언제 좋은 말을 했는데, 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녀석의 그 남아도는 힘이 등뒤의 문을 떠밀기 시작했다.
혼비백산, 네 글자를 떠올리며 나는 등으로 막은 문을, 거의 드러누울 기세로 밀며 뻗대었다.
단순히 부서진 문으로 녀석의 괴력을 어림짐작했던 때와는 달리, 나는 녀석의 곰 같은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도 평균치의 힘은 가지고 있고 벽에 다리까지 대고 버티며 등으로 온힘을 다해서 미는데, 녀석이라고 열기가 쉬울 리는 없다.
그러나 조금씩, 유감스럽게도, 문은 열리고 있었다.
결국 등이 부서져라 문을 밀고 있는 나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이 한 뼘 가량 열렸을 때, 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잠이나 자지 왜 문을 열려 들고 그래! 가, 가란 말이다!”
“얌, 전, 히―…문을 열면, ……―좋았잖아, 그러게!!”
퍼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튕겨오르듯 등을 떠미는 문에 나는 앞의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을 나뒹굴었고, 온몸을 던져 문을 열어 버린 녀석은 씩씩거리면서 주먹으로 코 아래를 훔치고 있었다. 주먹에 피가 묻어나오는 게, 코피가 제법 났나 보다.
바닥에 부딪힌 팔꿈치가, 몇 분 안 있어 틀림없이 피멍이 맺힐 정도로 아파 인상을 찌푸릴 새도 없이, 난 허겁지겁 바스타올을 끌어당겨 대충 앞만 가렸다.
다행이랄까,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놀란 덕에 앞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몸속에는 로터가 들어앉아 진동하고 있었다. 약한 걸로 해 두어 소리가 들릴 일은 없겠지만, 녀석이 로터에 대해 알 리도 없겠지만, 가슴 속이 선득해진다.
“왜. 뭐.”
불쑥, 그 말만 하고는 녀석의 발치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
녀석은 험상궂게 그 말만 툭 던지고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시선이 따갑게 내려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소리소리 지르던 게 언제냐는 듯 조용히,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는 게 꼭 태풍의 눈 같아서 가슴 속에 돌덩이가 수억 개는 얹힌 것 같다.
그렇게까지 해서 들어왔으면 할 말을 해! 뭐!
핏기가 가신 손톱을 손바닥에 박아 넣으며 나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번쩍 들어 녀석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녀석은, ―희한한 얼굴을 하고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내는 건 같지는 않은데 또 어떻게 보면 화내는 것 같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긴 했는데 그게 또 그렇게 험상궂지는 않은 게, 뭘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이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남의 목덜미나 손목 언저리, 허리 같은 데를 보고 있던 그놈은, 내가 고개를 들자 겨우 시선을 얼굴로 돌렸다.
“……여자친구도 없냐?”
갑자기 한 말이, 그거였다.
나는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일시에 긴장이 푸스스 풀려 버려 쓰러질 것만 같았다.
고작 그런 걸 물어보려고 그렇게 기를 쓰고 문을 열었냐?!
“없다, 왜.”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녀석이 흐응,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하긴 그러니까 혼자 딸이나 잡고 앉아 있었겠지.”
두 번째 펀치 작렬.
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미심쩍한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고작 그거 물어보려고 사람을 팽개치면서까지 밀고 들어왔어? 당장 나가.”
“―야, 오밤중에 갑자기 사내놈 딸 잡는 거 본 나는 기분 좋은 줄 아냐?”
“그런데 뭘 굳이 확인까지 하려 들어! 나가, 얼른 나가!”
“사람을 무슨 취급을 하고 있어! 내가 뭐, 너 그런 거 하는 거나 보고 싶었는 줄 알아? 워낙 평소에 고고하기 짝이 없으신 분이니, 내 눈이 미친 건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소리 지르는 것까진 좋은데, 왜 나가지 않고 사람을 잡아먹으려 악을 쓰는 거야.
난 계속 몸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로터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만큼 눈앞에서 인왕상처럼 버티고 있는 이놈도 신경 쓰여 양방향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몸속에 들어앉은 로터 때문에 계속 허리가 튀어오를 것만 같다.
제발 좀 나가 주라, 나가 달라구.
만에 하나라도 이놈 앞에서 자칫 민망한 꼴을 보이기라도 하면, 난 죽어버릴 거다. 아예 내 손으로 땅 파고 들어가서 평생 나오지 않을 거다.
그만큼이나 절박하고 다급했다.
목덜미까지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
갑자기, 조금 전까지 집이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던 녀석이, 문득 소리를 죽였다.
“……야, 뭐, 그렇다고 울 건 없고. 몸 풀게 해 줄 여자 하나 없어서 가끔 오른손을 애인 삼는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나쁠 건 없거든. 네가 뭐 사람 죽인 것도 아니고. ……응? 야, 뭐 그런 걸 갖고 우냐.”
조금 난처한 것처럼 웅얼거리는 목소리.
아무래도 녀석은, 끊임없이 진동이 전해져 오는 몸을 주체하지 못해 가늘게 덜덜 떠는 몸이며,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모양새, 꽉 틀어쥔 주먹 같은 걸 보고, 내가 울기라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도끼눈을 뜨고 고개만 아주 약간 들어 녀석을 쏘아보았다.
“울긴 누가 울어.”
그런 오해는 절대 사양이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움칫했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푹 쭈그리고 앉았다. 무릎에 팔을 턱 걸치고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웃는 얼굴 비슷한 표정을 했다.
“야, 야. 됐어. 부끄러워하지 마. ……실은 네놈 좀 놀려먹을 작정이긴 했는데, 관뒀다. ……흐흐, 하지만 그 나이에 여자 하나 없냐. 하긴 너 같은 얼음 깐깐을 누가 좋아하랴만.”
“여자 등쳐먹고 사는 놈보단 나아.”
혀끝에 칼날이 섰다.
동시에 녀석은 좀 울컥한 듯 표정을 욱 하니 굳혔다.
잠시 그대로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지만, 이윽고 녀석이 입꼬리를 비틀어올리며 슬쩍 중얼거렸다.
“너, ……동정이지?”
“누가 동정이야, 누가! 기둥서방 주제에!”
오가는 인신공격 속에 싹트는 울화.
어느샌가 내 인성까지 이놈 수준으로 끌려내려가 있었다.
……한심하다.
나는 찌푸려진 미간이며 이마를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냈다.
기둥서방이라는 소리는 그렇게나 듣기 싫은지―원래 인간이란 게 정곡을 찔리면 더 아파하는 법이다―버럭 화를 내던 그놈은, 내가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조용히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을 떠 녀석을 보자 녀석이 희한한 얼굴을 하고 물끄러미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난 또, 요전에 손톱깎이 찾는다고 네 방에 들어가서 서랍장 열다가 그 안에 로터가 한가득 들어 있어서 엄청난 애인을 데리고 있나 보다 했더니, 것도 아니었나 보네.”
……세 번째, 이번에야말로 직격으로 원폭이 터졌다.
순간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평소 포커페이스로 단련되어 있었던 걸 얼마나 감사했는지.
문득 녀석이 어라, 하더니 고개를 기웃하며 말한다.
“그런데 넌, 애인도 없는 놈이 그럼 로터는 왜 그렇게 종류별로 싸갖고 있냐?”
“왜 멋대로 남의 서랍장을 뒤져?! 이 망할 녀석!”
“손톱깎이가 망가졌었다고, 내 거.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했는데 네가 없었으니까 그냥 뒤질 수밖에.”
태연하게 지껄이는 저놈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비단 처음이 아니지만, 살의까지 치미는 건 역시 치부를 보이고 만 사람의 본능인지도.
“……어이, 정말, 애인도 없는 게 그 로터는 다 뭐야?”
녀석이 자못 진지하게 다시 한 번 물어왔다.
난 고개를 숙이고 우물거리다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애인 있을 때 썼던 거야. ―아아, 그만 나가! 언제까지 이 좁은 욕실에 갇혀 있으란 말이야!”
그 로터 중 하나가 몸속에서 요동치는 걸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시 샤워기를 집어 들자, 녀석이 또 젖기는 싫은지 벌떡 일어나 욕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실실실 웃는 폼이, 영 마땅찮다.
“흐흥, 설마 내 주위에 애인 하나 없어 딸치고 있는 놈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는데, 네놈이 그랬단 말이지. 그렇다고 너무 비참해하진 말고.”
비웃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어조로 웃으면서 그 말을 해 봐야, 액면가 그대로 믿을 놈이 어디 있으려구.
그러나 속에 열불이 끓어오르는 그 와중에서도, 일단 나는 일말의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마스터베이션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다행이다(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민망스럽긴 하지만).
자칫해서 넣고 있는 현장이나, 혹은 빼는 현장이라도 보였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기각.
녀석이야 모르고 있겠지만 어쨌건 몸속에 살아 숨쉬는 로터도 그렇고, 반라의 상태로 그렇게 대면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 민망한 시추에이션도 그렇고, 한시바삐 녀석의 얼굴을 코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자신의 추태를 제일 보이고 싶지 않은 놈에게 보여 버리고 마는 불행이란 게 얼마나 처참한지.
녀석의 코앞에서 도로 욕실 문을 쾅 소리 나도록 닫아 버리곤 고장난 욕실 문고리를 노려보고 있는데, 문득 밖에서 녀석이 흘리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민재 형님이 갑자기 네 안부를 묻더라. 마누라나 애인이면 또 몰라도 친구 안부까지 묻는 사람이 아닌데, 뭔 바람인지 몰라.”
……윽.
뭔 바람이긴 뭔 바람이겠어. 여전히 네놈과 나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식은땀을 흘리면서, 나는 고장난 욕실 문을 몸으로 막고는 조심조심 로터를 꺼내었다.
이미 녀석의 기척은 부엌 쪽으로 옮겨가 있었지만 오늘은 이미 충분하고 넘칠 정도로 정신적 데미지가 심각했다.
……제길. 제길. 제기랄.
입속으로 수백 수천 번 욕설을 씹어 삼키면서도, 나는 로터를 꺼내는 순간 다시금 반응해 버리고 마는 수컷의 슬픈 천성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졸지에 ‘애인 하나 없는 비참한 놈’으로 전락해 버렸다.
설마 내 평생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육체적인 취향도 그렇고, 성격적으로도 다른 사람과 의도적으로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게 고되어서 일부러 애인을 사귀려고 안 했던 것뿐이지, 나라고 여자가 전혀 붙지 않을 정도로 기괴한 인간은 아니다. 대학 때는 두어 번 사귀어도 봤다. 귀찮아져서 금방 헤어졌을 따름이지.
그런 걸, 저놈은 제가 사귀는 여자가 두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해서, 나는 완전히 능력도 뭣도 없는 놈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아니 뭐, 거기까진 괜찮다.
마뜩찮은 오해를 받는 게 그리 내키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참아 줄 수는 있다. 어차피 잘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에 대해 타인이 완벽하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거고, 사소한 오해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수없이 받게 된다.
문제는.
……약간,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로터를 만지작거리거나 사용이라도 하면, 절정을 맞을 때면 이젠 으레 저놈이 연상되는 것과 동시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는다. 이러다가 갑자기 저놈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가슴 속에 자욱이 깔렸다.
덕분에 쾌감을 느끼는 것도, 절정에 달하는 것도 다 어중간해서, 이래서야 욕구불만이라도 될 지경이었다.
욕구불만의 현실도 그렇고, 원치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저 녀석을 보며 욕망을 품게 된다는 현실도 그렇고, 이거야 타파해야만 할 대상밖에 되지 않는다.
일어나자마자 찝찝한 기분으로 방에서 나와 물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괸 채 나른하게 고민에 잠겨 있는데, 호랑이도 아닌 놈이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난 반사적으로 사나운 눈으로 그쪽을 보았다.
“너, 아침에 나가면서 문도 안 잠그고 나갔었어?”
“1교시만 마치고 금방 돌아올 거였는데 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왜. 또 그거 하다가 딴 놈한테 들킬까 봐?”
녀석이 빙글 웃으면서 비수를 던졌다.
정통으로 심장을 관통한 그 비수를 뽑을 생각도 못하고, 난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녀석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상헌.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수 있는 처지던가……?”
그래, 따지고 보면 그렇다.
성인 남자가 자위를 하다가 걸렸다는 건, 좀 민망하고 낯 팔리는 일이긴 해도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원조 교제라거나 문어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게다가 식탐이 그렇게나 강한 저놈이, 굶고 며칠이나 넘길 수 있을까.
녀석도 그런 입장을 잊은 건 아닌지, 희한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체, 하고 중얼거리곤 얌전히 부엌으로 갔다.
난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녀석을 보다가 한마디 물었다.
“밥 안 먹었어?”
“어, 늦잠 자서 뛰어나갔거든. 굶어죽겠다.”
“흐응. ……게장 담가 뒀어. 지금쯤이면 먹을 만할 거다.”
“어, 정말? 간장게장, 양념게장?”
“간장게장.”
어제, 간장을 몇 번이고 끓였다 식히느라 온 집에 간장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도 몰랐냐. 아, 하긴 어제 이놈 여자 만난다고 하루 종일 밖에 있었지.
어째 조금 울컥한다.
저놈이 여자 만나고 다닐 때 나는 저놈 먹으라고 음식이나 해 두다니.
그러나 그런 생각도, 녀석이 만면에 희색을 띠면서 나 간장게장 엄청 좋아해, 하고 이마에 써 놓은 표정을 보자 사그라들었다.
……역시 이거야, 어머니의 마음, 인가.
등줄기에 스르륵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일어나, 게 껍질을 몇 개나 꺼내어 신나게 밥을 비벼먹는 녀석의 옆으로 갔다.
“맛, 괜찮아?”
“응. ―뭐 확실히 네놈은 그리 맘에 드는 놈은 아니지만, 요리 하나는 괜찮아. 여자였다면 좋은 집에 시집갈 수 있을 건데. 하지만 딸 치는 여자는 없지, 아마.”
“―!!!”
일언반구 없이 식탁을 내리쳤다.
밥 먹을 때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고, 상자리에서 난리치는 건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참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최근 이놈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말끝마다 사람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
이걸 정말 굶겨 죽여 버릴까.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세게 주먹을 움켜쥐고 녀석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꿈쩍도 않고 웃으면서 게 다리를 입에 대고 쪽쪽 빨았다.
“야야, 그런 얼굴 하지 마. 무섭잖아. 안 그래도 여자 없는데, 그런 얼굴 하면 어떤 여자가 너한테 오겠냐. 그래서야 평생 오른손이 애인…….”
“……기둥서방, 뚫린 입이라고 말 다 하셨나……?”
인성의 타락이란 이렇듯 참을 수 없는 분노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먹을 걸로 협박하는 게 얼마나 치사한 일인지는 알지만, 날아간 이성을 규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 당분간 밥 없어―라고 외치려던, 그때였다.
난 가히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제력으로, 녀석을 향해 내밀었던 집게손가락을 딱 멈추고 한동안 그윽하게 녀석을 노려보다가 말없이 돌아섰다.
겨우 그 치사하고 비겁한 말은 입안에 욱여넣고 돌아섰지만, 그래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내 평생 저런 녀석에게 이런 식으로 취급당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래, 욕구불만에, 저 사람 속을 뒤집는 놈을 상대로 욕정을 느끼는 복장 터지는 상황 따위, 타개하고 말 테다.
난 전화를 집어 들어, 전화기가 죄라도 지은 양 무지막지하게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한참 갔지만 도통 받을 생각을 않는다. 이럴 때 전화마저 통하지 않으면 넘치는 울화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열에 들뜬 머리로 생각할 때였다.
‘여보세요.’
조금 피곤한 듯한 목소리.
다른 때였다면 괜찮냐고 먼저 물어봤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기엔 내 머리는 너무도 굳어 있었다.
“재영아.”
‘어, 해신이구나. 목소리가 안 좋은데, 웬일이야.’
내 목소리를 확인하자 녀석의 목소리에 조금 윤기가 돈다. 반가워해 주는 게 느껴져, 이쪽도 마음이 조금 풀린다. 이래서 친구란 게 좋은가 보다.
“나, 사람 하나 소개해 주라.”
‘……………………응?’
평소보다 몇 배의 시간이나 더 침묵한 후, 녀석이 반문했다.
등뒤에서 달각, 하고 젓가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게, 등뒤의 저 화상도 멍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는 걸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 ……무슨?’
“애인, 필요해.”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긴 침묵이 흘렀다.
‘……요는, 소개팅, 얘기하는 거냐?’
“응.”
‘음―뭐 안 될 건 없는데, ……갑자기 왜?’
“여하튼.”
‘응……. 너 그런데, 내가 소개해 줄 수 있을 만한 사람은 남자란 거, 알고 있지?’
물론 안다. 녀석이 게이라는 걸 잊고 녀석에게 소개 주선해 달라고 할 정도로 맛이 간 건 아니다.
사실 나는 남자보단 여자가 좋다. 남자와는 자 보긴커녕, 페팅조차 한 적이 없다. 남자를 상대로 그런 종류의 상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니다, 있긴 있구나, 저 화상.
하지만 내 육체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에는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가 나을 거고, 더욱이, 쾌감을 이끌어낼 때마다 떠오르는 저 빌어먹을 녀석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 쪽이 좀 더 임팩트가 크지 않을까 하는 계산이 섰다.
남자와 사귄다―라니, 난생 처음의 시도이긴 하지만 즉흥적으로 결심한 것치고는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았다. 상대만 매너 좋은 놈이라면. 그래, 남자에게 욕정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지만 저 망할 놈을 상대로도 느껴 버리는 몸이 된 바에는 다른 놈이라도 마찬가지겠지.
“매너만 좋은 사람이면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아, 미리 말해 두건대 나는 네 그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은 절―대 아니다.”
기민이 같은 놈과 사귀느니 차라리 평생 혼자 살고 만다.
재영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알았어. 아―하지만 정말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윤해신이 소개팅시켜 달라는 소릴 다 하고.’
네놈도 당해 봐, 저 빌어먹을 ‘오른손 애인’ 내지는 ‘딸치기’ 공격! 더러워서 애인 하나 만들고 말지!
목구멍까지 치민 소리를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꿀꺽 삼키는데, 속전속결 김재영, 당장 날을 잡는다.
‘그래, 매너 좋고 애인 없는 놈, 마침 하나 있다. 내일이 아마 그놈 시간 비는 날일 건데, 내일 바로 괜찮아?’
이렇게까지 빠른 반응을 보이니, 이번엔 내가 조금 주춤하고 말았다.
“내일? ……난 괜찮지만, 그쪽은 그렇게 갑자기 괜찮아?”
‘괜찮을걸. 한번 전화해 보고. 그럼 일단 내일 오후로 잡자. 그놈 안 된다고 하면 그냥 너랑 나랑만이라도 만나서 저녁이나 같이 먹지 뭐.’
“응? 내일 오후? 어―응, 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머리끝까지 솟았던 열이, 재영이 놈이 이렇게 간단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너무나도 재빨리 보이자 일시에 식어 버렸다.
일사천리로 장소까지 대충 잡고 끊었을 때엔 오히려 내가 약간 멍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비록 일시적인 홧김에 재영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소개 이야기를 꺼내었다고는 해도 곰곰 생각해 보면 나쁜 건 아니다.
남자가 상대라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역시 좀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요는 익숙해지냐 아니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다른 것보다도, 더 이상은 쾌락을 쫓을 때 저놈의 얼굴을 떠올리는 건 좀 피하고 싶다. 뒷맛이 매우 안 좋다. 얼굴 마주치기도 껄끄럽고.
전화를 끊고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는데, 그 얼굴과 정면으로 시선이 부딪혔다.
떨어뜨린 젓가락을 주워들고 가만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또 울컥 끓어올랐다.
“왜.”
“……소개팅?”
“그래.”
“네가?”
“여태껏 안 만들었을 뿐이지, 못 만든 거 아냐. 가만히 있으려니까 사람을 뭐 취급하는 거야.”
쌀쌀맞게 말하며 녀석을 고이 노려봤다. 녀석은 마치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밥도 마다한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좀 의아해져, 나는 흘끔 테이블 위의 반찬거리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녀석을 보았다.
“왜, 그 사이 게 맛이라도 변했어?”
그러자 녀석은 응? 하는 얼굴을 하더니 다시 숟가락을 놀렸다. 게껍질 안에 담아 비빈 밥을 입으로 옮겨가는 게, 전화하는 몇 분 사이에 게 맛이 변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헤에, 소개팅. 그 나이에 소개팅이냐? 그만두는 게 좋을 걸. 그 나이 되도록 애인 없이 있다가 소개팅 나오는 여자란 게, 보나마나 뻔해.”
밉살맞은 성격은 어디 가질 않는다.
녀석은 금세 다시 이죽이죽 중얼거렸다.
재영이 녀석, 애인 사귀는 취향이 영 나쁘긴 해도 사람 보는 안목 하나는 좋으니까 별 문제 없겠지만, 그래도 저놈 말하는 게 괘씸하다.
“―사람이야 혼자 마스터베이션을 하건 못생긴 애인을 만들어 섹스를 하건 신경 끄고, 네 앞가림이나 잘하시지, 기둥서방.”
울컥한 얼굴로 녀석이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가만히 날 노려본다.
다소 입장이 역전된 감도 들어, 나는 그제야 조금 울분을 가라앉히며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싸늘하고 사나운 시선이 서로의 사이를 오갔다.
녀석은 갑자기 입맛이 떨어진 듯 에이 씨, 라고 중얼거리며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러곤 테이블을 걷어찰 듯한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어딜 그냥 들어가려 그래. 내일부터도 밥 계속 먹고 싶다면 설거지 하고 들어가.”
방으로 들어가려 하던 녀석은 멈칫하더니 툴툴거리면서 개수대 앞에 섰다.
“흥, 소개팅 같은 데에 나가서 잘된 역사를 내가 못 봤다. 어디, 얼마나 괜찮은 여자 만나나 한번 두고 보자.”
그릇을 월그럭덜그럭 씻으면서 녀석이 내뱉는 말이란 게 그거였다.
저놈 자식이, 혼자 처량하게 자위나 하는 놈이라고 비웃을 땐 언제고 지금 와서 또 저주를 퍼붓고 있어. 성격도 지랄맞긴.
난 이를 지그시 사리물고 녀석을 노려보다가 작위적인 비웃음을 입가에 진하게 피워 올리며 한마디 던졌다.
“적어도 서른 중반의 마나님은 아니겠지.”
그러곤, 녀석이 사납게 쏘아보는 것도 무시하고 내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문을 닫고 방안에 홀로 남아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과 새로이 사귀기 시작한다는 것은 피곤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공통된 화젯거리부터 더듬어 찾아나서야 하는 그 머쓱하고 어색한 과정이 무척이나 싫다. 그래서 작위적인 만남을 조장하는 행위엔 끼지 않으려 했는데.
하지만 요즘 정말로 욕구불만이 도를 넘어선 듯하고 저 상헌이 놈을 상대로 망상을 품는 것에서는 한시바삐 벗어나야 하기도 하니, 그를 위해선 애인을 만드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일이건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금세라도 재영이에게 다시 전화해 ‘취소’라고 말하고 싶은 걸 억누르고, 나는 다시금 길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