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너, 다음달 3일에 뭐해?”
녀석이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어느 평화로운 오후였다.
거실에서 한가로이 5천 피스의 퍼즐을 맞추고 있던 나는 언뜻 보기에 엇비슷해 좀체 구별이 가지 않는 두 조각을 손에 쥔 채, 옆에 우뚝 서 있는 녀석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대체 무슨 난리를 피우면서 욕실 청소를 한 건지, 트레이닝 바지를 무릎까지 둥둥 걷어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옷자락이 푹썩 젖어 있다. 목에 걸린 수건 역시 끝자락이 완전히 물에 절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 떨어지잖아. 세 걸음 뒤로 물러서서 얘기해.”
퍼즐 조각이 물에 젖으면 불어서 잘 안 맞아 들어간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녀석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나는 조금 이야기할 기분이 들어, 조각을 한쪽에 치워 두며 녀석을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다음달 3일? ……이라고 해 봐야 일주일도 안 남았잖아. 왜?”
“동아리 친구들이 올 거다.”
무뚝뚝하게 뇌까리며 뚫어져라 이쪽을 바라보는 저놈의 눈매가 음흉하다.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건지 몰라도, 그리 탐탁지는 않을 일이겠지.
“……그래서?”
“일단 알아 두라고 미리 말은 해 두는 거야.”
그래서, 그날은 하루 종일 집 비우고 어디에 나가 있으라는 건지, 혹은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저렇게만 말해서야 나라고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천천히 돌아서면서 입매를 비틀어 올리는 저 웃음이 심상찮다.
좀 많이 마음에 걸렸지만, 굳이 물어보는 것도 뭐하고 해서 난 그냥 손만 내저었다.
“욕실 청소 다 했으면, 세탁기 다 돌아간 것 같으니까 빨래도 널어.”
웃음기가 감돌던 녀석의 입매가 당장 굳었다.
“청소를 내가 했으면 빨래 정도는 네가 좀 널어라!”
“무슨 소릴 하고 있어. 지난주는 내도록 내가 했잖아. 그럼 이번 주는 당연히 네 차례잖아, 집안일.”
게다가 네놈은, 지난주엔 내가 당번이라는 걸 빌미삼아 세탁거리도 청소거리도 산더미처럼 내놓는 심술을 부린 주제에.
녀석은 에이 씨, 라고 중얼거리며 소파를 냅다 걷어차고는 세탁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난 교육의 성과라는 두 단어를 떠올리며 흐뭇하게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물론 저 성깔 더러운 놈이, 아무리 입장이 역전됐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저렇게 순순히 집안일을 했던 건 아니다. 처음 며칠간은 집에도 거의 안 들어왔다. 새벽, 내가 저혈압으로 혼곤히 잠들어 있는 동안 밥만 챙겨먹고 재빨리 빠져나가, 밤늦게, 역시나 내가 잠들 무렵에 들어와 야식을 또 산더미처럼 먹고서 설거지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곤 했었다.
쉽게 말해,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밥만 먹고 사라졌었다.
사실은 그대로 그냥 둬도 괜찮았다.
식비만 조금 축날 뿐, 내가 일어나 활동하는 시간 동안에는 녀석의 모습을 볼 일이 거의 없으니 녀석이 내 집으로 들어오기 전의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기에는 딱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그냥 놔둬 줄까, 라는 착한 마음이 여지없이 깨어진 건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설거지를 안 하고 가는 것까지도 어떻게건 봐줄 수 있다고 쳐도, 반찬을 꺼내어 먹었으면 다시 제대로 냉장고에 넣어 둬야 하는 건 상식이다. 그런데 이놈이 반찬 뚜껑도 덮지 않고 식탁 위에 그대로 내팽개쳐 두고 나갔던 것이다. 그것도, 김치통은 아예 부엌 바닥에 엎어져 김칫국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대충 정리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해 두었더라면 그것까지도 넘어가 줬을 것을, 그대로 내팽개쳐 둔 채 나가 버리다니.
당장 냉장고 문에, 소경 아니면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큼직하게 시간표를 써 붙였다.
‘저녁 식사 시간 6:00-7:30 p.m. 뒷정리를 스스로 하지 않으면 사흘간 밥 없음’
아침 식사야 그렇다 치고, 점심때야 녀석이 집에 없으니 넘어가고, 저녁 생활이 불규칙한 건 못마땅하던 차에 잘 됐다. 약속이 있는 날에는 어차피 먹고 올 테니 상관없을 테지.
녀석에게도 인지할 시간은 주어야 하는 터, 그렇게 써 붙이고 이틀이 지났다.
여전히 녀석은 분명 그 글은 봤을 텐데도(냉장고 문을 도배할 정도로 커다랗게 써 붙인 그 글귀를 못 봤다면 녀석은 문맹임에 틀림없다) 밤늦게 들어와 야금야금 야식을 챙겨먹고 그대로 빈 그릇은 내팽개쳤다.
내가 뭣 하러 네놈 말을 따라, 라는 태도가 여실히 보인다.
그리고 나는 사흘째부터 내 말을 실행했다.
홀로 한적하게 저녁식사를 한 후, 마침 거의 비어 가고 있던 밑반찬통을 싹 비워 버렸다. 냉장고 안에 먹을 거라곤 김치 한 조각 남겨 두지 않고, 오로지 음식 재료들만 남겨 두었다. 밥통도 텅텅 비워 뒀다.
먹고 싶으면 제놈이 알아서 만들어 먹겠지만, 요 얼마간 녀석과 살아 본 바로는 녀석은 요리라곤 라면밖에 못 끓이는 놈이었다(그것도 요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리고 그날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마침 외주로 들어왔던 일 하나를 깔끔하게 마무리한 시점이기도 해,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낙락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마도 그대로 아침까지 기분 좋은 숙면을 취할 수도 있었겠지. 한밤중에 갑자기 거칠거칠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밥!’ 하고 소리치며 사람을 뒤흔들지만 않았더라면.
‘야, 어떻게 된 거야. 냉장고가 비었잖아.’
짜증스럽게 내뱉는 목소리에, 나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녀석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냉장고 문에 써 붙인 거 못 봤어?’
‘뭐?’
‘앞으로 그 시간 아니면 밥 못 먹을 뿐더러, 설거지 및 뒷정리 안 하면 사흘간 밥 없어. 너 오늘 아침에도 먹고 그냥 나갔지?’
‘―네 멋대로 써 붙인 걸 가지고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싫으면 네가 해 먹어. 식재료는 냉장고에 있잖아.’
난 귀찮다는 듯 툭 내뱉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을, 거친 손이 다시 홱 걷어낸다.
‘윤해신! 이 새끼가, 왜 자꾸 네 멋대로 굴어?! 너 정말 죽고 싶냐?!’
‘…….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을 작정을 하지 않고선 섣불리 손대지 마라. 나 성격 그렇게 좋지 않다.’
―퍼걱!
둔탁한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울렸다.
분을 못 이긴 녀석이 베개 바로 옆을 무지막지한 힘을 담아 주먹으로 내리쳤던 것이다.
스프링이라도 나갔는지 푹 꺼져 되돌아올 줄을 모르는 침대를 두어 번 눌러 보곤 난 신경질을 내며 일어섰다.
‘사채업자 짓을 하려면 딴 집 가서 할 것이지, 왜 내 집에서 날뛰고 야단이야! 너야말로 자꾸 이럴래?’
‘지난주에 네놈 하란 대로 가정부 짓은 다 했잖아! 그러면 너도 네 입으로 한 약속은 지키란 말이다, 자식아!’
질세라 소리 지르는 그놈에게 다시 한 번 뭐라고 된통 쏘아 주려다가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밤중에 자다 깨서 인상도 험상궂은 놈이랑 나란히 얼굴 맞대고 맞고함지르는 취미는 없다.
내가 입을 다물자 녀석도 전의를 상실했는지, 험상궂은 얼굴로 에이, 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하필이면 저녁도 안 먹은 날을 골라서 이 지랄이야, 이 새끼는.’
그리 우아하게 자라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육두문자가 남발하는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은 나는 그놈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에 잠깐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뭘 하느라 저녁도 안 먹고 있다가 지금 이 시간에야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저 왕성하다 못해 블랙홀마저 연상시키는 식성에 저대로 자라고 하는 건 좀 잔인한 일이겠지.
나는 다시금 길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이곤, 좀 귀찮긴 했지만 많이 봐줘서 중얼거렸다.
‘계란찜 해 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 봐.’
자다 일어나서 이게 웬 봉변이람.
입속으로 욕설을 툴툴거리며 일어선 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뒤따라오는 그놈에게 쌀 씻으라고 시키곤 계란을 풀었다.
새벽 두 시.
이 시간에 내 의지가 아닌 타의로 요리를 하게 되다니 그리 기분이 상큼하진 못하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다시마와 멸치를 둘 다 넣어 밑국물을 내면서, 난 녀석의 표정 못지않게 부루퉁한 목소리로 내쏘았다.
‘현관문에서 화장실 문, 벽 타일에 전화기에 이젠 침대까지라니. 집에서 그 무식한 힘 좀 휘두르지 마. 힘이 남아돌면 공사장 가서 일이나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네 돈줄들이랑 침대에 가서 그녀들이나 기쁘게 해 주든지.’
마디마디 가시 돋친 말을 내뱉자 녀석이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꼭 한마디가 많아. 네놈이야말로 남의 힘 운운하기 전에 그 혀 좀 어떻게 안 되냐? 차라리 잘라 버리든가.’
‘……굶고 싶어?’
‘…….’
이내 조용한 공기가 실내를 감쌌다.
20여 분간 그렇게 고요한 가운데 사람 움직이는 소리만 들린 후에야 간단한 영양식은 완성되었다.
계란찜에 밥―찬밥이 남아 있던 것이 요행이었다―을 비벼 내어주곤,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받아먹는 그놈의 앞에 걸터앉았다.
턱을 괸 채 녀석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워낙 맛있게 먹기에 궁금해 녀석의 손에서 숟가락을 빼앗아들어 나도 한 입 떠먹어 보았다. 짜증스러워서 대충 눈대중으로만 간을 맞췄는데, 그래도 몇십 년 쌓아 온 손맛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맛은 훌륭했다.
도로 숟가락을 돌려주자 어쩐지 잔뜩 찡그린 얼굴을 했던 녀석이 다시 말없이 밥을 퍼먹는다.
‘그런 간단한 거라도, 내가 만든 건 뭐든지 맛있어.’
불쑥 말하자, 녀석은 갑자기 이놈이 무슨 뻘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하는 눈치로 날 힐끔 본다. 그러다가 내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는 있다더니.’
그 말은 특별히 안 들은 걸로 해 주마.
‘즉 나는, 얼마든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여느 가게보다 맛있게 해 줄 수 있단 말이지. 하지만 맛있는 걸 공짜로 먹는다는 건 언어도단이니 네가 할 수 있는 것 중 내가 바라는 것을 마땅히 네가 내게 제공해서 상호교환을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 자유시장 체제하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아니겠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잠시 멍한 얼굴로 날 보던 녀석이, 잠시 후에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말이야, 정상헌. 이건 오히려 내게 손해라고. 넌 네가 먹은 뒤처리만 하고 집안일도 나랑 공평하게 나눠 할 테니 결론적으로 네 몫만 하게 되는 거지만, 오히려 나는 네 몫까지 밥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 반대급부로 네가 해야 할 일은 너 먹을 찬거리만 장보는 것뿐인데, 얼마나 네가 이득 보는 장사냐구.’
‘하기 싫어.’
……이런, 보이지 않는 주먹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
난 순식간에 냉랭해진 표정을 감추려고도 않고, 그렇단 말이지, 라고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그게 네가 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마지막 저녁인 줄 알아. 사람이 양보를 하면 그 한계치가 어디인지는 알아야지, 바보 녀석아. 말해 두건대, 내일부터 저기 적힌 시간이 아니면 일절 저녁밥은 없을 줄 알고, 네 몫의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인 줄 알아.’
그렇게 딱 잘라 선언하고, 나는 지체 없이 일어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화가 났다는 걸 여실히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조금 빠른 걸음으로, 바닥을 힘껏 즈려밟으며.
그리고 그 후로 나흘, 나는 내가 말한 대로 일절 녀석에게 밥을 차려 주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밤늦게 들어오는 녀석에게 돌아갈 몫의 음식은 냉장고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 당장 안전 잠금쇠까지 이중으로 달아 놓은 내 방문은 녀석의 괴력에도 굳건히 견뎌, 한밤중에 갑자기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다가 결국 백기를 흔들어 보인 것은 그놈이었다(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나야 백기를 들어 보일 만한 아무런 꿀리는 구석이 없었으니까).
느긋하게 석간을 뒤적이며 경제란을 보고 있는데 며칠 만에야 웬일로 저녁 여섯 시가 채 안 되어 들어온 녀석을 희한하다는 듯 올려다보려니, 못마땅해 견딜 수 없다는 얼굴로 그놈이 한참 나를 사납게 노려보다가 갑자기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뭔가 싶어 보자, 까만 비닐봉지다.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게 해산물 종류가 아닐까 싶긴 했다.
‘뭐야, 이건.’
며칠 만에 마주쳤는지 모를 얼굴이 갑자기 그런 걸 들이밀어, 나는 조금 얼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녀석은 심통이 가득 난 어린애 같은 어조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꽁치. ……꽁치구이가 먹고 싶어졌어. 장 봐 왔으니까, 얼른 만들어 내.’
엉겁결에 그걸 받아들자 녀석은 휙 돌아서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 멍하니 그대로 녀석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있다가, 이윽고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내려다보았다.
안에는 나란히 머리 맞대고 들어 있는 꽁치가 두 마리.
푹, 웃음이 나왔다.
이 바보놈아, 내가 말한 장 봐오라는 건, 이렇게 주재료 하나만 달랑 사오란 뜻이 아니란 말이다. 저거 아무래도 장 보는 게 어떤 건지도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다.
이거야 원, 앞으로 가르칠 게 태산 같겠군,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피식피식 웃으면서 선선히 몸을 일으켰다.
야, 정상헌, 종이에 적어 줄 테니까 냉큼 나가서 다른 것들 더 사와, 라고 소리치며.
그리고 그걸로 게임 오버였다.
굳이 맛있는 밥이라는 미끼뿐 아니라, 녀석이 돈을 벌고 있는 주된 아르바이트(라고 할까, 쉽게 말해 원조교제지만)가 그리 떳떳치 못한 것이라는 점도 약점으로 잡고 있어서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삼 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정희 씨가 전화해 오는 걸 내가 받을 때마다 불안한 눈치로 내 근처를 서성이는 녀석의 태도가, 그 약점이 녹록치 않은 것임을 멋지게 증명해 주었다.
정말로 개라도 기르기 시작한 것처럼, 집안에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그 아래인가를 확실하게 점찍어 두는 것은 그걸로 결정되었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하극상을 시도하려는 저놈의 작태를 신경쓸 것 없이, 평화롭고 안온한 삶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주씩 청소며 빨래 같은 요리 외의 가사를 번갈아 하고 있던 차에, 이번 주는 녀석 차례.
욕실 청소를 하고 나온 녀석이 갑자기 내게 한 말이 그거였다.
다음주에 동아리 친구들이 찾아올 거다, 라는.
뭘 생각하는 걸까, 라고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녀석이 빨래거리를 안고 베란다에 빨래 널러 내 앞을 스쳐가 이내 그 생각은 지워지고 말았다.
저 커다란 몸집을 하고서 집안일을 하는 것도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어울린다기보다는 그 언밸런스가 보는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 준다.
난 쿡쿡 낮게 웃으며 일어나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흘끔, 곱지 않은 눈으로 날 노려보는 녀석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빨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말없이 녀석을 도와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이봐, 그만 노려봐. 그만 노려보고, 고마운 줄 알라구.
오후에 나른하게 일어났을 때, 나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어젯밤 자정이 되기 조금 전에 읽던 책을 덮고 막 자려고 하던 차에 대학 때 선배의 전화를 받았고, 그리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했나 싶던 내게 밀려온 것은 급박하기 짝이 없는 외주 일이었다.
‘야, 해신아, 너라면 할 수 있잖냐. 제발, 내일 새벽까지 좀 처리해 주라.’
징징거리며 매달리는 선배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전화기를 반 뼘 정도 귀에서 떼고 시계를 보았다. 내일 새벽까지라니, 고작 예닐곱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프로그램을 통으로 짜라는 것도 아니고, 에러난 곳을 찾아서 손 좀 봐 달라는 거잖아, 응? 해신아, 안 되면 나 짤려. 나한테는 이미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차라리 통으로 짜라고 하는 게 낫지, 원인 불명의 에러라면 그거 찾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건 댁도 알고 있잖아!
혀끝까지 욕설이 비어져 나왔지만, 이 선배의 단골 문구인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새끼’ 타령도 듣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예전에 신세진 것도 있으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일단 파일 받아 보고, 될 만하면 해 보겠지만 안 되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는 단서를 달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날아온 파일을 열어 보자 이거야 과연 난감하긴 하겠다. 소스 정리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누가 이 프로그램 짰는지 그놈은 당장 잘라 버릴 것을 진심으로 권하고 싶었다.
하지만 예닐곱 시간의 여유분이라면 못할 일도 아니었고, 어쨌거나 지급으로 들어온 일인 만큼 보수도 세다. 하룻밤 정도 투자해 줘서 나쁠 건 없었다.
……아니 뭐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요는, 그 덕분에 어젯밤은 하얗게 새고 잠든 게 오늘 아침 일곱 시 조금 넘어서였다.
대학 이후, 규칙적인 생활의 중요성을 절절히 느낀 이래 칸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상당히 규칙적이고 정확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내게 있어, 정상적이지 못한 시간에 취침했다는 건 신체 리듬이 깨어져 기분까지 망가뜨리고 만다. 그래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났을 때 기분이 과히 좋지 못했다(덧붙여 말하자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 규칙적인 생활을 해라,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 등등, 의무교육 기간 동안 내도록 귀에 닳도록 듣는 그 말들은 결코 그냥 흘릴 만한 것이 아니다. 수천 년 역사의 정수가 그 말들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은 건강 잃은 후에 땅을 쳐 봐야 늦는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벌써 오후 두 시를 넘어선 시계에 흘끔 시선을 주곤 입맛도 없어 물만 마시고 거실에 앉았다.
조용했다.
평일 오후, 간간이 멀리서 경적 소리, 골목을 지나가는 발소리 따위가 들릴 뿐 그 외엔 온통 정적으로 감싸여 있다.
벌써 몇 년을 이렇게 살아왔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적막하게 느껴진다.
왜 그럴까, 하고 잠깐 생각해 보자 곧 결론이 났다.
낮 동안에는 학교에 가거나 여타 약속으로 나가 버리고 집을 비우는 저 화상, 정상헌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저놈이 집에 들어앉아 있는 동안에는 조용할 날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입을 다물고 있어도 그놈은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육중한 걸음소리가 온 집안에 울릴 정도인 것이다.
집에 오는 사람이라고 해 봐야 입만 다물고 있으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조용한 재영이 녀석 정도니까, 더더욱 저 시끄러운 생물은 집안에서의 존재를 어필한다.
생각해 보면 오늘 아침에도, 밤을 꼬박 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삼 일 밤새는 건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 나이가 되면 하룻밤도 벅차구나, 라는 세월의 흐름을 절감하며) 물 마시러 부엌으로 나가자, 조깅이라도 하고 온 건지 땀을 흘리며 운동복 웃옷을 벗어던지곤 주전자째 물을 마시는 정상헌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하룻밤을 풀가동하는 바람에 탈진해서 멍한 머리로 피로를 얼굴에 적어 놓고 그놈을 멍청히 바라보자, 주전자 부리에 입을 대고 물을 벌컥거리면서 녀석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야, 너.’
‘밤 샜냐?’
이 시간에 나를 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벽에 걸린 시계로 한 번 시선을 주곤 물으며, 녀석은 물방울이 두어 방울 흘러내리는 입가를 팔뚝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컵에 따라 마시라고 말했잖아. 너 혼자 마시는 것도 아닌데 주전자에 입을 대고 마시면 어쩌라구.’
새삼스럽게, 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이놈이 저렇게 주전자에 직접 입을 대는 게 상습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요전에도 1000mm짜리 우유를, 통째로 입 대고 마시는 걸 보고 분명 주의를 줬었는데(다만 그 경우, 그 한 통을 그대로 작살을 내어서 내가 다시 마시게 될 일은 없었지만).
‘더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다소 짜증스레 내뱉었다. 그리고 냉큼 녀석의 손에서 주전자를 빼앗자 녀석의 얼굴이 금세 찡그려진다.
‘저는 얼마나 깨끗하다고, 새끼.’
녀석은 툴툴거리며 중얼거리곤, 아직 덜 마셨다는 듯 컵을 꺼내어오더니 내 손에서 도로 주전자를 빼앗아 가 한가득 물을 따라 마셨다.
내키지 않았지만 달리 물도 없어, 나도 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식탁 앞에 앉았다.
‘조깅 갔다 왔어?’
‘응.’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은 의자 등에 걸쳐 놓았던 웃옷을 집어 들어 땀을 닦았다.
난 컵을 입에 댄 채 여전히 몽롱한 머리로 넋을 놓은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여름이 다가온다고는 해도 아직 새벽녘에는 제법 쌀쌀한데, 한바탕 뛰고 나면 그렇지도 않은지 녀석은 반쯤 벗어던지고서도 덥다며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솟아오른다. 굵은 목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려, 떡 벌어진 어깨 부근에 잠시 머물렀다 떨어진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피부 위로 줄기줄기 흐르는 땀들을 보며, 문득 나는 재영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게이가 환장하면서 좋아할 만한 체격, 이라고 했던가.
난 게이는 아니지만, 그 말을 이해할 듯도 했다.
아니, 굳이 게이가 아니라도 저놈이 저 몸뚱이 하나로 여자들을 몇이나 구슬려 그걸로 돈을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익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육이 좀체 붙기 어렵다는 동양인의 체격의 한계를 그 몸으로 물리쳐 반증하기라도 하듯 훌륭할 정도로 잘 발달된 체격이, 순진하고 귀여운 처녀라면 당장 얼굴을 발그랗게 물들이고 고개를 돌릴 정도로 멋졌다. 같은 남자의 눈으로 봐도 그러니, 여자나, 혹은 동성을 연애의 대상으로 보는 남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거다.
유감스럽게도 녀석 스스로도 그건 잘 알고 있는 듯, 내가 멍한 눈으로나마 찬찬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자 그 시선을 알아채곤 흥, 하고 코웃음 치며 내 앞을 스쳐갔다. 컵을 개수대 안에 넣어 놓는 녀석의 뒷모습 역시 앞모습 못지않게 멋지고 당당한 남자의 체형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상헌아.’
피로로 인해 낮게 갈라져 있는 목소리로 낮게 부르자, 녀석은 부럽지? 라는 눈초리로 은근히 자랑스레 날 돌아보며 대답한다.
‘왜.’
‘컵, 개수대에 담가 놓지만 말고 씻어서 찬장에 넣어 놔야지.’
‘…….’
바보놈. 뭘 그렇게 기대에 어긋났다는 양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린애처럼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녀석의 반응에 나는 피로에 전 머리가 소량의 엔도르핀을 생성하는 것을 느꼈다.
픽 웃으며, 한 모금밖에 줄지 않은 물컵을 들고 그대로 도로 내 방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가볍게 한마디 던져 줬다.
‘몸, 멋지다. 인기 좋겠는데.’
그러자 녀석은 아주 잠깐 머쓱한 얼굴을 했다가(그런 말을 바란 게 아니었어?) 무뚝뚝하게 중얼거렸다.
‘네놈도 책만 파고 있지 말고 운동이나 좀 해 보지?!’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일단 지금은 좀 자야겠다. 어젯밤에 갑자기 일이 들어와서 밤 샜어. 넌, 이제 나갈 거지?’
‘응? 아, 응. 맞아, 오늘 좀 늦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은 내 몫까지 저녁 준비 안 해도 되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이놈, 어젯밤에 거실에서 영란 씨랑 전화했었지. 얼핏 들은 것도 같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한 끼 거른다고 해도 이번 주 가사는 네 담당이다, 라고 생각하며.
어쨌거나 당시의 나는 침대에 푹 파묻혀 잠자는 것이 그 순간 유일한 인생의 목적일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백지가 된 것처럼.
놀면서 밤새우고는 멀쩡해도 일로 머리를 혹사시키면서 밤새우고는 멀쩡할 수가 없다.
두뇌 노동도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흐느적거리며 방으로 들어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곤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의식이 끊어졌다.
―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한가로이, 낙락한 오후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이다.
역시 평소의 생활 리듬이 깨어지면 몸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다. 앞으론 급작스럽게 들어온 일 같은 거, 절대 맡지 말아야지.
무거운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날씨는 안온하니 좋고, 집안은 조용하고, 할 일도 처리했으니 마음도 느긋하고.
이렇게 모든 여건이 다 좋은데, 단순히 규칙적인 삶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우울하다는 건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든다.
……이럴 때엔.
소파에 거꾸로 걸터앉아 등받이에 턱을 괴고 멍청히 창밖을 내다보고만 있던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며칠을 안 한 건지.
얼핏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열흘은 넘은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았을 때 가끔 쓰다가, 이후로는 일약 급변한 환경 탓에 거의 잊고 있었다.
사랑스레 내 방의 서랍장 안쪽 깊숙이 잠들어 있는 작고 귀여운 로터.
재영이 덕에 예전엔 서랍장에 넘쳐나도록 종류도 크기도 다양했지만, 몇 차례 거듭 사용하다 보니 모두 다 좋은 건 아니었다. 기계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면 웃기긴 하지만, 개중 특성에 따라 나와 상성이 맞는 게 있고 안 맞는 게 있다. 그런 것들을 워낙 다양하게 이것저것 써보다 보니 이제는 새로이 제품이 나왔다고 해도, 한눈에 나랑 맞을지 안 맞을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먼저 크기는 적당한 게 좋다. 너무 작은 건 허전하고 큰 건 빡빡해서 아프다. 로터라는 게 물론 대체로 바이브보다 크기가 작긴 하지만, 그래도 큰 건 손가락 세 개 굵기까지 가는 게 있어서 자칫하다간 속이 얼얼해져서 오히려 기분이 나빠진다. 그랬다가는 원래 로터를 쓰는 목적 자체에서 빗나가니까, 기각.
둘째는 질감인데, 매끈한 것도 거친 것도 다 제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나로서는 매끈한 걸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너무 매끈매끈하면 미끄러져 나오는 수도 있어 좀 그렇지만, 적당히 탄성을 가진 놈을 쓰면 괜찮다. 요전에는 멋모르고 돌기가 튀어나와 울퉁불퉁한 걸 썼다가 죽는 줄 알았다. 자극이 세다 못해 아플 정도였다. 아픈 건 질색이다(게다가 그 안에 상처가 나면 약도 바르기 힘들다).
셋째는 진동의 세기.
역시 중용의 덕을 쌓아야 한다(이 경우에 쓰는 말은 아니지만). 뭐든 중간치가 제일 좋다. 너무 약하면 감질나고 너무 세면 안온한 쾌감 따위 느낄 여지도 없이 허덕이게 된다. 적당히 약하게 진동하는 것이 안락한 느낌이 들어 딱 좋다.
그 외에도 뭐, 여러 가지로 로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요소는 다양하지만 일단 제일 중요하게 치는 건 그 정도랄까.
나는 요 몇 년, 마치 애인과 부인의 차이나 마찬가지로(이 역시 경우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간간이 색다른 걸 써 보긴 했지만 역시 평소에 가장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곤 해 가장 오래, 자주 애용해 왔던 로터를 꺼내어들었다.
엄지손가락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분홍색 로터. 모델명은 핑키핑키 2호. ……라고 처음에는 민망스럽게도 적혀 있었지만, 오랫동안 쓰는 사이에 그 로고는 다행히도 지워져 버렸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침대 속에 파묻혀 조심스레 속옷을 헤치고 그 매끈하고 익숙한 질량감의 물건을 세팅한 후 밀어넣었다.
한동안 안 했다고는 해도 역시 몸은 몇 년에 이르는 기억을 유지하고 있다.
별 어려움 없이 좁은 길을 헤치며 안까지 들어가 적당히 자리를 잡은 로터를 몸속에 남기고, 손가락은 빠져나왔다.
입에서는 무심결에 만족스런 한숨이 새어나온다.
느릿한 진동이 몸속에 전해지며 알 수 없이 허전했던 공허함을 채워 주는 그 생동감이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그 평화로운 물결에 잠겨 둥둥 떠 있는 양 안락한 기분에 잠겨 있던 나는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앞쪽으로 손을 가져가며 눈을 떴다. 문득 가느스름하게 떠올린 시야에, 옷장 문에 붙박여 있는 거울이 비쳤다. 침대 머리맡의 바로 옆쪽에 위치하고 있어 눈만 뜨면 바로 보이는 그 위치를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그런 종류의 쾌락을 탐닉하고 있는 스스로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닌 것이다.
눈가까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르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잘근거리며 깨물어 붉게 부풀어 오른 입술이 벌어져 그 사이에서 달뜬 숨결이 새어나오는, 쾌락에 정신이 팔려 몽롱해져 있는 눈동자를 한 저런 스스로의 표정은, 보아서 그리 유쾌한 건 아니다. 못 본 체하고 있던 스스로의 음란한 내부를 적나라하게 비쳐 코앞에 들이대는 것 같아 우울해진다.
실수했다. 저쪽을 향해 눈을 뜨는 게 아니었는데.
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리고 조금 전에 본 탐탁치 못한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 노력하며, 손으로는 자신의 부풀어 오른 물건을 위로했다.
이제는 뒤쪽의 자극이 없으면 온전한 쾌락을 맛볼 수 없게 된 가엾은 분신은 오랜만에 찾아드는 쾌감의 자극에 금세 힘을 찾고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가 버릴 것만 같아 몸을 웅크리면 그 결에 몸속에 들어 있던 로터의 진동이 더욱 진하게 전해져 와 등줄기에 서늘하게 소름이 돋는다. 그런 쾌감이 몇 번이나 거듭 이어졌다.
머릿속에서 조금씩 이성이 달아나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성이 달아나고 남은 빈 공간에, 무의식이 만들어 낸 탐욕적인 영상이 대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앉는다.
마치 슬라이드처럼 한 장, 한 장 넘겨져 지나가는 그 필름들은 번번이 다른 영상을 보여 준다.
때로는 글래머러스한 여성의 풍만한 젖가슴이나 하얗고 둥근 엉덩이를, 때로는 몇 명이나 되는 남녀가 뒤엉켜 난잡하게 난교를 하고 있는 리얼한 움직임을, 때로는 허덕거리며 달아오른 피부 위로 떨어져 내리는 땀방울의 체취마저도, 더없이 원색적이고 음욕스런 내음을 담뿍 담은 채 말초신경 구석구석까지 전해 준다.
그런 영상들은 주로 과거에 내가 보았던 것, 접했던 것들과 연관성이 있게 마련이라, 그 대부분이 예전에 보았던 어덜트 비디오나 화보집 따위에 담겨 있던 것들이곤 했다. 무의식 속에 담겨 있던 성적인 색향이 이럴 때에만 금제에서 풀려나 머릿속에서 날뛰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내가 누군가와 그런 행위라도 하듯이 달아올라, 이성도 무엇도 잃고, 아플 정도로 달아올라 욕망을 호소하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날.
나는 정말로 내가 미쳐 버렸다는 것을 자각했다.
자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물 위로 나와 있던 빙산의 일각뿐 아니라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었던 무의식마저도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걸 싫어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 절정을 향해 치닫기 직전, 떠올려 버렸던 것이다.
거친 사내의 체취를 담고서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 위로 흘러내리던 그 땀방울의 내음을.
엉망으로 흐트러진 탐욕스런 영상 속에서, 여자의 하얀 속살 위로 떨어져 내리던 땀방울은 곧 구릿빛 피부 위로 흘러내리는 것으로 이미지가 대체되었고, 그것은 곧 가장 최근에 보았던 건장한 몸으로 영상을 단번에 바꾸어 버렸다.
찬탄이 나올 정도로 멋지게 단련된 몸 위로 굴러 떨어지던 땀방울을 아무렇게나 훔쳐내며 수컷의 체취를 사방에 흩뿌리고 있던 그 몸이, 그 사내가, 거칠고 사나운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본다. 남자답다면 남자답다고 할 수도 있는 그 얼굴은 유감스럽게도 예전에 보았던 비디오나 잡지 따위에서 본 얼굴이 아니라,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몸과 정신이 쾌락에 휩쓸려 무의식의 바다에서 헤매다가 거의 절정의 막바지까지 치솟아 올랐을 때, 어느 순간 나는 번뜩 깨달아 버렸다. 그 얼굴이 누구의 것인지.
―정상헌.
……윽, 잠깐, 이건 좀―.
선뜩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 와, 나는 눈을 떠 버렸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바로 그 순간, 나는, ……가고 말았다.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낮은 신음을 감싸지도 못하고 그대로 내뱉어 버리며, 허리를 뒤틀면서, 어이없이 절정에 달해 버리고 말았다.
머릿속 한구석에 되살아난 이성이, 바보얏, 저 얼굴 따위를 떠올리면서 해 버리지는 마, 적어도 다른 얼굴을―, 이라고 외쳤지만, 오히려 손을 내저으면 내저을수록 더더욱 명확히 각인되는 그 얼굴에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요는, 결국은,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끔찍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하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때 나는 분명히 평소보다 더욱 깊고 진한 쾌락을 맛보았다.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신음을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쾌락을 실은 거칠고 커다란 파도가 완전히 가신 후에도 한동안 침대에 파묻힌 채 움직일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해 섬뜩하고, 허탈하고, 어이없다는 감정이 온 머릿속에 눌러 붙었다.
맙소사.
재수없게도. 정말 기분 나쁘게, 왜 하필이면 막 막바지에 다다른 그때 그 얼굴 따위가 떠올라 버린 거야.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만으로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반에서 제일 못생기고 성격 더럽고 기분 나쁜 여자애를 두고 몽정이라도 해 버린 가엾은 어린 소년과 같은 기분에 잠겨, 나는 비참한 심경으로 티슈를 뽑아들었다.
그럴 일은 절대로, 죽어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런 일이 그놈 본인에게 알려진다면, 난 그놈이 펄펄 뛰며 패악을 부리기 전에 내가 먼저 구덩이에 몸을 던져 죽어 버리고 말 거다.
잊어버리자.
얼른 잊어버리지 않으면 난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서 살아갈 수가 없을 거다.
얼른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완벽하게 지워 버리는 것만이 상책이다.
난 머리를 붕붕 흔들면서 로터를 꺼내고 욕실로 향했다.
평화롭고 안락한 오후, 이날의 기분은 최악의 하향곡선을 그렸다. 로터 사용 역사상, 최악에 최악의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