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7)

5

“흑, 걸, 걸작이다, 흐……으하하하하하!”

재영이는 개지도 않은 이불 위에서 뒹굴면서 미친 듯 웃었다.

머리는 까치집이 되어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다. 잠에서 막 깬 얼굴에는 책을 베고 잤는지 책의 모서리 모양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고 옷도 잔뜩 주름져 칠칠치 못하다.

그런데도 외견만으로 보면, 이쁘장한 놈이 저러고 있으니 오히려 귀엽군, 이라고 생각되니, 저놈이 잘났긴 잘났나 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침에 일어나 부엌으로 나와 보니 텅텅텅 비어 있는 카레 냄비를 보고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재영이 놈에게 약속한 건 있고 하니 결국 이놈 집으로 와서 카레를 끓여 주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 끼 분량이라면서 그걸 하룻밤 만에 다 먹어치우다니, 저놈 배탈은 안 났으려나. 뺏길까 봐 두려웠다고 해도 저 큰 냄비를 다 먹다니 무식한……. 그냥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만들어 줬을 걸.

뭐 물론 저놈 성격에, 또 만들어 줘, 따위의 귀여운 말을 하는 일은 입을 찢는다고 해도 없으리라는 건 익히 짐작이 가는 바이긴 하다.

약한 불 위에 걸어 놓은 카레 냄비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나는 손까지 내저으며 웃고 있는 재영이 놈을 못마땅히 바라보았다.

“세수나 해. 카사노바 얼굴이 말이 아니다.”

세수 안 해도 타고난 외모가 어디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마디 쏘아 준다.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 여전히 실실 웃으면서 욕실로 갔다.

나는 인심 쓰는 김에 더 쓰자는 생각에 그놈이 자던 방으로 가서 이불까지 훌훌 털어 개어 주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정말이지 살벌한 집이다.

심플을 부르짖는 내 집도 이렇게까지 휑하지는 않다.

정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만 아니면 무엇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집이란 건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이럴 때마다 나는 가끔 저 잘 웃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놈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곤 한다. 그건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머리는 까치집이다. 너 그래갖고 나갔다간 새로 애인 못 만들어.”

삐죽거리며 일어선 머리에 물을 묻혀 대충 몇 번 빗어 내리면서 욕실에서 나오던 녀석은 웃으며 흐흥, 하고 중얼거렸다.

“벌써 생겼네, 이 사람아.”

“뭐?”

나는 어이없이 놈을 보았다.

옛애인이랑 헤어졌다고 맥을 못 추던 게 언젠데 벌써 또 만들……아, 아니다. 꽤 되긴 됐구나. 애인이랑 헤어지고 바로 그 다음날로 새 애인을 만든 기록도 있는 이놈에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이번엔 누구야?”

“너도 알걸.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니까. 2학년 때 5반 부반장 했던 놈인데, 기민이라고 알려나?”

“뭐?”

이번에야말로 인상을 팍 찌푸렸다.

“기민이라면, 그 돈에 대한 소문 안 좋은 그놈이잖아? 야, 그만둬, 그만둬. 그놈, 사채까지 끌어다 쓰고 있다는 소문도 도는 놈이다. 괜히 애인 했다가 너한테까지 불똥 튀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나 그놈 성격, 좋아하거든. 줏대 없고 약하고 비굴하면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교만하고 거만하고 잔인한 놈.”

그 수식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에서 핏기가 가실 것 같았다.

그래, 그 표현이 정확하긴 하다.

수학여행 때 우연히 같은 방을 썼던 것만으로 내가 파악한 그놈의 성격도 딱 그랬다. 난 이놈과 사귀는 미친놈은 대체 누굴까 생각했지. 그놈이 재영이가 될 줄이야.

“너 취미 이상하다는 소리, 안 듣냐?”

“너한테 종종 듣지.”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냄비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오오, 맛있겠다, 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난 녀석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리면서 도로 뚜껑을 덮었다.

“뚜껑 자주 여는 거 안 좋아.”

“예에, 예. 것보다 그 얘기나 자세히 해 봐. 그래서 네 동생, 찜통에 한가득 한 걸 하룻밤 사이에 다 먹었단 말이야?”

“동생 아니야. 찜통도 아니었고. ……마음에 들었나 보지, 카레.”

“그래서, 지금은? 배탈은 안 났던?”

“알 게 뭐야. 집에서 나오면서, 그놈 마침 휴일이기에 담배 연기로 찌든 소파 커버를 벗겨서 빨아 놓으라고 소리치고 나왔지. 들어갈 때 유리청정제 사다가 유리창도 말끔히 닦을 거다.”

내가 닦을 건 아니지만.

아침, 소파 커버 말끔히 빨아 놓으라고 당당하게 소리치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나를 노려보다가 결국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왜 하필 저놈한테 걸려서.’를 부르짖던 그놈을 떠올리자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그간의 내 고충을 알 것 같으냐, 정상헌.

피식피식 웃다 보니 갑자기 집에 얼른 돌아가고 싶어졌다.

요 근래 집에는 가능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 기분은 온데간데없다.

난 거의 다 마무리된 카레 위에 향신료를 가볍게 뿌린 후(물론 재영이 집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재료도 내가 다 들고 왔다) 불을 껐다.

“카레는 묵혀 뒀다 먹는 게 더 맛있긴 하지만 지금 먹어도 될 거다.”

“응? 넌 안 먹어?”

“응, 얼른 집에 가 보게. 그놈이 어쩌고 있을까도 조금 신경 쓰이고.”

재영이는 빙글빙글 웃었다.

“아깝다. 점심 때 약속만 없었더라도 너랑 같이 너네 집에 가서 그놈 구경 좀 하는 건데. 하지만 요전에 얼핏 본 것뿐이긴 해도 제법 괜찮은 놈이던데. 몸도 드물게 건장할 뿐 아니라 그 성깔머리 있게 생긴 얼굴까지, 게이가 환장하고 좋아할 타입이라고.”

“―재영아, 널 위해 하는 말인데…….”

“알았어, 알았어. 나도 친구 동생한테 손대진 않는다고. 게다가 난 벌써 애인도 있고.”

동생 아니라니까! 하고 한 번 더 길길이 뛰려다가, 이런 데에 있어서는 묘하게 학습능력이 없는 이놈에게 부질없는 소리를 하는 걸 포기하고 난 못마땅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놈도 나쁜 놈은 아닌데 말이지, 가끔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는단 말야…….

난 녀석의 양뺨을 콱 틀어쥐고 세―게 꼬집어 준 다음에, 웃옷을 걸치고 현관 쪽으로 갔다.

벌게진 뺨을 감싸쥐고서도 웃는 낯으로 녀석이 뒤를 따른다.

“그럼 난 간다. 볼일 잘 보고.”

“아아, 삶의 고뇌에서 벗어난 해신이의 평화로운 일상에 건배!”

녀석은 와인 잔이라도 들어올리는 시늉을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픽 웃으면서 녀석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그 집에서 나섰다.

뽀독뽀독뽀독뽀독…….

유리창에서 들리는 상쾌한 소리가, 열어 놓은 창 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며 멀리서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장사 트럭의 확성기 소리와 어우러져 한가롭고 평온한 휴일을 채색한다.

담배 냄새도 거의 가신 집안을 휘 둘러보는데 베란다의 큰 창에 달라붙어 창유리를 닦으면서 입속으로 쉴 새 없이 무어라 꿍얼거리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 한구석에 뒹굴고 있는 페브리즈 한 통.

다 저놈이 자초한 일이다. 바보놈.

난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흥, 하고 코웃음 쳤다. 그 소리가 들렸는지 녀석이 반짝이는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사납게 노려본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거만한 표정을 짓고 턱을 치켜 올리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부아가 치밀어 견딜 수 없다는 듯 걸레로 유리를 텅 때리더니, 마구잡이로 걸레질을 했다.

그러니까, 약 한 시간 전이다.

집에 들어온 나는 나갈 때와 무엇 하나 변한 것 없는 집안의 모습에 안색을 굳히고 멈춰 섰다.

인상이란 인상은 다 쓰고 소파에 앉아 담배를 물고 있던 그놈은 날 보더니 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뭐.’

할 말 있냐는 듯 부루퉁하게 중얼거리는 놈에게 나는 팔짱을 끼고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소파 커버, 빨아 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페브리즈 뿌렸어. 그럼 됐잖아.’

녀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확실히 페브리즈가 텅 비어 뒹굴고 있었다.

난 그리로 걸어가, 아무래도 새 것인 것 같은데도 텅 비어 있는 페브리즈 통을 손에 들고 두어 번 흔들다가 녀석에게로 다가가 인정사정없이 그걸로 그놈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텅 빈 플라스틱 통으로 맞아 봐야 그리 아프지도 않았겠지만, 미처 예상치도 않고 있었는지 그걸 고스란히 얻어맞은 그놈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멍하니 쳐다보다가―생각해 보니 이놈이 나한테 얻어맞은 건 처음이었다―순식간에 험상궂게 표정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하는 짓이야, 이 새끼가!’

‘요만한 천 조각에 페브리즈 한 통을 다 들이붓는 바보가 어디 있어, 이 멍청아!’

‘소파 깨끗이 해 놓으라면서!’

‘빨아 놓으랬지 언제 페브리즈 뿌리라던?!’

‘살균소독소취! 됐잖아, 그럼!’

‘냄새만 없앨 뿐이지 이게 그렇게 엄청난 효용이 있는 줄 알아?! 광고에 속아 넘어가는 멍청이! 당장 소파 커버 벗겨서 빨아!’

녀석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채어 뒤돌아서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거리가 켜켜이 쌓인 게 보인다.

이놈 자식, 또 먹고 나서 뒤처리 안 했잖아. 한 냄비를 하룻밤 사이에 다 먹었으면 적어도 치워는 놔야 할 것 아냐.

물에 적신 휴지로 담배를 감싸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는 여전히 우뚝 선 채 꼼짝도 안 하고 있는 녀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른 안 빨고 뭐해. 소파를 그 꼴로 만든 건 네가 한 짓이니까 네가 책임을 져야지. 내가 네놈 뒤까지 닦아 줘야겠어?’

녀석은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은 표정을 한눈에 담고 뜨거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지만, 결국 고릴라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소파 커버를 찢어낼 듯 거칠게 벗겨내었다. 신축성 좋은 소재로 했기 망정이지 여차했으면 찢어졌을 거다. 집안 기물 망가뜨리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놈이다.

그러고 보니 조폭이랑 아는 사이랬지. 혹시, 사채 빚 받으러 다닐 때 이놈 동원하는 거 아냐……?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효과적으로 물건들을 망가뜨릴 수 있을 리가…….

물론 반장난이긴 했지만, 반쯤은 진지하게 그 생각을 하는데 녀석이 소파 커버를 다 벗겨내어 세탁기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아, 그거 세탁기에 빨지 마. 담배 때는 잘 안 지니까.’

그러자 녀석이, 그럼 어쩌라구,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난 선선히 그놈에게 걸어가 소파 커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욕실로 간다.

욕실의 좁은 욕조―성인 남자 한 사람이 들어가기에 빡빡할 정도의―에 그걸 넣고, 더운 물을 틀었다. 소파 커버가 적당히 잠길 만한 물은 금세 차올랐고, 난 이내 물을 잠갔다. 비누가루를 적당히 풀고 휘휘 저어 녹인다.

욕실 문 앞까지 따라와 뭐하나 구경만 하고 있던 녀석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려 불러들인 다음 욕조 안을 가리켰다. 녀석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여기 들어가라고?’

‘응. 밟아. 꼭꼭. 어릴 적에 가끔 해 봤지? 이불 빨래. 그거랑 같은 요령으로.’

소파 커버라고 해도 보통 면감의 천이 아니고 두툼하고 푹신하게 짜인 합성 재질이라 밟을 맛은 날 거다.

녀석이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원래 더러웠던 소파, 담배 냄새 좀 배었다고 뭐가 달라져! 네놈이 실컷 더럽혀 놓고는 괜히 담배 핑계 따위를 대서 나한테 떠넘길 작정인 거잖아!’

‘깨끗한 옷을 입고서 깔고 앉아서 더러워진 정도랑, 담배 연기에 찌들어서 누렇게 변색되도록 더러워진 정도가 같아? 나는 내가 할 일을 남한테 떠넘기는 인간은 아니야, 누구 씨랑은 달라서.’

태연한 얼굴로 한마디 한마디 명확한 발음으로 말해 준 후 나는 다시 한 번 욕조 안을 가리켰다. 녀석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악다문 잇새로 여느 양아치 같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 씨발, 미치겠네. 걸리기도 좆같이 걸려서, 돌아 버리겠구만.’

주먹으로 타일 벽을 세 번 치는데, 치면 칠수록 점점 강도가 세어진다. 그러다 못해 결국 타일 한 장이 벽에서 떨어져 나와 땅에 부딪혀 퍼석, 하고 깨졌다.

틀림없다. 이놈, 사채단을 쫓아서 집안 기물 파손하는 데에만 따라다니는 게 분명하다.

이거야 걸어 다니는 흉기도 아니고, 움직일 때마다 집구석이 온전히 남아나질 않으니.

나는 혀를 차며 변기 옆에 세워져 있던 화장실용 빗자루로 깨진 타일 조각을 구석으로 쓸었다. 나중에 화장실 청소할 때 같이 버리자.

녀석은 설마 그렇게 타일이 깨질 거라곤 생각지 못한 건지 머쓱하게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나는 당장 빗자루를 들어 맨발인 채로 움직이려 하는 녀석의 발목을 턱 막았다.

‘움직이지 마. 아직 덜 쓸었어. 발 베인다.’

‘―…. 흥, 내 발 베이면 얼씨구나 하고 춤을 출 놈이 걱정하는 척은.’

‘발 베인 놈에게 비눗물 속에 발 담그고 빨랫감 밟으란 소리는 아무리 나라도 못하거든. 얼른 욕조에나 들어가서, 밟어.’

그 말을 듣자 잠깐 머쓱한 얼굴을 했던 녀석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체, 하고 혀를 차며 욕조 안으로 순순히 들어갔다. ……들어가려 했지만, 나는 다시 빗자루로 녀석의 발목을 막았다.

‘또 왜!’

신경질을 부리는 녀석에게 혀를 차며, 나는 타일 조각을 구석으로 다 몰아넣은 후 녀석의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길게 늘어진 바짓단을 둥둥 걷어 무릎 위까지 올렸다.

‘이 바지 오늘 아침에 새로 꺼내 입은 거잖아. 비눗물에 젖으면 다시 세탁해야 하는데 비효율적이잖아, 이 얼빵한 놈아.’

정말로 바보인 건지 일반상식선에서의 사고가 불가능한 건지 알 수 없는 녀석을 매섭게 노려보곤 손을 털며 일어섰다.

이제 들어가도 좋아, 라고 고갯짓을 하며 욕실에서 나온 나는, 곧 ‘나 화났다’라고 여실히 주장하는 철벙철벙하는 물소리를 등뒤로 들을 수 있었다.

‘골고루 천 번 밟은 다음엔 나와도 좋아. ―아, 그렇지, 유리청정제 사 놨으니까, 나오면 베란다 유리도 닦아.’

일순 물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저 새끼가 누굴 파출부로 알아!! 라고 패악을 부리는 목소리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게 들려왔지만, 귀를 막고 무시했다.

녀석의 고함소리와 뒤이어 들려오는 철벙거리는 물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하며, 나는 오는 길에 장을 봐 온 비닐봉지를 풀어 냉장고에 정리해 넣었다. 오늘이야 마침 오는 길에 생각난 김에 봐 왔지만, 다음부터는 장 보는 것도 물론 저 녀석 차지다. 청소나 세탁 같은 거야 그래도 분담을 할 생각이지만, 이용할 수 있는 한은 다 이용해 먹어야지. 여태껏 내 신경을 긁어낸 것에 대한 보답은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난 놈의 분노에 찬 함성이 내게는 기쁨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고, 절로 입가에 미소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비닐 제일 밑에 깔려 있던 작달막한 생닭 두 마리를 꺼내었다. 빈 비닐은 종이접기하듯 삼각으로 곱게 접어 벽걸이식 주머니에 넣어둔다.

오늘 저녁 메뉴는 삼계탕.

이것도 잔손이 많이 가서 그리 자주 하진 않지만, (하기야 음식치고 제대로 맛있게 만들려면 뭐건 잔손이 안 가랴마는) 요 근래 축적되어 온 스트레스가 일시에 확 터져 풀리면서, 요리에의 사랑이 애끓는 열정으로 변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내 첫사랑은 초등학교 때의 실과 과목이었다(그중에서도 요리 실습).

인삼 한 뿌리를 저며 찹쌀이랑 같이 물에 담가 놓은 후 재료를 하나씩 어렵잖게 손질하는 사이, 녀석은 소파 커버를 다 밟았는지 부루퉁한 기척을 온몸으로 풍기며 욕실에서 나왔다. 난 뒤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발 깨끗이 닦고 나왔으면 현관 옆에 놔둔 유리청정제 갖고 베란다 유리 말끔히 닦아. 물걸레로 닦으면 안 되는 거 알지? 베란다에 널려 있는 노란 수건을 마른 걸레 대용으로 쓰면 돼.’

‘그래, 다 시켜라, 다 시켜, 이 망할 새끼야!’

‘기꺼이. 네가 해야 할 일은 얼마든지 말해 줄 테니, 일단 유리부터 닦으시지.’

시키라면 못 시킬 줄 아냐.

원래 집안일이라는 게 할 일이 없는 듯 보여도 구석구석에 일거리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은행 속껍질을 까면서 고이 노려보자 녀석은 노란 수건을 낚아채어 유리를 북북 닦기 시작했다.

과연, 분노가 힘의 원동력이 되는지 녀석은 무식한 힘에 무서운 기세로 유리를 닦아 가기 시작했다. 금세 유리가 뽀독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눈부신 빛을 발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즐거이 즐거이 취미생활에 탐닉했다.

확실히 스트레스의 근원이 풀어지니까 좀 살 것 같다. 인간의 삶이란 건 이런 거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나는 나를 버리지 않은 신(神)과 악우이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은 재영이 놈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뽀독뽀독뽀독뽀독…….

상쾌한 소리가 들려올 즈음 실에 둘둘 말려 가련한 포즈를 취하고 솥 안으로 들어간 두 마리의 닭과 짧은 이별을 고하고 뚜껑을 덮은 나는 가벼이 한숨을 쉬며 돌아보았다.

집은 드디어 나의 아성으로 돌아왔다. 요 얼마간 녀석의 입김이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이 없었던 때가 거짓말인 것처럼.

난 입가에 밀려드는 웃음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으며, 이쪽에 등을 돌린 채 열심히 온몸의 분노를 유리에 대고 표출하고 있는 그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손을 허리에 얹고 한손은 걸레를 틀어쥐고 있다. 반짝반짝, 유리가 없는 것처럼 저편이 말갛게 비치다 못해 거울처럼 저놈의 얼굴마저 비치는 (물론, 저놈이 서 있는 곳이 빛이 잘 안 드는 쪽이었기에 그런 거였겠지만) 것이 더욱 가관이다. 뭣 씹은 것처럼 입은 한일자로 다물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다.

기분이 좋아지다 못해 붕 떠 버렸는지, 나는 갑자기 녀석이 귀엽게까지 보이며 웃음이 나왔다. 녀석이 귀엽게 보인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난 녀석의 뒤로 다가가, 콱 틀어쥔 주먹에서 비어져 나온 걸레 끝을 쥐었다. 녀석이 손을 멈추고 사납게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다음 순간.

……오, 새로운 발견을 했다.

이 녀석, 의외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놈이었나 보다.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사그라들지 않은 채 눈이 마주치자 순간 흠칫한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움찔, 하면서 몸을 움츠리더니,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린 채 희한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사람 얼굴을 흘끔거린다.

난 녀석의 손에서 걸레를 쉽사리 빼앗아, 더 이상 닦을 곳도 없는 유리 위에 새로이 내려앉는 먼지 한 올을 훔쳐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제법 괜찮게 닦았네. 역시 힘줘서 미는 게 포인트라니까.”

그러자 녀석은 흥, 하고 코웃음 치며 못마땅한 듯 고개를 돌리더니 팔짱을 꼈다.

“그럼 이제 됐지? 나머진 네놈이 해.”

그 말만 남기고 자기 방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놈을 돌아보며, 난 태연하게 한마디 던졌다.

“어딜 가? 아직 욕조 안에 소파 커버가 그대로 들어 있는데.”

녀석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고개를 외로 꼬며 비스듬히 돌아보는 녀석의 눈동자에 터질 듯한 빛살이 서렸다.

드물게도 기분이 좋아진 나는 빙글, 눈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할까도 했는데, 상헌이 네가 다 시켜 달라니 무시할 수야 있나. 세 번 더 밟아 헹궈서 잘 짠 다음에 베란다 창 열고 창틀에 널어 놓으면 돼. 그러고 나면, 그렇지, 쓰레기 봉지 묶어서 내다 놓아 줄래? 박스 안에 들어 있는 종이들은 분리수거 하는 거 잊지 말고.”

부탁할게, 라고 웃으며 걸어 나선 나는 부엌으로 가는 도중에 녀석을 스치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틀어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보여 더더욱 유쾌하다.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게 얼마나 유치한 짓이며,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 할 행동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나도 감정이 살아 있는 인간이다.

저놈이 이 집에 들어온 직후 얼마간 내게 해 댔던 언행들을 생각하면, 극히 일부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 올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가 유발되었다.

당분간은 참고 살아야 할 것이다, 정상헌.

그래, 적어도 네가 내 가슴에 못질을 해 댄 그 시일만큼은.

“……야.”

악문 이 사이로 거친 숨결과 함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것만큼이나 무시무시한 기백을 담고 있었지만, 내가 눈살을 찌푸린 것은 그 목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녀석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나는 녀석의 턱을 잡고 억지로 입을 열었다. 당황한 듯 얼른 내 손을 잡아떼며 녀석이 얼굴에 의문부호를 담는다.

“이 악물지 마. 이 상하니까. 건강한 치아는 오복 중의 하나. 몰라?”

“네놈 때문이잖아!”

“그래, 말 잘했어. 나 때문에 식생활에 의한 네 건강은 훌륭하게 유지될 테니, 치아 건강만큼은 너 스스로 챙겨!”

말을 한 바퀴 빙글 꼬아 대답하자, 녀석은 허를 찔린 듯 우물거리다가 결국 에이 씨, 하고 소리를 지르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이러 걸음을 옮겼다.

절대적 우위에 선 채 다른 사람과 다툰다는 건 역시나 비겁하고 치사한 일이긴 하지만, 즐거웠다. 마치 싸움놀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철이 든 이후, 싸운다는 행위에서 소모되는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의 양이 어느 정도인가를 깨닫고는 가능한 한 싸움을 피하려 했었다. 물론 지금도 싸움은 싫어한다.

하지만, 이건 마치 어린애인 양 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미있지 않은가.

물론 녀석으로서는 악몽처럼 심기가 언짢은 일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제법 즐거웠다.

철벙거리는 물소리가 흘러나오는 욕실 쪽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 번 픽 웃고 말았다.

결국 이날, 녀석은 엄청나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래봐야 고작해야 첫날일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집안일에 좀 써먹히는 게 기껏해야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화가 치밀어 못 견디겠는지, 얼마나 밟아 댄 건지 거의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소파 커버를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창틀 위에 턱 걸쳐 두곤, 착하게도 쓰레기 봉지까지 바깥에 내다버리고 와선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내 앞에 섰다.

“네놈이랑은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

하루 만에 말을 번복하다니.

며칠 전만 해도 속이 울컥거리며 언짢은 기분이 뭉게뭉게 치솟아 차마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녀석의 얼굴을 나는 태연하게 빤히 올려다보다가, 아,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좋을 대로. 언제 나갈 건데?”

“지금 당장. 오늘 하루 네놈 하라는 대로 다 해 줬으니, 이걸로 서로 빚 없는 거다. 너도 나도 서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거야, 알겠어?”

요는, 완전히 타인으로 돌아갈 테니 자기 사정은 아무한테도 불지 마라, 라는 거군.

그다지 남 일에 신경쓰는 성격도 아니니, 나로서야 별 손해날 것 없다. 다만, 이런 즐거운 싸움놀이를 더 못하게 되는 건 아주 조금 아쉬웠지만.

그 말만 던지고 녀석은 집을 나갈 채비를 하려는 듯 제 방으로 들어갔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가기 전에 열쇠는 돌려줘.”

이럴 줄 알았으면 닭은 한 마리만 살 걸.

나는 슬슬 다 되어가는 냄비를 내려다보며 조금 아쉽게 생각했다.

녀석이 짐이라도 싸는 듯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동안 요리는 완성되었고, 나는 아직 식지 않았을 때에 급속 냉동시켜 두는 것이 그나마 요리를 가장 맛있게 보관하는 법이라는 방식 그대로, 큼직한 이중 팩을 꺼내어 닭 한 마리를 옮겨 담을 채비를 했다.

그때, 드디어 짐을 다 쌌는지 녀석이 커다란 가방을 걸머메곤 도로 방에서 나와 열쇠꾸러미를 식탁 위에 냅다 던졌다.

“자, 돌려줬다. 됐지?!”

“응? 아아. 지금 나갈 거야?”

“다른 물건은 대충 박스 안에 넣어 뒀으니까, 나중에 주소 보낼 테니 택배로 부쳐.”

“착불로 보낼 거다.”

“맘대로 해.”

녀석은 내 손에 들린 커다란 국자와, 냄비 속에서 국물 따라 흔들거리고 있는 닭을 흘끔 보곤 휙 걸음을 돌려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뭐, 덜 챙긴 거라도 있는 모양이다.

조금 전보다도 더욱 요란하게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챙기는 기색이 역력한 녀석에게서 신경을 끊고, 나는 닭을 떠올려 튼실한 팩에 옮겨 담고, 깔때기를 꺼내어 국물도 부었다.

아무래도 좋긴 하지만, 뭐 별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껏 만들었는데,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문득 조금, 아주 조금 우울해진 나는 밑접시에 국물을 조금 담아 호록 마셔 보았다.

인삼 맛이 딱 알맞게 우러났다. 간이야 어차피 자기가 맞추는 거니 됐고, 닭 속을 살짝 긁어 보니 찹쌀도 그렇게 찰지게 맛이 스며 있을 수가 없다.

냉동시키면 아무래도 맛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뭐 할 수 없는 건가.

아, 아니다. 재영이 놈을 불러다 앉히고 천천히 기민이 같은 놈이랑은 헤어지라는 충고라도 할 겸, 그놈이나 줄까.

아침엔 카레에 저녁엔 삼계탕이라니, 녀석도 먹을 복이 터졌군, 하고 내심 생각하면서, 난 국자를 냄비에 걸쳐 놓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마루 장식장 위에 당그라니 있던 유무선 전화기는 상헌이 녀석의 손에 의해 골로 가 버렸다).

하지만, 없었다.

하기야 일하러 나갔을 시간이기도 하니 집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난 자동응답기가 돌아가는 녀석의 집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괜히 폰으로까지 전화할 건 없고, 음성이나 남겨 두자.

“……응, 재영아? 삼계탕 했다. 한 사람 몫 남게 되었으니까, 먹으러 오―….”

도중에 입을 다문 건, 방안에서 부스럭거리던 녀석이 완전히 나갈 채비를 마친 듯 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걸머메고 나왔기 때문이다.

사납기 그지없는 눈으로 우뚝 서서 날 노려보는 놈에게 어서 가 보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

녀석은 가방을 바닥에 턱 내려놓더니 내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녀석을 바라보는데, 녀석은 내 손에서 쉽사리 전화기를 뺏어들더니 서슴없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난 바보처럼 눈만 깜빡이며 녀석의 하는 양을 보고만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눈살을 찌푸렸다.

“정상헌, 뭐하는 거야? 왜 남 전화하는데―.”

“이 자식아, 너도 양심이 좀 있어 봐라.”

갑자기 이놈이, 이를 악문 채 뜬금없는 소리를 뇌까렸다.

나는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가 하아, 하고 중얼거렸다.

“양심……?”

“그래.”

“……. 그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나한테 대고 지껄일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 모르는 사이에 국어대사전에 엄청난 개편이라도 있지 않았던 이상은.

녀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빛내더니, 내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를 지르는 말이란 게.

“하루 종일 사람을 가정부처럼 부려먹고, 뭐하자는 짓이야? 사람이 나간다는데 굶겨서 내보내는 양심 없는 놈이 너 말고 그럼 또 누가 있어?!”

……조용히나 있으면 50점은 주지,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문득 의심해 본다.

나는 녀석의 손아귀에 멱살을 맡겨 놓은 채, 시선만 녀석의 어깨너머 냄비 속을 흘끔 바라보았다.

윤기 나는 찰밥을 뱃속에 품고서 인삼, 대추, 은행 등등과 함께 푹 고아낸 국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어린 닭의 자태가 아리땁기 그지없다.

그래, 네가 어딜 간들 저렇게 외향이 아리땁고 맛이 그윽한 삼계탕을 먹어 보겠냐.

……마는.

푹 웃어 버렸다.

진지하게 사람 멱살을 쥐고 화내고 있는 이놈의 단순성이 이 순간 너무도 확실하게 잡혀 버려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섯 살이다, 다섯 살.

많이 봐줘야 여섯 살.

이놈은 정말로 주먹싸움이랑 싫어하는 놈 괴롭히는 거, 그리고 먹을 거에만 목숨을 거는 어린애다.

단순한 놈.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놈 같으니.

내가 웃음을 터뜨리자 입을 다물고 희한한 얼굴을 하는 녀석을 마주보며, 난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죽이며 가능한 쌀쌀맞게 말했다.

“같이 살 놈이라면 모를까, 금방 나갈 생판 타인에게 내가 만든 요리를 왜 줘?”

녀석은 으,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겠지. 제 입으로 나가겠다고 한 주제에 할 말 없을 게다.

난 멱살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을 떨쳐내며 다시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에게서 뒤돌아서, 웃는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목소리에 배어나오는 웃음기를 죽이려 안간힘을 쓰며, 태연한 척 중얼거렸다.

“뭐어……, 그래도 이걸로 영영 마지막이고 하니, 어차피 남기도 한 거, 줘 볼까.”

“―안 먹……!”

“자, 일단 국물부터 조금.”

밑이 오목한 접시에 국물을 담아 냉큼 녀석의 입술 끝을 두드리자,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녀석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말없이 내 손에서 접시를 거칠게 낚아내어 단숨에 들이켠다.

표정이 부루퉁하게 누그러지는 걸 곁눈으로 보고 픽 웃으며, 난 비닐 팩에 담았던 걸 도로 꺼내어 냄비에 붓고 약불에 올렸다. 금세 뜨끈한 김이 솟아오른다.

“먹고 갈 거지?”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쌀쌀맞게 한마디 툭 던지자, 녀석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발끝으로 식탁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따끈따끈 김이 솟는 삼계탕을 한 그릇 듬뿍 떠 녀석의 앞에 놔 주고, 내 몫도 떠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속도로 음식 그릇을 비워나가는 녀석을 반쯤은 경악이 스민 눈으로 바라보며, 나도 천천히 그릇을 비워나갔다.

하지만, 뭐어, 생각지도 못했던 거긴 하지만,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든 것에 정신이 팔려 잘 길들인 대형견처럼 맛있어, 맛있어 라는 얼굴을 하고서, 결코 우아하다고는 할 수 없이 무식하게 먹어치우는 저런 표정을 앞두고 하는 식사라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개나 한 마리 키워 볼까. 큼직한 걸로.

갑자기, 근 30여 년간 살아오면서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내 몫의 음식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 이미 녀석은 제 몫의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냄비의 국물을 따라 밥까지 말아먹고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만족스럽다는 얼굴을 한 주제에 곱지 않은 눈으로 날 쏘아보던 녀석은, 묵묵히 가방을 들고 도로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반찬들을 냉장고에 도로 넣고 빈 접시를 개수대에 담근 후 귀를 기울여 보자, 찌익, 찌익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무래도 박스를 봉했던 테이프를 도로 뜯고 있는 것 같다. 와르륵, 하고 가방에 담았던 물건들을 쏟아내는 것 같은 소리도 섞여 들렸다.

“야, 정상헌! 짐 정리 하려거든 설거지부터 해 놓고 난 다음에 해! 부엌을 치워 둬야 내일 먹을 식사 준비를 할 것 아냐!”

방문을 두어 번 두드리며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한 후 난 유유히 욕실로 들어갔다.

가사 노동을 하고 맛있는 밥을 배불리 먹은 후 따끈한 물속에 몸을 담근다는, 더없이 나른하고 기분 좋은 휴식을 취한 후 씻고 나왔을 때, 나는 커다란 몸을 어색하게 웅크리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 놈의 모습을 보았다.

녀석이 겸연쩍은 듯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걸 못 본 척하고,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정말로, 정말로 처음이었다. 저 덩치 크고 험상궂은 녀석이 귀엽게 보인 건, 맹세코 오늘이 처음이었다(확실히, 그간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미쳐 버린 게 틀림없는 것 같다).

난 앞으로 지출될 막대한 식비를 손꼽아보며 한숨을 쉬다가도, 쨍강,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에 뒤이어 들리는 저놈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듣곤 바닥에 엎어져 웃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가 방문 너머까지 새어나갔는지, 녀석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목소리로 거칠게 소리쳤다.

“열쇠나 도로 내놔!!”

너, 집에서 나가겠다고 유세는 왜 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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