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7)

4

그래, 그렇게 많은 카드들과 지갑 속 빡빡하게 꽂혀 있는 그 지폐들, 결국 그렇게 생겨난 거였단 말이지.

요는 그놈이 부자라서 연상의 여인과 사귈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연상의 여인을 잘 물어서 녀석이 부자가 된 거였다.

그래그래, 그런 놈이었다는 거로구나. 그런데 그렇게 잘난 얼굴을 하고 다니다니.

나는 입 밖으로 웃음이 슬슬 배어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즐거이 집으로 들어갔다.

아직 녀석은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은 오후에 내가 집에서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녀석의 잔해로 어지럽혀져 있었지만, 그것마저 지금은 곱게 봐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담배 냄새는 싫었기에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지저분한 식탁 위도 정리했다. 세탁기 옆에 떨어져 있는 세탁물도 세탁기 안에 고이 집어넣었다.

갑자기,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차하면 돈 좀 들더라도 집 구해 주면 되는 거고.

원조교제나 하고 있는 저 한심스런 놈 때문에 한계까지 신경을 갉아먹으며 사는 것도 이제 견딜 수 없는 정도까지 갔다.

집 청소도 해야겠고, 설거지도 해야겠고, 빨래도 해야겠다.

너무나 혹독하게 신경쇠약에 시달리면 사람이 한순간에 정신이 돌아 버리는 일도 있다. 내가 지금 그런지도 모른다.

집 하나 구해 주면 되는구나, 라고 결론을 내리자 이렇게 편한 걸.

난 요 며칠 죽어지냈던 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이 빌어먹을 놈을 마지막으로 어떻게 긁어 줄까 생각에 잠겼다.

아, 기운이 좀 돌아오니까 허기가 진다.

오랜만에 뭔가 만들어 볼까. 밑반찬에 밥만 먹는 것도 질린 참이고. 미식에 길들여진 혀가 울고 있기도 하고.

난 찬장과 냉장고를 뒤적였다. 최근에 장 보러 간 기억이 없는 걸 보니, 변변찮은 음식 재료도 없으려니 싶었다. 있는 거라곤 그나마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식재료뿐.

당근, 감자, 양파, 말린 버섯, 계란, 단호박, 콩.

계란은 상했을 테니 버리고, 당근은 조금 말랐지만 아직 쓸 수 있겠다. 버섯은 물에 불려 놓고.

가만히 재료를 보고 있으니 머릿속에서 퐁 하고 카레가 떠올랐다.

그래, 카레 하기에 적당한 재료구나. 마침 단호박도 있으니 딱 좋군.

몇 시간 전의 지옥 끝까지 떨어진 것 같은 기분과는 동떨어진, 당장 천상으로 날아오른 듯한 기분에 스스로 잠시 ‘나 혹시 과도한 스트레스로 미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다.

카레 루를 꺼내 보니 매운 맛밖에 없었다. 하지만 잘만 요리하면 매운 맛이 오히려 더 맛있다. 그리고 난 잘 요리할 만한 실력이 있다.

매운 맛 카레엔 우유 3분의 2 국자만 부으면 맛이 부드럽고 윤택해지지. 그렇게 맵지도 않고, 오히려 보통 순한 맛 카레보다 훨씬 맛있어진다.

그럼 우유를 사러 가야 하나. ……나가는 것 귀찮은데, 결국 나가야 하는 걸까.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일단 버섯을 물에 담가 놓고 젖은 손을 닦았다. 요 앞의 슈퍼에 가서 우유나 하나 사와야겠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하늘을 날던 내 기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곤두박질쳤다. 이토록 급격한 기분의 변화라니, ……나 미친 거 맞나 보다.

파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 신경으로, 웃옷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서는 녀석을 흘끔 보았다.

녀석은 늘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놈이 웬일로 부엌에 서 있나 신기한 듯 역시 날 흘끔 봤지만, 깨끗이 무시했다.

그래, 하지만 이것도 오늘로 끝이다.

어차피 최악의 경우 집까지 구해 줄 각오를 한 바에는 앞으로 오래 볼 일도 없다.

나는, 천천히 고의적인 웃음을 입가에 떠올리며, 첫발부터 폭탄을 떨어뜨렸다.

“6년 사귄 애인이랑 헤어졌다는 고등학교 친구는 잘 위로해 주고 왔어?”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 폭탄이 정확히 목표 지점 중심부를 강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싹 굳어 버린 얼굴로, 녀석이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날 돌아보았다. 그 퍼렇게 얼어붙은 표정이, 내게 가슴속이 오싹해져 올 정도의 쾌감을 안겨 준다(그래, 미쳤다니까).

“너―….”

“한 번 만날 때마다 수표를 몇 장이나 아무렇지 않게 주는 여자라면 나도 사귀고 싶은데 말이지.”

두 발째.

역시나 멋들어지게 명중이다.

녀석의 얼굴이 점점 더 파랗게 질렸다. 아니 이제 숫제 하얗다.

“친구가 칵테일바에서 근무하는데 말이지, 아까 잠깐 만나러 갔었는데 너도 왔더라. 말을 걸까 했는데 ‘영란 씨’랑 너무 친해 보여서. 근데 이상하다……. 오늘, 유나 씨랑 만나는 거 아니었어? 유나 씨, 6년이나 된 애인이랑 헤어졌대? 가엾어라.”

조금 더 이죽거리려다가 입을 다문 건, 순간 녀석의 눈이 퍼렇게 번쩍였던 탓이다.

녀석은 한달음에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당장 내 멱살을 쥐어 올렸다. 힘이 센 줄은 알았지만 설마 성인 남성을 달랑 들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줄은 몰랐다.

“이 새끼가, 쥐새끼같이 내 뒷염탐이나 하고 다녀?”

“내가 먼저 갔었어, 그 가게! 그 여자보다 한 시간은 더 먼저 가 있었다고.”

숨쉬기가 괴로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할 말은 무사히 마쳤다.

녀석이 내 멱살을 쥔 채 뒷벽에 거의 내리찍듯이 밀어붙였을 때엔 등뼈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파서 순간 눈앞에 별이 보였다.

처음으로 육체적 폭력을 당하자 새삼 분노가 불같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난 쾌재를 불렀다.

녀석은 당황했던 모양인지, 가엾게도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말을 해 버렸던 것이다.

“이 새끼, 어디 가서 말했다간 그냥 안 둔다. 죽여 버리겠어.”

아하, 빙고.

바보 같으니, 제 입으로 제 약점을 말하다니.

난 생각지도 못하게 들어 버린 녀석의 약점에 눈을 반짝였다. 녀석도 알아차린 듯, 아차, 하는 얼굴을 한다.

난 녀석을 정면으로 노려보며, 이죽거리며 비꼬는 말투를 버리고 평소처럼 싸늘한 어조로 한마디 한마디 말했다.

“호오, 그래도 곤란하긴 한가 보지, 정상헌. 하긴 너 하나 믿고 사는 지방에 있는 홀어머니랑(다소 이미지에 갭은 있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널 다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얼빠진 돈덩어리 아줌마랑, 네가 침대로 끌어들이느라 고생깨나 한 유나 씨며 그 외 여자들이 알면, 곤란해질 거라고 생각은 하나 보네?”

“이 새끼가!!”

녀석은 아예 목을 졸라 죽일 기세로,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난 숨이 턱 막혀 잠시 마른기침을 하다가,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 버렸다.

녀석만큼의 완력은 아니지만 어쨌건 녀석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의 펀치는 되었던 모양이고, 반 바퀴쯤 돌아갔던 녀석의 얼굴은 거의 야수의 형상을 하고서 날 돌아보았다.

“걱정 마시지, 정상헌 씨. 난 네 그 돈덩어리나, 다른 여자들에게 연락할 방도는 모르니까. 적어도 앞으로 네가 그 여자들을 집으로 끌어들이지만 않으면, 그 여자들에게 네 돈줄이 뭔지를 말할 방법이 없단 말이다. 알겠어? ―아아, 하지만, 그래, 정희 씨한테는 말할 수 있겠네. 그래도 착하다고 믿고 있는 아들이 실은 몸 팔아서 부잣집 아들 행세한다는 거, 들으시면 참 즐거워하시겠어.”

내가 생각해도 좀 비열한 대사다…….

하지만 그만큼 난 악에 받쳐 있었고, 나를 그렇게까지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놈이었다.

녀석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날 반죽음시켜 놓건 말건, 어쨌건 난 정말로 목숨만 붙어 있으면 이 녀석에 대한 걸 동네방네 퍼뜨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난 무시무시하게 날 노려보는 녀석에게, 한마디 덧붙여 승부수를 걸었다.

“하지만, 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 어때? 처음에 약조했던 생활 규칙과 더불어, 내가 하는 말을 얌전히 잘 따라 준다면 나도 네 인간관계에 대해선 아무 말 않겠어.”

녀석은 조용히 날 노려보았다. 어딜 물어서 단숨에 죽여 버릴까 고민하는 맹수처럼, 정말 금세라도 살인이라도 할 눈으로 무시무시하게 날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잇새로 낮게 내뱉었다.

“웃기시는군. 그렇게 될 성싶어서? 어디 한 번 해 보시지, 죽고 싶으면. 응? 죽고 싶으면 어머니한테 전화해 보라고.”

그러곤 가만히 침묵한 채 녀석을 마주 쏘아보고만 있는 날 잠시 더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겁이라도 먹어서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욕실로 들어갔다.

난 조용히, 그러나 녀석에게는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겠지……? 나중에 후회하지 마.”

그러자, 녀석이 욕실로 들어가던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쾅, 하고 벼락같은 소리가 나면서, 이어 우지끈, 하는 소리도 뒤를 이었다. 약 30초 동안, 그 비슷한 소리가 끊임없이 욕실 쪽에서 흘러나왔다.

녀석은, 정말로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기라도 하듯이, 욕실 문을 미친놈처럼 마구잡이로 때려 부수고 있었다.

예전에 현관문으로 이미 입증해 보였던 녀석의 완력은 1분도 채 되기 전에 욕실 문을 욕실 벽에서 반쯤 분리시켰고, 가엾게도 문은 걸레가 된 채 끼익거리며 흔들렸다(이놈은 문이라는 것에 대해 지독한 증오라도 품고 있나 보다. 이유가 뭘까).

집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녀석은 돌아 버린 것 같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놈은, 설령 날 저 문짝 꼴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날 죽이진 못한다. 딴놈은 멱을 따더라도 적어도 내 멱을 따지는 못한다.

그러면 정희 씨에게도 그렇고, 녀석이 나름대로 잘 따르는 우리 아버지를 볼 면목도 없을 테니까(이 경우 녀석이 나름대로 효자라는 점이 녀석의 핸디캡이 되었다).

그리고, 설령 저 문짝 꼴이 난다고 할지라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나중에 내가 저놈에 대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할 거라는 것 역시(아니 오히려 어설프게 반죽음시켜 놓으면 악에 받쳐 더욱더 악의에 찬 말을 퍼뜨릴 거라는 걸) 녀석도 나도 알고 있었다.

아마 이놈, 내가 다른 인간만 되었어도 나중에 감옥을 가는 한이 있어도 제 성질에 못 이겨 여기서 때려죽이고 말았겠지.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널 막고 있구나(이래서 조직폭력배들이 서로의 가족을 연판장으로 삼는 건가 보다).

난, 비열하게도(라지만, 씨를 뿌린 건 저놈이라니까) 죽일 테면 죽여 보라고 당당하게 녀석을 노려보며,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게 네 대답이란 거지……? 좋아.”

그리고 당장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내 손가락이 누르는 번호는, 저 녀석도 익히 알고 있는 번호.

경주 지역번호가 054에, 그 다음 번호가…….

순간, 비호같이 녀석이 날아왔다.

녀석의 한주먹이 전화를 때려 부쉈고, 다른 한손은 내 손목을 잡아 올렸다.

“……내 핸드폰도 부술 거야? 그 다음엔, 세상에 널려 있는 공중전화도 다 부술래? 재밌겠네.”

내 말에 녀석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얼굴을 했다.

아마 이 세상에 지옥의 야차가 살아 돌아왔다면 그런 얼굴이었을 거다.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데, 녀석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송곳니가 흘끗 보이는 게 더더욱 섬뜩했다.

그러나 결국 녀석은, 약 1분 30초 가량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열적으로 날 쳐다본 끝에, 악문 잇새로 신음소리처럼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알……았……어……. 뭐부터, 하면……돼……?”

신이시여!

정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저 멀리서 천상의 음악이 들려오는 것을 환각처럼 들으면서,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다.

믿어지지 않는 정의 탈환에 나는 손까지 벌벌 떨려 오는 것을 느끼며 미친 듯 머리를 굴렸다.

이놈한테 뭘 시키지? 엎드려 뻗쳐를 시킬까? 골목에서 포복전진을 시켜 버려?

환희에 찬 머리는 그러나 빠르게도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구나, 우선은.

난 승리에 젖은 눈으로 녀석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가서 우유부터 사 와.”

그 다음엔, 청소도 빨래도 설거지도 다 시켜야지.

카레는 마침맞게 끓고 있었다.

요리에 손을 놓고 있던 나날도 내 손맛에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물 양도, 재료 양도 계량컵으로 잰 듯 딱 알맞다.

나는 적당히 다 되었겠다 싶은 때에 카레를 한 스푼 냄비에서 건져, 후후 불어 입안에 넣었다.

부드럽고 진한 카레 맛이 입안에 퍼진다.

아아, 완벽하다.

구태여 딱 하나 단점을 찾자면, 카레는 원래 재료 구석구석까지 카레향이 배어들게 하기 위해 반나절 가량은 묵혀 둬야 하지만, 뭐 이걸로도 충분히 맛있다.

요 며칠 제대로 된 음식을 맛보지 못한 혀가 기쁘게 오케이 신호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재영이가 카레를 좋아했었지. 전화를 하면 기꺼이 당장 달려오겠지만, 벌써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이니 패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저녁을 걸렀던 나는 허기에 지친 배를 위로하고자 만족스레 콧노래를 부르며 고슬고슬하게 막 지은 밥을 넓은 접시에 펐다.

실로 평온한 밤이다.

아늑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집안은 여느 때와 변함없이 마음의 평화를 아낌없이 내주고 있었다.

거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세탁기는 부엌 밖 작은 베란다에서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으며, 부엌에는 그윽하게 카레 내음이 떠돌았다.

평소 내가 만끽하고 있던 사랑스런 내 집이다.

딱 하나, 욕실 쪽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딱, …딱 하는 소리만 빼고는.

“정상헌, 아직 멀었어?”

대답 대신 돌아온 건, 조금 커진 떵! 하는 울림.

저 녀석이 욕실 문 고쳐 놓으라고 했더니, 문에다 대고 망치질을 했나 보다.

그러나 조금 전의 그 소리가 마지막 못 박는 소리였던 모양, 공구 상자를 들고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웃통을 벗은 채 한손에 공구 상자, 한손에 망치를 든 모습이 꼭 공사판에서 일하다 온 사람 같다.

살기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한손에 망치를 들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니 인생의 끝자락이 덩달아 아스라이 보이는 듯하다.

나는 녀석을 마주보며 부드럽기 그지없게 빙―긋 웃어 보였다(아마 이 녀석에게 그렇게 웃어 보인 건 처음이지 싶다).

“청소에 빨래에 수리까지 해 주다니, 고맙기도 하지. 아, 나중에 샤워한 후엔 욕실 정리하는 것 잊지 말고. 카레 만들었는데, 늦은 시간이지만 너도 먹을래? 아, 하지만 넌 유나 씨랑 저녁 먹고 왔지?”

“…….”

죽어라 날 노려보던 그 녀석이, 갑자기 분통이 치밀어 견딜 수 없다는 듯 공구 상자를 저만치 사정없이 내팽개쳐 버렸다. 그리고 그 위로 망치까지 던져 버린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망치에 정통으로 맞은 철로 된 공구 상자가 휘어졌다.

“음……. 공구 상자 제자리에 갖다놓기 전에 휘어진 거 깨끗하게 펴 놓고 갖다 놔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렇게 말한 나는 내 몫의 카레만 담아 식탁 앞에 앉았다.

겨우 공구 상자랑 망치 던진 것 정도로 지칠 놈도 아닐 텐데, 뭐가 그리 힘든지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욕실 문 고치는 게 꽤 힘들었나 보다. 하지만 망가뜨린 게 너니까, 고치기도 네가 해야지.

“……야, 윤해신.”

녀석이 으르렁거리며 내 이름을 읊었다.

“형․님.”

난 카레를 밥과 잘 섞으며 대답했다.

이놈, 생각해 보니 줄곧 반말이다. 하긴 10여 년 전의 그때에도, ‘형님’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오죽 싫었던지 가능하면 내 이름을 안 부르려고 안간힘을 썼었다. 저놈 입에서 형님이라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어쩌면 한 번도 그렇게 안 불렀는지도 모른다.

녀석은 갑자기 확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멈칫하더니 테이블을 향해 그 주먹을 박아 넣었다.

그래도 한줄기 남은 이성이, 차마 내게 주먹을 박지는 못하도록 말렸나 보다.

사실 난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없었다. 아버지가 저런 사람이고 가족 상황도 저렇다 보니,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누구한테 맞은 적이 거의 없었던 탓이다.

혹자는 어릴 때부터 맞고 자란 놈이 만성이 생겨서 폭력도 잘 견딘다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아니, 일체 거짓말은 아니라고 해도 다분히 개인차가 있다. 어릴 적부터 맞고 자란 인간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움츠러들게 마련이다. 겉보기엔 아무렇지 않아도, 어쨌건 내부적으로는 그렇다. 아픈 것의 공포를 익히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제대로 맞지 않고 거의 내팽개쳐지다시피 해서 자란 나란 인간은, 하긴 나처럼 자라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쨌건 적어도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남들에 비해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내가 두려워하는 건 폭력보다는 굳이 따지자면 내 정신을 피 말리고 번거롭게 하는 환경이랄까.

뭐 어쨌건, 그런 전차로 인하여, 나는 녀석이 완력을 눈앞에서 아무리 휘둘러도 그에 대해 겁을 먹거나 할 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녀석이 테이블을 내리치건 문을 부서뜨리건 녀석의 화풀이는 될지도 몰라도 그 외의 효과는 얻을 수 없는 거다.

나는 녀석이 테이블을 내리치는 통에 튀어 오른 접시가 테이블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것을, 숟가락을 한 손에 들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너, 아까운 음식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줬더니 이게 웬 행패야, 행패가! 쯧.”

난 조용히 일어서 새 접시에 다시 밥과 카레를 펐다. 푸는 김에, 아무래도 칼슘이 부족한 듯한 저 녀석의 몫도 한 접시 퍼 준다. 바닥에 떨어진 건 나중에 저 녀석더러 치우라고 해야지.

난 다소 거칠게 그 녀석 앞에 카레 접시와 수저를 턱턱 놔주었다.

“먹어! 먹고 네 죄를 알아라!”

그리고 난 그 녀석에게서 신경을 끊고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아랑곳 않았다.

녀석은 이내 포기했는지 내 앞의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이 집에 들어온 이래 이렇게 나란히 테이블에 마주앉는 것도 처음이지 싶다.

“야, 윤……. ……이봐, 잠깐 얘기 좀 하자.”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불러젖히려다 말고, 내가 또 ‘형님이라고 붙이라니까’라고 할까 봐 두려웠는지 조용히 이름을 입안으로 삼키더니 말을 꺼내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고작해야 두어 시간 만에 사람이 눈에 띄도록 해쓱해질 리는 없는데도, 기분 탓인지 녀석의 얼굴이 피로로 야윈 것 같았다.

선이 거친 험상궂은 얼굴에 피로와 수심을 담은 채 눈을 번뜩이며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을, 나도 한손으로 턱을 받친 채 가만히 마주보았다.

“좋아, 해 봐.”

녀석은 내 선선한 말투에 울컥한 것 같았지만, 용케 참고 알았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좋아, 알았어, 알았다고. 앞으로 가능한 너랑 집안에서는 안 부딪히도록 하지. 나라고 네 얼굴 날마다 보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니니까, 가능하면 너랑 안 마주치도록 노력하겠어. 그러니 너도 내 일에 일절 간섭하지 마라.”

“안 마주치는 정도로 될 리가 없잖아. 혼자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럼 나더러 계속 네 몫의 집안일까지 하라는 거야?”

“―좋아, 내 몫은 내가 하지. 내 빨래도, 설거지도 내가 하겠어. 거실이나 부엌은 어지럽히지 않을 거고, 소음도 줄이도록 하지. 여자도 안 데려오겠어.”

녀석이 많이 양보한다는 식으로 말하며 어때? 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난 지그시 녀석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래, 이 이상 하면 이 녀석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니, 대충 이 정도에서 타협을 봐 줄까.

난 다시 카레 접시로 내 시선과 손을 옮겼다.

“하나 빠졌잖아. 장 보는 거. 요리를 내가 하면, 적어도 그 재료 준비라도 네가 해야지. ―아, 맞아, 어렵게 번 돈일 테니 장 볼 돈은 내가 주겠어.”

대충 그 정도에서 타협을 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뒷말이 녀석의 신경을 건드렸나보다(하긴 나도 그러리라는 걸 예측하고 한 말이긴 했다).

빠직, 이마에 힘줄이 돋은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먹어! 이 집구석에 있는 건 김치 조각 하나도 안 먹을 테니까 네놈 혼자 요리건 뭐건 해서, 네놈 혼자 다 먹어!”

“어, 정말?”

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사실 의외이긴 했다.

이 녀석, 만들어 놓은 밑반찬을 워낙 잘 먹기에 내가 만드는 게 입에 맞긴 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고(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그것마저 맘에 들지 않았었다), 당연히 밥은 집에서 먹고 다닐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하지만 뭐, 싫다면 나로서도 편하다. 요리하기 귀찮을 때까지 이놈 때문에 부엌에 설 필요 없고, 아무 때나 이놈 입맛 생각 안 하고 나 먹고 싶은 거 만들어서 먹으면 되고.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잘 됐네, 안 그래도 너 많이 먹어서 식재료비 무진장 나가겠다 생각하던 참인데.”

카레는 이놈을 생각해서 좀 넉넉하게 만들긴 했지만, 뭐 나도 카레는 좋아하니까 혼자 간식으로 조금씩 퍼먹어도 되고, 재영이도 좀 나눠주자.

난 이를 악문 채 금세라도 상을 엎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식생활에 관련된 건 일절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 이봐, 카레 식는다. 그게 이 집에서의 네 마지막 식사니까, 꼭꼭 씹어 먹어.”

형식적으로 방긋 웃어 주었다. 잠깐 정희 씨가 녀석의 식생활을 걱정하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런 소소한 것에 매여 있어서야 나의 스트레스 지수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그래서야 안 될 말.

하지만 녀석은 저 고집에, 두 번 다시 내가 이 집에 있는 걸 먹나 봐라, 하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 생각도 않고 꼿꼿이 앉아 날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지간히도 분통이 터지나 보다.

내 몫의 카레는 거의 다 먹어 가고, 배가 부르고 기분도 나아지자 나도 조금 제대로 이야기할 마음이 생겼다.

“나로서도 동거 생활 불편하게 하는 건 딱 질색이니까 하나만 더 추가하자.”

평소와 마찬가지의 얼굴로 조용히 말을 꺼내는 것을 녀석은 내 나름대로의 화해 신청이라고라도 받아들인 건지 조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그 표정도 내가 한 말을 듣자마자 싸늘해졌다.

“네가 이야기한 것에 플러스 원, 이 집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도록 해.”

“―네가 집주인이니까, 네 앞에선 기기라도 하라는 거야?”

너처럼 커다란 게 앞에서 기어 다니면 통행 방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설마. 단지, 그만큼 서로의 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신경쓰자는 거지. 너도 내 신경이 예민한 편이라는 건 알고 있을 거고, 어떤 식으로 생활하는 게 타인과의 생활을 무난히 지켜나가는 방식인지도 알고 있을 것 아냐.”

네 덕분에 요 근래 줄곧 미열이 따라붙어 이제 만성발열 환자가 될 지경인데.

녀석은 생각에 잠긴 눈치로, 하지만 여전히 사나운 눈매는 거두지 않은 채 한동안 날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노력하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 이상 나한테 요구하지 마. 안 그러면 정말로 다른 식의 해결 방식을 찾아볼 테니까.”

정말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눌러 담았다. 나로서도 그 이상 요구하는 건 무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난 마지막 한 숟갈을 먹은 후 상쾌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이야기 끝. 내일부터는 서로 원만한 생활을 하도록 하자구.”

“……아아.”

난 빈 카레 접시를 개수대로 옮기면서, 생각난 김에 말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그 밑에 떨어진 카레 접시 치워 주면 좋겠군. 그건 네가 한 짓이니까, 설마 네가 벌인 일을 내게 정리하라고는 안 하겠지? 그리고 내가 먹은 건 내가 씻을 테지만 네 앞에 놓여 있는 그건 네 몫이니까 버리건 먹건 알아서 하고, 접시 씻어 두도록 해.”

“입도 안 댄 음식을 왜 버려. 도로 냄비에 담아 둬.”

“밥 위에 떠 놓은 걸 어떻게 냄비에 담아.”

난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하곤 내가 먹은 접시를 깨끗이 씻었다.

그러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욕실로 향했다.

과연, 덜렁거리도록 망가졌던 문은 말끔하게 고쳐져 있다.

하지만.

“……어라. 이봐, 정상헌! 다 안 고쳤잖아, 문고리! 이거 안 잠기잖아!”

그러자 부엌 쪽에서 녀석의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못 고쳐. 이음쇠가 완전히 망가져서 문고리는 새로 사야 돼. 나중에 사다가 달아 놓을 테니까 신경 꺼. 어차피 앞으론 네놈이 있는 동안은 욕실 근처에 얼씬도 안 할 테니 문 따위 안 잠겨도 상관없잖아. 네놈이나 노크 잘 하고 다녀. ……흥, 달려 있을 거 똑같이 다 달린 주제에 샤워할 때 무슨 문을 잠그고 한다고.”

목소리가 뭔가를 씹는 것처럼 묘하게 웅얼거리는 것이, 결국 카레를 먹어치우기로 했나 보다.

버려도 상관은 없었지만 음식물 쓰레기 늘리는 것보다야 먹어치우는 편이 낫긴 하지.

나로서도 내가 한 요리, 쓰레기통으로 가는 것보단 사람 몸의 영양이 되는 편이 좋다.

콧노래를 부르며 세수와 양치질을 꼼꼼히 했다. 그러면서 이리저리 욕실 문을 살펴보았다.

닫히긴 하지만 잠기지는 않는 가엾은 욕실 문.

뭐 어차피, 저놈 말마따나 노크를 제대로 하고 다니면 상관없는 일이고, 녀석이 이 집에서 나가고 나면 나 혼자 사니까 또 관계없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집안의 기물 파손이 하나하나 늘어가다니, 역시 저놈이랑 같이 살게 되어서 좋아진 일이라곤 하나 없다.

양치질을 한 후에 가그린까지 하고 입을 닦으며 욕실에서 나섰을 때, 녀석은 그 왕성한 식욕으로 가득 펐던 한 접시의 카레를 거의 다 먹어치우고, 겨우 몇 숟갈 남기고 있었다.

조금 어이가 없어져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녀석을 보았다.

세수와 양치질을 한 것은 고작해야 7, 8분 남짓으로, 10분도 채 안 될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저놈 몫이라고 퍼놓은 밥은 내가 먹는 것의 1.5배는 되는 양이었다.

사람이 공들이고 시간 들여 만든 요리를 그 제작 시간의 10분의 1도 안 되어 먹어치우다니. 사람의 노력을 허무하게 만드는 놈 같으니.

“……이거, 무슨 카레야?”

갑자기 녀석이 불쑥 물어온 게 그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난 멍해질 시간도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 그냥 내 식으로 이것저것 섞었는데. 왜, 입에 안 맞아?”

“…….”

더 이상 말없이 녀석은 우걱우걱 입만 움직였다.

언제나 식욕이 좋아 요리인을 즐겁게 만드는 재영이조차 저렇게 무식하게 빨리 먹진 않았다.

아, 그래, 재영이.

난 카레를 우물거리며 어쩐지 묘하게 찡그린 얼굴을 하고서 날 바라보는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싱크대 옆에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녀석은 여전히 복잡하고 불쾌하고 기분 상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녀석의 입은 닫힌 채였다.

……?

“……여보세요. 응, 나. 아직 안 잤지? 그래, 하긴 네놈이 자겠냐, 이 시간에. 가게는? 지금 막 집에 들어갔어? 확실히 애인이 없으니까 집에도 빨리 들어가네.”

칵테일바에서의 일을 마치고 지금 막 집에 귀가했다는 재영이는, 내가 먼저 전화하는 일도 그다지 없거니와 이 시간에 전화하는 일은 더더욱 없기 때문에 의아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동생은 어떻게 됐어?’

“동생 아니라고 했지!”

습관처럼 소리를 질렀다가, 바로 옆에 그 동생 아닌 놈이 있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다물었다.

“……너 자꾸 그러면, 카레 안 줘 버릴 테다.”

거기서 아주 잠깐, 눈앞의 그 동생 아닌 놈의 표정이 희한하게 바뀌었다.

……? 아닌가? 잘못 봤나.

‘어, 카레 했어? 마침 먹고 싶던 참인데 잘됐네. 요리를 했다는 걸 보니 동생이랑은, 아니 그 동거인이랑은, 잘 해결된 모양이지?’

“뭐 그럭저럭.”

‘헤에,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들려주라.’

전화로 이야기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재영이 놈은 유독 전화를 즐기질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가능하면 만나서 하자는 주의로, 조금 길어질 듯한 말은 어김없이 ‘나중에’라고 돌렸다. 심심해서 시간이나 때우려고 전화를 한다는 건 이놈에게 있어서는 통용이 안 되는 말이다. 이놈은 그럴 바엔 직접 찾아오니까.

결국 카레 귀신인 재영이는 내일 당장 갈게, 라며 반색을 하곤 전화를 끊었다.

난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다가, 갑자기 동생 아닌 놈이 스윽 일어서는 것에 흠칫했다.

저 큰 몸이 갑자기 솟아오르면 누구건 놀라지 않으랴만.

녀석은 뭐에 화가 났는지 사나운 눈을 하고 가만히 날 노려보았다. 그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서 한 손에는 빈 카레 접시를 들고 있는 게 나름대로 개그라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 기분이 든다.

“카레, 누구 주는 거야?”

그 표정을 하고, 불쑥 한다는 말도 어이없다.

“……그래, 친구. 나 혼자서는 저거 다 못 먹어.”

“그러지 않아도 많지도 않은 걸 갖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혼자 먹어도 세 끼만 먹으면 끝날―.”

부엌에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통에, 나는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러곤 더더욱 어이없는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정말로 희한맞게 찌푸린 표정을 했다.

“…….”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와, 대체 뭐냐 이 거북한 공기는.

이놈 카레에 목숨 건 것도 아니고, 이제 이 집에 있는 건 김치 한 조각 안 먹는다며? 갑자기 왜 엉뚱한 걸로 화를 내고 그러는데?

나는 이 타이밍에서 한 번 녀석을 비웃어 줘야 했지만, 어쩐지 그러기도 껄끄러운 기분이 들어 살짝 찌푸린 얼굴로 지그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결국 어깨를 움츠리곤 조용히 걸음을 옮겨 내 방으로 향했다.

“그래도 입맛에 안 맞지는 않았던 모양이네. 마지막 만찬을 카레로 해서 좀 그랬지만, 그래도 다행이군. 설거지 잊지 말고.”

그 말만 던지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뒤돌아선 채 싱크대를 향하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빙글 돌아섰다.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흠칫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표정 위에, 평소와 같은 뻔뻔함과 거만함이 감돌고 있었던 탓이다.

녀석은 혼잣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하지만 시선만큼은 잡아먹을 듯이 나를 쳐다보는 채,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 들어와 살게 된 것도, 결국 어머니가 하숙을 하면 식사를 잘 못 챙겨먹을 거니까 너한테 받아먹으라고, 일부러 그렇게 한 거잖아? 게다가 밖에서 사먹으면 식비도 이만저만이 아닐 거고.”

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물론 저 커다란 냄비로 한솥 가득 만든 카레를 혼자서 세 끼면 다 해치운다는 녀석의 식비가 보통 드는 게 아니겠지.

어째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녀석은 그 말만 마치고 다시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한참 동안 이어질 말을 기다리다가, 결국 뒷말을 기다리다 못한 내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그제야, 녀석은 정말로 아니꼽게, 거만하게, 하지만 차마 입에서 못 나올 말을 한다는 듯 어렵사리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장, ……며칠에 한 번 보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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