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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조금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다.
별 이유는 없었지만, 굳이 이유를 들자면 현관 앞에 쌓인 짐 두 박스 때문이다.
오늘 오후 택배 회사에서 옮겨 놓고 간 저 박스가 눈에 띌 때마다 녀석이 이 집으로 들어올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이 싫어도 기억 속에 떠올랐고, 자연히 그놈과 함께 살게 됨으로써 받게 될 스트레스가 연상되었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가 찾아드는 악순환이 오후 내도록 몇 번이나 반복되다보니, 또 열이 난 것이다.
이럴 때마다 난 스스로의 정신 구조의 취약성과 동시에, 정신과 신체의 밀접한 관련을 새삼 검증하게 된다.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미열이 조금 나는 것을 그대로 두면 두통까지 일 것만 같아, 아직 아홉 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냥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열이 오를 때의 유일한 장점은, 쉽게 잠들 수 있다는 거다. 그 정도의 장점조차 없으면, 밥 먹듯 아픈 내게 있어 이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곳이 되어 버릴 거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 사랑스럽지 않은 세상, 싫어하기까지 해서야 내가 너무 가엾지.
……별 관계없는 거지만, 열이 오를 때의 수많은 단점 중의 하나는 이렇게 쓸데없는 말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는 것도 있다.
어쨌건, 그렇게 나는 이른 시각부터 잠에 빠져들어 꿈도 꾸지 않고 잘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깨운 것은, 무례하게도 한밤중에 울린 초인종 소리였다.
‘한밤중’이라는 말도 어찌나 정확하게 지키는지, 그리 상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눈을 뜨자마자 시선을 준 탁상시계는 정확히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 시간에 사전 연락도 없이 들이닥칠 녀석은 하나뿐이다.
그래, 이놈.
한손에 양주를 들고서 거리낌 없이 집안으로 들어서는 이쁘장한 놈.
“마침 집에 있었네.”
“대체 지금이 몇 시라고 생각하는 거야, 김재영. 게다가 너, 굳이 초인종 안 눌러도 열쇠로 따고 들어오면 되잖아. 남의 스페어키 강탈해 가선 이럴 때나 쓸 것이지.”
“자고 있었어?”
미안한 빛도 없이 뻔뻔하게 웃는 그 녀석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표정 읽는 건 잘 못하지만, 이 녀석의 표정은 읽기가 쉽다. 기분이 마이너스일 때면 유독 철저하리만치 반어법을 고집하는 얼굴.
술을 진탕 퍼마시곤 (밑 빠진 독인 이놈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는 법이 없었다)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는 폼이, 또 그거인 모양이다.
“깨졌냐?”
한마디 툭 던지자, 녀석은 과장스레 가슴께를 움켜잡으며 바닥에 엎어지는 시늉을 했다.
“어우……, 야, 너무한다. 그렇게 직격탄을 터뜨리냐.”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가장 사랑하는 애인이랑 만나고 다니더니 왜 또.”
오늘 잠은 다 잤다. 몇 시간이나마 미리 자 두길 잘 했지.
이놈은 가엾게도 친구가 없다. 나한테 친구가 없는 거랑 비슷한 이유다. 성격이 은근히 지랄맞아서 그렇다.
그렇기에 정말 속 쓰리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그리고 그럴 때에 도저히 혼자 있기가 싫으면 으레 날 찾아오곤 했다.
애인이 있을 때면 물론 애인한테 간다.
즉 이놈이 이렇게 날 찾아왔다는 말은, 그 애인한테 못 갈 만한 괴로운 일이라는 거다.
이쯤 가면 안 봐도 삼천리.
스물두 번째의 실연을 당한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가 같았다고는 해도 같은 반이었던 적도 없고 동아리가 같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합동수업조차 한 적이 없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던 이놈이랑 알게 된 것도, 청소시간에 쓰레기통 비우러 가다가 학교 뒤뜰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 이놈과 맞닥뜨린 게 시초였다.
얼굴이 이쁘게 생긴 만큼 애인도 잘 만들고, 성격이 모난 만큼 헤어지기도 잘 하고, 그런 주제에 헤어지면 혼자 끙끙거리고 괴로워하는, 웃긴 놈이다.
은근히 쿨한 척하면서 가만히 보면 애처럼 여린 구석이 있어서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도 들 때가 있지만, 그래도 난 예전부터 줄곧 생각했었다.
이런 놈이랑은 절대 안 사귄다, 라고.
그건 이놈이 장난기가 많아서 날 곧잘 골탕 먹인 탓만은 아니다.
한때는 이런 녀석이랑 사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때는 내가 이놈을 잘 몰랐던 때로, 당시 이 녀석은 웬 놈이랑 사귀고 있었는데 정말 간이라도 빼 줄 듯이 잘해 줬었다.
기념일 챙기는 건 물론이요, 무엇을 하건 정말 진심으로 상대를 위해 상대가 기뻐할 것을 해 주고 안 보이는 데서도 상대를 챙겨 주곤 해, 정말 애인감으로는 부족한 데가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녀석이랑 사귀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시의 착각이 싹 가신 것은 이놈이 그 상대랑 헤어진 직후였다.
상대 놈이 바람을 피워서, 딴 건 다 용납해도 그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었던 이 녀석은 칼 같이 녀석이랑 헤어졌다(라기보다는 달리 좋아하는 애가 생겼다는 상대의 말에, 차인 거나 마찬가지다).
그날 밤 녀석은 꼬박 술을 마시며 펑펑 울었고 나는 덩달아 옆에서 녀석의 술 상대를 했다. 마시는 술이 다 눈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눈물이 끊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을 정도로 서럽게, 슬프게 울었다. 하룻밤 내도록.
거짓말이 아니라,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물론 눈물샘의 용량이 무한대가 아닌 만큼 때로 눈물이 멎을 때는 있었지만, 그럴 때조차 녀석의 입에서는 억누른 신음이 새어나왔다).
무섭다고 생각했던 건 그 다음이다.
그렇게 처연하게 울고 또 운 게 언제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음날 아침부터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다. 태연하게 웃고, 장난치고, 먹었다.
그건 상관없다. 실연당했다고 며칠 몇 달을 우울해하는 것도 꼴불견이니까.
바로 이틀 후, 그놈을 찼던 녀석이 이내 그놈이 얼마나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 줬는가를 깨달았는지 주뼛거리며 찾아왔다. 새 상대랑은 헤어졌다고, 역시 너밖에 없다고.
그때 우연히 옆에 있었던 나는 이 녀석이 다시금 펑펑 울면서 그놈의 목을 끌어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은 웃었다. 차갑거나 매정한 게 아니라,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난 더 이상 너에게 미련 없다, 라고.
그리고 그 말은 한 푼 뺀 것도 보탠 것도 없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것도, 같잖은 복수심 같은 것은 요만치도 없는 순수한 마음의 표현 그대로.
녀석은 그런 놈이었다.
누군가를 아무리 좋아해도 일단 한 번 마음에서 털어 버리면 그걸로 정말로 끝이었다. 손톱 끝만치의 애정도, 추억도 남기지 않고, 완전한 THE END.
바보스럽게도 이놈과 사귄 인간들은, 이놈이 사귀는 상대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헌신적인 연인인가만을 기억하기에 일단 헤어지더라도 나중에 수습할 기회가 분명히 있으려니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건 그들의 커다랗고 어리석은 착각이다.
나는 이렇게 확실하고 깨끗하게 미련을 끊어내는 놈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난 그런 면에서 이놈이 무서웠다. 친구로라면 모를까 애인으로라면 절대로 사귀고 싶지 않다.
뭐 어쨌건, 이놈은 오늘도 애인이랑 헤어져 그 타령을 하러 찾아온 모양이고, 나는 며칠 정도 후에 이놈에게 사과하고 다시 한 번 부질없이 사랑을 애걸할 얼간이를 애도하며 적당히 냉장고에서 안주로 쓸 만한 과일을 몇 가지 집어왔다.
“오늘은 안 울 거냐?”
양주를 까더니 홀짝홀짝 마시기만 하며 침묵을 지키는 녀석을 보다 못해 한마디 던지자, 녀석은 픽 웃었다.
“무슨 사람을 만날 우는 놈처럼 말하고 있어. ……실은 벌써 한바탕 울고 왔어.”
“그걸로 돼? 평소엔 하룻밤 꼬박 울잖아.”
“……근데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뭐.”
“왜 나랑 사귀는 놈들은 백이면 백 다 바람을 피우거나 양다리를 걸치는 걸까.”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폼이다.
나는 양주 대신 맥주를 마시며, 한쪽 눈썹만 찌푸린 채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너는 누구에게나 애인으로는 과분한 놈이다.
얼굴이나 몸매는 어디 가서 모델을 해도 되도록 미끈하게 빠졌고, 애인한테는 더없이 다정하다. 섹스 테크닉이야 내가 알 도리가 없지만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꽤 쓸 만한 모양이고, 살고 있는 맨션을 봐서는 돈도 없지 않다. 고교 때를 회상컨대 머리회전도 비상한 놈이었다. 인간성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사귀는 상대에게는 넋을 놓을 정도로 잘 한다.
그런데 왜 매일 이 꼴이 나는 걸까. ……라고 묻는다면.
왜긴 왜야, 그놈들이 너한테 어리광부리는 거지. 나중에 제 눈에서 피눈물 흐를 줄도 모르고.
“네가 너무 그놈들한테 잘해 주니까, 딴에는 이놈이 나한테 푹 빠져서 못 헤어나겠구나 착각한 그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지 뭐.”
“나한테만 한결같은 마음을 주면, 나도 영원히 그 사람만 좋아해 줄 자신이 있는데 말이야.”
녀석은 좀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좀체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사람 마음을 어떻게 맘대로 할 수 있겠어.”
혼잣말처럼 말하자, 풀죽은 와중에서도 녀석이 밉살스런 말을 던졌다.
“사람 사귀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아는 척 잘도 말한다.”
울컥 했지만, 녀석이 스물두 번이나 실연하는 동안 나는 사람 손 한 번 잡아 본 적이 없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너 벌써 기운 차린 것 같다. 당장 나가라.”
조용히 단호히 말하자, 녀석이 비슬비슬 옆으로 다가앉더니 내 허벅지를 베고 벌렁 드러누웠다.
“너무 야박하게 그러지 마라, 인마.”
“어차피 오늘밤만 지나면, 내일 아침부터는 그놈에게서 칼같이 미련 끊고 새 애인 찾을 거면서 무슨 어리광이야.”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보내는 오늘밤이 얼마나 괴로운지, 네가 어떻게 알겠어.”
“……. 많이 힘드냐?”
“응. 가슴을 작두로 저며서, 피투성이가 된 살덩이에 소금을 뿌리고 방망이로 꾹꾹 다지는 것 같다.”
이놈은 축 처진 때조차 표현이 참 뭣 같다.
난 조금 희한스런 눈으로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지친 듯 눈을 감고서 내 허벅지에 뺨을 대고 있는 녀석은, 평소와는 조금 틀렸다.
다른 때라면 눈을 감고도 눈물을 줄줄줄줄 흘리면서 하룻밤을 보낼 텐데, 오늘은 지치기만 잔뜩 지친 표정으로 울지는 않는다. 자세히 보니 눈도 부었고 뺨 언저리에 눈물자국도 있는 게 제 말마따나 어디서 한바탕 울고 온 모양이지만, 그래도 딴 때라면 밤새 울 건데.
“어디서 울고 왔는데?”
“뒷골목에서.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더라, 헤어지자고. 그래서, 저녁에 가게 뒤로 나와서 골목에 앉아 그냥 울었지.”
저녁, 오늘 저녁이라면 비도 내렸을 텐데 비오는 골목에서 울고 앉았다니, 광경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참 처량스러워지는 그림이다.
녀석은 다시 그때의 정경이 떠오르는지, 입을 다물고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그러다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떴다.
“넌, 뭐했어?”
“오후 내도록 앓았다.”
앓은 것까진 아니고, 미열이 지속되어 조금 쉬었던 것뿐이지만.
“아, 어째 허벅지가 뜨끈뜨끈하더니만.”
“걱정스럽다거나 염려스럽다는 생각은 안 들었고?”
“난 또 한창 네가 ‘그거’ 하고 있는데 들이닥쳤나 보다 했지.”
당장 허벅지를 흔들어 녀석의 머리를 떨궈내었다. 녀석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고, 제법 아플 듯한 소리가 상쾌하게 울렸다.
“아우! 야, 아프잖어!!”
“넌 내가 만날 그 짓만 하고 사는 줄 알지?”
“그럼 아니냐? 실제로 너, 지금 엉덩이 속에 로터나 뭐 그런 거 안 집어넣고 있어?”
“…….”
틀린 말은 아니니 뭐라 할 수도 없다. 실제로 내가 몸속에 뭔가를 안 집어넣고 있는 시간은, 집어넣고 있는 시간보다 훨씬 적으니까.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벌써 10년 가까이 그런 쾌감에 길들여진 몸으로서는 이제 와선 몸속에 뭐가 없으면 오히려 불안스러워지는 거다. 점점 더 변태의 길로 발을 딛고 있는 악순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녀석은 일어나 앉아 머리를 슥슥 문지르며 불쑥 말했다.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어? 왜 또 열이 오른 건데?”
녀석은 오래 사귄 만큼 내 신경이 조그만 일에도 미열을 일으킬 정도로 섬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음―…, 다소 장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생겨서.”
“흠. 현관 앞에 쌓여 있는 저 짐박스랑 관계있는 일이야?”
눈치 한번 빠르긴.
말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자니 녀석이 가만히 나를 쳐다보며 말을 잇는다.
“이삿짐이라기엔 좀 적고, 택배 보낼 거라기엔 스트레스와 큰 관계있을 것 같지 않고, ……설마하니 네 그 성깔머리에 딴사람이랑 같이 살게 되거나 한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어, 정말? 누군데?”
“‘같은 공기도 마시고 싶지 않아’의 장본인.”
그 일례에 대해서는 예전에 같이 술을 마시다가 이야기해 줬던 적이 있다. 기억력이 썩 좋은 녀석이니 잊지는 않았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기억하고 있는 듯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금 어이가 없는 얼굴을 했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것들끼리 무슨 동거야? 맘에 안 드는 녀석을 잠깐 만나기만 해도 그날 밤 내도록 열이 나는 주제에, 정신 나갔구나, 너.”
“음―…, 아직 집세의 반물주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그 비극의 원천이지.”
속도 답답한데 담배라도 한 대 피울까 했지만, 생각해 보니 집에 담배가 없다. 그렇다고 사러 나가기는 귀찮다.
녀석은 흐응, 하고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미심쩍은 게 있으면 풀릴 때까지 꼬치꼬치 캐묻는 저 성격에 저 한마디로 끝나다니, 아무래도 짧은 대화를 통해 대충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다. 눈치 빠른 놈은 이래서 좋다(이래서 싫을 때도 있다).
오히려 미심쩍은 눈으로 상대를 보는 건, 녀석이 아니라 나였다.
이놈 오늘 조금 이상하긴 하다.
평소라면 양주를 까서 한 모금 들이켜자마자 줄줄줄 울면서, 나 그 애 정말 사랑했어, 정말 좋아했었다 타령을 골백번을 할 놈이, 오늘은 조금 착잡한 표정으로 우울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벌써 한바탕 울고 왔다고 했었지. 그동안 누구한테 제대로 위로라도 받은 건가.
“누구 붙들고 울다 오기라도 한 거야?”
별 흥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난 김에 묻자, 녀석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응……있어, 나 아르바이트 하는 곳 회원.”
“네가 아르바이트 한두 군데 하냐. ……회원이라면, 문화센터 쪽 아르바이튼가?”
별 재주가 다 있는 이 녀석은, H백화점의 문화센터에 일주일마다 한 번씩 나가며 칵테일 교실을 맡고 있었다. 예전에 칵테일 관련한 무슨무슨 콩쿠르에서 꽤 좋은 성적으로 입상했던 적도 있다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오늘 너 거기 가는 날 아니었잖아.”
그렇게 따로 만날 만큼 친하게 지내는 학생이 있던가? 이 녀석의 인간관계는 다 꿰고 있는데, 그런 말은 들었던 적이 없다.
녀석은 여전히 묘하게 찌푸려진 얼굴로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우연히 만났어. 가게에서 전화로 헤어지잔 소릴 듣고, 가게 뒤로 나가서 쓰레기통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등뒤에서 버티고 서 있더라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한두 사람 겨우 지날까 말까 한 좁은 골목, 가게 뒷문 옆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이 녀석을 생각하니, 거 한 폭의 그림이다.
귀공자티가 줄줄 흐르는 이 뽀얗고 이쁜 녀석이 그 지저분한 데서 울고 있으면 멋모르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로맨틱하고 황홀한 그림을 떠올릴지 몰라도, 이 녀석의 너무나도 인간적인(여러 가지 의미로) 면을 알고 있는 나로선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런 데서 맞닥뜨리다니 우연도 대단한 우연이다. 어떤 사람인데?”
녀석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하나 졌다.
“별로 내키지 않는 사람이었거든, 또 그게……. 늘상 문화센터에 와서 얌전하고 조용하니 있다 가는 사람이긴 한데…….”
거기까지 말하고는, 내가 왜 그런 놈을 붙들고 울었을까 내심 고민하는 눈치였다.
알 것도 같다.
이놈 성격에, 애인에게 헤어지자는 소리를 들은 직후라면 분명히 옆에 있던 사람이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해도 옷자락을 붙들고 펑펑 울었을 거다. 왜냐면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판별할 정신도 제대로 없으니까.
“그래서, 우는 김에 한 방 치기라도 한 거야?”
“아냐. 그냥 울다가 조용히 옷 놔주고 택시 타고 왔어. 아무 일 없었어.”
“그럼 됐네, 뭐.”
“으음.”
안됐다손 치더라도 아무렴 어때. 나랑 상관없는 일이다.
내 코앞에 닥친 스트레스 거리가 더 문제인 나는 성의가 담기지 않은 위로를 던졌다.
“그래그래, 잊어버리고 얼른 새 애인 만들어라.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하는 법이라고, 예전에 네가 그랬지?”
“응. ……근데 생각해 보니까, 이제 새 애인 만들어도 너네 집에는 못 오겠구나.”
그 녀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마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절대 안 돼!”
이 녀석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내 집 스페어키를 슬쩍 빼 간 후로 저 내킬 때면 아무 때나 내 집에 쳐들어오곤 했다. 물론 내가 없을 때에도 빈집에서 뒹굴거리며 자다가 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더 화가 났던 건 이놈이 종종 내 집을 제 맘대로 호텔화해서 사용하곤 한다는 거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봤더니 내 침대 위에서 친구 놈이 생전 처음 보는 놈이랑 벗고 난잡하게 뒹굴고 있더라는, 그런 사태에 맞닥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놈은 게이인 만큼 당연히 상대도 게이다.
나야 게이는 아니라도 변태이긴 하니까 녀석이 남자랑 뒹굴어도 거기에 대해 뭐라고 하진 않지만, 정상헌 저놈은 다르다.
나 없을 때 저 녀석이 제 애인을 끌고 들어와서 게이 포르노를 찍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상헌이 놈이 들이닥친다는 상황 같은 거,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칼이 주뼛 선다.
“그러고 보니, 내놔, 이번에야말로 내 스페어키, 얼른 돌려줘. 그놈 이 집에 들어오면 그놈에게 줘야 할 테니까.”
“싫다, 야. 네 동생한테는 새로 복사해서 주렴.”
“동생 아니야!”
“어쨌건.”
녀석은 끝끝내 스페어키를 내놓지 않고 꿋꿋이 양주 한 병을 다 비운 후에야 피로에 지쳐 열이 더 오르려 하는 나를 재워줬다.
비온 뒤 맑음. 쾌청.
새벽녘에 보슬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빗소리 속에서 단잠을 즐기다가 내가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엔 비가 내렸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붉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의 때깔을 보니까 오늘은 무던히 덥겠다.
더운 게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비오는 것보다는 낫다. 이사하기엔.
오늘, 타의에 의하여 상호 비협의하에 발생된 동거가 드디어 시작된다.
이사니 뭐니 해도 어차피 그 녀석의 짐은 앞서 보낸 택배 두 상자가 거의 전부인 모양이었지만, 뭐 어쨌건 그러잖아도 맘에 안 드는 녀석이 새로이 집에 들어오는데 날까지 우중충해서야 안 될 말이다.
저혈압이라 아침엔 언제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나는 그 기분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 채 거실의 큰 창을 열고 창턱에 걸터앉았다.
한손에는 언제나와 같이 생수 한 컵.
있는 척한다고 커피 따위를 빈속에 마셨다간 골로 가는 거다.
천천히 물을 넘기는 동안 정신은 차차 맑아졌고, 나는 대충 정리되어 있는 집안을 휘 둘러보았다.
녀석이 쓸 방은 이미 비워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관 옆의 두 평 남짓한 골방을 주면 저놈이 길길이 뛰지 싶어 중간 방을 비워 뒀다(물론 당연한 거지만 가장 큰 방은 내 몫이다). 옆방이라 좀 찝찝하긴 하지만, 뭐 벽이라는 훌륭한 매체가 있으니 상관없겠지.
어젯밤에 받은 정희 씨의 전화에 따르면 그놈이 도착하는 건 오늘 오전 중. 정희 씨와 함께.
‘오전’이라는 애매하기 짝이 없는 시간대를 말하다니.
어차피 오전에는 외출할 일이 없긴 하지만 그리 내키진 않는다. 확실한 시간대를 이야기해 주는 편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을 텐데. 그래, 꼭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그 기다리는 감정에는 하늘과 땅의 간극보다 더 넓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하지만 설마 남의 집에 들어오는데 그리 일찍 쳐들어오진 않을 거고, 짐작컨대 열 시에서 정오 사이에 오겠지.
나는 아무렴 어때, 하며 느긋하게 근처의 조깅 코스를 따라 산책을 다녀와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신문을 읽었다.
하지만 그래, 탁 까놓고 말해서 사실 난 태연한 척은 하고 있었지만 마치 기요틴에 목을 내밀고 운명의 때를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은 심정으로 바깥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이 가스중독으로 실려 나가건 말건 일절 신경을 쓰지 않는 개인주의자가 나라는 인간이라지만, 그런 만큼 내게 관련된 일엔 비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더욱이나 마음에 안 드는 녀석과의 동거라니, 며칠 전부터 줄곧 미열이 날 정도로 거슬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 당일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거다.
아아, 나는 소심한 A형(관계없는 말이지만, 정신병원에 제일 많이 들어가 있는 건 AB형이라고 하던데 사실 정작 들어가야 할 놈은 A형 중에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안정된 집단 속에 성실함을 가장하고 앉아 있는 것들이 사실은 제일 위험한 놈들이다. 왜 있잖은가, 엽기적 연쇄살인을 일으킨 중학생 소년이,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주위에서 다들 인정하는 조용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그런 놈이 바로 전형적인 A형이라는 거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다른 사람의 것과 공평한 속도로 흘러가고(그러나 내겐 불공평할 정도로 내 시간의 흐름은 짧게 여겨졌다), 결국 운명의 때는 오고야 말았다.
오전 열한 시를 조금 넘었을 무렵, 벨이 울렸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던 나는, 순간 흠칫 몸을 움츠렸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현관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있다, 그놈이. 드디어 온 거다.
잠시 동안의 사이를 두고 천천히 현관으로 갔다. 누군지 물을 필요도 없이 그냥 문을 열자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밝은 얼굴로 좋은 아침이야, 하고 아침 인사를 해 오는 정희 씨.
그리고 그 뒤에, 뭔지 몰라도 굉장한 짐가방을 들고(뚱뚱한 가방을 한 다섯 개는 이고 지고 메고 있었다) 못마땅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는 그 녀석.
분명히 제 짐은 저 박스가 대부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희 씨에게(만) 일단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의아한 눈길로 그 가방들을 지그시 바라보는데, 집안으로 들어선 정희 씨는 집안을 한 번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녀석이 쓸 방을 들여다본 후 만족스러운 듯 녀석에게로 가 그 수없는 가방들을 하나하나 받아들기 시작했다.
“……?”
“그럼 난 가 볼 테니까, 해신아, 상헌이 앞으로 잘 좀 부탁해. 조금 까탈스러운 애긴 하지만 그래도 주는 거 뭐든 잘 먹고, 힘도 좋으니까 뭐 힘 쓸 일 있으면 아무 때나 부려먹어도 괜찮거든? 상헌이 너, 형 말 잘 들어. 나 매일 전화해 볼 테니까. 알았지?”
아무래도 저 가방들 중 스포츠백 하나만 빼고는 다 정희 씨 짐이었나 보다……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난 조금 당황한 얼굴로 정희 씨에게 물었다.
“어……아니 왜 벌써 가시게요. 좀 더 있다 가세요. 정희 씨 오신다고 해서 어제 고기도 좋은 걸로 사다가 갈비찜 해 뒀는데.”
그렇게 오자마자 가 버리면 나더러 이 녀석이랑 바로 둘이서 대치하란 말이에요?――라는 말은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억지로 삼켜 버렸다.
그러자 정희 씨는 반색을 했다.
“어머, 갈비찜? 어떡해, 나 굉장히 좋아하는 건데. 상헌이 좋겠네, 얼마 전에 갈비찜 갈비찜 타령을 하더니, 필이 통했나 보다, 얘.”
윽, 딴 걸 할 걸. 저 녀석이 싫어하는 음식이 뭐였더라.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니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알아야 말이지.
“근데, 기차표 끊어 뒀거든. 지금 바로 서울역으로 가야 해.”
“예? 기차표, 라면…….”
“오늘 나 경주 내려가거든. 아, 말 안 했었나? 내일부터 바로 그쪽에서 일하기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에 원래라면 며칠 전에 내려갔어야 하지만, 아무래도 상헌이 혼자 여기에 보내면 분명히 딴 길로 새거나 한밤중에 들어오거나 할 것 같아서, 내가 데리고 왔지.”
정희 씨……, 아들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긴 하신데, 하지만 이렇게 일찍 이 녀석을 여기에 데려다 놓으면, 내 하루는 어쩌라구요……. 차라리 이 녀석이 한밤중에 들어오는 편이 나았지, 얼굴 마주칠 시간 적어서 좋으니.
그러나 역시나 그 말들은 다시 목에서 역회전해 뱃속으로 들어갔고, 난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 전부터 녀석은 뭐가 그리 마땅찮은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딴 쪽을 보고 있었다.
흘끔 보니 정말 십여 년 전에 비해 인간 많이 망가졌다.
그때는 그래도 애였기 때문에 외모는 그나마 귀여운 구석이 있었고, 이 녀석 어른 되면 적어도 외모만은 멋진 남자가 되겠군, 하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서 이렇게 험상궂은 인상이 될 줄이야.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사이에 그녀는 부엌으로 가(라고 해 봐야 거실에 붙어 있어 몇 발짝 옮긴 것뿐이었지만) 냄비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감탄스런 얼굴로 말했다.
“세상에……. 너무 맛있겠다. 어디. ……어머, 해신아, 대단하다. 진범 씨한테 너 요리 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떻게 이렇게 맛있게 했어? 가만있자, 미림을 썼나?”
“아, 아니에요. 미림은 안 들어갔고, 정종을 조금 듬뿍 넣었어요. 그리고 배즙에 소금 반 티스푼 정도 섞어 두었고, 딴 것보다도 간장을 좋은 걸로 썼어요.”
“간장? 어디 거 쓰는데?”
“그게 따로 주문해서 구하는 건데…….”
정희 씨는 가야 한다더니 못내 아쉬운 듯, 결국은 밑접시를 가져와 갈비찜을 두세 덩이 덜어 뜯기 시작했다.
어머어머, 당근에 군맛이 전혀 안 나네, 이건 어떻게 한 거야? 등등, 다분히 주부다운 의문과, 주부는 아니지만 입맛이 까다로운 나의 요리에 대한 현학적 토론이 이어졌다.
숫제 메모까지 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갈비찜 약간을 다 먹은 그녀는 자기 접시를 한 번 헹구더니 거기에 다시 갈비찜을 듬뿍 떴다.
그렇게 많이 드실 수 있으려나, 맛있었나 보지, 라고 만족스레 그녀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나는 그녀가 그 접시를 상헌이 녀석에게 권하는 걸 보곤 내심 혀를 찼다.
내가 한 요리 네놈은 먹지 마, 처럼 어린애 같은 말을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미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놈은 흘끔 나를 보곤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을 하더니, 몇 번인가 안 먹어, 됐어, 라고 하다가 결국 정희 씨의 공세에 못 이기고 한 점 입에 물었다.
몇 번 입을 우물거리다가, 녀석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내게 말을 붙였다.
“네가 만들었다고, 이걸?”
대답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녀석은 기묘한 얼굴이 되더니, 흥, 하고 비웃는 듯한 표정을 했다.
조금 울컥한다.
이 자식, 맘에 안 들면 먹지 마! 그 주제에 왜 자꾸 주워 먹고 있어!
세 번째로 목을 뚫고 나오는 진심을 꿀꺽 삼킨 그때, 정희 씨가 시계를 보더니 가방들을 하나하나 들기 시작했다.
“정말 가 봐야겠다, 얘.”
“아……, 잠깐만요. 역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아니야, 실은 앞에 택시 세워 뒀거든. 이렇게 기다리게 했으니까 요금 많이 올라갔겠다. 그럼 가 볼게, 나오지 마.”
현관 밖을 내다보자, 정말로 노란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의 나와 부루퉁한 무표정의 그 녀석(아마 속내는 서로 반대였겠지만)은 결국 문 앞까지만 그녀를 배웅했고, 택시가 골목을 지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말없이 서 있었다.
“…….”
“…….”
난 그녀가 있을 때처럼 표정관리가 안 된다는 걸 스스로도 느끼면서 흘긋 그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 역시 나랑 비슷한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들어갈까.”
그 한마디만 던지고 집 안으로 서걱서걱 들어오자 녀석도 말없이 뒤따라 들어왔다.
“이 방이 네 방. 저게 화장실. 저건 골방으로 쓰니까 불필요한 짐이 있으면 저 방에 넣어놔도 괜찮아. 단 정리는 확실하게 해 둘 것.”
녀석은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흘끔흘끔 보았을 뿐 납득했다고 고개를 끄덕이지조차 않았다.
나는 어서 내 방으로 들어가 문 닫고 틀어박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틀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붙들었다.
“서로 편하게 지내기 위해 규칙이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이 말해 봐, 하는 얼굴로 본다.
“소리. 한집에 사는 한 서로 필요 이상의 시끄러운 소리는 내지 않도록 하자. 보통 음악 같은 건 상관없지만 메탈 쪽은 피해 주면 좋겠어. 청소는 자기 방은 자기가. 공동 구역은 적어도 사흘에 한 번씩, 각자 2주일씩 번갈아서. 그리고 밥은 정희 씨에게 들은 말도 있으니 일단 내가 하겠어. 그 대신 너는 내가 2, 3일에 한 번씩 메모해 주는 걸 장 봐올 것. 그냥 얻어먹기만 할 생각은 아니겠지. 빨래는 자기 건 자기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론 사생활은 침해하지 않을 것. 우선은 이 정도로 할까. 너는 원하는 것 없어?”
녀석은 싸늘한 눈으로 가만히 날 쏘아보다가 입 끝을 한쪽만 씨익 틀어 올리면서 내뱉었다.
“네가 내 눈앞에 안 보이는 것.”
……이놈 자식이 사람이 가만히 있으니까.
더 이상 나도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 봐야 나만 손해다. 예전 같이 살았었던 그때처럼.
“그야 네가 집에 안 들어오면 되겠군. 그렇게 해 주면 나도 편할 거고. 아무래도 좋지만 하나 더 생각났다. 담배는 베란다 밖에서만 피워, 난 기관지가 약하니까. 너도, 같은 공기도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이랑 같이 사는데 그나마의 공기를 더럽히진 않는 게 좋겠지?”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집어치우고, 평소에 재영이 녀석이 얼음 떨어지겠다고 불평하곤 하는 말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특별히, 마지막 문장은 약간의 비웃음도 담아.
녀석도 아직 그 ‘같은 공기 선언’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당장 표정이 비틀어졌다.
“네놈은 아직도 그 이중성, 안 고쳐진 모양이군.”
“윗사람을 윗사람으로 안 보는 그 건방진 성격은 차치하고, 너의 그 어쭙잖은 지식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두고 보도록 하지. 재밌겠는걸. 아, 그런데 아직도 시튼 동물기를 쓴 건 뉴튼이라고 알고 있는 건 아닐 테지?”
뚜두둑, 주먹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신기하게도 조금 힘을 줘 주먹을 쥐는 것만으로도 뼈 울리는 소리가 나는 구조로 되어 있나 보다, 이 녀석의 손은.
어지간히 맘에 안 드는지 이마엔 힘줄도 희미하게 솟아올랐다.
그런 것에 위축될 나도 아니지만, 그래도 마지막 말은 조금 어린애 같았다. 반성, 반성.
그러나 나도 속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다.
“정상헌 씨, 맘에 안 드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피차 피곤하게 그러지 말자. 공동생활의 규칙만 잘 지킨다면 서로 말 한마디 안 붙이고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생각 안 들어?”
“지금 보니, ……옛날엔 정말로 내숭을 뒤집어쓰고 살았었군. 그때부터 그런 성격이었던 거야, 아니면 성격이 더 악화된 거야?”
“글쎄……뭐, 네 인상이 나빠진 것만큼 변하기야 했겠어.”
뚝, 뚝, 뚝, 반대편 손에서도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정말로 사람을 치려고 하나, 슬슬 진지하게 걱정되기 시작할 무렵, 바로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생소한 벨 소리. 내 건 아니다.
녀석은 입새로 칫, 하고 내뱉더니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예, 정상헌입니다. ……아, 영란 씨세요? 예, 예. 아, 오늘 저녁이요? 물론 괜찮죠. ……글쎄요, 영란 씨는 뭘 드시고 싶은데요? 영란 씨 좋으실 대로 해요. 난 영란 씨가 맛있게 먹는 걸 보는 편이 내가 맛있게 먹는 것보다 더 좋으니까.”
억…….
못 들을 걸 들었다.
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저런 대사가 재영이 놈도 아니고, 저 녀석 입에서 나올 줄이야.
틀림없이 저 녀석은 애인한테도 무뚝뚝하고 다소 거칠게 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건 기분 탓만은 아닐 거다.
그래도 애인은 있나 보지. 그것도 저런 흉악한 놈을 저렇게 끔찍스럽게 바꾸어 놓을 만한, 사랑스런 애인.
난 조금 어이가 없어져, 저 녀석이 깨끗하게 비운 밑접시를 개수대로 가져가 씻으며(물론 이것은 처음이니 특별히 서비스해 주는 것으로, 다음부터는 얄짤없이 녀석이 먹은 뒤처리는 녀석에게 시킬 생각이다) 한숨을 쉬었다.
반쯤밖에 안 들리지만, 아무래도 애인이 연상인가 보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말하는 내용도 손윗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뭔가 공적인 볼일이 있어 통화하는 사이라기엔 너무 허물이 없다.
흥, 연상의 애인이라. 능력도 좋군. 백수나 다를 바 없는 학생 주제에.
다소 악의가 담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전화를 끊고 온 녀석이 웃옷을 걸쳐 입었다.
“돈 없는 인간에게도 붙는 연상의 애인이라니 흔치 않네. 정말 너 좋아하는 모양이다. 잘 해 줘라.”
그 녀석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날 째려봤다.
왜? 엿들었다고? 다 들리는 데서 전화한 네놈이 나쁘잖아.
녀석은 묵묵히 품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쫙 펼쳐져 내 코앞에 들이대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JCB, 마스터, 비자, 응, 카드 광고해도 되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죄다 골드에 플래티넘이다. 얼핏 보니 지갑 안에는 새파란 지폐가 빳빳하게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직 대학도 졸업 안 한 놈 주제에 저 카드며, 현금의 행렬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
정희 씨가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었는데.
이놈 뭘 해서 이렇게 부유한 걸까. 밀수라도 뛰었나.
“네놈보다는 부자일걸, 능력 없는 프리랜서.”
녀석이 픽 비웃듯 중얼거렸다.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온다.
너 내 연봉이 얼만지는 알고 능력이 없다는 거냐?
그러나 그런 걸 일일이 따지는 것도 바보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래, 과연, 돈이 있으니 연상의 여인도 거느린다 이거지. 좋으시겠군.
녀석은 한마디 던지지도 않고 휙 밖으로 나가 버렸다. 옷까지 챙겨 입고 간 걸로 봐, 멀리 나간 듯하다. 아마 그대로 어딘가를 돌아다니다가 저녁을 그 애인이랑 먹고 난 후에야 들어오는 거겠지.
난 온몸을 짓누르던 돌덩이에서 겨우 헤어난 심정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으윽, 싫은 놈이랑 계속 둘만 대치하고 있었더니 머리가 뜨겁다. 틀림없이 오늘밤은 앓아누울 거다.
그래, 마음의 안정제라도 하나 넣고, 그 안온한 진동과 쾌감을 느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언짢은 기분으로 로터를 찾으려고 막 방으로 들어가려 하던 나는,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려 저도 모르게 흠칫 멈춰 섰다. 혼자 사는 게 버릇이 되어, 이런 대낮에 갑자기 문이 열리는 건 생소한 경험이다.
놀라서 굳어 버린 동물처럼 눈만 깜빡이며 가만히 현관 쪽을 바라보자, 녀석이 현관에 선 채로 집에 들어올 생각도 않고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쳐다본다.
“……왜? 나간 거 아니었어?”
“아, 잊은 게 있어서. 열쇠 내놔.”
“응? 아아, 그렇구나, 열쇠.”
얼른 가방을 뒤적여 어제 복사해 두었던 여벌 열쇠를 건네주었다.
녀석을 열쇠를 받아들고도 나갈 생각을 않고 마뜩찮은 눈으로 가만히 날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마디 뱉었다.
“뭘 죄지은 사람처럼 그렇게 놀라? 평소에 뭘 하고 다니길래.”
그러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나가 버렸다.
난 잠시 그대로 굳어 있다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놀랐다. ……하지만, 큰일날 뻔했다.
만에 하나 녀석이 딱 3분만 늦게 돌아왔더라면, 넣고 있는 현장을 그대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우왁, 생각한 것만으로도 최악의 시추에이션이다.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난 그제야 정말로 이제부터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고 가슴 속에 새겨 두며,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