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공기 마시기
1
‘너 같은 놈이랑은 같은 공기도 마시고 싶지 않아.’
라고 했었지.
아니다.
같은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하면 폐가 썩는 것 같다고 했던가? 구역질이 난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뭐 하여간 그 비슷한 말을 했다.
스물 몇 해를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과 한 번도 충돌이 없었다면, 그건 인간성이 좋은 게 아니라 나름대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거다. 아예 바보거나 혹은 엄청나게 음흉한 녀석이 아니라면 인생에 한 번도 싸움이 없었다는 건 다분히 무리가 있다.
나도 물론 몇 번인가 친구나 혹은 일 관계 동료들과 크고 작은 다툼을 한 적이 있고, 험악한 소리도 수없이 듣고, 동시에 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금 되새겨 생각해 보면, 저 말만큼 나를 끔찍스럽게 싫어하는 감정이 확실하게 담겨 있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두 살 아래였던(물론 지금도 두 살 아래겠지만) 동생에게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 만다.
동생……이라고 하면 조금 어폐가 있다. 지금은 동생이 아니니까.
이미 법적인 가족관계가 끝난 지 1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 그 녀석을 동생이라고 한다면, 나한테는 다섯 명의 어머니와 세 명의 피 섞이지 않은 동생이 더 있어야 한다. 그래서야 호칭이나 다른 것도 복잡하니까, 지금 현재 호적에 있는 사람한테만 가족의 호칭을 쓰자고 결심한 게 고교 2학년 때였지.
즉, 여성 편력이 화려한 남자를 친아버지로 둔 탓에 나는 어릴 적부터 몇 번이나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을 갈아치웠고, 지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여성은 공식적으로 다섯 번째 어머니이다(호적에 올리지 않은 여자들까지 하면 두 손으로도 못 꼽는다).
악의가 듬뿍 담긴 저 말을 한 꼬맹이는 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이자 가장 짧은 기간인 8개월간 함께 살았던 여성이 데리고 들어온 아들이었다.
……음…, 나는 성격상 사람에 대해 특별히 호불호(好不好)를 느끼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 세 번째 어머니는 꽤 좋아했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이면서도, 동시에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고 호탕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눈물을 짜면서 주저앉기보다는, ‘어휴, 그래도 해 봐야지 어쩌겠니.’ 하고 웃으며 팔을 걷어붙이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두 번째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할 때, 헤어지느니 차라리 죽겠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칼을 들고 한바탕 소동을 부린 데에 질려서 더욱 그랬는지 몰라도, 어쨌건 세 번째 어머니의 그런 성격은 몹시 내 마음에 들었었다. 재혼(아니 삼혼인가) 8개월 후에 깨끗하게 합의하에 갈라선 것도 그녀다웠지.
그러나 여태껏 겪었던 다섯 명의 어머니 중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사랑한다고 느껴 본 적이 없는 내 친모는 불행히도 지독한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내가 세 살 때 정신병원에 들어가더니 거기서 12년을 사는 동안 서른네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끝에 서른다섯 번째에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녀와 살았던 8개월은 그리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나보다 두 살 아래였던 아들.
그 녀석을 처음 본 것은 아버지가 세 번째 어머니 정희 씨와 혼인 신고를 하기 두 달 전이었다.
첫인상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개구쟁이 골목대장처럼 생겨먹은 그놈은 콧잔등에 반창고를 하나 붙인 걸 빼면 험상궂거나 보기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친근감을 담뿍 풍기는 보드라운 인상인 것도 아니었다.
이미 예전에 정희 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던 나는 이놈이 얼마 안 있어 내 동생이 되겠구나, 라고 어렴풋이 생각했고, 원래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나는 같이 살게 될 사람과 충돌하는 건 극력 피하고 싶었기에 최대한 붙임성 좋게 웃어 보이며 첫마디를 꺼내었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라고.
녀석은 탐색하는 것처럼 나를 빤히 구석구석 들여다보더니, 흐응, 하고 웃고는 손을 내밀었다.
‘어, 반갑다. 나는 정상헌. 넌?’
딱 그 첫마디를 들은 순간, 난 직감적으로 느꼈다.
이놈이랑 잘 해 나가기는 힘들겠다고.
단순히 활달한 개구쟁이의 말투라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는 그 어조는, 어딘가 고압적인 독선의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두 살 위인 형을 대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처럼 느껴지는 어감.
그다지 위계질서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낯을 가리는 편인 나로서는 녀석의 그 스스럼없음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야, 지내 보면 재미있는 아이일지도 몰라.
기특하게도 나는 그래도 두 살 위의 형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려,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생각하려 했지만.
……내 직감은 꽤 잘 맞는 편이다. 그것도, 사람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는 더욱.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 살게 되고,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그놈이 나랑은 정말로 안 맞는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아무리 맞추려 노력해도 끝끝내 안 맞는 인간이란 게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놈과 나의 다른 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비슷한 점을 찾아보라면 그거야말로 세 손가락만으로 꼽을 수 있었을 거다.
늘 동네 아이들을 우르르 이끌고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골목대장인 그놈과, 조용한 방에서 혼자 책읽기를 즐기는 내가 사이좋게 지내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또래들의 우두머리를 하고 있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 그놈 역시 ‘약골에 공부벌레’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나를 싫어하고 무시했다. 그나마 부모님이 한자리에 있을 때엔 좀 덜했지만, 집에 둘만 있거나 할 때엔 그게 확연하게 드러났다.
나 역시 머리가 돌지 않은 이상, 그놈이 좋았을 리가 없다.
행여나 그놈이 마음씨라도 듬직하게 착한 구석이 있었다면 또 모를까, 정신적으로 섬세한 데가 있어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금세 열이 올라 앓아눕곤 하는 나를 걱정해 주긴커녕 약골이라고 비웃는 그놈에게 내가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지.
다만 차이는, 그놈이 드러내놓고 나를 비웃었다면 나는 드러내지 않고 그놈을 경멸했다는 것 정도일까.
‘서유기’는 달마대사가 손오공 무리를 이끌고 천축으로 떠나는 이야기라는 소리를 당당하게 떠벌이는 그놈은, 늘 그런 식이었다. 제대로 아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도 주위를 보면서 항상 느끼는 거지만, 어설프게 아는 것들이 꼭 아는 척은 남들 세 배로 한다.
그놈도 마찬가지였다.
순진하고 멍청한 꼬맹이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어설픈 지식을 읊조리며 잘난 척을 하는 그놈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주장은 옳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게다가 플러스알파로, 지독한 아집과 독선.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뭐 어쨌건, 나는 그놈과는 달리 면전에 대놓고 핀잔을 주거나 호전적인 성격은 아니었기에, 별 토를 달지 않고 조용조용히 지냈다.
‘네가 말한 건 틀렸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긴.’이라는 짧은 말로 그놈의 어린 자존심을 망가뜨리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그랬다가 이후 같은 집에서 줄곧 껄끄럽게 마주칠 현실이 부담스러워 나는 마음속으로만 그놈을 비웃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고 경멸하는(물론 그 문제의 때가 오기까지, 그놈은 나도 자기에 대해 똑같은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리라곤 꿈도 못 꿨을 테지만) 가운데 시간은 지나갔고, 처음엔 잘 해나가는 듯 보이던 아버지와 정희 씨의 생활은 사상 최단 시간인 8개월 만에 끝을 보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가족사의 근원은 아버지의 여성 편력.
내가 생각건대, 아버지는 사람이 나쁘거나 색을 밝혀서 그렇게 늘상 여자를 갈아치운다기보다는, 그게 일종의 인성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무슨 대단한 어릴 적의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아버지는 단순한 불장난 따위가 아니라,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만 사귀었다.
즉, 좋아하는 사람이 바뀌는 시간 단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비상히 짧은 것뿐이다.
……뭐라고 해야 적절한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말 그랬다. 일반적인 인식으로서의 여성 편력과는 조금 다르게, 아버지는 양다리를 걸친 적 따위는 한 번도 없이, 사귀는 동안에는 정말로 마음 깊이 상대를 사랑했다(아들인 내가 봐도 이성 관계에 있어서는 정신구조가 조금 이상하게 생겨먹은 사람인 것 같다).
정희 씨도 그걸 알기에, 단란한 생활이 끝을 알릴 무렵에는 꽤 힘든 듯 내도록 우울한 표정과 한숨을 달고 지냈지만, 역시나 그녀다운 강인한 정신력과 회복력이 이번에도 작용해, 그들의 이혼은 조용하고 무난하게 끝났다. 그리고 놀랍다면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아버지와 정희 씨는 친구로서 종종 만나곤 하는 모양이었다.
아니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러니까 문제의 그 정희 씨의 아들과 나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저 험악한 말 ‘같은 공기도 마시고 싶지 않아’ 선언이 튀어나온 것은, 다행히도 그놈과 내가 마주한 마지막 날이었다.
이혼 신고를 마치고, 대부분의 짐을 이삿짐센터를 불러 미리 보내 버리고 자잘한 짐을 챙겨 정희 씨가 집을 나갈 준비를 거의 다 마쳐가고 있을 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놈은 다시 나를 괴롭혔다.
괴롭혔다고 해도 평소보다 그리 강도가 높았던 것도 아니고, 으레 그렇듯 듣기 거슬리는 말투로 오류투성이인 말을 나에 대한 비난과 섞어 퍼부었던 정도다. 여느 때였다면 그냥 넘어갈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리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았다.
좋아했던 정희 씨가 이제 막 집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고, 요 한 달 정도는 이혼을 앞두고 집안 분위기도 썩 좋지 않았던 터라 정신적 소모가 평소보다 심해 미열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이제 이놈과 같이 살 일도 없고 다시 얼굴 마주칠 일도 없는데 끝까지 이 녀석의 듣기 거슬리는 말들을 참아 줘야만 하나, 하는 어린애다운 분통도 꽤 작용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놈의 무슨 말에 대해 그랬는지는 몰라도, 평소에 수십 수백 번은 곱씹었던 말을 그대로 쏘아 줬다.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거, 꼴사나우니까 적당히 해 두지 그래.’
뭐 대충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녀석은 늘상 얌전하니 듣고만 있던 내가 표독스레 되쏘자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금세 벌겋게 얼굴을 물들이며 내가 뭘 모르는데, 하고 거칠게 내뱉었다.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그 녀석이 잘못 알면서도 자신 있게 줄줄 읊었던 잘못된 지식들을 생각나는 대로 일일이 짚어 수정해 나갔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의 오류를 타인에게 지적당했을 때 수치와 함께 그 사람에 대해(그 사람이 잘못한 것은 아님에도) 일말의 분노를 느끼곤 하고, 그건 어린애인 그 녀석도 다를 것 없었다.
급기야는 날더러 이중인격이니 겉과 속이 다른 놈이니 하면서, ‘너 같은 놈이랑은 같은 공기……’ 운운하는 선언을 성대하게 외치고 난 후 당황해하는 정희 씨를 잡아끌고 집에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다행스럽게도 그 녀석을 볼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친구로서 가끔 만나곤 하는 건 아버지와 정희 씨였지, 나와 그놈이 아니었던 거다. 나도 가끔 아버지를 따라 정희 씨를 만나는 일은 있었지만, 그런 자리에 그 녀석이 같이 나온 적은 없었다.
좋아, 좋아. 싫은 녀석과 마주칠 일이 없다는 건 정신 건강에 좋은 일이지.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과거의 일들을 몇 초 동안 잠시 회상하고 있던 나는 정희 씨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해신아, 부탁할게.”
“아―, 예, 걱정 마세요.”
나는 부드럽게 웃음 지으며 대답하곤 습관적으로 커피잔을 집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정희 씨를 만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이후로는 아버지와 정희 씨가 만날 때 같이 따라 나간 적이 거의 없었고, 대학 이후로는 나도 바빠졌기에 아버지의 인간관계에까지 어울리고 있을 틈은 없었던 것이다.
오늘처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이렇게 아버지와 정희 씨의 만남에 내가 끼어드는 일은 지금에 와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두절미.
입맛이 씁쓸한 건, 결코 커피 탓만은 아니다.
내 인생에 다시 볼 일은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녀석과 다시 얽히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할 수 없지.
오늘 아침, 한가롭게 오믈렛을 만들고 있는데 아버지에게 모처럼 전화가 와서, 정희 씨가 할 말이 있다니 오후에 같이 좀 만나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감은 들었다. 뭔가 탐탁지 않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아니나 다를까, 거의 1년 만에 얼굴을 본 정희 씨가 군대에 갔다가 엊그제 제대했다는 그 녀석의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다다음 주부터 정희 씨가 고향인 경주로 내려가 관광 가이드를 하기로 되었다는 말을 할 때쯤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이 갔다.
“관광 가이드요? 힘드실 텐데 왜 그런 일을…….”
“응, 사람들이 경주에 대해 너무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 말이야. 나중엔 경주 관광 전문으로 조그만 여행사라도 하나 차려 볼까 하는데, 경험 삼아서. 해신이 너도 경주 하면 천마총밖에 모르지?”
그녀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생각하는데, 슬슬 본론을 꺼내왔다.
“그래서 말이야, 조금 갑작스러운 일이 되어놓으니까, 당장 상헌이가 있을 곳이 없는 거야. 하숙을 시켜도 되겠지만 그 아이 성격에 그랬다간 건강 망칠 거고, 아무래도 옆에 누군가 있어 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래서 진범 씨랑 이야기하다가 생각해 보니까, 지금 해신이 혼자 살고 있잖니? 혹시 해신이만 괜찮다면, 몇 달 정도만 상헌이 묵게 해 줄 수 없을까? 아무래도 둘이 살면 집안일 도와서 하기도 쉬울 거고.”
그렇죠 진범 씨? 하면서 아버지를 보고 생글 웃는 그녀를 마주보며, 아버지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금 전부터 저런 말이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씩 들던 차였기에 그리 충격은 받지 않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기억 위로 떠올리는 일 없이 의식 저 밑에 가라앉혀 두고 있던 이름이 갑작스레 부닥쳐오니 당황스럽긴 했다.
하지만 이 경우, 백이면 백,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건 익히 알고 있다.
나 혼자 사는 집이니 거부권이 있다곤 해도, 20대 중반을 조금 넘어선 나이에 좁긴 해도 방이 셋이나 딸린 집에 홀로 살 수 있는 건, 집세의 반을 아버지가 대 주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아버지에게도, 정희 씨에게도 약한 편이다.
“저야 어려울 것 없죠.”
―그놈이 수긍을 할지가 문제지.
그 생각을 떠올리며,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상헌이는 괜찮대요? 벌써 못 본 지 10년이 넘었는데, 만나보고 싶네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진심처럼 말하는 건 그동안 익힌 처세술로 충분하다.
“응, 어제 말을 해 봤는데, 그게 좀……안 내키는 것 같더라. 아무래도 그 애는 나 외의 사람이랑 둘이서 살아 본 적은 없으니까, 불안한가 봐.”
그 녀석이 불안 따위를 느낄 인종이려고. 안 내키는 정도가 아니라 펄펄 뛰었겠지. 정희 씨 표정만 봐도 알겠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그게 제일 낫다는 건 그 애한테도 말해 뒀으니까. 실은 오늘 이 자리에 그 애도 나오라고 말을 해 뒀는데, 늦네. 두 시까진 오라고 했는데 이 녀석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는데. 나중에 혼내 줘야지.”
아마 안 올걸요.
하지만 또 모르지, 파란만장하고 힘겨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 여남은 해의 세월 동안 그 인간성에 장족의 발전을 이루어 그래도 지금은 좀 마음에 드는 성격이 되었을지도.
나는 진하게 우러난 커피잔에 물을 약간 부어 입맛에 맞게 희석시키면서, 내심 혀를 찼다.
가엾게도, 그 녀석. 같은 공기조차 마시고 싶지 않은 상대랑 같은 집 공기를 공유하면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다니. 폐가 썩건 구토증이 일건, 건강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겠군.
하지만 나도 남 말 할 때가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 어릴 적보다는 훨씬 면역이 생겼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는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간다는 건 내게도 심각한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다.
환경만 조금 바뀌어도 금세 열을 내며 자리에 눕는 과민성 신경을 가진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방 하나를 제공해 주기로 했다.
―라면 나도 어른스러워졌다는 거니 참 좋겠지만, 실상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사실은 그녀의 말에 당장 반대하고 나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못한 것은, 아까부터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부 자극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던 터라,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벌어질 결과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해 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아니, 내부 자극이라고 하는 게 옳을까.
“해신아, 어디 아프냐? 안색이 안 좋은데.”
저도 모르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데 아버지가 물어왔다. 난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제 잠을 잘 못 잤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피곤하네요, 라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나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 말았다.
―제길, 틀림없어. 이거, 분명히 점점 더 진동이 강해지고 있다구. 재영이 그 망할 자식, 그런 얘기 한마디도 안 해 줬잖아!
아침에, 태연한 얼굴로 ‘타이머로 조정해 뒀으니까 한 시간에 한 번씩 3분 정도 진동할 거야. 강도는 ‘약’으로 해 뒀으니까 적당히 기분 좋은 정도일 테니 걱정 말고.’라면서 묘한 얼굴로 싱긋 웃어 보인 친구 녀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이를 갈았다.
예쁘장하고 순한 얼굴을 한 주제에 남들보다 장난기가 몇 배는 많은 그놈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곤란에 빠뜨리는 걸 즐기곤 했다. 생각지 못한 게 내 실수다.
몸속에 자리잡은 조그만 로터는 한 시간은커녕 15분 간격으로 진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도 강도를 점점 높이면서.
아슬아슬하게 쾌감점에서 떨어져 있는 로터의 위치까지도 어설픈 자극을 주어, 금세라도 신음이 새어나올 것만 같은 입을 억지로 꾹 다문 채 주먹에 힘을 주는 나를 조금 걱정스런 눈길로 보던 아버지는, 문득 약간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내 게 아닌가. 정희 씨 혹시 핸드폰 울리는 거 아냐? 조금 전부터 진동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응? 아니, 난 진동으로 안 해 뒀는데.”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녀도 반사적으로 핸드백 안으로 손을 넣었다.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몸속에서 요동치고 있는 로터 소리가 바깥에까지 들릴 정도로 강하게 진동하고 있었던 거다.
몸도 거의 한계치에 이르고 있었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 봐야 좋은 꼴 볼 일은 없다는 걸 이내 깨닫고 난 얼른 일어났다.
“아―, 제……폰이네요.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주머니 속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는 전화를 움켜쥐고, 나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한 채 어떻게든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며 화장실로 향했다.
괜찮을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 걸음걸이가 이상해 보이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남아 있지 않다.
깔끔한 화장실은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이 비어 있었고, 난 거의 뛰어들다시피 화장실의 빈칸 안으로 들이닥쳤다.
몇 분 전까지 멀쩡하게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로, 마치 말기 마약 중독자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걸쇠를 잠그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긴장이 풀렸는지,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숨결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속옷 대신 입은 단단하게 죄어든 서포트를 내리자마자 터질 듯 부푼 물건이 고개를 치켜들고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것은 딱 두 번 훑은 것만으로,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절정을 맞아 버렸다.
조금 한심스런 기분으로 좌변기에 걸터앉아 손을 뒤로 가져갔다.
엉덩이를 약간 벌리고 힘을 주자(그 순간, 강하게 느껴진 진동에 다시금 흥분하고 말았다)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조그만 로터가 바깥으로 흘러 떨어졌다.
안도와 아쉬움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로터를 가만히 살펴보고 있으려니, 아니나 다를까 진동이 점점 강해지는 종류의 물건이다. 로터의 건전지를 빼고 만지작거리며 돌려보다 보니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전화를 꺼내어 그놈의 번호를 눌렀다.
‘……예, 김재영입니다.’
“재영이 너 이 자식!!”
‘……와우, 귀 떨어지겠다. 해신이야?’
“너 인마, 뭐 이따위 걸 줬어?!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알아?! 아버지랑 정희 씨를 만나는 자리였단 말야!”
‘하지만 스릴 있었지? 더 흥분하지 않았어?’
조금도 주눅 든 빛은 보이지 않고 웃기까지 하면서 지껄이는 목소리가 폰 너머로 들려온다.
이런 걸 친구라고!
“너―! ……에이 씨, 너 나중에 두고 보자.”
더 이상 말해 봐야 이 녀석을 말로 이길 재간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말하면 말할수록 울화만 치밀어오를 것 같아 폴더를 탁 닫아 버렸다.
저편에서 녀석이 전화를 붙잡고 즐겁게 웃을 정경이 떠올라 더욱 부아가 난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는 이 녀석은 늘 이랬다. 뻔히 알면서 녀석에게 부탁한 내가 바보다.
하지만 할 수 없지. 이런 걸 부탁할 만한 인간 중에 아는 놈이 이놈뿐인 걸.
늘상 성(性)적 기호를 물으면 당당하게 ‘난 동성애자’라고 대답하는 그놈은,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첫 경험을 마친 훌륭한 게이였다. 지금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남자 애인이 있다고 하는 그놈은, 외모는 제법 준수하다.
하지만 난 저런 성격의 인간과 사귀는 놈이 이해가 안 간다. 나라면 이 세상 인간이 저놈 혼자 남는다 해도 저놈이랑은 안 잔다.
그래도 뭐, 인간관계가 그리 넓지 않은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친구 중 하나니 끊어내지는 않지만.
게다가 저놈에게는 때때로 오늘처럼 신세를 지는 일도 있고.
그래,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
나는 변태다.
특수고에서 일류대를 졸업하고 잘 나가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쿨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세련된 청년으로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고 있는 나는, 사실은 그렇다. 변태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중 3 시작될 무렵의 초봄이었지.
그 나이에 벌써 성적 쾌감에 눈을 떴다고 하면 참 되바라진 아이로 생각되겠지만, 그때 이미 같은 반 아이들 중에서 자위를 해 보지 않은 놈은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몰라도, 하여튼 입으로는 다들 해 봤다고 자랑스레 떠벌이고 다녔었다(진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개중에는 여고생 누나랑 해 봤다는 놈도 있었다).
내가 처음 마스터베이션을 했던 건 중 1의 6월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네 번째 어머니랑 재혼을 해서 동거하고 있었고, 그녀는 나 이상으로 낯을 가리는 타입이라 좀체 내 방엔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방에 문란한 잡지나 비디오테이프 따위가 당당히 돌아다녀도 들통 나는 일은 없었다.
중학생이 된 사내놈들의 주요 관심사는 역시 이성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겠지만 내 때는 아무튼 그랬고, 그렇기에 몽정이나 마스터베이션, 도색 잡지 등등의 화제는 매일같이 흔하게 귀에 들어왔다.
또래 아이들만큼의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마스터베이션이란 걸 어떻게 하는 건지 곁귀로 전해 듣고 있었고, 6월의 어느 후덥지근한 날 처음으로 실행해 보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놈들이 입 모아 말했던 죽여주는 전율과 끝내주는 쾌감 따위는 느낄 수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첫 경험이란 게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도 실망스럽고 평범했던 탓에 제대로 기억도 안 난다. 하여간, 기분 좋은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쾌감이 있긴 있었지만 기대를 너무 크게 했던 탓인지 그리 좋게 느껴지지는 않아 실망만 컸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두 번, 세 번 해 보면서 왜 그놈들이 이걸 그렇게 좋다고 하는지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역시 중독이 될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만뒀다.
한창 때 성에 눈뜬 사내아이로서는 비정상적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처음 몇 번을 해 본 후에 나는 깨끗이 마스터베이션에 대한 환상도, 미련도 버렸다.
그냥 그대로 갔더라면, 아마 지금 난 스스로를 변태라고 인정하는 일도 없이 깨끗하고 고결한 몸으로 있을 수 있었겠지. 혹시 또 누가 알겠는가, 신학대학이라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대한민국 두 번째의 추기경으로 기대되는 빛나는 신성이 되어 있었을지.
하지만 그런 모든 깨끗하고 금욕적인 가능성들은, 중 3 초봄에 이미 무너져 버렸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리 튼튼한 신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신경질적이고 섬세한 정신 구조를 가진 탓에, 조금만 신경 쓰이는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대로 열이 올라 앓아눕곤 했다.
중 3 때의 이른 봄, 그때도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호되게 앓아누웠다. 아마도 새 학기가 시작되어 환경이 바뀐 탓도 있었을 거고, 옆자리에 앉은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던 탓도 있었을 거고, 꽃샘추위로 감기에 걸린 탓도 있었을 거다.
한 사흘가량 학교에도 못 갈 정도로 앓아 끙끙거렸는데, 그 운명의 때, 불운하게도 나는 자신의 변태기를 감지해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앓아누운 첫날 밤, 저녁 식사 후 드물게도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던 아들이 알고 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는 걸 아버지가 깨달은 것은,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여태껏 앓아누운 게 두 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잦으니 그리 크게 염려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게 앓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면 그럭저럭 낫곤 해 왔으니, 그렇게 수선을 부리며 병원에까지 데려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열이 높으니 일단 해열제는 먹여 놓고 봐야겠다, 고 아버지는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당시 집에는 해열제가 떨어지고 없었다. 내 체질이 체질이니만큼 늘 집의 약통에 해열제만큼은 떨어질 날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한 알도 남지 않고 해열제통이 비어 있었던 거다.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간, 약국은 이미 닫은 지 오래일 테고.
고민하고 있던 아버지의 눈에 들어온 건, 약통 한구석에 비상용으로 박혀 있던, 여태껏 주의해 본 적도 없었던 손바닥만 한 약상자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두통약이라고 적혀 있어도 일단 먹이고 봐야지, 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눈에 비친 반가운 글자는, 고맙게도 ‘해열제’.
……다만, 좌약이었다.
아버지로서야 그게 좌약이건 가루약이건 (나는 가루약도 끔찍하게 싫어해서, 혼자 살기 시작한 후 언제였던가 집에 가루약밖에 없고, 도저히 바깥까지 알약을 사러 나갈 기운도 없었을 때, 아픈 걸 참으면서도 가루약을 젤라틴으로 굳히는 수고까지 해서 겨우 약을 먹었던 전적이 있다) 아무런 상관없었을 테니 약통을 쥐고 득달같이 달려왔고, 나는 침대 위에서 끙끙거리며 몽롱한 정신으로 누워 있었다.
‘해신아, 약 넣자.’
아버지가 약을 먹자고 했는지 넣자고 했는지도 판단치 못하고, 나는 평소 그러듯 아버지에게서 물컵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웬일인지 이불을 걷어내더니, 단번에 바지를 끌어내려 버린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의아함과 놀라움에 나는 아버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불렀고, 아버지는 역시나 아무렇지 않게 좌약이거든, 하고 말했다.
나는 약을 잘 삼키지 못했던 어린애 때 이후로는 좌약 같은 건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고, 그래서 좌약이란 게 있다는 건 알아도 그게 어떻게 쓰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좌약……? 근데 바지는 왜……?’
중 3이면, 아무리 부모가 상대라고 해도 알몸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수치는 느끼기에 충분한 나이다. 아니, 오히려 완전히 어른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내렸을지도 모르지만, 어설픈 사춘기 때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특히나 나는, 비록 그 이후로 변태가 되어 버렸을지라도 그때까지는 멀쩡하고 금욕적이기까지 한 소년이었기에, 바지를 내린 아버지가 속옷까지 끌어내리려는 걸 깨닫고 아픈 와중에도 기겁을 하고 속옷을 틀어쥐었다.
‘왜, 왜 그러는데요……?’
‘왜 그러긴, 이 녀석아. 손 치워, 약 넣어야지. 좌약이라니까?’
‘좌약? 좌약이라면…….’
‘그래, 좌약. 몰라? 항문으로 끼워 넣는 약.’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끼워 넣다니, 참 민망스런 단어도 선택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역시나 그때에는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러잖아도 열이 끓고 있는데 얼굴에 열이 화악 더 오르는 걸 느끼며, 기겁을 하곤 두 손으로 속옷을 꼭 잡았다.
‘시, 싫어요.’
‘이 녀석아, 그럼 열 올라서 죽을래?’
아버지는 반쯤 벗겨진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때리더니, 날 빙글 돌렸다. 그러곤 재빠르게도 속옷을 끌어내려 버렸다.
그쯤 되자, 몸에 열이 더 오른 탓인지 머리가 더욱 몽롱해지기도 하고 이왕 버린 몸이라는 자포자기까지 생겨, 그러잖아도 힘도 안 들어가는 손, 그냥 놓아 버렸다.
그리고 무릎 굽혀서 엉덩이를 들어 보라는 둥 하는, 지금 생각해도 얼굴에 불이 나는 민망스럽기 짝이 없는 지시에 얌전히 따랐다.
그 다음 순간.
……윽, 기분 나빠……라고 잠깐 생각했었다.
아무리 작다고는 해도, 난생 처음 생경한 이물질이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밀고 들어오는데, 그 느낌은 과히 좋지 않았다.
이제 대충 다 들어 갔겠거니 생각해도 아버지는 어디까지 집어넣을 생각인지 계속 약을 꾹꾹꾹꾹 밀어넣었고 (몽롱한 정신이라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본능적인 혐오감에 식은땀까지 나는 걸 느끼며 잔뜩 몸을 웅크렸다.
그런데, 그때.
조그만 로켓형처럼 생긴 좌약의 앞부리 부분이, 어딘가에 닿았다.
아니, 쿡 찔렀다고 하는 게 옳으려나.
하여간 약이 몸속에 있던 어딘가를 자극했고, 순간 나는 눈앞이 하얗게 아찔해지는 느낌을 맛보았다.
‘…? ……??’
흠칫하며 가늘게 경련하는 걸 알아챘는지, 아버지가 손을 떼며 다시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렸다.
‘다 됐다, 다 됐어. 자, 이제 얌전히 한숨 푹 자면 아침엔 나을 거야.’
다행히도 내 반응이 단순히 약 넣는 게 싫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듯, 아버지는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주고 토닥인 후 불을 끄고 방에서 나갔다.
나는 어땠냐고 하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설프게 자극당한 성감대에 (물론 그때는 성감대 따위 몰랐지만) 물건은 반쯤 일어서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기이한 느낌이 아랫도리에 들러붙어 가시지 않았던 거다.
한창 때의 사내애를, 약간만 자극해 놓고 내팽개치는 게 얼마나 잔인한 건지 아는 사람은 안다.
결국 나는 그 아픈 와중에도 그대로 잠들기가 힘들어, 1년 반 넘도록 손을 놓았던 마스터베이션을 다시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 서긴 서지만 그리 기분 좋지는 않다. 아까처럼 그런 아찔한 느낌은, 이게 아니야. 이거랑 비슷하긴 했는데, 좀 더―…. 아, 아까, 어떻게 했었더라?
나는 잠기지 않은 방문을 곁눈질로 흘끔 보곤, 이불 속에서 손을 움직였다. 예전에 몇 번인가 마스터베이션을 했을 때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만둘까, 이런 거 이상해. 더러워. ……하지만…….
몇 번이나 내심 갈등을 겪으면서도 내 손가락은 속옷 속, 저 너머의 작은 구멍 속으로 향했다.
일단 손가락 끝을 넣고 나자, 약하게 항의하던 고결한 이성의 목소리는 쥐죽은 듯 사라져버렸다.
아까, 약이 닿았던 데가…….
이 부근이었던가, 아니면 이쪽이었던가, 좀처럼 그 기묘한 느낌의 근원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에, 따끈따끈한 살점 속에 감싸인 손가락도, 그 손가락이 주는 보드랍고 안온한 자극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 그대로 손가락을 몸속에 묻은 채, ―믿어지지 않게도,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최초의 뒤쪽 마스터베이션은, 다음날 새벽 눈을 뜬 후 성공했다.
잠에서 깬 새벽 다섯 시 반 가량에도 손가락은 여전히 몸속에 들어앉은 채였고, 스스로 경악을 하면서 손가락을 빼려고 움직이던 와중에 그게, 성감대를 직격했던 것이다.
정신이 몽롱했던 지난밤보다 더욱 선명하게, 강렬하게 불이 붙는 음란한 쾌감에, 나는 거의 무아몽중에 손가락으로 그곳을 연신 누르면서, 다른 손으로는 앞쪽에 자극을 주었고, 그제야 나는 같은 반 녀석들이 말하던 죽여주는 전율과 끝내주는 쾌감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게 내, 변태로서의 인생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로는 단순히 앞만 자극해서는 쾌감을 느끼지 못하고, 반드시 뒤쪽까지 자극해 줘야만 제대로 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굳이 자극을 하지 않아도, 내 입으로 말하려니 좀 그렇지만, 그…… 안에 뭔가가 들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족된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우울하거나 언짢은 일이 있을 때에는 기분전환을 위해 무엇이건 자그마하고 매끈매끈해 다칠 염려가 없는 물건을 몸속에 집어넣고 다니곤 하고, 실제로 그러고 있으면 기분이 안정되며 좋아졌다.
이런 비유를 하면 이상하지만, 몸속에서 아이가 숨쉬고 있는 걸 느끼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임산부의 기분이랄까, 뭐 그 비슷한 거다.
……그러니까 말하는 거다. 난 변태라고.
하지만 굳이 덧붙여 말하자면, 난 게이는 아니다.
단순히 엉덩이 속에 뭔가를 집어넣고 있는 게 좋고, 그곳으로 자극을 받는 게 좋을 뿐, 남자를 보고 욕정을 느끼거나 같이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런 날더러 저 악우 재영이 녀석은 ‘변태’라며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발끈했지만, 그것은 그 녀석이 날 변태라고 불러서 그런 건 아니다. 말마따나 내가 변태인 건 사실이니까. 단지, 그놈이 하는 말은 대체로 뭐든지 화가 치미는 것뿐이다.
지놈은 게이인 주제에!
……라면 또 성차별 하지 말라고 정색을 하고 말하겠지(하지만 이런 경우도 성차별이라고 하는 건가?).
뭐 어쨌건, 단순히 신체적 자극이 좋을 뿐 남자가 좋은 게 아니니 난 변태일지언정 게이는 아니다.
게이 포르노를 즐겨보긴 한다. 즉, 엉덩이 속에 뭔가를 넣는 영상에 흥분을 하긴 한다.
하지만 그 대상을 나로 바꾸어 생각해 보면, 좀 그렇다. 생리적 혐오감보다는 뭐랄까, 아플 것 같다.
어릴 적부터 자주 아파 왔으니, 머리가 지끈거린다거나 욱신거리는 종류의 아픔에는 익숙하지만, 살갗이 찢어지거나 피가 나오는 종류의 아픔은 정말로 싫어한다.
언제였더라, 한 번은 게이 포르노를 보는데 거기서 바텀으로 나오는 남자의 거기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걸 그대로 생생하게 클로즈업으로 잡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 순간의 그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한마디로, 아플 것 같다, 난 죽어도 저 짓은 못하겠다, 였다.
뭐 그런 건 별 상관없는 얘기니 저만치 밀어두고.
오늘 아침도 그랬다.
막 오믈렛이 완성되어, 한 입 먹어 보니 생각보다 훨씬 근사하게 만들어져 즐거운 마음으로 막 케첩을 뿌리려던 차에 아버지 전화를 받았다.
정희 씨와 오후에 만나기로 했는데, 정희 씨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니 같이 좀 만나잰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언뜻 정희 씨의 아들놈이 제대했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예감이 안 좋았다. 오믈렛을 먹을 기분도 뚝 떨어지고, 기분이 암울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날은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
난 우울하게 전화를 집어 들었다.
‘……응, 왜?’
여보세요, 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저놈은 고교 때부터의 악우 김재영 군.
“오전에 시간 있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역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우리 애인이랑 점심 같이 먹기로 했는데. 그 전까진 괜찮아. 왜?’
“오후에 아버지가 정희 씨랑 같이 만나자는데, 좀 기분이 우울하네. 와 줄래?”
‘아하, 또 ‘그거’냐? 알았어. 근사한 걸로 하나 가져갈게. 금방 갈 테니까, 먹을 것 좀 준비해 놔. 어제 밤새고 아직 아침을 못 먹어서 속 쓰리다.’
“오믈렛 만들어 놨어.”
녀석은 기쁘다는 듯 호오, 하는 감탄사를 중얼거리곤 곧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집인가 보다. 그렇다면 여기까지는 녀석의 오토바이로 15분 거리.
아니나 다를까, 정확히 15분이 지나자 녀석이 찾아왔다. 처음 보는 타입의 로터를 들고.
사흘 굶은 것처럼 오믈렛을 맛나게 먹은 그놈은, 오전에는 한가하다고 한 주제에 열한 시가 넘어가는 시계를 보더니 시간 없다며 로터를 휙 던졌다.
‘그거, 타이머 붙은 거야. 한 시간마다 3분 정도 진동하는 거. 강도는 제일 약한 걸로 조정해 뒀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녀석은 간단하게 작동법을 알려주곤, 왔을 때처럼 휑하니 가 버렸다. 내 몫의 오믈렛은 한 숟갈도 안 남겨 놓고.
난 조금 미심쩍은 기분이 들어 로터를 손에 든 채 작동을 시켜 보았다.
확실히 녀석의 말마따나 3분간 진동하다 그쳤다. 게다가 진동하는 정도도 아주 미약해 제대로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 이 정도라면 바깥에 하고 나가도 그리 난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안도하고, 엄지손가락의 3분의 2 정도로 딱 좋은 크기인 로터를 집어넣었다. 이미 작은 이물질을 받아들이는 데는 충분히 익숙해져 있는 몸에 아무런 무리 없이 자리잡은 로터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역시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분을 전환하는 데에는 이게 제일 좋다.
딴 데 가서는 절대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로터가 15분마다 작동한다는 것, 그것도 진동이 점점 강도를 더해 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아버지와 정희 씨를 만나러 집에서 나오고 반 시간 가량이 지나서였다. 그 전까지는 진동이 워낙 약했던 터라 제대로 알아채지도 못하고 있었지만, 알아차리자마자 그 진동은 기다렸다는 듯 가속도를 붙여 강도를 더해 갔던 것이다.
건전지를 빼고 휴지로 감싼 로터를 주머니에 넣고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씻으며, 눈앞에 있는 거울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피로한 듯 지쳐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청년이 비친다.
얼핏 보기에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는 이 청년의 머릿속은,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구가 있다면 분명 그 안엔 흉측한 벌레가 오물투성이가 되어 꿈틀거리고 있을 테지.
……그런 기구가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핸드페이퍼를 뽑아 손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좀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버지랑 정희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뭐 통화가 길어졌다고 하면 되겠지.
다시 한 번 거울을 보며 옷에 이상한 게 묻어 있지는 않은가 마지막 체크를 하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거울 반대쪽에 있던 문을 열고 성큼성큼 들어온 사람과, 거울 속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
“…….”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다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냥 눈이 마주쳤나 보다, 하고 시선을 돌리려는데 그 사람이 시선을 돌릴 생각도 않고 뚫어져라 날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만 시선을 돌리는 것도 죄지은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 그대로 마주보았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닌데, 이 녀석은 상당한 장신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인상파로 우락부락하고 험상궂게 생겨먹은 얼굴은, 좋게 말하면 남자답고 나쁘게 말하면 흉악하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아직 어린 티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데, 기껏해야 나랑 비슷한 또래거나 나보다 어리겠다.
어이구, 주먹은 흉기구만. 사람 두셋 잡았나.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도 짧게 밀어 올렸다. 정말 감방에서 오늘 아침에 나온 건 아닌가 싶다.
딴 것보다, 눈매가 더럽다.
낯선 인간을 저렇게 금방이라도 죽일 듯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다니, 이만저만 무례가 아니잖아.
……라는 생각을 한 1.5초 동안 하다가, 먼저 시선을 돌렸다.
사내놈 둘이서 거울 속으로 말없이 눈 맞추고 있는 것도 좀 웃긴 상황이고, 무엇보다 그리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눈 맞추기 놀이하고 있을 만큼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다.
관상학적으로 판별하건대, 저런 놈은 분명히 자기주장이 강하고 저 잘난 맛에 살며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놈일―….
……아?!
순간 머리를 스치는 인물이 하나.
그러나 번뜩 다시 바라보려고 해도, 그 남자는 이미 시선을 돌린 채 변기 앞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변기 앞에 선 놈을 빤히 바라볼 정도로 노골적인 변태는 아닌 나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렇구나, 왜 몰랐을까.
어째 묘하게 익숙한 인상이다 싶었다.
그놈이로군, 정상헌.
……어릴 적보다 인상이 더 험상궂고 흉악스러워졌다. 녀석이 중고교 때의 학창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안 물어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올 줄 알았더니 왔나 보지.
테이블로 돌아가자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던 아버지와 정희 씨가 반가이 맞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비어 있던 의자 위에는 투박한 스포츠백이 하나 놓여 있다.
“뭘 그렇게 오래 있다 와? 배탈이라도 났어?”
“아니요, 통화가 좀 길어져서요.”
자리에 앉아 물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이 텁텁하다.
“아, 조금 전에 상헌이 왔거든. 화장실 갔는데, 혹시 만나지 않았어?”
기다렸다는 듯 정희 씨가 물었다.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모성의 마음이 눈망울 속에 초롱초롱 맺히는 게 보여 조금 부담스럽다.
“아아, 역시 상헌이었구나. 그냥, 스쳤어요. 어디서 본 것 같다 싶었는데,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기억이 났지 뭐예요. 어릴 적보다 많이……듬직해졌던데요.”
모성의 눈빛 앞에, 차마 험상궂어졌다는 소리는 못하겠다.
뭘, 아직 애야, 애, 라며 웃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고슴도치처럼 기뻐 보였다.
젠장, 하지만 말하고 보니 그렇군. 앞으로 저런 흉악범 같은 놈이랑 몇 달을 지내야 한다는 말이잖아.
이미 응낙한 셈이니 지금 와서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몸속의 로터가 빠져 이제 완전히 이성이 돌아온 데다가, 기분까지 도로 다운된 나는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떠오르지 않도록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이렇게 되면 저놈이 거절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수밖에.
종업원을 불러 이미 식은 커피를 물리고 리필을 청하는데, 확연한 존재감이 뒤쪽에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놈이 테이블로 오고 있다는 건, 눈앞에 있는 정희 씨의 눈치를 봐도 알 수 있다.
말없이 가방이 올려져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가방을 옆에 내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은 그놈은, 불쾌한 기색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내 쪽은 한 번 보지도 않은 채 커피잔을 쥐더니 물처럼 꿀꺽꿀꺽 마셨다.
고맙기도 해라, 내 마음을 네가 표현해 주는구나. 이런 걸 이심전심이라고 하지.
“상헌이지? 오랜만이다. 10년도 넘었지? 우와……, 굉장히 멋있어졌는걸.”
푸근하게 웃으면서 말해도, 녀석은 같잖다는 눈빛으로 흘끔 날 일별할 뿐, 아무런 대답도 않았다. 흥, 이라는 낮은 코웃음도 대답이라면 대답한 거겠지만.
야, 야. 그래도 너무 노골적으로 그러지 마……? 네 사랑하는 어머니가 불안하게 보고 있잖아?
내심 중얼거리다가 기억이 났다.
맞다. 이 녀석은 상당한 마더 콤플렉스였다.
그래도 오이디푸스까지는 안 갔던 모양인 게, 이놈은 우리 아버지도 잘 따랐다. 요는 단순히 어머니한테 약한 거다.
지금도 그건 변하지 않은 듯, 녀석은 낮게 나무라는 정희 씨를 조금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짧게 대답했다.
“어, 오랜만이야.”
허어. 암만 둔한 놈이라도 단번에 ‘이놈 나랑 상대하기 싫구나’라는 거 알아챌 법한 그런 말투로 말해 봐야, 별로 안 기쁘다구. 하긴 이놈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이 날 기쁘게 하랴마는.
“이젠 정말 길에서 스치면 못 알아보겠다. 잘 지냈어?”
연거푸 말을 붙이는 내게, 이놈이 뭐 잘못 먹었나 싶은 시선을 보내던 그놈은 역시나 마지못해 한다는 티를 풀풀 풍기면서 대답했다.
“어, 뭐.”
어떤 대답이건 세 마디 이내로 마쳐 버리는 그놈을 상대로 나도 참 장하다고 스스로 감탄할 정도로 열심히, 그러나 적당히 말을 붙여 주면서 나는 나의 사교성이 어릴 적에 비해 놀랄 정도로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로 대하기 싫은 인간을 앞에 두고도 친근하게 웃어 보일 수 있게 된다는 게 환경 속에 이루어진 성장이라는 거겠지.
적당히 나의 인간성을 어필하고 난 후, 천천히 본론에 들어갔다.
“그런데 괜찮겠어? 내가 사는 집, 상헌이네 학교랑은 좀 떨어져 있는데.”
“어차피 같이 안 살 건데 무슨 상관이야?”
처음으로 세 마디 이상의 대답이 부루퉁하게 들려왔다. 고맙게도 바라마지 않던 내용을 담은.
“상헌아!”
나무라는 듯 낮게 소리치는 정희 씨를 불만스레 보던 녀석은 이것까지 양보할 수는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싫다고 했잖아요. 학교 근처에 하숙 잡겠다니까.”
“넌 안 챙겨 먹이면 제대로 먹지도 않잖니. 하숙집에서 끼니때마다 꼬박꼬박 너 챙겨 부르면서 밥 줄 줄 아니?”
정희 씨의 말을 아버지가 거들었다.
“해신이는 그런 거 관리는 확실하니까, 같이 살면 아마 정시간에 밥 먹어야 할 테니 제대로 먹고는 다닐 수 있을 거다. 어쩌면 새벽 조깅까지 같이 하자고 귀찮게 할지도 모르지.”
그다지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아버지.
나는 아무 말 없이 홀로 동떨어져 그 대화들의 결말을 가만히 지켜만 보기로 했다. 가능하면 저 녀석이 이겨 주길 바라며.
그 바람은, 처음에는 무난히 이루어질 듯싶었다.
어릴 적과 변한 데 없이 여전히 독불장군에 자기주장만을 앞세우는 그 녀석은 정희 씨가 여러 모로 타당하고 그럴 듯한 이유와 근거를 들어 내 집에 살기를 권유하고 아버지도 그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었음에도 불구하고, NO라는 대답으로만 일관했다.
희희낙락, 난생 처음으로 내가 그 녀석의 승리를 바라며 잘한다 정상헌, 을 내심으로 외치고 있을 때, 그 모든 걸 박살낸 것은 정희 씨의 반쯤 포기한 듯한 한숨 섞인 말이었다.
“엄마는 네가 너무 걱정된단 말야, 상헌아…….”
아. ……제길.
정말로 상심에 잠긴 듯한 목소리와 쓸쓸한 표정을 보인 순간,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얼핏 뒷골을 스쳐간다 싶더니, 역시나 그게 저 마더 콤플렉스 놈한테 직방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한 점 그늘 없이 냉랭하고 표독한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던 그놈이 모친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 안색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곤란한 듯 뭐라고 말하려다가는 입을 닫기를 몇 번이나 반복.
녀석은 답답한지 담배를 꺼내어 물었고, 그 자리에서 저보다 나이 적은 사람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 들었다.
내 성격은 또 어떠냐고 하면, 어릴 적보다는 그래도 대인 관계에 있어 처신을 어떻게 하는 게 나은지 깨달은 바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원래부터 나보다 어린놈에게 관대함을 베풀어 주는 속 넓은 인간은 아니었기에, 라이터를 찾으려 주머니를 더듬는 놈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어른 앞에서 허락 없이 담배 물어도 된다고, 누가 그랬지?”
녀석은 잠시 멈칫했다가, 같잖다는 어조로 말했다.
“왜 네가 참견이야?”
“이 자리에서 너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말해 봐.”
“나이가 깡패라, 그거냐?”
세금도 안 내는 신분 주제에 나이 운운이라, 부끄럽지도 않냐고 해 주고 싶었지만(그랬더라면 분명히 다시 한 번 ‘같은 공기’ 운운하는 선언을 들을 수 있었겠지), 그래도 거기까지 성격이 망가진 건 아니다.
대화와 협상은 테이블 위에서 얼어붙고, 불편한 정적만이 흘렀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정말로 내 입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만 할 분위기가 되고 만다.
나는 천천히 커피를 쓰디쓰게 마셔넘겼다.
“상헌아.”
내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내 쪽으로 흘긋 시선을 주는 게 느껴졌다. 안 봐도,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듯 눈매를 일그러뜨리는 걸 알 수 있다. 나 역시 그놈에게는 일체의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목소리만큼은 부드럽게, 따뜻하게.
“같이 살자.”
입을 찢는다 해도 이 말만큼은 내 입으로 하기 싫었는데.
“정희 씨도 걱정하시고, 너도 좀 멀긴 해도 내 집에서 다니는 게 여러 가지로 편할 거야. 내 집, 와 본 적 있던가? 좁긴 해도 방이 세 개라, 물론 독방을 쓰게 해 줄 거고, 네 개인 생활은 침해하지 않을 거야.”
입이 찢어져도 하기 싫었던 이 말을 굳이 내 입으로 한 까닭은, 이 불편한 분위기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어릴 때에도 저놈은,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부루퉁하게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동안, 슬그머니 어머니 눈치를 보다가 결국은 안 내켜 안 내켜 하면서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곤 했었다. 그렇기에 정희 씨와 저놈이 대치할 때에, 백이면 백 결과는 정희 씨의 승리였다.
기왕 그렇게 될 바엔,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척하는 게 정희 씨나 아버지를 더 편하게 만들어 주겠지, 라고 생각한 게, 그래도 효자인 척 탈을 쓰고 지내는 내 결론이었던 것이다.
내 성격이 저놈의 저 제멋대로인 구석을 반의 반만 따라갔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뭐, 사실은 저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나도 상당히 제멋대로인 성격이다. 남의 의견은 듣는 척하면서도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태반이니.
각설하고, 녀석은 이번에야말로 이놈이 뭘 잘못 먹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 표정을 하고 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끝끝내 맘에 안 드는 듯 욕설을 중얼거리며 테이블 다리를 한 번 뻥 차고는 툴툴거리며 입에 물었던 담배를 뚝 꺾었다.
다분히 어린애 같은 그 태도가, 그놈의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