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31)

외전 #1

“‘저건’ 뭐예요?”

정윤을 처음으로 본 순간, 경준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우기의 끈적한 공기 탓에 유독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경준은 모든 것에 은밀하게 짜증이 났었다. 프락치 하나 때문에 담당하던 구역을 모두 너구리 같은 김 이사에게 맡기고 한국을 떠나는 신세가 됐다. 삼합회 출신 비즈니스 파트너라는 것들은 장부도 제대로 작성할 줄 모르는 꼴통들로 판명이 났다. 새로 맡은 일은 자면서도 지휘할 수 있을 만큼 따분하고, 태국 현지에서 마련한 아파트는 너무 넓어 거실에 들어갈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이럴 때 초코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초코는 경준이 한국에서 기르던 애완견 이름이었다. 구역 정리를 하던 중, 얼어 죽기 직전의 개를 주워 왔는데, 털이 복슬복슬하고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면 사람처럼 재채기를 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워 기르게 됐었다.

몸통도 조그맣고, 안아 올릴 때마다 혀를 할짝거리면서 뽀뽀를 하겠다고 달려드는데, 정말이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초코라는 이름은 털색 때문에 붙이게 됐다. 짙은 갈색의 반지르르한 직모를 보고 대강 붙인 이름이다. 발음도 귀여우니까. 초코.

하지만 데려올 수 없었다. 죽었으니까.

경찰이 다짜고짜 사무실에 들이닥쳤던 그날, 인파에 휩쓸린 나머지 겁에 질려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 것이다. 경준은 최대한 정중하고 긴급하게 개를 데려와야 한다고 부탁했다. 하지만 강 반장은 야속하게도 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초코는 겁을 집어먹고 어슬렁거리다가, 주의가 깊지 않았던 오토바이에 치이고 말았다.

울 수 있는 인간이었다면 사흘 밤낮을 울부짖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경준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대신, 경준은 할 수 있는 대로 화풀이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모두 프락치를 색출하는 데에 할애했다.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럽게 죽여, 시체는 초코 같은 개들 밥으로 줬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사람을 개밥으로 준 일이 아니라, 초코의 죽음을 그 프락치 탓으로 돌린 것 말이다. 경준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탓했다. 목줄을 더 꽉 잡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외로워 보여도 사무실에 데려오지 말걸 그랬다. 죽은 개를 생각할 때마다 죄책감으로 가슴이 무겁고, 비통했다. 경준은 대한민국에 당분간 발을 디딜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보다도, 개의 죽음이 더 가슴 아팠다.

그런 고로, 그는 태국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윤을 처음 만났던 때, 그러니까 사업을 시작하기 전 약의 품질을 확인하기 위해 방콕에서 반군이 득실거리는 국경 지대까지 직접 행차했던 그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모기가 많고 군복을 입은 딱딱한 사람들만 마주치게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 제조한 마약이 들어오는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다. 새로운 ‘상품’을 찾던 참에 한 번은 들러야 했었다.

수확이 없지 않았다. 기존의 약물을 새롭게 조합해 만들어졌다는 새 물건을 발굴했으니까. 알약처럼 생긴 각성형 약물이었는데, 화학 약품을 사용해 만들기 때문에 제조 비용이 양귀비 농장을 운영하는 비용의 반도 되지 않았다. 중독성도 강하고 보관도 쉽다. 유일한 문제는 품질뿐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물건을 보여주겠다며 안내를 맡은 삼합회 출신 조직원이 데려간 곳은 건축 자재 창고로 위장한 컨테이너 박스였다. 중구난방으로 봉투를 보관한 통에 약이 사라져도 알아차리기에 어렵고, 위장용으로 시멘트 포대를 켜켜이 쌓아둔 바람에 사방에 먼지가 빼곡하다. 견디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던 찰나 경준의 눈에 피투성이가 된 인간이 들어온 것이다.

“저게 뭐냐니까요?”

그래서, 퉁명스러운 질문이 나오고 말았다. ‘저것’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저건, 인간이다. 뒈지게 얻어맞은 인간.

손발이 노끈으로 묶여 구석에 던져진 모습이 꼭 사냥당한 짐승 같았다. 엽총을 맞고 쓰러진 곰이나, 멧돼지 같은 것. 얼마나 때린 건지 코뼈가 부러졌고, 눈에 보이는 곳곳이 멍투성이였다. 눈을 반쯤 뜨고 있었지만, 의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화가 날 만큼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계절은 습하고 더운 날씨의 연속이다. 저러다 죽기라도 하면 금방 악취가 날 것이고, 그 냄새가 물건에 배기라도 하면 손쓸 수가 없었다. 그 피해는 소매상인 청명파에서 고스란히 떠안게 될 터였다.

경준의 굳어진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그를 여기로 안내한 삼합회 소속 조직원이 더듬거리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잠시 끌고 온 것뿐입니다. 녀석이 도망을 갈지도 모른단 소리가 있어서….”

이어지는 말은 어차피 진짜 처형은 다른 곳에서 일어날 계획이었고, 여기는 잠시 끌고 온 것뿐이라는 게 주된 취지였다.

기분이 상한 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경준은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려, ‘그것’이 쓰러진 기름통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경준은 더 신경을 기울여 그를 훑어보았다.

멍청하게 생긴 얼굴. 축 처진 눈꼬리며 눈썹이 언젠가는 이 꼴로 이 자리에 올 것이었다고 예견하는 것 같다. 유일하게 사나운 구석이라고는 딱지도 앉지 않은 눈 밑의 상처뿐이었다. 휘어진 칼날로 도려낸 것 같은 상처였는데, 그마저도 변변치 않았다. 린치 당하던 중에 생겼다기에는 위치도, 벌어진 모양도 애매하다. 얘네는 사람 하나 망가뜨리는 것도 못 하나?

발끝으로 턱 밑을 툭툭 건드리고 있을 때, 뒤에 선 삼합회 조직원이 속삭였다.

“그 자식입니다. 큰 형님을 죽인 게.”

“…얘가? 얘가 탄 루안을 죽였어요?”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준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말았다.

이곳을 이십 년 가까이 이끌었던 독재자 같은 리더, 탄 루안이 죽었다는 소식은 얼마 전에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그 처형 방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것도 들었다. 그렇게까지 흥미를 끄는 소식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생길 일이었으니까.

탄 루안은 성정이 포악하고 괴팍한 놈이었다. 인간들을 싸움 붙여 서로 죽이게 만들고, 고아들에게 약을 주어 세뇌하기도 했다고 들었다. 가끔은 경준도 구역질이 일 정도였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만큼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그런 인물이 공포 정치를 펼치는 게 도움이 되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악명이 자자했으면서도 그 오랜 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렇지만 요즘에는 약에 취한 나머지 그 횡포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오죽하면 보스의 죽음을 전달하는 저치들도 저렇게 담담할까.

아무리 그래도 이 남자가 제 보스를 죽였다는 건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한 짓을 뒤집어쓴 거라면 모를까.

경준의 침묵에 초조해진 듯, 조직원이 설명을 이어갔다.

“원래 시중을 들던 놈입니다. 무슨 악귀가 쓰인 나머지, 형님이 목욕하는 사이에 무시무시한 짓을 저지른 거죠.”

“악귀요.”

“끝까지 대장은 죽은 게 아니라고 우기지 뭡니까.”

아하. 미친놈이었군.

어느새 경준은 피투성이가 된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준은 상대에게 찬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목을 적실 용도라고 생각한 상대가 아이스박스에서 생수통을 가져오자, 경준은 남자를 응시한 채로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이내 생수통을 기울이고, 남자의 얼굴 위에 붓는다.

벌어진 상처 위로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스며든다. 찬물을 두들겨 맞은 남자가 튀어 오르며 눈을 떴다.

경준은 빙긋, 웃음을 머금었다.

“처음 만나네요.”

“뭐? 누, 누구야? 어디?”

남자가 어눌한 발음의 북경어로 더듬거렸다. 삼합회 출신이 아닌 건가?

“정말이에요? 당신이 보스를 죽였어요?”

“아니.”

“저 사람이 그랬다던데.”

“대장은 안 죽었어.”

경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가 고개를 젓는다.

“죽었어요. 유골함도 봤는걸.”

“누나 짓이야.”

궁지에 몰린 것처럼,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나는 머리가 좋아. 항상 속임수를 써.”

맛이 단단히 갔는데. 경준은 삐딱하게 그를 보다가, 턱 아래에 구두코를 밀어 넣었다.

“시중을 들었다고 그러던데. 정말이에요?”

“…….”

“혹시 좆도 빨 줄 알아요?”

그저 잔인한 호기심에, 혹은 조롱하려는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남자의 이어지는 행동은 경준을 놀라게 만들었다.

감겨 있던 남자의 눈이 천천히 떠진다. 그가 비틀거리며 몸통을 일으켜 세웠다. 조직원이 공격적으로 다가왔지만, 경준은 손등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막 재밌어지려는 일을 걷어찰 수야 없었다.

까맣고 초점이 없는 눈이 다시 스르르 감긴다. 이번에는 체념하듯이. 머리를 기울여, 그가 입술을 경준의 사타구니에 문질렀다. 코뼈가 비틀어지고 턱까지 피가 흘러내리는 상태로. 당장이라도 박히고 싶다고 조르는 것처럼.

경준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가 앞니를 드러내 지퍼를 내린다. 속옷 위로 혀를 내밀어 애타게 핥다가, 조금 더 입술을 깊게 박는다. 뒤로 묶인 손목이 움찔거린다. 아마 반사적으로 성기를 그러쥐려 한 모양이었다.

경준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던졌다. 좀 더 놀아도 괜찮을까? 삼합회 조직원은 양보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내미는 제스처를 보였다.

어깨를 으쓱하고, 경준은 다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봐도 볼품없이 생겼다. 가랑이 사이에 음탕하게 피가 말라붙은 볼을 비벼대는 것을 보니 더 그렇다. 상처 입은 개새끼. 아는 거라고는 이런 짓밖에 모르는 인간처럼.

재밌어.

경준의 손바닥이 짤막한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성적인 자극보다도, 상대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야 말고 싶은 가학적인 욕망에서 욕정이 일었다. 반 정도 선 성기를 빼내어 남자의 입술 사이에 물려준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달갑게 귀두를 머금었다. 혀가 끈적이게 귀두 아래의 민감한 부분에 파묻힌다. 죽은 듯 딱딱한 얼굴에 묘한 열기가 뜬다. 남자는 가늘게 눈을 떠, 경준을 올려다보았다. 더 원한다는 듯이.

경고 한마디 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힘을 주어 밀어붙인다. 자위 기구처럼 기도 안으로 제 성기를 들이박는다.

놀라웠다. 기침을 삼키느라 목구멍이 꿀렁이면서도 남자는 몸부림 한 번 치지 않고 경준의 성기를 집어삼켰다. 눈이 벌게지며 눈물이 고이고, 검은자위가 돌아가도록 괴로워하는 기색이지만, 그마저도 잘 견뎌낸다. 경준은 흥미롭게 그 모든 반응을 지켜보았다.

이런 건 살고 싶다고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 훈련을 받아 익혀진 거지. 행위로 인한 자극보다도 그 사실이 더 흥분된다. 아주 오랜만에, 경준의 얼굴에 진심 어린 웃음이 번졌다.

더, 더 몰아붙인다.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고 붙잡은 머리통을 휘둘러댔다. 두꺼운 성기로 목젖 너머를 찔렀다. 숨이 막혀 피투성이의 얼굴이 추잡스러울 만큼 붉어질 때까지 뒤통수를 짓눌렀다. 그렇게 박아 넣은 채로 사정을 했다.

남자는 모든 걸 받아냈다. 조금의 반항도, 분노도 보이지 않고.

목구멍으로 정액을 받아내자마자, 남자는 기침을 뱉으며 허리를 구부렸다. 경준의 시선이 마침내 그에게서 떨어진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경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상상도 못 한 말을 뱉었다.

“살 수 있을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이거요. 혹시 내가 데려갈 수 있나 해서.”

조직원이 곤란하다는 듯 헛기침을 뱉었다.

“곤란합니다. 처형식이 내일입니다. 모두 참석할 거고요. 손톱 발톱을 다 뽑아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습니다.”

“요코하마로 넘어가는 배, 여기 줄게요.”

동요 어린 시선이 지나갔다. 부산항에서 지나가는 그 배. 일본까지 몸집을 불리려던 삼합회 입장에서는 먹음직스러운 미끼일 터였다.

“육만 달러 정도 하죠? 월 매출이. 그 정도면 약쟁이 몸값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임원회에 상의해보겠습니다.”

그날 밤, 경준의 숙소 앞에 그가 배달되었다.

남자는 여전히 지저분했고, 반쯤 죽어 있었다.

***

방콕으로 돌아왔을 때의 경준은 유별나게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지루할 때 놀아줄 상대가 생긴 게 아닌가.

치료를 마친 후에는 집으로 데려왔다. 새 옷을 준비해달라고 부하에게 부탁하고, 목욕을 시켜주겠다며 욕실로 데려갔다.

경준은 거의 사용하지 않은, 금색 다리가 달린 널찍한 욕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욕조에 물을 받아둔 참이었다. 향을 내기 위해 라벤더 입욕제도 타두었다.

욕조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하자, 남자가 멍청하게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경준을 응시했다.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래요? 부끄러워요?”

그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제 속옷을 끌어 내리는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반려견을 씻겨줄 때처럼, 경준은 성의를 다해 직접 남자를 씻겼다. 제법 즐거웠다. 피부가 부드러울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것도, 흉터 위를 만질 때마다 표정이 굳어지는 것도.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아랫배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거기에는 음탕하고 천박한 짐승을 부르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글자를 꾸민 모양이 그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게 우스웠다.

글자를 따라 손가락으로 훑어 올리며, 경준이 입꼬리를 들었다.

“이게 이름이에요?”

“…….”

“이렇게 불러도 돼요?”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차피 시시한 장난이었기 때문에, 경준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 앞에는 부탁한 옷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에게 옷을 건네자 그는 셔츠를 처음으로 본 사람처럼 옷을 둘러보았다. 정말 자기가 받아도 되는지 물어보는 듯 경준을 응시하다, 고개를 끄덕여주니 조심스럽게 팔을 끼운다. 서툰 손짓이 답답하게 단추를 채워 올렸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경준은 곧 곤란한 낯을 했다.

“…음. 문제네.”

사이즈는 얼추 맞았지만, 가슴이 문제였다. 유난히 발달된 가슴 탓에 흉부가 단추가 터져나갈 것처럼 팽팽했다. 숨만 잘못 쉬면 가슴만 드러나는 민망한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걸 본인도 느꼈는지, 남자는 어정쩡하게 벌어진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멍청해.

부드럽게 웃음이 흘러나온다. 까딱거리고 그의 앞에 손짓하며, 경준이 걸어 나섰다.

“나중에 해결해줄게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대리석이 깔린 부엌, 둘이서 앉기에는 명백하게 넓은 식탁 위에 저녁 식사가 준비된다. 요리사까지 데려와 만들도록 한 요리가 줄줄이 이어져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강낭콩으로 만든 수프와 돼지 뱃살 구이. 베이컨을 넣은 으깬 감자와 흰살생선 요리에 태국식 청경채 샐러드도 곁들였다. 하나같이 먹음직스러웠다.

경준은 주의 깊게 남자의 행동을 살폈다. 그는 한참이 지나도록 눈앞의 수프에 손도 댈 생각을 않았다.

“음식이 마음에 안 들어요?”

고개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는 서서히 고개를 젓는다. 느긋하게, 경준은 깍지낀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럼 먹어요.”

출발 신호라도 들은 것처럼, 그가 식사를 개시했다. 고개를 처박고 들이마시는 것처럼 수프를 해치우고는 포크로 고깃덩어리를 들어 우악스럽게 뜯어먹는다. 평생을 굶주린 사람처럼 게걸스럽다. 제 몫의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고, 경준은 그가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접시가 순식간에 깨끗해진다. 남자는 만족했는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이 빠르게 이완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경준이 말을 걸었다.

“소개를 다시 해야겠네요. 전 경준이에요. 박경준.”

“박경준?”

남자의 눈이 뜻밖에도 반짝였다.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내뱉는 말이다. 어딘가 놀라는, 달가운 듯한 기색이 어린다. 그의 양손이 식탁보를 붙잡았다.

“한국인이야?”

“네.”

남자가 망설이듯이 입술을 깨문다. 눈을 도르륵 굴리다가,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한국에서 왔어.”

한국어였다. 그것도 능숙한.

이건 예상 못 했는데. 경준이 고개를 기울였다.

“한국인이었다고요?”

“응.”

“어쩌다 여기 왔어요?”

묵묵부답이다.

팔뚝의 주사 자국에 시선이 넘어갔다. 얼마나 오랫동안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수단을 통해 철저하게 훈련받은 건 분명하다. 저 멍청한 얼굴로 무슨 짓을 하고 다녔을까?

“한국 이름도 있어요?”

“…정윤. 정윤이야.”

“성은 모르고?”

“기억이 안 나.”

“그럼 그렇게 부를게요. 정윤 씨.”

건드리지 않은 식사를 그 자리에 두고,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 멍청한 눈망울이 경준을 사로잡았다.

“어디 가?”

“그런 옷으로는 못 데리고 다녀요.”

정윤은 어리둥절했다. 못 데리고 다닌다고? 왜? 대장은 옷차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더러워질 옷이니 넝마 같은 것을 입히기 일쑤였다. 화가 난 날에는 발가벗긴 채 목줄을 채우고 끌고 다니기도 했다.

게다가 지금 건네어 받은 옷은, 정윤이 평생 입은 것 중 가장 좋은 옷이었다. 처음에는 옷감이 너무 부드러워 몸이 움츠러들 뻔했다. 가슴이 약간 답답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경준은 이미 계획을 세워둔 듯했다. 정윤의 옆으로 다가와, 그가 짤막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두피에 닿는 감촉이 간지러워 어깨가 움찔한다. 그 솔직한 반응을 보며 경준의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따라와요.”

그렇게 경준이 안내한 곳은 고급 리무진 앞이었다.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경준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다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몰려온다. 정윤은 두 다리를 모으고 창밖으로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을 돌렸다.

“…….”

고층 건물과 거리를 빽빽하게 메운 사람들. 막 창밖에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고 웃는다. 정윤에게는 이 모든 게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경준이 데리고 간 곳은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맞춤형 재단실이었다. 옷을 파는지도 모를 만한 호화스러운 장소였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도 모르고 서성이는 정윤을 보고, 경준이 웃음 지었다.

“알아요. 저도 익숙해지는 데 꽤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턱짓과 함께 찻주전자를 든 사람이 나타났다. 줄자를 든 사람들이 정윤의 옆에 둘러서 둘레를 잰다. 끈 같은 것을 가슴에 두르고 지그시 누르는 감각이 이상하고, 불편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시선을 돌리고 있자 경준이 턱을 잡아 자세를 맞췄다.

“똑바로 서지 않으면 옷이 삐뚤어져요.”

얼마간의 갑갑한 시간이 끝나고, 곧은 양복을 갖춰 입은 키 작은 남자가 셔츠와 정장을 가지고 왔다. 경준의 지시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정윤은 무심결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

짤막하게 숨을 머금는다. 거울 속에는 제 기억에 없는 낯선 인간이 서 있었다. 얼굴은 깨끗하고 옷은 잡지에서나 보던 사람들처럼 생겼다. 뺨에 난 흉터는 여전히 흉측했지만, 샹들리에와 앤티크 가구가 늘어선 배경이 시선을 분산시켰다.

어색하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혹은 앞으로 그렇게 되어버릴 듯한 불안감이 정윤에게 들이닥쳤다.

“잘 맞네.”

하지만 경준은 만족한 모양이었다. 어깨 위에 제 턱을 얹으며, 허리에 늘씬한 팔을 감싸 안는다. 곱상하고 갸름한 얼굴이 바로 옆에 있으니 뭉툭한 제 생김새가 대비되어 도드라졌다.

“어때요? 아까보다 편하죠?”

“…으, 응.”

“마음에 들어요?”

이상하고 어색해.

“-마음에 들어.”

“잘됐네.”

아랫배 위를 매만지며, 경준이 그에게서 떨어진다. 그가 품에서 카드를 꺼내어 들었다.

***

숙소로 돌아가기 전, 경준은 차를 세우고 정윤을 불렀다. 좋아하는 가게가 근처에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경준이 말한 가게는 유명한 해변 옆에 위치한 작은 버블티 트럭이었다. 경준은 그에게 마시고 싶은 음료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정윤에게는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고개를 젓자, 경준이 멋대로 음료를 주문했다. 레모네이드 두 잔.

두 사람은 해변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바닷가에는 해외에서 몰려온 관광객과 현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석양을 구경하고 있었다. 바다가 해를 집어삼키며 모래사장이 붉게 물든다.

“예뻐요. 참.”

정윤은 조용하게 동의했다. 이런 바다를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으니까.

그의 시선이 조용하게 ‘경준’이라는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결국, 정윤은 그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날 살려준 이유가 뭐야?”

경준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런 건 왜 물어봐요?”

“얻을 게 없잖아.”

정윤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좋은 밥에, 깨끗한 옷을 입히고, 경치 구경까지. 이런 대접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죽여야 하는 사람, 있어?”

“조금요. 그런데 그거 때문은 아니에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경준은 그저 즐겁게 미소 지었다.

“정윤 씨. 개 길러본 적 있어요?”

정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경준이 말을 이었다.

“전 있어요. 두 번. 둘 다 좋았어요. 놀아주고,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빗질도 해주고. 그러면 되게 좋아해요. 얼마나 잘 따르는데. 졸졸 쫓아다니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제일 먼저 반겨주고.”

노을빛을 받으며 부드럽게 선을 그리는 눈동자가 함께 물든다. 반듯하게 뒤로 넘겼던 머리카락도 바닷바람을 맞아 한두 가닥이 허물어졌다. 얇은 입술이 빨대 끝을 문 채 웃음을 머금었다.

“전요. 그게 사랑이라고 봐요.”

이윽고, 경준이 고개를 돌렸다. 정윤은 흐트러짐 없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경준의 얼굴은 단정하고, 깨끗했다.

“정윤 씨. 절 개처럼 사랑해줄래요?”

일그러지고, 부패하고, 추악해지게 된 순간이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석양이. 죽은 개가. 불이 난 항구와 이슬이 맺힌 음료수 컵이. 그 순간 속에 뚜렷하게 녹아들었다.

이번에는 잘 해내야지.

그날, 경준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절대 목줄을 놓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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