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31)

#28

빗줄기를 뚫고 강 반장의 차가 현장으로 다가왔다. 부두는 언뜻 보기에 빈 것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쓰러져 누운 인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강 반장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비의 후드를 쓰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씨발….”

강 반장이 뒷걸음질을 친다. 곧 커다란 동작으로 팔을 흔들며 신호한다. 경찰들이 부두를 에워싸고, 형사 한 명이 박경준에게로 다가갔다. 두 손이 가만히 목을 짚는다. 잠시 동안 숨도 쉬지 못할 침묵이 흐르고, 이내 경찰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습니다.”

한숨이 쏟아졌다. 이마를 누르며 강 반장이 명령했다.

“구급차 부르고, 상황 수습해.”

주변을 둘러본 강 반장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피가 묻은 각목이 굴러다녔지만 이를 휘두른 사람은 바다로 들어간 빗물처럼 사라졌다.

강 반장은 쓰러진 경준의 얼굴을 다시 응시했다. 아주 잠시, 그가 시퍼렇게 눈을 뜬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돋아서 눈을 깜빡였을 때, 그는 곤히 잠든 채였다.

***

훈장 수여식이 이어진다. 단상 위에 선 강 반장은 오랜만에 입는 정복이 익숙하질 않아 계속해서 몸을 굼질거렸다. 그의 옆으로는 김 형사, 그리고 웃고 있는 이 경관의 영정 사진을 든 그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별처럼 생긴 금색 훈장이 가슴에 달린다. 밑에 달린 리본은 색이 푸르딩딩할 뿐, 추모식에서 달았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식이 끝나고, 모자를 옆구리에 낀 채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을 때, 경관 하나가 강 반장을 불렀다. 보자는 사람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복도로 나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강 반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김 검사님 아니십니까.”

김 검사가 능구렁이 같은 얼굴로 웃음 지었다. 자금 세탁 건으로 검사장 자리도 물을 먹고 옷을 벗네 마네 하면서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던 그는 박경준 건으로 일약 전 국민적인 강력 수사의 아이콘이 되어 있었다. 테러까지 일으킨 무자비한 조폭들을 추적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한 영웅으로. 사실은 동네 노친네가 오줌을 지리며 경찰을 불렀을 뿐이었는데.

애써 표정 관리를 한다. 어쨌든 떳떳하게 특수수사반으로 돌아온 것도 김 검사가 제자리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훈장도 그때 같이 물먹은 것의 보상일 터였다.

“고생 많았어, 지금까지. 어디, 총장 자리 한번 노려보지 그래, 이번 기회에.”

어깨를 두드려대며 김 검사가 혼자서 껄껄 웃음을 터뜨려댔다. 강 반장은 띠꺼운 듯이 그를 응시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듣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김 검사님. 이주환이 사건 말입니다.”

김 검사의 안색이 빠르게 굳었다.

“그 살인범 얘기는 왜.”

“살인범 맞습니까, 정말?”

“거, 분위기 좋다가 갑자기 살벌하게 만드네. 증거랑 지문이랑 강 반장도 다 확인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 약방 있는 건물, 김 검사님 외가 쪽 소유던데요. 사촌분이 그날 밤에도 그 근처에 돌아다녔다던데….”

김 검사가 입을 다물었다. 절절매며 가식적으로 웃던 미소까지도 가셔, 흉흉한 냉기가 흐른다.

“그놈, 고졸에 근본도 변변치 못한 놈이야. 털었으면 뭐라도 나왔어.”

“그럼 그걸 터셨어야죠.”

“이 사람 왜 이래? 인마, 넌 찬성 안 했어?”

“어떻게 대한민국 사법 집행부란 곳에서-.”

“이 자식이, 근데.”

김 검사가 언성을 높였다.

“좋게 좋게 끝내. 어? 언제부터 사람이 이렇게 앞뒤가 막혔어?”

“사람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죽였어? 우리가 죽였냐고?”

강 반장이 입을 다문다. 김 검사는 갑자기 더위를 탔는지 양복 재킷 단추를 풀어, 펄럭이고 안으로 바람을 불어 넣었다.

“너 다시 한번 그 새끼 이름 내밀기만 해봐. 강릉 촌구석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알겠어?”

마지못해, 강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

가는 빗줄기가 차 유리에 떨어진다.

와이퍼가 움직이지 않는 차창에 내려앉아 이상한 모양으로 휘어지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잠자코 응시한다. 굵게 뭉쳐 흐르던 물방울은 이제 분무기를 뿌린 것처럼 작은 방울로 튀어 있을 뿐이었다. 때 이른 소나기였던 걸까. 시원하게 대기를 가르던 빗소리 역시 속삭임처럼 사그라든다.

김 형사가 다가온다.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진 않은 모양이다.

“…없더냐?”

“계속 수사하겠습니다.”

그러라고 말은 하지만, 솔직히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라진 이진환을 찾는다는 게.

“문상까지 다녀오신 겁니까?”

강 반장이 제 넥타이를 만졌다. 평소에는 매지도 않는 물건인데. 오늘 그의 목에는 새카만 넥타이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아니. 기분만 냈다. 염치가 있지. 내가 어떻게 거길 가냐.”

병원에서 의문의 괴한에게 살해당한 진환의 형, 이주환의 장례식 얘기였다. 부검을 마치고 오늘이 발인이니, 장례식장에 나타날 생각이라면 이날밖에 없다.

물론 형사들이 깔려 있을 걸 모를 만큼 멍청한 놈은 아니었지만, 원래 미련한 짓도 해보는 게 경찰 정신 아니겠나.

“…이진환이는 그렇다고 치고, 그 새끼는 어쩔 겁니까?”

“누구.”

“박경준이 애완견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버려 두고 싶다.”

강 반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수로 찾겠냐. 벌써 죽은 사람을.”

동의하는 것처럼, 김 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차 너머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양아치 놈들이 시비를 걸러 왔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연 강 반장은 놀라고 말았다. 웬 젊은 여자가 대뜸 핸드폰을 내미는 게 아닌가.

“강 형사님 맞으시죠?”

“그렇습니다만은….”

간판에 걸린 것처럼 단단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OO일보에서 나왔습니다.”

헛웃음을 흘리며, 강 반장이 담배꽁초를 떨어트렸다.

“이진환, 이 씹새끼.”

***

눈을 뜬 순간, 경준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추위였다. 잘 보니 병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봄이 왔는데도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털이 쭈뼛 설 것 같았다.

창문을 닫으려 팔을 움직였을 때가 되어서야 경준은 제 팔에 수갑이 채워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반대편 고리는 침대맡 지지대에 걸렸다. 신기하다는 듯 손목을 돌리며 절그럭거리는 모양을 지켜보다가, 경준은 도로 벌러덩 제 머리를 누였다. 손목을 탈골하면 탈출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귀찮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두통이 정수리부터 일었다. 통증에 무감각해진 지는 오래였지만, 죽을 만큼의 부상은 오랜만이었다. 한번 눈을 떴더니 쉬이 잠이 들지도 않았다. 망을 보기 위해 붙어 있는 듯한 형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좋은 얘기 상대가 되었을 텐데.

결국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누워 있기뿐이다. 천장을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경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왔네요.”

그러자 상대가 대답한다.

“응.”

오래 머물 생각은 없는지, 정윤은 바로 옆에 마련된 의자에도 앉지 않았다. 야구모자에 마스크까지 쓴 것을 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가 썩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곧 마스크를 벗고 멀쑥하게 저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얼마나 멍청한지. 코를 꼬집어주고 싶다.

“작별 인사예요?”

“응.”

“어디로 가는데요?”

“나도 몰라.”

“바보.”

눈이 가늘어진다. 반으로 쪼개어지는 것 같던 통증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왜 마음을 바꿨어요?”

속삭이듯,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나랑 같이 죽어준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는데.”

정윤의 손가락이 이마 위를 훑었다.

“너 죽는 거, 싫더라.”

조그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웃음이라고 말하기에는 딱하고 실소라고 하기에는 잔인한 웃음이었다. 실없고 가벼운 미소와 함께, 경준은 눈을 감았다.

“가버려요. 꼴도 보기 싫어.”

“경준아.”

“가라니까.”

“살아.”

경준이 고개를 돌렸을 때, 발걸음 소리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다시, 경준은 창문가를 응시했다. 문을 닫아달라고 할 걸 그랬나. 역시 추운데.

“날씨 좋다.”

일부러 소리 내어, 경준이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미웠다. 살고 싶었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있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여전히 지루했을 것이다. 얼만큼의 돈을 손에 쥐고 어느 자리에 올라도, 누가 오줌을 지리며 비명 지르는 걸 지켜봐도, 지금과 똑같이 지루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라고?

그건 저주다. 제 꼬리를 먹는 뱀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평생을 연옥 같은 삶 속에서 썩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깨달음을 선사하는 게, 정윤 나름의 복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정윤은 그런 걸 할 만큼 똑똑하지 않다.

“걱정 말아요.”

경준이 중얼거렸다.

“찾으러 갈 테니까.”

곧 간호사가 찾아오고, 의사가 찾아오고, 꾸벅꾸벅 졸던 경찰이 일어났다. 경준은 한참이나 고루한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하품이 나오고 진이 빠지는 짓이었다. 앞으로 며칠간은 계속 이럴 생각을 하니 아득할 정도였다. 손목을 달그락, 달그락, 돌리는 게 그나마 재미있는 일이었다. 관절을 꺾는 연습을 하면서.

***

- 오늘 경찰에서는 지난 무차별 살인사건 수사 당시 벌어진 부정 행각을 두고 공방이 일어났습니다. 한편, 억울하게 수감되었던 이 모 씨의 유가족은 경찰 당국을 상대로 소송을….

라디오를 끄고, 진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준아!”

힘차게, 그녀가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새로 이사한 집이 익숙해지질 않아, 아들 방을 찾는 데에도 잠시 발걸음이 헷갈린다. 그러나 동준은 제 방에 없었다. 널브러진 이불과 책이 쌓인 책상뿐이었다.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가, 그녀가 걸음을 틀었다.

“동준아! 영어 가야지!”

세탁실에도, 화장실에서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얘가 말도 안 하고 어딜 나갔나? 슬슬 걱정이 되려고 할 때, 현관 근처에서 꾸물거리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준은 빼꼼히 문을 연 채, 염탐이라도 하는 것처럼 문틈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아는 아들의 옆에 앉아, 조그마한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리 아들.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장난스럽게 부르며 머리카락에 뽀뽀를 해준다. 평소라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돌아와야 할 텐데, 이번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제야 진아는 아들이 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틀었다. 문틈으로 사각의 각진 그림자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니, 손잡이가 달린 조그마한 캐리어 가방이었다.

“저게 뭐지?”

동준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당부하고, 진아는 문밖으로 나섰다. 가방은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뭐가 들었는지,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웃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는 아파트 구조상 힘들었다. 거기에 이 가방은 정확하게 이 집의 문 앞에 놓여 있었다. 미심쩍게 가방을 바라보던 끝에, 진아는 내용물을 확인하기로 했다.

주인을 알려줄 만한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태그도 달려 있지 않았고, 여행 가방에 으레 붙어 있는 수화물 스티커도 없었다. 그저 흠집이 많아, 무척 낡은 가방이구나, 하는 실감이 날 뿐이었다. 가방을 살펴본 끝에,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동준아. 혹시 모르니까 방에 들어가 있어.”

“왜?”

“일단 들어가 있어.”

입을 샐쭉하게 내밀면서도 아들은 얌전하게 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가슴을 진정시키고, 진아는 지퍼를 열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 누런빛이 물결처럼 어른거렸다.

진아는 눈을 깜빡였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은 탓이었다. 금괴. 가방 안은 금괴로 가득 차 있었다.

***

하늘이 낮고, 푸르다. 포말을 일으키며 갈라지는 물결 사이로 뱃머리가 지나간다. 꼬리를 따라 물결이 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몇 시간이고 질리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진환이 다가왔다.

“선실에 들어가시죠.”

“여기도 좋아.”

“형님, 물 진짜 좋아하십니다. 물고기도 보입니까?”

“음.”

난간에 배를 대고 정윤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농담이었는데. 엔진 소리가 이렇게 큰데 물고기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진환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바람에 목둘레의 옷깃이 펄럭이는 모습이, 열중해서 눈을 내리깐 모습이 이가 시릴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마침내, 정윤이 팔뚝으로 지탱하던 허리를 들고 고개를 세웠다.

“거품 때문에 안 보여.”

그 순간, 진환이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는다. 정윤은 천천히 침입해 들어오는 말랑한 혀를 맞이했다. 끈적하게 혀끝이 얽히고 간지럽게 젖어든다. 머리 전체에 저릿저릿한 감촉이 퍼졌다. 진환이 떨어진 후에야, 그가 중얼거렸다.

“…누가 보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조심해야 하는데. 자제가 안 되네요.”

진환의 얼굴이 발갛게 열이 올랐다. 부스스 웃음을 머금으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믿기지가 않습니다. 형님이랑, 여기 있다는 게.”

진환의 두 손이 손등 위에 겹쳐졌다. 그는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날아갈 곤충을 쥔 것처럼 단단하게 손바닥을 죄여왔다. 손을 맞잡는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나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면 정윤이 사라질 것 같았다. 대신, 진환은 조그맣게 속삭였다.

“형님.”

“…응.”

“사랑합니다.”

정윤에게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진환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정윤은 손을 모으고 앉아, 엔진의 진동과 함께 조그맣게 흔들거리는 제 어깨 위의 무게를 느꼈다. 염색물이 빠져가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아 간질간질하다. 팔뚝이 맞닿아, 바닷바람을 쐬고 있어도 신기할 만큼 따뜻했다.

배가 방향을 돌린다. 진환의 머리가 미끄러지기 직전, 정윤의 손바닥이 그의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소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 진환의 눈꺼풀은 벌어지지 않았다. 배가 부드러운 움직임을 되찾자, 정윤은 이마의 손바닥을 떼어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입가엔 아무런 표정도 띄워져 있지 않았다.

다시금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정윤은 엄지와 검지 사이의 오목한 부분을 꾹, 꾹, 누르기 시작했다. 진환이 알려준 지압이 아직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해는 오래전에 저물었다. 수평선 저편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즈음, 배는 건너편에 도착할 터였다.

이상해.

이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정윤의 계획은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견딜 수 없이 이어지는 벌과 가질 자격이 없는 행복, 두 개에 모두 지쳐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뿐이었으니까. 적어도 그런 것 같았는데.

주사기가 떨어지는 순간, 진환의 머리가 가슴팍에 닿는 그 순간, 정윤은 무언가가 끊어져 버리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은 그랬다. 오랫동안 팽팽하게 묶여 있던 끈이 도끼날을 맞은 듯 툭하고 끊어졌다. 반동으로 몸이 기울고, 다리가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일어나.’

사이렌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을 때, 진환의 팔을 낚아챘을 때.

‘도망가야 돼.’

그를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 숨은 곳에서 구급차에 실려 가는 경준을 보고, 옷 안까지 적신 차가운 빗물을 느꼈을 때.

‘같이 가자.’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길을 따라서.

바람이 뺨을 스친다. 하늘과 바다가 검정으로 뒤엉키고, 배는 공허를 가르고 꿋꿋이 길을 찾는다. 별과 구름과 달무리가 얼룩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옆으로 지윤이 다가왔다.

“배 한번 구리다. 가라앉는 거 아냐?”

지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위에 실크 가운을 꿰입고 있었다. 대장의 저택에서 마지막으로 봤을 때처럼. 하지만 얼굴이 밝고, 약이나 구타 따위는 겪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피부가 깨끗했다. 심지어 지윤은, 미소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누나가 저렇게 웃는 걸 보는 건.

정윤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할 말이 있어.”

“뭔데?”

“고마워.”

대장을 죽여줘서. 휘파람 같은 웃음소리가 귓전에 올렸다. 지윤의 손길이 뺨 위에 닿고, 사라진다. 그 흔적을 기리듯 정윤은 눈을 감았다.

홀가분하다. 처음으로.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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