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행인이 지나가자, 경준은 자연스럽게 후드를 뒤집어썼다. 제 얼굴이 전국 뉴스에 떴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윤을 찾을 때까지는 몸을 사리는 편이 좋았다.
“…….”
갑작스럽게 어지러움이 찾아온다. 눈을 감고, 경준은 바닥이 흔들거리는 듯한 감각이 사라지기를 조용하게 기다렸다. 어지럼증이 지나가자 이마를 만져본다. 진환이 내려친 자리에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피도 아직도 멎지 않았다.
따분해. 핏물이 묻은 손가락을 문지르다가 고개를 든다. 주변을 살펴보니 행인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텅 빈 풍경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깡촌이다.
항구의 흔적인 계선주며 노끈이며 부둣가는 여전하지만, 그 외에는 황량할 정도였다. 시멘트 바닥은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고 공기에서는 짙은 녹 냄새가 났다.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하늘은 짙은 어둑한 회색이다.
단 게 먹고 싶은데. 입맛을 다시던 중, 경준의 눈에 간판 색이 다 바랜 슈퍼가 들어왔다. 여름에 그나마 찾아오는 관광객을 노린 것인지 유치한 노란색의 비닐 튜브가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깨를 으쓱하고, 경준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천 원.”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며, 계산대에 앉은 노인이 말도 제대로 맺지 않고 응대했다. 경준은 오만원 권을 내밀었다.
“아니, 잔돈 없어?”
“그게 다예요.”
“이 양반이 제정신인가-.”
노인이 퉁명스럽게 고개를 들춘다. 그가 경준과 눈이 마주쳤다. 뉴스에서는 마침 검찰청에서 일어난 테러 사건과, 도주한 조직 폭력배 박경준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노인의 손이 계산대 옆에 올려진 전화기를 향해 뻗었다. 그걸 잡아채기도 전, 경준이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죄송한데. 조금 나중에 걸어주실래요?”
경준이 웃음을 머금었다. 노인의 손을 수화기에서 떼어내고, 전화를 옆으로 밀친다. 그가 가까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느새 노인의 턱 아래에는 칼날이 닿아 있었다.
“지금 급한 볼일이 있어서.”
“너, 너….”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칼을 빼, 가판대 위에 꽂는다. 노인이 뒤로 물러선다. 어느새 그는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고 있었다. 경준은 사탕을 집어 들었다.
“잔돈은 가져요.”
***
진환은 서서히 의식을 되찾았다. 눈길을 드니 실외기와 전선이 엉킨 건물 벽 그림자가 보인다.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가 어느새 거세어져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마가 터졌다. 무심결에 머리에 손을 대자 진득하니 피가 묻어 나왔다. 혀를 차며, 진환은 어질거리는 몸통을 억지로 벽에 기댔다. 빗물이 한두 방울씩 벌어진 상처에 스며들어, 간헐적으로 쓰라림이 찾아왔다.
진환은 멍하니 재킷 안쪽을 뒤적였다. 분명히 아까 담배를 샀는데, 이상하게 만져지지가 않았다.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탓인지도 모른다. 얼핏 본 손등은 원래 크기의 두 배에 가깝게 부풀어 있었다.
담배를 찾는 걸 포기하고, 진환은 피곤에 찌든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빗물이 신발 안으로 차올라,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물속을 걷는 느낌이 든다. 물에 젖은 바지 탓에 걸음이 갑절로 무거웠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몸통을 질질 끌며, 진환은 다리를 건넜다. 난간 너머, 다리 아래로 한강의 새까만 물줄기가 흐른다. 더러운 물은 하수구로 들어가, 아무도 도착지를 궁금해하지 않는 곳을 향해 흘러간다.
걷는 것도 피곤해.
자고 싶었다. 고상하고 대단한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흙 속에서 지렁이가 느낄 법한 본능적인 수면욕이 머릿속에 차오른다. 진환은 난간 앞에 멈추어 섰다. 물이 흘러 내려가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한다. 이대로 떨어진다면. 이대로 한 발만 앞으로 내민다면.
그러나 발은 쉽게 내밀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억지로 다리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구두 밑창이 달라붙어 버린 것처럼.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 그렇게 강물을 응시하고 있으니 오한이 밀려온다. 입가가 떨려오다가 기어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고 싶지 않은 것과 죽고 싶은 것 사이에는 얇은 막이 존재한다.
커다란 소리를 들어 손상을 입은 고막처럼, 고통과 무감각을 동시에 동반해야만 그 막은 무너진다. 형은 그 가느다란 선을 넘어 걸어가 버렸다. 하지만 거기로 형을 밀어버린 장본인은 걸음 하나도 내딛질 못한다.
머릿속이 멍하고, 사방에서 라디오 회신이 어긋났을 때 들릴 법한 삐익 소리가 들려왔다.
***
“아, 아, 아! 아파, 씨발!”
“칼도 맞아본 적 있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대체.”
얼굴에 대문짝만한 반창고를 붙인 채, 강 반장은 병원 난간에 기대어 비 내리는 길가를 응시했다. 궁지에 몰릴 만큼 몰린 상황이다. 박경준은 사라졌다. 경찰들이 뒤를 쫓고 있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경관은.
제대로 되어먹은 게 하나도 없었다. 여기에 쉼 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탓에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강 반장이 목 뒤를 문질렀다.
그의 옆으로 동료 경관이 다가왔다. 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반장님. 이진환이한테서 연락이 왔답니다.”
이진환이 제 차를 훔쳐 타고 사라진 후 사흘 만의 소식이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 두통이 생길 것 같아, 강 반장은 눈썹 앞머리를 주름이 지도록 모으며 꾹꾹 눌러댔다.
“…뭐래냐.”
“차 제자리에 돌려놓을 테니까 걱정 말랍니다.”
“하아. 걔 앞으로 수배령 내렸지.”
“진작에 그랬죠.”
“그래. 그거 잘 유지하고.”
눅눅한 탓인지 라이터에 불씨가 잘 붙지 않는다. 고전하고 있자, 김 형사가 먼저 부싯돌을 문질러 그의 앞에 내밀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이주환 말입니다. 이진환이 형.”
담배를 깊게 빨아올릴 때 불씨가 벌겋게 깜빡인다. 내뱉는 연기와 함께 강 반장의 시선이 아스라이 하늘을 향했다.
“…우리 탓인 것 같냐?”
“그 할머니 치매 있는 건 맞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 형사도 개운해 보이진 않았다.
강 반장이 그에게도 담배를 권하지만, 짤막하게 끊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내가 임신을 했다는 모양이다. 좋을 때라고 속으로 되뇌고, 두 모금째를 빤다.
***
방파제가 쌓인 해안가, 정윤은 물이 떨어지는 지붕 아래에 서 비바람과 함께 요동치는 바다를 멍하니 응시했다. 바람에 실려 끼쳐오는 냄새에 상쾌한 빗속의 공기와 묘한 비린내가 번갈아 풍긴다.
“도착했네.”
누나가 말을 걸었다. 정윤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만이지?”
“잘 모르겠어.”
“이십일 년이야. 그것도 기억 못 해?”
기억 못 하겠다. 정윤에게 한국에서 있었던 일들은 겪지 않은 일처럼 흐릿했다. 그러나 포말을 남기며 해변을 휩쓰는 파도를 보고 있자 오랜 시간 가라앉아 있었던 기억의 파편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도박 빚 대신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심각하게 도박에 빠져 있었다. 언제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고 ‘털보’라는 사람을 따라다녔다. 며칠 동안 사라지는 게 일상이었던 아버지는 곧잘 새벽에 돌아와 누나나 정윤을 내려치며 팔자가 어쩌고, 여편네가 어쩌고 욕설을 퍼부었다.
정윤과 지윤은 아버지 눈에 자기들이 짐짝처럼, 쌀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털보’ 말에 아버지가 넘어간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일이 있던 날. 아버지는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다. 너희 입으라고 사 왔다면서 사이즈도 맞지 않는 새 옷을 내밀고, 점심으로는 돈가스를 사줬다. 지윤은 이상하다며,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정윤은 지윤의 말에 반만 동의했다. 다정한 아버지는 이상했지만, 정윤은 그런 아버지를 조심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쌍둥이의 손을 잡고 바다로 나갔다. 달을 보러 가자고 했던가. 그런 핑계를 댔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데리고 간 곳은 정윤은 처음 보는 부둣가 구석의 어느 창고였다. 양탄자처럼 둘둘 말린 원단이 선반처럼 켜켜이 쌓인 곳이었다. 먼지 때문에 가만히만 있어도 코가 간질간질하고 재채기가 나왔다.
정윤과 지윤은 옆으로 누운 원통형으로 두껍게 말린 원단과 원단 사이의 틈에 나란히 고개를 들이밀고 무섭게 생긴 낯선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불쾌하게 웃었고, 아버지는 비굴하고 허리를 숙여댔다. 이윽고, 아버지의 손에는 두둑한 돈다발이 들렸다.
데리러 갈게. 울지 말고.
아버지가 말했다. 비열한 얼굴로 웃으면서. 정윤은 누나의 말을 들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쌍둥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이 데려가려는 작은 배에는 두 쌍둥이와 비슷한 행색의 사랑받지 못하고 불행한 아이들이 실려 있었다. 정윤의 심장이 섬뜩하게 내려앉았다. 이대로 떠난다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정윤은 저를 붙잡은 남자의 손등을 깨물었다.
달아나는 정윤을 붙든 것은 창고 옆에서 돈다발을 들고 히죽거리던 아버지였다. 정윤은 집으로 가고 싶다고, 놓아달라고 울먹였지만, 아버지는 ‘쌍놈’이라는 단어를 쓰며 윽박지를 뿐이었다. 정윤은 고분고분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 몸싸움이 격해지고, 창고 옆에 세워진 드럼통이 쓰러졌다. 그 틈으로 가솔린이 쏟아졌다. 그리고, 아버지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어디에서인가 지윤의 팔이 뻗쳐와, 정윤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열기가 둘을 잡기 전, 두 아이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불길이 치솟았다.
삼합회 조직원들은 배를 띄웠다. 정윤과 지윤은 물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배에 올라타야만 했다. 정윤은 불이 붙은 저편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불에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심장에 돌이 들어찬 것처럼 아무 감각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다음부터는 줄곧 그랬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악마처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는데, 지금의 이곳은 믿기지 않을 만큼 평화로웠다. 배들은 모두 사라지고 해안가에는 울타리가 걸렸다. 이십 년 전의 풍경을 얇은 종이에 옮겨 그려 지금 이곳의 모습 위로 겹쳐 올리는 기분이다. 유령처럼 과거의 흔적들이 되살아나 풍경 위로 하늘거린다.
“좀 살풍경하다. 구려.”
지윤이 말했다.
손안의 고양이가 울었다. 바닥에 내려놓았더니, 쪼르르 골목 안쪽으로 달려가 버린다. 별다른 말 없이, 정윤은 벽에 등을 기댔다. 시멘트벽이 눅눅해져 등이 서늘해지는 게 기분이 좋다. 정윤은 비를 좋아했다.
“정말 할 거야?”
지윤이 그의 옆에서 물었다.
“아프면 어쩌려고?”
“금방 끝날 거야.”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누나는 설득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바보.”
갈 시간이다.
발등이 들려, 처마 밑의 안락한 구역에서 성큼 벗어난다. 발목에서 가장 먼저 한기를 느낀다. 무릎 위를 때리는 물방울의 감촉도 와닿는다. 정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조잡한 울타리를 넘어, 콘크리트 절벽 끝에 선다. 파도가 일며 발치에서 부서진다. 물은 지독히 차가워 보였다.
그렇지만 정윤에게는 이제 갈 곳이 없었다. 아니. 이건 틀리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한에서, 정윤이 가고 싶은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발을 뻗는다. 바다를 향해.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 말아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윤은 뒤를 바라보았다. 우산도 없이 그 자리에 서, 경준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젖어 이마에 들러붙고,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후드가 달린 점퍼를 입어 한눈에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분명했다. 경준이다.
“하지 말라고.”
“경준아.”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어요? 못 찾을 뻔했잖아.”
정윤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왜, 여기에 왔을까. 나는.
“…배가 고팠어.”
정윤이 중얼거렸다.
“일주일간 아무것도 안 줘서. 배가 고팠어. 대장이 고깃덩어리를 보여줬는데, 먹고 싶었어. 배가 너무 고팠으니까. 그런데 대장이, 바로 앞에 있는 남자를 찌르면 먹을 수 있댔어. 그래서 찔렀어.”
“고기 맛은 어땠어요?”
“기억 안 나.”
“거짓말.”
경준의 걸음이 조금씩 앞으로 향한다. 두 팔을 뻗어, 그가 정윤을 감싸 안았다. 정윤의 눈이 부드럽게 감겼다. 팔 위로 흉터투성이 손을 올린다. 기대는 것처럼.
“최 검사님이 손 써주셨어요. 당분간은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요.”
“응.”
“섬에 가는 건 어때요? 따뜻하고 사람 없는 곳 있잖아요. 하루 종일 떡치고, 자고. 그것만 반복하는 거야.”
“경준아….”
“그러니까 하지 말아요.”
경준의 목소리가, 끝끝내 갈라진다.
“…죽지 마.”
정윤은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경준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누군가 저를 막으리라는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어둡게 감긴 눈꺼풀이 들린다. 조용하게, 정윤이 속삭였다.
“안 돼.”
절박하게 몸을 둘렀던 팔이 떨어진다. 그가 멱살을 잡아 내리친다. 몸통에 올라타 가슴을 짓누르는 모습이 사냥감의 숨통을 끊으려는 맹수를 연상시켰다. 눈알이 번뜩인다.
“선택해요. 나랑 같이 죽든가, 같이 가든가.”
“죽기 싫으면서.”
주먹이 날아들었다. 묵묵히 충격을 받아내며, 정윤은 무심한 눈길 그대로 상대를 응시했다. 경준 역시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아주 약간, 짜증이 난 표정이다.
“다시 물을게요. 나랑 죽을래요. 나랑 같이 갈래요.”
“죽여.”
“대체 왜 그래요?”
눈썹이 꿈틀거리고 구겨진다.
“정윤 씨, 죽은 다음에 뭐가 있는 줄 알아요?”
“몰라.”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곳이 가보고 싶어요?”
“난 이미 여기 없어.”
차가운 손바닥이 경준의 뺨 위에 닿았다. 그의 몸이 조그맣게 굳는다. 정윤은 조심스럽게, 사랑스러운 뺨 위를 쓰다듬었다.
“여기 없어서, 아무 데도 못 있어줘. 네가 원하는 걸 해주고 싶은데 해줄 수가 없어.”
“…….”
경준을 사랑하려고 해봤다. 충분하지 않았다. 아무리 쏟아부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는 이것이 어떤 감정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처음에는 노력하지 않아서인 줄 알았다. 경준의 규칙을 기억하지 못하고 경준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해서라고. 하지만 이제 알겠다. 원인은 그 이전에 있었다.
원인은, 정윤 자신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을 떠난 그 순간부터, 정윤의 감각은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남자들의 아래에서 벗겨질 때마다, 정윤은 일부분이 무너지고 무너져왔다. 이제는 허물어질 모래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인간이 사랑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온전하게 사랑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가치도,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세계에서 사는 건 지친다.
“내게 남은 건 이것뿐이야.”
느릿하게, 그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죽여.”
경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기어이, 두 손이 목으로 향한다. 행위 때와는 다르다. 냉정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목련 같은 손에 숨골을 맡긴 채, 상대를 올려다본 정윤은 작게 미소 지었다. 저런 표정을 짓는 경준은 처음 봤다. 신기하고, 황홀한 순간이었다.
경준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야가 까무룩해지며 보이는 헛것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림자의 형체는 빗속에서도 점점 뚜렷해지기만 했다. 그림자가 팔을 들어 올린다.
경고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경준의 고개가 옆으로 꺾인다. 목을 조이던 손은 애무처럼 부드럽게 풀어져, 쓰러지는 몸통과 함께 정윤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정윤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붉은 얼룩이 묻어 나온 각목을 지나, 차가운 비를 맞으며 쓰러진 몸뚱이로 향한다. 그 아래로 검붉은 피가 가늘게 길을 만든다. 붉은 길은 그의 발치에 멈춘다.
그리고 그 위로, 진환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