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진환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눈을 깜빡이거나 숨을 쉬는 것조차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밀랍 속에 파묻힌 것처럼, 온몸이 묵직하고 무거웠다. 욕을 하거나 슬퍼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나 때문이야.’
진환은 독배를 음미하듯, 천천히 그 한마디를 혀끝에 굴리며 목울대에 넘겼다.
‘나 때문에 형이 죽은 거야.’
- 한편, 경찰은 도주한 박 씨에게 긴급 수배령을 내리고-.
웅웅거리는 티브이 소리가, 물에 잠긴 듯 먹먹했던 고막을 뚫고 진환의 뇌리에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진환은 병실 안에 틀어진 티브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납작한 티브이 화면에서는 법원에서 연기가 치솟는 화면이 나오는 중이었다. 박경준이 폭탄 테러 후 도주했다는 헤드라인과 함께.
***
“진환 씨.”
형수의 목소리에 진환이 걸음을 멈춘다. 비척거리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표정이 없고 크게 뜬 눈이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형수님은 불안할 때 자주 그러시듯 카디건으로 몸을 감싸고, 성큼성큼 진환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밖에 갑니다.”
“방금 진환 씨 형이 죽었어요. 그런데 어딜 간다는 거예요?”
진환의 시선이 형수님의 발치를 향했다. 이제 보니 신발이 참 낡았다. 신발코가 다 헤졌는걸.
“제가… 찾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먼 곳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진환이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좀 걸릴지도 모릅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장례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받으시죠. 이번엔.”
“지금 그런 말이… 진환 씨. 진환 씨!”
형수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진환은 걸음을 옮겨 나갔다.
***
현장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벌써 구급차가 도착했다. 머리에 수건을 댄 사람들이 깨진 유리 위에 앉아 충격을 가다듬으려 하고 있었다. 몰려든 구경꾼들이 수군거리며 경찰서에서 실려 나오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중 한 명은 진환이 곧바로 알아볼 수 있는 인간이었다.
“이진환.”
이마에서부터 질질 피를 흘리는 강 반장이었다. 기겁한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강 반장은 저를 나르는 구급 요원들을 멈춰 세우고, 진환의 팔을 움켜잡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진환이 그에게로 고개를 내밀었다.
“뭐야. 놓쳤어? 말해. 박경준이 그 개새끼, 놓쳤냐고!”
“그래. 나도 살아 있어서 존나게 반갑다, 양아치 새끼가….”
등골이 오싹해진다. 정말로 박경준이 달아났다면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른다.
“무슨 일이야. 설명 좀 해봐…!”
“박경준이, 그 빌어먹을 새끼가….”
강 반장이 짧게 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깨진 게 머리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잡아야 돼. 그 새끼, 내가 꼭….”
“뭐? 지금…?”
“지금 못 잡으면 평생 못 잡는다, 이 자식아!”
악을 쓰다 어디가 어긋났는지, 강 반장이 허리를 비틀었다. 구급 요원 한 명이 다가와 그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강 반장은 악을 쓰며 그 손을 내리쳤다. 억지로 두 발을 들것에서 내린다.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발을 다 딛기도 전에 나뒹굴었으니까.
“씨발, 가만히 있어, 좀!”
못 봐주겠네. 보다 못한 진환이 그에게 달려갔을 때였다. 진환의 팔을 뿌리치고, 강 반장은 기어이 두 발로 일어섰다. 이윽고 그가 얼이 나간 듯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빛에 이상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너. 이진환이 너.”
비틀거리며, 강 반장의 두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도왔냐?”
“무슨 헛소리야?”
“대답해. 네가 했냐고?”
“이 양반이 뇌진탕이 왔나.”
“다음은 너야, 새끼야!”
강 반장이 계속해서 으르렁거렸다.
“모르겠어? 박경준이 그 새끼 탈출하면 제일 먼저 잡아 족치는 거, 너다. 이제 와서 네가 무슨 헛지랄을 떤다고, 그 새끼가 널 살려둘 것 같아? 아니, 만에 하나 그러더라도, 내가 널 가만히 안 둔다. 너 확실하게 잡아 가둔다고. 김 검사님이 옷 벗기 직전이라도 너 하나 감방에서 평생 못 썩게 만들 줄 알아? 너희 형은. 산소 호흡기 차고 교도소로 돌려보내 줘?!”
진환은 무감각한 눈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강 반장을 응시했다. 바로 앞에서 고함을 치는데도 고막이 울리지 않는 것처럼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해지고 말았다. 익숙해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결국은 이 꼴이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개처럼 가랑이를 기어서 딱 한 번을 이겨도, 결국 이 꼴로 돌아온다. 선택지가 없는 삶. 내몰리고 명령을 받는 삶.
그런데도.
“이제 안 차도 돼.”
“뭐?”
“우리 형, 벌써 뒈졌다고.”
보란 듯이 강 반장을 밀친다. 그가 휘청이며 구급 요원의 손에 붙들리는 사이, 진환은 아수라장이 된 사건 현장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뒤에서 강 반장의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해. 이진환 이 개새끼야! 박경준이 어디 있는지 말해!”
대답 없이, 진환은 구급차 사이로 걸어가 버렸다.
강 반장의 시야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축된 것 같았던 등이 펴진다.
손을 들어 열쇠를 핑그르르, 돌린다.
강 반장을 부축하는 척하며 슬쩍한 차 열쇠였다. 주차장 구석에 강 반장이 몇 번인가 타고 나타난 적 있는 흰색 아반떼가 보였다. 혹시나 폭발에 휘말려 망가졌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잔해에 차 문이 긁힌 것을 빼고는 멀쩡하다. 열쇠의 리모컨을 누른다. 삑삑. 차 문이 열린다.
강 반장의 말이 맞았다. 박경준이 밖에 나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다.
날 죽이러 올 테니까. 그 새끼는 위험한 또라이니까. 사법 정의 실현에 어긋날 테니까. 상식적인 이유야 수도 없이 많지만, 솔직히 말해 그중 어느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벌레가 갉아 먹는 것처럼 한 가지 생각만이 뇌 속을 파고들었다.
진환은 그저, 박경준을 다섯 갈래로 찢어 죽이고 싶었다.
***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부스스한 미소를 짓고, 경준이 중얼거렸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솔직히 경준 마음에 드는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소란을 피우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쉬울 때는 남들 장단에 놀아줘야 하는 법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흔들리며, 구치소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 속에 돌아왔다.
‘말씀하신 번호로 전화 걸었습니다.’
회계사가 몇 개의 사진을 보여준다.
‘삼합회에서 사람 몇 명을 빌려준다고 합니다.’
‘신분 검사는?’
‘최 검사장님 힘이 닿습니다.’
‘대놓고는 못 도와줘도, 벽에 구멍은 뚫어준다 이거네요.’
탁자 위에 손을 두드린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자금은 급한 대로 마련했습니다.”
호텔 침대 위, 회계사가 들고 있던 슈트 케이스를 올린다. 달칵, 잠금장치를 풀고 뚜껑을 열자 가방 안을 가득 채운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괴에 달러 다발. 낱개로 포장된 귀금속도 수북하다. 이런 케이스가 다섯 개나 있다. 이름도 출신도 묻지 않는 촌구석에 들어가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만한 돈이었다.
“고생했어요. 마지막까지 일만 시키네.”
“아닙니다, 회장님.”
“아니긴. 사례, 입금해 둘게요. 계좌 아직 열려 있죠?”
회계사가 머뭇거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준이 미소 지었다. 거울에서 떨어져, 경준이 아직 열려 있는 케이스 앞으로 다가간다. 금괴 하나를 잡아 심드렁하게 훑어보던 그는, 곧 회계사가 있는 방향으로 금괴를 던졌다.
“!!”
묵직한 무게에 회계사가 거의 고꾸라질 듯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경준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기념품.”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별일도 아니라는 듯 경준이 웃음을 머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손목시계로 향했다. 저녁 열한 시 반.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숨어들어, 자금을 정리하고 도주할 곳을 찾아내기까지 반나절 가까이 걸렸다.
반나절이나 낭비한 셈이다.
한순간 경준의 얼굴에 차갑게 스쳐 가는 기척을 읽지 못하고, 회계사가 가짜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내일 오전 일곱 시 출국입니다. 좀 이르지만, 최 검사장님께서 조치를 빨리 취하셔야 안심이 되시겠다고 하셔서….”
“그거 말인데요.”
사락. 소매 끝이 손목시계를 덮는다.
“차 상무님 혼자 가세요.”
“예…?”
“걱정 말아요. 금방 따라서 갈 테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회장님?”
회계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경찰이 제 코앞에 들이닥친 상황, 평생 한국 땅을 못 밟고 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한 시간도 꾸물거릴 수 없는 판국에 경준의 언사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수준이 아니었다.
경준의 시선은 다시 거울로 돌아가 있었다. 제 앞머리를 지분거리고 만지며, 그가 예쁘장한 제 얼굴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직 못 찾았잖아요.”
눈매가 휘어진다.
“정윤이.”
이제는 소름이 끼친다. 회계사는 표정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경악에 차 경준을 응시했다. 처리 못 한 자산이 있어 두고 갈 수가 없다거나, 보복이 염려되는 경쟁 조직들을 밟아주고 가야 한다는 말이어도 말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작 장난감 때문에 머물겠다고? 검사장이 주는 티켓을 쓰레기처럼 내팽개치면서?
그 생각을 읽은 것처럼, 경준이 코웃음을 쳤다.
“왜요? 철없는 소리 같아요?”
“아니, 아닙…니다.”
“오래 나가 있을 건데. 내 것 좀 챙기는 게 나쁘진 않잖아요.”
그의 옆으로 다가가, 경준은 태연하게 손을 들었다. 제 손안에 저절로 가방이 들리기를 당연히 기대하는 몸짓이었다. 슈트 케이스를 전달하며, 회계사가 파리한 눈꼬리를 꿈틀거렸다.
“그렇게 중요한 사람입니까?”
경준의 손안에는 여지없이 가방이 들려진다.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그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이면 이렇게 안 챙겼어요.”
경준이 말했다.
“사람은 지저분하잖아요. 징그럽고, 불순하고, 짜증 날 정도로 오만하지. 정윤 씨는 안 그래요. 얼마나 말을 잘 듣는다고요. 맞아요. 가끔 지금처럼 속을 썩이긴 하죠. 그렇지만 그것도 잘 몰라서 그러는 거예요. 개가 신발 물어뜯을 때처럼 있잖아요.”
경준이 빠르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이,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름을 붙일 수 없던 것을 이제야 붙잡았다는 듯이.
“개.”
그가 중얼거렸다.
“개예요. 정윤 씨는. 내 소중한 개.”
제정신이 아니다.
경준을 지켜보며 오래전부터 느낀 바지만, 이번처럼 확신이 든 적은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이 후레자식은 또라이 그 자체다. 화목한 가족의 집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불태우거나 재미 삼아 금반지를 배수구에 떨어트리는 종류의 미친놈. 이해할 수도, 그런 시도를 해서도 안 되는 상또라이.
머뭇거리던 회계사는 황금을 슬슬 돌려가며 바라보았다. 안경을 쓰고 길쭉한 그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회장님. 그 사람은-.”
“도망친 거 아니에요.”
말을 잃고, 회계사는 경준을 응시했다. 자기 최면을 거는 것처럼, 그는 거울 가까이에 얼굴을 댄 채로 중얼거렸다.
“정윤 씨, 도망친 거 아니에요. 길을 잃은 거지.”
“…….”
“개들이 가끔 그러잖아요. 정신없이 뛰쳐나갔다가, 길을 잃기도 하고. 못 돌아오기도 하고. 멍청하긴 해도, 그게 걔들 잘못은 아니니까.”
무어라 덧붙이려던 회계사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더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걸,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좋은 주인은 그래서, 끝까지 걔들 찾아다녀요.”
경준은 조그맣게, 그리고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저도 그럴 거고.”
***
어두운 골목.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뛰어오는 형사 두 명을 제친 김종식은 출입금지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를 뜯어냈다. 잠잠해질 때까지 폐건물 안에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아이, 씹… 박경준이 개자식 때문에.”
턱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시키며 욕설을 뱉는다. 검찰청에서 박경준이 벌인 폭죽 쇼 덕분에 청명파 간부들은 모두 수배 명단에 올랐다. 김종식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벌써 사흘이나 짭새 놈들을 피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도망 다녔다. 기운 빠지고 쪽팔린 짓이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진 않을 터였다.
꼽쳐둔 재산은 많지 않지만, 청명파가 돈을 숨겨둔 곳이라면 잘 알았다. 오늘 목숨을 걸고 다녀온 창고가 그런 곳 중 하나다. 앞으로 몇 군데만 더 돌아다니면 어디 베트남 같은 곳에서 여자들 끼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은 수중에 들어올 터였다.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김종식은 들고 있던 배낭 지퍼를 열었다. 돌려서 말할 것도 없는 두툼한 오만 원권 다발이 수북하다. 가장자리에는 투명한 약이 든 유리병과 편리하게 함께 쓸 수 있는 주사기도 같이 들어 있다. 봉투 위로 주사기를 퉁퉁, 손으로 퉁겨보던 김종식은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어차피 잠잠해지려면 하루는 꼬박 이 안에 있어야 할 터였다. 재미 좀 봐서 나쁠 건 없겠는데.
“이젠 약까지 하냐?”
고개를 들 틈도 없이 억 하는 충격이 등을 강타했다. 김종식이 자리에 고꾸라진다. 몸을 뒤집어 허둥지둥 자세를 잡다가,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씨발, 이진환?”
“그래. 오랜만이다, 좆같은 새끼.”
“이 씹새끼, 네가, 네가 어떻게-.”
김종식이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머리에 강렬한 충격이 밀려온다.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묻어난다. 얼룩진 각목의 끝을 바닥에 짚으며, 진환이 웃음을 머금었다.
“옛날 일은 묻지 말고. 편하게 가자. 옛정도 있는데.”
“씹새끼. 이, 씹새끼….”
코피를 흘리며 김종식이 뒷걸음질을 친다. 칼을 뽑으려 할 때 진환이 다시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옅은 비명을 흘리며, 김종식이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박경준이 어딨어.”
“말 못 해.”
각목이 이번에는 다리를 내려친다. 부러졌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진환은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제 다리를 붙들고 김종식이 자리에서 뒹군다.
“악!”
“박경준 어딨냐고, 씹새끼야.”
얼굴 옆으로 침을 뱉는다. 김종식은 겁에 질려, 다른 인간처럼 보이는 진환을 올려다보았다. 눈은 풀려 있고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분명히 죽였다고 했는데. 죽여버렸으면 이 사달이 안 나잖아. 이래서 멍청한 놈은 부리는 게 아니라고. 김종식의 손가락이 시멘트 바닥을 긁으면서 오므라든다.
“차라리 날 죽이지 그래.”
“못 죽일 것 같냐?”
제 말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듯, 진환이 각목을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머리를 쪼개버릴 기세로 내려칠 것처럼. 야만인을 연상시키는 표정으로.
이대로는 정말로 죽는다.
“셋에 갈 거야. 숫자 센다.”
진환이 말했다.
“하나, 둘, 셋-.”
“말할게, 씨발! 말한다고 개새끼야!”
관자놀이를 내리치려던 각목이 멈췄다. 바람까지 느껴졌다. 벅차게 숨을 고르며, 김종식은 제 눈알 바로 위에서 멈춘 각목을 응시했다.
“…마지막 기회다, 이 새끼야.”
진환의 시선이 내리깔렸다. 동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에 생기가 없었다.
식은땀이 흐른다. 아무래도 갇혀 있을 때 저 자식을 너무 후려친 모양이었다. 맛대가리가 간 걸 보니까.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한다. 더듬더듬, 김종식이 입을 열었다.
“센셔널 호텔 알지? 기차역 가는 길에 있는. 거기로 데리고 간다고 들었어. 새벽에 출발한다고 들었으니까, 금방 거기서 떠날 거라고. 알아들어?”
“몇 호실이야.”
“그것까지 내가 알겠냐, 이 등신 새끼.”
진환은 그의 말에 납득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대답한다.
“그러네.”
각목이 마지막으로 김종식의 머리를 내려친다. 어디선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흘러나와 진환의 발치까지 적셨다.
죽은 김종식의 옆에 각목을 던지고, 진환은 묵묵히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
그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하고 있자, 따라 나오던 회계사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조그만 미소를 지은 채, 하늘에서 시선을 떼어낸다.
“비가 올 것 같아서.”
그 순간, 묵직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회계사가 다리를 붙들고 자리에 나뒹군다. 돌멩이를 맞은 것 같다. 경준은 차분하게 공격이 날아왔을 법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비를 입은 이진환이 서 있었다. 입을 문질러 닦자, 정신없이 맺힌 땀이 손등과 함께 훑어져 나간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우리 박 회장님.”
“진환 씨.”
박경준이 웃음을 머금었다.
“잘됐네요. 진환 씨 그냥 두고 가는 거, 마음에 걸렸는데.”
“역겨운 소리 하지 마, 개자식아.”
“왜 다들 이렇게 진심을 몰라주는지.”
경준이 다리를 붙잡고 구르는 회계사의 옆에 들고 있던 케이스를 내려놓았다.
“서운하게.”
더 뜸을 들이지 않고, 진환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 씹새끼!”
돌멩이를 쥔 주먹을 얼굴 위에 갈긴다. 성이 찰 때까지 계속해서. 팔이 저리고 아프도록 휘두른다. 경준의 미간이 옅게 찡그려졌다.
“왜 그랬어. 우리 형한테 왜 그랬어, 씹새꺄. 개같은 새끼야! 죽여버릴 거야. 너, 죽여버릴 거라고!”
진환의 손이 돌멩이를 고쳐 쥐었다.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후려칠 생각이었다. 기고만장한 눈깔이 빠져나오도록. 팔을 들어 올린다. 돌을 쥔 손이 빠르게 포물선을 그리며 달려든다.
경준이 가슴팍을 걷어찼다. 갈비뼈가 부러진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동작이었다. 발길질이 치고 들어올 때마다 금이 간 뼈가 다시 갈라지는, 날 선 통증이 뇌리로 파고들었다.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진환이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될 때 즈음, 구둣발이 손등을 내리찍는다.
경준이 칼을 뽑는다. 차가운 날이 눈썹 위에 닿았다.
“어느 쪽 눈이 더 마음에 들어요? 가지고 죽게 해줄게요.”
“또라이 새끼….”
칼날이 눈썹을 스치며 올라가, 진환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손바닥 정중앙에 박힌다. 진환이 통증으로 튀어 올랐다.
손바닥에 틀어박힌 칼날이 옆으로 뒤틀린다. 힘줄을 끊어버릴 것처럼. 진환이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다.
남은 반대편 손이 꿈틀거리며, 버려진 벽돌을 향해 기어갔다. 간신히 손이 벽돌을 움켜쥔다.
벽돌을 쥔 채, 포물선을 그리며 경준에게로 휘두른다. 짓뭉개고 싶었다. 고상한 척하는 저 곱상한 면상을. 이번에야말로.
그러나 닿지 않는다. 그에게 손끝도 닿지 못하고, 경준의 얼굴 옆에, 반듯하고 고운 눈매의 바로 옆에 맴돈다.
“제가, 정윤이 잘 모른다고 그랬죠?”
진환의 손목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더해가며, 경준이 웃음 지었다.
“맞아요. 저 사실 정윤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악을 지르며 아무리 팔을 휘둘러도, 움직이질 않는다. 경준은 심드렁하게 진환의 행동을 응시하다, 그의 배를 걷어찼다. 진환이 몸을 말자 떨어진 벽돌이 가느다란 손가락에 들려 올려진다.
“…하지만 정윤이에 대해서는 다 알아요.”
벽돌이 위로 치솟는다. 무감각하게, 진환은 그것이 제 머리를 향하는 것을 응시했다.
“그게 사랑 아닌가?”
***
진환의 고개가 맥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죽었을까? 사실은 상관없다. 경준은 저 머리를 짓이겨버리고 싶었다. 정윤을 이해한다고 지껄인 입술을 뜯어내고 손가락 마디마디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지? 선물 포장을 뜯는 기분이다.
경준이 칼을 뽑아 들었다. 날 끝이 진환의 눈꺼풀 위에 닿았을 때였다.
“회장님.”
회계사가 그를 붙잡았다.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 가셔야 합니다.”
“먼저 가세요.”
“여기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경준은 칼날과 진환을 번갈아 응시했다. 사이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따돌릴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붙잡혀 시간을 낭비하면 정윤을 놓칠지도 모른다. 이진환을 데리고 노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윤이 보는 앞에서 손톱을 하나하나 뽑아버리는 것도 그렇게 나쁜 선택지 같지 않았다. 그러려면 지금은 떠나야 한다.
한숨을 내쉬며, 경준이 칼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그가 지저분해진 파일을 집어 들었다. 종이를 들추니 비에 잉크가 번져 대부분의 글자는 읽을 수가 없었다. 괜찮았다. 이미 중요한 부분은 모두 외웠으니까.
진환의 옷자락을 끌어 뒷골목에 내던진다. 널브러진 꼴이 쓰레기봉투나 다를 게 없단 생각이 들어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회계사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그의 뒤에 섰다. 지금 보니 상처가 깊지 않다. 피라도 닦으라는 뜻에서 손수건을 던지고, 경준이 웃음 지었다.
“항구 가 있어요.”
회계사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택시 뒷좌석, 발밑에 수백억대의 돈이 가방 하나에 담겨 덜그럭거린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응시하며, 경준은 찬찬히 턱을 괬다.
솔직하게 말해서 강 반장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숨어 들어갈 만한 장소도 없는 외진 곳이고 배가 드나드는 곳조차 아니었으니, 내버려 두었다면 찾아볼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로 늦을 수도 있었다. 이젠 괜찮다. 정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면 정윤은 돌아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