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작은 신음과 함께, 경준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목이 조여들며 아프다. 산소가 끊겼다가 돌아온 머리가 지끈거리고 아팠다.
“정윤 씨?”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을 부른다.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한 번 더, 경준은 힘을 주어 목소리를 높였다.
“정윤 씨.”
널찍한 거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에서 대리석으로 마감된 부엌이 연결된 저 끝까지, 경준의 목소리가 메아리조차 없이 흩어졌다. 그러고는 조용하다. 누구도 돌아오지 않는다. 담담하게, 경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협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든다.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린다. 상대의 인사를 듣기도 전, 경준이 말을 꺼냈다.
“상무님. 미안해요. 새벽에. 네. 일이 생겨서.”
개 목줄을 놓쳐버리는 주인들이 있다. 불쌍한 강아지는 길을 잃고 떠돌이가 되거나, 차에 치이거나, 더 끔찍한 일을 겪기도 한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다.
“-애들 좀 모아줘요.”
사랑하니까.
***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 경준은 심드렁하게 선반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훑었다. 눈처럼 덮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쓱 밀어 닦는다. 손가락을 따라 먼지가 끌리면서 검은 흔적이 남는다.
낡은 매트리스가 켜켜이 쌓인 창고 안은 재채기가 나올 만큼 먼지가 많았다. 그러고 보니 사방이 더럽다.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래. 드디어 미쳤어?!”
경준이 등진 곳에서 손이 뒤로 묶인 남자가 악을 질렀다.
신 사장을 제압하고 남은, 인천항 남쪽의 오합지졸들이었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콧등이 반으로 으스러지고 피가 턱까지 덮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비하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와이셔츠에 팬티 한 장 차림이다. 얼굴에 검은 비닐봉지를 썼거나 기절해 쓰러진 나머지 놈들도 피투성이인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다 해주겠다고 그랬잖아. 얘기 잘 끝내놓고 갑자기 왜 이러냔 말이야. 어?!”
시선 하나 주지 않았던 경준이 그제야 서서히 그를 훑었다.
남자의 얼굴에 옅은 기대감이 어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경준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약에 취했거나 몽유병에 걸려 걸어 다니는 인간의 눈 같다. 당장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미친놈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눈이었다.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신 사장, 자기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남자가 숙청당하고, 억지로 넘버 투 자리에 앉은 그는 청명파에게 무조건적인 휴전을 요구받았다. 그 뒤로는 자기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인천항 물꼬를 그냥 넘겨주고, 억지로 놈들의 약을 떼어다 파는 신세가 되었다. 미치광이처럼 전쟁을 원하는 박경준을 달래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답이 없었다. 남아 있는 조그마한 영역이라도 지키려면.
그래도 버티면 언젠가는 저 기생오라비 같은 면상이 질질 우는 꼴을 보게 될 줄 알았다. 후레자식 박경준을 얕봐도 한참 얕본 것이라는 걸, 지금은 알겠다.
‘처음부터 엮이는 게 아니었는데. 미친 새끼….’
사내가 속으로 후회의 말을 중얼거릴 때였다.
먼지를 쓸던 손을 털고, 경준이 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처럼 보였다. 목뒤를 문지르고 느직이 눈을 깜빡거리더니, 입이 몇 번이나 열렸다가 닫힌다.
이윽고 웃음조차 없는 피곤한 표정을 띠며, 경준이 고개를 들었다.
“정윤 씨, 여기 왔었어요?”
남자가 예상한 것과 거리가 먼 질문이었다. 거래처 얘기나, 남은 업소마저 넘기라는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그의 인상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정윤…?”
경준의 입에서 나온 건 여지없이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야, 그게?”
“제 옆에 있던 애. 저번에 사업하러 왔을 때 보셨잖아요.”
“아니,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이 씹새끼야.”
“음. 사진을 보여드려야 하려나…. 아니다.”
곤란한 척 머리를 기울이는 동작이 인간을 흉내 내는 귀신이나 인형처럼 느껴진다. 옆머리를 긁적이다, 박경준이 도로 고개를 들었다. 그가 손을 들자, 뒤에 선 장정이 허공에 들린 손안에 나이프를 쥐여주었다.
“굳이 안 봐도 아실 거예요.”
나이프 끝이 남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꿈틀거리며 몸을 뒤로 밀치지만, 깍두기 하나가 꼼짝도 하지 못하도록 몸통을 붙잡는다.
“그만해. 그만, 씨발, 그만- 제발, 아악!!”
“알아보기 쉽거든요. 눈에-.”
나이프가 눈꺼풀 위에 파고든다. 살갗을 가르며 칼끝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끔찍한 비명 소리가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나란히 묶인 조직원들의 얼굴이 공포를 감추지 못하고 허옇게 질렸다. 핏물을 헤집는 질척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떨어졌다. 자기 그림을 감상하는 예술가처럼, 박경준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런 흉터가 있는데.”
이미 피떡이 된 남자의 얼굴 절반이 핏물에 뒤덮였다. 폭력적으로 덮쳐온 통증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숨을 헐떡였다.
나이프를 뒤로 던지고, 경준이 그의 턱을 붙잡았다. 이미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는 얼굴을 묶인 조직원들을 향해 내민다.
“어때요? 생각 안 나요?”
“이, 미친 새끼야…!”
그들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몰라. 그딴 거 몰라…! 왜 애먼 곳에 와서 행패야, 어?!”
“머리카락은 짧고요.”
“이거 전쟁 선포야. 박경준! 너 핵미사일 날린 거라고!”
“정말 못 봤어요?”
“너도 끝이야. 끝났어, 씨발 놈아!”
희멀겋게 띄워졌던 웃음마저 단번에 사그라든다. 붙든 남자의 머리를 내동댕이치고,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른단 말이죠.”
박경준이 뒤돌아선다. 창고 밖으로 향하며, 그가 손을 퉁겼다. 우비처럼 생긴 검은 모포를 뒤집어쓴 깍두기들이 걸어 나와 뒤돌아선 박경준의 모습을 가렸다. 남자들의 손에는 약수터에서 쓸 법한 커다란 생수통이 들려 있었다.
“요즘, 화재가 그렇게 잦아요.”
사내들이 생수통을 기울여 남자들의 위로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물은 아니다. 더 가볍고, 휘발성이 강한 액체. 강렬한 가솔린 냄새가 진동하고, 익사하기 직전에 놓인 것처럼 콜록거리는 소리가 지옥도처럼 울려 퍼졌다.
“불조심들 하세요.”
“거기 서. 박경준! 박경준 씨발 놈아! 거기 서! 이 개새끼-.”
번쩍이는 불씨가 튀어 올랐다. 이어지던 욕설이 비명으로 바뀌고, 안개 같은 매연이 창고를 휘감았다.
***
멀찍이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차 뒷좌석에 앉아, 경준은 담배를 빼 물었다. 항구 저편, 불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밤하늘로 녹아들었다. 해보다도 밝게 타오르는 불길이 석양을 연상시킨다. 그 모습을 감상하며, 경준은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
“은근히 잘 타죠? 사람이.”
경준의 옆에 앉아, 회계사가 파리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이렇게까지, 뭘요?”
이렇게 할 필요가 있느냔 뜻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용기는 없었다.
지난 아홉 시간 동안 경준이 보여준 행동은 ‘기행’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강남의 영업장이라는 영업장마다 청명파 조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정윤과 대화를 나눈 이력이 있는 모든 인간들이 신문대에 오르고, 이내는 경쟁 조직들이 차지한 구역까지 멋대로 찾아가 들쑤셔놓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게 고작 태국에서 데려온 장난감 하나 찾아내겠다고 저지를 만한 짓이란 말인가?
회계사가 대답을 않고 머뭇거리자, 경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차 안의 재떨이에 담배꽁초를 비볐다.
“결과가 안 좋았어요. 그렇죠?”
“…….”
“이번엔 진짜 있을 줄 알았는데.”
“…….”
“맞아. 항구 북쪽은 어때요?”
“예…?”
“OO구 있는 곳 근처요. 거긴 아직 안 찾아봤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박경준은 천진난만하게 미소 지었다.
회계사는 소름이 끼쳤다. 인천 북쪽에 주둔 중인 야쿠자들은 부산을 주거지 삼는 무리다. 김 회장도 이들을 건드리진 않았다.
“거긴 왜….”
“신기파 사람들까지 모른다잖아요. 남은 곳이 거기밖에 없는걸. 거기 노 터치 지역인 거, 정윤 씨도 알아요. 거기로 갔을 수도 있어요. 마침 잘됐네요.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경준이 차 문을 벌컥 열려는 순간이었다. 회계사가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무모한 짓입니다.”
“놔요.”
“아무리 검사장이 우리 편이라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렇게 막 나가는 건 안 좋습니다.”
“놓으라니까.”
“회장님.”
“놔!!”
차가운 분위기가 흐른다. 제 이마를 짚고, 경준이 시트에 등을 기댔다. 냉정을 잃고 고함을 지르는 건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짓이었다. 회계사 역시 말을 잃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회장님.”
회계사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진환이 같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만.”
***
기억이 흐릿하다.
불그스레한 조명 아래.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정윤의 얼굴이 뿌옇게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꿈속 음성처럼 웅웅거린다.
“지키는 사람 둘. 밖에는 네 명 있어. 조심해.”
손목을 압박하던 테이프가 끊어진다. 두 손이, 이어서는 다리가 움직인다. 마디가 욱신거리고 쓰라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괴롭지만,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가.”
정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먼 곳에서 들리는 경적 소리가 공백을 대신한다. 정육점 같은 붉은 조명은 날벌레가 오가는 게 들여다보이는 누리끼리한 조명으로 뒤바뀐다.
회상이 끊기고, 진환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어느 가로등 아래, 쓰레기봉투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비에 젖어 축축하고, 악취가 나고, 몽롱하며, 살아서. 아직은 쌀쌀맞은 밤공기가 팔에 오스스 끼쳤다.
역겹지만 봉투를 딛고 몸을 일으킨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옥에서 돌아와 보는 풍경이니 더 근사하게 느껴질 법한데, 밤의 서울 시내는 여전히 눈이 어지럽고 요란하고 지저분했다. 걸음을 디딜 때마다 행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절뚝거리던 진환은 제일 먼저 보이는 술집에 들어갔다.
그의 행색을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비틀거리며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어 들어간다. 진환이 다가가자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녀가 기겁하며 일어섰다. 그 빈자리를 그가 차지하고 앉았다.
진환이 손을 들었다.
“여기요. 소주 한 병.”
손톱 하나가 빠진 집게손가락이 천장을 향해 대롱거린다. 짓뭉개진 고기 같은 몰골이었다.
기겁한 종업원이 들고 있던 메뉴판으로 얼굴을 가렸다. 테이블에 접근하는 사람도, 주문을 받는 목소리도 돌아오지 않자, 진환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구깃구깃한 오만 원짜리 지폐가 딸려 나왔다. 땀과 핏물에 절어 지저분한 지폐였다.
손바닥이 오만 원과 함께 테이블을 내리쳤다.
“소주 한 병 달라니까요. 예?”
여전히 차가운 정적만이 흐른다. 이번에는 두 손이 테이블을 내리쳤다. 의자를 끌고 일어서, 그가 소리쳤다.
“가져오라고!”
고성에 가게 안이 메아리쳤다. 버티질 못하고,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소주병을 들고 왔다. 잔을 내미는 그녀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진환은 군말 없이 병을 잡아 들었다.
뚜껑이 잘 따지지 않았다. 제 손을 내려다보니 이유를 알 만했다. 손바닥이 홀라당 까진 것이었다. 눈을 끔벅거린 끝에, 진환은 뚜껑을 이빨에 끼워 돌렸다. 까득, 병이 열린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소주잔이 가득 흘러넘쳤다. 채워진 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진환이 웃음 지었다.
“와…. 진짜 오랜만이네.”
술잔을 기울여 단번에 들이마신다. 알알한 알코올이 쓰라리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깨끗하게 잔을 비운 진환이 구석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종업원을 돌아보았다.
“저기. 안주 되는 거 없-.”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
어디론가 실려 가고 있다. 바퀴가 굴러가고, 천장의 긴 백열등이 속도감 있게 지나갔다. 무어라 다급하게 얘기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의사. 그리고 푸른 옷을 입은 간호사.
현실의 감각이 기억과 뒤엉킨다. 눈을 떴다가 감을 때마다 그 순간이 의식을 침투했다.
‘가.’
정윤이 말한 때였다. 진환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멀겋게, 그리고 곧게 정윤만을 향했다.
‘저랑 같이 갑시다.’
정윤이 가만히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깔며 아랫입술을 물던 그는, 이윽고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환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발. 저랑 같이 나가요. 형님, 여기 있으면 큰일 납니다. 아시잖습니까.’
정윤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돌아갈 곳이 있어.’
‘예? 무슨… 설마, 박경준 말입니까?’
‘…….’
침묵 끝에, 정윤이 눈길을 들었다. 축 처진 눈꼬리가 환하게 얼핏 휘어진다. 기운 없이 머금은 미소가 달처럼 청초하다.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처럼. 이질적이다.
‘…안 갈 겁니다.’
‘가야 돼.’
‘형님 두고는 안 갈 겁니다.’
희미하게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진다. 정윤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망설이듯, 그러면서 천천히 다짐하듯, 다섯 손가락을 차례대로 구부렸다. 이윽고, 정윤이 주먹을 들었다.
‘가야 돼.’
***
눈을 뜨니 바이털 사인을 알리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가 들려왔다. 팔에는 두꺼운 링거 바늘이 꽂혀 있었다.
이불을 걷고, 진환은 허탈하게 웃음을 뱉었다.
미라라도 된 것 같다. 붕대가 감기지 않은 부위를 찾기가 더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리에는 두꺼운 깁스가 채워져 있었다. 금이라도 갔던 모양이다. 어쩐지 아프더라니.
부상을 의식하기 시작하자 고통이 밀려왔다. 앓는 소리를 내며 베개에 다시 머리를 누였을 때,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진환 씨. 일어나셨다고요.”
차트를 든 젊은 의사였다.
그가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처럼 지루하게 줄줄 읊어준 사실에 따르면, 진환은 언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태였다고 한다. 골절상은 기본에 장기가 파열된 곳도 있고, 안구는 시력 손상이 걱정될 만큼 충격을 받았다. 잘못하면 다리를 절게 될 수도 있다는 게 추가 소견이다. 한마디로 가지각색으로 얻어맞았다는 소리다.
어쩌다 이런 지경이 되었냐는 질문에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전화 한 통 쓸 수 있겠습니까?”
링거 덕분인지, 아니면 소독약 덕분인지는 몰라도 머리가 쌩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신이 맑아지고 나니, 어느 목소리 하나가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휴대폰이며 다른 소지품은 진작에 빼앗긴 후라는 점이었다.
의사는 여러 가지 윤리적인 고민을 하는 눈치였지만, 방금 제 입으로 죽었다 살아났다고 표현한 환자의 부탁을 거절하는 짓은 하지 못하겠다고 결론 내린 듯했다. 의사가 머뭇거리며 내민 전화기를 받자마자, 진환은 프라이버시를 운운하며 그를 내몰았다.
등에 받친 베개가 불편해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그러고 있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누구세요?
“동준아. 난데, 그러니까-.”
- 삼촌?
갑자기, 목놓아 울고 싶은 기분이 밀려들었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찾아온 탓이었다. 시큰거리는 콧등을 쥐고 문지른 후, 진환은 목을 가다듬었다.
“…응. 삼촌 맞아.”
- 번호 바뀌었어?
“아니. 누구 전화를 빌려서 그래. 동준아, 전에는 삼촌이….”
건너편의 낌새가 이상하다. 이상한 떨림이 느껴졌다. 색색이는 숨소리가 뒤를 잇는다. 심상치 않은 기척을 알아차리고, 진환이 인상을 찡그렸다.
“…동준아. 무슨 일 있어?”
- 삼촌. 삼촌….
“왜 그래. 누가 괴롭혀? 삼촌이 지금 갈까?”
- 그게 아니라….
코를 훌쩍이고, 동준이가 말을 잇는다.
- 아빠가….
***
퇴원할 상태가 아니라는 의사의 말을 만류하고, 목발을 짚은 진환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빠르게 병원을 박차고 나갔다. 남은 돈을 털어 택시를 타, 운전사에게 외쳤다.
“○○병원으로 가주세요.”
택시 운전사는 누가 보아도 환자 행색인 남자가 다른 병원으로 가자고 보채는 모습이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진환이 남은 오만원 권을 내밀자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이동하는 내내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병실 복도에 들어서자 형수님이 그를 맞이했다. 밤을 새웠는지 눈 밑이 새까맣게 내려앉았다. 낡은 남색 카디건까지 변함이 없었다.
“형수님….”
진환의 행색을 훑어보고, 형수님이 시선을 돌렸다.
“연락도 안 되더니. 어디 차 사고라도 났었어요?”
“동준이가 한 말 진짭니까? 형이 그랬다고? 언제요. 왜?!”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 형수님이 몸통을 돌린다.
“간수가 찾았어요.”
병실 문을 열며, 형수가 말했다.
삭막한 병실 끄트머리, 산소 호흡기를 찬 형이 보였다. 오랜만에 본 형은 볼이 움푹 패고 안색이 검어져 첫눈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감긴 두 눈꺼풀마저 낡은 조개껍데기처럼 건조하다. 형의 목에는 검어 보일 만큼 짙은 멍이 빙 둘러 자리 잡았다.
“수건을 썼대요. 찢어서 밧줄처럼 만든 것 같다고.”
형수님이 앉지 않았기 때문에, 진환도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쪽을 택했다.
“남편이 왜 그랬냐고 물었죠?”
“…….”
“교도소로, 이혼 서류를 보냈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야 팔자가 더러운 셈 치면 된다고 쳐도, 동준이 앞날까지 막히는 건 안 될 것 같아서. 연을 끊으면 좀 나아질 것 같았거든요.”
“…형수님 잘못 아닙니다.”
“알아요.”
형수님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긴다. 금방이라도 잠에 빠져 자빠질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용서가 안 되네요.”
바이털 신호를 제외하고는 정적이 흘렀다. 산소 호흡기에 뿌연 입김이 차오르다가 사라졌을 때, 형수가 다시 눈을 떴다. 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그녀가 말했다.
“진환 씨가 보내주신 돈, 전부 돌려드렸어요.”
“형수님….”
“뭐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나중에 불똥 튈까봐 그런 거지.”
그녀가 카디건을 고쳐 입는다.
“진환 씨 앞일이나 신경 써요. 앞으로는. 저도 제 앞가림만 할 테니까.”
병원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기 때문에, 진환은 옥상으로 향했다. 담뱃갑을 열어 개비를 고르고 있자 현기증이 덮쳐왔다.
형이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헛구역질이 날 것 같다. 담뱃갑을 든 채 난간을 붙잡고 헐떡이는 숨을 붙들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담뱃갑이 구겨진다.
형수님 탓이 아니다. 나 때문이다.
내가 형을 모른 척했기 때문이다. 내가 형을 믿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증스럽게 삐져나오려는 울음을 집어삼키며, 진환이 입을 열었다.
“너냐?”
독기 어린 시선으로, 그가 상대를 돌아보았다.
“네가 우리 형 이렇게 했냐?”
예상한 그대로의 인물이었다. 달무리처럼 불길하고 뿌연 웃음에 갸름한 선. 휘어지는 웃음까지.
여기로 그를 밀어 넣은 인물. 빌어먹을 미친놈. 후레자식 박경준.
턱을 들며, 그가 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그랬죠. 사는 게 좀, 고단했나본데.”
“이 씹…!”
손이 떨어지며, 구겨진 담뱃갑이 아득한 옥상 아래로 떨어진다. 박경준을 향해 휘두른 주먹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스치기 전, 박경준의 뒤에 선 장정이 진환의 팔을 붙잡았다. 박경준의 부하가 팔을 뒤로 꺾어 등을 걷어찼다. 어제 기껏 의사가 고정시킨 갈비뼈가 어긋나는 게 느껴졌다.
후려갈기고 싶은 인간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도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속에 불이 붙어, 마구잡이로 노성을 지른다. 박경준은 그 모습을 그저 딱하다는 듯, 동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시선을 담아 바라보았다.
구둣발이 머리를 짓눌렀다. 증오심에 차 저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아랑곳 않고 받으며, 그가 입꼬리를 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그냥 지금 죽여, 씨발 놈아.”
“조금 있다가요. 뭐 하나만 물어본 다음에.”
경준이 몸통을 기울였다. 무게가 실리며 두개골에 진득한 통증이 더해졌다. 나른하게 풀린 동공은 통증을 견디려 몸부림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았다. 언제 봐도 소름 끼치는 눈깔이다. 저 미친 새끼는.
경준이 입을 열었다.
“…정윤 씨, 어디 있어요?”
진환은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입이 벌어지고 미간이 찌푸려진다. 어이가 없어 잠시 말도 잇지 못하다가, 그가 되물었다.
“뭐?”
“어디에 숨겨뒀어요? 솔직히 말해요. 그럼 진환 씨 살려두는 것도, 생각해볼 테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박경준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태연하고 고운 얼굴 위에 구름에 달이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선명하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진환은 곧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진환의 만면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사라졌구나?”
“…….”
한순간, 가슴이 얹힌 바위가 사라진 것처럼 가벼워졌다.
지금껏, 진환은 정윤이 경준에게 돌아갔으리라고 생각했다. 박경준에게 어떤 벌을 받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런데 그게 아니다. 정윤 형님은 무사하다.
적어도 지금은.
웃음이 점점 더 깊어진다.
“아끼던 장난감 하나 뺏겼네, 우리 박 회장님.”
“입 닥쳐요.”
“언제까지고 네 옆에 붙어 있을 줄 알았지.”
낄낄거리고 웃어대기 시작한다. 박경준이 한 차례 더 거세게 머리를 짓밟았다. 짧은 신음과 함께 웃음이 멈췄지만, 진환은 그만두지 않았다.
“그 새끼, 나도 배신했어. 넌 안 버릴 줄 알았어?”
“진환 씨는 죽는 게 소원인가봐요.”
“야, 멍청한 새끼야. 죽일 거면 진작에 죽였어야지.”
“네?”
진환의 입꼬리가 비죽하게 치켜 올라갔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흰자위가 희번덕거렸다. 박경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들었다. 바람에 섞여, 모기 날갯짓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다.
당황한 경준의 부하들이 옥상 난간에 달려가 붙었다. 경찰차가 몰려와 있었다. 한 대가 아니다. 건물 전체를 포위한 수준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보험이 그렇게 간절할 수가 없더라고.”
주머니를 뒤적인다. 진환의 손에 검고 눈에 익은 둥그런 플라스틱 물체가 들려 나왔다. 자그마한 빨간 다이오드가 빛을 내며 깜빡이고 있었다.
“기억 안 나? 나 프락치 새끼인 거.”
***
- 삼촌. 어떡해? 아빠 죽으면 어떡해?
“…동준아. 삼촌이 금방 거기로 갈게. 어느 병원이라고?”
- OO병원….
“걱정하지 말고, 엄마 옆에 붙어 있어. 알겠지? 우리 똥준, 씩씩하게 잘 있을 수 있지?”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힘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전화를 끊자, 핸드폰을 빌려주었던 의사가 불편하다는 눈길로 그를 응시했다.
“저기, 그거 다 쓰셨으면 그만….”
“잠깐만요.”
그의 말을 가로채고, 진환은 생각에 잠겼다.
“한 통만 더 씁시다. 예?”
“저기요. 이러실 거면 가족분한테 가져다 달라고 하시든지-.”
“아이고-. 병원이 왜 이렇게 덥냐, 어?”
의사의 말을 가로채고 진환은 태연하게 제 환자복을 들췄다. 배 아래로 길쭉하고 흉악한 흉터가 드러났다. 누가 보아도 칼에 찔려 생긴 자국이다.
“-필요한 만큼 쓰시죠.”
의사의 표정이 빠르게 유해졌다. 고맙다며 손을 휘휘 젓고, 진환은 전화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기 직전, 잠깐의 망설임이 일었다. 다시는 상종하게 될 줄 몰랐는데.
‘삶이란 게 참, 미스터리하다. 어?’
어쩌면 자살골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진환이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동아줄이 아니다.
그놈의 목을 매달기 위한 거다.
손가락이 이끄는 것처럼, 진환은 무의식이 기억하는 그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인사말이 들려오기도 전, 진환이 그를 앞질렀다.
“오랜만입니다, 강 반장님.”
제 목소리를 들어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천하의 강 반장님이 욕설을 뱉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 씨발. 이진환, 이 개새끼-.
“인사는 됐고, 내 생일이 언제인지 아시나?”
- 너 어디야, 인마. 감옥 들어갈 준비는 됐냐?
“서운하게시리…. 우리가 알고 지낸 게 얼마인데 생일도 몰라? 뒷조사 안 했어?”
- 순순히 말해. 데리러 가게. 콩밥은 좋아하냐?
“알아두시는 게 좋을 텐데. 그게 비번이니까.”
강 반장이 숨을 멈췄다.
- …무슨 뜻이야?
“양재역 물품보관소 알지? 거기 9번 사물함에 넣어놨어. 안에 USB가 하나 있을 거라고.”
- 너 인마, 지금 헛지랄하는 거면-.
“내가 목숨 걸고 지랄하는 놈으로 보여?”
허망한 시선이 천장을 응시했다.
“들어보시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전화해.”
***
“긴급 영장 발부까지 끝났을 시점이지.”
계단을 타고 급히 뛰어오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옥상 문을 두드린다. 이윽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검은 방탄조끼를 입은 무장 경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진환이 웃음 지었다.
“체크메이트다, 씨발 놈아.”
경찰들이 쏟아져 들어와, 청명파 조직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전쟁터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경준은 그저 감탄 어린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밌네요.”
경준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재밌어요, 진환 씨.”
선두에 선 강 반장이 경준에게로 향했다. 그를 땅에 짓누르고,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으며,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 이 씹새끼야.”
경준의 시선이 태연하게 위를 향했다. 어느새 비틀거리고 선 진환은,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쇼, 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