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솨아아아….
봄비 한번 호되게 내린다. 창문 하나 없는 뒷방에서도 잔잔한 천둥소리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공기까지 후덥지근하다. 셔츠를 붙잡고 훌훌 털다가, 김 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의 기름 냄새. 지겨워서 진짜-.”
투덜거리는 소리가 울리려는 때, 그를 향해 매서운 눈빛이 쏘아졌다. 강 반장이 금방이라도 뒤통수를 후려갈길 기세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상황을 무마하려, 김 형사가 헛기침을 뱉었다.
“아니, 그러니까… 정겹…단 말이었습니다. 아이고, 정겹다.”
강 반장의 사나운 시선이 거두어졌다. 강 반장은 곧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 경관. 그래서 알아왔다는 건 뭐야?”
“반장님 말씀을 듣고 박성수 뒤를 좀 캐봤습니다.”
이 경관이 클립으로 묶인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첫 장을 들어 읽던 강 반장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실종이 됐어?”
“지인에 의해서 실종 신고가 들어가서요. 수사 결과 자산을 정리한 흔적이 발견되어서, 해외 도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피라고? 강남에서 제일 몸집 큰 업소를 운영하게 됐던 놈이 이제 와서?
강 반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직감이 옳았다. 역시 찝찝하다.
김 형사가 질문을 얹었다.
“해외로 튄 건 확실해?”
“그게, 좀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요.”
김 형사가 머뭇거리며 보고서를 넘겼다. 줄글을 따라 훑던 손가락이 종이 중간에서 멈춘다.
“여기. 여기입니다.”
강 반장과 김 형사가 나란히 고개를 내밀어, 이 경관이 가리키고 있는 부분을 빤하게 응시했다. 김 형사가 곧 인상을 찌푸린다.
“증언이 엇갈려?”
“예. 같은 시간대에 박성수를 봤다는 사람이 둘 있는데, 위치가 정반대입니다.”
“그럼 뭐야. 박성수한테 쌍둥이 동생이라도 있단 거야? 아니면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것까지는 저도 잘….”
기막혀하는 김 형사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강 반장은 종이를 응시했다.
증인 1번. 인천항에서 화물 운반용 소형 보트를 소지한 사업자. 박성수가 최근에 인천항 주위를 자주 답사했다는 증언을 토대로 수사 끝에 확보. 박성수와는 전에 안면이 있는 사이로, 안부 인사를 하러 다녀왔다고 말했다.
증인 2번. 강북구 빌라촌 편의점에서 일하는 알바생이다. 실종 신고가 들어오기 약 이 주 전 박성수의 카드 거래 기록이 남아 있는 장소라 발견. 박성수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금세 알아봤다고 한다. 워낙 양아치처럼 생겨서 기억한다고. 원하는 담배가 다 팔렸다고 했더니 쌍욕을 하며 나갔다나.
강 반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이 편의점. 이상하게 뭔가 낯이 익은데. 어디에서 봤더라….
어쨌든 둘 다 마지막 행적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찮다. 그가 보고서를 내려놓자, 김 형사가 말을 꺼냈다.
“모종의 이유로 바다를 건너가게 됐거나, 밤길에 끽연도 못 하고 성질머리를 부리다가 무슨 일이 생겼거나. 둘 중 하나라는 소리인데.”
“해외 도피 쪽이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말마따나 자기 클럽에서 칼부림 났는데. 생각이 있는 놈이면 도망가고 싶겠죠.”
“청명파 내부의 세력 다툼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진환이 그 자식도 그런 얘기를 했었고.”
이진환이.
강 반장의 머릿속에 커다란 종이 울렸다. 희뿌옜던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고 퍼즐이 모여 제 모양이 된다. 그가 탁자를 내리쳤다.
“그거였어.”
“예?”
“이 경관. CCTV 기록 조회 좀 부탁하지. 위치 보내줄 테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김 형사. 넌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무슨… 어딜요? 반장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 편의점, 이진환이 집 바로 앞에 있는 곳이야.”
바람막이 재킷을 걸치고, 강 반장이 콧등을 찡그렸다.
“박성수가 마지막으로 만난 게 이진환이일지도 모른다, 이 소리다.”
***
기분이 좋다.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온몸이 이완되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깔린다. 살결과 비누가 섞인 내음이 난다. 눈을 뜨자 정윤이 바로 앞에 보인다. 둘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다. 정윤의 손이 감미롭게 뺨을 쓰다듬는다.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파도 소리가 들리고, 비강 안쪽으로 은은한 짠 내가 느껴졌다. 눈을 감으며, 진환은 정윤의 손을 마주 잡았다.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진환이 중얼거렸다. 이제 안전하다고. 여기선 안전하다고. 그렇게 말할 참이었다. 조금만 행복해보자고. 우리도 그래보자고. 뺨을 어루만지며, 콧등 위에 입을 맞출 셈이었다. 그랬는데.
“있잖아.”
뺨 위의 온기가 사라진다. 정윤은 어느새 진환의 손을 움켜쥐어, 제 목 위에 대고 누르고 있었다. 손이 말을 듣지 않는다. 멋대로 손가락이 꿈틀거려, 정윤의 목을 휘어 감는다.
왜 이래. 이거, 왜 이래.
정윤의 말간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고, 이내는 동공까지 안구 위로 밀려가며 벌건 실핏줄이 솟는다. 죽어가는 인간처럼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도, 정윤의 목소리는 이상할 만큼 차분했다.
“형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망가뜨려.
“이거 놓으세요. 형님. 이거 놓으시란 말입니다!”
―날 망가뜨려.
싫다고, 아무리 안 된다고 반항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 손가락은 멋대로 정윤의 목을 파고든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살갗을 짓이기는 역겨운 감각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등골이 차가워진다. 숨이 막혀온다.
“형님. 제발… 형님!”
정윤의 목이 기괴하게 비틀린다. 이제는 인간조차 아닌 것 같은 형태가 되어, 손바닥 아래로 흘러내려 간다….
***
머리를 강타하는 충격과 함께, 진환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구둣발을 들며 낄낄거리는 김종식이 눈에 들어왔다.
“해 떴다, 아그야. 안 일어나냐.”
차라리 고맙다, 씨발 새끼야. 욕설을 속으로 읊는다. 그러나 눈을 뜨자마자 진환을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악몽일 뿐이었다.
“포클레인 기억나지?”
자리에 쭈그려 앉아, 김종식이 역겨운 얼굴을 들이밀었다.
“고쳐졌댄다, 그거.”
“잘됐네. 드디어 죽이시려고?”
“뭐 하나만 알아보고.”
날붙이가 부딪히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온다. 진환은 이미 갈라져 보이는 시야를 애써 집중해, 김종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보려 했다. 신문지를 둘둘 펼쳐, 그가 손바닥 정도 크기의 과도를 꺼낸다.
“너 인마, 사람이 급소 안 찔리고 죽으려면 얼마나 찔려야 하는지 아냐?”
“뭐?”
칼끝이 어깨 위를 찌른다. 작은 칼날이 뼈에 부딪히며, 어깨를 찢어발길 듯이 앞뒤로 흔든다. 그럴 힘도 남아 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몸이 요동치며 비명이 나온다. 질척하게 칼날이 뽑히고, 그 자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손등 위까지 흐른다.
“내가 그걸, 지금부터 알아보려고.”
“이, 개새끼가….”
“어디, 다음은 어느 곳을 찔러볼까-.”
고르기 게임을 하는 것처럼, 김종식의 칼끝이 섬뜩하게 진환의 몸통 이곳저곳을 가리킨다. 손등, 무릎, 아랫배, 사타구니. 그리고 허벅지 위에 멈춘다.
“여기구만.”
김종식이 비식 입꼬리를 올린다. 저 새끼 칼에 넝마가 되는 것은 차마 버티고 싶지가 않았다. 체념에 젖어 눈을 감으려던 때였다.
핸드폰 벨 소리가 울린다. 허벅지 위를 찌를 듯 말 듯 망설이던 끝에, 김종식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숨을 내쉬며 힘이 들어갔던 고개를 뒤로 젖힌다. 마신 게 없어 다행이다. 오줌을 지릴 뻔했으니까.
“예, 예. 회장님. 거래처 애들이요. 지금 말씀입니까?”
통화가 끊어진다. 칼날에 묻은 핏물을 신문지에 대강 문질러 닦고, 김종식이 뒤에 선 패거리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회장님이 부산 가라신다. 차 준비해라.”
산 건가? 당분간은? 잔뜩 긴장했던 몸이 풀어진다. 방심한 그 순간, 김종식의 발길질이 명치 위에 날아왔다. 턱 하니 숨이 막혀 콜록거리는 진환을 아래에 두고, 그가 비열하게 웃음을 흘렸다.
“몸 닦고 기다리고 있어라. 내일이면 돌아오니까.”
“혀 깨물고 죽어 있으마, 씹새끼야.”
“근데 이 새끼가.”
진환이 한마디도 덧붙이지 못하고 쓰러질 때까지 등을 걷어찬 후에야 김종식은 방을 나섰다.
***
“49재 지내고 처음 뵙네요, 김 회장님.”
납골당 벽을 응시하며, 경준이 중얼거렸다.
사무적인 보관함처럼 다닥다닥 붙은 유리장 한가운데, 특별한 사람을 위한 듯 비워놓은 널찍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꽃을 장식하기 위해 마련된 홈 안에 흰색 국화꽃을 꽂아 넣고, 경준은 감상하는 것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제일 볕이 잘 드는 자리로 골랐는데. 좁은 것 같아요. 조금.”
정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석상처럼 자리에 서, 무던한 눈으로 네모난 상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로 시간이 멈추어버린 사람 같았다.
“정윤 씨.”
“…….”
“정윤 씨!”
이윽고, 얼어붙어 있던 정윤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응.”
정윤의 이상한 행동은 집에서까지 이어졌다.
솔직히 말해, 경준은 그날 하루 종일 정윤이 침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비로운 기분이 들어 준비한 게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정윤도 그걸 알아본 듯했다. 그의 시선이 협탁 위에서 떠나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선물이에요. 정윤 씨.”
정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경준이 말했다.
협탁 위, 한참이나 비어 있던 어항에 물고기가 돌아와 있었다. 둥글게 휘어진 어항. 지난번 죽어버린 금붕어와 똑같은 색의 비늘을 가진 물고기였다. 경준은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정윤을 응시했다.
“같은 종으로 샀어요. 좋아할 것 같아서요.”
물고기가 꼬리지느러미를 펄럭인다. 느릿하게, 정윤은 고개를 돌렸다.
“응.”
그의 눈에 아무런 빛도 돌아오지 않는다.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죽은 사람처럼.
경준은 손을 쥐었다 펴며 애써 저릿하게 올라오는 감각을 떨쳐냈다. 하지만 내려둔 쟁반 위를 바라봤을 때는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정윤 씨. 여기 봐요.”
정윤의 시선이 돌아오지 않자, 턱을 붙잡아 저를 보게 만든다. 공허한 눈빛이 막연하게 그를 훑었다.
“왜 준비해둔 아침은 안 먹었어요?”
“입맛 없어.”
“이틀이나?”
생각에 잠기는 듯 정윤의 시선이 내리깔린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금니를 맞물린다.
“먹여줄게요. 입 열어요.”
“먹기 싫어.”
“계속 이러면 목에 튜브를 끼워버릴 줄 알아요.”
이윽고, 정윤이 입을 벌렸다. 경준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깝게 끌어안는다. 차분하게, 정윤은 눈을 감았다.
“아, 해봐요.”
정윤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서, 먹을 수 있는데….”
“그러지 말고요. 아.”
비행기를 태우며 수저를 넣자, 저도 모르게 숟가락이 들어간다. 어리둥절하게 죽을 우물거리는 정윤을 보며, 경준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약은, 안 넣어?”
“회복하기 전까지는요.”
“그럼 자도 돼?”
“…….”
경준의 웃음이 조그맣게 가신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정윤이 자리에 눕는다.
악몽에 뒤흔들려, 정윤은 식은땀에 젖어 눈을 떴다. 이른 새벽이다. 경준은 그의 옆에, 간호하다 지친 듯 옆으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단정한 이마를 가린다. 감겨 있는 속눈썹은 촘촘하니 예쁘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올리며, 정윤은 생각에 잠겼다.
경준은 때때로 아기처럼 잠이 든다.
정윤이 경준에 대해 아는, 몇 안 되는 사실 중 하나였다. 김 회장을 만나기 전에는 길바닥에서 일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썩 좋아하지 않았고, 어머니한테 더 잘해줬으면 했다고 한다.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고 금방 피곤해한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이 떠오른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레몬 향기가 나는 차가운 음료를 마셨는데, 정윤이 지금까지 입에 댄 음료 중 어느 것보다도 달콤했다. 경준은 웃음을 머금으며 부탁했다.
개처럼 사랑해달라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보이는 얼굴은, 그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정윤은 그의 가슴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일정하게 두근거리는 맥박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온다. 제 손등 위에 입을 맞추고, 정윤은 서서히 손을 떼어냈다. 조용하게, 그가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어항 위를 의미 없이 두드리고, 정윤은 현관문으로 향했다.
막 해가 떠 밝아지려는 거실을 지나, 홀로 어둑하게 드리운 현관문 앞에 선다.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정윤은 조용히 대답했다.
“…밖에.”
“정말 가둬두면 좋겠어요? 아니면, 힘줄을 잘라버릴까?”
“미안해.”
“또 말만-.”
“아니.”
손잡이에서 손이 미끄러진다. 정윤의 불투명한 눈이 경준을 향했다.
“진심이야.”
단번에 뜀박질을 해, 정윤이 달려든다. 경준은 민첩하게 피했지만, 팔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발차기를 날려 정윤의 몸통을 걷어차려는 순간, 정윤이 몸을 부딪쳐 그를 넘어뜨렸다. 목에 팔을 걸어 당긴다. 제 복부를 가격하는 발길질이 멈출 때까지.
서서히, 경준의 팔다리가 늘어졌다.
정윤은 긴장이 풀려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앉은 채로 뒷걸음질을 하니 등에 문이 닿는다. 식겁해서 등골에 소름이 스치고 지나간다.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숙인다. 가볍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 할 때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고,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때때로 오한이 덮쳐왔다. 걸음을 딛는다는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다.
경준을 저대로 둬서는 안 된다고 온몸이 외친다. 지난 사 년 가까이 경준은 그의 전부였다. 아이의 세계는 어버이고, 개의 세계는 주인인 것처럼. 정윤의 세계는 경준이었다. 그 나머지가 지금도 질척하게 그를 붙잡는다. 몸 구석구석이, 약에 절여지고 개처럼 범해진 속살 한 점 한 점이 그를 걱정한다. 사랑한다.
길들여진 몸이 바르르 떤다. 멋대로 손이 들려져 경준이 누운 방향으로 옮겨갔다.
잘게 흔들리는 손끝이 경준에게로 향했다. 금방이라도 그를 뒤흔들어 깨울 것처럼.
탁.
손길이 닿기 전, 정윤의 손목이 멈췄다. 정윤을 멈춘 것은 정윤 자신이었다. 제 왼손으로 손목을 움켜 붙든 채, 정윤은 지긋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안 돼.’
간신히 자신을 붙든다.
여기에서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는 평생 경준을 떠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정윤에게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장소가 있었다.
뼈에서 살가죽을 벗겨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정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돌아선 채 도어 록 버튼을 누른다. 경준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문을 닫기 직전까지 그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문밖으로 나서자 오한은 사라지고 가슴이 갑갑하게 막혀오며 식은땀이 등줄기로 흘렀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집에서 멀어질수록, 현관에 쓰러져 잠든 경준과 멀어질수록, 정윤은 점점 더 괜찮아졌다. 고동은 가라앉고 냉정한 판단이 머리로 돌아온다.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온다.
“비 오겠다.”
어느새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정윤은 익숙해진 시선으로, 이제는 언제든지 제 옆에 나타나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상관 안 해.”
“우산도 없으면서. 등신.”
얄미운 소리를 골라 하기는. 정윤은 누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누나는 맨발로 걸어, 정윤의 뒤를 쫓았다. 누나의 말이 맞았다. 공기 중으로 습기 어린 눅눅한 이끼 내음이 나더니,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굵어지고 하늘은 어두워져, 세상은 소나기 속에 잠긴다.
***
비가 쏟아져 내리려 한다.
진환은 반쯤 죽어 그 소리를 들었다. 창문 하나 제대로 얹지 않은 폐건물,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까딱도 할 수 없게 된 손가락을 보고 있으니, 그 아래로 새로 적셔진 핏자국이 콘크리트 바닥에 스며들고 있었다. 눈을 감는다.
이젠 아프지도 않네.
복도에서 패거리가 담배를 피우며 떠드는 소리가 빗소리의 일부처럼 들려왔다.
“배때기를 확 갈라버려야 하는데, 하여간. 씨발….”
“내버려 둬라. 어디 장기라도 떼어다 파시려나 보지. 저 새끼 O형이잖아.”
B형이다, 씨발 놈들아.
이죽거리는 말을 뱉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몸을 뒤집을 수조차 없다. 눈앞이 아득하고, 무척이나 깊은 졸음이 몰려왔다. 천천히 타오르던 심지가 뚝 하고 끊어지는 것 같은, 위태로운 졸음이었다.
위험한데.
천천히 어둠에 잠겨 들어가는 시야를 앞에 두고 있자니 무딘 실감이 다가왔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는 물 몇 모금을 빼고는 아무것도 먹질 못했다. 피는 매일같이 흘렸고, 분명히 갈비뼈 어딘가가 부러졌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회개라도 하라는 듯, 진환은 지금껏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형을 떠올렸다. 답답한 벽 안에 갇혀 있을 형. 나 키우느라 젊은 날 다 날리고, 가족들 뒷바라지한다고 재미 한번 못 보고 살았던 우리 형.
이제는 안다. 형은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라는 걸.
설령 형이 약을 팔았다고 해도- 진환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구한 약 때문에 돈 버리고 몸 버린 젊은이들만 트럭 하나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설령 형이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진환은 기만하려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접근했다.
설령 형이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진환은….
그런 주제에, 진환은 형을 등졌다. 그 답답한 방에 남겨두고 나왔다. 형이 가장 필요로 했던 믿음조차 주지 않고 형을 버렸다. 왜? 처음으로 형보다 잘난 인간이 된 것 같아서 즐거웠나? 박경준이 쥐여주는 알량한 돈다발이 그렇게 보기 좋았나?
형 말이 말대로였다. 어쨌든 그래서는 안 됐다.
가족에게, 그래선 안 됐다.
이건 그 벌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가 멎었기 때문이 아니라, 청각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답잖은 말소리도 뭉개져서 알아들을 수 없게 되고, 눈을 뜨고 있어도 눈앞이 밤처럼 어두웠다. 진환은 암흑 속에 남겨졌다. 곧 멎어버릴 제 고동 소리와 함께.
“…나.”
그리고,
“일어나.”
놀랄 만큼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둑했던 시야가 희뿌옇게나마 돌아온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자, 머리 위로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쏟아낸다. 그러자 상대가 수건을 내밀었다. 반 정도 비워진 생수병과 함께. 조금씩 시선을 들어 올린다.
“…형님.”
정윤은 쭈그려 앉아, 가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다치셨습니까, 또.”
“어디.”
“볼이요.”
천천히, 정윤은 제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까의 몸싸움 중에 흔적이 남은 모양이다. 그렇게 행동할 줄 알았던 것처럼, 눈을 감은 채로도 진환은 픽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이해할 수 없도록 구겨졌다.
“…정말 미친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정윤이 그를 응시한다. 몽롱하게, 진환이 말했다.
“저 여전히 사랑합니다. 형님을.”
정윤의 두 눈이 느릿하게 감겨들었다. 땅을 딛고 그가 일어섰다. 각진 얼굴이 좌우로 흔들렸다.
“이젠 안 믿어.”
“못 믿는 게 아닙니까?”
“안 믿을 거야. 네가 하는 말은 다 안 믿어.”
가늘게 눈을 뜬 채, 정윤은 지난번에 그 말을 믿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게 무너진 순간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어떻게 엄습해왔는지. 다시는 그걸 겪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믿지 않는 게 최선이다.
진환은 정윤의 표정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그럼 안 믿으셔도 됩니다.”
“…….”
“그러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환하다.
진환과 함께 있을 때는 그랬다. 전혀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곳에서도 빛이 난다. 그래서 안 된다. 정윤은 빛나고 따뜻한 건 무엇이든 가질 자격이 없었다.
정윤이 얼굴을 쓸어 올렸다.
“너무 늦었어.”
“형님. 저 보세요.”
“싫어.”
“다 괜찮습니다. 형님. 다 괜찮으니까….”
조금씩,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바닥 안에 보드랍고 상처 입은 뺨이 다가간다.
“키스 한 번만 해주세요. 죽는 사람 소원 삼아.”
조명 아래에 유난히 울긋불긋하던 멍 자국이 손바닥 아래로 감겨들었다. 볼을 기울인 채, 진환이 힘없이 눈꺼풀이 들었다. 연갈색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더없이 맑은 빛을 띠며. 진환이 뺨을 쓰다듬어 올린다. 그리고, 입을 맞췄다.
혀가 닿자 여지없이 녹아든다. 당장이라도 죽는다는 생각을 한 탓일까, 그의 아래가 꼿꼿하게 발기한다. 말랑한 혀를 뒤섞으며, 샅샅이 입 안을 탐색하고 들어간다.
입술을 떼어냈을 때 진환의 볼은 여지없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익숙한 욕정을 담은 눈빛이 꿰뚫는 것처럼 이쪽을 향한다.
그런 자신을 억누르듯, 진환이 지긋하게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질적인 은색 물건이 정윤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칼날이다. 정윤이 칼을 쥐고 있다.
“눈 감아.”
마지막으로, 정윤이 말했다.
“금방 끝나니까.”
칼날은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니들 거기 모여서 뭐 하냐?”
폐건물 앞에 차가 멈춘다. 호랑이 무늬의 셔츠를 입은 김종식이 차에서 내려, 모여서 담배를 피우던 패거리에게 다가갔다.
“그, 정윤 형님이 오셔서 잠깐 봐야겠다고 하셨지 말입니다. 그사이에 한 대 피우고 있었습니다.”
“뭐?”
이상하다. 그 새끼라면 분명 회장님께서 나돌아다니지 않게 감시하라고 한마디 하셨었는데.
김종식은 담뱃갑을 꺼내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진환이 있을 곳에서 발소리가 묵직하게 굴러간 기분이 들었다.
“…너희도 들었냐? 방금 그거.”
“뭐 말씀이십니까?”
“…….”
별것 아닐 수도 있다. 재개발 부지의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폐건물. 쥐새끼를 보는 것도 일상적인 곳이었다. 그렇지만 꺼림칙한 기분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담배를 땅에 떨구고 구둣발로 밟아 문지른다. 희미한 연기가 퍼져 오르는 꽁초만 남기고 김종식은 계단을 올랐다.
“하여간 이진환 좆같은 새끼. 끝까지 지랄이야.”
무엇보다도 상대가 이진환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김종식은 그가 성가시고 미웠다. 이제까지 그놈이 겉으로만 뺀질거리는 썩을 놈이라는 걸 조직에서 저밖에 몰라보지 않았나. 지난 일주일간 곤죽이 되도록 패댔는데도 속이 개운해지질 않았다. 내일 철근과 함께 산 채로 으스러지는 걸 보고 나면 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난간이 덜렁거리는 계단. 꽁초며 깨진 유리가 쌓여 걸음걸이마다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김종식이 향한 방에는 원래 그곳에 붙어 있던 게 아닌 티가 나는 두꺼운 철문이 달려 있었다. 심드렁히 문을 바라보던 김종식의 얼굴이 한순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창백해졌다. 느릿하고 건들거리던 걸음걸이에도 단번에 불이 붙어, 그는 다급하게 마지막 계단을 박차 올라 달렸다.
‘씨발, 어떻게 된 거야?’
벌레 한 마리 못 나오도록 꼭 닫혀 있어야 할 문이 반 정도 훤하게 열려 있는 것이었다.
단번에 문 앞에 도착한 김종식은 벽에 손을 대고 안으로 몸을 기울였다.
“형님. 형님, 문제없으십니까잉?”
그 안을 들여다보자, 긴장으로 쿵쿵거리던 심장이 이번에는 공포에 질려 차갑게 식고 말았다. 욕설을 뱉으며 뒷걸음질을 쳤다가, 바로 몸을 틀어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절박한 달음박질과 함께 커다란 발소리가 폐건물을 뒤흔들었다.
“씨발, 당장 애들 풀어. 당장!”
건물 밖으로 달려 나오며 김종식이 소리쳤다.
백열구 전구가 간헐적으로 깜빡거리며 누리끼리한 빛을 뿜었다. 그 바로 아래에 나뒹구는 끊긴 청테이프 아래로 웅덩이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