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20/31)

#19

정윤은 침대에 앉아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했다. 깍지 낀 손, 엄지가 계속해서 꼼질거린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걸레짝이 된 진환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목에 무언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다.

보러 가는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진환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없애버리려 했다. 하지만 쉽게 그렇게 되질 않았다. 약을 한 후에 몰려오는 메스꺼움처럼, 진환이 해준 말들이, 보여준 행동들이 자꾸만 그를 엄습했다. 그때마다 숨이 막혀왔다. 벗어나고 싶어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마음이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진환을 보면, 처음부터 저를 경멸하고 이용할 생각뿐이었을 그의 원래 얼굴을 보면, 이 모든 게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갔을 뿐인데.

싫어. 이런 건 느끼고 싶지 않아.

통증은 오히려 격렬해졌다. 꾸물거리고 답답한 느낌이 가슴을 틀어막아 아무리 떨쳐내려 애를 써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여기 있었네요.”

의식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흠칫 고개를 든다. 어느새 문가에 서 있는 경준이 보였다.

“불러도 대답이 없더니.”

“못… 들었어. 미안해.”

“괜찮아요. 피곤했죠?”

나풀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경준이 그의 이마에 짧게 입술을 맞댔다. 온기와 함께 내내 가슴을 옥죄던 통증이 조금씩 옅어졌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이 꽉 틀어막혔던 안쪽에 조금씩 공기가 드나드는 기분이다.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고, 경준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새로운 거래처가-.”

말을 멈추고, 경준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정윤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왜 그래요?”

“박…아줘.”

“네?”

“박아줘. 지금.”

꼴불견으로 녹아내린 정윤의 얼굴이 상대를 향했다.

그래. 경준이라면 없애줄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통증, 잘 알고 있는 그 통증이 필요하다. 약과 좆물과 주먹질. 그거면 된다. 그거라면 이 모든 게 사라질 것이다. 그 외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질릴 때까지 좆물을 받고 쌀 때마다 벌을 받으면 된다.

그러면 사라진다. 이 통증도.

경준이 눈썹을 들었다.

“네?”

“뒤도, 입도. 다 좋아. 박아줘. 제발….”

흠칫, 말이 멈춘다. 제 뺨을 쓰다듬으며 웃던 진환의 얼굴이, 눈도 뜨지 못할 만큼 뭉개진 몰골과 겹쳐지며 눈꺼풀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뾰족한 칼끝으로 가슴 정중앙을 찔러대는 것 같은 통증이 들이닥친다. 안 돼. 더는 싫어.

“내가, 내가 할게.”

성급히, 정윤은 경준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었다. 경준이 아무 대답도, 행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경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정윤은 그의 버클을 풀어 헤쳤다. 발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성기가 손바닥 아래에 만져지자 몽롱하게 열이 올라온다. 입술이 속옷을 끌러 내리려 한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뜯겨 나가는 통증이 날카롭게 두피를 가로질렀다. 아픔보다도 좆에서 억지로 떨어졌다는 사실이 더 괴로워, 정윤이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여, 경준이 시선을 맞춰왔다.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빛이었다.

“정윤 씨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언제부터 이렇게 버릇이 없어졌어요?”

“미안. 미… 미안. 미안….”

몸을 파르르 떨며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경준의 사타구니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는다. 이제 벌을 받게 될까? 억지로 다리가 벌려져서 내장이 좆집 모양으로 바뀌도록 박히고, 입이며 뒷구멍에 좆물이 흘러넘치게 되는 걸까? 실낱같은 기대에 아래가 뻣뻣하게 선다. 그 위를, 경준의 발이 무참히 짓밟는다.

“하흣…!”

“발정기가 너무 잦네요. 거세를 시켜야 하나?”

“흐, 이힛…! 그만, 아, 아프….”

“조용히.”

지분거리며 음경을 짓누르던 발이 터뜨려버릴 듯이 힘을 더한다. 뇌리로 전류처럼 흘러 오르는 빽빽한 통증에 정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일 얘기 하는 중이었잖아요.”

정윤이 입을 뻐끔거렸다. 눈가에 빠르게 열이 올라 가무잡잡한 얼굴 전체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억지로 고통 속에서 숨을 쉬려 벌린 입에서 개처럼 혀가 내밀어진다. 어떻게 봐도 말을 알아들을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경준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새 거래처를 찾았어요. 상품도 괜찮고요. 배가 인천항을 통해서 들어오는데, 아무래도 항구를 새로 파야 할 것 같아요.”

괴로워. 중심을 짓이기는 발에 새하얗게 머리가 질린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저 정윤의 발에, 힘이 실려 고통스럽게 압박된 제 좆에 신경이 쏠린다. 발가락이 조금이라고 꼼지락거릴 때마다 등골에 오싹한 감각이 스쳐 갔다. 무언가 붙잡고 싶어 경준의 옷자락을 그러쥔다. 애처롭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내일 만나 뵈려고 하는데. 물론 정윤 씨도 데리고요.”

“흐….”

“그런데 이렇게 창놈처럼 행동하면. 도움이 안 되잖아요.”

발이 떨어진다. 해방감에 바닥으로 몸이 곤두박질쳤다. 간신히 숨을 쉴 수 있겠다. 질척하게 젖은 속옷의 감각이 호흡하며 등이 들썩일 때마다 전해져, 정윤에게 제 처지를 일러주는 것 같았다.

“…미안해.”

가까스로, 정윤이 뱉었다. 반사적인 말에 가까웠다. 의식이 멀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돌려버릴 거예요. 알겠어요?”

“미안해. 미안….”

“알았으면 됐어요.”

머리를 쓰다듬으며, 경준이 이윽고 어깨를 끌어안는다. 훈육 후에 간식을 주는 것처럼. 귓바퀴를 만지작거리고 눈꺼풀에 입을 맞춰준다. 몽롱하게 뒤틀린 손길을 받으며, 정윤은 얌전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아래가 여전히 욱신거린다.

가버렸다. 좆대를 밟혀서.

치욕스럽고 고통스럽다. 쓸모없어진 도구로 전락하는 감각. 하지만 그마저도 감사하고 달콤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진환이 한 말도. 그가 쓰다듬은 곳에 남은 감각도.

***

신기파 신 사장이 경준의 손에 의해 물러난 후, 강남은 완벽하게 청명의 관할 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인천은 아직이다. 항구 두 곳을 관리비를 떼어주고 운영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시작할 거래에서는 항구 두 개 정도로 물량을 감당할 수 없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그러니까 죽은 김 회장이 선택할 법한 방법은 관리비를 두 배로 얹어주고 새로운 항구를 트는 것이었다. 경준이 인천에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의 청명파 인간들이 생각한 시나리오도 그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이야, 이게 누구야. 박 회장님 아닙니까.”

해 길어지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에어컨 바람이 빵빵하게 나오는 컨테이너 박스 안. 크고 작은 어탁이 액자에 담겨 빈 공간 없이 가득 메운 벽을 등지고,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일어났다. 정 상무. 인천 항구 관리를 담당하는 능구렁이 같은 영감.

“길게 머물 생각 없어요. 본론부터 말할게요.”

“그래, 그래. 그, 새로 항구를 뚫으셔야 한다면서.”

검은 가죽으로 된 장부를 덮으며 정 상무가 실실 웃음을 머금었다.

“이용료 팔천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따악, 사십 프로. 어떠신가?”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지금 내는 돈의 세 배에 달하는 액수다. 거기에 수익금의 일부까지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억지에 가까운 제안을 하면서도 정 상무의 태도는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었다. 박경준이 돌아온 후 강남에서 불었다는 피바람 얘기를 듣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 봤자 제 영역을 믿고 까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천은 그의 홈그라운드였다. 인력과 자원 모두 그가 훨씬 우수하다.

지금도 손짓 한 번만으로도 들이닥쳐 박경준을 다진 고기로 만들 수 있도록 애들만 서른 명을 대기시켜놓았다. 싫은 내색을 보이면 바로 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시퍼런 놈이 눈물 콧물을 다 빼며 빌게 만들 생각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박경준은 저를 우습게 본 것인지 뭔지 시커먼 꼬붕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을 뿐이다.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러나 경준에게서는 불쾌하거나, 겁을 먹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만하게 시선을 내리깔아 손톱 밑에 낀 때를 확인하며 정 상무의 제안을 듣던 경준이 입을 열었다.

“파는 건 어때요?”

“팔아?”

“네. 가격은 잘 쳐드릴게요. 이천 정도.”

“이천….”

경준의 말을 되풀이하던 정 상무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컨테이너 안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대던 그가, 탁자 위의 머그잔을 낚아챘다. 경준을 향해 내던진다.

“이 씹새끼가 누굴 등신으로 아나!”

머그잔이 경준에게 날아와 부딪히기 직전. 내내 박경준의 뒤에 말 한마디 없이 서 있던 수족이 그의 어깨를 잡아당겨 감쌌다. 등짝에 머그잔이 부딪친다. 이윽고 뒤를 돌아본 수족은 눈 아래에 흉측한 흉터가 나 있었다. 알아보겠다. 신기파 애들을 반 불구로 만들어버렸다는 놈이다.

경준을 놓아주고, 정윤이 서서히 정 상무를 향해 돌아섰다. 얼굴에 어둑하니 그림자가 지고 이유를 모르게 서늘하다. 아주 짧은 시간 말을 잊었다가, 정 상무가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어. 저 건방진 새끼 잡아!”

장정들이 달려든다. 하지만 경준에게는 털끝도 닿지 못한다. 정윤에 의해 칼이 살을 가르고, 뼈가 부러지고, 배를 걷어차이며 하나하나 쓰러진다.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짐승 같았다.

마지막 발버둥처럼 정 상무가 칼을 빼 든다. 휘두르기도 전, 정윤이 탁자를 발로 차 밀친다. 탁자 모서리가 정 상무의 투실투실한 배를 졸라맨다. 벽으로 몰아붙여져, 그가 헐떡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형세가 뒤바뀌었다. 경준은 흥건한 피 웅덩이를 피해서 정윤에게로 다가왔다. 정 상무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정윤이 그에게 내민다. 정 상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파, 팔게!”

그가 단번에 내뱉었다.

“판다고. 이천에!”

“이자가 붙었어요.”

“뭐?!”

경준이 그의 손을 낚아챈다. 무딘 칼날이 검지 마디에 닿았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해요. 거래는.”

***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경준은 정윤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잘했어요. 오늘.”

그가 귓가에 속삭인다. 경준의 조그마한 행동에도 매달려야만 하는 지금,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정윤의 숨통을 놓았다. 피 냄새에 찝찝하고 불편해졌던 마음이 단번에 사그라들었다. 겨우 한마디일 뿐인데 날아갈 것만 같이, 녹아내릴 것만 같이 기쁘다. 발그레하게 볼이 달아올라, 정윤은 가늘게 눈을 떴다.

“사… 상, 주, 줄 거야?”

“뭐가 받고 싶어요?”

“나….”

마른침이 넘어간다. 매달리듯 어깨를 붙잡은 채, 그가 조심스럽게 다리를 내민다. 정윤의 허벅지가 머뭇거리는 동작으로 경준의 사타구니 위를 문질렀다. 경준의 눈가가 사뭇 휘어졌다.

“그렇게 박히고 싶어요?”

“응.”

새빨개진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여댄다. 제 못생긴 얼굴로 이러는 모습이 얼마나 흉할지 알면서도,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서 박히고 싶다. 생각도 못 할 만큼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내장부터 범해져서 자신이 누구의 물건인지 확실하게 확인받고 싶었다. 어깨에 머리를 비비자, 경준이 그로부터 가볍게 떨어진다.

“어쩔 수가 없네요.”

다리를 허리에 걸치게 만들고, 경준의 손이 허리춤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손끝이 골반 위를 만지작거리다가 볼기짝 사이로 파고든다. 손가락 두 개가 찌꺽이며 내벽을 문질러댄다. 입술을 문 채, 정윤이 속삭였다.

“이거, 말고….”

“참아요. 이렇게 안 하면 정윤 씨, 암캐처럼 물고 놓아주질 않아서 귀찮게 굴잖아.”

“하지만….”

벽에 등을 대고 선 자세, 체중에 내벽이 눌려, 안쪽을 휘젓는 손가락이 이상하게 평소보다도 생생한 감각으로 다가온다. 쑤신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안이 눅진하게 풀리며 입구가 꿀렁거린다. 그때마다 내벽은 탐욕스럽게 손바닥을 조여들어, 휘어진 손가락 마디가 더 생경하게 느껴지고 말았다.

통증 하나 없는 몽롱한 쾌감이 머리에 들이닥친다. 몸에 힘이 풀리고 몸통을 지탱하는 한쪽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건 정윤이 원한 감각이 아니었다. 그는 통증을 원했다. 몰아붙여지고 벌을 받는다는 자각이 들도록. 좆대가 입구를 찢고 박아버리길. 목구멍에 좆기둥이 박혀 좆물을 쏴주길 바랐다. 그에 비해 경준의 지금 행동은 너무 정중했다. 통증을 무시하고 깊은 곳의 쾌감만을 자극한다. 안절부절못하고 따뜻한 꿀에 빠져 미쳐가는 것 같다.

기어이, 정윤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싫어. 이거, 싫어. 빨리 상, 상 줘. 자지, 자, 자지….”

“모처럼 잘해주려고 했는데.”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벌름거리는 입구에 뜨겁고 달가운 감촉이 닿았다. 정윤의 얼굴에 넋이 나간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예고도 없이 좆기둥이 뿌리까지 쑤셔 박혔다. 명치까지 닿을 것 같다. 갑자기 숨도 쉴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정윤의 동공이 위로 굴렀다.

“아힛…!”

“기뻤거든요. 정윤 씨가 길을 잘 찾아서.”

“히, 으… 흐… 하, 아하읏….”

“그런데 정윤 씨는, 좆이 제일 좋은가봐요. 그렇죠?”

“아하으… 으흐….”

“서운해라.”

중력 때문에 몸통이 아래로 내려앉으며, 좆 끝이 원래라면 닿지 않을 곳까지 뭉갠다. 단번에 내장이 휘어지고 눌려 대뇌까지 좆물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입이 벌어지고 시뻘건 혀가 헐떡인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꾸짖는 투로, 경준이 벌건 입 안에 손가락을 우악스럽게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손끝이 혀를 잡아당기고 입 안의 살이 여린 부분을 일부러 간질거린다.

“괜찮아요. 정윤 씨. 전 그래도 정윤 씨 사랑할 거예요.”

“하으, 아….”

“정윤 씨는요?”

“어…?”

“정윤 씨도 저 사랑해요?”

‘저 형님 좋아합니다. 사랑한다고.’

쾌감과 압박감에 녹아내리던 뇌수에, 달갑지 않은 독극물이 스며든다. 녹아내리던 정윤의 눈빛에 한순간 동요가 일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억누르려고 애썼던 감각이 다시금 날 서서 돌아온다. 타액이 턱으로 흘러내리며 멍청한 표정으로 멈추어 선다.

“정윤 씨?”

박힌 채, 경준이 그의 허리를 잡고 들썩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기만 해도 끝까지 닿아 괴로웠는데, 흔들기까지 하자 사정없이 내벽이 짓눌린다. 박힌다. 박히고 있어. 좆에 휘저어지고 있어. 동물적인 쾌락이 그를 지배한다. 동시에 진환이 속삭였던 말들이, 그것들이 주는 예리한 통증이 심장을 휘저었다. 두 가지가 뒤섞여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리고 싶도록 가슴을 옥죈다.

“사랑해.”

그저 달아나고 싶은 마음에, 정윤이 입을 열었다.

“사랑해에. 너, 어어, 무…! 사, 하으…! 사랑해, 에, 히…!”

박혀 올라갈 때마다 발음이 뭉개진다. 하지만 끝까지 말한다. 만족스럽기 그지없다는 듯, 경준은 그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비볐다.

“예쁘기도 하지.”

사라져. 입맞춤에 빌어, 정윤은 기도했다. 제발 사라져. 필요 없어. 이런 느낌은 필요 없어. 제발. 제발….

***

네 눈을 파버릴 거야.

도망가요. 그럴 수 있잖아요.

넌 암캐야. 좆물받이 암캐.

저 사랑합니다. 형님.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며, 정윤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경준은 그의 옆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고운 속눈썹이 감긴 눈꺼풀 밑으로 드리운다.

창밖은 어스름했다. 해가 뜨려면 시간이 남았다. 이제는 지나가는 차도 얼마 보이지 않는 도시를 내려다보다가, 정윤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식은땀이 흥건하다. 이를 악물었다가, 그는 지쳐서 무거워진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꿈속에서 속삭임을 들었던 귓가가 아직까지도 간질거린다.

안 돼.

벌을 받아도, 아무리 통증을 가해도 사라지질 않는다. 저릿하게 목을 조여오는 정체 모를 아픔이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무시하면 언젠가 사라질 거라고 외면하기에는 억누를 수가 없는 불편함이었다. 당장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정윤의 시선이 잠든 경준에게로 향했다. 당장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뜨려면 세 시간은 더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만. 보고 올까?’

이 답답함의 이유가 무엇이든, 원인은 진환에게 있었다. 그가 흘려보낸 달콤한 말들이 약물처럼, 독처럼 스며들어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그를 마주 보고 나면, 그래서 진환이 얼마나 그를 경멸하고 비웃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고 나면 더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차라리 진환의 시체를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전의 일식집에서 입에 좆을 물리려고 했던 남자가 죽은 것을 봤을 때처럼. 죽은 사람에게는 감정을 가지기 어려운 법이니까. 그러나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진환이 죽어도 이런 감정이 계속된다면? 숨 쉬기가 어렵다.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이 방법뿐이야.’

이윽고, 정윤은 마음을 굳혔다.

침대에서 다리가 내려온다. 발바닥이 조용하게 마룻바닥 위를 밟았다. 경준은 대체로 잠이 깊은 편이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깨우고 싶지 않았다. 별일도 아닌 거니까. 경준이가 신경 쓸 일도 아니니까. 이런 일로 피곤한 하루를 보냈을 그를 깨울 수는 없다.

침실 문이 열렸다가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닫혔다.

죽은 듯한 정적이 돌아오고 얼마나 되었을까, 경준의 굳게 감겨 있던 두 눈이 가늘게 벌어졌다.

***

이제는 눈꺼풀을 들 기운조차 없다. 수분이 부족해 눈 사이가 쩍쩍 들러붙어 눈알 굴리는 것도 어려운 것이었다. 김종식이 어제는 기어이 손가락 두 개를 밟아서 부러뜨렸다. 으스러진 마디에 피가 고여 퉁퉁 부어오른다. 아마 피멍이 든 것처럼 색깔도 거무죽죽하겠지. 더는 몸뚱이 어느 구석 하나, 제 몸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쇠문이 들썩였다.

“포클레인 그거, 다 고쳤냐?”

갈라진 목소리로 빈정거리며, 진환이 몸을 웅크렸다.

“씨발 놈들. 존나 질질 끄네. 데려가, 새끼들아. 데려가서 묻든, 쇳물에 던지든. 마음대로 하라고.”

“아직인데.”

아는 목소리다.

“더 걸려.”

숨통이 조여들었다. 피떡이 진 속눈썹을 벌려, 시뻘겋게 충혈된 눈알이 위로 굴렀다. 눈을 의심하듯,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헐떡이는 숨결에, 진환이 속삭였다.

“졍윤 형님.”

정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안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몇 발짝이 떨어진 곳에서, 그가 무릎에 손을 얹은 채로 웅크려 앉았다.

혈관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헛것이나 이상한 꿈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저런 무뚝뚝한 표정도, 멍청하게 흐리멍덩한 눈빛도 아니었을 거다. 초점이 뚜렷하지 않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진환을 응시하다가 옆으로 비껴갔다. 그제야 그가 손에 무언가를 든 것이 보였다. 칼이나 해머는 아니다.

“이거.”

정윤이 그것을 내밀었다. 일회용 종이컵이다. 백조처럼 하얗고 깃털처럼 가볍다. 둥글게 말린 가장자리는 어느 진주보다도 탐스럽다. 조명에 아찔하고 불투명한 그림자가 보였다. 물의 표면이 빛을 받아 찰랑거린다.

“마실래?”

대답을 듣기도 전, 진환이 그의 손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놀란 듯 손을 물린 정윤은 곧 서서히 입가에 종이컵을 대 기울였다.

말라비틀어진 혀끝에 생생한 물기가 닿는다. 당장 코를 박고 죽어도 달가울 듯한 전율이 일었다. 게걸스럽게 한 모금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온몸이 달콤하게 젖어들었다. 급하게 들이켜는 탓에 기도에 물이 들어가 기침이 났지만 목울대는 멈추질 않았다. 얼마나 갈증이 강렬했는지 물을 마신 후에야 알겠다. 지금 생수 두 통을 목구멍에 흘려 넣는다고 해도 이 열망이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에 비해, 종이컵 한 잔은 너무나 적었다.

컵에서 입이 떨어지자마자 억눌렀던 기침이 쏟아졌다. 다시 무한한 피로가 찾아왔다. 억지로 들었던 고개가 떨구어지고, 눈꺼풀이 스르르 감겼다.

잠깐의 공백 후에, 빈 종이컵이 바닥 위에 놓였다. 목소리는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목말랐구나.”

서서히, 진환이 눈을 감았다.

“기분 좋으십니까?”

가늘게 눈꺼풀이 들렸다. 기운 없는 근육이 씰룩거리며, 입꼬리 한쪽이 피식 들춰진다.

“저 이 꼴 된 거 보고서. 속이 시원하시냔 말입니다.”

“…….”

정윤이 그를 응시했다. 본래도 흐리멍덩한 눈이지만, 정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생기마저 모두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따금 깜박거릴 뿐인 눈이 진환을 향하면서도, 그 너머를 보는 듯이 초점이 없다.

왜 저런 표정을 짓지? 왜 저런 표정으로 날 보는 거지?

“잘 모르겠어.”

한참의 침묵 끝에, 정윤이 입을 열었다.

“그래야 해?”

그럴 기운이 있었다면,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맥이 빠진 듯이 얼굴의 긴장이 허물어졌다. 멍청하고 불쌍한 새끼. 자기가 뭘 미워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새끼. 길들여지고 내몰린 새끼. 개같은 새끼.

“도망쳐요.”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맹세코 아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이 벌어진 후였다. 목구멍 안쪽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진환은 애원하고 있었다.

“씨발 새끼야. 도망치라고. 제발…. 사람 뒤통수까지 쳐서 이렇게 만들었으면, 자기라도 뻔뻔하게 잘 살아야 할 거 아냐. 어? 평생 그렇게 살 거야? 평생 그렇게 살 거냐고.”

정윤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눈이 어디로 갈지 모르고 구르며 입술을 씹는다. 그는 정답을 모르는 아이가 칠판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더듬더듬 말을 읊어갔다.

“사랑…받는 중이야. 난.”

“제정신입니까?!”

진환이 목을 쳐들었다.

“사랑?! 그 새끼가 어딜 봐서 사랑하는 겁니까? 때리고, 약 넣고, 박아대기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게 뭐가 사랑입니까!”

“거짓말하고, 시체 묻게 만드는 거. 그건 사랑이야?”

“……!”

말문이 막혀, 진환은 시퍼렇게 뜬 눈으로 정윤을 응시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원망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불투명한 피로와, 약간의 호기심뿐이었다.

“말해. 나, 사랑했어?”

침묵 사이로 정윤의 손이 뺨 위에 감겼다. 느슨하고, 다정하고, 애무하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멍이 올라 퉁퉁 부어오른 피부가 깃털에 잠기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아찔하게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연이은 구타로 머리가 지끈거려, 손을 뻗은 그의 모습이 두 개로 나뉜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으십니까?”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다.

“저도 똑같은 쓰레기라고. 형님 이용한 나쁜 놈이라고. 그런 말이 듣고 싶으십니까?”

“…….”

“그러면, 편하게 나 죽는 거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러십니까?”

“…….”

“해드리겠습니다.”

목구멍 안쪽이 긁히는 것처럼, 기어이 마구잡이로 웃음이 나온다. 이마를 바닥에 비비며 광인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느슨한 이빨이 덜렁거리며 쇠 맛이 차올랐다. 끈적한 피가 떨어져 내렸다. 어떤 끈이 끊겨버린 것 같다. 제어가 되질 않았다.

“그래야 형님 마음이 편하시다는데, 그럼, 해드려야죠. 예, 저 죽일 놈입니다. 짭새한테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형님이랑, 박경준이랑 싸잡아서. 처음부터 그러려고 친한 척한 겁니다. 안 그러면 왜 내가, 미쳤다고 친한 척을 해? 좆이나 빨아주는 약쟁이 새끼한테. 형님이랑 있을 때 대화한 거, 전부 녹화 떠놨습니다. 들어보셨습니까? 형님이랑 박경준이 그 새끼랑 빠구리 뜨는 것도 있는데. 그것부터 찾아 버리셔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짭새 새끼들이 그 앙앙거리는 소리 다 돌려 들을 테니까! 이제 만족하십니까?”

진환이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양팔이 묶여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지만, 벌레 새끼처럼 허리를 뒤틀며 턱을 내민다.

“그럼 죽여. 그냥 씨발, 지금 죽여버리라고. 어? 사람 좆같이 만들지 말고! 죽여! 칼로 긋든가! 대가리를 깨버리든가! 당장!”

단말마 같은 마지막 고성과 함께 눈앞이 빙그르르 돌았다. 몸이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다. 아득하게 눈을 감겨오고, 내밀었던 머리는 힘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친다.

먹먹하게 잠겨오는 고막 너머로 누군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진다. 이제 정윤은 자리에 선 채로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물, 더 필요해?”

“꺼져.”

이기지 못하고, 진환이 으르렁거렸다.

“꺼져. 씨발 새끼야. 꺼지라고! 얼굴만 보고 있어도 구역질 나니까, 꺼져!”

목이 기어이 갈라진다. 피를 토할 것처럼 기침을 이어가는 진환을 응시하던 중, 정윤이 빈 종이컵을 들어 올렸다.

“…미안해.”

마지막으로, 정윤이 말했다.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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