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31)

#17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신호음 소리가 달칵, 끝난다. 긴장 끝에 돌아온 것은 기계 안내원의 정해진 메시지였다. 조사실 전체에 탄식이 흘렀다. 김 형사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한다.

“이제 아예 배터리 충전도 안 해놓는 모양입니다.”

강 반장은 스피커폰으로 돌려둔 휴대전화를 뒤집고 긴 한숨을 뱉었다. 숨결과 함께 턱이 젖혀지며 멍하니 천장이나 보게 된다. 쥐새끼가 돌아다니는지 지저분한 자국이 남았다.

“바람을 좀, 자주 맞힌다. 이 새끼가, 요즘.”

“겁먹고 뺀 거 아닙니까. 박경준이 그 새끼, 보통 놈 아니잖아요. 살벌한 꼴 좀 보고 쫄았을 수도 있죠.”

“살벌한 꼴이라….”

깍지 낀 손을 머리 밑에 대고, 강 반장이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겁먹고 내뺐다? 보통이라면 그럴 만하겠다고 납득을 하겠지만, 이진환의 케이스는 조금 다르다. 이번 잠입 작전을 실행하면서 파악한 이진환은 거머리처럼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놈이었다. 자기가 이미 파악한 위험이 두려워 내뺄 놈 같지는 않았다.

김 형사가 계속했다.

“그 새끼, 칼빵 맞았다고 연락한 다음부터 계속 이런 식 아닙니까. 뭐 찾아가지도 못하게 핸드폰 위치 추적 기능은 다 꺼놓질 않나. 이제는 전화도 국 끓여 먹고. 그 양아치 새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라니….”

“잠깐.”

강 반장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너 뭐라고 그랬어.”

“그 껄렁한 양아치 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요.”

“그거 말고. 맨 처음에.”

제 인내심을 시험하며 손을 저어댄다. 가만히 말을 듣던 최 형사가 구조에 나섰다.

“칼빵? 그거 말씀입니까?”

“그래, 그거! 그거, 아직 범인 못 잡았지.”

“예. 뭐, 근데, 뻔하지 않습니까. 박경준이가 나대는 기질이 있어서 꼭 칼부림이 나게 되어 있다고….”

“그건 그런데….”

강 반장이 탁자 위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뭔가 그, 존나게 찝찝하단 말이지.”

강 반장이 탁자 위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똥 덜 싸고 바지 올린 것맨치로. 씨발….”

“반장님!”

뚝, 손가락이 멈췄다. 조사실 문을 박차고 박 형사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뉴스 보셨습니까?!”

그 뒤에 닥칠 지독히 골치 아픈 일을 예견했는지, 강 반장은 벌써부터 지그시 눈을 감고선 염불을 외웠다.

***

- 서울중앙지검 김춘수 과장이 뇌물수수와 부정청탁 및 불법 해외 자산 투기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검찰청에서는 공정한 조사를 통해 적절한 징계를 내릴 계획이며, 김 검사의 모든 업무 수행 권한을 즉각….

VIP실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가죽 소파 위에 정윤을 밀쳤다. 순순히 그 위에 드러누워 양팔을 젖히자, 그렇지 않아도 들러붙어 죄여오는 셔츠 단추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들썩였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는 골이 잡힌 가슴이 은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떡대가 벌어진 사내 모습으로,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며 내밀고 있다니. 손을 대고 만져달라고, 탐하고 농락해달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벌어진 틈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헝겊을 움켜쥐고, 잡아당긴다.

“자, 잠깐, 옷….”

뒤늦게 거부하려는 듯한 말이 들렸지만, 이미 셔츠는 뜯어진 후였다. 정윤의 귓바퀴가 붉게 달아올랐다. 제대로 벗겨지지 않고 중간에서 뜯어져, 가슴만 헐벗은 듯이 도드라진 꼴이 된 것이다. 정윤에게는 부끄럽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지만, 진환에게는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단추가 뜯겨 나가 속절없이 벌어진 가슴골 사이로 진환의 손이 파고들었다.

“예쁘십니다. 형님.”

미묘한 곡선을 그리며 손바닥에 전부 들어오지도 않는 가슴 전체를 움켜쥐고 엄지가 은근하게 유두 옆을 근질거리고 문질렀다. 가슴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쥐고 모았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그 모양을 살피다, 코를 박고 가슴골의 살갗 위를 할짝댄다. 피부가 얇은 곳 위에 뜨겁고 물컹한 혀가 닿아 생물처럼 꿈틀거리고 움직이자 배 속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열이 올랐다.

턱 바로 아래에서 제 유두가 젖이라도 물리듯 빨리는 것을 계속 볼 수가 없어, 정윤은 시선을 돌렸다. 삽입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쾌감에 애가 닳아, 발정이 난 듯 앙앙 울어댈 것만 같았다. 입술을 물며 호흡을 가라앉히려 애쓰다, 결국 정윤은 제 손가락을 물었다.

진환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정윤의 몸통에 긴장이 들어간 것이 이상하게 여겨진 탓이었다. 손가락이 붓도록 깨문 채로, 덜덜 떨며 쾌감을 참고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정윤의 이마를 쓰다듬어 올리고, 그가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프셨습니까?”

“…소리. 나올 것, 같…아.”

“내면 되지 않습니까.”

“네가….”

눈꺼풀이 감기자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도드라진다.

“질릴지도, 모르니까.”

아무 대꾸도 들리지 않는다. 침묵에 묘한 불편함을 느껴 정윤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진환의 얼굴이 가깝다. 입꼬리는 떨리고 미간에는 잔뜩 주름이 진 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어쩐 일인지 물어보기도 전, 입술에 따뜻한 온기가 덮쳐왔다. 혀를 얽고 타액 채로 빨아올리는 감촉에 등골이 저릿해진다. 젖은 입술을 떼어 올리고, 진환이 가슴께에 머리를 문질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물으려고 했지만, 곧 제대로 생각하기가 어려워졌다. 장난을 치는 듯이 예민한 부분만 건드리는 경준의 애무와 다르게, 진환은 제 몸 구석구석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만지고 입 맞추는 데 열중이었다. 배의 골이며 허리까지 몸통의 휘어진 부분 곳곳을 콧등으로 문지른다. 이내는 다리를 벌리게 만들고 허벅지 안쪽에 뺨을 비비며, 한참이나 속옷 아래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는 그곳의 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익숙하지 않다. 머리가 멍하니 떠오르는, 약에 취했을 때 같은 감각이 온몸을 점령했다.

“그만, 봐.”

“형님. 기분 좋으십니까?”

“그런 건, 왜….”

부끄러워. 평소에 느끼던 모멸감과는 달랐다. 가슴속이 간지럽고 온몸이 부풀어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다. 진환의 손이 속옷 위, 젖어 들기 시작하는 귀두를 부드럽게 감쌌다.

“금방 젖으시네요.”

“그냥…. 그냥. 어서. 필요 없, 으니까. 이런 거….”

“싫습니다.”

거친 편인 속옷의 헝겊이 손짓과 함께 예민한 귀두 부분에 엉키며 마찰해 온다. 참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이 허사로 돌아가, 우는 듯한 비음이 막을 수도 없게 흘러나왔다. 단숨에, 진환의 손이 속옷을 벗겨냈다. 덜렁거리며 성기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고무줄 부분이 좆대에 마찰하는 감각에 곤두선 신경이 반응했다. 엄지손가락이 회음부를 꾹 누르며 둔부의 살집을 은근하게 헤집어 벌렸다. 시큰거리는 감촉이 어리며, 저도 모르게 구멍이 벌름거렸다. 부끄러움에, 정윤은 다시금 질끈 눈을 감았다.

“여기에서. 경준 형님이랑 자주 하셨죠?”

열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항상 이런 형님 모습을 본 겁니까?”

애널의 주름 안쪽으로 손가락이 파고들어 간다. 차가운 젤 안에 뜨거운 열이 섞여들어 이상한 감각에 젖어든다. 내벽을 꼼질거리며 자극하다가, 배려하듯 파고들어 깊은 곳을 은근하게 짓누른다. 나른한 쾌락에 익숙하지 않아 어지러운 머릿속과는 반대로, 구멍은 기뻐하며 더 커다란 것을 넣어 달라고 뻐끔거린다. 꿈틀거리고 안에서부터 빨아들이는 음란한 모양새에 진환의 눈가가 건조하게 가늘어졌다.

“샘납니다.”

이윽고, 귀두가 장벽을 마찰하며 단숨에 깊은 곳 내벽까지 차고 올라왔다.

비명도 나오질 않는다. 붙잡을 곳도 없이 허공에서 팔이 버둥거렸다. 한계까지 벌려져 젖혀진 오금에 전류가 흐르듯이 시큰거린다. 숨이 틀어막혀 온몸이 바르르 떨린다. 생리적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젖어든 뺨 위로, 여지없이 진환이 입술을 문질렀다. 다정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지만, 한껏 치켜올린 허리는 어느덧 다시 들썩이며 안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금세 숨이 달아 정윤이 머리를 흔들어댔다. 목울대 아래로 우는 소리가 울렸다.

“안 돼, 안 돼. 그렇게, 돌리면, 안….”

“좋으십니까?”

“이상해. 이, 이상해. 이거….”

늪 같은 쾌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정윤이 자리에서 기며 앞으로 피하려 애썼다. 그러자 진환의 손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작은 동물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그 손길에 반사적으로 정윤이 숨을 들이마셨을 때, 좆대가 예고 없이 뿌리까지 치고 들어온다. 턱 끝까지 박히는 듯 숨이 막히며 머리가 징 하고 울려왔다. 벌어진 턱 아래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팔의 힘이 무너져내려, 둔부를 강조하는 것처럼 허리가 빠진 채로 몸통이 주저앉았다. 그 허리를 감싸 안은 채, 진환이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흐히익… 힉….”

“형님 안쪽, 너무 기분 좋습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정윤을 아래에 누른 채, 좆 끝이 집요하게 안으로 파고든다. 이미 정수리가 뚫릴 것처럼 깊은데, 만족하질 못하고 안쪽으로 안쪽으로 헤집고 들어간다.

“안 돼, 흐…! 더어는, 안 들어가아….”

“하지만. 더 닿고 싶습니다.”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목소리가 열에 심취한 채 귓가에 속닥거렸다. 이미 후들거려 제 구실을 못 하는 허벅지 안쪽으로 부드러운 손길이 파고들어 갔다. 무릎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파고들어 가, 팔꿈치에 단단히 걸친다. 그리고 팔뚝을 잡아당긴다.

“잠깐. 뭘…!”

힘이 들어가지 않는 넓적다리가 세워지며 덜렁거리는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골반이 당겨지며, 더는 누를 곳도 없을 것 같던 좆 끝이 닿아서는 안 되는 생경한 곳을 짓눌렀다.

“……!”

머리가 하얗게 질린다. 장 끝이 뭉개지며 두개골까지 저릿하게 전류가 흘러 올랐다. 목구멍까지 좆이 치고 올라온 것처럼 숨이 틀어 막혔다. 껄떡거리던 성기에서 쪼르르 맑은 액체가 흘러내린다. 다리를 들춘 자세 탓에, 오줌을 싸는 개 같은 꼴이 따로 없었다.

“이상, 힛, 해… 이거, 망가져어… 안에… 자지가, 가득, 가득….”

팔이 무너지고, 속절없이 좆대에 꿰뚫린다. 코가 막혀 맹맹한 목소리를 울리며, 정윤은 그나마 움직이는 허리를 흔들었다. 도가 지나친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어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이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장을 비집고 들어간 좆 끝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비비적거리며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쾌감을 억지로 안겨주었다. 찌꺽이며 안쪽을 문지를 때마다, 이미 한 번 지린 성기에서 투명한 액이 똑똑 떨어졌다.

“예쁩니다. 형님.”

“더러어… 더러워…져… 그만…. 힉…! 흐힉…!”

“저만 볼 겁니다. 형님 웃는 거, 싸는 거, 울고 자지러지는 거. 다 저만 볼 겁니다. 저만 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제발….”

어지러운 열락 속에서, 정윤은 고개를 틀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시야가 일그러져, 진환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윤은 그저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입술이 맞닿고, 내장을 짓눌러 대는 좆대에 비하면 차라리 서늘하게 느껴지는 혀가 입천장을 애무한다. 열에 절은 채, 정윤은 귓가에 들려오는 조그마한 흐느낌을 들었다.

사랑합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

창가에 서, 경준은 시계를 확인했다. 늦어진다. 계산한 시간보다도. 그렇다면 지금쯤인가? 슬슬 시작하면 되겠네.

따분한 표정을 지은 채, 그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연락처를 뒤적이던 손이 어느 인물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통화 연결음 끝에, 경준이 입을 열었다.

“네. 차 부장님.”

***

술이 다 스며들지 않아 뒤늦게 메스꺼움이 몰려온다. 술집마다 흘러나오는 대중가요, 건물 사이사이의 모세혈관 같은 길을 달리는 말벌 같은 오토바이 엔진 소리, 긴 밤을 지새우는 취객의 말소리가 차창밖에 쟁쟁한 가운데 진환과 정윤 사이의 침묵이 대조되어 도드라졌다.

“…옷.”

멍하니 소파에 누워 있던 중, 정윤이 중얼거렸다.

“어떡해?”

진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제가 한 짓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가 다섯 개 이상 뜯어져, 도무지 입을 수가 없었다.

“그….”

“옷은 안 된다고, 했는데.”

샐쭉하게 정윤이 입술을 내민다.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이 붉어졌다. 이윽고, 진환이 맥없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옷이라도 입혀주고 싶지만, 저보다 월등하게 덩치가 큰 정윤에게는 맞을 리가 없었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흥분해서 옷을 찢어버리다니 대체 뭐 하는 짓인지. 민망함이 점점 더 몰려온다. 진환이 두 손바닥을 벌려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정윤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괜찮아.”

그가 귓가에 입을 맞춘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미소 짓고 있었다. 온화하게. 기적처럼.

“기분 좋았어.”

날아가버릴 것처럼 포근한 환희가 진환을 감쌌다. 다시금 그의 뺨을 감싸 입술을 틀어막는다. 놀란 것처럼 뻣뻣하게 반응하던 정윤도 곧 느슨하게 긴장을 푼다.

키스만 하는 건데도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입술 안쪽의 매끈하고 부드러운 점막이, 말랑한 살덩이가 엉키는 감미롭고 간지러운 감각이 두개골 안쪽까지 저릿하게 만든다. 들러붙어 떨어지고 싶지 않은 감촉이다. 정윤의 뒷머리를 쓸어 만지던 손이 가슴팍으로 향하려던 때, 그가 제 손목을 쥐었다.

“안 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로저으며, 손목을 붙잡은 그대로 소매를 밀어 올렸다. 진환이 세 달 전에 차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명품 시계가 해가 뜰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사이를 못 참고 꼿꼿하게 선 아래를 애써 무시하며, 진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은 셔츠를 대신할 물건으로 직원용 유니폼을 가져왔다. 가장 사이즈가 큰 셔츠를 가져왔는데도 가슴이며 어깨 부분이 터질 듯 끼이는 것이 신경 쓰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셔츠의 단추를 채워주고 가슴팍을 털고 있으니 신혼부부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진환의 입가에 간질간질한 웃음이 띄워졌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진환이 고개를 들었다. 조르는 강아지 같은 초롱초롱한 눈빛이 정윤을 향했다.

“…곤란하십니까?”

어느새, 정윤은 무릎을 모으고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주말 새벽, 도로는 아직 선선한 편이었다. 운전 중의 진환은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을 숙고하는 것 같았다. 후회하는 걸까? 불안한 생각이 밀려든다. 애써 둑을 쌓아 막아둔 현실이 목 끝까지 잠기도록 쏟아져 내렸다.

무릎 위에 주먹을 얹고, 정윤은 차분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대로는 안 돼.”

조용히, 정윤이 입을 열었다.

“경준이가 알아낼 거야. 언젠간.”

“…….”

“잘못하면 네가 다쳐. 그건 안 돼.”

“…….”

“그러니까….”

묘한 위화감이 와닿았다. 정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창밖의 풍경이 낯설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이 아니었다. 차가 갓길에 접어든다. 비상등을 켜고, 진환이 아직도 어리둥절한 정윤의 손을 붙잡았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형님.”

진환이 입을 열었다.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저를 마주 보면서.

귀퉁이에서 꺾어진 차가 건물 근처로 접어든다. 정윤은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환이 그 말을 꺼낸 이후로, 그는 신발코에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응.”

“형님.”

느릿하게, 정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진환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진심입니다.”

대답 없이, 정윤은 차 문을 닫았다. 새로 받은 셔츠가 유난히 답답하다.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가뜩이나 굽은 어깨를 더더욱 굽히며 걸음을 딛는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다음에는 최대한 구석에 등을 기댄다. 온몸의 혈관으로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배, 잡아 놨습니다.’

진환이 그렇게 말했다. 제 손을 붙잡고, 곧게 눈을 마주 보며. 막 떠오르려는 새벽 해를 받아, 색이 옅은 갈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난다.

‘물론 박경준 그 자식이 따라붙겠지만, 따돌릴 자신 있습니다. 먼저 상해 쪽에 있다가 그다음에 바로 동남아로 가죠. 필리핀 쪽, 알아보겠습니다.’

정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진환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눈을 마주해 주었다.

‘같이 갑시다. 형님.’

‘…….’

‘잘될 겁니다, 형님. 계획대로만 하면. 저희 둘만 있는 겁니다. 이 좆같은 나라 버리고. 좆같은 박경준 버리고. 형님이랑 저만. 둘만 사는 겁니다. 행복해지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잘될 리가 없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진환이 그의 뺨을 만지고 입 맞추자 그런 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한 감촉에 이성이 마비된다. 목숨도 맡길 수 있을 것만 같다.

‘믿어주세요. 저를.’

단추를 움켜잡은 채로 눈을 감는다. 처음으로 상상이 들었다. 숨 막히지 않는 곳. 파도와 고요함만이 있는 곳.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벨 소리와 함께 상상 속의 물방울이 톡하고 터진다. 눈꺼풀을 들었을 때, 정윤은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현관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정윤의 어깨가 조그맣게 움츠러들었다. 경준은 뜻밖에도 깨어 있었다. 그것도 거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이른 새벽이었으니 아직은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을 하는 중이었는지, 그의 손에는 조금 낡은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오래 걸렸네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경준이 말을 꺼냈다. 정윤은 동요하지 않기 위해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응.”

“손님들은, 언짢아하지 않았어요?”

“잘 해결했어. 돈도 받았어.”

“옷은 왜 그래요?”

서류철이 가지런히 닫힌다. 경준의 차분한 시선이 어느새 올려져 정윤에게로 와 꽂혔다. 그를 따라 정윤도 제 차림새를 돌아보았다. 다시 보아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꼭 끼는 직원용 유니폼. 지난밤에 입고 나간 새하얗고 매끄러운 셔츠와는 한눈에 보기에도 다르다.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다. 남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정윤은 가까스로 머리를 짜냈다.

“…더러워…졌어.”

“난동이 심했나봐요.”

화를 내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정윤은 가만히 눈을 감고, 속으로 누구인지도 모를 존재에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우아하게 서명을 마치고,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아입어요. 저녁에 나가봐야 하니까.”

“약속 있어?”

“네.”

경준의 손가락이 턱 아래를 근질거린다. 그의 입가에 호선이 걸렸다.

“전해줘야 할 게, 생겨서.”

***

대나무 골을 따라 물이 흐르는 소리에 병목을 타고 흐르는 정종 소리가 아름답게 겹쳐진다. 잔 끝까지 차올라 볼록하게 너울거리는 표면을 응시한다. 따분하기 짝이 없는 독실에 짜증 나기 짝이 없는 얼굴이 거꾸로 비추어 일렁인다.

“내가 박 회장만 믿으면 될 줄 알았지, 그래.”

차 부장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김 검사 그 새끼, 해 처먹어도 너무 해 처먹었어. 비자금이 헤아려 보니까 뭐, 사십 억은 되더만. 내가 그 새끼 머리 꼿꼿하게 세우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어. 알아봤다고.”

“네. 그럼요.”

“박 회장도 이제, 한시름 놔. 검찰총장 바뀌면 강남 앞바닥 싹 갈아엎는 거 알지? 우리 회장님께서 다 알아서 준비해 놓으실 거라고. 어?”

코웃음을 흘리며, 경준이 술잔을 기울였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차 부장이었지만, 오늘은 누구 기분을 맞춰주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쭉쭉 들이켜라는 듯이 손짓까지 하고서 그가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경준은 사양하지 않았다.

얼큰하게 취해 벌게진 얼굴이 된 차 부장은 사업 얘기에서 배은망덕한 자식 얘기로, 이내는 제 지저분한 사생활 얘기를 꺼내 들며 떠들었다. 넙치 같은 얼굴로 가자미회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경준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을 즈음,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담배 한 대 태우고 오지. 그래, 같이 가?”

“전 괜찮아요.”

폐차장의 소음이 그립다.

***

지루해.

셔츠 깃을 잡아당긴다. 벚꽃이 막 피어오르려는 무렵, 찬 공기가 한결 가라앉아 선선하다. 검은 밤하늘을 뒤로 몽글몽글하게 맺혀 오른 꽃망울들이 정자 옆을 장식한다. 마루에 구부정하게 걸터앉아, 정윤은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방이면 된다던 경준은 도무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경준이 나온 다음에도 좋은 일이 생기진 않을 터였지만, 그래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보단 나았다. 가슴이 답답하다. 무심결에 말랑하게 들어가는 제 가슴팍을 꾹꾹 누르다, 정윤이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혈, 이랬더라.’

둔한 손짓이 엄지와 손바닥 사이, 그 어딘가의 지점을 찾아 더듬거린다. 뚜렷이 생각은 나지 않지만 그때 스쳐 지나간 따뜻한 흔적만큼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저릿하고, 간지럽고, 이상할 만큼 말랑말랑했던.

도망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경준이 얼마나 집요한지, 정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도 좋았다. 죽는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그런 마음이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볼 줄 몰랐던 마음이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 나왔다. 시선을 던진 정윤은 곧 사색이 되고 말았다.

얼굴이 불그스레해져 등장한 사내는 그가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퉁퉁한 입술에, 괴물같이 굵은 손.

손님이다. 전에 왔던.

보지 마. 보지 마. 보지 마….

재빠르게 고개를 숙인다. 그때의 악몽 같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구역질 나게 고깃덩어리처럼, 성욕 처리를 위한 장난감처럼 취급받았던 기억. 거친 손찌검과 가슴을 쿡쿡 찌르던 모욕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주위가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보지 마. 날 보지 마. 제발, 그냥 지나가. 제발….

정윤의 바람은 어긋나고 말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불쾌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손끝이 매섭게 떨렸다. 등골에 오싹하게 한기가 내려앉는다. 입술을 깨물고 애써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을 하려 했지만, 사내는 징그러울 만큼이나 끈질겼다. 그가 역겨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우악스러운 손이 턱을 잡아선 억지로 들어 올렸다.

“우리 개새끼도 왔네.”

찢어진 것 같은 두 눈이 벌겋게 휘어졌다. 음탕한 시선이 몸통을 훑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윤은 얼어붙은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으랬어.’

경준의 명령은 아직도 유효하다.

물건을 보듯 이리저리 정윤을 훑던 사내는 곧 턱을 놓아주었다. 뺨을 두드리며 그가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셨다.

“이거, 이거. 생긴 게 이래서 그렇지. 참… 잘 쓸 수 있을 텐데, 참.”

정윤이 반응하지 않자 모종의 허락으로 받아들인 모양인지, 사내의 얼굴에 불쾌한 미소가 짙어졌다. 아니면 허락 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끈적한 두 손이 아예 흉부 아래부터 감싸, 몸통 전체를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더러운 욕정을 숨기지 못한 손길에 벌레가 기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이야. 이거, 실크 아냐? 개새끼한테 분수에 안 맞게 좋은 옷을 입혔어, 박경준이.”

가슴 주변을 둥글게 문지르며 엄지가 톡톡 유두를 건드린다. 동시에 피어싱이 밀려, 예리한 자극이 등골을 관통했다. 정윤의 표정을 눈치챈 그가 유두 주위를 자비 없이 문질렀다.

“허, 이건 뭐야. 요즘은 애완견한테 이런 장난감도 쓰나?”

빙글빙글 유륜 주변을 돌다가 보란 듯이 손톱으로 유두를 건드린다. 가슴 주변은 대장에게 막 조련당할 무렵부터도 이상할 정도로 감도가 좋았던 곳이었다. 거기에 피어싱까지 건드리자 느껴지는 신경을 씹는 듯한 감각에 힘이 빠지며 허리가 말렸다.

온몸에 힘을 주며 손길을 견뎌내는 그 몸집에 오히려 흥분했는지, 차 부장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다. 손바닥에 손톱을 박고 몸에 힘을 주며 정신을 되찾으려 한다. 눈을 감으면 신경이 더욱 예민해질 것만 같아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 눈을 그대로 둔다. 그러나 몸은 착실하게 반응한다.

“돌아가면 어디, 박 회장한테 말 한번 해봐야겠어. 얼마인지 모르겠네. 한 일이억 주면 되나, 이거?”

예고 없이, 사내가 양쪽 유두를 꼬집어 비틀었다. 하마터면 꼴사나운 교성을 지를 뻔했다. 입을 악문 채로 파르르 몸을 떨고 있자, 역겨운 숨결이 뺨 위에 불어닥쳤다.

“어떻게, 새 주인 한번 받아볼 테야?”

가슴에서 손이 떨어진다. 안도할 틈도 없이 아래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벨트를 풀고 지퍼를 끌어 내리고 있었다.

경준의 명령도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에서 흐릿해진다.

“하, 하지 말….”

말이 끝마치기도 전에 사내가 따귀를 내리쳤다. 아프기보다도 당혹스러워 정신이 멍해진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뿌리째 움켜쥔다. 이내 무릎을 들어 명치를 가격한다. 기침을 내뱉으며 정윤이 내려앉자, 사내가 마저 벨트를 풀어 헤쳤다.

“개새끼가, 어디 사람 말을 해?”

정윤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본래 음식 나르는 종업원 외에는 드나들지 못하게 되어 있는 독채였다. 당당한 사내의 행동거지를 보니, 설령 누군가 본다고 해도 도와줄 것 같진 않다.

“오늘은 씨까지 잘 삼켜보라고. 그럼 내가 너 사는 거,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지.”

백태가 낀 혀가 징그럽게 아랫입술을 핥는다. 퉁퉁한 손가락이 구불거리는 털 속에서 성기를 끄집어낸다.

그만해.

이를 악물고, 정윤이 눈을 감았다.

제발, 누구라도 내 말을 들어!

멀찍이서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할 만큼의 고요함이 뒤를 잇는다. 정윤의 감겼던 눈꺼풀이 가늘게 벌어진다.

사내는 고추를 붙잡은 추태 그대로 경직해 있었다. 턱 아래로 붉은 선이 그어지고, 이내는 물감이 넘친 붓 자국처럼 핏물이 흘러내렸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어색하게 두 팔을 들어, 사내가 제 목을 만졌다. 손에 선명하게 묻은 핏자국을 본 후에야 그는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절규였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그의 무릎을 걷어찬다.

쓰러진 남자의 뒤로, 칼을 든 경준이 보였다.

“조용히 해야죠. 영업장인데.”

사내가 고꾸라져 숨을 헐떡거렸다. 나이프 자루를 고쳐 잡으며, 경준이 그의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뭐, 말씀하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너, 너, 이 새끼….”

흘러넘친 피가 마루 위로 웅덩이를 만든다. 그 위에 드러누운 채, 붕어처럼 뻐끔거리며, 사내가 쉰 소리로 씩씩거렸다.

“네, 네가, 네가 이러고도….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글쎄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경준이 대꾸했다.

“그게 중요한가?”

칼날이 다시 목으로 향한다. 숨골이 정확하게 끊어졌는지, 사내는 모로 고개를 비튼 채 더는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사내의 재킷 위에 피가 떨어지는 나이프를 대강 문질러 닦고선,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한 번 빌려줬다고 기어오르네요.”

정윤은 조용하게 숨을 골랐다. 식지 않은 시체는 움직이지 않을 뿐, 아직도 산 것만 같았다. 시퍼렇게 뜬 두 눈이 경악에 어려 있다. 천천히, 정윤은 고개를 틀었다.

“가요, 정윤 씨. 이제 볼 일도 없는데.”

시체를 뒤로하고, 경준이 벚나무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할 얘기가 있어요.”

***

경준은 모든 걸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집에 돌아온 그는 누군가에게 요정으로 가 시체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셔츠 커브의 단추를 풀어 걷어 올리고, 침대 위에 느슨하게 걸쳐 선다. 제 앞에 가까이 다가선 아름다운 얼굴을, 정윤은 가만하게 응시했다. 반듯하게 뒤로 올린 앞머리가 아까의 몸싸움으로 흐트러져 이마를 가지런하게 덮었다. 그 아래로 고운 눈매가 휘어졌다.

“아까 그 사람….”

정윤이 입을 열었다.

“위험할 수도 있어. 위험해.”

“전혀요. 옥상에서 떨어트리고 유서 좀 숨겨두면 아무도 신경 안 써요. 한두 번 한 것도 아니면서.”

“나… 때문이야?”

경준이 날 선 웃음을 흘렸다.

“아뇨. 최 회장님 부탁이에요. 왜, 우리 사업 도와주시는 건설사 있잖아요. 저 새끼가 선을 좀 넘는다고 그러셔서.”

경준의 낌새가 이상했다. 은근한 미소는 가시고, 얼굴 전면에 그늘이 가라앉았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만족스러울 때와도 거리가 멀다.

서성이며 눈치만 보던 정윤을 향해,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정윤 씨. 선물 받을래요?”

정윤이 눈을 깜빡였다.

“선물?”

“네. 주운 건데.”

경준이 주머니를 뒤적인다.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물건이 이쪽을 향해 던져졌다. 쭈뼛거리며 손을 뻗자, 그 자그마한 은색 물체가 안쪽에 차분히 안착한다. 집게손가락으로 쥐어, 정윤은 차가운 감각이 어린 그 물체를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동그랗고 구멍이 났다. 반지였다. 음각이 패이고 두꺼운 반지. 낯이 익은 물건.

박성수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다.

동그랗게 뚫린 구멍에서부터, 정윤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린다. 경준은 웃고 있었다.

“…경준아.”

“배 타고 나갔다던 성수 형이, 폐차장에서 뭘 하고 있었으려나.”

“얼마나, 언, 언제….”

“한 달 정도 됐나. 좀 오래됐어요.”

“왜, 말 안 했어…?”

“뻔하니까.”

경준이 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스산한 한기가 더해진다. 몇 년에 걸쳐 학습된 두려움에 다리가 얼어붙었다. 뒷걸음질을 치려고 하지만 곧 걸음이 엉켜 휘청인다. 다정하게, 경준이 뒷머리를 감싸 잡았다. 이마가 맞붙는다.

“이진환 걔가 살려달랬죠? 어쩔 수 없었다고 빌면서 말이에요. 죽이기 싫었다고, 별소리를 다 했을 거예요.”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

명치에 무릎이 찍힌다. 숨이 턱하고 막히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아픈 가족을 부축하는 것처럼, 경준의 팔뚝이 그를 지탱해 붙잡았다. 쉬이, 달래는 목소리를 속삭이며 경준이 뺨을 쓰다듬었다.

“정윤 씨는 그게 문제예요. 사과를 너무 많이 하는 거.”

배가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기침이 멎지를 않는다. 들썩이는 등 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이젠 아무것도 못 느끼겠거든.”

“경준아. 정말 미안….”

주먹이 뺨을 내리쳤다. 머리카락이 뽑혀 나갈 듯 움켜잡혀, 침대 위에 내동댕이쳐진다. 가감 없는 발길질이 성기를 짓밟았다. 통증과 함께 교성이 새어 나왔다.

“줄줄 싸봐요. 평소처럼. 같잖은 사과보다 그게 나으니까.”

“흐… 그… 흐윽… 만, 터… 아흐… 터지….”

낑낑거리는 개 같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지만, 낭심을 압박하는 힘은 더 바짝 조여들 뿐이었다. 손이 오므라들며 시트를 움켜잡는다. 뇌리까지 미치도록 차오르는 감각을 억누르느라 얼굴에 피가 몰린다.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귀두가 젖어들어 갔다.

경준이 발을 떼어내자, 지옥 같은 압박감이 사라졌다. 팽팽하게 들이마셨던 숨이 턱하고 풀린다. 팔뚝으로 눈가를 가리고, 눈물이 고이려는 것을 막는다. 꼴사납게 떨기나 할 때가 아니었다. 진환이 위험하다. 그는 벌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진환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상상만 해도 싫었다.

경준의 다리를 붙잡는다. 개처럼 엎드려 헐떡거리며 애원한다. 손을 끌어 제 얼굴에 비비며, 손바닥 안에 입술을 문질렀다.

“나, 나야. 내가 잘못했어. 벌, 나한테 줘. 진환이는 잘못 없어. 어쩔 수가 없었대. 경준아….”

“불쌍해라.”

“착한, 애야. 진환이. 착해. 죽이지 마. 아프게 하지도 마. 제발….”

“이진환, 프락치예요.”

정윤의 애원이 칼로 벤 듯이 멈췄다. 나른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경준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김 검사가 비밀리에 진행하던 사건 파일을 봤어요. 강 반장님이 빽도 없이 나대셨을 리는 없다, 했더니, 설마 그 믿는 구석이 김 검사일 줄이야.”

L건설사 투자 사건으로 앙금이 깊게 남은 김 검사는 그 건설사의 수족이 되는 김 회장을 전부터 좋게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진 건 배짱밖에 없는 짭새 새끼를 데리고 일을 칠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진짜 수확은 따로 있었다.

“김 검사가 담당한 사건 중에 ○○동 묻지 마 칼부림 사건이 포함되어 있어요. 알죠? 진환 씨네 좀 모자란 형. 강 반장님이 이걸 가지고 재밌는 일을 꾸몄더라고요.”

“…아냐.”

“이진환이 태국 일 안 물어보던가요? 상해 놈들 얘기는요?”

“아냐….”

“멍청하고 귀여운 우리 정윤 씨는, 그걸 꼬박꼬박 대답해줬고?”

“아냐. 아냐. 아냐….”

“걔가 뭐랬어요? 정윤 씨 행복해질 수 있댔어요? 아니면 사랑한대요?”

“…….”

“그걸, 정윤 씨는 믿었어요?”

정윤이 그를 내리쳤다. 고개가 휘어지고, 돌아온다. 경준이 미소 지었다.

“저한테 화풀이하게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해.”

“그거야말로 거짓말일 텐데.”

두 손이 경준의 목을 감았다. 숨통이 조여오는 중에도 경준은 파르르 입꼬리를 들어 보였다.

“저, 죽이게요?”

“거짓말이라고 해.”

“죽여봐요.”

웃음을 머금은 채, 경준이 눈을 감는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절규가 울려 퍼졌다. 정윤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

한밤중, 짐 들어올 일도 없는 항구는 잔잔하기만 하다. 바닷바람에 태우던 담배를 던진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재가 사그라들며 꽁초가 살랑살랑 가라앉았다. 진환은 휴대폰을 꺼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었다.

형수님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실망감은 들지 않는다. 검게 출렁거리는 밤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자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하라는 안내음이 이어졌다.

“예, 형수님. 접니다. 인사를 드리고 가면 좋았는데…. 그 좀, 멀리 갈 것 같아서 전화드립니다.”

동준이는 한번 보고 가면 좋았을 텐데.

새끼, 삼촌 얼굴도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몰라.

“형수님 앞으로 돈 좀 보내놨습니다. 동준이 학원비랑, 그, 필요한 데 보태 쓰세요. 옷도 한 벌 사 입으시고….”

머리를 긁적거린다. 폼이라도 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민망하다. 마지막 인사라는 건.

“…행복하셔야 합니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바라본다.

거기엔 모든 게 들어 있었다. 박성수 밑에서 일하게 되면서 수집한 증거들. 클럽 음지에서 이루어지는 마약 밀매 현황, 불법 도박장 운영 기록, 자금 세탁 정황까지. 물론, 이런 건 지금의 박경준이 털끝도 못 건드릴 증거들이지만, 정말로 쓸 만한 한 방도 들어 있었다.

정윤의 녹음 파일 같은.

‘이걸 보내면.’

박경준이 그 자식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다. 대한민국을 더 정의롭게 만들 수도 있을 거고. 강 반장이 얼마나 믿음직한 짭새 새끼인지에 따라서는 형이 풀려날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전송 버튼에 얹힌 엄지는 쉬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직은 정윤이 오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계속 정윤이 오지 않는다면, 그가 덮어쓸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건 원하지 않았다. 정윤이 안전했으면 했다. 설령 자신과 함께 있지 않더라도.

씨발, 갈 데까지 갔구나. 이진환.

쓴웃음이 나왔다.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괜찮았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모든 걸 괜찮게 만들었다.

***

바닷바람이 얼굴의 정면으로 불어닥쳤다. 몸이 욱신거린다. 손마디에는 방금 전 조였던 동맥의 팔딱거리는 맥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평소보다도 역하게 머리가 아팠다.

지윤은 방파제 옆, 길을 따라 낮게 이어진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정윤은 걸음을 멈춰, 조금도 닮지 않은 쌍둥이 누나를 응시했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부드럽게 나부꼈다.

“이런 곳이었어.”

지윤이 말했다.

“기억나? 배에 탔던 날.”

“추웠어.”

“우린 배가 고파서 울었는데. 아버지란 사람은 손에 돈다발을 들고 갔지.”

“상관 안 해.”

“너도 참. 애가 멍청해. 예나, 지금이나.”

정윤이 걸음을 떼자, 지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누나가 이렇게 끈질긴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개자식이었지. 그 선장. 우는 애를 데리고….”

“미안해. 내가 더 잘 싸웠어야 했는데.”

“됐어. 고작 열 살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냐. 너도, 나도. 어리고, 힘도 없었지.”

바람에 귓가가 울린다. 떨어져 나갈 듯이 양 볼이 아리다.

“날 사랑한다고 했어.”

“어떻게 할 거야? 어디로 갈 건데?”

“모르겠어.”

그녀가 딱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넌 알아.”

가무러질 듯 졸음이 몰려왔다. 그러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

약속 시간이 지났다.

곧 배가 뜰 시간이다. 진환은 피우다 만 꽁초를 바닥에 던져 밟았다. 여전히 정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안 오려는 건가?

심장에 무거운 추가 내려앉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던 순간이었다. 등 뒤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을 질질 끄는 듯한, 익숙한 소리다. 뒤를 돌아본 진환의 얼굴에 서서히 순진한 웃음이 번졌다.

“형님!”

단번에 정윤의 앞으로 달음박질친다. 정윤이 나를 선택했다. 박경준을 버리고, 끝내 나를 골랐다. 그 사실에 가슴이 요동쳤다. 두 팔을 벌려, 진환이 그를 끌어안았다.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않고 입을 맞췄다.

“걱정했습니다. 안 오시는 줄 알고.”

“그래?”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거기 가면, 제가 책임지고, 형님 행복하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안겨든 정윤의 몸통이 평소에 비해 싸늘하다. 어두운 탓에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정윤의 행색 역시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도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입술은 터져 있다. 옷깃은 이리저리 정돈이 되지 않았다. 짐이라고 할 것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맨발이었다.

“…형님. 괜찮으신 겁니까?”

떨어져서 그를 살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윤의 두 손이 단단히 팔을 붙든 탓이었다. 기쁨으로 요동쳤던 가슴은 빠르게 식어, 다른 이유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쭈뼛거리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진환이 몸을 비틀었다.

“형님. 형님…. 놓아주시죠. 저희 이동해야 합니다.”

“응.”

“정윤 형님. 잠깐, 왜 이러십니까. 형님!”

갑자기 눈이 부시다. 자동차 전조등이 눈앞에 들어섰다. 눈살을 찌푸리자 검은 그림자가 차 문을 열고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박경준이 따까리들이다.

“형님! 놔주세요. 도망가야 합니다. 형님!”

드디어 목소리가 닿은 듯, 정윤이 움직였다. 그러나 진환이 바란 것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목등뼈를 움켜쥔 채, 그가 검은 승용차를 향해 진환을 끌었다. 검은 봉투를 든 사내가 진환의 머리 위로 팔을 들었다. 어째서냐고 묻고 싶은 듯, 진환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있잖아.”

정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도 나 사랑해?”

***

목에 자국이 남았다.

턱을 들어 손자국을 따라 붉게 든 멍을 살피다가, 경준은 그 흔적을 따라 쓸어내린다. 격정적인 정사를 한 후에 남는 것 같은 자국이다.

싫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얹혔다.

***

시야가 어두워졌다. 얼굴에 봉투가 씌워진 것이었다. 곧 뒤로 묶인 손에 테이프가 감겼다. 발버둥을 칠 때마다, 정윤의 억센 손이 어깨를 붙들었다.

“가만히 있어. 안 그러면 때려야 해.”

“왜 이러십니까. 형님… 제발….”

겁에 질려, 진환의 목소리는 이제 울음기에 젖었다. 정윤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봉투 위로 그가 이마를 댄 것은 느껴진다.

“걱정하지 마.”

정윤이 속삭였다.

“당장은 안 죽여.”

온기가 떨어진다. 지금껏 머리를 쓰다듬고, 기꺼이 입맞춤을 맞아주던 굳은살투성이 손이 진환의 어깨를 밀쳤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진환은 붙들린 채 승용차에 밀려 들어갔다.

무언가 끊어진다. 머리가 하얘진 채 턱이 벌어졌다.

“이 개같은 새끼야!”

차 문이 닫히기 직전, 몸부림을 치며 고개를 앞으로 꺾는다. 배신한 상대에게 한 대라도 먹일 수 있을 것처럼.

“배신을 때려?! 씨발…. 죽여버릴 거야. 정윤, 이 개새끼! 죽여버린다고! 들려?!”

누군가가 진환의 등을 내리찍었다. 동시에 차 문이 닫혔다. 곧이어 주변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봉투 안에 진동하는 제 숨소리, 심장 소리, 정신이 나가버릴 듯한 이명이 뇌리를 짓눌렀다.

속으로 되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한 건지. 대답은 알 수 없다. 세계는 금방, 암흑에 잠긴다.

-3권에서 계속

개같은 놈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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