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부드러운 손길이 왼팔의 혈관 위를 쓰다듬어 만진다. 경준이 짓궂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윤 씨. 어젯밤에 갑자기 나갔었죠. 무슨 일이었어요?”
잠시 입을 다문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필사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흉내 낸다. 눈썹이 꿈틀거리고, 손이 떨리는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냐.”
정윤이 중얼거렸다.
경준의 얼굴에 의뭉스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따뜻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어쩌면 이렇게 둘 다 생각대로 움직여주는지. 바보 같을 정도로.
“그렇다면야.”
팔뚝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전만큼 넣을게요.”
예정된 말이 들렸다. 멍하니, 정윤은 밀려 내려가는 약물을 응시했다.
바늘이 혈관을 찌른다. 잠시, 경준의 눈빛이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관찰할 겨를이 없었다. 금세 약이 들어오고, 온몸의 혈관이 펄떡이며 되살아난다. 목소리가 사라지고 전율이 찾아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다가 곧 감긴다. 물속에 잠긴 느낌. 따뜻하고 출렁거리는 물결에 잠겨 부유하는 감각.
뇌를 잠식하는 감각 안쪽에서 곧이어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전과는 다르다. 옳지 않았다.
죽은 듯이 낮아졌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고동이 달음박질치는 감각과 함께, 정윤이 비명을 지르듯 눈을 떴다. 큼직한 손이 손등을 매만지던 경준의 팔목을 움켜잡았다.
“뭘, 넣었어…?”
경준은 미소 지었다.
“금방 듣네요.”
“달라. 뭐야? 대체, 뭐….”
“진정해요. 별것도 아닌데.”
경준의 손끝이 손목뼈 사이의 옴폭한 부분을 문질렀다. 단순한 동작이건만, 손길이 닿는 곳부터 신경이 불타는 듯이 정신이 아찔해졌다. 하마터면 비음을 낼 뻔했다. 흠칫하며 손을 빼자, 경준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들었다.
“특별한 걸 섞었어요. 평소보다 기분 좋을 거예요.”
식은땀이 난다. 멍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하늘 위로 치솟는 듯하다가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했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져 팔의 털이 쭈뼛 선다. 숨을 헐떡거리며, 정윤이 몸을 말았다. 팔뚝을 붙잡은 채 달아날 곳을 찾지 못한 동물처럼 고개를 감췄다.
“싫어. 이거…. 싫어….”
정윤의 두 손이 뺨을 매만지며 고개를 세운다. 가늘게 눈을 뜨자 저를 꿰뚫는 두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렵다. 미치도록, 두렵다. 머리가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을 치려 하지만, 약이 들어간 몸통은 젤리 위에 앉은 것처럼 균형을 잡질 못했다. 침대 시트를 움켜잡은 채 색색 숨을 몰아쉬는 그의 위로, 경준이 고개를 숙였다.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 사이, 천진하고 부드러운 눈이 희번덕이며 빛났다.
“정윤 씨. 우리 놀이할까요?”
피 얼룩이 말라붙은 손이 턱 아래를 간질인다. 정윤은 질끈 눈을 감았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만을 기도하면서.
***
기억난다. 주인이 바뀌던 날이.
한쪽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구타당하고, 대장이 살던 저택이 아닌 처음 보는 곳으로 끌려왔을 때였다. 경준은 정윤을 발견하고, 그들과 가격을 흥정했다. 짧은 대화 끝에, 그들은 어느 배 한 척과 정윤을 맞바꾸는 데에 동의했다. 시장에 내놓아진 고깃덩어리처럼, 정윤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했다.
경준은 다정했다. 웃는 얼굴로 이름을 불러줬다. 밥을 주고 몸을 씻겨줬다.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며 웃음 지었다. 이렇게 물으면서.
‘개, 길러본 적 있어요?’
몇 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정윤은 경준이 그들에게 넘겼던 그 배가 매달 육천만 원가량의 수익을 가져다줬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숨이 막혔다. 정윤은 자신에게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대장이 자신을 사들였을 때, 정윤의 몸값은 고작 이만 달러였다.
눈앞이 어둡다. 안대를 쓴 탓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가뜩이나 약 때문에 예리해진 신경이 이제는 스치는 바람에도 반응하는 지경이 되었다. 개처럼 네발로 엎드린 채, 정윤은 이미 타액으로 축축하게 얼룩이 진 시트를 질끈 악물었다. 내장을 헤집어대는 손가락 탓에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개를 넣었지?
다섯 개를 넘어간 다음부터는 세질 못했다. 로터 줄을 삼킨 내벽 안쪽이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랫배를 채우다 못해 불룩 배가 튀어나올 정도로 차오른 로터는 안쪽에서 잘그락거리며 부딪힌다. 네 발로 엎드린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어질 때마다 안쪽에 들어찬 플라스틱 장난감이 서로 마찰하며 견디기 어려운 감각을 주었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돼요.”
경준이 등골을 쓰다듬어 내렸다. 식은땀이 흘러 서늘해진 등짝은 손길이 닿는 곳마다 불길이 이는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머리가 하얘져 자세가 무너지려다, 정윤은 힘을 주어 둔부를 위로 들췄다. 그에게는 가장 견디기 쉬운 자세였지만, 안쓰러울 만큼 벌어진 구멍을 벌름거리며, 안쪽의 장난감과 이어진 선을 꼬리처럼 달고 있는 모양은 그저 놀아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제… 이제 됐… 됐…어?”
“설마요.”
잔인하게 쾌감을 불러일으키며 귓가에서 속닥거리던, 경준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정윤의 몸이 반사적으로 안도하려던 찰나였다.
“이제부터인데.”
달칵.
플라스틱이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버티고 섰던 정윤의 두 팔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가뜩이나 울퉁불퉁하게 내벽을 압박하며 차오른 로터가 파르르 떨면서 스폿을 짓뭉개고 진동한다. 폭력적인 쾌감이 뇌리를 지배했다.
“규칙, 기억하죠? 오 분 동안 싸면 안 돼요.”
“아… 아흐… 그… 윽….”
대답을 하려고 했지만, 잇새로는 음절로 된 소리만 흘러나온다. 사실은 경준이 무어라고 말했는지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기절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붙드는 게 최선이었다. 안쪽에서 요동을 치며, 차갑고 둥근 플라스틱 조각들이 잘그락잘그락 부딪혀 대는 통에 위장 전체가 휘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물질을 뱉어내고 싶어 내벽이 꿈틀거리지만, 전립선에 닿을 때마다 애널은 기뻐하며 오히려 오므라들었다.
안 돼. 못 참아. 가고 싶어.
짐승처럼, 싸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조금이라도 자극에서 벗어나려 허리를 들썩거리다가, 도망칠 수 없는 게 확실해지자 이내는 바닥에 귀두를 문지르기에 이르렀다.
“싸면 안 된다니까.”
경준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알싸한 통증이 두피로 파고들었다. 그 순간, 시트를 물어 생긴 얼룩 아래로 선명하게 새로운 얼룩이 번져나갔다. 희멀건 정액을 싸고, 정윤이 몸을 만 채로 자리에서 떨었다. 그러나 사정에서 오는 개운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멍청해.”
가느다란 손가락이 로터의 진동 수치를 위로 치켜올렸다.
정윤의 턱이 벌어졌다.
안대 아래로, 눈이 풀리며 눈알이 위로 굴러 올라갔다. 혀를 내민 채로 헐떡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찔하게 건들거리던 것이 이제는 강압적으로 몸을 떨며 전립선을 짓누른다. 아무리 허리를 뒤틀어도 벗어날 수 없는 폭력적인 쾌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비명 같은 교성이 목울대로 울렸다.
“뭐라고 했어요? 안 들려요.”
그만하라고. 이런 건 이제 싫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경준은 알아들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한다.
“아, 더 해달라고?”
“흐읍… 읍…! 으, 으흐으응…!”
신음 소리와 함께 자지러지며 허리가 휘어진다. 이제는 정액으로도 부족해 투명한 액체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불이 더러워졌잖아요.”
“아흑… 하… 응… 응….”
“정윤 씨. 말 알아듣겠어요?”
“응… 어….”
“거짓말.”
이미 한계라고 생각한 회음부가 억지로 갈라지며 다른 로터가 비집고 들어왔다. 정윤이 교성을 지르며 치켜든 둔부를 흔들어댈 때, 경준이 볼기짝을 내리쳤다. 따끔한 통증이 이는데도, 몸은 착실하게 이를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제 귀에 닿지도 않는 교성은 부추기는 것처럼 달콤한 열을 띠었다.
“이대로 계속 박아버리면, 좆밖에 모르는 고깃덩어리처럼 되는 건가?”
이미, 그렇게 취급하고 있으면서. 사정을 참으려 손가락을 깨문다. 억누른 쾌락의 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해 못 할 소리다. 이것 외에 뭐가 있단 말이지?
“또.”
경준의 손이 목둘레를 움켜잡는다. 턱을 당기며 깊게 처박아 올린다. 숨이 틀어막히는 것과 동시에 징징 울리는 로터가 장벽을 눌러, 꺽 하고 움츠러드는 소리가 났다.
이것만이 그의 세계였다. 더럽고, 아둔하고, 추한 그에게 걸맞은 세계. 이 이상은 과분하다.
이것조차 과분하다.
그렇게 여겼는데.
숨이 막혀온다. 눈물이 흘렀다. 다정한 웃음이, 입맞춤이 그립다. 가슴을 채워주던 환희가 그리웠다. 처음부터 가질 자격조차 없었던 것들인데도. 이제는 아득하게 멀어진 것들인데도.
‘보고, 싶어.’
한마디가 머리에 떠오른다. 칼에 베이는 고통이 심장을 갈랐다.
***
손이 아프다.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볕을 올려다보다가, 진환은 설핏 눈살을 찌푸렸다.
쇼핑백을 들고 벌써 얼마나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안에 뭘 그렇게 넣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무작정 백화점에 들어가, 열두 살이 좋아한다는 물건이면 닥치는 대로 주워 담았으니. 게임기가 두 대, 태블릿도 들어 있던 것 같긴 한데. 솔직히 관심도 없다. 물건을 마음대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금방 싫증이 나는 일이었다.
거기에 정작 선물의 주인은 모습을 보일 생각도 않았다. 옹기종기 모여 교문에서 빠져나가는 쪼그만 것들을 계속 보고 있으니, 이제는 저 얼굴이 이 얼굴 같고, 이 얼굴이 저 얼굴 같다. 그마저도 듬성듬성 수가 줄더니, 이제는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몇몇 망아지들을 제외하고는 조용하다. 시간을 확인하니 네 시가 넘어간다. 아무리 요즘 애들이 학원이다 교육열이다 한다지만, 네 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을까.
비장의 수단으로 전화를 걸까 싶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지만, 형수님이 받을 가능성이 커 관두기로 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달 전 생활비에 보태라며 무작정 입금을 했다가 쓴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
“…결석했나.”
머리를 긁적거리며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어디가 아팠을 수도 있고. 아니면 오늘따라 길이 어긋났을 수도 있고. 선물은 언제든지 줄 수 있으니 상관은 없다지만.
차 문을 열다가, 진환은 멈칫하여 넋이 나간 것처럼 조수석을 응시했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일이다. 정윤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가시질 않았다. 눈썹은 구겨지고 턱에는 힘이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면 그냥 두고 보진 않겠다는 듯 나를 노려봤다. 실망하고, 화를 냈다. 지금껏 그렇게 짓밟히고 고문을 당해도 한 번도 불편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정윤이 제가 고백하자마자 화를 냈다.
‘오만하게 보였겠지.’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뭐라고. 뭐라도 되는 것처럼. 도망가자. 구해줄게. 널 꺼내줄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들러붙어서 줄줄이 읊어댔다.
사실 어딜 그렇게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여기가 아닌 곳으로 가고 싶었다. 형이 나를 이해해주는 곳으로. 좆같은 박경준 면상을 안 봐도 되는 곳으로. 치사한 짓 안 해도 먹고살 수 있는 곳으로. 박성수가 묻혀 있지 않은 곳으로. 그 자리에 정윤이 함께할 수 있으면 했다.
“…씨팔.”
정말, 말아먹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구나, 이진환.
그 후, 진환은 정말로 정윤을 찾지 않았다. 그럴 낯도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을 피하고, 옷깃이라도 닿지 않도록 숨을 죽이며 그를 피했다. 정윤은 조금도 의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겠지. 본인이 부탁한 일인데.
인상을 찡그렸다가,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쇼핑백을 던진다. 무게에서 해방된 팔이 새총에 달린 고무줄처럼 시원하게 덜렁거렸다. 운전석에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똥준?”
교문 밖으로 걸어 나오는 동준이 보였다. 평소와 다르게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구부린 채, 가방끈을 쥐고 주변을 휙휙 돌아보는 폼이 어쩐지 석연찮았지만, 오랜 기다림이 드디어 보답받았다는 생각에 깊게 파고들 여력이 없었다. 숨도 쉬지 못하게 무거웠던 가슴에 송풍이 불었다.
입가 가득히 웃음을 짓고 조카를 부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동준이보다 키가 훌쩍 크고, 교복을 입고, 싱글싱글하게 웃음을 짓는 놈은 어깨동무를 한 채로 동준이를 교문 안쪽, 길가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벽 근처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킬킬거리며 뭐라 속닥거린다. 그러자, 동준이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돈이 든 게 분명한 봉투가 쥐어져 나왔다.
“너 뭐야.”
찐득거리는 손가락에 돈이 들어가기 전, 진환이 놈의 어깨를 붙잡았다. 동준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사, 삼촌…!”
“삥 뜯냐? 내 동생 삥 뜯어?”
상대가 교복을 입은, 기껏해야 고삐리 애새끼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후려칠 기세로, 진환이 멱살을 움켜잡았다.
“왜… 갑자기 왜 이러세요….”
“씹새끼가….”
“삼촌! 아냐! 그 형 선생님이야!”
“넌 빠져!”
벽에 고삐리를 밀치고 씩씩거리며 노려보았다.
“씨발, 아저씨 누구냐고요?!”
“쟤 삼촌이다, 넌 뭔데?”
“과외요. 과외!”
힘이 풀린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 놈이 악을 지르며 손을 뿌리쳤다.
“씨발…. 나 안 해. 안 해!”
교복이 걸어나가자, 동준은 그 녀석이 무슨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렸다. 결국 교복을 눈앞에서 떠나보내자, 동준이는 다시 진환을 돌아보았다. 아까와는 영 다른 표정으로.
“삼촌 진짜 왜 그래!”
“…난… 그냥 너 도와주려고….”
“저 형 없으면 나 공부 못 따라간단 말이야! 중간고사 평균 20점이나 떨어졌는데! 삼촌이 책임질 거야?!”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똘똘해 보이지도 않았는데.
“학원… 가면 되지. 과외 그거, 불법-.”
“학원 못 가! 나 학원 못 가!”
“뭐?”
“아빠 때문에 못 간다고!”
진환은 짤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동준이의 뺨이 씰룩거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흥건하게 눈물이 흘러넘쳤다. 입을 벌리며, 세상에 둘도 없을 일처럼 꺼이꺼이 운다. 아무리 팔로 닦아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처럼.
“갑자기 오지 말래. 그냥 오지 말래. 안 왔으면 좋겠대.”
“…동준아.”
“나보고 오지 말래.”
그 말을 되풀이하며, 동준이가 몸을 말았다. 진환은 그럴싸한 위로의 말 한마디 생각해 낼 수 없었다.
***
아무것도 안 들려.
돈은 많아졌다. 하지만 어디에 쓰면 좋을지 모르겠다. 형을 풀어줄 수도, 형수님이나 동준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구르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 할 수 없었다.
진환은 흐리멍덩한 눈길로 댄스 플로어를 내려다보았다. 클럽 음악은 땅이 울릴 만큼, 고막이 터질 만큼 시끄럽다. 아는 거라고는 씹질하고 허세 떠는 것뿐인 일행들이 뒤에서 떠드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색색의 조명이 살갗을 물들인다.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진환은 술잔을 채웠다. 한 병에 이백은 하는 위스키가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잔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머리를 감싼다.
“…이진환, 이 찐따 새끼….”
술 냄새 나는 숨결에 욕설이 섞여들었다.
동준이의 울음이 귓가에 쟁쟁하다. 벌써 소문이 퍼진 걸까? 이미 두 차례나 쫓겨나듯 이사를 가야 했던 형수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더러운 새끼들. 그렇다고 교육자라는 놈들이 애를 따돌려? 확 애들 풀어서….
속에 맺힌 응어리를 쓸어버리려, 단번에 술잔을 비운다. 독한 위스키가 식도를 태우고 들어갔다. 어질어질한 취기와 함께, 진환의 손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녹음 파일은 아직 남아 있다.
몇 번이나 지울 기회가 있었지만, 삭제하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카드였다. 일이 틀어졌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동시에 들고 있기만 해도 목숨이 간당간당해지는 시한폭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형을 내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다.
길게 얼굴을 내려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VIP룸이 늘어선 복도 옆, 인테리어 삼아 놓은 거대한 열대어 수조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둑한 복도에 이어진 네온 조명 사이, 물속의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평화롭다. 기포가 보글거리고 수면으로 올라간다. 은색 방울처럼.
수족관에서 천장을 바라보던 정윤이, 그의 얼굴 위로 어리던 물그림자가 떠올랐다. 절망적인 열망이 취기처럼 몸에 번졌다.
보고 싶어.
무언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환 주변을 비눗방울처럼 감쌌던 멍멍한 정적이 불쾌하게 부서졌다. 혀를 차고, 진환은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마흔 살이 가까운 남자가 들러붙는 유니폼을 입은 직원의 머리채를 붙잡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
집무실 한가운데. 한 팔을 등 뒤에 올린 채 팔굽혀펴기를 하다 말고, 정윤은 멈칫하고 말았다. 몇 번까지 했는지를 잊어버린 탓이었다. 서른 번까지는 기억했는데. 진환과 그 일이 있던 다음부터 자주 생기는 일이었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따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머릿속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질 않는 것이었다.
지쳤기 때문일 거라고, 정윤은 추측했다. 조금만 마음을 풀면 칼에 베이는 것 같은 통증이 심장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쥐어짰다. 발밑이 흐늘거리고, 가끔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진환이 인사 한마디도 않고, 모르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차가운 눈으로 저를 흘겨보고 스쳐 지나가는 날에는 더 그랬다. 아주 조금만 힘을 풀어도 초조함이 몰려들었다. 불편하게 심장이 뛰어 도무지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마룻바닥 위에 떨어진다. 멀어졌던 정신이 돌아온다.
‘더러워지겠다.’
황급히 셔츠로 자국을 문지른다. 길게 숨을 내쉬고, 정윤이 반대편 팔을 뻗었을 때였다.
“정윤 씨.”
경준이 책상에서 저를 불렀다. 우뚝 일어서 경준을 바라본다. 그가 귓가에 댄 핸드폰을 톡톡 가리키며 웃음 지었다.
“진환 씨네 클럽에 문제가 생겼나봐요. 난동을 피우는 사람이 있나 본데… 거기 애들 데리고는 해결이 잘 될지 모르겠어요. 가줄래요?”
“진…환이네?”
“네.”
“나 혼자?”
그 목소리에 작은 기대감이 깃들어버린 것을, 정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경준은 혀를 날름거리는 제 안의 독사를 잠재우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부탁해요.”
***
“개같은 연놈들이! 뭐? 오천?! 이 씨팔 놈들이 계집질이나 하려고 왔더니, 날 개호구 취급을 해! 매니저 나와. 확 죽여버리기 전에, 매니저 나와!”
머리가 벗겨지고 정장은 재킷만 진품이다. 그림이 뻔하다. 거기에 깨진 병을 흉기처럼 쥐고 휘두르는 통에 떡대들이 주춤거리며 막질 못하는 상황이었다. 좆만 한 놈들. 돈은 그렇게 받아 처먹고선.
테이블 위에 수표를 던지고, 진환은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저희들도 취해서 허우적거리며, 만류하는 둥 마는 둥 실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은 게 역력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진환아. 네가 가게? 야, 저 인간 취했어. 가지 마.
계단으로 가는 길목, 떡이 되어 잠든 남녀의 테이블에서 길쭉한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춤을 추듯이 발걸음을 꺾으며 원을 그리고 수조 안으로 컵을 집어넣는다. 파드득 기포가 솟아오르며 팔뚝까지 짠물에 잠겼다. 안온한 수면이 무너져내려 정처 없이 달아나던 열대어가 유리벽 안에 갇힌다. 컵 주위로 매끄러운 물길이 쏟아져 내렸다.
계단에 말을 디딘 순간부터, 아래층에 소집된 조직원들의 시선이 진환에게로 향했다. 개중에는 김종식이도 있었다. 바 위에 구피가 요동치는 유리잔을 올려두고, 진환이 취객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고 없이, 그가 의자를 집어 던졌다.
얼굴에 정확하게 맞는다.
충격으로 입술이 터졌는지, 앞니가 꺾였는지, 사내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쥐고 있던 병 조각까지 놓고서 제 얼굴을 더듬어댄다. 더 지켜보지 않고, 진환은 다시 그의 등에 등받이를 내리쳤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장사하는 데에서 이러면 안 되죠, 예?”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것을, 손등을 짓밟아 누른다. 구두 뒷굽에 힘을 주어 비비적거리자 손뼈가 망가지는지 으드득거리는 진동이 전해졌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버러지 같은 놈이 와가지고.”
전세가 꺾이자마자 사내는 더없이 비굴해졌다. 그가 꺽꺽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천을, 어떻게 하룻밤에 오천만 원을 가져갑니까….”
“왜. 아저씨 옷도 좋은 거 입었네. 돈 없어?”
“빌린, 빌린 건데….”
짜증 어린 손짓으로 진환이 머리를 털었다.
“안 되겠네. 야, 손님 VIP실로 안내해 드려라. 차분히 얘기 좀 하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선생님. 회장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사내는 진환의 다리에 들러붙어 빌어대고 있었다.
“아씨, 왜 이래. 사람 불편하게.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
진환이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들었다. 그가 바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에서 구피가 헤엄치는 유리잔이 그의 손안에 감긴다.
“마셔봐.”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까지는 구경거리처럼 상황을 지켜보던 군중도 서로를 마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제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예…?”
“돈 안 받을 테니까, 이거 마셔보라고.”
사내가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진환은 서글서글하게 웃음을 지으며 그의 앞에 컵을 내밀었다. 구피는 좁아진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점점 더 빠르게 몸부림을 쳤다. 그 바람에 수면이 출렁거려, 유리잔 안의 물 전체가 어떤 생물체처럼 보였다.
“아니면. 뭐 금니 뽑아서 돈 내시든가.”
사내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듯했다. 딱 한 번의 굴욕이다. 그걸로 화를 면한다면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그가 컵을 받아 들었다.
“이야. 그렇지. 아저씨, 멋있네.”
사마귀가 난 볼이 입술과 함께 벌어진다. 그가 유리잔의 가장자리를 입가에 대었다. 출렁이는 물이 벌써부터 턱으로 흘러내렸다. 진짜 마시나봐. 미친 거 아냐? 나직한 속삭임들과 내민 핸드폰을 앞에 두고, 진환은 차분하게 허리를 숙였다.
“토하지 말고. 씹지도 말고. 한 번에 삼켜.”
사내가 용기를 내어 유리잔을 꺾었다. 목울대로 물이 쏟아져 들어간다. 그는 최대한 맛을 느끼지 않고, 이 모든 걸 빠르게 끝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물이 반 이상 사라지고, 펄떡거리던 구피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정적이 흘렀다. 사내는 명백히 잘 해내지 못했다.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기질 못하고, 볼 가득 물을 머금고 만 것이었다.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모두의 악의 없는, 그러나 잔인한 시선이 그의 목울대로 향했다. 결과를 모르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삼. 이. 일.
위를 거꾸로 짜내는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입에서 구피가 튀어나와, 흥건히 젖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 경련하며 펄떡였다.
“왜, 못 하시겠어?”
사내의 앞에 주저앉아, 진환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사내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잘 걸렸다, 씹새끼.
꼬붕들 손에 사내가 끌려 나간다. 얼어붙었던 소란은 빠르게 원상 복구되었다. 군중들은 방금 본 광경을 술기운에, 약간의 뽕에, 그리고 전자음이 삑삑거리고 만들어낸 형태를 모를 음악에 섞어 흘려보냈다. 그사이 진환은 창고 안에 사내를 던져 넣었다. 골판지 박스 앞에 뒹굴자마자,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칭얼거리는 소리를 들어줄 기분이 아니다. 주먹을 풀고 가장 먼저 그의 복부에 한 방을 먹인다.
상대가 콜록거리면서 고꾸라지자 계속해서 배를 걷어차고, 얼굴을 쥐어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열이 치밀어 올랐다. 머리가 뜨거워진다. 상대가 지르는 비명에 화가 났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 내려칠 때마다 손등 발등에 닿는 충격에 화가 났다. 모든 게 열이 뻗치고 짜증이 나고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새 주먹에 피가 묻어났다. 사내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았다. 몸을 웅크리고 앞에 숙여,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이고 싶어 애원하듯 울부짖을 뿐이었다. 그 비참한 모습에까지 화가 난다.
“이 씨발…!”
주먹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진환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뚜렷한 흉터가, 차분한 두 눈이 그를 마주한다.
“그만해.”
진환의 손목을 움켜쥔 것은 정윤이었다.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어, 진환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잠시 멀겋게 멀어진다. 정윤의 뒤로 열린 창고 문이, 불청객이 들어오는 걸 막지 못해 허리를 숙여 사죄하고 있는 조직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초점이 다시 앞으로 향해, 정윤의 얼굴을 또렷하게 담는다. 붙잡은 손목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며, 정윤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하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다 죽겠어.”
숨이 찬다. 계속 숨이 차올랐었다. 제 머리를 감싸고 부르르 떠는 사내의 모습도 온전하게 눈에 들어온다. 마귀처럼 저를 덮쳤던 분노가 얼음물에 구름을 담근 것처럼 한순간에 가신다.
열대어는 수조에 돌아와 있었다. 그 구린내 나는 입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얼마나 오래 살지는 모르겠다. 일행은 벌써 사라져 있었다. 수표와 함께. 뻔한 새끼들.
피로감이 몰려와, 진환은 테이블 위에 발을 얹고 앉았다. 유리잔에 얼음 없이 양주를 붓는다. 위스키를 털어넣자 구두약 같은 고약한 냄새가 비강을 찔렀다.
“그 아저씨한테 왜 그랬어?”
등 뒤에서 정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환은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갈색 양주가 입술 사이로 흘러넘치도록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는다. 이어서 유리잔의 반짝이는 조각이 시커멓게 그림자가 지도록 양주를 쏟아부어 넣는다.
바로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옮겨가더니, 정윤의 덩치 큰 몸통이 눈앞에 들어왔다. 허수아비처럼 우뚝 선 채, 정윤은 고개를 숙여 그를 응시했다.
“대답해. 왜 그랬어?”
“언제부터 제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셨습니까?”
“…죽으면 돈도 못 받아”
“본보기를 보여줘야 안 기어오르는 겁니다. 사업이 다 그렇지.”
“그래도….”
“왜 오셨습니까? 여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진환은 잔을 기울여, 목울대가 꿀렁거리도록 술을 들이켰다. 식도에서 위장까지 술이 들어가는 길을 따라 생생한 통각이 이어졌다. 결심한 것처럼, 정윤이 입을 열었다.
“경준이가 확인하고 오랬어.”
“문제없습니다, 여긴.”
“안 그래 보여.”
허리를 숙여, 정윤이 고개를 내밀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제 손등을 겹쳐 만진다. 손바닥은 여전히 따뜻하다. 셔츠가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는 목둘레에 멍울이 드러난다.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 가슴이 요동친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겨우 얼굴을 봤을 뿐인데. 달려들어 머리칼을 붙잡고 키스하고 싶다. 혀를 빨고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놀려주다가 끌어안고 싶다. 실컷 머리카락을 헝클이고 싶다. 온몸이 그걸, 그것밖에 바라질 않는다.
“돌아가시죠.”
떨지 않기 위해, 진환은 볼 안의 살을 깨물었다.
“지겨우니까.”
맞닿은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전해진다. 온기가 멀어지고 손등에 인 가벼운 압박감이 미끄러지며 사라진다. 눈길을 들자, 뒷걸음질을 치며 조금씩 멀어져 가는 정윤이 눈에 들어왔다. 정윤의 표정을 마주 보게 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네.”
정윤이 돌아선다. 난간을 붙잡은 채로 그가 계단을 따라 달렸다.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몸이 뛰어올랐다. 다리가 저절로 일어서고 고개가 세워졌다. 어느새, 진환은 그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잠깐, 형님…!”
갑자기 위장에서 가시가 박히는 듯한 격통이 치밀었다. 밤새 무작정 몸에 쏟아부었던 양주가 흡수되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것이었다. 배를 붙잡고 느리게 숨을 고른다. 고개를 들자, 정윤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씨발….”
배를 붙잡고 뛰쳐나간다. 건물 밖으로 계속해서 달리면서 다리를 움직인다.
정글처럼 얽힌 강남 밤거리를 달려 나간다. 난 멍청이다. 천하의 멍청이. 얼간이. 등신. 팔도강산의 다채로운 욕설이란 욕설은 전부 가져다 붙여도 부족한 개새끼. 한순간 마주쳤던 정윤의 얼굴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린다.
정윤은 웃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괜찮아 보이려고 비명을 참고 있었다.
왜 나란 새끼는, 항상. 울음이 나올 것 같지만 억누른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몰아쉰다. 고개를 돌려 거리를 채운 인파 사이에서 그를 찾는다. 시야가 갈라지자 눈가를 꾹 누른다. 손을 떼어내자, 덩치 큰 그림자가 건물 옆으로 꺾어져 걸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기다.
입가를 닦아내고 달린다. 골목 안쪽, 그림자가 제 얼굴을 문지르며 벽에 머리를 기댄다. 더 멀어지기 전, 그의 팔뚝을 붙잡는다. 등이 움찔하고 떨리며, 고개가 제 쪽으로 돌아섰다.
“왜, 여긴, 왜….”
“말해주세요.”
떨리는 숨 사이로 한 마디 한 마디가 섞여든다.
“저한테, 왜 키스하신 겁니까?”
“…몰라.”
“왜 절 막질 않으셨습니까?”
“…몰라.”
“여기까지 왜 절 보러 오신 겁니까?”
“몰라. 몰라.”
“저한테 기대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으셨습니까?”
“몰라. 모른다고 했잖아!”
정윤이 팔을 뿌리친다. 온 힘을 다한 탓에 반동만으로 진환의 몸이 휘청거렸다. 술을 먹어 균형을 잘 잡지 못하는 몸이 단번에 기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진환보다도 놀란 건 정윤이었다. 당장이라도 달아날 것처럼 채비하던 게 언제였냐는 듯, 정윤이 그의 양어깨를 붙들었다. 걱정밖에 어리지 않은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미안해. 미안….”
말꼬리가 흐려진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정윤은 완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단단한 온기가 가슴팍에 닿는다. 두 팔이 등을 감싸 둘러, 다시 놓지 않을 것처럼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형님을 사랑합니다.”
조용한 목소리가 귓속에 속삭인다.
“…….”
“형님이 계신단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정윤의 시선이 서서히 떨린다.
“…그럴 리가 없어.”
“형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진환이 속삭였다.
“저는,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이상하게도, 진환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 나뭇가지가 구부려지고 구부려져, 마침내 쪼개질 때 나는 또각, 소리. 조용한 교실에서 실수로 연필을 떨어뜨렸을 때 나는 데구루루, 소리. 단단한 과일 껍질에 칼날을 박아, 균열을 따라 벌어지며 나는 쩌억, 소리. 정윤을 지탱하던, 괜찮다는 말을 계속하도록 만들던 단단한 껍데기에 도끼날이 박힌 것이었다. 다시 귀를 기울여보니, 그 소리는 옅은 흐느낌이었다. 숨을 참고 목구멍을 조이느라, 거의 들리지 않는 조그마한 흐느낌.
“돌아가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얼핏 떨린다. 조금씩, 진환의 눈이 감겼다.
“저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