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꽃잎처럼 곱게 저며진 횟감을 앞에 두고 정종을 따른다. 잔을 들며, 경준은 눈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부은 것처럼 두꺼운 입술에 두꺼비 같은 인상. J그룹 총수 차 회장의 오른팔인 최 수석이다. 저만한 위치에 선 인간 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축에 속하기 때문에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아둔한 게 탈이었지만.
“이번 건은 박 회장 덕분에 아주 수월하게 됐어.”
최 수석이 킬킬거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뒤룩뒤룩 살집이 잡힌 손에 잡힌 정종 잔이 가여울 만큼 작아 보였다.
“그 동네 청소 좀 하겠다는데 말이야. 무슨 놈의 잔소리들이 그렇게 많은지, 원….”
“저희가 회장님께 얼마나 신세를 졌는데. 이 정도 부탁도 못 들어드리겠어요.”
“사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드디어 본심이 나왔군. 깍지 낀 손을 정중하게 식탁 위에 올리고, 경준은 상대가 패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빈 잔이 테이블 위에 얹히고, 최 수석이 입맛을 다셨다.
“장 검사 알지. 왜, 그, 회장님 큰딸네.”
“사위분이시죠.”
“그 사람이 올해로 이 검사장 라인에서 사 년을 버텼어. 아니, 하다못해 동네 짜장면집도 개업 일주년이면 수건을 하나씩 돌리는데, 뭐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거지. 그런데 사람이 좋아서 아무 말을 못 해요. 회장님께서 그, 얼마나 염려가 깊으신지.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프더라고.”
“저런.”
이 검사라면 깽값이랍시고 이백만 원을 현찰로 던진 후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각목으로 사람을 폭행한 차 회장네 둘째 손주를 눈감아준 위인이다. 그런 놈도 총장 명찰 한번 달아보고 싶어서 안달을 내는 모양이다.
그다지 신경 쓰는 바는 아니었다.
“왜, 2과 김 검사가 얼마나 악독해. 박 회장도 한번, 그놈들이 생트집을 잡는 바람에 큰일 날 뻔했잖나.”
“김 검사님이 너무하셨죠. 영장도 없이, 형사랑 짜고서.”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박 회장. 그런 놈이 검찰총장 되어봐. 가뜩이나 헬조선, 헬조선 하는데, 이게 얼마나 더 각박해지겠느냐고. 안 그래?”
그러니까, 사돈 앞길 트이도록 경쟁 상대 오점을 캐달라는 말이다. 귀찮은 짓이었다. 남의 싸움에는 관심도 안 가지고 상관도 안 하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귀찮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두 가지 점에서 예외를 두기로 한다. 우선, 차 회장이 직접 지시한 일이다. 그리고 검찰 눈치 안 보고 사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수석님 말씀이 맞네요. 잘 알아볼게요.”
“역시 우리 박경준이. 김 회장님이 괜히 점찍은 게 아냐.”
걸걸대는 소리로 웃고는 최 수석이 정종병을 털었다.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취기가 올라, 그가 젓가락을 들었다.
“태국에서 개를 하나 들여왔다면서?”
“쓸 만해 보여서요. 가엾기도 하고.”
“유기견도 기르고. 그렇게 안 봤는데, 봉사 정신이 아주 투철해, 우리 박 회장.”
홀라당 회 두 점을 집어 먹는다. 두꺼운 입술이 음식을 부수는 기계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이며 게걸스럽게 투명한 횟감을 빨아들였다. 구역질이 난다.
그러나, 바로 그 역겨움 때문에 변덕이 인다.
입매를 올린 채로 술잔을 비우고, 경준이 느슨히 턱을 들었다.
“보실래요? 그 개새끼.”
“뭐? 지금?”
웃음이 깊어진다.
“후회 안 하실걸요.”
***
진환이 가고 난 다음엔 기분이 이상하다. 마음이 간질거리고, 괜히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털이 보들보들한 동물을 만지거나,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거나, 바다에 발을 담그거나 할 때처럼.
소파에 누운 채 수조에서 오가는 금붕어를 응시한다. 평화롭고 예쁘다. 더러운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경준이가 더 천천히 오면 좋을 텐데.’
경비 장치를 해제하는 소리를 듣자 뻣뻣하게 굳었던 몸통이 반사적으로 튀어 올랐다. 안심을 되찾으려, 정윤은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이라도 달가워 보이려고, 그래서 경준이 언짢은 일이 없게 하려고, 있는 힘껏 웃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문가에 들어선 건 경준뿐만이 아니었다.
“정윤 씨. 깨어 있었어요?”
“…누…구야? 그 사람.”
“최 수석님. 차 회장님 알죠? 그분 맡아서 뒷바라지해주시는 분이에요. 오늘 정윤 씨 보러 오셨어요. 감사하죠?”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좋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런 직감이 든다. 음침한 남자의 눈빛도, 다리 옆에서 흥분을 억누르고 비벼대는, 소시지 같은 손가락도 모두 불길하다. 정윤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뒷걸음질을 치다가, 다리가 미끄러지며 제자리에 넘어진다. 아둔한 모습에, 투실투실한 남자가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이야. 깜짝 놀랐어, 박 회장. 뭐 하러 이렇게 못생긴 놈을 사 왔어?”
“저 말곤 아무도 안 데려갈 것 같아서요.”
“덩치 한번 크네. 이거, 무는 거 아냐?”
“전혀요. 길이 잘 들었어요. 보실래요?”
주저앉은 채 덜덜 떠는 정윤의 앞에 경준이 선다. 그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정윤 씨. 가만히 있어요.”
매서운 통증과 함께 얼굴이 기울어진다. 얼얼하게 뺨이 부어올랐다. 놀란 나머지 어깨가 튀어 올랐지만, 정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경준이가 그러라고 했으니까.
“허. 물건이네, 이거. 진짜 꼼짝도 안 해?”
“뭘 해도요. 최 부장님도 해보실래요?”
사내가 비식 웃었다. 오른손에 낀 시계를 빼더니, 명치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끔찍한 통증이 숨통을 조였다. 눈앞에 번뜩하고 섬광이 인다. 발길질이 배를 걷어차다가, 날 선 소리가 귓방망이를 찢어버리도록 따귀를 날린다. 아랫입술이 터진다. 머리가 얼얼하게 울릴 정도가 되었을 때, 사내가 우렁차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이거, 살 만하네. 살 만해.”
“뭐랬어요.”
고개를 숙인 채, 정윤은 ‘이제 됐다’는 말을 기다렸다. 대장이 장난감 자랑을 하고 싶어 한 경우는 종종 있었다. 경준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정도에서 끝난다면 견딜 만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머리 위에서 들려온 말은 기대를 짓밟는다.
“박 회장. 정말 해도 되는 거야?”
“물론이죠.”
당혹스럽게, 정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준은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 다정하게.
“정윤 씨. 보여드려요.”
“뭐, 뭘…?”
“정윤 씨 잘하는 거 있잖아요.”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앞섶 사이로 튀어나온 거무죽죽하고 축 늘어진 살덩어리가 이미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불쾌하게 내리쳤다. 흉측하리만치 커다란 성기였다. 매캐한 냄새가 난다.
평생에 걸쳐 훈련된 몸뚱어리도, 그 순간만큼은 쉬이 행동하질 못했다. 눈물이 고인다. 콧등이 쨍하고 아려왔다. 정윤의 입이 벌어졌다. 싫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건 싫다고. 싫다고 하고 싶다고.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입술이 새까만 귀두를 물었다. 완전히 발기되기 전인데도 입 안에 꽉 차, 코끝까지 역한 냄새가 올라온다. 자신을 죽이며 혓바닥으로 그곳을 감싼다.
“하, 씨발….”
남자가 허리를 민다. 묵직한 성기가 기도를 틀어막는다. 눈알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는다. 폭력적으로, 그는 자위 기구라도 사용하는 것처럼 성기를 찔러 넣었다.
“이거 봐라, 이거.”
그의 발등이 정윤의 사타구니에 닿았다. 흠칫하며, 정윤은 허리를 물렀다. 큰 편인 성기 탓에 묵직하게 발기한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알고 보니까 발정 난 개새끼였네?”
조롱에 익숙해진 지는 꽤 되었지만, 이런 순간마다 모멸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통각에 흥분하게 된 것은, 진한 수컷 냄새에 들뜨도록 훈련받은 것은 그의 탓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내들은 조롱을 퍼붓는다.
“박 회장. 내가 말이야, 아니, 이 근방 화냥년들은 다 잡고 있거든.”
불룩한 귀두가 목젖을 찌르고 눌렀다. 목이 꿀렁거리며 뱉어내고 싶어 한다. 좆내가 비강 가득히 들어차, 이제는 생각도 제대로 되질 않았다.
“근데 이 새끼 입 X지는 못 따라가겠네, 이거. 수컷이라 그렇지, 끝내줘.”
“마음에 드세요?”
“벌써 싸겠네. 박 회장, 이거 안에 싸도 되나?”
경준의 시선이 정윤에게로 향했다. 경준의 시선을 느끼고, 정윤은 온 힘을 다해 제정신을 되찾았다. 눈빛으로나마 애원하기 위해서였다. 정윤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무잡잡한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얼굴이 망가지도록 턱을 벌리고 펠라티오나 하고 있다. 비참하게 망가지고 짓밟히고, 기어 올라갈 곳도 없이 처참하게 부러졌다. 여기에서 더 곤두박질치고 싶지는 않았다. 경준이 그걸 알아주기를 원했다. 눈이 마주친다.
잠시 동안, 경준이 그를 훑었다. 경준은 신문을 읽을 때와 다름이 없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흥미 없는 것을 관찰하는 듯한 눈빛. 이윽고 경준은, 미소 지었다. 그가 벽에 등을 기댄다. 말한다.
“마음대로 하세요.”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
이미 기도를 틀어막고 있던 귀두에서 정액이 쏟아졌다. 산소를 요구하는 몸뚱어리가 더는 견디질 못하고 꿈틀거린다. 정윤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빼 돌렸다. 기침과 함께 헛구역질이 쏟아져 나왔다. 우그러들었던 허파가 부푼다. 매캐한 악취와 함께 목구멍에서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턱 아래로 삼키지 못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입술로 손이 향한다.
“씨발.”
날 선 욕설이 들린다.
“똑바로 안 해?! 이 잡종 새끼가!”
따귀가 날아왔다. 정윤이 꼼짝도 하지 않자 다시 머리채를 움켜잡는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정윤의 머리를 들어, 테이블 모서리에 내리찍었다. 이번 건, 확실히 아프다. 눈앞이 번쩍하고 빛났다.
그 충격으로 어항이 넘어졌다.
어지럽던 시야에 단번에 불이 들어왔다. 쏟아진 물 위로 펄떡이며 발버둥을 치는 물고기가 보인다.
안 돼. 저러다 죽겠어.
기어가며, 정윤은 금붕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갑고 동그란 몸통에 손이 닿기 직전, 숨이 막혀왔다. 턱 아래로 가죽 벨트가 걸려 있었다.
“개새끼 주제에, 어딜 더럽다는 듯이 뱉어? 버릇없이, 어?!”
남자가 그르릉거렸다. 벨트를 쥔 양손이 뒤로 당겨진다. 숨골이 눌리며 하얗게 눈앞이 질렸다.
각오를 마친 듯, 정윤이 눈을 감았을 때였다.
“그 정도로 해두세요.”
어스름하게 경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겋게 눈을 뜨자, 테이블 앞에 허리를 기울인 경준이 보였다.
“정윤이가 실수한 것 같은데.”
머뭇거린 끝에, 남자의 손아귀가 풀려났다. 정윤은 조용히 숨을 몰아쉬었다.
“오냐오냐하면 안 좋아.”
지퍼를 추슬러 올리며, 남자는 뒤늦게 누그러진 티를 보였다.
“그래도 개운하게 한 발 쐈네, 박 회장 덕분에.”
“운전사 불러드릴까요?”
“됐어. 쉬엄쉬엄 내가 하지.”
문이 기울어진다. 남자의 두둑한 눈자위가 휘어졌다.
“개 한번 잘 샀네.”
문이 닫힌다. 집 안에는 침묵이 흐른다.
“…다쳤어요?”
내미는 경준의 손을 피한다. 비스듬히 뺨을 튼 채, 정윤은 멍하니 마룻바닥을 응시했다. 흥건해진 바닥 위, 물고기는 이제 움직이지 않았다. 지느러미도. 아가미도.
경준이 제 목 위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까무룩 졸음이 찾아왔다.
***
정신을 차리자 정윤은 벌거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도 모르겠다. 인기척이 없는 걸로 보아, 경준은 외출한 모양이었다. 협탁 위로 어항이 보인다. 물고기는 없이 물만 찰랑거리는.
‘추워.’
분명히 햇살이 들어오는 낮인데도, 집 안은 더할 나위 없이 미지근한데도, 오한이 들이닥친다. 벌레가 갉아먹는 것처럼 피부밑이 가렵다. 금단 증상이다.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착실하게, 몸이 길들여지고 있다.
‘이건 벌이야.’
잘 알았다. 그뿐이라는 걸. 정윤은 그만한 행동을 했고, 경준은 거기에 맞는 벌을 준다. 경준뿐만이 아니다. 대장도. 배에서 만난 사람도. 아버지까지. 정윤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세계에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건.’
목구멍이 욱신거린다.
‘언제 끝나는 거지?’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고 싶지 않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말을 하는 것도, 눈을 마주 보는 것도 무섭다.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초인종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세 번째가 되었을 때, 정윤은 몸을 일으켰다.
“으악!”
진환이 다짜고짜 비명을 질렀다. 손바닥이 제 눈을 찰싹 내리치며 가린다. 영문을 모를 행동이었으나, 정윤은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맞다. 옷.
“당장 들어가세요. 당장!”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세차게 어깨를 밀친다. 엉겁결에 정윤은 현관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제가 못 삽니다, 정말! 당장 옷 차려입고 오세요. 당장입니다!”
잔소리에 등살이 밀린 모양새가 되어, 정윤은 침실로 몰아넣어졌다. 저렇게 소리 지를 일인가? 벗은 몸 정도는 전에도 봐놓고선. 어깨를 움츠리며 옷장을 뒤적인다.
적당히 편한 셔츠에 바지를 입고 나왔다. 느린 걸음을 딛자 발치에 따뜻한 것이 치인다. 진환이 침실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다 입으셨습니까?”
“응.”
“아, 씨. 놀라라….”
눈을 가린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진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언제 봐도 신기하다.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데, 천천히 상기되어 있던 표정이 가라앉았다. 콧등이 일그러지며 송곳니가 보이도록 윗입술이 들린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 진환이 입을 열었다.
“…얼굴이 왜 그러십니까?”
얼굴?
그 말에, 정윤의 손이 느적지근하게 제 얼굴을 더듬었다. 평소보다 열이 나고, 건드릴 때마다 아프다. 이마와 눈가는 명백하게 부어 있었다.
“미안. 보기 안 좋지.”
“뭐… 그게 문제입니까?!”
손목을 낚아채고, 진환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눈에서 불이 튄다. 진환은,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말해 주십쇼. 누가 이랬습니까?”
“…넘어졌어.”
“어떻게 넘어지면 사람 얼굴이 이렇게 됩니까?! 말도 안 되는 거짓말 마세요, 좀!”
곧이어, 두 손이 뺨을 감쌌다. 다친 곳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다. 밖에 오래 서 있었구나. 손바닥이 차갑다. 기분 탓인지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보스 짓입니까?”
“아냐.”
“그럼 막가파 놈들입니까? 씨발, 그 새끼들. 진작 조져버렸어야 했는데.”
뺨 위의 손을 겹쳐 잡는다. 손길에 놀랐는지, 진환이 번뜩 말을 멈춘다. 천천히, 한마디를 눌러가며, 정윤이 말했다.
“넘어진 거야.”
진환은 오랫동안, 정윤을 들여다보았다. 곧이어 아랫입술을 깨문다. 엄지로 간질이듯 표면을 쓰다듬으며, 진환이 눈을 감았다.
“안 할 겁니다.”
진환이 말했다.
“저라면, 이런 짓 안 할 겁니다.”
이상하다.
정상적이었던 것도, 진환과 같이 있으면 그렇지 않게 느껴진다. 괜찮았던 것들이 괜찮지 않아진다. 무엇보다 괜찮지 않은 건 불안하고 괴로워야 하는 그 과정이 편안하다는 점이다. 심해에 가라앉는 것처럼.
네가 준 거, 죽었어.
말을 하고 싶었다.
미안해. 잘 간직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죽어버렸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금붕어는 죽고, 그는 벌을 받는다. 그게 섭리였다.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은. 허기가 찾아오는 것과 같은.
두렵다.
평생을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산 정윤이었지만, 이런 두려움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가.”
정윤이 입을 달싹였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환은 목에 난 상처 위로 손을 올렸다.
“괜찮습니다. 회장님 오늘-.”
“가라니까.”
그래도 진환이 움직일 생각을 않자, 정윤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가라고!”
두꺼운 두 손이 진환의 어깨를 밀쳤다. 속절없이 밀려나, 진환은 쫓겨나듯이 집 밖으로 내몰렸다.
“잠깐, 왜, 왜 이러십니까…. 형님. 형님!”
그의 얼굴 앞으로 쾅하고 문이 닫힌다. 서서히, 정윤은 문 앞에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금붕어였다. 그다음에는 무엇이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게 진환만큼은, 아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