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골목으로 사내가 달려 들어간다. 새까만 아스팔트 위를 요란하게 때려 대던 삼선 슬리퍼가 기어이 벗겨졌다. 맨발이 까질 지경이 되어서도, 그는 헐떡거리며 달려갔다. 꺾어지는 길옆, 대로로 빠져나갈 길이 보인다. 그가 옆으로 휘어졌을 때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십니까, 사장님.”
머리를 갈색으로 물들인 청년, 진환이 그를 막아섰다. 남자가 욕설을 뱉는다. 돌아서 다시 도망갈 길을 찾지만, 이미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은 살벌하게 생긴 떡대들이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절망으로, 남자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씨발…. 배 째, 이 개새끼들아. 배 째!”
“아니, 뭘 그렇게 욕을 다 하시고.”
진환이 그를 따라 쭈그려 앉는다. 실실 웃는 얼굴에는 잔인한 여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냥 사인만 해달라니까요. 그게 뭐 그렇게 어려워가지고. 사장님 허리도 안 좋으신데 이렇게 달리시고 말이야.”
손을 내밀어 까딱거리자, 뒤에 선 떡대 한 명이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낸다. 볼펜 뒤축을 딸깍, 누른 진환은 귀퉁이에 펜이 잘 나오는지 확인까지 마치고 남자에게 종이와 펜을 건네었다.
남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서류는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내치더니, 이윽고 그가 팔뚝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전 재산이다, 이놈들아. 마누라 죽고 보험금으로 차린 가게란 말이다, 씨발. 그거 없으면 우리 식구 굶는다. 우리 불쌍한 현정이 어떻게 하라고, 그걸 그냥 이렇게 뺏어. 천벌 받을 놈들아!”
김종식이 껌 씹는 소리가 짝짝거리며 뒤에서 들린다. 진환은 고민하는 척,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장님. 저도 압니다. 다 알아요. 근데, 그렇다고 또 어차피 나가야 하는데 어렵게 가시는 것도 좀….”
“차라리 날 죽여라, 이 양아치 새끼야!”
“그 말 되게 살벌하게 하시네, 아까부터. 사장님. 여기 좀 봐요.”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한숨을 푹 내쉬고, 진환이 그의 귓가에 고개를 기울였다.
“사장님. 사장님!”
“못 준다고, 씨발 놈들아!”
“잘 읽어보고 말을 해. 봐봐, 여기.”
서류를 펼쳐, 진환이 먹물처럼 보이는 조항 중 아래의 어느 곳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의구심에 차 그것을 읽던 남자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진환의 얼굴에 넉살 좋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어때. 괜찮지. 우리 회장님께서 특별히 인심 써주신 거예요. 재개발 진행하는 협업사의 자회사 지분인데, 이거 팔면 뭐 여기서 장사하는 건 소꿉장난이야. 사장님 족발 되게 괜찮던데, 전국에 간판 한번 걸어보는 건 어때. 번듯한 집도 사고. 현정이 남들 사는 거 다 누리게 해줘야죠, 예?”
“이걸… 이게, 진짜입니까?”
“우리도 양보 많이 한 거예요, 사장님 사정이 딱해서.”
여전히 남자의 눈에 망설임이 보인다. 그러자 펼쳐진 종이가 조개껍데기 닫히듯 맞물렸다. 진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 그래도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
“잠깐!”
남자가 다리를 붙잡아 늘어졌다. 시큰둥한 표정을 연기하며 진환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 왜. 뭐.”
화상 자국이 덕지덕지 난 주름진 손이 그를 향해 뻗쳤다. 손바닥이 차갑고 축축했다. 침을 꿀떡, 삼킨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
“펜, 펜 이리 주시죠.”
“진작 그러시지.”
사인 받은 종이를 파일철에 집어넣는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못 나가겠다고 버티던 사람들은 다 정리했으니, 마음 놓고 높으신 분들 사업하실 수 있겠지.
파일을 넘겨주자, 떡대가 안절부절못하던 끝에 물었다.
“회장님께서 저까짓 놈한테 지분을 주셨습니까?”
“주셨지, 그럼.”
진환이 히죽거렸다.
“삼 년 전에 부도난 노래방 지분.”
“아….”
어깨를 으쓱하며 진환은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힘으로 양아치 짓 해 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이걸 써야지, 안 그래? 이걸.”
***
노크 두 번 후,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집무실로 들어간다. 보스는 통화 중이었다. 운동장 같은 목제 테이블 위에 파일을 내민다. 박경준이 눈썹을 들썩였다.
“다시 걸게요. 그럼.”
전화를 끊고, 박경준이 서류를 훑어보았다. 눈빛에 약간의 감탄이 어렸다.
“송 사장님 그렇게 싫으시다더니, 양보해주셨네요.”
“좋게 좋게 말로 했더니. 진심은 통한다,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박경준이 웃음을 흘렸다.
“부탁할 게 하나 더 있어요.”
“뭐든, 말만 하시죠. 회장님.”
서랍장이 열린다. 맨 위에 덮인 종이를 꺼내, 박경준이 그의 앞에 내밀었다.
“민 이사님 거였는데, 관리하는 게 어려워서 그런가. 다들 맡기 싫어하네요. 봐줄 수 있겠어요?”
별다른 감흥 없이 서류를 읽던 진환은 곧이어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강남구 노른자위 땅에서 관리하는 유흥업소. 억 소리가 나오는 수익을 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딱 봐도 현금 위주에 돈세탁용 영업장이다. 만지는 돈의 질이 달랐다.
말머리를 더듬다가, 진환이 어설프게 웃음 지었다.
“아니, 회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저 같은 놈이 맡기엔 쪼오금 건수가 크지 않습니까?”
“하긴. 사원한테는 좀 그렇죠.”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린다.
“그럼 실장 하면 되겠네요.”
“예…?!”
두 번에 이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어안이 벙벙해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박성수가 사라지고 실장 자리가 빈 지 한 달이 지났으니, 다음 행동대장을 뽑을 때도 됐다.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또 뭔가를 떠보려는 수작인가?
경준이 웃음을 머금었다.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돼요. 종식 씨한테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 회장님, 또 이러시네.”
망설이던 마음은 김종식 이름이 나오자 깔끔하게 녹아내렸다. 약간의 당혹감이 엿보이던 표정마저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바뀐다.
“싫은 게 아니라, 놀라서 그랬습니다, 놀라서.”
“그럼 맡아주신단 거죠?”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경준이 입매를 들었다.
“솔직히, 성수 형 사라져서 좀 기쁘네. 진환 씨가 워낙 잘해줘서.”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글자를 보고, 박경준이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들었다.
“약속 있는 걸 깜빡했네. 내일 뵐게요, 그럼.”
“감사합니다!”
“잘 부탁해요, 나도.”
깍듯이 기울였던 허리를 편다. 문가로 걸어가는 보스의 등 너머,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 저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구부정하게 어깨를 구부리고 석상처럼 멈추어, 경준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윤은 돌아오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지만, 진환은 계속해서 그를 응시했다.
“맞다. 진환 씨?”
“예, 예…!”
박경준이 갑자기 돌아선다. 긴장해서 바짝 서자, 그가 허공에 짤랑거리는 무언가를 던졌다. 리모컨과 고양이 키 링이 달린 자동차 열쇠다.
“세차 부탁할게요.”
“물론입니다! 아주 반짝반짝하게-.”
말이 끝나기도 전, 경준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닦아놓겠다, 재수 없는 놈의 새끼야.”
중얼거리며, 진환은 열쇠를 움켜쥐었다. 입꼬리가 내려앉는다.
***
슬슬 봄이 올는지, 공기가 서늘한 것에 비해 햇살이 은은하게 따스하다.
“반짝반짝하게 부탁합니다.”
오만 원 네 장을 찔러넣고 세차장 간판이 기대어진 벽에 등을 댄다. 간판에는 눈 모양이 어딘가 불쾌한 세차장 마스코트가 엄지를 세우고 있다. 빤히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져, 진환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새로 산 시계를 SNS에 자랑할 셈이다. 박경준의 행색이 떠올랐다. 평소보다 비싼 정장을 입고 있던 걸 보니, J그룹 사람과 접선할 모양이었다.
민 이사 쪽 세력을 친 이후로, 박경준은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J그룹에서 진행하는 재개발 사업을 처리하겠다고 나서더니, 정말로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구역을 싹쓸이해 버렸다. 그쪽에서는 귀찮고 더러운 일 손에 안 묻히고 처리하고, 이쪽은 영역이 두 배로 늘었다. 경찰에 흠이 잡혔다는 이유로 박경준을 주시하던 J그룹이 이번 일로 그를 완전히 인정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떤 걸 먹으시려나, 그놈들이랑.’
입을 비죽거리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나 시계 브랜드가 잘 보이도록 사진을 찍기 위해 핸드폰을 기울였다. 딱 완벽한 각도를 찾았을 때, 화면에 통화 아이콘이 무자비하게 구도를 가렸다.
“아, 씨…!”
모르는 번호였다. 보이스 피싱이기만 해봐라. 짜증을 억누르고 단말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짜증스러운 어투로 쏘아붙인다.
“누구십니까.”
- 나다, 이진환.
햇살에 데워져 덥기까지 했던 등줄기가,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린다. 잘 아는 목소리였다. 잘 알다 못해, 지긋지긋한 목소리다. 진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씨발….
“강 반장님.”
- 그래, 이 새꺄.
“씨발…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알고 싶냐?
“나 좆되는 꼴 보고 싶어?”
-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씨발 놈아. 네 형, 재심까지 두 달도 안 남았다. 아냐?
“…압니다. 예.”
- 그런데 왜 연락을 안 받아, 새꺄.
“아니, 찾은 게 없는데, 저보고 어쩌라고요. 그리고, 계속 말했잖습니까. 박경준이 그 새끼 사이코라니까?”
- 너 인마, 혹시 뭐 숨길 생각이면-.
“듣자 듣자 하니까.”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어느새, 진환의 손은 묵직하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말했잖아. 난 목숨 걸고 하는 짓이라고.”
- …알아.
“알면 저 좀 믿어주세요. 뭐 돈 떼어먹힌 것처럼 그러지 마시고. 알겠습니까?”
강 반장이 잠시 잠잠해진다.
-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새꺄.
“예, 예. 건강하시고. 예.”
전화를 끊어버린다.
“짭새 새끼. 존나 끈질겨서….”
머리를 긁적인다. 햇살이 자꾸만 눈을 찌르는 게 영 거북하다. 콧등을 찡그리고 주변을 보다가, 진환의 시선이 세차장 구석으로 향했다.
“아저씨! 그거 진짜 가죽이에요. 살살 닦아, 좀, 살살!”
삿대질하며 걸어가는 동안, 왼손의 엄지는 통화 기록을 삭제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창문에 설치된 기다란 테이블에 볼링 핀처럼 줄지은 사람들 사이에 앉아, 진환은 감자튀김을 씹었다. 동준이의 재잘거리는 말소리를 포함해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멀었다. 반도 안 먹은 햄버거가 벌써 한참이나 멍하니 손에 들린 채다.
아직은 그 녹음 파일을 전달할 수 없다. 박경준이 순순히 당해주리란 보장도 없고, 정윤도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물론 지금 그는 정윤을 전적으로 신뢰했지만, 그걸 인정할 준비가 되진 않았다. 일도 바쁘고 상황도 복잡하다. 좌우간 지금은 때가 아니다. 좌우간 기회를 봐야 한다. 좌우간.
“근데, 삼촌. 이거 안 비쌌어?”
동준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이미 곤죽이 된 감자튀김을 삼키고, 진환이 한가득 웃음 지었다.
“야, 삼촌 이제 돈 많아. 부자다, 부자. 뭐, 더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 다 해.”
“진짜? 오올~ 그럼 스파이더맨도 사줄 수 있어?”
“스파이더맨하고 지네맨하고, 파리맨도 사줄게, 형이.”
“뭐야, 삼촌. 파리맨이 어딨어.”
동준이 가게가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다. 형이 그렇게 된 이후, 몇 번 보지 못한 웃음이다. 진환은 물이 든 것처럼 미소 지었다.
치킨너깃을 집어 케첩을 듬뿍 찍어 먹다가, 동준이 위아래로 눈동자를 굴렸다.
“근데, 삼촌.”
“왜?”
“돈 그렇게 많이 벌었는데, 옷은 왜 안 사?”
“내 옷이 어때서.”
“삼촌 나이도 있는데, 계속 그런 것만 입는 건 좀 아냐.”
쪼르륵, 동준이 콜라를 빨아 먹었다.
“양복 좀 사 입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사람은 복장이 제일 중요하댔어. 옷을 잘 입어야 회사에서도 좋아하고 인상도 좋대. 면접 가려면 무조건 양복 입어야 돼. 몰라?”
빨대를 쪽 빤다. 말도 참 야무지게 한다. 요즘 애들은 원래 이렇게 똑똑한가?
“양복이라 이거지.”
“그리고, 좀 변태 같은 얘기인데.”
조카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
조만간 이성 얘기가 나오겠군.
“여자 친구도 그래야 좋아한대.”
그럼 그렇지.
겨우 그 얘기 하나를 하고선 뭐가 그렇게 웃긴지, 혼자서 한참을 키득거린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조카가 웃음을 그치는 동안 햄버거를 물었다.
형수님 몰래 동준이를 집에 바래다주고, 진환은 제집으로 돌아왔다. 번호 키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온다.
문 너머에 보이는 공간은 진환에게 익숙했던 집과는 완전히 다른, 별천지였다. 신축 오피스텔. 복층에 방이 세 개나 있다. 신축 빌딩이라 페인트 냄새가 나는 게 유일한 단점이다. 깨끗하고, 넓고, 전망도 좋다. 월세가 그 전 방의 다섯 배는 나가지만 알 게 뭐란 말인가. 클럽에서만 하룻밤에 벌리는 돈이 얼마인데.
“크, 이게 씨발, 사는 거지.”
침대에 벌러덩 눕는다.
돈이 있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새 시계. 새집. 번쩍번쩍한 조카 선물. 지금이 아니면, 박경준이 창살 너머로 들어가면 얻을 수 없는 윤택함이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오지 않은 지금은 그 즐거움에 집중하고 싶었다.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이윽고 일어선다. 명품 시계의 시곗바늘이 어느새 여섯 시를 가리킨다.
“슬슬 가셨겠네. 우리 회장님.”
자리에서 일어선다. 셔츠를 갈아입으려던 차, 진환의 시선이 옷장으로 향했다.
***
막상 안 차려입던 옷을 입으려니 처음 만나는 것처럼 긴장이 된다. 넥타이는 괜히 맸나. 촐싹대는 거 같게. 매듭을 끌어 느슨하게 만들고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진환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느릿한 목소리가 말했다.
“옷이 다르네.”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 진환은 정윤의 뺨을 잡아당겨 입술을 틀어막았다. 정중하게, 정윤의 팔이 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가 없다.
박경준이 시다바리 노릇을 자처하고, 그의 일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 후, 진환은 경준이 바쁘리란 확신이 들 때마다 정윤을 찾았다. 운이 좋은 날도, 허탕인 날도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은 항상 키스로 끝이 났고, 정윤도 이런 패턴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진환은 조그마한 틈만 생겨도 정윤을 찾았다. 가끔은 그 작은 틈 때문에 하루를 산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입술이 떨어지자, 정윤이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왜 바꿔 입었어?”
“신경 좀 써봤습니다. 잘생겨 보이지 않습니까?”
“얼굴은 똑같은데.”
“예….”
솔직하다니까. 입술이 비죽거리다가, 곧 둥근 선으로 바뀐다. 진환의 눈길이 올라섰다.
“…보고 싶었습니다.”
“아침에 봤으면서.”
“아홉 시간이나 지났잖습니까.”
정윤은 머리를 쓰다듬고, 진환은 거기에 기댔다.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기분이 좋다. 이윽고 고개를 기울여, 차분하게 입을 맞춘다. 뭉근하게 혀를 적시며 얽자 머리가 저릿하다.
‘장난 아닌데.’
몇 번 시답잖은 연애질을 한 적은 있지만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키스만으로도 날아갈 것 같다. 진환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정윤이 부드럽게 입술을 떼어냈다.
“얼굴. 빨개.”
“그렇…습니까?”
“응.”
서서히 정윤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진다. 손길이 벨트에 닿기 전, 진환의 손이 민첩하게 그 손목을 붙잡았다.
“벌써 말했잖습니까, 형님.”
단호한 눈빛이 정윤을 향했다.
“형님 지켜주고 싶다고.”
정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 싸움 잘해.”
“그런 뜻이 아닙니다.”
굳은살이 박인 딱딱한 손을, 손바닥으로 감싼다.
“저랑은 이런 거 할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하기 싫어?”
“충분히 알아가기 전에는요. 싫습니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박아버리고 싶었다. 정윤의 선 좋은 몸을 볼 때마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피어싱을 단 가슴을 주무르고 우는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만 든다. 상스러운 장면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떠오른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난 다르니까.’
정윤에게 자신이 박경준이 그 후레자식과는 다르단 걸, 진정으로 아낀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정윤을 따먹고 싶은 게 아니다. 지금 나를 잠식한 감정은, 이 저릿하고 눈부신 감정은, 절대로 육욕 따위가 아니다. 사랑이다. 낯 뜨거울지언정 그랬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저 같은 추잡스러운 놈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숭고한 감정. 박경준은 절대로 모를 감정이다.
그걸 절대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진환의 손이 메마른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 손짓을 느끼다, 정윤이 입을 열었다.
“…형 얘기 들었어.”
손짓이 멈칫한다. 놀란 시선이 위로 향했다가, 마룻바닥으로 달아났다.
“누가 말해줬습니까?”
“껌 씹는 사람.”
“아, 씨. 김종식 그 새끼. 입만 싸가지고….”
손을 놓는다. 털썩, 진환이 자리에 엎어졌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한 박자가 어긋나게, 정윤이 주저앉는다.
“거기 알아. 커다란 세탁소 있는 곳.”
“정윤 형님이, 우리 형 약방 있는 곳을 어떻게 하십니까?”
“경준이 따라서 가봤어.”
“세상 좁다, 참.”
머리를 뒤로 젖히자, 정윤의 너른 손이 부드럽게 귓바퀴를 감쌌다. 어리광 부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애처럼 어깨에 턱을 대고 뺨에 머리를 비벼댄다. 덩치 큰 강아지 같은 행동에, 정윤이 웃음을 머금었다.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웃음.
“나도, 있어.”
정윤이 입을 열었다.
“…누나.”
“누님이요…?”
금시초문이다. 진환의 눈이 벌어졌다.
“어디 계십니까?”
“중국에.”
“상상이 안 가네요. 어떤 분입니까?”
“나랑 안 닮았어.”
“몇 살 차이?”
“차이 안 나.”
정윤이 눈을 깜빡인다.
“쌍둥이라서.”
벙하니 떴던 진환의 눈은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되돌아왔다. 얕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방금 들은 말을 소화하려 한다. 문득, 말이 튀어나왔다.
“다행이네요. 형님 안 닮아서.”
정윤이 받아들이기 전, 재빠르게 말을 잇는다.
“닮았으면, 제가 정신을 못 차렸을 거 아닙니까.”
입을 헤벌린 채, 정윤은 더 대꾸를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멍하고 둔한 표정이 가슴 아릴 만큼 사랑스럽다. 뺨을 잡아 아랫입술을 오물거리고 문다. 반응하는 정윤의 혀가 아까보다 조금 느리다. 그렇게 당황할 일이야? 웃음이 멈추질 않아, 다리를 베고 누워버렸다. 기분 좋게 속닥거린다.
“누님한테. 버릇없이.”
올려다보자, 우물거리던 정윤의 입가가 미소를 머금었다. 웃기로 결정했구나. 그게 또 이상하게 기쁘다. 손을 뻗어, 진환은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꺼풀을 지나 움푹 팬 흉터가 지문에 감겨든다.
***
실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환에게는 사무실이라는 게 생겼다.
내친김에 서랍장도 새로 짜고 소파도 갈아엎었다. 명판도 새로 맞췄다. C&A 건설 전략팀 관리부장 이진환.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경치다. 창가에 서서 외벽의 창문이 번쩍번쩍한 다른 건물들과 곧 그런 건물이 버섯처럼 돋아날 건설 부지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올랐다.
권력은 보이지 않는 갑옷 같았다. 담배를 꺼내면 불이 붙는다. 잔이 비면 입이 마르기도 전에 차오른다. 운전은 더 안 해도 된다. 처음에는 갑갑하고 어색했지만 사람은 적응이라는 걸 하기 마련이다. 진환은 곧 그럴듯한 우두머리 연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앉은 자리가 쉬웠다는 건 아니었다.
‘무슨 일을 이렇게 벌이고 간 거야?’
도무지 일이 안 끝난다. 박성수 그 새끼는 도대체 벌려놓은 일이 왜 이렇게 많은지. 양아치 하는 일이 어려워봤자 얼마나 어렵겠나 했거늘, 장부 관리며 구역 관리며 회장님 뒤에서 망쳐먹은 게 수두룩하다. 얼마 전엔 박성수가 클럽 핑계를 대고 돈을 뜯어먹었다는 약쟁이가 찾아왔다. 소주병을 들고서. 애들을 대동해서 개박살을 내놓긴 했지만, 여전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박성수, 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눈이 깜빡였다.
‘아니…. 그러니까….’
박성수는, 그러니까, 죽었다. 분명히. 알고 있는데.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 터인데.
정신없이 머리를 휘젓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김종식이 들어왔다.
“사장님! 예, 해결해드려야죠, 그럼. 돈을 빌렸는데 갚아야지, 그 새끼가.”
전화를 저렇게 하면서도 요란하게 껌 씹을 수 있다니.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한참 전화로 떠들어대던 김종식이 보란 듯이 전화를 끊었다.
“이진환이. 아주 터 잡았네.”
“말이 약간 짧으십니다. 이제 제가 선배님 오야붕인데.”
김종식이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본다. 어쩌라는 듯 흘겨보자, 다짜고짜 멱살을 휘어잡아 당긴다. 그가 이마를 들이밀었다.
“씨발 놈. 너. 단물 다 떨어지기만 해봐. 내가 아주 개박살을….”
“치면.”
진환이 말했다.
“전쟁 시작이야.”
원래 개새끼는 몸집이 작을수록 요란한 거라고, 김종식이 딱 그 짝이다. 한 대 후려칠 것처럼 주먹을 들어 올렸다가 헛웃음을 터트리곤 자기가 봐준다는 듯이 손을 턴다. 치와와가 저것보단 용맹하겠다.
김종식이 자리를 비우자, 방금 전의 불경한 생각은 진환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는 처리할 일에 시선이 모인다.
박경준이 별것 아니라는 듯 던져준 사업체에 발을 담그자마자, 진환은 박경준이 뭘 믿고 그랬는지 알아차렸다. 진환이 맡는 일은 흔히 말하는 바지사장. 정말로 중요한 일은 전부 회계사인 최 이사나 정체도 모를 다른 구멍을 통해서 해결된다. 아마 출처도 모를 해외 법인이겠지. 몇 번이나 전담 수사가 들어간 청명파가 아직도 건재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결국 진환이 맡은 일이라고는 업소 물 관리나 수익 앞뒤 계산 정도였다. 불만이라는 건 아니지만. 빚도 못 갚을 약쟁이 잡다가 머리 깨지기가 일상다반사였던 전의 일에 비하면야, 지금 자리는 인생 역전이나 다름없다.
‘빚쟁이 말이 나왔으니.’
업소에서 외상값을 꿨다가 갚지 않은 놈들을 슬슬 뽑아낼 시간이다. 까짓 도박 빚, 그 자리에서 금니를 빼서라도 받아낼 수 있지만, 그건 올바른 사업가의 자세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현물보다 투자 자산이 더 가치 있는 법이다.
아, 사장님 야마가 좀 부족하셨구나. 오늘은 봐드릴 테니 그냥 가세요, 가. 등을 살살 떠밀어주며 빚을 지도록 내버려 두면 외상값은 한 달 만에 갑절, 갑의 갑절, 갑의 갑의 갑절이 되어 그 호구 놈의 골수까지 빨아먹어도 남는 자산이 된다.
이런 놈들을 처자식 집에서 끌어내는 게 몇 달 전까지 했던 일이었는데. 직접 끌어낼 때는 구질구질하고 번잡스러운 일이건만, 엑셀로 정리된 서류 위에서 액수를 헤아려 보니 이렇게 우아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보면 양아치 하는 짓이든 높은 놈들 하는 짓이든 똑같다. 사람 울고 웃고 인생 조지는 게 다 엑셀 놀음, 명단 놀음이란 거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호구 다섯 명 이름 위에 형광펜을 칠하고, 침을 발라 서류 다음 장을 넘긴다.
‘…어?’
중간에 어정쩡하니 박힌 업소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한 달간 도박 업소 관리를 하면서 처음 보는 이름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머리를 굴린 끝에 그 이유를 알았다. 얼마 전에 정윤이 스쳐 가듯 언급한 곳이었다. 박경준이랑 자주 다녔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꽤 중요한 관리 대상이란 건데…. 왜 그런 곳을 지금까지 보질 못했지?’
무심한 호기심으로 넘기고 다음 장을 살피려던 순간 진환의 시선이 다시금 그곳에 멈추었다. 보리라 예측하지 못했던 이름 석 자가 거기 있었다.
***
날이 풀린 걸 제일 먼저 아는 건 미세먼지하고 애들이다. 한적할 줄 알았던 공원은 동준이 또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아이들로 점령된 상태였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서로 술래잡기를 하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힘없이 응시하다가, 진환은 멍하니 팔을 긁었다. 어제부터 내내 이상하게 피부가 가려웠다.
“…써.”
정윤이 말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감각한 말투지만, 어딘지 미묘하게 풀이 죽은 기색이다.
“형님.”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진환이 제 몫으로 산 프라푸치노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망설이며 받아 들지를 않자 적극적으로 그의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를 빼앗아 바꿔 들도록 만들었다.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쪼옥 아메리카노를 빨아올린다. 이윽고 정윤이 느릿하게 주어진 새 음료를 빨아 마신다. 돌덩이 같은 얼굴에 감출 수 없이 꽃이 피어났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정윤이 세련된 카페에서 주눅이 들어 아무거나 주문하고 만다는 건 벌써 한 달 전에 눈치챘다. 그 후로 진환은 정윤이 제 선택에 실망할 때를 대비해 주문하는 버릇을 들였다. 뜻밖에, 조약돌도 불만 없이 씹어 먹을 것처럼 생긴 정윤은 소위 말하는 아기 입맛의 소유자였다. 달고 짜고 불량하고, 폭신한 걸 좋아한다.
‘캐러멜 향도 좋아하는 것 같길래 시럽을 추가해 봤는데.’
대성공이었다. 순식간에 반이 동난 정윤의 컵을 흐뭇하게 바라보자, 정윤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봄볕 탓인지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옷, 바뀌었네.”
“예. 전의 건 옷감도 좀 그렇고, 다들 새로 사는 게 좋겠다고 하길래 장만했습니다.”
“이상해.”
“예? 그럼 안 되는데. 비싸게 주고 샀다고요. 아르마니 아십니까, 아르마니?”
“잘못 샀어.”
히죽이고 입꼬리를 올리며, 진환이 그의 볼을 콕, 찔렀다.
“잘생겨 보여서 심통 나신 거 아닙니까?”
볼을 건드린 손을 정윤이 역으로 감싸서 잡는다. 예상하지 못한 동작에 괜히 마른침이 넘어갔다. 거칠고 딱딱한 손바닥이 잘못하면 망가질 물건을 쥔 것처럼 조심스럽게 제 손등을 쓸어 올렸다. 기도하는 것처럼 정윤이 눈을 감았다.
“그럴지도.”
사랑스럽다.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나뭇잎이 바람 자락에 흔들리고 새들이 날아오른다. 이 빽빽한 콘크리트 숲에서도 살아 있는 것들은 계속해서 살아간다.
“…형님.”
어제부터 자갈처럼 목에 굴러다니던 질문이 튀어나왔다.
“전에, ○○동 뒷골목에 자주 가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정윤이 느릿하게 눈을 뜬다.
“응. 경준이 따라서.”
“거긴 정확히 왜 가셨던 겁니까?”
“일하러.”
“그러니까, 무슨 일 때문에 가셨냐고요. 뭐, 거기 중요한 업소가 있다거나….”
“그건 아니고.”
손등을 따개비처럼 감싸던 두 널찍한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봄 공기에 노출된 손등이 묘하게 쌀쌀맞다.
“창고야. 거기.”
“창고요…?”
“응. 강남에서 팔 약은 거기 둬. 위험하다고 경준이가 옮겼어.”
“짭새한테 들킬까봐, 그런 겁니까?”
“그것도 있고.”
느릿하게, 정윤이 말을 이었다.
“약이 자꾸, 사라져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진환이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난간 위에 떨구고 만 것이었다. 덕분에 중고차 한 대 가격만 한 양복 재킷이 쫄딱 젖었다. 진환은 그러고서도 멍하니 얼어붙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도 안 남은 아메리카노를 통째로 쓰레기통에 던진다. 양복을 털고 핑계를 대며 걸음을 재촉하는 진환의 표정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돌아가야 돼.”
“잠깐만요.”
정윤을 불러 세우고, 진환이 부리나케 차로 달려갔다. 운전석을 뒤지던 그가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로 되어 있고, 물이 찰랑거린다. ‘선물’을 손에 쥔 정윤의 눈이 멀뚱하게 껌뻑거렸다.
머그잔처럼 생긴 네모난 어항 속, 금붕어가 제자리를 돌며 빙글빙글 유영한다. 안에 깔린 조잡한 자갈이며 수초 때문에 연못의 한 조각을 잘라온 느낌이 든다. 유리 벽의 감촉이 차갑다.
“형님, 물고기 좋아하잖습니까.”
대형 마트, 반려동물 코너에서 무작정 산 것이다. 무작정, 가장 큰 물고기로, 무작정, 가장 제 눈에 예뻐 보이는 걸로 골랐다. 레이스 같은 금붕어의 꼬리가 헤엄을 칠 때마다 반투명하게 살랑거렸다. 다홍색 비늘이 무지개처럼 반짝거렸다.
“…기르는 법 몰라.”
“이제부터 배우시면 됩니다.”
정윤의 눈동자가 물에 잠긴 자갈처럼 빛났다.
***
예쁘다.
수조 안에서 오가는 물고기를 바라보며 정윤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하늘거리는 꼬리도 예쁘고, 빛에 따라서 결대로 빛나는 비늘도 예뻤다. 보고 있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계속 보네요. 그거.”
경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정윤은 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변덕으로 그걸 사 왔어요? 제가 사준다고 할 때는 됐다고 해놓고선.”
“마음이 바뀌었어.”
“갑자기?”
“응.”
정윤이 보지 않는 사이, 경준의 표정에 묘한 기척이 어렸다. 차분하고, 어두운 기척이.
이내 그가 미소를 머금었다.
“정윤 씨. 목욕할 때 되지 않았어요?”
“냄…새나?”
“네.”
정윤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제도 씻었는데. 낮에 햇살을 좀 맞아서 땀이 난 건가? 경준의 교묘한 덫에 불과한 것을 모르고, 정윤은 진지하게 제 셔츠를 끌어와 킁킁거렸다. 정말로 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옷 벗고 욕실로 들어가요. 씻겨줄 테니까.”
어깨를 감싸 잡고,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욕실로 들어가자, 나른한 향취가 정윤을 붙잡았다. 라벤더 향기. 욕조에 차오른 더운물이 찰랑거리며 깊고 흰 바닥으로 물그림자가 일렁거린다. 경준은 욕조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전기에 탄 살가죽 냄새와 벌겋게 그을려 욕조 밖으로 나온 팔 한쪽이 눈꺼풀 안쪽을 뒤덮는다. 짙게 눈을 감았다 뜨자, 대장의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대신 경준이 웃는다.
“씻겨줄게요.”
물은 딱 맞게 따뜻하다. 물장난을 하는 애처럼, 경준은 오목하게 만든 손바닥에 물을 담아 정윤의 머리에 얹었다. 짧은 머리카락 사이, 두피 위로 따뜻한 물이 금세 스며든다. 손찌검으로 까진 살갗에 물이 닿자 따끔한 통증이 인다. 따스한 손바닥은 목덜미를 쓰다듬었다가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정윤 씨, 상처 정말 많네요.”
손이 미끄러지며 복부를 쓸었다. 은밀한 손짓은 자꾸만 아래로 파고들어 가며, 이내는 무릎 사이를 벌렸다. 경준은 남몰래 그 장면을 감상했다. 장관이다. 가슴이 수박만 한 남정네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달아올라 있는 꼴이라니. 둔부 골에 손가락이 닿는다.
“그만…!”
그 순간, 정윤이 다리를 움츠렸다.
“호… 혼자서 할 수 있어.”
“정윤 씨.”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는다.
“아까 실수한 것도 그렇고. 오늘 좀 거슬리네요. 저한테 숨기는 일 있어요?”
진환이.
서서히 고개를 젓는다. 수치심을 견디며, 오므렸던 무릎 사이를 조금씩 벌린다. 흉터투성이의 허벅지 사이, 상스럽게 반쯤 발기한 성기가 드러난다.
경준의 시선이 기울어졌다. 아직도, 충분하지 않다. 정윤은 입술을 물고 밀부를 잡아 스스로 벌렸다. 불그스레한 애널이 애원하듯 벌름거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경준이 뺨을 쓰다듬었다.
“예쁘기도 하지.”
***
밀부에 좆기둥이 들락거릴 때마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울린다. 욕조 벽을 잡은 손가락에 자꾸만 힘이 빠진다. 쿵쿵거리고 박힐 때마다 벌려진 허벅지에 단단하게 긴장이 흘렀다. 울리도록 박아넣는 것에 이기지 못하고 허리가 따라서 들썩였다. 감각이 곤두선 탓에 허리를 따라 일렁이는 수면마저 자극으로 느껴진다. 입술을 아무리 물어도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정윤 씨.”
경준이 입을 열었다. 손바닥이 느릿하게 허벅지를 쓸어 올라가, 이미 수차례는 간 정윤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닿을 때마다 가고 있어요. 지금.”
“뭐…? 아냐…. 아냐. 그럴 리….”
정윤이 말을 잇기도 전, 배려심 없는 손길이 그러쥔 성기를 아래위로 흔들었다. 갑작스럽게 민감한 부분이 움켜쥐어져, 정윤이 비명에 가까운 교성을 질렀다. 초라한 변명이 무색하게 벌건 좆대가리가 꿀렁인다. 이제는 정액조차 아닌, 투명한 색의 점액질이 흘러나왔다. 손가락이 은밀하게 귀두를 건드리자 질척이며 액체가 손끝에 감겨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것처럼.
“…그렇게 좋아요?”
오금을 단단히 쥐어 머리까지 다리를 밀었다. 턱 아래까지 물에 잠기며 입술 안으로 물이 들어온다. 헐떡이며 턱을 들자 그렇지 않아도 깊었던 삽입부가 목구멍 아래까지 닿는 것처럼 생경하게 느껴진다.
“박히는 거.”
밀어 올린 손에는 힘이 풀리지 않는다. 좆대가리가 강제적으로 파고들었다. 벌어질 만큼 벌어진 회음부를 짓이기며, 내벽에 좆대가리가 닿을 만치 쑤셔 넣는다. 그대로 허리를 돌린다. 장벽에 닿은 귀두가 뭉근하게 원을 그리며 안쪽을 압박하며 문질렀다. 뇌 내까지 생경하게 긁어 뒤집는 감각이 정윤을 압도했다.
목을 젖히며, 정윤은 숨 한 줌을 구걸하듯 경준의 등을 긁어댔다.
“좋아. 으… 흐응…! 읏….”
얼마나 주물렀는지 불그스레한 손자국이 난 가슴이 부풀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사람처럼 껄떡거리며, 등을 붙잡지만 힘이 풀릴 대로 풀린 팔은 그마저도 단단히 얽어 잡지 못하고 휘청일 뿐이었다.
“힘들, 응…!”
다시금 허리 짓이 이어진다. 주름이 안쓰러울 만큼 펴져 빡빡한 접합부에 좆기둥이 세차게 문질러지면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내벽을 거슬러 박아댔다. 등조차 잡지 못한 팔이 맥없이 떨구어져, 핏기가 몰리고 눈이 붓기 시작한 정윤의 얼굴을 가렸다.
“얼굴.”
경준이 중얼거렸다.
“가리지 마요.”
허벅지 위쪽에 팔뚝을 걸어 눌렀다. 치덕일 때마다 밀려 올라가던 장벽이 빠져나갈 길 없이 좆대가리에 그대로 부딪혔다. 정윤이 억누르지 못하고 울음 섞인 교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안, 으흣…! 가리면, 네가… 앙…! 아흣, 힉…!”
정신을 추스를 틈을 주지 않고 허리를 흔들자 기어이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목 안쪽으로 삼키려 애쓰는 울음 중간중간, 꼴사나운 히끅, 소리가 섞였다. 쾌락을 감당하기도 어려운 가운데 숨까지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발버둥도 치지 못한다. 잘게 몸을 떨렸다.
호흡이 한계에 치달았을 때, 좆대가리가 박혀와 거세게 장벽에 충돌했다. 허리를 들친 채로, 정윤은 이제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아직도 좆대가리는 빠져나가지 않는다. 내벽에 머물며 느릿하게 오가, 정신을 잃지도 못하고 둔한 쾌감에 빠져 휘적이도록 만든다.
“그거, …그으… 으흥… 읏… 그거, 안….”
“네?”
경준이 눈길을 들었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침착한 시선에, 까발려진 듯한 감각이 든다.
“아.”
허벅지를 받쳐 억지로 허리를 더욱 숙이게 한다. 고개를 기울이며, 경준이 물에 잠긴 접합부를 살폈다. 허리가 비틀린다. 지금까지도 압박감으로 자극을 받던 스폿이, 억지로 각도가 틀리며 적나라하게 짓눌렸다.
“이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숨조차 들이마시지 못하겠다. 들락거리기만 해도 달칵대며 스폿을 누르던 두꺼운 좆대가 아무런 가감도 제약도 없이 대놓고 그곳을 뭉갠다. 벌어진 입 사이로 소리조차 나오지 못한다.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정윤 씨. 여기가 좋은 거죠? 말해봐요.”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경준은 재촉하며 집요하게 그곳을 노리며 골반을 움직였다. 전립선을 짓누른 채로 좆대가 들락거렸다. 몸통이 다시금 경련했다. 드라이로 가버렸는지, 이제는 꿀렁이던 투명한 액체조차 나오지 않았다. 강제된 절정에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가, 기진맥진하며 쓰러진다.
“안 돼. 이제, 이젠, 안 돼….”
숨이 넘어갈 듯 목소리가 갈라졌다. 얼마나 이렇게 박혔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물과 쾌감, 어느 쪽에든 잠겨 익사할 것 같았다. 의식이 흐려진다.
하지만 경준은 기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유두의 갈라진 끄트머리에 손톱이 박힌다. 감미롭게 끊어지려던 의식이 억지로 되살아나, 정윤은 악몽에서 깬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저 아직이에요. 조금만 더 버텨요.”
“그만…. 제발…. 그만, 아, 아흐… 흣!”
다시 좆대가 쿵쿵거리며 예리하게 스폿을 짓이기고 들어온다. 어절의 높낮이가 불규칙하게 들썩거리다 이내는 말조차 아닌 소리가 되었다. 입을 다물 수조차 없어, 신생아처럼 입가로 타액이 흘러넘쳤다. 계속되는 절정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좆이 들어오는 대로 흔들렸다.
경준의 손이 턱 아래를 감싼다. 입술이 이마에 닿은 것 같기도 하다. 더는 소리 내어 울 기력조차 없어, 정윤은 뺨 위로 눈물 줄기가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
정윤을 눕히고 방문을 닫는다. 집 안은 고요했다. 경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회계사에게 부탁해 전달받은 자료였다. 나라님들 모르게 일하느라, 손을 좀 빌렸다고 했지.
재미는 없지만, 아주 유익하다. 파일을 덮고 탁자 위에 밀어두었는데, 정윤의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 저 멍청한 걸 좋다고 바라보던 정윤이 떠올랐다. 죽은 것 같던 눈에 돌던 묘한 생기도.
마음에 안 든다.
경준은 물고기를 빤하게 응시했다.
무엇 하나, 성에 차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