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31)

#12

클럽 블랙웨일.

한 달 전에 일어난 칼부림 사건이 뉴스에까지 나온 참이건만, 자정이 되기 전부터 줄이 끊이질 않는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북적인다.

술값 좀 들인 보람이 있네.

진환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제 손안에 이곳의 소유권이 들어온 때부터, 진환은 소위 말하는 ‘마케팅’에 열중했다.

우선은 핵심 고객 파악.

VIP 리스트 명단을 뽑아, 앞 장은 넘겨버리고, 맨 끝장, 명단의 맨 밑, 어느 중소기업 사장이나 방금 사법고시를 패스한 애송이 같은 작은 놈들에게 접근한다. 바람잡이들에게 말을 흘리면 자연스럽게 중심인물들은 넘어오기 마련이다.

그다음은 브랜드 이미지.

그들이 즐겨 찾는 술집이며 영업장을 찾아가 이빨을 털어댔다. 티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번 클럽에서 일어난 칼부림이 안에서 흘러넘치는 약과 샴페인, 돈과 연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뉘앙스를 계속해서 풍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경찰이 봐주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암시를 넌지시 던지며.

양아치들이 쌈박질이나 하는 흉흉한 난장판이 어느새 짭새들도 터치 못 하는 향락의 낙원으로 탈바꿈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첫날, 늘어진 줄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L건설사 최 회장네 사위를 보고, 진환은 그가 제대로 자리매김을 했음을 직감했다.

해낼 줄 알았어.

난간에 기대어 개미 떼 같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인생 첫 성공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었다. 클럽을 열고 일주일간, 진환은 평생 번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만졌다. 당장에 집을 옮겼고, 오늘 아침에는 새 차까지 계약했다. 번 돈을 거의 써버린 셈이지만,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돈이니 미리 써두는 편이 오히려 현명할 것 같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이 정도는 즐겨도 되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다.

사실 돈을 만지기 시작한 다음부터, 진환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지옥 같은 기억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이 클럽이 원래 누구의 것이어야 했는지,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폐차장의 소음마저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음악 소리가 하프 연주처럼 감미롭게 느껴졌다. 술과 약에 취해 몸을 흔들어대는 사람들이 새끼 양처럼 사랑스러웠다.

단점이라고는 하나뿐이다.

“…….”

등 뒤로 산만한 기척이 지나간다. 누구인지 돌아볼 필요도 없다. 진환은 미간을 구긴 채로 머리를 헝클였다.

‘인사 한마디 없네. 딱 부러진 새끼….’

머리카락 뿌리를 움켜잡은 채로 쓸쓸하게 시선을 내리깐다.

유일한 단점.

그건 바로 정윤이, 이 클럽에 밥 먹듯 드나든다는 것이다.

주된 이유는 볼 것도 없이 박경준 때문이다.

사업상의 미팅이 잡힌 박경준이 VIP룸으로 들어가면, 정윤은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그 옆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껍데기 같은 눈으로 미동도 하지 않으며. 가끔 미팅이 길어지면 세 시간, 다섯 시간도 그렇게 버틴다. 역겨운 짓이었다.

그러다 경준이 그를 부르면, 정윤은 그제야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혼이 나간 듯한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돌처럼 굳었던 동작은 살과 피로 차오른다. 문틈으로 경준의 흰 손목이 빠져나온다. 정윤의 손등을 쓰다듬고 얼굴을 매만진다. 싫증 난 장난감처럼 그를 던져두었다는 사실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손짓으로.

그러면 정윤은 눈을 감고, 방 안으로 발을 딛는다.

그다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어금니가 갈린다.

벽을 걷어찬다. 홧김에 저지른 탓에 예상보다도 격렬한 통증이 엄지발가락을 관통했다. 욕설을 뱉다가, 진환은 거만하게 손을 휘저으며 직원을 불렀다.

“예, 사장님.”

“여기. 나폴레옹 가져다줘요.”

“잔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잔 말고.”

직원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능숙하게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문질러 내리며 진환은 난간에 등을 기댔다.

병째로 주문한 건 아무래도 현명한 짓은 아니었다. 내일은 박경준이 조직원 전원을 소집한 날이다. 오래전부터 걸리적거리던 상대 조직을 드디어 청소하려는 것이다. 숙취에 시달릴 만한 짓은 안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충동을 이기지 못해, 진환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역시나였다. 정윤은 이번에도 바위처럼 문가에 서, 경준이 조그마한 말이라도 하기를, 자비를 베풀어 그를 들여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기분이 더럽다.

***

“새끼. 동틀 때까지 떡이라도 쳤냐?”

몰골을 보고 김종식이 내뱉는 말이다. 짝짝 껌을 씹어대는 탓에 저놈 목소리가 평소보다 갑절로 거슬렸다. 진환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정신이 말짱하지 못하고 몸이 찌뿌둥하다. 역시 마지막 한 병은 까지 말고 집에 돌아갔어야 했는데.

“예. 저도 이 좋은 아침부터 선배님 상판 봐서 기분이 째집니다, 아주.”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카악 목을 긁으며 껌을 뱉어내고, 김종식이 좌우로 고개를 기울였다. 목뼈가 풀리며 우드득거린다. 세모난 눈짝이 기분 나쁘게 히죽거렸다.

“배때기에 구멍 안 나게 간수나 잘해, 좆만 한 놈아.”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진환은 앞으로 고개를 틀었다.

골목 저편, 목표물이 보였다. 요란한 셔츠를 입고 흉흉하게 생긴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는 중이다. 머리 위로 남산타워에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네온사인 간판이 조명이 꺼진 채 잠잠하게 드리워졌다. 나눔고딕으로 딱딱 굽어진 알파벳을 더듬더듬 읽어보자면 ‘미스틱’. 진환은 무심결에 웃었다.

‘하여간 양아치 놈들. 창의력 없는 건….’

신기파.

청명파에서 떨어져 나오거나 흡수되지 않고 간신히 숨통만 붙어 있던 건달들이 상경한 경남 건달과 뭉쳐 생긴 새 조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돼지머리에 소꼬리를 합친 오합지졸이었건만, 무슨 연줄이 닿았는지 재개발 건으로 H건설과 결탁한 후 승승장구하고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껏 강남을 넘볼 기미가 보이지 않아 쉬쉬하고 내버려 두었는데. 최근에 기어이 일이 터졌다. 청명파에서 관리하는 도박장에 들어가 깽판을 벌이고 달아난 것이다.

아직 박경준이 언더보스이던 때, 막 김 회장이 병원에 실려 갔던 시기였다. 제 몫 챙기기 바빴던 간부들은 영역 정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부잣집 곳간에 쥐 좀 든다고 거덜 나겠냐’는 식이었다. 대놓고 족치질 않으니, 당연히 놈들은 신이 나 좀먹듯이 구역 여기저기에 깃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지난주부터는 아예 업소를 잡아 대놓고 약 장사를 하면서 이쪽에 덮어씌울 기색이다. 이젠 현실적으로 손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래 청소라는 게 막상 시작하면 생각보다 일이 커지기 마련이다.

진환이 혀를 찼다.

“좀, 많네. 애새끼들이.”

“쫄리면 뒈지든가.”

“아, 예. 네가 칼빵을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새 혈기왕성한 양아치 꿈나무들을 데려온 모양이다. 몇 달 전만 해도 휑하던 아지트 입구가 떡대들로 바글바글하다. 그중 반 이상은 졸업식을 땡땡이치고 왔을 법한 애새끼들이었다. 덩치만 커서 입 걸레나 물 줄 알지, 여드름 자국도 안 여문 사내놈들. 경험도 깡도 뭣도 없는 놈들이겠지만, 패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건, 패거리 크기다.

“먼저 와 있었네요.”

차에서 내리며, 박경준이 말했다. 진환과 종식의 고개가 동시에 뒤로 돌았다. 보스는 여느 때처럼 싱글벙글했다. 이 와중에 하늘이 퍼렇다고, 푸르스름한 렌즈가 달린 선글라스를 썼다.

학습된 자세로 인사하려던 진환이 짧은 순간 얼어붙었다.

경준의 뒤에 큼직한 그림자가 돌아와 있었다. 언제나처럼 멍한 표정으로, 정윤이 느릿하게 차에서 발을 디뎌 내린다. 널찍한 어깨가 차 문에 걸리지 않게 허우적거린다.

‘멀쩡하네. 오늘은.’

간밤의 기억이 떠오른다.

결국,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정윤에 대한 생각을 잡아 누를 수가 없었다. 술기운을 빌어 겨우겨우 잠이 드나 했더니, 꿈에까지 나오는 게 아닌가.

‘이 짓을 하면서 돌아버렸지, 내가.’

잊어버리자. 쪽팔린다. 리셋을 시키려 제 머리를 세게 후려치고, 보스를 향해 걸어간다.

“회장님. 그, 오늘 말고, 준비를 더 하고서….”

“기껏 왔는데 귀찮게 왜요?”

절절매다가, 진환이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쪽수가 밀립니다.”

눈대중으로 세어봐도 머릿수가 이쪽의 두 배다. 아지트 안에 있을 놈들까지 합하면 승세는 더더욱 희박해질 터였다. 박경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 데려와요, 그럼.”

“지금 말씀입니까?”

“으응.”

박경준이 선글라스를 벗어, 양복 재킷 앞주머니에 다리를 걸쳤다. 시원하게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전 먼저 가 있을게요.”

“예? 잠깐만…. 회장님! 박 회장님!!”

말리기도 전, 박경준이 유유히 걸어간다. 당연하다는 듯 정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진환은 입술을 씹으며 보스의 뒤를 따랐다.

***

“어허이, 이, 어딜 막 편하게 들어오시나, 그래.”

건물 근처에 발 딛기도 전, 머리를 스님처럼 빡빡 민 떡대 하나가 가로막아 선다. 상대를 본 진환은 혀를 잘근 씹었다.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폭행 치사로 빵에 들어갔다가 막 나왔다고 해도 믿을 만한 험상궂은 얼굴에, 목둘레에 두꺼운 금목걸이까지 달았다. 바위산 같은 덩치 탓에 키가 늘씬한 편인 박경준이 새끼 사슴 같아 보였다.

보는 사람이 다 쫄릴 지경이건만, 박경준은 그저 살가운 미소를 지었다. 친척 동생이라도 본 듯이.

“신 사장님 계세요? 뵈러 왔는데.”

“신 사장?”

흐릿한 빡빡머리의 눈썹 선이 꿈틀거린다. 헛웃음이 이어졌다.

“미친놈 아냐, 이거?”

“신세 진 적이 있거든요. 외출하셨나?”

박경준이 막아선 사내를 비켜 걸어가려 한다. 사내의 손이 경준의 어깨를 붙잡았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패거리는 말도 더하지 않고 실실 웃으며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야, 옷도 좋은 거 입었네. 너 뭐 하는 놈이야?”

“저요? 궁금해요?”

“너 이 새끼, 죽고 싶구나?”

“그쪽은요?”

“뭐?”

경준의 눈꺼풀이 나른하게 풀어졌다. 눈으로 쫓을 틈도 없이 사내의 팔꿈치가 휘어지며 목, 명치, 그리고 척추가 가격됐다. 반질거리는 구둣발이 종아리를 휘어 차자, 멧돼지 같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경준이 그의 팔을 꺾어 손가락을 잡았다. 떡대들의 표정이 서서히 얼어붙었다.

남자의 검지가 휘어져선 안 되는 각도로 구부러졌다. 듣기 괴로울 정도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몰려 있던 떡대들이 경준을 에워쌌다. 한 놈이 장대를 들고 달려든다. 나무 막대가 경준의 머리를 박살 낼 기세로 달려들었다.

“야, 야, 야.”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정들이 멈추어 우르르 한 갈래 길을 만들고 물러섰다. 그 사이로 뱀처럼 생긴 초로의 사내가 다가왔다. 자세가 얼마나 건들거리는지, 어깨가 귀에 닿을 기세였다.

“이게 누구야. 방콕 갔던 박경준이 아냐.”

박경준이 그제야 쥐고 있던 빡빡머리의 손을 놓았다.

“오랜만이네요. 신 사장님.”

“우리 부회장님께서 이 누추한 곳에는 무슨 일이신가, 그래.”

“신 사장님 얼굴 뵈러 왔죠. 강남에 사업 시작하셨다면서요.”

“이야. 청명파 언더보스가 집들이를 다 와주고. 이 신풍광이, 출세했네. 출세했, 어!”

마지막 말미와 동시에 뱀 같이 생긴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그린 궤적에 은빛이 번뜩였다. 손안에 날붙이를 감춘 것이었다. 칼은 경준의 옷깃도 스치지 못했다. 유연하게 공격을 피한 경준의 자리에 정윤이 차지하고 들어왔다. 정윤의 주먹이 묵직하게 신기파 두목을 후려친다. 순식간에 패싸움이 시작됐다. 주먹과 버터플라이 나이프, 발길질이 골목 안에 한데 엉켰다. 각목을 휘둘러 놈들을 상대하면서, 진환은 예상과는 다른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아주 가까이에서 정윤이 싸우는 방식을 봤기 때문이었다.

주먹질이라면 행동부대 노릇을 하면서 지겹도록 겪었지만, 정윤의 움직임은 시정잡배의 싸움과 전혀 달랐다. 싸움이라기보다는 사냥에 가깝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급소를 겨냥하고, 쓰러트리고, 다음 상대에게 넘어간다. 상대가 기절하지 않으면 눈을 감을 때까지 머리에 주먹을 내리박는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머릿수가 밀린다고 생각한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망을 보던 똘마니의 반 이상이 어느새 쌍코피를 흘리는 신세가 됐다.

신기파 두목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오른쪽에 들려 있던 날붙이가 뒤집혀 돌아 왼손으로 옮겨 갔다. 그 왼손은 바로 앞에 있던 경준의 눈알을 향해 날아들었다.

경준의 앞에 정윤이 들어선다. 신 사장은 나이프를 휘두르려 애썼지만, 더 이상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칼날은 정윤의 손바닥을 파고든 채로 꿈쩍 않았다. 초점이 없이 새카만 눈이 신 사장의 잔상을 담는다.

정윤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무거운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신 사장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대장이 쓰러졌다. 이곳의 주인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공짜로 가져가겠다는 거 아니에요.”

경준이 권리 양도서를 내밀었다. 신 사장을 비롯한 신기파 패거리는 모두 만신창이였다. 얼굴이 부모도 못 알아볼 만큼 부은 놈, 어디가 부러졌는지 끙끙거리는 놈, 앞니가 부러진 놈도 있다. 정윤은 신 사장이 달아나지 못하게 묶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묶는다’는 건 갈비뼈가 으스러질 만큼 납작하게 등뼈를 밟아놓는다는 뜻이다.

“건물 값은 쳐줄게요. 지장만 찍으세요, 여기.”

“…….”

“신 사장님?”

“태국 물을 먹어서 그런가… 많이 물러졌네, 박경준이.”

“그래요?”

살 빠졌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뺨을 만지며 천연덕스럽게 그가 중얼거린다. 신 사장이 불쾌하게 킬킬거렸다.

“너 인마. 좆된 거야. 내가 저기 올라가서 찌르면 너네 다 젓갈 돼, 새꺄. 젓갈!”

“서운하네요. 옛정이 있는데.”

“정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뒤통수 탈탈 털어서 도망간 주제에.”

신 사장의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경준은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영업장에서, 얼마 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어요. 그게 어느 약쟁이 짓이었는데….”

박경준이 고갯짓을 한다. 신 사장의 등을 밟고 있던 정윤이 허리를 숙였다. 그만큼 무게가 척추로 내려가 우드득 소리가 난다. 신 사장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정윤이 그의 손바닥을 붙들었다. 경준이 인주를 내민다. 발버둥을 무시하고, 정윤은 꼭두각시 놀리듯 신 사장의 엄지손가락을 빼 인주에 문질렀다. 이 위에 불그죽죽한 인주가 미끄러졌다. 그대로, 신 사장의 지문이 맥없이 서류 위에 남았다.

“범인을 못 잡았어요.”

신 사장의 얼굴에 검은 봉지가 씌워졌다. 손이 뒤로 묶였다.

“지문이랑, 몇 개 좀 가져가야 하니까 잠깐 번거로울 거예요. 그다음은 편하게 보내드릴게요.”

“이, 씹새끼….”

“하나 더.”

경준은 마지막까지 다정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 돈 훔쳐간 거. 저 아니에요.”

신 사장이 몸을 일으키기 직전, 정윤의 주먹이 그의 얼굴에 냅다 꽂혔다.

***

“아주 그냥, 죽여주셨습니다, 회장님. 그 새끼들 이제 찍소리도 못 할 겁니다.”

“말을 재밌게 하네요, 진환 씨는.”

박경준이 가볍게 웃음 짓는다. 아직도 패싸움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해, 진환은 각목에 맞은 팔이 욱신거리는 것도 잊고 핸들을 두드렸다. 새로 박경준의 운전을 맡은 놈이, 하필이면 근무 첫날부터 머리가 부서지는 바람에 돌아온 자리였지만 기분은 날아갈 것 같다. 사내다운 본능. 아드레날린이 머리에 핑핑 돈다.

신기파 놈들 기세등등한 탓에 덤터기는 전부 저 같은 말단 차지였더랬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짭새한테 책잡히기 싫다고 유야무야하던 간부 새끼들이 얼마나 보기 싫던지. 신기파 두목이 무릎을 꿇는 걸 보니 앓던 이가 빠진 듯이 후련하다.

괜히 후레자식 박경준이 아닌데.

기묘한 존경심이 몰려온다. 무심결에 백미러를 봤을 때였다.

“…….”

반 정도 보이는 정윤의 얼굴이 영 이상했다. 안색이 파랗고 눈이 풀려 있었다. 차 안에는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데도 부르르 몸을 떨며 팔로 몸통을 감싼다. 열이라도 나는 건가?

“…저, 회장님. 정윤 형님이-.”

괜찮은 거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백미러 속 정윤의 고개가 앞으로 꺾어진다. 그리고, 사라져버린다.

끼이익,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가 멈췄다. 진환은 곧바로 허리를 틀어 뒷좌석을 바라봤다. 정윤은 의식이 없다시피 한 상태였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입술이 도무지 제정신 같지 않았다. 식은땀이 엄청나다.

심장이 가파르게 널뛰기 시작했다. 차가워지는 손으로 굳게 핸들을 움켜잡는다.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예?”

뜻밖의 대답에 박경준을 바라본 진환은 한 번 더 얼음물을 맞은 듯 서늘해졌다. 경준은 미소 짓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약은 여기 있으니까.”

무슨 뜻이지? 혼잡한 머리가 정리되기 전, 경준이 발치에 내려둔 서류가방을 꺼내 들었다. 회사원이 들고 다닐 법한 가방 안에서 불투명한 흰색 플라스틱 케이스가 나온다. 달칵. 맑은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투명한 약병과 주사기다.

서서히, 진환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뭘 하시는 겁니까.”

“진통제 놔주려고요.”

진통제? 옘병할 소리 하고 있네.

핸들을 쥔 왼손에 힘이 들어간다. 속 안이 끓어올라 금방이라도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목구멍 바로 위까지 요동치는 심장을 억지로 눌러 삼키며, 진환은 가까스로 웃음을 지었다.

“회장님.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정신도 없으신 것 같은데. 약을 넣는 건, 좀….”

“이래야 나아져요.”

“그럴 리가…!”

하마터면 큰 소리가 나올 뻔했다. 입술을 깨문다.

핸들을 쥔 손에서 하나둘씩 손가락이 떨어졌다. 드러나지 않게 심호흡을 하고, 진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하하…. 그, 아까 한판 하셔서 지치신 모양입니다. 제가 빨리 댁으로 모셔다드릴 테니까-.”

“그럼 진환 씨가 놔줄래요?”

“예?”

경준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들린 희뿌연 플라스틱 몸통이, 유난히 소름 끼치게 뻗은 은색 바늘이 진환을 향했다.

“오른팔은 멀쩡하잖아요. 저 대신 진환 씨가 찔러요.”

“그건….”

“못 하겠어요?”

불투명한 미소.

“왜?”

입이 다물렸다. 박경준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은 채, 피스톤 위에 엄지를 얹고 느릿하게 주사기를 흔들었다.

“좀 답답해서 그래요. 답답하고, 서운해서. 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정윤이 때문이잖아요. 정윤이가 힘들어하는 걸 보니까 마음이 안 좋아서. 봐요. 식은땀 나는 거. 사흘에 한 번은 약을 넣어줬는데, 오늘은 한 방울도 넣지 않았어요. 지금 정윤이, 숨 쉬는 것도 힘들 거예요. 개미가 피부를 갉고 나오는 것 같을 거라고요. 이런 애를,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잖아요. 그래서 도와줬으면 해서 부탁하는 건데. 진환 씨는 계속 싫다는 말만 하네요. 이게 진환 씨한테, 그렇게 불편한 일이에요?”

박경준이 시퍼런 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팔뚝을 감싸 잡아 올렸다. 이미 본 적이 있는 흉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생리적인 거부반응이 일었다. 전염병으로 일어난 발진 같다. 그 자국을 보여주는 경준은 트로피를 자랑하는 듯 여유 넘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진환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부르르 꾹 쥔 주먹이 떨렸다가, 그가 눈을 떴다.

“약을 넣어 ‘줬다’고 하셨죠.”

이제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 자국… 회장님께서 그러신 겁니까?”

“네.”

“어째서?”

“재밌으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

고개를 들었을 때, 진환은 숨이 틀어막히는 것을 느꼈다.

저를 마주 보는 중임에도 박경준의 눈은 무엇도 담지 않았다. 공손하고 다정한 미소에서 전해지는 것 역시 소스라치는 한기뿐이다. 구석에 몰아넣은 생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 같은 눈빛.

“진환 씨.”

경준의 손이 감겨 있는 눈꺼풀 위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정윤이, 그렇게 감싸줄 만큼 가치 있는 사람 아니에요. 사람 해치고. 구멍 팔고. 약까지. 한 달 전에는 심심하다고 좆을 찾으러 나가더라니까. 좀, 그렇죠?”

“…….”

“그런 애를, 진환 씨는 계속 애틋해하네요. 뭐 얻어갈 게 있어 보여요?”

식은땀이 흐른다.

얻어갈 것. 있었다. 많았다. 처음에는 정보였고, 지금은 입막음이다. 처음부터 진환은 그럴 목적으로 정윤에게 접근했다. 친한 척을 하고 호감을 사고 돌봐주었다. 그 얘기를 캐내려고 하는 걸까? 속내를 알아내시겠다고? 어디까지를 알고, 어디까지를 듣고 싶어 하는 거지?

목이 타들어 간다. 억지로 치켜올린 입꼬리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면? 정의로운 사람 되고 싶어요? 결벽증 같은 거 있어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재밌네요. 옛날 생각이 나요.”

“예…?”

“성수 형이, 진환 씨 얘길 했었거든요.”

고운 눈꼬리가 곱게 휘어졌다.

“사라지기 전에.”

사지의 힘이 풀리고, 뱃속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분노가 치밀어 갑갑하게 끓어오르던 등짝에 갑자기 오한이 스쳤다.

당했다.

저 새끼가 이끄는 대로 구석에 몰려, 빠져나갈 길도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싫다고 말할 명분도, 이유도, 모두 사라졌다. 이 이상 거절하면 박경준은 그를 공개적으로 의심할 것이다. 진환의 행동은 약을 만지기 싫어하는 프락치의 수상한 짓거리가 될 것이고, 정윤에게 정보를 목적으로 접근했던 것도 들통날 것이다.

그러면 진환은 해가 뜨기도 전에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김 회장이나, 박성수처럼.

그것만은 싫다.

속이 메슥거린다. 어지러운 시선이 정윤을 향했다. 그의 상태는 아까보다도 더 좋지 않아 보였다. 눈에 힘이 풀리고 머리가 늘어졌다. 금단 증상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다.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그의 몸에 더 이상 독을 집어넣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하지만, 살고 싶다.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지금 당장은 죽고 싶지 않았다. 들이마시는 공기, 박동하는 심장, 피부에 닿는 공기의 흐름까지 놓고 싶지 않았다. 살고 싶다. 그냥, 살아만 있고 싶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멈추고 몸이 식어버릴 것처럼, 의식이 까맣게 암전되어 사라질 것처럼 두렵다. 배에 칼이 들어왔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한기가 온몸으로 기어오른다. 칼날에는 형체가 있었다. 위협과 피해가 뚜렷하다. 박경준의 눈깔 저편에 깔린 무언가에는 그게 없었다. 허무뿐이다.

저런 것과는 싸울 수가 없다.

차분한 절망이 찾아왔다. 싸울 수 없다. 포기하는 수밖에,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입꼬리가 내려앉는다.

“…알겠습니다.”

손바닥을 내밀어, 진환이 주사기를 받아 들었다.

박경준의 미소가 짙게 물들었다.

“여기에 찔러요.”

고운 손가락이 정윤의 팔을 감싸 쥐더니 드러난 혈관 하나를 지그시 눌렀다.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진환은 고쳐 든 주사기를 가까이에 가져갔다. 손끝이 누른 자국 바로 그 위에 은색 끄트머리가 닿는다. 바늘이 관통한다.

‘끝내버리자.’

피스톤 위에 엄지가 올려졌다.

‘얼른 끝내버리고, 동준이 얼굴이나 보러 가는 거야.’

멀쩡하게 걸어서. 살아서. 더는 아무런 감각도,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진환은 피스톤을 눌렀다.

아니, 누르려고 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도무지 들어가질 않는다. 단순한 일이었다. 심지어 스스로 하려고 생각한 일이기까지 했다. 약을 진탕 주사해 죽여버리자고, 그런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그런데도,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다. 철사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틀렸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피스톤을 누르고 싶었다. 눌러야만 했다. 하지만 바늘 끝이 지탱한 정윤은 무방비하다. 밀어낼 수가 없다. 벼랑 끝으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박경준의 시선이 서늘하게 눈금이 내려가지 않는 주사기로 향했다.

“못 하겠어요?”

“…….”

“진환 씨?”

“그게….”

긴장에 허물어져, 멍청한 말이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정윤이 눈을 떴다. 아주 가늘게. 제 얼굴을 보고 있던 박경준의 시야에서 빗겨난 곳에서. 힘없는 시선이 팔뚝을 찌른 바늘을, 진환을 번갈아 훑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

이윽고, 정윤의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들린다. 그가 말한다.

‘해.’

진환은 하마터면 고개를 저을 뻔했다. 경준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충동을 참고, 긴 숨을 내쉰다.

조금씩, 피스톤이 밀려 들어갔다. 약이 밀려들 때마다 정윤은, 더 뻣뻣해지고, 더 서늘해지고, 더 흐릿해졌다. 눈금이 완전히 내려가고, 진환은 바늘을 뽑아냈다. 진환의 손을 겹쳐 잡아, 박경준의 손으로 주사기가 옮겨간다.

“잘했어요.”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이제 돌아가요. 진환 씨도 피곤할 텐데.”

진환은 핸들을 잡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산산조각 나는 유리와 불꽃이 자리 잡았다.

***

“야, 이진환이 덕분에 우리가 이런 데에서 다 놀아보고, 야.”

동창이 어깨를 얼싸안으며 소리쳤다. 멀게만 들린다. 양주를 기울이다가, 진환은 룸을 나갔다.

“어디 가?”

“화장실.”

가벼운 새끼들. 속으로 괜한 욕을 씨불이며 복도를 걷는다. 얼마나 오래 그랬지?

웅웅대는 클럽 노랫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난간에 서, 흐리멍덩하게 플로어를 내려다본다. 누군가가 이끄는 것처럼 계단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가장자리에 있는 바로 가, 손에 잡히는 대로 술병을 낚아챘다. 막는 사람은 없었다.

병을 기울이며, 진환은 클럽 밖으로 나선다. 속이 들끓었다.

금요일 밤이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골목의 간판이란 간판은 여전히 번쩍거린다. 진환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간판의 불빛도, 가게 앞을 지나갈 때마다 들렸다가 안 들리기를 반복하는 시끄러운 유행가도 모두 지긋지긋하다.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어 술병을 기울인다.

그나마도 병은 곧 바닥을 보였다. 아무리 흔들어도 감질나는 방울밖에 나오지 않자, 진환은 홧김에 병을 내동댕이쳤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유리병이 산산조각 난다. 눈앞이 휘어지며 몸이 휘청거린다. 얼굴을 감싸고, 진환은 가로등 옆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오래 그랬지?

얼마나 오래, 약을 맞았지?

갑자기 약에 취해 나타났던 정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멍 자국이 불어난 팔뚝이 떠오른다.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박경준 짓이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이 약을 넣고 있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추잡스러운 재미를 보겠다고.

그런데도 난.

‘보아하니 약 때문에 회장님 옆에 계시는 것 같은데-.’

숨이 막혀온다. 세계가 빙글빙글 꼬리물기를 한다.

***

뜻밖에, 정윤은 문을 열어주었다.

약에서 덜 깨어났는지 눈빛이 몽롱하지만, 대체적으로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말끔하다.

“술 냄새 나.”

“들어가도 됩니까?”

“안 돼.”

“왜요? 회장님 때문에?”

진환이 낄낄거렸다.

“안 계신 거 다 압니다. 내가 이제 박 회장님 시다바리인데.”

다시 문을 닫으려는 순간, 진환이 그를 붙잡았다. 정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친한 척하지 말라며.”

“저 때문이었죠?”

정윤의 표정이 굳는다. 진환은 계속했다.

“그날. 소파에서…. 그거. 저 때문에, 그런 꼴을 당하셨던 겁니다.”

“…….”

“전, 그것도 모르고.”

“…….”

“…아프셨습니까?”

잠깐의 정적이 일었다. 이윽고,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런 짓 당하고 괜찮은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난 그래.”

정윤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돌아가.”

“씨발….”

갑갑함에, 그리고 머리가 깨질 듯한 알코올 탓에, 진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설이던 정윤이 따라서 무릎을 굽힌다. 이어서, 너른 손바닥이 머리 위에 닿았다. 이제는 알겠다. 이건 정윤의 습관이다. 다리를 떨거나 손톱을 무는 것 같은 행동. 자기가 내게 무슨 하는지도 모르고.

아마 그 습관 때문에, 정윤은 끝끝내 자신을 감싸고돈 것이다.

그런 순간에서까지.

손을 뿌리치고, 진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에서,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물었었지.

대답은 한 가지다. 네가 싫었으니까.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는 모습에 화가 났다. 걷어차이는 개 같은 그 신세가 딱했다. 박경준만 쳐다보고, 박경준의 손짓에 목숨까지 바치는 충견이 왜 제게도 헤프게 웃어주냔 말이다. 너한테 왜 잘해준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네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짓을 했는지 상상도 못 하면서. 밉고, 지긋지긋하고, 짜증스럽다. 답답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 씨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울음이 날 것 같다. 고개를 숙인 채, 진환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형님. 저 큰일 난 것 같습니다.”

“뭐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정윤은 반은 어리둥절하고, 반은 졸린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눈꺼풀이 감기고 뜨일 때마다 패인 흉터가 씰룩거린다. 어둑한 거실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 눈이 온다고 하더니, 컴컴해질 시간인데도 창밖이 희끄무레하다.

진환은 서서히 손을 뻗어 정윤의 볼품없는 양 뺨을 붙들었다.

그러곤 입술을 포개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묻는다. 뭘 하는 거냐고.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다. 그가 미워서 그만둘 수가 없다. 그가 가여워서 그만둘 수가 없다. 추락하고 있는 그를 붙잡고 싶어서. 건져내고 싶어서. 그 손을 잡는 게 내가 되었으면 해서.

그래서.

“그, 만….”

정윤이 손목을 움켜쥔다. 순순히, 진환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가까이에서 본 정윤의 표정은 은밀하게 들떠 있었다. 동동 눈을 굴리는 흉터투성이 얼굴이, 그저 어여쁘다. 가슴이 저리도록.

“…방금 것도 실수야?”

“그렇게 보이십니까?”

떨리는 손끝. 정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뭉근한 머릿속이 열에 찬다.

“…아니.”

진환이 다시 입술을 덮쳐왔다. 달갑게, 그가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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