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뽀얀 국물의 설렁탕 두 그릇을 테이블 위에 턱하니 얹어놓고 서빙하는 직원이 돌아섰다.
저녁 시간, 국밥집에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막 불에서 떼어 왔는지, 뚝배기 안 설렁탕은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정윤과 마주 앉은 채, 진환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뚝배기를 노려보았다. 배가 고프다는 정윤의 말에 적당히 눈에 띄는 식당을 골라 들어오긴 했지만 식욕이 돌진 않았다.
의욕 없이 소면을 건져 후후 부는데, 정윤이 게걸스러울 정도로 고개를 박고 국물을 퍼먹기 시작했다. 뜨거울 텐데도 무던한 얼굴로 한참이나 국물을 마시다가, 뒤늦게 흰 쌀밥을 볼이 불룩해지도록 입 안에 넣는다. 진환이 고기 몇 점을 건져 먹는 동안, 정윤의 그릇은 절반이 넘게 사라졌다.
‘언제 봐도 잘 먹는다니까.’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진환은 김치를 잘게 찢었다. 딱 먹기 좋은 크기로 찢어진 배추 줄기를 들어 막 한 술을 뜬 밥숟가락 위에 얹는다. 정윤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환이 중얼거렸다.
“퍽퍽하지도 않습니까? 밥만 먹으면.”
“…몰랐어.”
“뭐, 요령껏 드시죠. 그럼.”
김치가 얹힌 밥 수저를 응시하다가, 정윤이 입을 벌렸다. 생긴 건 늑대 같은 송곳니가 났을 것 같아서는, 의외로 가지런한 치열과 발그스레한 혓바닥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식당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진환은 군침을 삼켰다.
이윽고 입이 닫힌다. 먹성 좋게 김치가 씹히며 우적우적 소리가 울렸다.
“태국에선 먹는 것도 달랐죠?”
“응.”
“한국 음식은 안 그리우셨습니까?”
“딱히.”
먹는 것에 까탈스러운 편은 아닌가보다. 가만히 생각하는데, 정윤의 시선이 옆 테이블을 향해 있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도가니를 시켜 막걸리 안주 삼고 있는 아저씨 한 명이 보였다. 먹음직스러운 수육에서는 폴폴 흰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드시고 싶으십니까? 수육?”
“아니.”
“그럼, 뭐.”
그런 줄로 알고 밥을 말기로 한다. 식욕은 없었지만 생리적으로 허기가 들었다.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옅게 웃음이 나왔다.
‘내까짓 게 살아보겠다고.’
밥이 말린 고기국물을 소면과 함께 숟가락에 퍼 올린다. 누리끼리하고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입 안에 넣으려던 때, 진환의 입이 뚝 다물어졌다.
“형님.”
“어?”
“그만 보시죠.”
“뭘?”
진환이 고갯짓을 했다. 정윤은 그제야 한참을 쳐다보고 있던 옆 테이블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아마 그 자리에 앉은 불쌍한 양반은 막걸리가 코로 나와도 모를 지경이었을 것이다.
“…미안.”
정윤의 어깨가 추욱 가라앉는다. 내려간 눈꼬리가 청승맞게 처진다. 또다. 야단맞은 동물처럼.
한숨을 내쉬고, 진환이 점원을 불렀다.
잠시 후,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육 한 접시가 올려졌다. 정윤은 어느 원시 부족처럼 허겁지겁 고기를 먹어댔다.
“안 뺏어 먹습니다. 천천히 드시죠.”
“응.”
말만 그렇게 할 뿐, 젓가락질 속도도 고깃덩어리를 삼키는 속도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답만 잘하는 기질이 있군. 찬물을 들이켜며 속으로 정윤에 대한 평가를 갱신한다.
깍두기를 씹자 볼 안이 알싸하게 쓰렸다.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오전에 김종식 개자식들에게 얻어맞는 바람에 멍이 들어 퉁퉁 부은 탓이었다. 찬물을 머금어 가라앉히고 있자 정윤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스뎅 밥그릇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이제 나가도 되느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왜 그랬어?”
질문이 올 줄은 몰랐다. 당황을 감추며, 진환은 머금은 물을 단번에 삼켰다.
“무슨… 뭘 말입니까?”
“병원에서.”
진환은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정윤은 이쪽을 바로 마주 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비뚤어져 어색하게 깍두기나, 테이블 가장자리의 호출 벨 언저리에 머물렀다. 평소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꾹꾹 눌러놓았던 기억이 용수철 장난감처럼 머릿속에 번뜩이고 들어왔다. 키스 얘기다. 왜 그때 입을 맞췄느냐고, 그걸 묻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진환 본인도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모른다는 대답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거북한 대화를 피하고 싶다면,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정윤이 원하는 대답이 대체 뭐지?
사고가 경직된다. 새하얗게 머리가 질린 와중에, 누군가 줄을 잡아당긴 것처럼 턱이 움직였다.
“실수였습니다.”
정윤의 가라앉았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제대로 골랐나? 빠르게 입을 다물면서도, 진환은 정윤의 반응을 면밀하게 살폈다. 관심을 보이는 걸로 보아 잘 고른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싫어하는 기미는 아니다.
“실수?”
“예, 그… 형님 볼에 속눈썹이 묻어 있었는데. 그걸 떼어낸다는 게, 고개가 미끄러져서. 하하.”
“그래.”
“신경… 쓰이셨습니까?”
“아니.”
정윤의 시선이 남은 수육으로 돌아갔다. 그게 전부였다. 남은 식사 시간 내내, 정윤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기 접시를 비우는 데에 전념했다. 눈썹이 들리지도, 입꼬리가 들썩이지도, 다리를 떨지도 않았다. 평소와 똑같다. 똑같이 무표정하고, 나른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괜히 쫄았네.’
남모르게 쓴웃음을 머금는다. 아마 키스가 아니라 더한 짓이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테지. 그 자리에서 박았어도. 따귀를 때렸어도. 무엇을 해도 정윤에게는 의미 없는 짓인 것이다.
얼굴로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정윤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개를 틀어, 진환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죠.”
계산대 앞에 선 진환은 영수증만 가득해 쓸데없이 두둑해진 지갑을 열었다.
‘젠장….’
오천 원이 부족했다. 녹색 종이 쪼가리 수를 필사적으로 헤아리다가 포스기에 뜬 액수를 봤다가를 반복한다. 그런다고 없던 돈이 뚝 떨어지진 않았다.
‘그놈의 수육 때문에….’
어쩌지? 카드를 쓸까? 전에 받은 신용카드는 진작에 한도가 찼다. 비상금이 든 통장 카드는 들고 다니지 않는다. ATM이 있느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생까고 확 도망쳐?
두통이 돌아오려 할 때 즈음, 어깨 위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의 큼지막한 손안에 샛노란 오만 원권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역 앞에서 나눠준 전단지처럼 구깃구깃하다. 꾸물거리던 진환 탓에 짜증이 날 대로 나 있던 점원은 망설임 없이 정윤의 손에서 돈을 받아 들었다. 현금 영수증은 필요 없다고, 정윤이 점원에게 대답했다.
“고기, 잘 먹었어.”
그러곤 온화한 눈길을 내리깐다. 짐승처럼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꼭 갚겠습니다.”
가게에서 나오자마자, 진환은 제일 먼저 선언했다.
“십만 원이죠. 돈 생기는 대로 바로 입금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갚는다니까요.”
돈도 그렇게 많으면서, 왜 지금껏 수족관은 안 보러 간 거야? 연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벅벅 문지른다. 그렇게 고개를 든 순간, 진환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
정윤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또 저런 표정이다. 어린애나 귀여운 동물을 보는 것 같은 표정. 다정하고 부드럽기만 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표정.
불만도, 시시껄렁한 생각도, 속 쓰림과 화끈거렸던 낯짝까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진다. 명치가 따끔거린다.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슴이 갑갑했다. 산소가 모조리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저 인간은, 어떻게 저렇게 웃지?
이 바닥에서 저런 표정으로 돌아다닌다는 건 벌거벗고 굶주린 사자 앞에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용해달라고,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조롱해달라고 구애하는 꼴이었다.
진환은 일찌감치 철갑 두르는 법을 터득했다. 둥글둥글하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는 법. 그래서 정윤의 무뚝뚝함이, 평소에는 미동의 변화도 없는 표정과 생각을 들여다볼 수 없는 뿌연 눈빛이 그와 비슷한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이라고. 하지만, 그렇다면 저렇게 웃으면 안 된다. 저따위 식으로 사람을 봐서는 안 된다.
정윤은 꽁꽁 언 손을 녹이듯 제 손에 입김을 불었다. 날숨과 함께 흰 입김이 서리처럼 밤공기에 퍼지며 녹아든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든다. 달을 올려다본다. 폐차장에서 보았던 그 옆얼굴에 지금의 그가 겹쳐진다. 투박한 얼굴선과 밤공기에 가려져 차분하게 그림자 진 흉터. 초점 없이 뿌옇게만 보인 눈은 달빛을 받아 묘하게 반짝인다. 주위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주변의 경치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고 만다.
널 돕고 싶었어.
옥상에서 들었던 말이 나직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것뿐이야.
안 돼. 진환은 직감했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도 직감했다. 이게 무엇이든 간에 위험하다. 이게 무엇이든 간에 그를 위험에 집어넣을 게 분명했다. 이게 무엇이든 간에.
“형님.”
입을 연다.
“이제, 친한 척 안 하는 게 어떻습니까.”
하늘을 향했던 정윤의 시선이, 서서히 그에게로 돌아간다. 진환은 헝클어진 염색 머리를 나부끼며 차분히 그를 마주했다.
“안 좋을 것 같습니다. 저한테나, 형님한테나.”
“그래?”
“그렇습니다.”
말간 정윤의 눈이 한 번 깜빡거린다. 짧은 속눈썹이 부드럽게 내리깔린다.
저 눈꺼풀이 올라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다시 눈을 마주 보는 날에는 아까처럼 사로잡히게 된다.
얽히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 진환은 돌아섰다. 외면한 채로 발을 디뎠다. 겨울바람이 고막을 막아버릴 듯이 귓가에 웅웅 퍼져나갔다. 그 사이로 저를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놓아주겠다는 듯. 처음부터 붙잡을 뜻도 없었다는 듯.
***
고기가 썰리며 붉은 육즙이 터져 나온다. 고기의 단면, 불에 익어 야들야들해진 조직을 바라보다가, 입 안에 넣는다. 맛을 음미하듯 정성을 들여 씹어 삼킨 후 냅킨을 들어 입 주변을 닦는다. 경준이 눈길을 들었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여유가 흘렀다.
“식욕이 없어요?”
나이프를 달그락거리던 중 경준이 물었다. 소가 고깃덩어리 보듯이 스테이크를 쳐다만 보고 있던 탓이다.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곧 나이프를 들어, 판자에 대고 톱질을 하는 듯이 스테이크를 썰어 낸다.
“여기 좋네요. 야경도 근사하고.”
경준은 시선을 틀어 서울의 밤 시내가 환하게 보이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으로 손에 냅킨을 걸치고, 벨벳 조끼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들이 테이블 사이를 지나다니며 조용하고 정확하게 잔을 채우고 음식을 나른다.
“고기는 어때요?”
“싱거워.”
“매정하긴.”
머리를 빗어 뒤로 넘긴 종업원이 테이블에 다가왔다. 정윤의 얼굴을 보고도 깍듯한 태도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빈 잔에 검붉은 와인이 찰랑이며 차올랐다. 그가 경준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전 됐어요.”
경준이 손을 내밀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종업원을 위해, 경준은 마시던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투명한 색에 기포가 파르르 올라온다. 사이다.
“술을 못해서.”
눈을 휘면서 웃는다.
예의 바르게 알았다는 대답을 남기고 종업원이 걸어간다. 경준이 탄산수를 머금고 내려두었을 때 정윤이 입을 열었다.
“마실 줄 알잖아.”
“일 때문에 그러는 거죠. 예의 없게 거절할 수도 없고.”
거짓말이다. 상해 사람들을 상대로 접대할 때에는 고량주 한 병을 거뜬히 비운 것도 본 적이 있다. 그에 비해 정윤은 덩치만 클 뿐, 금방 얼굴이 붉어지고 취기가 올라 좀처럼 술이 좋아지지 않았다. 와인도 경준이 멋대로 주문한 것이다. 그나마도 떨떠름하고 쓴맛밖에 나지 않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 정도 남은 고기를 남겨두고 경준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정윤이 식사를 마치는 동안, 그는 유리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빙빙 훑으며 시간을 보냈다. 레스토랑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 사이, 마구잡이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불청객 같다.
불청객. 정윤의 존재 자체가 그랬다. 마치 어릴 때부터 이런 것을 누려온 듯 자연스러운 경준과 다르게, 그는 이 공간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가슴부터 꽉 끼는 양복 셔츠는 불편하고 신경 쓰인다. 당장이라도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고, 멍청해 보일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주변을 흘겨보게 된다. 관절이 삐걱거린다. 들짐승이 된 것 같다. 남들 보는 시선 앞에 벌거벗겨진 흉터투성이 짐승.
경준이 턱을 괴었다.
“자주 와요. 이번 건만 잘 끝내면.”
“필요 없어.”
“왜요? 경치 좋고. 맛도 괜찮고. 분위기도 이 정도면… 근사하잖아요.”
“그다지.”
“정윤 씨,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네요. 나쁜 일 있었어요?”
칼질이 멈춘다. 정윤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나쁜 일.
‘친한 척 안 하는 게 어떻습니까.’
여린 얼굴은 아직 완전히 어린아이 티를 벗지 않았다. 독한 척, 똑똑한 척하려는 훤칠한 눈에는 이상한 온기가 어렸다. 입고 나온 짧은 겨울 점퍼는 멋이 잔뜩 들었지만 별로 따뜻해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막 돌아선 얼굴은, 이상하게도, 울상 같았다.
무슨 말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 닥쳤다. 정윤의 말은 고요하게 잠겨버리고, 진환은 그를 등지고 멀찍이서 걸어갔다.
남은 것은 서울의 밤거리뿐이다.
‘그런 것도 나쁜 일인가?’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아프지도 않았고, 강제로 당하지도 않았다. 물고기를 보고 오랜만에 좋아하는 설렁탕을 먹었다. 나쁘게 봐야 할 일은 어느 것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분이 안 좋을 이유도 없을 텐데.
포크에 들린 고기가 덜렁거린다. 한참을 응시한 끝에, 정윤이 그것을 입에 넣었다.
“아니.”
그가 대답했다.
깍듯이 인사하는 종업원을 돌려보내고, 경준은 방 안을 가리켰다.
“이런 걸 잘 몰라서. 제일 좋은 걸로 달라고 했어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다른 세계에 갑자기 던져진 것처럼, 상상도 못 한 커다란 공간이 펼쳐진다. 벽 가장자리마다 은은한 금빛 테두리가 둘려 있고, 중앙에는 아이보리색 소파와 커다란 테이블이, 그 저편에는 주름 한 점 없이 빳빳한 시트가 덮인 침대가 기다린다. 침대가 맞을까? 정윤의 눈에는 집채만 한 시트 덩어리로 보였다. 잠을 자는 데에 저렇게 드넓은 공간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가구마다 윤이 났다. 바닥이 이상하게 부드럽다. 함부로 방해해서는 안 되는 세계 같다. 멀뚱히 얼어 있자, 경준이 보채는 아이처럼 팔목을 잡아당겼다.
“편한 곳에 앉아요.”
***
“팔 이리 대요.”
정윤은 가만히 팔을 내밀었다. 창밖으로 지평선이 안 보일 만큼 뿌연 밤하늘이 들어왔다. 달빛마저 두꺼운 대기에 번졌다. 방콕도 공기가 안 좋은 곳이 많았지만, 높은 곳에서 보는 대기 오염은 유난히 장엄하다.
“전만큼 넣을게요.”
“응.”
경준은 더 이상 참을성을 가지지 않았다. 새로운 벌의 일부다. 그는 이제 계산된 양을 주사해 넣었다. 죽지 않을 만큼. 그러나 몸이 충분히 반응하고 신경이 기뻐할 만큼. 금단 증상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었을 때, 다시 약물을 찔러 넣는다.
어떤 계획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경준은, 그를 중독자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대장 밑에 있었을 때처럼.
더럭 겁이 났다. 그때로 되돌아가는 건 싫었다. 고상한 이유 때문은 아니다. 머리가 멍한 기분도 썩 좋지 않았고, 자꾸만 심장이 벌떡거리는 것도 싫었다. 금단 증상은 끔찍하다. 환각은 가끔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드러낸다.
바늘이 닳기 전, 잠자코 내밀었던 팔이 굽어졌다.
“정윤 씨.”
“…….”
마지막으로, 정윤은 애원해보기로 했다.
“하지 마.”
“약속했잖아요.”
“도망 안 가. 정말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정윤의 눈동자가 구부러졌다.
“나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쥔 주먹이 덜덜 떨려왔다.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로, 정윤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도, 너 사랑해.”
주사기가 시트 위에 올려진다.
따뜻한 경준의 두 손이 얼굴에 닿았다. 정윤은 아찔하게 눈을 감았다. 상냥하기 그지없게, 경준의 손바닥이 뺨 위를 문질러 내렸다. 다정하다. 자식을 어루만지는 부모의 손처럼. 일그러진 흉터 위를 쓸어, 머리를 가만히 만져 올리고, 경준이 미소 지었다.
“그래요? 나 사랑해요?”
먼지가 덮인 하늘은 흰색으로도, 회색으로도 보인다. 경준의 어깨 너머에 하늘에 잠식당한 고층 건물 그림자가 어슬렁거린다.
상냥한 손짓이다. 엄지가 얇은 입술 선을 훑었다. 경준은 웃고 있었다.
“그럼 내 말 들어요.”
눈을 감자 몸이 떠오르고, 세계는 잠잠해진다. 물고기가 보인다. 가오리도. 상어도. 떠오르는 기포도. 물속은 고요하고 예쁘다. 뱃고동이 들린다.
잘 아는 풍경이다. 여기까지는.
‘형님 가만 보면.’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되게 귀엽습니다.’
티끌 없이 저를 보는 듯한 눈동자.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시선.
왜 네가 여기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윤은 환각에 젖어 그를, 진환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는 미소 짓고 있다. 까슬까슬하게 잔털을 세워도 가려지지 않는 순수함이 앳된 얼굴에 어렸다. 따뜻하고, 간질거리는 미소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듯, 진환이 입을 벌렸다. 정윤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까맣고 끔찍한 어둠이 정윤을 집어삼켰다.
다시금 눈을 뜨면 그는 욕조 밖에, 라벤더 향이 나는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어디로 갔어?
고개를 휘저어 사라져버린 그 얼굴을 찾는다. 시선의 끝에는 기다리지 않았던 이가 서 있었다. 대장이다.
대장이 저를 내려다본다. 손에는 굴 까는 갈고리 칼이 들렸다.
‘네 눈알을 도려내겠어.’
밀쳐내려 하지만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달아나려 하지만 발바닥에서 피가 흐른다. 초침이 돌아가고 가희는 노래하고 어디선가 누나가 웃는다.
지금은 몇 시지?
악몽은 달이 사라질 때까지 이어질 터였다.
***
경준이 일출이 시작되는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환각 상태에 빠진 정윤은 벌써 두 시간이나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약에 취해 몽롱한 눈빛이 간간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 드러날 뿐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정윤만이 알 일이었다.
투박한 사내의 머리를 무릎에 눕힌 채, 경준은 머리카락 사이를 만지작거렸다. 짧게 자른 정윤의 머리카락은 의외로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에 감긴다. 좋은 대접을 받고 자란 털짐승같이. 관자놀이에 입을 맞춰주고, 경준은 부스스 미소 지었다.
언젠간 이름까지 잊어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두려워하면서, 반은 혼란에 피곤해하며, 몸을 웅크리고 어쩔 줄 몰라 하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옷자락을 잡아끌며 애원하겠지.
그런 그의 귓속에 몇 번이고 속삭여주는 것이다.
알 필요가 어디 있어요? 내가 여기 있는데.
그러면 정윤은 받아들일 것이다. 백치 같은 머릿속에 단 하나의 낙인만을 찍으며.
노크 소리에 달콤한 상상이 멈춘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회계사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노란 파일과 간결한 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침대에 정윤을 눕힌 채, 경준은 문가에 서서 그의 보고를 들었다.
“박성수 건입니다.”
얇은 노안용 안경이 전등에 뿌옇게 반사된다.
“일주일간 라오스를 뒤졌는데, 언질이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일본 애들 쪽 소식도 알아봤습니다만, 거기도….”
“재산은요?”
“정리한 재산이 사라진 흔적도 없고, 금품도 그대로입니다.”
경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회계사가 주춤하자, 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 옛날 생각이 났거든요.”
“옛날 생각…이요?”
“성수 형이 사격을 그렇게 좋아했어요. 장난감 사격 말고, 진짜 총 쏘는 거 있잖아요. 저 막 조직 생활 시작했을 때에도 가끔 데려가 주고 그랬어요. 사격장. 많이 배웠는데. 전 취미가 안 붙더라고요. 소리도 크고.”
회계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경준은 미소를 유지한 채 보고서를 돌려주었다.
“오랜만에 해볼까 해서요.”
“사격 말씀입니까?”
“아니.”
한 번 더, 부드러운 웃음이 깔린다.
“조준이요.”
***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 진환은 멈칫하고 말았다. 박성수와의 일이 있었던 곳이었다.
망설인 끝에, 진환은 결국 걸음을 내디뎠다. 독해지려는 결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습관이 그렇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젖은 이불처럼 더럽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감정이 엄습했다. 그 사이에서 쓴웃음이 나온다. 사람은 무엇이든 적응할 수 있다. 이런 일까지도.
정윤은 얼마나 많은 향을 피웠을까?
사당에서 맡았던 진한 향내가 다시금 코끝에 스치는 기분이 들었다. 올려다본 달과 함께 향을 들던 정윤이 떠올랐다. 스르르 감기던 눈꺼풀.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던 흉터와 깔끔하게 깎은 머리선. 기도라도 하듯이 다정한 옆얼굴이.
아, 제기랄. 또 이런다.
등신같이 일을 그르쳤으니, 이제 정윤을 죽이는 건 물 건너갔다. 그렇다면 최대한 거리를 두어서 박경준이고 강 반장이고 그날 밤의 일에 대해 모르게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니 오늘 한 말,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한 그 말은 잘한 거다. 했어야만 하는 일이고 똑똑한 일이었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대화하는 것도,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안 된다.
더는 정윤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선을 먼저 그은 게 누군데.
주변 풍경이 멀어진다. 무심코 들이마신 산소가 폐부를 쿡쿡 찔렀다. 따끔거리는 가슴 부위가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토할 것처럼 어지럽고 울렁임이 불쾌해서 차라리 위장을 짓이겨버리고 싶다. 평생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감각이다.
정윤은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진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담뱃불 끄는 것도 잊고, 진환은 멍하니 보스의 뒤를 응시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박경준은 단신이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정윤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늘도 안 나왔네.’
벌써 사흘째였다. 사흘이나 정윤이 보이지 않았다. 수상하게 보일까 차마 행방을 묻지도 못했지만, 그만큼이나 아무런 설명도 주지 않는 박경준의 태도도 거슬렸다. 애완견처럼 끌고 다니던 정윤을 모두의 눈앞에서 치워놓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누구 찾아요?”
마음을 읽은 것처럼 경준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허리가 가시에 찔린 듯 곤두섰다.
“아…닙니다.”
차 문을 열자 박경준이 몸에 익은 듯 좌석에 앉았다.
어쩐 일인지 신호에 자주 걸리는 날이다. 벌써 세 번이나 연달아 빨간불에 가로막혔다. 침묵이 흐르는 차 안이 어색하다. 진환은 눈썹 부분을 누르고 문질렀다. 머리가 물에 잠긴 것처럼 고막이 멍멍하다.
‘…왜 안 보이지?’
이제부터 무시한다느니, 모른 척한다느니 자신에게 호언장담했던 게 언제냐는 듯, 진환은 궁금증에 골몰해졌다. 갑자기 사라지면 신경 쓰이는 게 당연하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라진 걸까? 설마 태국으로 돌아간 건가? 아니면 그사이에 어디에서 또 칼부림이라도 나서….
“신호 바뀌겠다. 존나 꾸물거리네, 씨발. 안전 운전 하시게?”
조수석에서 아니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죽일 듯이 저를 노려보는 김종식이 뭘 꼬나보냐는 듯이 턱을 들썩였다. 좆이나 까라, 새끼. 속으로 중지를 세우며 다시 정면을 돌아본다.
그래. 신경 쓰지 말자. 오히려 잘된 거야. 시야에서도 지워버리고, 머릿속에서도 지워버리자. 그날 밤에 있었던 일까지 전부.
정확히 이십 초 동안 유지된 다짐이었다. 진환은 다시 저도 모르게 백미러를 살펴, 언제나 구석에 우직하게 자리했던 정윤의 흔적을 찾았다. 턱을 괴어 차창 밖을 바라보는 박경준이 비쳤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늘 순찰할 곳은 기념비적인 장소다. 죽을 뻔했던 곳이니.
***
이걸 그새 다 치웠네.
클럽 이 층에 걸어 들어온 진환은 속으로 감탄을 뱉으며 말끔해진 VIP룸을 바라보았다. 탁자가 박살이 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는데. 가구는 모두 새것으로 교체. 칼을 맞아 스펀지가 튀어나왔던 소파의 가죽은 반질반질하니 광이 난다. 이 잡듯이 뒤졌다는 뜻이다. 미리 손을 써서 도청기를 치워두지 않았다면, 정말 좆됐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보스는 결벽증 환자처럼 탁자 위를 문질러 먼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결과는 흡족했던 모양이다.
“밤에 영업 시작해요.”
방 안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눈빛을 주고받다가, 김종식이 입을 열었다.
“저, 형님. 관공서에 낼 서류를 새로 써야 하는데….”
“그런데요?”
“사업자 이름이 아직 박 상무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줄타기 잘못했다가 라오스에 날아버린 걸로 되어 있는 박성수 얘기였다.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진다. 진환은 남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요?”
보스는 짜증조차 내지 않았다.
“바꾸면 되죠. 어디….”
박경준의 시선이 널찍하게 방 안의 사람들을 훑었다. 산 정상에서 경치를 보는 것처럼 흥미 없는 눈빛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되어 간다. 고르기 놀이를 하듯 검지가 허공에서 까딱거리다가, 진환의 앞에 멈췄다.
“진환 씨 이름이면 되겠네.”
진환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예…?!”
“성수 형한테 많이 배웠잖아요. 어려운 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박 성수는 김 회장이 인천의 유흥업소들 상대로 삥 뜯던 시절부터 붙어 있던 사람이지만 진환은 몇 년 전 기어들어 온 피라미다. 이만한 장사를 맡아 할 군번이 못 됐다. 지금 김종식의 표정이 그 반증이다. 씨발 놈, 그래도 보스 앞인데 표정 관리 좀 하지. 누가 얼굴에 똥을 발라 놨어도 저렇게 얼굴을 구기진 않겠다.
“최 계장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인주 있으시죠?”
서류철을 든 회계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경준이 미소 지었다.
“따라와요. 계약서 써야지.”
땀이 찬 손바닥을 바지에 대고 문지른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보스의 집무실에 발을 디뎌 보기는 처음이었다.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김 회장에 후레자식 박경준까지. 보스란 놈들은 하나같이 편집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잡심부름도 아무나 안 보낸다.
박경준이 다가오자마자, 집무실 앞에 자리를 잡고 섰던 건달들이 직각으로 허리를 숙이며 문을 연다. 종종걸음으로 보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내부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넓었다.
“거기 앉아요.”
박경준이 앤티크풍 책상 앞의 간이 의자를 가리켰다. 윤이 반지르르한 데 비해, 책상다리 귀퉁이 한구석이 묘하게 그을려 있었다.
쉬이 와닿지 않는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엉덩이가 따끔거려 계속 들썩인다. 진환이 무릎 위에서 괜스레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는 동안, 경준은 회계사 최 상무에게 손을 까딱였다. 그가 누리끼리한 갈색 파일철을 내밀었다.
파일을 열자 진환의 표정에 경악이 어렸다. 상상 이상이다. 클럽 블랙웨일은 권리금만 일억오천에 육박하는 사업체였다. 동준이 새 안경 맞출 돈, 방 두 개가 넘는 건물로 이사할 돈, 형수님 좋은 옷 사줄 돈, 형한테 실력 좋고 돈 많이 받아먹는 변호사 갖다 붙여줄 돈, 짝퉁 냄새 나는 거 말고 진짜 폼 나는 명품 시계 손목에 찰 돈이 하루아침에 굴러들어 왔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한참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수리가 땅바닥을 보도록 깍듯하게 인사한다. 보스는 대답 없이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진환은 어느 때보다도 들뜬 마음으로 담배 개비 끝에 불을 붙였다. 골백번도 더 한 일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달가울 수가 없었다. 라이터를 집어넣으며 들썩이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리 주시죠.”
최 상무의 손에 든 인주를 빼앗다시피 하며 낚아챈다. 엄지손가락을 푹 묻어 서명란에 눌러 찍는다. 파일을 도로 내밀자, 버러지 보는 듯한 표정으로 최 상무가 파일철을 거두었다.
어느새 보스는 의자에 앉아 손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느긋한 손짓을 허공에 휘두르자, 최 상무가 책장 사이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모든 게 반지르르한 사무실과 어울리지 않게, 손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서류였다.
“이것도 부탁해요. 원래 성수 형이 하던 일인데, 조금 급해서.”
“이게 뭡니까?”
“거래명세서예요. 어려운 건 아니고. 사인해서 그 주소로 보내면 돼요. 등기로.”
이런 잔심부름 정도야 달가운 수준이다. 연연할 때가 아니었다. 목이 빠져라 고개를 끄덕이자, 박경준의 입가에 따스하게 웃음이 걸렸다.
“진환 씨만 믿을게요.”
진환은 열띤 미소를 머금고 집무실에서 걸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목숨 다 바쳐 일하겠습니다, 회장님. 온갖 입에 발린 말을 내뱉으면서.
그러나 문지방을 걸어 나올 무렵, 진환의 웃음은 봄눈처럼 사그라졌다.
머리끝까지 피가 몰리고 손끝이 저릿하다. 따끔거리는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봉투를 뒤적이고 만다. 계약서를 열자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죽인다….”
살면서 이 정도의 돈을 만져본 적이 있었던가. 일수 중 고작 몇백만 원 만진 걸로 덜덜 떨었던 게 바보 같을 정도였다. 음침한 눈으로 실핏줄이 서도록 서류를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음.”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발이 저린 듯 후다닥 계약서를 등 뒤에 숨긴다. 잘 보니, 집무실 맞은편 접객실 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소파에 길게 누운 인영이 보였다.
박경준이 보스 자리를 꿰차자마자 한바탕 뒤엎어, 바닥재부터 가구까지 먼지 한 톨 안 보일 모던한 모습으로 뒤바뀐 사무실과 달리, 접객실은 아직 죽은 김 회장의 취향이 남아 있었다. 소파 옆에는 기다란 난 화분이, 그 앞에는 다리에 곡선 조각이 들어간 자개 탁자가 놓였다. 소파는 잘 무두질된 소가죽으로 언제나 반질거렸다. 그림자는 바로 그 소파 위에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자고 있는 모습이다.
“누구야?”
괜히 꽁한 마음이 들어 투덜거리는 소리가 나온다.
회장실을 마주 보고 잠을 자다니. 간부급도 안 할 짓이었다.
그 배짱 좋은 놈 얼굴이나 보자는 마음이 들어, 진환은 문가로 고개를 들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맨팔이 소파 아래로 비죽이 내려왔다. 소매를 걷어 올린 두꺼운 팔뚝 위, 주삿바늘 자국이 가득한 피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팔뚝을 타고 어깨 위로 시선이 올라갔을 때, 진환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정윤 형님?”
감은 것도 아니고, 뜬 것도 아닌 희뿌연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잠꼬대처럼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또 약 한 거야?
한순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난번, 뜻하지 않게 제 방에 찾아왔을 때의 그가 떠올랐다. 그때도 목이 막혀 반죽음 상태가 됐더랬다. 지금 그의 팔에 난 멍 자국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았다. 쇼크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아니면, 벌써 왔거나.
더는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저 불길하다. 축 늘어진 사지도,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가슴팍도, 뿌연 눈동자까지.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조여온다. 압박감에 튕겨 나가듯 진환은 한달음에 문 너머로 달려들었다.
“형님. 정윤 형님!”
두 손이 어깨를 붙들어 흔든다.
죽었어? 정말 죽었어? 씨발. 그러게 약 좀 작작하라니까!
목구멍까지 악이 받쳐 올랐을 때였다. 꿈틀거리지조차 않았던 정윤의 눈꺼풀이, 반짝 위로 치솟았다. 검은 눈동자가 굴러, 진환을 향했다. 생기는 없지만 살아 있는 건 확실하다.
힘이 풀린다. 진환은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씨발. 놀라라.”
“여기 왜 있어?”
“형님 잘못됐을까봐….”
“모른 척한다고 하지 않았어?”
“…….”
인상이 구겨진다. 정윤의 말이 맞았다. 제 행동을 돌아보면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위장이 뒤집히도록 속을 졸인 것도, 여기까지 달려와 소리를 질러댄 것도. 모두 바보 같은 짓이다. 거친 말이나마, 죽게 내버려 뒀으면 저한테도 좋은 일이 아닌가.
이해가 가지 않는 제 내면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진환이 입술을 깨물고 있는 사이, 정윤은 멍 자국이 가득한 팔로 몸을 지탱해 일으켰다. 큼직한 손이 진환의 손목을 붙잡았다.
진환이 놀라 물러서기 전, 고장 난 악기처럼 삐걱거리는 목소리로 정윤이 말했다.
“거절해.”
“예…?”
마른기침이 이어졌다. 약의 부작용인지, 밤새 울어댄 탓인지는 모르지만 목이 상당히 건조해진 모양이다.
“경준이 때문에 왔지? 여기.”
“뭐, 그렇습니다만….”
“거절해.”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정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금 뭔지도 모르는 일을 대뜸 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이유가 뭡니까?”
“예감이 안 좋아. 조심하는 게 좋아.”
“그게 무슨….”
정윤의 표정을 살핀다. 딱딱한 무표정 너머에 확연히 동요가 이는 것이 보였다. 눈썹이 내려가고 입술 끄트머리가 견디듯이 파르르 떨린다. 어딘가 겁을 집어먹은, 곤란한 기색.
아하.
“껄끄럽다 이겁니까?”
정윤이 둥그렇게 눈을 뜨고, 입술을 허하니 벌렸다. 정곡이었군. 목구멍으로 쓴 물이 넘어오는 것을 억누르며 진환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여기에서 더 박경준 가까이 자리를 잡으면 당연히 정윤과 마주칠 때도 많아질 것이었다. 정윤이 경계하는 건 아마도 그런 상황이리라. 얼굴을 마주 보고 불편함을 삼켜야만 하는 상황. 그럼에도 무난하게 넘겨야만 하는 상황.
한마디로 꼴 보기 싫다는 소리다.
당연한 말이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머리로는 아는데도 두개골 아래로는 받아주질 않았다. 가슴이 옥죄이고, 배 속이 뒤엉키는 것처럼 기분이 더럽다. 무엇보다도 따끔거린다.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몸통 안쪽의 모든 곳이.
입이 벌어졌다. 지금 제 행동이 화풀이라는 걸, 논리적이지도 폼 나지도 않는 짓거리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통증이 너무나 강렬했다. 눈물이 반사적으로 삐져나올 만큼, 가슴 위로 바위를 내려치고 싶을 만큼 강렬하다. 그 통증을 제 알량한 목소리로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성대가 마구잡이로 울렸다. 상처를 받았다는 미약한 사실이 온갖 말을 지껄이게 만든다.
진환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방 한가운데에 울렸다.
“형님이나 조심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 팔뚝을 잡은 손을 떼어낸다. 조소 어린 시선이 멍 자국 난 팔뚝 위를 훑었다.
“보아 하니까 약 때문에 박 회장님 옆에 붙어 계시는 것 같은데. 몸에 좋은 버릇도 아니고. 그러다 언제 망가지실 줄 알고 그러십니까?”
“…….”
“뭐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제까짓 게 무슨 자격으로 그럽니까. 그렇죠?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좆까지 빨아가면서-.”
정윤이 멍하니 눈을 든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 듯이 달싹인다. 그러나 눈꼬리는 곧 내려가고 기운 없이 움직이던 입꼬리는 일자를 그린다. 부드럽고 약한 시선이 바닥으로 내리깔렸다.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 든다.
입술을 악문다. 따끔거리는 통증이 가시기는커녕 목구멍까지 조여온다. 정확히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를 충동이 계속해서 머리를 뒤섞는다. 서류 봉투를 집어 올리고, 진환은 자리를 박차고 섰다.
“모르는 척, 계속하겠습니다. 걱정 마시죠.”
왜일까. 그에게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혼잣말을 하는 기분이 드는 건.
더 이상 정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면서, 진환은 뒤돌았다. 정윤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
‘이사부터 가자.’
마음을 붙든다.
지긋지긋하다고 형 면전에 소리를 지르고 땡전 한 푼 없이 집을 나온 이후로 집이랄 것도 없이 이 방 저 방을 떠돌아다녔다. 형네 식구나 동창들, 허접한 동네 양아치 후배들 앞에서는 잘나가는 척 허세를 부렸지만, 사실 진환에게 재산이라고 할 만한 건 바람 잡을 때 입는 짝퉁 브랜드 옷 몇 벌뿐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벼룩 같은 장물 거래나 어쭙잖은 주먹질밖에 없었으니 당연하다.
좆같은 나라라고, 언젠가 확 떠버릴 거라고 떠들면서 냉소적인 한탄만 일삼았지만, 내심 진환은 지금껏 기대를 놓지 못했다. 그래도 남들 말하는 좋은 날이 오진 않을까. 어디 떳떳하게 고개 들고 살날이 오지 않을까. 그것마저 떠나보내면 죽음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붙들던, 의미가 있다기보단 필요에 의해 매달린 마음이었다. 그런데 쥐구멍에 볕이 드는 수준이 아니라, 천장이 통째로 들려서 비단 침대에 옮겨진 것이다.
“어디, 볼펜이….”
중얼거리며 원룸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뒤적인다. 아직 내놓지 않은 쓰레기봉투 옆, 무협 소설 더미 아래에 굴러다니는 모나미 볼펜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누워, 진환은 박경준이 부탁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시커먼 볼펜 잉크 찌꺼기를 대충 종이에 문질러 닦고 서명란으로 펜촉을 기울인다.
“…….”
막 서명을 하려던 손이 멈칫한다. 무심결에 읽어 내린 문장으로 다시금 시선이 올라갔다. 볼펜을 돌려 끄트머리로 긴 줄을 툭툭 두드린다. 눈썹이 찡그려졌다.
수입 목록 리스트.
클럽 수익금 일부로 어느 회사의 지분을 다량 구매한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문제는 그 회사가 듣도 보도 못한 외국 기업이라는 것이었다. 스마트폰을 들어 검색해보니 영문으로 관련된 검색 결과만 줄줄 나온다. 몇 가지 정보는 얻었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많이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라는 것 같다. 위치는 타일랜드.
“가지가지 한다, 박경준. 이 씨발 놈….”
서류를 뒤집어, 미리 인쇄된 수신인 주소를 훑어보았다. 부산의 어느 세무서였다.
이제는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 되어, 진환이 핸드폰 화면을 연타했다. 녹음된 파일이 재생되면서 느릿한 정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타이어에 숨겼다고 했다. 타이어. 태국. 자동차 회사.
예상에 하나도 빗나감이 없군.
그의 시선이 침대 아래 상자로 향했다. 여름옷이 켜켜이 담긴 상자 안에는 구형 모델의 폰이 들어 있다. 번호라고는 셔츠가 지저분한 짭새 새끼 것 하나 달랑 저장된 핸드폰이. 진환이 중얼거렸다.
“좆됐네, 이진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이끄는 것처럼, 진환의 손이 천천히 전화기를 향해 기어갔다.
- 나다, 새꺄.
전화 너머에서 강 반장이 말한다.
- 씨발 놈. 요즘 왜 전화를 안 받아?
건진 거라고. 진환은 들고 있는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뭘 들고 있는지 알면 이 아니꼬운 짭새 새끼가 무릎까지 꿇고 빌 텐데.
서명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머릿속이 차분하게 돌아갔다.
- 야, 인마. 대답 안 해?
침묵이 이어지자, 짜증이 극에 달한 목소리로 강 반장이 몰아세웠다. 진환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이윽고 통화 종료 신호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휴대폰을 내리고 배터리를 분리했다. 서류는 봉투에 도로 집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