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 정윤은 누나와 마주쳤다.
지윤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흘러내리는 비단결 같은 흑발, 가느다란 어깨, 멍 자국이 든 팔뚝이 달린 야윈 몸통까지.
누나는 깨끗한 셔츠 바람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깊은 새벽, 버스 정류장의 전광판에 앞으로 두 시간이나 있어야 도착할 첫차 소식이 흘러 지나갔다. 바람에서 낙엽 냄새가 난다.
정윤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인사를 떼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윤을 본 것은 대장이 죽은 이후로 처음이다. 사 년은 되었다는 뜻이었다. 사 년 동안 보지 못한 가족을 향해서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인사를 나누던가.
망설임을 거듭하는 와중, 지윤이 선수를 쳤다.
“그 남자를 믿어?”
이상한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신기할 만큼 적당하게 느껴졌다. 지윤은 언제나 저보다 더 성숙한 면이 있었다. 태국 땅을 밟은 후 먼저 울음을 그친 것, 먼저 태국어를 배운 것, 먼저 대장과 잠을 자기 시작한 것도 모두 지윤이다. 정윤은 재빠르고 감정이 보이지 않는 쌍둥이 누나가 부러웠다. 지윤은 가물가물한 안개 같은 인간의 얼굴 가죽을 꿰뚫고 정곡을 찌르는 공격을 던질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질문처럼.
정윤은 더 이상 지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다가가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으니까. 그저 지윤의 얼굴을, 주름 없이 빳빳한 셔츠를, 담배를 사이에 낀 늘씬한 손가락을 한참이나 바라봤을 뿐이다.
생각 끝에, 정윤은 대답했다.
“난 대장을 믿어.”
지윤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다. 이상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발광하는 오래된 뼈 같은 빛.
“계속 그래라.”
정류장을 지나쳐서 계속 걸어간다. 공기를 거스를 때마다 따끔한 냉기가 피부 위를 찌르며 지나갔다.
***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밤이 밝아왔다. 잠이라기보다는 혼수상태에 가까운 가수면에 빠졌던 진환은 베개를 뒤흔드는 진동 소리에 눈을 번뜩 떴다. 강 반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받지 마.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이었다. 진환은 곧바로 그 생각을 반박했다. 다시 전화를 걸어달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놓고, 정작 전화를 받지 않으면 수상해 보일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강 반장의 의심을 사기에 가장, 안 좋은 시기였다.
긴 심호흡 끝에 진환은 수화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예. 강 반장님.”
- 나와.
진환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다.
“뭐?”
- 나오라고, 새꺄.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너 집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나오라고.
진환은 버티컬을 들춰 골목길 어귀를 응시했다. 먼지 낀 창문 너머 전화기를 든 강 반장과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재수 없는 태도로 손을 흔들기까지 해 보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요동치며 시큰거리려는 심장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진환은 창문에서 떨어졌다.
“미쳤어? 누가 볼 줄 알고 여기까지 와?!”
- 급하다, 급하다 그러니까 친히 왔다, 싸가지 없는 새끼야. 걱정 마. 따라오는 놈들 없는지 확인 다 했으니까.
“씨발….”
- 왜, 못 나올 이유라도 있냐?
그 질문에 진환은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부지런하게 방을 훑었다. 얼룩진 이불을 제외하고, 방 안에 이상한 흔적이랄 것은 없었다.
“…나갑니다. 나가. 사람 번거롭게 하긴.”
핸드폰을 든 채 방을 나선다. 도어 록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빌라 계단을 딛고 내려갔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의 맨 아래, 외부로 이어지는 그나마 환한 입구에 강 반장이 삐딱한 자세로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환은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를 훑어보던 강 반장이 인상을 구겼다. 코를 틀어막는 시늉을 했다.
“너 뭐, 똥통이라도 들어갔다 나왔어? 냄새가 왜 이래?”
“냄새?”
“무슨 썩은 내가 난다, 인마. 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허, 가만 보니까 안색도 시퍼렇네. 너, 무슨 사고 쳤냐?”
두근.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다. 초조한 표정을 최대한 감추려 했는데, 식은땀 한 줄기가 이마에 맺힌다.
진환의 고개가 땅을 향했다.
“…어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끼고, 강 반장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진환. 솔직히 말해. 무슨 일이 있었어?”
주머니 속에 찔러넣은 손이 꼼지락거린다. 플라스틱의 표면을 엄지가 계속해서 훑는다. 그 끝에는 핸드폰이 있다. 정윤의 증언이 녹음된.
“…있었지. 큰일이.”
가늘게 떨리던 정윤의 속눈썹. 중얼거리던 가는 입술 선. 골목 어귀에서 풍기던 악취. 죽기 직전까지 부릅뜨고 저를 마주 보던, 박성수의 두 눈. 짤막한 영상들이 삽시간에 머릿속을 헤집고 스쳐 지나갔다. 눈을 감고, 뜬다. 진환의 시야는 다시 제 두 발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씨발, 죽을 뻔했어.”
“…무슨 일인데.”
“그러니까….”
주머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손이 멈춘다. 그리고 단단히 물건을 움켜쥐었다. 진환은 강 반장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지금부터는 신뢰가 전부였다.
거기에 모든 게 달렸다.
“이것 때문에.”
손을 꺼낸다. 강 반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눈가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내밀어 뻗은 진환의 주먹이 서서히 펴졌다.
그 위로, 반토막 난 도청기 커버가 보인다.
“뽀록날 뻔했다고, 이 짭새 새끼야.”
강 반장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비죽거리는 진환의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하나 회수해달라고 했더니. 그것도 제대로 못 해줘? 대단하다, 대단해.”
“…넌 이거 어떻게 찾았냐?”
“구역 순찰하다 발견했습니다. 진땀 나서 정말. 이게 뭡니까? 이러다 나 들키면. 책임질 거야? 책임질 거냐고.”
“이거 따지자고 나한테 전화했다 그거냐, 지금?”
“아니, 그럼. 빡이 안 돌게 생겼습니까? 나 잘못하면 뒈지게 됐는데?!”
“내가 많이 만만해졌구나, 너.”
“왜요. ‘님’ 자 붙여서 욕해드려?”
강 반장의 얼굴에는 허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를 따라 하듯 진환이 미소 지었다. 강 반장의 손이 유연하게 플라스틱 조각을 낚아챘다. 진환이 무어라 덧붙이기 전, 여태껏 맞아본 것 중 가장 얼얼한 한 대가 뒤통수를 가격했다.
“너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어봐. 그냥 잡범으로 엮어서 감방에 넣어 버릴 테니까.”
“뭐?! 씨발, 똥 싼 놈이 성낸다더니, 일은 자기들이 그르쳐놓고 나한테 화풀이야, 왜?!”
상대할 기운도 없다는 듯 강 반장이 돌아서 걷는다.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긴장으로 후들거릴 지경이었던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진환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건물 현관에서 강 반장을 보낸 후, 진환은 엘리베이터 없는 원룸 건물의 삼 층인 제집까지 비척비척 계단을 올라 바위처럼 느껴지는 몸을 침대 위에 던졌다.
천장을 응시하자 다시는 잠들 수 없을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뻐근한 눈이 깜빡일 때마다 화끈거린다. 이불에서 올라오는 악취와 함께 지난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박성수가 죽었다.
시퍼렇게 멍이 든 목을 드러내고, 얼굴과 몸통의 핏기가 가신 채로, 뻣뻣한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사라지지 않는 사실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엄습해오는 섬뜩한 그의 마지막 얼굴이 그 증거다. 혀가 부풀고 시퍼렇게 눈을 뜬 그 얼굴이 도박중독자가 경험할 법한 떨치기 어려운 유혹처럼 진환을 쫓았다.
그 새벽, 정윤은 그를 뒷좌석에 실었다.
시체가 덜 상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저 모든 게 빠르게 끝나기만을 바랐던 터라 무어라 대꾸하지도 않았다. 고개를 끄덕여주고 왼손 엄지손톱이 걸레짝처럼 되도록 물어뜯으며 정윤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핸들을 틀었다.
어디에서인가 경찰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본 백미러에는 뒷좌석에 쓰러진 박성수의 허리 언저리가 비쳐 있었다.
홀린 듯이 그곳을 응시하던 중 정윤이 어깨를 붙잡았다. 그야말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정윤은 가만히 계기판을 가리켰다.
‘빨라.’
그의 말대로, 진환은 차가 얼마나 빨리 가고 있었는지를 알아차리고 다시금 식겁하고 말았다. 속도를 줄이자 뒷좌석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운전은 한 시간가량 더 이어졌다. 정윤이 안내한 곳은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였는데, 바로 옆에는 타이어를 분리하고 뼈대만 남은 차를 거대한 잡동사니 블록처럼 뭉개어 쌓은 폐차장이 함께 있었다.
정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볼품없는 불이 켜진 입구로 걸어가 인터폰을 통해 누군가를 부르곤, 관리원 옷을 입은 노인 둘이 박성수를 끌어 내릴 때까지 거대한 쓰레기 블록을 응시할 뿐이었다. 악취와 철 냄새를 맡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굉음과 함께 괴수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기계 집게가 오르내렸다. 멀찍이서 개가 짖었다.
검은 하늘과 언젠가 그 하늘을 덮어버릴 것처럼 쌓인 고철의 구조물 사이에서, 눈꺼풀의 떨림조차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 한순간, 단 그 한순간, 진환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쓰레기장에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모든 소란이 쓸데없는 소음에 불과한 먼 혹성에 있었다. 정윤이 바라보고 있는 건 건너편의 우주였고 기계 팔의 소음은 전자파가 대기에 쏟아지며 만드는 떨림이었다. 그리고 진환은, 마침내 벗어나 있었다.
‘담배 있어?’
정윤이 물음과 함께 두 발이 지면에 안착했다.
뜻밖에도 재킷 안에는 반 까치 정도가 남은 담뱃갑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정윤은 자연스럽게 불을 받아 연기를 마셨다. 어딘가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옷은 태워버려.’
첫 날숨을 뿌옇게 뱉어내고, 그가 차 지붕 위에 팔꿈치를 얹으며 기댔다. 이윽고 정윤이 막 타들어가는 담배 개비를 내밀었다.
진환은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도움이 돼.’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결국 담배를 받아 들었다. 달리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던 탓이었다.
개비를 입에 가져다 대자 앞니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담배를 쥔 손도. 전신에 오한이 든 것처럼 떨림이 멎질 않았다. 정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춥지?’
‘…예.’
‘괌은 안 추울까?’
‘그러겠죠.’
미적지근한 물이 턱 아래로 떨어지면서 찝찔한 맛이 입술로 파고든다. 아무리 얼굴을 쥐어 비틀고 이를 악물어도 어깨가 뒤흔들렸다. 결국, 진환은 양팔 사이에 제 고개를 묻어버렸다.
정윤이 대답했다.
‘그래.’
***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아마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어쩌면 정윤이 몇 마디를 얹거나, 담배를 더 얻어 피웠거나, 저 때문에 더러워진 침대보를 두고 사과를 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아침은 밝았고, 아침이 오자 정윤은 보이지 않았다.
진환은 혼자 남았다. 지긋지긋한 박성수의 마지막 모습과 쇠사슬이 든 것처럼 무거운 심장에 쫓기며.
맙소사.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박성수가 죽었다. 아니, 죽였다.
진환은 식은땀을 흘리며 천장을 응시했다. 다시는 잠들 수 없을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뻐근한 눈이 깜빡일 때마다 화끈거린다. 이불에서 올라오는 악취와 함께 지난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몇 번을 반복해도 믿기지 않았다. 확 뒈져버리라고 뒤에서 욕을 퍼부었을지언정, 진심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에 와서는 그랬던 것 같다. 박성수는 말이 많았지만 술값은 자기가 냈다. 똥배가 나오고 곧잘 입에서 구린내가 났지만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대신 날아오는 소주병을 맞아준 적이 있다. 프락치 짓을 한 배신자를 믿어보겠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는 좆같은 상사였다. 하지만 상사는 원래 대부분 좆같다. 이 바닥이 아니더라도. 그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는, 괜찮은 인간이었다.
그랬는데.
‘씨발.’
얼굴을 감싸 잡는다. 되돌이킬 수 없는 일, 그런 식상한 표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사람을 죽였다. 잡배도 아니고 형님이라고 부르고 모시던 사람을 하루아침에 제 손으로 없애버린 것이다. 지난밤 차마 다 감당하지 못했던 절망이 방파제 둑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쏟아져 흘렀다.
흐릿하게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든 이성적인 판단은 어지간히 좆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박성수는 행동대장이다. 조직에서 사라져버리면 찾아 나설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박경준과는 술자리에서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그 박경준이 알아내는 날에는 어떻게 나올까. 산 채로 콘크리트에 묻히는 걸로 끝나면 감지덕지할 지경이다.
경찰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강 반장 입김이 얼마나 센지는 모르나, 살인에 시체 유기범까지 풀어줄 정도에는 한참 못 갈 게 분명하다.
감방에서 죽거나, 차라리 죽여주기를 바랄 처지가 되거나. 지금 진환의 앞에 놓인 기로는 그 두 가지뿐이었다.
‘생각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냉혈한 살인마들이 그러는 것처럼. 계획을 세우고 침착하게 언행을 가다듬을 여유가 필요했다. 연기를 연습하고 알리바이를 적어 내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노인의 손에 짐짝처럼 끌려가던 박성수의 사지가 떠올랐다. 담배를 내밀던 정윤이 떠올랐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끔찍한 영상이 꼬리물기를 하며 머리를 어지럽혔다. 끝내는 물에 빠졌던 것처럼 숨을 들이켜며 눈을 뜬다.
정신을 차리니 휴대폰이 정신없이 울리고 있었다. 이명이 걷히며 진동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발신인은 김종식이었다.
퇴원하는 날까지 위 기수 들먹이며 부려먹더니, 기어이 꼭두새벽에 전화를 걸어, 씨발.
그러고 보니 맥주 심부름도 깜빡하고 말았다. 꼬장을 받아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아 휴대폰을 그 자리에 내팽개쳤지만, 이내 제때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의심을 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마를 문지르던 끝에 진환은 전화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김종식의 관심사는 맥주와는 거리가 먼 듯했다.
- 야, 정윤 형님 봤냐?
상상도 못 한 질문이었다. 너무나 뜻밖이라, 하마터면 사실을 털어놓을 뻔했다. ‘몇 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어.’ 그렇게 튀어나오려는 말을 혀를 당겨 붙든다. 진환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기도하며 대답했다.
“정윤 형님요? 병원에 계시지 않습니까?”
- 씨발….
김종식의 태도는 확실히 이상했다. 화가 난 게 아니다. 짜증이 났거나, 더 안 좋은 경우라면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이 보였다. 정윤의 차림새가 기억났다. 한겨울에 코트 하나 변변히 걸치지 않았다. 약 기운에 발걸음 닿는 대로 걸어 나온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김종식 이 자식이랑 무슨 상관이 있지?
“왜… 물어보십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 무슨 일이나 마나, 씨발. 지금 개판이다.
“개판이요?”
- 회장님께서. 씨발…. 밤새 그 새끼 찾는다고 애들 풀어서 강동구 돌멩이는 다 뒤집어 놓으셨다. 망보던 새끼 다리 두 짝 부러뜨리고….
피로감 짙은 한숨이 끼어들었다.
- …말을 말자. 너 인마 씨발, 너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당장 사무실로 튀어 와. 눈 밖에 났다가 뒈지기 싫으면. 끊는다.
전화가 끊어진다. 외나무다리를 건넌 것처럼 툭 하니 마음이 놓여, 온몸에 힘이 빠졌다.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다행히 아직 박성수의 행방에는 관심이 미치지 않은 듯했다. 정윤이 입을 다물기만 한다면 상황을 돌파할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윤이 입을 다물어 준다면.
얼굴을 문지르던 손이 멈칫한다. 진환은 갑자기 뻑뻑한 눈꺼풀을 치켜올렸다. 의문이 떠올랐다. 어째서 지금까지 품지 못했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당연한 질문이었다.
왜 정윤은 나를 도왔지?
물론, 도와달라고 한 건 이쪽이다. 그렇지만 정윤에겐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위험만 떠안게 될 뿐이었다. 의문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과연 정윤은,
‘박성수와 주고받은 얘기를 못 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프락치라는 얘기. 그가 약에 취해서 나불거리는 소리를 모조리 녹음해 경찰에 넘기려고 했다는 얘기.
정윤은 모든 사달이 끝난 다음에, 목이 졸린 박성수가 혓바닥을 개처럼 내밀고 뒈진 다음에야 문을 열었다. 마치 문밖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았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약에 취해 있었다지만, 의식이나 기억이 사라질 만큼 인사불성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기회를 엿보고 있던 건 아닐까? 어떤 기회를? 대체,
뭘 요구하려는 거지?
머리맡에 던져놓은 핸드폰을 쥐었다. 땀 때문에 화면 위로 지문 자국을 겹겹이 쌓으며 녹음 파일을 틀었다. 약에 취한 정윤의 목소리는 느리고, 그에게 쏘아붙이는 제 목소리는 조급하다. 이건 던져버릴 수 없는 동아줄이다. 동아줄 끝에는 형과 형수님과 동준이가, 한 줌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 한 줄로 매달려 있다. 사람 새끼다운 짓을 할 유일한 기회가 여기에 달려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
정윤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면 전부 불어버릴 것이다. 잘못 틀어지면 영장 발부도 취소되고, 강 반장은 꼬리 자르기에 들어가겠지. 그러면 인생 통째로 종 치는 수가 있다.
감옥에 가는 게 더 빠르길 기도해야 할 테다.
박경준의 손에 걸리는 것보단 그게 낫다.
소름이 끼친다. 냉기가 흐르는 두 손을 눈자위 위에 얹은 채, 진환은 한참을 전율했다. 선명한 확신이 들었다. 뚜렷하고 분명하게.
마무리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불가피하게도.
***
정윤은 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경준이 있을 곳이야 뻔했으니, 직접 만나러 가는 편이 빠르다.
주춤하는 남자들을 가르고 집무실에 들어오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준은 일을 하는 중인 것 같았다. 갈라진 펜촉이 달린 고급 만년필이 서류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펜을 쥔 손도, 팔의 각도도 흔들림 없이 일정하다. 그에게 다가간다.
“왔네요.”
“응.”
“이 탁자 보여요?”
정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경준은 만년필 촉으로 탁자 위를 두드렸다. 스산하리 만치 넓은 집무실에서 유일하게 부피감을 가진 가구였다.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얘기해주신 적이 있는데. 벼락 맞은 나무로 만들었대요. 벼락을 맞아도 꼿꼿이 서 있길래 베어버렸다고요. 참, 괴팍하시죠.”
“탄 자국도 있어?”
“아마도요.”
만년필 자루를 뒤집는다. 펜촉이 목젖을 찢어버릴 듯이 짓누른다.
차분히, 정윤은 눈길을 올렸다. 경준이 비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손가락이 턱 아래를 쓰다듬었다.
“어디 갔어요?”
“항구.”
“왜?”
“바다가.”
정윤이 눈을 깜빡인다.
“보고 싶었어.”
경준의 손이 음낭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러운 압통에 허리가 들썩거렸다.
“달아났다고 생각했어요.”
통증에 헐떡이던 끝에 정윤이 말을 뗐다.
“달아나지 않았어.”
“하.”
손아귀가 바짝 조여들었다.
정윤이 입술을 악물었다. 통증 탓만이 아니었다. 통증에 발기해버렸다는 수치심을 억누르고 싶었다. 그러나 경준의 손은 계속해서 윤곽을 매만지며 부끄러운 흔적을 그에게 되새겼다.
“여길 떠나면 뭐가 있을 것 같아요?”
경준이 웃는다.
“아무것도 없어요. 정윤 씨, 여기 나가면 아무것도 못 한다고.”
눈을 감은 채 쾌감을 억누르려 하지만, 집요하게 손길이 엉겨들자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알… 흣…!”
손이 책상 위를 더듬으며 손톱이 판자 위를 긁었다. 마치 그 발버둥을 즐기듯, 이제 경준의 손은 요도구를 틀어막아 쥐었다.
“아니. 몰라요.”
“놔, 줘. 이것 좀, 놔….”
“좋은 거 아니에요? 섰으면서.”
통각과 비참함에 눈물이 고여왔다. 정윤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디 갔어요?”
“바다.”
“개소리하지 말고.”
손아귀에 힘이 더해진다.
“사실대로 말해요.”
사실대로. 정윤의 눈동자가 데룩 구르며 지난밤을 떠올렸다. 퉁퉁한 남자 시체를 앞에 두고 울어대던 얼굴을.
‘살려주세요, 형님.’
파르르 떨리던 눈가가 가늘게 떠진다. 숨을 고르고, 정윤은 올곧게 경준을 마주 보았다.
“네 말이 맞아.”
정윤이 입을 달싹였다.
“…박히고 싶어서 그랬어.”
경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신다. 잘하고 있어. 정윤은 말을 이었다.
“그런 곳 있잖아. 하고 싶은 사람끼리 모이는 곳. 가서 기다렸어. 사람이 올 때까지.”
“상대는?”
“기억 안 나.”
손을 들어, 희고 고운 뺨을 쓰다듬는다. 정윤의 눈동자가 휘어지며 뿌옇게 상대를 담았다.
“싫어?”
말한다.
“헐렁해질까봐?”
아래를 압박하던 손이 풀어진다.
흐르지 못했던 쿠퍼액이 울컥 쏟아지는 탓에 쥘 것이 없는 손이 탁자 위를 긁었다. 저릿저릿한 쾌감이 등줄기에 흘렀다. 속절없이 붉어지려는 얼굴을 팔을 들어 가린다.
주먹 정도는 날아올 줄 알았다.
대장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얼굴에서 피가 나고, 눈이 부어올라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폭행한 다음 이틀간 걷지 못할 만큼 약을 집어넣고 박아댔겠지.
그러나 경준은 그러지 않았다.
부드럽게 몸을 말아 일어서, 그가 창문 앞에 섰다.
“나가요.”
경준이 속삭였다.
햇살이 그의 얼굴에 쏟아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벌은 없는 건가? 따귀도? 헤로인도? 안도감이 들어야겠지만, 언제 체벌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건 불편하다. 하지만 경준은 더 이상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기분이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안 나가.”
모르겠다. 정윤은 도로 털썩 누워버렸다. 나무로 된 탁자는 기분 좋을 만큼 시원했다. 간밤에 게워낸 몸은 달갑게 다가오는 졸음을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없다며.”
***
- 정윤 형님 돌아오셨댄다. 대체 뭐 하는데 뭉그적거려?
“금방 간다니까.”
식은땀을 감추며, 진환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직까진 아무 말 안 한 모양이고….”
중얼거리며 열쇠를 돌린다. 낡아빠진 편의점 안쪽 캐비닛, 직원 유니폼 아래에 노란 골판지로 된 박스가 놓였다. 고무줄을 벗기고 박스를 연다. 다행히 내용물은 그대로다. 얇은 분말이 덮인, 불량식품 같은 색색의 알약이 봉지 안에 가득 담겼다.
전에 빚쟁이 하나가 가지고 튀려던 엑스터시다. 당장은 처치가 곤란해 박성수가 보관하던 물건이다.
약봉지를 주사기와 함께 가방에 넣는다.
시동을 켜며, 진환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정윤을 처치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