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31)

#6

그냥 방문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정윤은 뜻밖에, 그 후에도 자주 그의 병실에 들렀다. 머무는 시간은 제각각. 특별한 대화를 나누거나 공통된 취미 생활을 누린 것도 아니었다. 정윤의 목적은 그저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앉아, 가능한 한 적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진환이 어떻게 숨을 쉬고 밥을 먹는지 살펴보는 데에 그치는 듯했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진환의 질문에 그의 대답은 늘 일관적이었다.

‘경준이는 바빠.’

그럼 난 시간 때우는 용도인 셈인가?

거기에 유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정윤은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놀면 좋은지 전혀 모른다.

정윤의 시선은 늘 부담스러울 만큼 정면을 보고 있거나, 무릎 위에 깍지를 껴 올린 굳은살 박인 제 두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답은 간결하지만 초점에서 벗어나 있었고, 말을 걸지 않으면 고개를 처박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가는 변기 물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소용돌이가 있어, 언제라도 휘몰아치는 어둠 속으로 육중한 제 몸뚱이를 던질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옆자리에 누운 양반이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저기 저 청년, 어디 부족한 거 아녀?

어쨌든, 좋은 신호였다.

도청기가 박살이 난 지금, 정윤은 뜻밖의 카드다. 얼떨결이긴 했지만 목숨을 살려줬다. 완전히 이쪽을 신뢰하게 된 게 분명했다. 바로 지금이 기회였다. 바로 이 시점에, 점수를 딸 수 있을 만큼 따는 거다. 알랑방귀도 뀌고. 놀아도 주고. 조금이라도 더 저를 믿어서 잠잘 때 머리맡 지키는 것도 허락하게끔. 그러면 강 반장에게 다시 연락이 들어왔을 때 전처럼 헛짓거리하지 않고 바로 작전에 들어갈 수 있다.

‘만약에 운이 좋다면….’

진환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정말로 운이 좋다면, 태국에서 일어난 일을 캐물을 틈도 생겨날 것이다. 물론 막연한 희망일 뿐이었다. 정윤이 술술 불어댄들 그걸 증명할 기록 없이는 쓸모가 없다. 그렇다고 언제 오갈지 모르는 대화를 위해서 늘 핸드폰 녹음기를 켤 수도 없었다. 그러다 들키는 날에는 정말 변명하기가 곤란해진다. 뒷산 흙 맛이 어떤지나 알게 되겠지.

“형님, 오셨습니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문가에 선 정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정윤은 착실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링거가 놓인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진환은 몸을 일으켰다.

“안 그래도 어제 성수 형님이 귤을 가져왔는데. 드시겠습니까?”

“귤?”

진환은 침대 옆 간이 수납장 위에서 검은 봉지를 집어 올렸다.

“혼자 먹다 다 썩게 생겨서… 달아요. 여기.”

봉지 안에서 귤 하나를 꺼내 정윤의 손바닥 위에 얹는다. 나무뿌리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손바닥 위에 올라간 오렌지색 동그라미는 연약하고 보잘것없었다. 그래서인지 껍질 아래로 손톱을 밀어 넣어 벗겨내는 정윤의 동작은 평소의 행동보다도 느릿하고 집중력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과육이 으깨어 터지지 않도록 껍질을 벗기려 애쓰는 것 같았다. 조각난 조그마한 귤껍질이 흰색 거스러미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진환이 세 개 정도 되는 귤을 까먹는 동안, 정윤은 마침내 반질반질한 껍질을 긁어내고 첫 번째 알맹이를 입에 집어넣었다. 귤 쪼가리가 곤죽이 되고도 남을 시간 동안 씹은 끝에 삼키고, 정윤이 입을 열었다.

“달아.”

그때, 진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쾌하게 목청을 울리며.

정윤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진환을 응시했다. 한참 후에야 웃음이 잦아들었다. 진환은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나 더 드시죠. 이것도 답니다.”

이제 고개를 끄덕거리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정윤이 정말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슴 한편이 부드럽게 저며 들었다. 진환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형님. 퇴원은 언제 하십니까?”

정윤의 뒷모습에 대고 진환이 더해 물었다. 널따란 손톱이 귤 꼭지 아래를 누르며 서툴게 자그마한 조각을 뜯어냈다.

“경준이가 아직이래.”

“회장님께서 말입니까?”

의사가 아니라? 정윤이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불길한 침묵이었다. 진환은 서둘러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전 낼모레 퇴원합니다.”

“모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정윤의 눈빛이 묘하게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실밥도 풀었겠다, 성수 형님 뒷정리 도와줄 사람도 필요하고, 이 몸이 나서야지 어쩌겠습니까.”

“응.”

“그러니 형님만 퇴원하시면 됩니다.”

정윤은 멀뚱하게 시선을 던졌다. 진환은 살갑게 웃어 보였다.

“약속하셨잖습니까. 한잔 사시겠다고.”

“약속.”

“예. 약속.”

마치 그 말을 되새기듯, 정윤이 손을 꼽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덩치는 커서, 저럴 때는 어린애 같다. 웃음이 조금 더 깊어졌다.

***

“입을 열었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채 몸뚱이가 흔들거린다. 장갑을 벗은 사내가 고개를 주억이며 다가왔다. 고개를 기울여 곤죽이 된 사내를 흘겨보다가 경준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금방이네요. 수고했어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형님.”

무거운 소음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대롱대롱 흔들리던 몸뚱이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었다. 도르래에 매달린 밧줄을 잡은 사내가 움츠러들었다. 괜찮다는 손짓을 해보이고, 경준은 다시 넙치에게 돌아섰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곽동진이 시켰다고-.”

곽동진이면 민 이사와 연줄이 있는 브로커다. 철거 현장에 내보내는 시종 잡배에서 삼합회 계보의 중국발 조직 간부까지 발이 넓은 인물이지만, 도박벽이 있어 요즘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들었다. 민 이사가 제시한 액수를 휑하니 모른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았대요?”

“그게… 행동대장이 말해줬답니다.”

담배 필터가 입술에 물리려다 도로 멀어진다.

“성수 형이요.”

“저도 그, 구라 치지 말라고 좆창을 내려고 했습니다만.”

넙치가 묵직한 지퍼백을 내밀었다. 액정이 반짝거리는 신형 스마트폰이다. 경준은 눈매를 슬쩍 좁히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이 끈적거린다.

“뭐가 좀 묻었습니다, 그. 닦는다고 닦았는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는 넙치를 앞에 두고, 경준은 말없이 화면을 눌렀다. 배경 화면은 보기가 낯뜨겁도록 폼을 잰 청부업자 본인의 사진이었다. 별 의미 없이 화면을 양옆으로 스와이프하다가, 경준이 고개를 들었다.

“이게 어쨌는데요?”

“사진첩 보시죠.”

갤러리 앱을 열자 배경 화면과 비슷한 본인의 얼굴 사진이 가득하다. 저만치 너머 발밑에 떨어진 피떡이 된 얼굴에서는 흔적도 남지 않은 모습이다. 심드렁하게 스크롤을 내리던 중, 경준의 손이 멈칫했다.

술자리였다. 못 본 사이에 주름이 확실히 는 곽동진의 모습. 얼굴이 벌겋고, 무릎 위에는 속옷이나 다름없는 옷차림의 여성이 꾸며낸 웃음으로 들러붙어 있었다. 카메라를 든 건 본인이다. 그 저편에는 위스키 잔을 든 오른손이 보인다. 요란한 은색 반지를 낀 손.

박성수의 손이다.

느긋하게 사진을 바라보다가, 경준은 핸드폰을 그대로 넙치에게 던졌다.

“물에 던져 버려요. 누가 안 보는지 확인 잘하고.”

“알겠습니다, 형님.”

반 정도 탄 담배를 바닥에 떨구고 휘휘 손을 젓는다. 신호를 알아들은 장정 둘이 달려와 바닥에 깔린 비닐을 시체 위에 겹쳐 만다. 고등어 포장하는 것처럼. 끈적거리는 손이 영 불쾌하다. 손마디를 비벼대자 주름에 낀 검붉은 때가 밀린다.

맥락 없이, 경준이 입을 뗐다.

“…왜 찔렀대요?”

“예?”

“저 그 자리에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찔렀대요?”

넙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벙하니 입을 벌렸다.

경준은 웃고 있지 않았다.

***

병실 문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던 경준은 그대로 잠시 멈추었다. 손가락 사이의 주름이 불그스레한 찌꺼기가 뭉친 것처럼 지저분했다. 손수건으로 대강 문질러 닦는다는 게 오히려 스며들어서 흔적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먹질을 한 탓에 손뼈 부근이 욱신거렸다. 팔꿈치도 시큰거린다.

피곤하다.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으며 유심히 관찰하는 중 옆에서 지켜보던 부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형님.”

경준의 눈길이 사내에게 향했다. 그가 두 팔을 내밀었다.

“코트 맡아드리겠습니다.”

“아.”

조그맣게 수긍하는 소리를 내고, 경준은 입고 있던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검은색 코트를 벗어 내밀었다.

“조금 축축할 거예요. 눈을 맞아서.”

부하는 어리숙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코트를 건네어 받았다. 그 낌새가 이상했다. 그는 지난 일주일간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사라지지 않았다. 주욱 위로 째진 눈이 안 그런 척 경준의 손바닥을 흘끔거렸다. 경준은 산뜻하게 머리를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예? 아,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왜 그러세요?”

목울대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절절매던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말… 진짜 같습니까?”

문고리에서 손이 떨어졌다. 두 손이 허공에 들리고, 돌아선 몸통이 그를 향했다. 상대의 어깨가 좁혀졌다. 눈매에 공포심이 서렸다. 손마디까지 핏물이 낀 손이 허공에 들렸다.

그리고, 어깨에 안착했다.

“목마르지 않아요?”

“네, 네…?”

“목이요.”

경준이 미소 지었다.

처음에는 얼어붙었던 상대는 서서히, 막 태엽이 풀린 장난감처럼 쌩하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깁스처럼 크고 축축한 코트를 팔뚝에 만 채 뒷걸음질을 치더니, 고개를 연거푸 끄덕인다. 허옇게 질린 얼굴에는 식은땀마저 맺혀 있었다.

“마실 것 사 오겠습니다.”

“고마워요.”

촌스러운 구김이 간 실크 셔츠를 입은 사내가 복도 건너편으로 사라진다. 머릿속이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들여다보인다. 양아치 새끼들은. 경준은 나긋한 미소를 띤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의심의 문제가 아니다. 늘 그래왔다. 의심한 적은 없었다.

죽어라 패던 아버지에게 재떨이를 들고 달려들었을 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등 뒤에 칼빵을 일곱 번 맞고 길바닥에 뒹굴다가 살아남았을 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러시아 놈들 소굴에 들어가 열 손가락 멀쩡하게 거래를 성사시켰을 때,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경준은 한 번도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다.

위협에 반응했을 뿐이다.

상념을 떨쳐내고, 경준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정윤 씨. 저 왔어요.”

경준을 맞이한 건 얼음장 같은 침묵이었다.

인기척도, 대답도 없었다. 발을 디딘 병실 안은 고요했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경준은 숨바꼭질을 시작한 술래처럼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굳게 닫힌 창문으로는 흐리멍덩한 겨울 햇살이 들어왔다. 창문에 부딪히는 바람이 휘몰아치며 적막감을 더한다.

“정윤 씨?”

경준의 걸음은 계속해서 안으로 향했다. 병실 안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정윤은 거의 틀어보지도 않는 티브이를 지나 침대로 향한다. 안으로 향할수록 걸음은 빨라지고 손바닥에는 싸한 땀이 흘렀다. 공이 튕겨 나가는 것처럼, 성마른 시선이 정신 사납게 방구석 곳곳을 찔렀다.

“정윤 씨. 정윤 씨…!”

걸음이 침대 앞에 우뚝 선다. 부피감이 전혀 없는 이불을 들쳐 올리자, 병원 마크가 패턴처럼 찍힌 초록색 침대 시트가 삭막하게 드러났다.

내내 웃음이 걸려 있던 경준의 입매가, 고정된 실이 끊긴 것처럼 톡하고 일자로 돌아왔다. 가지런한 손길이 시트를 쓸었다. 경준은 상황을 받아들였다.

정윤이 없다. 적어도 이 병실에는. 분명히 여기에 있으라고 말한 다음이다. 심지어, 사람이 부탁을 했는데.

그런데도 사라져 버렸다.

그 개자식이.

병실 문이 도로 열린다. 박차고 걸음을 디디며 복도를 오가던 경준은, 차트와 링거대를 들고 이동 중이던 간호사 한 명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저기요.”

경준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간호사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가 차트를 들어 얼굴의 반절을 가렸다. 불편함이 느껴질 만치 거리를 좁히며, 경준이 웃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웃는 표정일까? 잘 모르겠다. 치켜올린 입꼬리가 미친 듯이 덜덜 떨렸다. 눈알이 시큰거린다.

경준이 입을 열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경준은 말을 꺼냈다.

“사람 좀 찾으려고요.”

***

고심하듯 눈살을 찌푸리던 끝에, 정윤은 홍단을 내려놓았다. 패가 착하니 붙는다. 진환은 아깝다는 듯이 기다란 신음을 뱉었다.

“아-씨, 그거, 제가 먹으려고 한 건데!”

“내가 먼저야.”

“진짜 인정사정없으십니다, 형님.”

화투장을 내려치며 진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켜보던 정윤의 입가가 따라서 씰룩거렸다. 거울을 보고 연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걸 보고 있자니, 망아지가 비틀거리면서 걷는 것을 연습하는 걸 볼 때 같은 흐뭇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짜악. 화투패가 붙는 날렵한 소리에 금방 집중력이 돌아온다. 먹으려고 점찍어 뒀던 팔광이 날름 정윤의 점수 패에 들어가 버린다. 이걸로 정윤은 벌써 9점. 이쪽은 피박만 면한 상태다. 진환은 머리를 긁적였다.

“대만에서 고스톱만 치셨습니까? 운빨이 잘 받으십니다.”

“가끔은. 근데 다른 거 더 많이 했어.”

“뭐 말씀이십니까? 마작? 바카라?”

정윤의 무심한 시선이 화투판을 훑었다.

“이거, 이상해.”

따라서 고개를 수그리고 눈대중으로 패 더미를 이어 맞춰보니 정윤의 말대로였다. 사쿠라, 홍싸리, 풍… 청단 하나가 댕그라니 남는다. 떠들면서 화투를 치다가 누구 한 명이 잘못 짝을 맞춘 모양이었다.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진환은 점수를 내려고 짝을 맞춰 두었던 패들을 우르르 쏟아버렸다. 그대로 침대에 덩그러니 눕는다.

“무승부로 하죠, 그럼.”

“괜히 졌다고.”

“그런 거 아닙니다.”

배 째라는 듯이 눈을 감고 있는다. 한참을 꿋꿋하게 자는 시늉을 하다가 슬쩍 실눈을 떠 흘겨보니, 정윤의 손이 머리카락 위에 닿아 있었다. 널찍한 손바닥이 훌훌 머리숱을 쓰다듬는다.

“뭡니까.”

“머리, 부드러워.”

“남사스럽습니다. 사내새끼들 사이에.”

“그만해?”

진환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손길과 동시에 등골에 짜르르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미친 듯이 가슴이 간질거린다. 쿵쿵거리고 심장이 달음박질을 친다.

잠깐. 이거 왜 이래?

“…왜 그래?”

시선을 느꼈는지, 정윤이 물어왔다. 살며시 웃는 정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는 축 처진 두 눈이 저를 보고 있으니, 괜히 속내를 들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볕이 좋을 시간인 오후, 정윤의 뺨이 발그스레하게 햇빛을 받아 달아올라 보였다. 공항에서 처음 봤던 그때처럼.

가늘게 떴던 눈을 재빠르게 감고, 정윤의 얼굴이 보지 못하도록 옆으로 돌아누웠다.

“만지지 마세요. 오래 안 감아서 더럽습니다. 냄새도 나고.”

“냄새 안 나는데.”

“더럽습니다.”

손길은 거두어지질 않았다.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는다. 계속 이상한 기분이 든다. 간지럽고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다. 부드럽다니. 분명히 굳은살만 가득한 사내새끼 손이다. 그게 왜 부드럽게 느껴지지? 강아지풀이 귓가에서 살랑거리는 것 같다. 날씨 좋은 날 풀밭 위에 누운 것처럼 온몸이 근질거린다. 참을 수가 없을 만큼.

속이는 거다.

지금 나는, 이 새끼를 속이는 중이다. 그래야 날 믿고 등을 맡길 테니까. 그래야 칼 쑤시기 좋으라고 빈틈을 보여줄 테니까. 그래야 쉽게 배신을 때리고 언더보스 팔목에 은팔찌도 채울 테니까. 그래야 형이 사니까.

그래서 속이는 중인 거다. 이 새끼는 그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는 거다. 그것뿐인데.

“그만하세요.”

“싫어?”

“싫은 게 아니라, 그….”

“아니면?”

“도대체 말입니다, 형님은!”

가쁘게 숨을 들이켠다. 갑자기 고개를 든 탓에 놀랐는지, 정윤은 손을 든 채로 멈추어 섰다. 방금 전까지 머리를 헝클이고 쓰다듬던 손가락이 어쩔 줄을 모르다가 허공에서 오므라들었다. 진환의 손이 그 손목을 낚아채 매트리스 위에 눌렀다. 고개를 불쑥 내밀어 버리고 눈을 단단히 마주친다.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뭐, 뭘?”

“이거 말입니다. 이거. 왜 이러시는 겁니까? 계속 저 찾아오고. 방금처럼 만지고.”

“많이, 싫어?”

“싫은 게 문제가 아니라-!”

오른손이 묵직하게 매트리스를 내려친다. 진환은 제 행동에 놀랐다. 생각보다 크게 울린 소리에도. 정윤은 여느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마주 보고 있었다.

“더러워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했잖습니까.”

“난 네 형님이잖아.”

정윤의 눈가가 좁혀든다.

“그것 때문에 그렇게 말한 거야.”

“예?”

“솔직하게 말하면 혼날 것 같으니까.”

“형님….”

“괜찮아.”

“형님, 지금 흥분하신 것-.”

“괜찮아.”

그 말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져, 반사적으로 말문이 막힌다. 다시 본 정윤의 표정은 고요했다. 까만 눈이 연기처럼 탁하다.

“걱정하지 마. 나, 아무 짓도 안 해. 아무 힘도 없어. 어차피 내 말은 아무도 안 들어. 내가 기분 나쁘면 그렇다고 말해.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침도 뱉고, 욕해도 돼. 경준이도 그랬고, 대장도 그랬고, 개싸움장에서 만난 사람들도, 배에서 만난 사람들도, 아빠도, 다 그렇게 했어. 다들 그렇게 해. 그러니까 너도 그래도 돼. 너도-.”

의식에 없는 행동이었다.

조절 밖의 일이다. 불가항력이었다. 조약돌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달이 차면 썰물이 이는 것처럼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월이 지나면 여름이 찾아오거나 땀이 차면 찝찝해지거나 돈 없는 도둑은 감옥에 가게 되는 것처럼 다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후에 몰려오는 졸음이나 굶어 죽는다는 아프리카 아이들이 나오는 공익 광고나 노래를 흥얼거리면 따라오는 들썩임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정윤에게 입 맞춘 것은.

맞대어 누른 입술 아래, 갈라지고 거스러미 진 얇은 입술의 동동거리는 맥박이 전해졌다. 까칠까칠하고 따뜻하다. 볼 위 가까이 숨결이 불어와 끼친다.

복도에서 녹슨 기계 부품을 억지로 당기는 듯한 소음이 들려왔다. 밀랍처럼 굳어 있던 시간이 용해된다. 진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정윤은 가슴을 밀어내고 있었다.

“…나.”

다시 바라본 정윤은 할 말을 잊어버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내리깐 눈꺼풀과 함께 축 처진 눈매가 바르르 떨렸다.

“갈게.”

현실이 벼락처럼 덮쳐왔다.

“잠깐, 형님. 잠-.”

변명을 할 틈도 없었다. 붙잡을 시간도 주지 않고, 정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팔을 잡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허무하게 휘둘렸다. 진환이 침대에서 발을 디뎌 달리려던 중, 협탁의 모서리가 꿰맨 자리를 찔렀다. 칼날이 두 번 쑤시는 듯한 통증에 억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사이, 정윤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형님. 정윤 형님! 아닙니다. 실수였습니다!”

진환이 소리 질렀다. 문이 닫힌다. 옆구리를 붙잡고 한참을 침대에서 구르던 진환은, 베개를 잡아 있는 힘껏 벽을 향해 집어 던졌다.

***

닫힌 문을 등에 대고, 정윤은 입가를 감싸 잡았다.

내게 키스했어.

성관계를 시작하기 전에 그렇게 바람을 잡은 적은 수도 없이 많다. 키스는 대장이 가장 좋아하는 애무 중 하나였다. 블로우 잡과, 목에 바늘을 꽂는 것 다음으로. 시가를 피워 수세미처럼 뻣뻣해진 혓바닥을 우악스럽게 문지르며, 질식감이 들 때까지 혓바닥을 목구멍에 밀어 넣곤 했다. 그렇게 키스를 하고 나면 정윤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기침을 해댔다. 아마 그 모습을 보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것은 느낌이 달랐다. 가슴이 답답할 만큼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른다. 숨소리가 귓가까지 들렸다. 목덜미를 누르는 손바닥은 아무런 무게도 실려 있지 않았다. 미묘한 균형이 잡혔다. 달걀이라도 쥔 것처럼.

모든 게 이상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흉할 만큼 손바닥에 땀이 난다. 턱에 댔던 손을 바라보다가 기도를 억누르듯 갑갑한 숨을 애써 몰아쉰다. 허리가 휘어졌다.

“…이상해.”

짧은 머리 뿌리를 쥔 손이 움츠러들었다.

덜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행기를 끄는 노인이 느린 발걸음으로 저편에서 걸어왔다. 늘 이 시간 즈음이 되면 산책을 하는 사람이다.

그 말은 경준이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얼굴에 몰렸던 열이 창밖으로 던져진 것처럼 내려앉았다. 방 안에 얌전히 있으라는 게 경준의 명령이었다. 자리를 비우고 다른 곳으로 간 걸 알면 분명히 화를 낼 것이다. 경준은 명령을 어기는 걸 싫어한다. 경준에 대해 다른 건 알 수 없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노인이 병실 문 앞을 지나갔다. 육상선수처럼 팔을 앞뒤로 흔들고 달려나가면서도, 정윤은 어르신을 향해 묵례해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계단 층계 옆에 자리한 엘리베이터의 층계 표시판을 보니, 막 한 대가 일 층에서부터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경준이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정윤의 시선이 옆의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여기서부터 세 층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여기까지 내려왔다가 도로 올라가는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하나뿐이다.

붕대를 감은 손이 계단 난간을 움켜쥐었다. 육중한 덩치가 계단을 밟아 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자는 생각에, 다리가 닿는 대로 계단을 밟았다.

자랑할 만한 것은 둔한 몸뚱이밖에 없는 정윤이지만, 한 번에 세 칸씩 계단을 오르자니 자연스럽게 숨이 찼다. 그러나 속도라면 뒤지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벨이 울리기도 전, 정윤은 제 일인실 병실 앞에 도착했다.

됐어. 이제 됐어.

땀조차 거의 나지 않았지만 괜히 이마를 문질렀다. 아직 열리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번 더 훑어보고서, 정윤은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찬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 들었다. 막 뜀박질을 마친 몸뚱이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고장 난 것처럼, 정윤은 그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왔어요?”

침대에서 역광을 맞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걸음과 함께 그림자가 매끄러지듯 얼굴 저편으로 비켜 간다. 웃는 얼굴이 드러난다. 경준의 웃는 얼굴이.

“…경준아.”

뒷걸음질을 친다. 아직 올라오는 중일 줄 알았는데. 늘 이 시간이 넘어서야 왔는데. 시선만이라도 도망치듯 병실 안을 훑는다. 그럴수록 경준은 가까워지기만 했다. 이윽고, 그의 손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정윤의 뒤로 문이 닫혔다. 도망칠 곳은 없다.

“어디 갔었어요?”

경준이 뺨 위를 쓰다듬었다. 더없이 다정한 손길이다. 정윤은 참회하듯이 손등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손끝이 떨려왔다. 흉터가 진 부분마다 각인된 공포가 고동친다.

“…산, 책.”

“밖으로?”

“응.”

“내내?”

“응.”

“추웠을 텐데.”

진환의 눈동자가 옆으로 향한다. 손등 위에 겹쳐둔 굳은살투성이 손바닥 위로. 이윽고, 매끈한 얼굴이 천사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따뜻하네요. 정윤 씨 손.”

손을 떼어내려는 순간 명치에 충격이 일었다. 경준은 짧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병실을 가로질렀다. 정윤은 두피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경준의 손길을 따라 걸었다.

반항하면 더 심한 꼴을 당할 뿐이다.

***

“아파요?”

배를 걷어찬다. 바닥에 굴러 콜록거리던 정윤이 고개를 저었다.

“부탁했잖아요.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왜 제 부탁을 안 들어줘요?”

“미안해. 경준아, 미안해.”

“또, 또, 마음에도 없는 말.”

“아냐. 진짜로 미안-.”

다시 복부에 발길질이 들어간다. 헐떡이는 사이 손이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힘이 빠져 고개가 저절로 들린다. 그대로, 목덜미가 흉포한 힘으로 짓눌리며 상체가 침대에 얹힌 채 고정된다.

“저 없었으면 정윤 씨 어떻게 됐을지 알아요?”

“경준아….”

“손톱을 다 뽑아버리겠다는 새끼들을 구슬리고 구슬려서 살려줬는데. 먹여주고 놀아주고, 사람처럼 살게 해줬는데. 작은 부탁 정도는 들어줘도 되는 거잖아요. 그래도 되잖아.”

등골에 오스스 소름이 스치고 지나갔다. 경준의 손이 어느새 바지의 허리춤을 끌어 내렸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이 수치스럽게 드러난 둔부에 닿아 끊어버리려는 신경을 자꾸만 환기시켰다.

“경준아. 잠깐만, 잠-!”

밀부를 벌리고, 경준의 손가락이 억지로 안쪽으로 파고들어 갔다.

이물감에 익숙해질 틈도 주지 않고 마디를 구부리며 스폿을 찔러댄다. 팽팽히 긴장이 들어간, 연약한 부위의 살갗이 강제로 벌려지는 고통 속에서 몇 년에 걸쳐 몸에 각인된 쾌락이 섞여들어 왈칵 눈물이 나오게 만들었다.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정윤은 억지로 시트를 깨물었다. 그러나 손마디가 계속해서 민감한 부분을 누르자 속수무책이었다. 악물린 이에서는 힘이 풀리고, 개처럼 질질 침이 새어 나온다.

더욱이 볼썽사납게 둔부가 들린 탓에 아래쪽의 반응이 훤하게 보여졌다. 비웃는 듯한 경준의 웃음소리가 머리 바로 위에서 들렸다.

“여기가 고파요?”

있는 힘껏 고개를 젓는다. 조금이라도 농락하는 손가락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허리를 뒤치려 해보지만, 목덜미가 눌린 탓에 오히려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꼴이 될 뿐이었다. 그럴수록 파고들어 간 손가락은 집요하게 까딱거리며 그곳을 문질러 댔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으흐… 하… 읍… 경준.”

“정윤 씨, 진짜 음탕하네요. 박히는 게 그렇게 좋아요?”

“그만. 그, 그만….”

“그게 문제였나? 그동안 안 박아줘서 그랬던 거예요? 그래서 내 부탁도 안 들어주고 나간 거예요? 아무한테나 좀 박히고 싶어서?”

“아냐, 아, 냐. 아…!”

허리가 부르르 떨린다. 고였던 눈물이 기어이 흘러내렸다. 시트에 비벼진 귀두 끝에서 사정액이 흘러나왔다. 가버렸다. 손가락으로 쑤셔진 정도로. 뺨을 댔던 시트에 아예 얼굴을 파묻고, 정윤은 눈을 감았다.

“방법이 없네요.”

경준의 기척이 멀어졌다. 둔부를 내놓은 채로 엎드려, 정윤은 조용하게 입술을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경준의 화를 풀어줄 방법이.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진다. 정윤은 질끈 눈을 감고 머리를 저었다. 무조건 용서를 빌자. 고추도 잘 빨고 싫다는 소리도 안 하고, 혼자 멋대로 안 가버리게 잘 참는 거야. 그러면 용서해줄지도 몰라. 착하게만 있으면.

마음을 다잡고, 정윤이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지으려 한다.

“심심했어. 그랬을 뿐이야. 그래서-.”

하얗게 미소가 바랜다.

“하지 마.”

“왜요?”

“하지 마. 제발, 경준아. 제발….”

몸을 뒤로 젖히며 일어서기 전, 정윤의 손바닥이 목을 움켜쥔다. 반대편 손에 들린 주사기가 허공을 가리켰다. 바늘 끝에서 투명한 약물이 동그랗게 맺혔다.

내장이 비틀리는 것 같다.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기어들었다.

“제발, 하지….”

“걱정 말아요.”

경준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다음에 박아줄 테니까.”

주사기 속 액체가 눈금 아래로 내려간다. 정윤의 팔다리가 꿈틀거렸다.

***

덜컹이는 소리가 난다. 심드렁하게 티브이를 보던 눈에 총기가 일고 덮고 있던 이불을 발길질로 들춰버린다. 문이 있는 방향으로 목이 돌아갔다.

“형…!”

그러나 상대방을 확인하자 말은 이어지지 않고, 흥분해서 올라간 두 어깨가 곧 축하고 늘어졌다. 비죽이 입술이 나왔다.

“…오셨습니까.”

여느 때처럼 봉투를 손에 든 박성수는 그 반응이 영 아니꼬운 듯했다.

“어허, 씨바, 새끼, 너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닙니다.”

“띠꺼운 새끼.”

여지없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피할 마음도 들지 않아, 진환은 배 째라는 심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티브이 소리가 괜히 더 시끄럽게 느껴진다.

그날, 그러니까 정윤의 입술에 생뚱맞게 입술 박치기를 하다 엇박자를 쳐버린 이후로, 정윤은 병실에 들르지 않았다. 벌써 사흘째였다. 짧게나 길게나,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들렀는데. 이제는 언질조차 없는 것이다.

당연하다. 그런 멍청한 짓을 했는데.

‘왜 그랬지?’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아마 화가 났던 것 같다. 목구멍까지 텁텁하게 막혀오는 것이 숨쉬기도 어려웠으니까. 정윤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저에게 침을 뱉으라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새까만 눈동자는 죽은 사람의 것 같았다.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담지 않고, 껍데기만 남은.

그래서 손이 뻗어 나갔다.

앞뒤가 안 맞는 소리다. 얼굴을 벅벅 문지른다. 그러니까 그 호구 새끼는, 왜 사람 머리를 막 만지고 그래서. 왜 쓸데없이 히죽히죽 웃고 다녀서. 쥐뿔도 없이 개털인 나한테….

‘혹시….’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이제 진짜 내가 자기랑 자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진환은 다리를 마구 구르다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집어 올렸다. 끝장이다. 여자건 남자건, 한번 대달라고 애걸하는 놈들만큼 못 미더운 놈들도 없는 법이다. 신뢰고 뭐고 쌓이질 않는다. 지금까지 시시덕거리면서 잘 지냈던 거, 귤 몇 개 까주고 말장난 걸어준 거, 하다못해 몸 날려서 칼 맞아준 것까지. 저한테 박아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아는 거면 이제껏 쌓은 신뢰도 거품처럼 꺼져버릴 터였다.

섹스하고 싶어 하는 거라고 오해해서, 막. 야한 만화 나오는 애들처럼 ‘너도 내 몸이 목적이었어?’ 하면서 사리는 거 아니냐고.

정윤이 양팔을 엑스 자로 교차하며 가슴을 가리며 요염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떠오른다. 가관이었다. 비 맞은 똥개 같은 얼굴은 더 축 처지고, 옷은 헐벗고, 가슴은 또 좆나게 커서 팔로 가리나 마나 하겠지. 근데 이상하게 살짝 가리면 더 꼴리는-.

“씨발!”

다짜고짜 몸통을 일으킨 진환이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아댔다. 자해 같은 행동에 겁을 집어먹은 박성수가 달려들어 그를 말렸다.

“이, 씨발 놈이 미쳤나. 야, 그만해, 씨발 놈아! 그만!”

“그만 못 합니다! 정신 차릴 겁니다!”

“지금이 더 미친놈 같아, 새꺄!”

“악!”

애타는 비명이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간호사가 들어온 후에야 진환은 쓸모없는 자학 행위를 멈추었다.

“내일 퇴원이지?”

박성수가 봉투에서 귤을 꺼냈다. 전에 사 온 것도 아직 남았는데. 울퉁불퉁한 모양을 보니, 또 어디 관리하는 가게에서 파치로 내놓은 걸 가져온 게 분명하다. 양아치 새끼. 진환은 얼얼한 이마를 누르며 귤 꼭지에 엄지손톱을 눌러 찍었다.

“그렇습니다.”

“쉬엄쉬엄해라. 또 쥐어 터져서 실려 가면 병원비 안 대줄 테니까.”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까지 참 일관성이 있으시다.

티브이에서 휴양지에 놀러 간 연예인들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모래사장에서 무슨 끝말잇기 게임인가를 하는데, 갈매기가 메인 MC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더 볼만했다.

“캬, 좋다.”

박성수가 감탄사를 뱉었다.

“저런 데에서 살면 얼마나 살맛이 나겠냐. 안 그래?”

진환은 심드렁했다.

“사람 사는 데 다 똑같습니다.”

“새꺄. 저 봐, 저. 괌이랜다. 저런 데에서 지지고 볶고 싶겠냐? 신선놀음하기 바쁘지.”

그 말에 진환은 귤을 씹으며 티브이 속 풍경을 유심히 바라봤다. 예쁘장한 아이돌 그룹 출신 연예인 뒤로는 눈이 시릴 만큼 시퍼런 하늘이 펼쳐졌다. 하늘 못지않은 바다는 조잡한 병원 티브이의 화면으로 봐도 맑았다. 해가 환하다. 따뜻해 보인다.

“진환아.”

박성수가 운을 뗐다. 나무라는 투가 아닌 건 오랜만이다. 놀라서 돌아보았지만 정작 본론은 이어지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만 있다가 그가 이내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싱겁기는. 턱을 당기고 미심쩍게 흘겨보다가 헤드에 등을 기댄다. 곧 거슬리는 전화 소리가 들렸다.

“형님이 부르시네, 그만 어, 가봐야겠다.”

“살펴 들어가십쇼, 형님.”

“너도 몸조리 잘하고.”

병실 안은 다시 조용함을 찾았다. 티브이는 본체만체하며 봉투에서 새 귤을 꺼낸다. 손에 들기는 했지만 식욕이 생기지 않아, 껍질을 까지 않고 조몰락거린다.

곰 발바닥 같은, 큼직한 손이 귤을 까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하는 일인 것처럼 느리고, 서툰 손짓. 한껏 집중하던 그 눈빛.

‘덩치는 산만 해서 귤 하나도 제대로 못 까.’

귀엽게.

낱알을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조그마한 과육 알갱이들이 톡톡 입 안에서 터졌다.

***

얼마나 지났지?

시간이 가늠되질 않았다. 오랫동안 여기에 누워 있었던 건 확실한데,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기억이 흐렸다. 뿌연 빛이 눈으로 들어왔지만 형광등 빛인지,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겠다.

눈동자가 팔뚝이 뻗은 쪽으로 향한다. 바늘 자국을 따라 퍼런 멍이 든 팔뚝은 이제 무뎌져 감각조차 없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려고 하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므라들었다가 펼쳐지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제 몸이 아닌, 괴상하게 생긴 외계 생명체나 기계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느리게, 그리고 불규칙적으로 뛰어오른다. 귓바퀴에 농구공 튀는 소리처럼 박동이 들린다.

경준이는 이번에 용서해주지 않았다.

혈관을 통해 약이 퍼지고, 몸이 축 처졌을 때 좆대가 파고들어 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행위 내내 정윤은 덩치가 무색하게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경준은 엉덩이를 치켜올리게 만든 다음에 박고, 무릎 위에 앉힌 다음에 박고, 가슴을 움켜잡으며 피어싱이 박힌 유두가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농락하다가 침을 질질 흘리는 벌어진 입 안에 좆을 밀어 넣었다. 혀 놀림을 기대하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기도까지 닿도록 귀두가 목구멍으로 꽉 차고 들어와 산소가 떨어져 눈알이 위로 굴러갈 때야 놓아주었으니.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의식마저 지워버릴 만큼의 둔한 쾌감이 몸을 지배했다. 약 기운이 떨어져 갈 때면 여지없이 바늘이 들어오고, 그러면 성행위가 이어졌다. 좆대를 치켜올리면서 불룩 뱃가죽이 솟은 것을 비웃는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난다.

‘이러다 임신할 것 같아요, 정윤 씨.’

그건 싫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낯선 울음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상스럽게 쿠퍼액을 흘리는 성기는 좆대가 내장을 쑤실 때마다 착실하게 꼼지락거린다. 몇 번이나 쑤셔 박히면서 사정을 했는지, 나중에는 사정액 대신 묽은 액체가 줄줄 흘렀다. 정신을 잃을 듯한 쾌감이 두려워 눈물이 나왔다.

핏발 선 눈이 데룩데룩 구르며 과거를 뒤돌아본다.

약은 언제 시작했더라?

팔려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장은 개싸움을 좋아했다. 누나와 정윤을 동시에 사 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윤이 뛰어난 ‘투견’이 될 것을 알아본 것이다.

산발적인 영상이 머릿속에 스쳤다. 나이프. 조명. 철장. 소리치는 사내들. 무기를 들고 마주 선 또 다른 아이의 겁에 질린 표정. 그리고 핏줄기. 그는 실로 최고였다.

간부들 앞에서 뒤를 따먹힐 때는 어땠던가.

약이 도와준 덕에 모멸감 같은 건 느낄 틈도 없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네발로 선 사내를 겁탈할 수 있다는 본보기였을까? 아니면 그저 고급 정장을 입고 총을 든 장정들 앞에서 수치심도 모르고 앙앙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걸까? 정윤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약도, 들락거리는 좆대도, 쏟아지는 모욕도.

바람이 들어온다. 하늘을 휘몰아치며 올라가는 기분. 한계까지 약에 절어버린 몸은 헐떡거리며 감당하기 어려운 쾌락을 참아내기에도 벅차다. 얼굴에 끼치는 바람과 함께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마의 땀을 훔치고, 축축해진 속눈썹을 만지고, 눈을 가로질러 난 흉터를 쓸어내린다. 다정한 손길.

“정신이 들어요?”

화가 난 목소리가 아니다. 벌이 끝났다는 뜻이다. 바다에 빠진 듯이 무뎌진 몸뚱이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윤은 따스한 안도감에 사로잡혔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가락이 들린다. 봄볕처럼 나긋한 목소리가 사근사근하게 귓바퀴에 파고든다. 헤로인에 빠져들 때처럼 몽롱한 저릿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정윤 씨. 저 정윤 씨 좋아해요. 사랑한다고. 그래서 구해준 거예요. 안 사랑했으면 도와주지도 않았죠. 생각해봐요. 안 그래요?”

고개를 끄덕인다. 적어도 끄덕이려고 애를 쓴다. 노력이 전해졌는지, 경준에게서 간드러지는 웃음이 돌아왔다.

“정윤 씨. 사랑받아 본 적 있어요?”

고개를 젓는다. 웃음소리. 잘하고 있다. 정답을 말하고 있다.

“봐요. 내가 처음이잖아.”

“응. …응.”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면, 제발 들어줘요. 이렇게 정윤 씨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응.”

흐릿하게 진동 소리가 들렸다. 말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경준이 고개를 돌렸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정윤 씨.”

“응.”

“돌아오면 바로 병실을 바꿔줄게요. 경치 더 좋은 곳으로…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려요. 그럴 거죠?”

경준이 하는 말은 옳다. 무슨 말이든 옳다. 어떤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지만, 정윤은 무엇이든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바늘이 꽂히지만 않는다면. 다시 박히고 뺨을 맞지만 않는다면.

구부린 손가락이 붉게 물든다. 저녁. 지금은 저녁이다.

“…응.”

***

짐은 진작에 정리했다.

빌라에 남은 것이라곤 이제 가구 몇 채와 자존심 좀 세우겠다고 질러버린 호랑이 모형뿐이었다. 그 외에 값나갈 만한 물건은 전부 팔아 치웠다. 슈트가 켜켜이 담긴 트렁크를 응시하다가 가차 없이 지퍼를 밀어 올린다. 마지막으로 식탁 위에 올려둔 비닐봉지를 들어 올린다. 그 안에는 빚쟁이들이 혼수품이라며, 돌 반지라며, 돌아가신 아버지 유품이라며 울고불고 놓아주지 않으려던 금붙이들이 수북이 엉켜 있었다.

박성수는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봉지를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바로 처분하고, 현금으로 만들어야지.

짐가방 손잡이를 집는다. 두꺼운 손바닥에 큼지막한 짐가방 두 개가 어린애 유치원 가방 들리듯이 들려져 올라간다. 짐 들어줄 똘마니는 부르지 않았다. 미쳤다고 그러겠나.

이제부터 튀어야 하는데.

“씨부럴, 민 이사, 그 개자식 때문에….”

욕심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빼돌린 돈이 있어 찜찜하던 차에 박경준 눈 밑으로 잘 처리해주겠다고 해주는데, 무턱대고 거절하기에는 행방불명된 김 이사 꼴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그런데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이제 와서 나쁜 뜻은 없었다고 설설 긴다고 쳐도, 그 후레자식 새끼가 봐줄 리가 없었다. 저를 죽이겠다고 칼부림까지 일어나 버렸으니.

트렁크를 열어 가방을 던져넣는다. 운전석에 앉는다. 어쩌면 잘됐을지도 모른다. 지긋지긋한 바닥, 언제가 되었든 한몫 벌어서 튀려고 했으니까. 클럽 땅문서 팔아 치운 것만 가지고도 삼십 년은 필리핀에서 돈지랄하면서 놀 수 있다. 잘하면 첩도 들이겠지. 거기 계집들도 예쁠 거 아냐.

입맛을 다시며 시동 버튼을 누르려던 박성수는 얼어붙었다. 손가락이 허전했다. 손을 들어 문지르던 그는 금방 이유를 알아차렸다.

반지가 없다.

잇새로 급히 숨을 빨아 마신다.

아마 귀중품에 같이 넣었겠지. 짐가방 어딘가에 섞여 있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확인해도 늦지 않는다. 없어도 상관없다. 까짓 반지다. 특별히 값나가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은 반지.

한국을 뜨면 다시는 못 볼 반지.

시동 버튼에 닿으려던 손이 멀어지다가, 가까워지다가, 달달 떨리더니, 결국은 이마빡을 친다. 욕설과 함께 운전석 문이 열렸다.

“세수한다고 그걸, 괜히 빼가지고. 씨발.”

구시렁거리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손톱이 삐져나온 굳은살을 성급하게 긁어댔다.

“없기만 해봐라. 그냥 확 버리고 간다. 확-.”

집으로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찬물을 끼얹는 공포가 등골에 스쳤다.

문이 열려 있다.

뒷걸음질을 친다. 지금이라도 도망가면 된다. 들리지 않게. 아직 모를 때에. 슬금슬금 뒤꿈치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딜 가십니까, 그래.”

등 뒤에 기척이 닿는다. 압력이 실린 손바닥이 어깨를 눌렀다.

“찾으셨지 말입니다.”

“뭐야, 너. 안, 안 놔, 새꺄?”

손바닥이 움직이지 않는다. 씨발.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주머니에서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꺼내 후방으로 흔든다. 위협감을 느낀 상대방이 주춤하며 물러나지만, 보내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날을 거두지 않으며 자세를 낮췄다.

“씨발. 어떤 놈의 새끼가 보냈어. 어?!”

그러자 실낱같은 기대마저 꺾어버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어요, 성수 형.”

눈이 감기고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온다. 심장에서부터 싸한 냉기가 퍼져나갔다. 박성수는 끝을 직감했다. 서서히 눈을 뜨고 뒤돌아본다. 예상한 그대로다. 후레자식 박경준.

빈틈이 생긴 사이, 한 녀석이 팔목을 움켜쥐어 벽으로 밀쳐 박는다. 나이프를 빼앗으려는지 손목을 쥐고 비틀어댄다. 순순히 놓아주려 하지 않자 방향을 틀어 눈깔 쪽으로 나이프 날을 돌린다. 칼날이 점점 가까워진다.

악을 쓰고 상대를 떨쳐낸다.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 들려는 사이, 뒤에서 발길질이 들어왔다. 등이 짓밟힌다.

박경준은 이 모든 것을 웃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흰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나이프를 주워 들었다.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을 접는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 역광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디 급한 일 있으신가봐요? 연락도 안 되고.”

박성수는 비굴하게 웃음 지었다.

“급한 일은요. 그, 클럽 조사 때문에-.”

“그거 다 마무리됐는데. 저하고 얘기할 틈도 없어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선물 가져왔어요.”

“선물…이요?”

박경준이 주머니를 뒤적거리곤 손수건 뭉치를 꺼냈다. 누에고치처럼 돌돌 말린 손수건을 들추자 뭉툭한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퉁퉁하고 구부러졌다. 한번 그것을 들춰 보던 박경준은 발치에 ‘선물’을 던져 놓았다.

그것은 엄지손가락이었다. 잘려나간 엄지손가락.

경기가 올라온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이제는 염불을 외는 것처럼 욕지기가 줄줄 새어 나왔다. 경준이 제자리에 자세를 낮춰 앉는다.

“걱정 말아요. 안 아프게 보내드렸으니까. 그 전자 상가 할아버지, 박 상무랑 친한 사이라면서요.”

“왜, 왜 갑자기 이러십니까, 회장님. 아니, 경준아. 왜…!”

“상무님, 민 이사님이랑 사이가 좋으셨다면서요? 클럽에 일 났던 밤에도 두 분이 연락하셨다던데.”

“그렇게 될 줄 추호도 몰랐다, 경준아. 설명 좀 들어줘, 제발. 들어보면 다 이해할 거야. 다….”

경준이 담뱃갑을 꺼낸다. 개비를 물고 불을 붙였다.

“성수 형. 제가 형 존경하는 거 알죠. 저 쥐뿔도 없을 때, 형이 내 뒤 많이 봐줬잖아요.”

알싸한 담배 연기가 흩어진다. 박성수는 이제 갓난아기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그럼. 알지.”

“제가 형 믿는 것도 알고요.”

“알아. 경준아. 다 알아….”

“그럼, 질문 하나만 대답해 줄래요?”

“그래. 뭐든 다 해줄게. 뭐든….”

경준이 뒤를 돌아본다. 시야가 뿌옇게 되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를 건네어 받는 듯했다. 한 모금을 깊게 빨아올리고, 경준이 그것을 내밀었다.

“이거, 형이랑 관련 있어요?”

경준의 손에 들린 물건은 까만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동그랗고, 나사못이 들어갔을 동그란 홈이 패였다. 조각이 경준의 손가락 사이에서 뒤집히고 빙그르르 돌다가,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그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이거, 도청기 커버라면서요?”

말문을 잃는다. 더듬거리며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경준은 껌이 눌어붙은 자국이 시커멓게 득실거리는 빌라 복도에 담배꽁초를 꺾어 문질렀다.

“콩고물 빼먹은 거, 뒤에서 간 좀 본 거. 다 괜찮아요.”

경준이 말했다.

“근데 나 배신한 거. 그건 좀 상처받는다.”

“나, 나 아니다. 경준아. 내가 한 거 아냐.”

순수한 두려움에 질려, 박성수가 비굴하게 눈을 까뒤집었다. 언더보스 시절 경준이 프락치를 어떻게 했는지 목격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타 죽는 게 났지. 그런 꼴은 피하고 싶었다. 정말로.

“진짜야. 경준아. 진짜야…. 내가 왜 그러겠냐. 어? 내가 뭐 하러 조직을 배신하겠느냐고. 나 그런 놈 아니다. 경준아. 알잖아….”

“성수 형. 그 클럽, 제 손으로 직접 청소했어요. 형 관리하는 사이에 이렇게 된 거예요.”

“미안하다. 관리 똑바로 못 한 건 미안해. 그런데 난 아니다. 경준아, 난, 난 그게 뭔지도 몰랐어. 진짜야. 내 눈 좀 봐. 이게 거짓말하는 사람 같아 보이냐. 어?”

“그래요?”

심사숙고를 하듯 경준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서서히 고개를 기울였다. 달이 저무는 것처럼, 느리고 서늘하게. 웃음을 머금은 입가에 매너리즘이 드리웠다.

“그럼, 누가 범인일까?”

박성수는 이것이 그의 마지막 기회임을 직감했다. 여기에서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죽는다.

“이진환 그 새끼야!”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제가 내뱉은 말에 온몸이 부르르 떨리고 지나간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뇌리가 찌릿거렸다.

박경준이 고운 미간을 좁혔다.

“네?”

마지막 기회다. 경준이 그의 말을 믿어주기를 바라며, 박성수는 일생에서 가장 큰 진심을 담아 빌었다.

“지금, 지금 생각하니까 알겠다, 경준아. 내가 그걸 말이야, 그거 VIP룸에서 찾았거든? 내 거기 관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데. 너 사업하는 곳인 거 알잖아. 청소도 나 보는 앞에서 시키고 그랬어. 거기 혼자 걸어 들어간 거, 이진환 그 새끼 하나밖에 없어. 그 새끼가 우리 뒤통수친 거란 말이야, 경준아!”

“설마 후배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거예요?”

“아냐. 그 새끼 내가, 내가 전부터 수상하다 했어. 싹수 노랗게 찌그러져 있던 새끼가 갑자기 친한 척을 하질 않나, 하는 짓도 빠져가지고. 똥 때리다 사라지고. 씨발…. 좆같은 새끼. 씹창 낼 새끼. 죽여버릴 새끼, 개 같은-!”

“형. 성수 형.”

경준의 손이 부드럽게 턱 아래를 쥔다. 기울어진 시선이 마주 닿았다.

“증명할 수 있어요? 그 말.”

덜덜 떨리던 고개가 어째서인지 움직이질 않는다. 움직여야 한다. 씨발, 움직여야 한다. 힘을 주어 턱을 누르니 고개가 까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박성수는 태어나서 가장 필사적으로 목뼈를 흔들었다.

“증명할 게. 증명할 수 있어….”

훌쩍거리는 소리가 뒷말을 얼버무린다. 턱주가리를 잡은 손이 떨어져 나갔다.

“내일까지예요.”

박경준이 말했다.

“내일까지 절 설득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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