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주마등 어쩌고 하는 건 다 구라다.
진환은 스쳐 가는 인생의 연속극 같은 건 보지 않았다. 심장에서부터 꺼멓고 차가운 물이 뿜어져 나오는 아득한 공포를 느꼈을 뿐이었다. 공포는 뇌를 마비시키고 상황을 이해하기 거부하는 지경으로 만들어, 이내 잠을 부른다.
주마등은 보지 않았지만, 꿈이라면 꾸었다. 열다섯 살의 겨울, 경찰 조사라는 걸 처음 받아본 그날의 저녁.
담뱃값 좀 벌어보겠다고 남들이 훔친 자전거를 가져다 팔았었더랬다. 짭짤했다. 언젠가는 번쩍번쩍하고 꺼먼, 이름 있는 브랜드에서 나온 마운틴 바이크를 장물로 입수했다. 시가 팔십이만 원. 번 돈으로 술을 사 먹으며 놀고, 갖고 싶었던 신발을 샀다. 그러고도 사만 원이 남아 집에 고기를 사 들고 갔다. 형에게는 친구 아버지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했다. 누린내가 땀구멍에서 새어 나오도록 고기를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에 경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운튜브에 찍힌 일련번호를 가리지 않은 게 원흉이었다. 장물아비는 진환의 이름과 인상착의, 다니는 학교까지 모두 말했다. 법적으로 성인이었던 형은 보호자 신분으로 조사에 참석했다. 경찰 앞에 앉은 내내 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대로 바람을 뺀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이내는 납작해질 것처럼.
다섯 시간이 조금 넘어서 진환은 귀가 조치를 받았다.
멀리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나고, 이리저리 얽힌 전선이 하늘을 쩍쩍 갈랐다. 돌아가는 내내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진환도 마찬가지였다.
잠이 들기 전 형이 말했다.
‘이제 우리밖에 없어, 진환아.’
진환보다는 형 자신에게 하려는 말 같았다. 진환은 창문 없는 다섯 평의 조악한 벽에 둘러싸여 형을 응시했다. 두 사람이 눕기만 해도 좁았다.
온 세계가 선인장처럼 뾰족한 가시를 가지고 그를 공격해오는 것 같았다. 아마 자신도 그런 가시 옷을 입고 있을 터였다. 형과 진환은 피투성이가 되도록 서로를 찌른다. 그렇지만 형이 옆에 누워 있었다. 그렇지만 형이 잠들어 있었다. 진환은 그 사실을 감사하게 느껴보려 했다. 텁텁한 체취와 찌든 물 냄새, 눅눅함, 신경을 곤두세우는 날 선 소음 이외의 것을 느껴보려고. 밤이 새도록.
영상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가위로 끊어진 필름처럼, 흔들려서 깨워진 잠처럼. 진환이 일어난 장소는 미지근하고 눅눅했다.
소독약 냄새와 매캐한 지린내가 풍겼다. 누리끼리한 얼룩이 들러붙은 벽 앞으로 청록색 커튼이 쳐졌다. 꼭 쥐어짜 물기 한 점 남지 않게 된 것처럼 눈알이 빡빡했다. 골이 빠개질 것처럼 아프다. 커튼을 뒤로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살덩이가 뿌옇게 흐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걸까?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진환은 한참이나 그를 마주 응시했다. 그에게서는 사슴 같은 기척이 어렸다.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는 역 근처의 오래된 가게나, 금성 같은 기척. 무해하고 지루한, 그리고 언제나 그곳에 있어 온 듯한 간지러운 스산함이었다.
문득, 두개골을 쥐어짜는 두통 속에서, 그가 형이라는 확신이 일었다. 형이 왔구나. 날 보러 왔구나. 내가 걱정되어서. 이제는 우리 둘뿐이니까. 형이 콘크리트와 천창으로 만들어진 방 안에 갇혀 있다던가. 진환이 더 이상 자전거 안장을 빼돌려 팔아넘기던 꼬맹이가 아니라는 사실 같은 건 중요하지도, 떠오르지도 않았다.
진환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입을 열었다.
“형?”
번진 얼굴이 움직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진환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은 떠나지 않았다. 진환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깨 위로 까슬까슬하고 후덥지근한 온기가 덮였다. 이불이야. 이불을 덮어줬어.
삑. 삑. 삑. 규칙적인 기계음이 저편으로 멀어졌다.
***
방수포를 들춘다. 시퍼렇게 눈을 뜬 얼굴 아래, 단번에 동맥이 끊어진 목의 단면이 보인다. 허리를 숙이고, 경준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살폈다. 망설임 한번 없이 매끄럽다. 정윤의 솜씨는 여전한 듯했다.
“어디에서 보낸 놈들인지 수소문하는 중입니다.”
경준은 조용히 뺨을 긁적거렸다. 죽는 순간의 고통이 생생히 새겨진 얼굴. 무감각하게 바라보던 중, 그가 입을 열었다.
“이를 때웠네요, 금니로.”
“예?”
“비쌌을 텐데.”
싸늘하게 식은 남자의 입 안이 번쩍인다.
“죽을 줄 알았으면 안 그랬겠지.”
들춰 들었던 방수포를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벗었던 장갑을 도로 손목 위까지 단단히 끌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한 사람, 살았다고 했죠.”
“예, 회장님.”
“준비는 해뒀어요?”
대답을 들으며, 경준은 사려 깊게 은색 수레 위에 진열된 도구를 훑어 만졌다. 희고 고운, 기다란 손가락이 조그마한 가위와 송곳, 아직 피가 묻은 펜치를 지나갔다.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듯이.
***
진환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밝았다. 다섯 시만 넘어도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계절이니, 방금 점심을 넘겼을 터였다.
의사는 수술이 끝나고 꼬박 열 시간이 지났다고 했다. 배를 찌른 칼은 아슬아슬하게 주요 장기를 빗겨나갔고, 팔과 손에 난 자상은 흉터가 남을 것이라고 했다. 머리를 심하게 두들겨 맞긴 했지만, 손상이 가지는 않았다.
의사가 나가고 박성수가 들어왔다.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엔 과자가 수북했다.
과일 들고 오지 않나, 보통?
“운 한번 억세게 좋아, 새끼.”
박성수가 푸하하 웃었다.
“뱃가죽이 두꺼워서 무사하대, 뱃가죽이. 씨팔. 진환아. 참 어긋남이 없다, 너도, 참.”
삼인 병실. 옆 병상에 누운 흰머리가 난 아저씨가 이쪽 편을 대놓고 보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이 느껴졌다. 쪽팔린 줄도 모르고 웃어대는 박성수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진환은 종량제 봉투를 뒤졌다.
세일 중인 묶음 상품을 골라온 티가 났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고만고만한 과자 사이에 몽쉘이 보였다. 딸기잼 맛. 마분지로 된 상자를 뜯고 봉지를 열었다. 얇은 초콜릿 코팅을 물자 크림색 빵이 건조하게 바스러지며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어린애 주먹만 한 과자가 두 입 만에 사라진다. 한 개를 더 꺼내 들었다.
박성수는 그사이 옆 병상에서 리모콘을 ‘빌려’왔다. 천장에 걸린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던 뉴스가 예능 재방송으로 바뀐다.
진환은 질문해야만 했다.
“누구였습니까?”
짐작이 아예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민 이사와 충돌이 있었다고 들었으니, 아마 거기에서 문제가 생겼겠지.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일은 나오지 마.”
후줄근한 개그맨 둘이 고기를 구우며 떠드는 것을 보면서, 박성수가 말했다.
“실밥 뽑으려면 한 일주일 있어야 한다고 안 그랬냐, 의사 새끼가. 그동안 쉬어.”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박성수가 떠보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쥐꼬리만 한 인정머리를 보이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진환은 다 먹은 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아닙니다, 형님.”
“괜찮으니까 나오지 마. 너 알짱거려봤자 어수선하기밖에 더해? 조사다 뭐다… 씨팔, 장사 시작하자마자 피박이네.”
“진짭니까?”
박성수가 뒤를 돌아본다. 진환은 반사적으로 껍데기 안으로 들어가는 거북처럼 목을 수그렸다. 그러나 허공에 뜬 박성수의 손은 맥없이 아래로 되돌아왔다.
“…욕봤다. 네가.”
얼마나 지친 목소리였는지, 뉘우치는 것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아닙니다, 형님.”
“뒤질 뻔한 새끼가 존나, 말은.”
피곤에 찌든 눈이 화질이 선명하지 않은 티브이로 되돌아갔다. 진환은 침묵을 지켰다.
예능이 끝나자 박성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고 일주일 후에 보자는 싱거운 말을 남기며 그가 떠나려는 때였다. 어떤 의문이 진환을 스쳤다. 흐릿한 장면 사이에 손가락을 들이밀어 휘휘 저었다. 뚜렷이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형님.”
박성수가 멈췄다.
“혹시 아침에 오셨습니까?”
“아니. 왜?”
분명히 누군가 서 있었는데. 검은 옷을 입었으니 의사도 아닐 터고, 성수 형이 아니라면 찾아올 만한 사람도 없었다. 죽기 직전에 헛것을 본 걸까? 혹시 저승사자였나?
그렇게 생각하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진환은 맨팔을 쓸어 만졌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니미, 새끼. 싱겁기는.”
박성수가 병실에서 나간다. 진환은 사라지는 뒷모습에 대고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일주일간은 휴가인 셈이다. 무급이지만.
예능이 끝난 티브이에서는 인스턴트커피 광고가 흘러나왔다. 리모콘 돌려받기를 포기한 옆 병상의 남자는 옆으로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
“아침에 어디 다녀왔어요?”
경준이 그를 맞았다. 정윤은 붕대를 감은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산책.”
“왜?”
“답답해서.”
“앉아요. 무리하지 말고.”
정윤은 침대 위에 앉았다. 경준이 마련한 병실은 일인실에 환하고 깨끗했다. 침대는 창문 바로 옆에 있었고, 탈취제 향이 머리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은은하게 풍겼다. 방은 세 사람이 들어와도 공간이 남을 만큼 넉넉하다. 솔직히 말해서, 정윤은 이 정도로 넓은 곳에 혼자 누워 있는 것이 불안했다.
의사가 입원을 하라고 했던가? 정윤의 머릿속에 그런 기억은 없다. 어쨌든 경준은 그를 여기로 데려오고, 여기에서 잘 것을 명령했다. 정윤은 그 이상의 의문을 품지 않았다.
“경찰한텐 뭐라고 했어?”
정윤이 물었다.
“정윤 씨가 신경 쓸 문제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누구야?”
“왜요? 만나고 싶어요?”
경준이 웃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 당시의 일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숨통만큼은 확실하게 끊어두었다. 시체는 반격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지금쯤 차체와 같이 짓이겨져 레고 블록처럼 울퉁불퉁한 사각형이 되어 있을 터였다.
멀쩡하다고 해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화가 더 이어지기 전, 손님이 찾아왔다. 경준이 밖으로 나가 사업 얘기를 하는 동안, 정윤은 도로 몸통을 일으켰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꼼짝도 하지 않기에, 영락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동에 직접 가 확인하니 숨도 쉬고, 팔다리도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경준이 방으로 돌아왔다. 심기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빨아줄까?”
“그럴 기분 아니에요.”
정윤은 눈을 깜빡이며 경준의 기척을 살폈다. 웃는 얼굴도 아니었고, 눈 밑에는 수척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분명히 지금 화가 난 거야. 아니면 지쳤거나.
정윤은 기어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말은 하지 않지만, 경준은 키스를 좋아했다. 정윤이 먼저 혀를 얽으며 움직이면 그의 기분이 좋은 날엔 착하다며 턱을 만져주기도 하고 숨을 쉴 여유를 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닌 모양이었다.
경준의 손이 목을 둘러 쥐었다. 숨이 막히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가 뺨을 내리쳤다.
“계속 창놈 같이 굴 거예요?”
“…미안.”
경준이 고개를 숙였다. 눈가를 쓸어 만지는 모습에 짙은 피로감이 돌아왔다. 그 옆에 앉아, 정윤은 길을 잃은 개처럼 끙끙거리며 그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준이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어제 어지른 것 때문일까? 분명히 정리하려고 했는데. 먼저 자신을 끌어서 데려간 건 경준 쪽이었다. 정윤의 직감이 맞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좋을 건 하나 없다. 태국이 좋았다. 거긴 모든 게 예상 가능한 범위 안이었으니까.
정윤은 그의 머리를 끌어 어깨에 기대게 했다.
“뭐… 하는 거예요?”
“졸려 보여서.”
“정윤 씨, 가끔 웃겨요.”
“응.”
경준은 눈을 깜빡였다. 기분이 조금 풀어진 것 같다. 정윤은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경준이 붕대를 감은 손 위를 매만졌다.
“아팠어요?”
“아니.”
“지랄.”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두 손을 겹쳐 정윤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손짓이었다. 숨통이 틀어막히며, 반사적으로 다리가 버둥거렸다. 경준이 그의 귓가에 쉿, 소리를 흘렸다.
“버텨봐요. 잘하잖아.”
조여드는 손아귀는 변함이 없었다. 눈앞이 하얗게 질렸다. 입가에 흰 거품이 끼고 눈알이 뒤로 돌아간다. 몸에 경련이 일 즈음, 경준이 손을 풀었다.
물속에 담가졌다 빠져나온 사람처럼, 정윤이 숨을 들이켰다. 먼지가 낀 듯 목소리가 갈라졌다. 콜록거리는 거친 소리가 울렸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경준은 이상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윤을 응시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도 화가 난 것이냐고 물으려던 찰나, 경준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어요.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
“신고 내용 확인은 해야겠다고 한 사람이 그렇게 우긴다고 하네요. 찬찬히 대화도 나누고, 커피도 한잔 사드리고 그래야죠. 추운 날에 고생하시는데.”
“나도 갈래.”
“안 돼.”
경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잠깐 심호흡을 한 후 그가 말을 이었다.
“나가지 말아요. 이제부터.”
“병원을?”
“여기에서.”
정윤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심심한데.”
“쉬어요. 한숨 자든가. 피곤해 보이는걸.”
별로 안 졸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정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준이 방에서 나간다.
방 안은 조용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도드라진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
창문을 통해 박성수가 시커먼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하고, 진환은 바로 병상에서 일어섰다.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간호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아, 그, 잠깐 앞에 산책만 하고 돌아올게요.”
“안 되세요. 내일까지는 답답하셔도 참으셔야 해요.”
진환은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도로 병상에 누웠다. 링거액을 바꾸고, 오후에 먹어야 할 약을 챙긴 간호사는 곧 다음 병실을 향해 걸어갔다. 벽에 기대어 간호사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진환은 바로 병실에서 빠져나갔다. 옆 병실에는 네 명 정도의 환자가 누워 있고, 담당 간호사는 그 한 명뿐이다. 한 시간 정도는 시간이 있다.
지하의 편의점에 들어간 진환은 곧바로 일회용 휴대폰을 사 병실로 돌아왔다. 화장실로 들어가 간략한 절차를 거쳐 개통을 마치자마자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목숨이 걸린 것처럼 외웠던 번호.
- 예, 특수수사본부 강민수 반장입….
“부탁 하나만 하자.”
강 반장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진환이 선수를 쳤다.
- 이진환이. 살아 있었네. 칼부림 났다더니.
“그거, 부서졌어.”
- 뭐가 부서져.
“도청기.”
강 반장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혀를 깨물고 싶은 것은 진환도 마찬가지였다. 망가진 송신기. 눈을 떴을 때부터 진환을 괴롭혔다. 기절하기 직전에 회수하려고 했지만, 차마 손이 닿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두고 왔던 그것.
- 들켰냐?
“몰라, 씨팔.”
- 등신 새끼가, 그거 하나 똑바로 처리를 못 해?
“칼빵 맞기 직전인데 어쩌라고, 그럼!”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지 주변을 훑어보고, 진환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박성수의 행동을 보아하니, 아직 수상한 물건을 발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장 아래에 밀어 넣은 게 도움이 되었겠지. 그러나 시간문제였다. 지금은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설령 몰래 빠져나간다고 해도, 발각되는 순간 의심받을 확률이 갑절로 높아진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쪽이 좀 처리해.”
- 따까리처럼 네 뒷정리나 해라?
“그럼 나보고 뒈지란 소리야?”
- 그러게 누가 띨빵하게 서서 칼이나 맞으랬냐, 쪼다 새꺄.
“씹창 낼 짭새 새끼가…!”
언성이 높아질 것 같다. 진환은 입을 다물고 호흡을 진정시켰다.
“…이유가 있어서 나한테 부탁한 거 아냐. 나 들키고 나면, 그다음엔? 박경준이 눈에 불을 켜고 프락치 색출하러 다닐 텐데? 태국으로 도로 토끼든가. 그럼 인터폴이고 뭐고 다 쫑이야. 난 뒈지고 당신은 옷 벗는다고.”
김 반장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피가 바짝 말라버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 어디야.
결국 이럴 거면서 쫄리게 하기는, 짭새 새끼.
“2층 VIP룸. 테이블 아래에 장착하려고 했는데, 붙박이장 아래로 들어갔어.”
- 이번만이다. 다음에 실수하면 못 감싸줘.
“빨리 처움직이기나 하시지요, 강 반장님. 네?”
전화가 끊어졌다. 반으로 가른 핸드폰을 변기에 빠트리고 물을 내린다. 변기 물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새까만 선불 핸드폰이 빨려들어 갔다.
진환은 얼굴을 문지르며 변기 시트 위에 주저앉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을 뻔했다는 것도. 살아 있다는 것도. 피로감뿐이었다. 꿰맨 자리는 당기고, 따갑고, 간지러웠고, 두개골이 단단해서 무사할 수 있었다는 머리는 두 동강 날 것처럼 지끈거렸다.
나가자. 나머지는 그 짭새 새끼가 해결할 거야.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형님?”
침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덩치에 짧은 머리카락.
정윤이 그를 돌아보았다. 덩치에 걸쳐진 모양 때문에 환자복을 입은 모습도 어딘가 우스웠다. 천장까지 닿을 만한 키 때문인지, 아니면 융통성 없이 멀거니 서서 병상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행색 때문인지, 정윤은 병실을 함께 쓰는 환자들은 물론이고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의 주목까지 한몸에 받았다.
여전히 불투명한 무표정이 진환을 차분하게 마주했다.
“일어났네.”
“형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친해. 여기 의사랑 경준이.”
“그런 말이 아니라….”
“안 앉아?”
“예?”
새까만 두 눈동자가 대답 대신에 되돌아왔다. 별수 없이 그의 말에 따른다. 옆 병상에 ‘뭘 꼴아보냐’고 쏘아붙이고 커튼을 친 후, 진환은 침대에 앉았다. 정윤은 매트리스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가능한 한 가장 작은 공간만 차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불편하고 어정쩡하다.
더 가까이 앉아도 괜찮다고 말하려던 때, 정윤이 입을 열었다.
“화장실에서 뭐 했어?”
먹은 것도 없는데 사레가 든다.
“배탈이…. 좀. 하하.”
진환은 긴밀하게 정윤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라도 통화한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는지, 다른 걸 알고 왔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정윤의 속내를 읽기란 철판 건너편에 적힌 글자를 읽는 것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목말라.”
“아. 물 드리겠습니다.”
벌떡 일어서는데 옆구리가 당겼다. 찌릿한 통증에 진환은 허리를 감싸 잡고 몸을 웅크렸다.
“씁. 윽….”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잠깐만….”
쓸데없이 엄살 부린다고 한 대 맞는 거 아냐? 하지만 뒤통수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정윤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미안해.”
“아닙니다, 형님. 이까짓 거….”
“그거 말고.”
진환은 곧 정윤의 말을 이해했다. 대신 다치게 해서 미안하다고. 지금 그 얘기인가?
“또, 뭘 그런 말씀을….”
정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다음에는.”
정윤은 풀이 죽어 있었다. 동물적인 본능에 휩쓸려 주인이 아끼는 신발을 물어뜯고선 자기가 저지른 짓을 뒤늦게 알아차린 짐승 같았다. 진환은 무심결에 말했다.
“그럼, 빚진 셈 치면 되겠네요.”
“빚?”
“형님이 제 부탁 하나 들어주는 겁니다.”
“뭔데?”
진환이 비식 웃었다.
“술 한잔 사주시죠.”
“그거면 돼?”
“그럼요. 얘기도 나누고. 형님께 한 수 배우기도 하고.”
정윤은 생각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알았어.”
또 웃지 않으려나? 진환은 기대에 잠겼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뒤를 이었다.
***
난장판이 된 이 층의 VIP룸으로 장정 넷이 걸어 들어왔다. 새 페인트와 락카 냄새가 골이 띵해질 정도로 진동했다. 경준의 구둣발이 바닥에 자갈밭처럼 깔린 유리 조각을 밟으며 칼자국이 나 누런 스펀지가 튀어나온 소파 앞까지 걸어갔다.
“여기예요.”
그의 뒤를 따른 이 형사가 천장부터 주변을 휘익 둘러보고는 끌끌 혀를 찼다.
“야, 야, 이…. 박살이 났네, 박살이.”
“저희 측 과실이에요. 약에 취한 손님이 들어왔을 줄은 몰랐는데.”
순경 한 명이 선배의 뒤를 따랐다.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모습에서 바짝 긴장하는 티가 흘렀다. 두리번거리며 눈알을 왼쪽 오른쪽으로 굴려대던 순경은 곧 턱을 치켜들더니, 요란한 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페인트칠을 새로 하셨습니까?”
“맞아요. 최근에 리모델링을 해서.”
“왜 바로 경찰 안 부르시고.”
“술 꼬장 일어날 때마다 일일이 경찰 불러 버릇하면 장사 못 해요. 다 아시면서.”
그렇게 말하며, 경준은 옆에 선 남자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서울역에서 파는 기념 선물용 카스테라. 봉투를 받아 든 형사는 상자의 포장이 이미 뜯어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빵 쪼가리가 들어 있다기엔 봉투가 제법 무겁다는 것도.
이 형사의 시선이 상대를 흘겨보았다. 경준의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어떻게, 더 보시겠어요?”
이 형사의 입꼬리가 씰룩거리며 위로 향했다.
“아니. 이만하면 됐어.”
나가는 길을 안내하려 팔을 뻗던 경준은, 출구 쪽에 다른 누군가가 선 것을 보고 고개를 젖혔다.
“아이고, 누가 먼저들 와 있었네.”
까치집이 인 머리카락, 냉소적인 웃음과 때가 찌든 목둘레의 칼라 깃.
아는 얼굴이다.
“강 반장님.”
강 반장과 그 따까리들. 경준이 미소 지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옆에 서 있던 이 형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강 반장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니, 뭐. 사건 현장이라길래.”
“현장 검증 다 마쳤습니다. 진술과 일치하는 부분이-.”
“뭐. 술 먹고 어떤 미친 새끼가 지랄했다고? 경찰 기다리는 중에 토껴서 못 찾았다고?”
발길질과 함께 유리 조각이 허공에 흩어진다. 강 반장은 이어서 뒤집어진 테이블을 쿵쿵거리고 걷어찼다.
“씨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씹새끼가. 야, 이 형사. 일 똑바로 해. 칼 든 괴한 둘이 들어갔다는 증언 못 들었어?!”
“그 뽕쟁이 증언이요?”
“너 말 잘했다. 그 뽕을 맞힌 게 누군데!”
강 반장의 입에 게거품이 일었다. 경준의 눈매가 미묘하게 좁혀들었다. 잠시의 계산 후에, 그가 웃음을 머금었다.
“서운하네요. 사람 무안하게…. 오랜만에 뵈어서 반가웠어요, 저는. 마지막으로 뵀을 때가 언제더라-.”
경준이 말했다.
“아버지 상에서였나.”
강 반장이 경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 씹새끼…. 네가 인간 새끼야? 네 아버지 얘기를 들먹여?!”
“왜 화를 내세요. 둘이 사이도 안 좋았으면서.”
강 반장이 주먹을 휘둘렀다. 제대로 얼굴에 공격이 들어갔다. 단정한 경준의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바로 근처에서 지켜보던 형사가 강 반장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반장님, 아이고, 형! 왜 이래요. 이거 큰일 나. 시민을 막 때리는 게 어딨어!”
“저게 시민이야?! 저 새끼가 시민이냐고. 저 양아치 새끼….”
얼굴을 추스른 경준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나설 듯 다가서던 강 반장도, 강 반장을 말리던 이 형사까지 그 자리에 멈칫한다. 가만히 볼을 문지르다가, 경준이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갈게요. 강 반장님,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이니까.”
“박경준이.”
스쳐 걸어가려는 그의 옆으로, 강 반장이 말했다.
“세상일이 그렇게 만만할 줄 알아? 네가 언제까지 이기기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
“그럼요.”
경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 만만하게 사는 사람 많아요. 모르셨어요?”
***
클럽 건물을 뒤로하고, 경준은 차에 타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흘러가는 대로의 고층 건물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선팅을 한 창문으로도 화사한 볕의 온기가 전해졌다. 따뜻한 날인가 봐. 웃음 지으며, 경준은 눈을 감았다. 생각에 잠기면서.
여기까지 강 반장이 직접 행차하셨다, 라.
물론 강 반장이 저를 아니꼽게 여기는 건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얽힌 사이니 시작부터 악감정이 쌓인 상대였다. 몇 년 동안 강 반장의 ‘회유’라는 이름 아래에서의 수사망을 귀신같이 피해 다녔다 보니, 경준을 향한 그의 집착은 괴물 같은 수준이 되어갔다. 아마도 강 반장은 지금쯤, 제 온 경력보다도 박경준의 감방행을 더 중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노력한 티가 난다. 이번 사건은 강 반장의 손에 닿을 일이 전혀 없는 데다, 공식적으로는 경준 본인과 연결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참고인 정도나 될까. 그런 곳에서 트집을 잡겠다고, 조그마한 소문 하나 듣고 다짜고짜 걸어 들어오는 건 그답지 않은 풋내 나는 짓이었다. 그 주먹질은 또 어떻고. 학예회에도 내놓지 못할 삼류 연기 아닌가.
주의를 끌려고 했던 거다. 주의를 끌면서 무언가를 확인해야 했다.
아니, 확인이 아니야.
그랬다면 요란하게 입장하지도 않았겠지. 확인이 아니다. 탐색. 찾으러 온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경준이 그런 장소에 무엇을 감추었을 거란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테고. 설령 감추었다고 해도 치워버릴 시간이라면 충분했으니까. 강 반장은 성가시지만 멍청한 새끼는 아니니, 이 정도는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강 반장이 찾는 물건은 이쪽이 숨긴 게 아니다.
그쪽에서 심어둔 거지.
그게 무엇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뻔하니까. 진짜 문제는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데에 있다. 철저하게 통제되는 구역에 짭새의 손길이 닿았다. 어떤 루트를 통해서? 다른 말로는-.
‘누가’.
차가 멈춘다. 지긋하게 감았던 눈꺼풀이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형님.”
운전석에 앉은 조직원이 묵직하게 말했다. 경준은 일어서지 않았다. 침묵과 함께 약간의 긴장감이 흘렀을 때였다.
“날씨가 참 좋네요, 오늘.”
부스스 미소를 지은 채, 경준이 중얼거렸다.
“잠깐 나들이 좀 다녀올까요?”
***
간판이 다 기울어가는 전자 상가. 박성수는 입수 출처를 밝힐 수 없는 최신형 핸드폰이며, 도청기, 소형 카메라가 줄줄이 늘어진 진열장 위에 팔을 기대고 노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지저분한 짓 외에는 써본 적이 없는 무식한 손가락이 덜그럭거리며 유리를 두들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충분히 뜸을 들이며 돋보기를 들여다보았다. 중간중간 뭔가 알겠다는 듯이 ‘으음’ 소리를 늘어놓는 걸 잊지 않으면서.
드디어, 노인이 돋보기를 내려놓았다. 박성수는 참을성 없이 몸통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서, 사장님. 거 뭔지 좀 아시겠어?”
“이걸 어디에서 주웠다고?”
노인이 들여다보던 물건을 도로 내밀었다. 사분의 일가량이 귀가 나간 접시처럼 깨어진 동그란 플라스틱. 엄지손톱만 한 크기였다.
언더보스가 곽종철의 손바닥에 길쭉한 구멍을 만들어주고, 그 칼부림이 일어나던 날 밤, 쓰러진 이진환의 몸통을 끌어내던 중 발견한 것이었다. 어디 조명에서 떨어졌겠지, 하기에는 주변의 가구와 동떨어진 구석이 있어 따로 챙겨 두었었다. 이 바닥에서 십수 년을 구른 그였다. 제 촉 하나만큼은 믿을 만하다고 봤다.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사장님. 그거 뭐, 문제 있는 물건인지 아닌지만 말해요. 폭탄이나 그런 거 아냐?”
“갑자기 사람 찾아와서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만한 폭탄을 뭣하러 만들어? 쥐새끼 발가락이나 날리려면 또 모를까.”
“알았고, 이게 이, 뭔데, 그럼.”
“뭐, 배터리 덮개인 건 분명하고.”
노인은 이내 허,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기를 보니까 그, GPS나, 도청기 같은 데에 쓰일 수도 있고.”
“도청기? 사장님, 지금 도청기라 그랬어?”
“뭐 말하자면 그런 거고. 근데, 그런 것 치고는 좀 오래됐구먼. 통신 도청 아냐? 이거, 이, 옛날에 안기부에서나 쓰던 건데, 이거. 요즘은 한물간 짭새들이나 좀 쓸려나 몰라. 어디서 찾았어?”
“아니 뭐, 그건 알 거 없고.”
거기까지 말하라는 듯, 박성수는 손바닥을 내저었다. 그는 남몰래 입맛을 다셨다. 생긴 게 영 꺼림칙해서 가져와 봤더니, 속이 뒤숭숭한 대답을 듣고 말았다. 도청기라고? 그런 게 붙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데? 심지어 VIP룸이라 오가는 사람조차 없지 않았던가. 저번에 심부름 한번 보낸 거 빼고는.
어쩌면 실종된 김 이사 짓일지도 모른다. 워낙 높은 분들이 남들 보여주기 싫은 짓도 하고 그러던 곳이니, 약점 잡을 생각으로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지.
사실 어느 쪽이든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어쨌든, 여기에 온 목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건 그냥 사장님 가지시고….”
눈썹을 들썩이며, 박성수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보다 그, 전에 부탁했던 건….”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돋보기를 앞으로 밀치고, 그가 허리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든 노인의 손에는 누런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박성수는 기다렸다는 듯 서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여권과 땅문서. 은행 계좌 정보까지. 요청한 그대로였다.
“햐, 역시. 사장님. 이름값을 해, 이름값을.”
인식 마크에 일련번호까지 감쪽같다. 막말로 인천 공항만 안 통하면 어디든 갈 수 있겠다, 싶다. 한 달간 버틴 보람이 있네. 이 정도면 어디 남쪽 나라에서 새 이름으로 새 삶을 살기에 충분하다. 제2의 인생이 박성수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뿌듯한 마음에 박성수는 봉투 위에 입까지 맞췄다. 노인이 징그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출국은 언제야?”
“금방, 금방.”
서류를 옆구리에 끼우며, 박성수가 말했다.
“그 전에 처리할 일이 내가, 쪼금 있어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