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김 회장의 사진에 드리운다.
진환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인생 존나게 허무하다. 각을 세워 허리를 숙이고 보니 옆으로 박성수가 회장님을 부르짖으며 대성통곡을 한다. 언더보스는 흰색 완장을 찬 김 회장의 아들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슬픈 안색 한 번 내비치지 않는다.
아니, 이젠 그냥 보스인가.
하품 나온다. 솔직히 진환은 김 회장에 대해 어떤 특출난 감정도 없었다. 억지로 침울한 척, 하늘이 무너진 척 우거지상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불경을 들으며 서 있자니 좀이 쑤신다.
혹시나 기회가 생길까 싶어 양말 아래에 도청기를 숨겨 가져왔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어서야 틈이 나질 않겠다.
볼 안쪽을 깨물며 쏟아지는 졸음을 참는 중, 다가오는 정윤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번만큼은 그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검은색.
언더보스와 무어라 얘기를 나누다가 도리질을 한다. 언더보스가 그의 등을 문지른다. 다정하고 모욕적인 태세로. 정윤의 어깨가 침울하게 내려간다.
이윽고, 정윤이 김 회장의 영정 사진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손이 향과 시들어가는 국화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이윽고 향대를 잡는다. 그는 어수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좁은 걸음걸이로 자리를 비켰다. 그 모든 과정이 불편해 견딜 수가 없다는 눈치였다.
잠깐. 그런데 이쪽으로 오는 건가?
대비하기도 전, 진환은 옆에 선 정윤을 발견했다. 피했어야 했는데. 잘근잘근 볼을 씹던 어금니가 혓바닥을 콱하고 문다. 이제 오도 가도 못 하고 옆에 서 있게 됐다.
‘가뜩이나 갑갑해 미칠 것 같은데. 씨발….’
최대한 모르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정윤의 기척은 쉽게 없는 셈 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정 옷을 입은 양아치로 바글거리는 방 안에서도 가장 투박하게 생긴 것 같다. 덩치만 해도 제 옆에 선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그런 주제에 어깨는 잔뜩 수그린 자세라니.
‘진정하자, 이진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나가리라, 지나가리….’
“있잖아.”
지나가는 법이 없네. 한숨을 참으며, 진환은 최대한의 억지웃음을 짓고 정윤을 돌아보았다. 내색하지 말자. 머릿속에서 지워버려. 그따위 꼴을 본 것도. 딸 친 것도-.
“예, 형님.”
제 머리가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목소리를 낸다. 정윤의 시선이 국화 화환에 파묻힌 김 회장의 사진으로 향했다. 멀뚱하게 목덜미를 긁적거리다가, 정윤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보스지?”
“예?”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그 반응에 정윤의 손가락이 곰질거리고 오므라든다. 진심으로 물었던 모양이다. 무슨 기분 나쁜 농담이 아니라.
의아함을 이어 경악이 몰려왔다. 태국에서 대물이랑 놀았을 거라는 소리는 진짜인가 보다. 천하의 김 회장을 앞에 두고 저런 소리를 하다니.
“예. 뭐….”
“그렇구나.”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는 듯, 정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병원에서 보던 거랑 다르네.”
“그래도 회장님께서 한창때는 아주 전설적이셨지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명동 뒷골목에서 맨손으로 시작한 사람이다. 나중에는 대기업까지 등에 업고 사업 큰 건을 척척 해내는 바람에 청명파를 경찰까지 손을 못 쓰는 규모로 키워 놓았다.
물론 그건 쥐새끼들이 오가고, 변절자가 생겨나기 이전의 이야기다.
어쨌건, 이미 죽은 사람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마음은 없었다.
어느새, 진환은 한가득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 식사하셨습니까?”
식당에 그를 안내해 자연스럽게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소주 두 병을 가지고 왔지만 정윤은 눈도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롯이 음식에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정신없이 입 안에 고깃국물을 퍼넣는다. 사흘은 아무것도 안 먹었거나, 평생을 굶기만 하면서 산 사람 같았다.
볼만한 장면이다. 잠시, 진환은 그를 데리고 온 이유도 잊어버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조용하게 목을 가다듬고, 진환은 태연하게 운을 떼었다.
“형님 말씀이 맞았지 말입니다. 바빠지게 생겼습니다.”
대꾸는 돌아오지 않고, 숟가락이 시끄럽게 잘그락거린다. 물러나지 않고, 진환은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회장님 저렇게 되실 거.”
접시가 부서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 볼품없는 볼이 긁어모은 고기 조각을 씹으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마침내 정윤이 입을 열었다.
“늙었잖아.”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왜 그래?”
“예?”
“왜 자꾸 물어봐?”
대답하지 못하고 진환이 눈을 깜빡였다.
흰 식기가 바닥을 드러낸 다음에서야 정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따라서 일어서려는 진환의 앞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경준이가 안 좋아해.”
저편으로 정윤이 사라졌다. 진환은 이마를 문지르고 주머니의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에는 녹음기 앱이 켜져 있다.
“만만치 않다, 이거지.”
핸드폰을 집어넣고 일어선다. 손도 대지 않은 육개장 그릇은 앞으로 밀어냈다. 처음부터 입맛 따위는 없었다.
***
문상객들을 보낸 식장은 고요했다. 상주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민 이사가 냉장고에서 막 꺼내 온 소주를 땄다. 잔 두 개에 따라 하나는 경준에게, 하나는 제 앞에 내민다. 민 이사가 단숨에 술잔을 털었다.
“슬슬 현실적인 얘기도 좀 해야지.”
민 상무가 비굴하게 웃었다.
“김 이사가 관리하던 구역 말인데. 그 양이 꽤 되더라고.”
“그랬죠. 일 많이 하셨는데.”
“거기에 회장님이 아직 처분 못 하신 것까지 합하면, 셋, 다섯… 큰 거 여섯 장은 되는데 말이야.”
“민 이사님.”
뒤늦게, 경준이 반 정도 비운 술잔을 테이블 위에 얹었다.
“좀 쉬시는 건 어때요?”
정적이 흐른다. 민 이사의 뒤에 선 조직원들이 다급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경준은 술잔의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는 듯, 민 이사가 파르르 떨리는 입가를 올리며 되물었다.
“뭐?”
“은퇴 말이에요. 요즘은 일찍들 하고 쉰다는데.”
경준이 소주병을 기울여 제 잔을 채운다. 잔이 차오르기 전, 민 이사가 술병을 낚아챘다. 술 줄기가 움직이며 식탁이 흥건해진다. 메기 같던 영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다.
“너, 너, 이 자식 너…!”
“잘 생각해보세요.”
경준이 미소 지었다.
“쉬러 가셨잖아요. 김 이사님도.”
민 이사가 식탁 위에 유리병을 내리쳤다. 성에 받힌 고함과 욕설이 뒤를 이었다. 뒤에 선 정윤이 움직일 기미가 보인다. 경준은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은 아냐.’
한참을 씩씩거린 후, 민 이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번듯하게 뒤로 넘겼던 앞머리가 어느새 틀어져 핏발 선 눈 위로 흩어졌다. 뿌득거리며 이를 갈아댄다.
“빌빌거리던 새끼, 오냐오냐하고 거둬줬더니….”
경준은 남은 술을 홀짝였다.
“네. 그러셨죠.”
***
“아까 그 사람도.”
셔츠를 들추며, 정윤이 물었다.
“폐차할 거야?”
“필요하면요.”
정윤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불안하다는 뜻이다. 장례식장 화장실. 새벽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게 걱정인 거겠지. 변태 새끼 주제에.
이제는 완전히 자리 잡은 피어싱의 표면을 간질거린다. 은색 구체가 떨릴 때마다 유두로 예리한 진동이 전해져 와, 정윤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경준아. 여기….”
경준은 미소 지었다.
정윤은 질질 침을 흘리고 허리를 껄떡였다. 귓바퀴를 깨물자 도망가려는 것처럼 몸을 비튼다. 머리채를 붙잡고 뒤로 당긴다. 허리가 따라오며 휘어졌다.
변기 앞이라니. 완벽하잖아.
“경준아, 너, 너….”
좆대가 미끄러져 나가자 히끅, 하며 변기를 붙잡았다가, 정윤이 눈을 꾹 감았다. 박아댔던 안쪽이 아리게 얼얼한 감각을 애써 참으며, 그가 말을 이었다.
“…대장을 죽였어.”
경준은 버클을 잠그며 정사 후의 옷매를 추슬렀다. 변기 위에 앉아 뻐끔거릴 때마다 정액이 흘러내리는 엉덩이를 수치스럽게 드러낸 정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요?”
“그러면 안 돼.”
“자기도 죽였으면서.”
“난 안 죽였어. 누나가. 지윤이….”
경준의 눈썹이 온화하게 내려갔다.
정윤의 허리가 한순간에 들썩였다. 길고 고운 경준의 손이 어느새 벌름거리는 애널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손마디가 마구잡이로 휘어지며, 손목이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꽉 찬 안을 헤집는다. 외설적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조용한 화장실 안에 소름 끼칠 만큼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려던 말을 잊고, 정윤은 제 팔을 깨물며 튀어나오려는 교성을 애써 집어 눌렀다.
“그만, 그거, 그….”
하지만 경준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 화가 난 건지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기계적이고 건조하게, 모욕을 주려는 것처럼 정액받이가 된 내벽을 긁으며 정윤을 몰아붙였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오므라든다. 크기만 한 성기에 덜렁이며 피가 몰렸다. 검지가 요도 위를 깔짝이며 긁는다. 제 딴에는 피하려는지 허리를 흔들며 빼려고 하지만, 부어오른 그곳과 울음을 삼킨 목소리는 그저 유혹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고문처럼 쾌락만을 종용하는 손길에 내몰릴 만큼 내몰려, 정윤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만해. 제발. 제, 하, 아악…!”
교성이 튀어나오기 전, 경준이 그의 목을 잡아 쥐었다. 숨통이 눌리며 비명처럼 튀어나오려던 목소리가 사라졌다. 산소가 희박해진 와중에도 얼얼하게 뒤를 짓이기는 감각이 생생하다. 예고도 없이 삽입한 경준의 성기가 다시금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만 짚고 넘어가요.”
허리가 꺾어져 범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 우람한 몸통이 속절없이 육봉과 함께 흔들린다. 쾌락에 눈알이 돌아갈 것 같았다. 목을 움켜쥔 채, 경준이 속삭였다.
“그 사람은 대장이 아니에요.”
***
장례식이 끝난 후 우리는 빠르게 적응했다. 사라진 사람의 빈자리 같은 소리는 허무하다. 개미 떼가 정렬을 회복하는 것처럼 모여들어 메꿔지니까.
김 회장의 사진 아래에 자리하던 커다랗고 반지르르한 가죽 의자에는 이제 박경준이 들어앉았다. 김 회장이 사용하던 물건은 모두 불태웠다. 그가 차지한 자리는 이제 납골당의 위에서 다섯 번째 선반이다. 그래도 해가 잘 드는 자리다. 자릿세도 존나 비싸다.
유일한 차이는 정윤뿐이었다.
그는 잘 보이지도 않고, 말을 걸어도 피하기 일쑤였다. 진환은 결국 강 반장에게 털어놓아야만 했다.
‘안 되겠어.’
‘뭐가.’
‘박경준이 개새끼. 접근이 안 된다고.’
‘그러냐.’
강 반장이 품에서 서류를 내밀었다.
‘그게 뭐야?’
‘검사님께 보낼 편지 되겠다. 눈물 없이 못 읽는 감동의 탄원서. 이게 이, 항소심 들어가려면 다음 주까지는 접수가 되어야 할 텐데….’
라이터 부싯돌을 문지른다. 불이 붙으며 종이 가장자리에 와 닿았다.
‘아, 씹!!’
그를 밀친다. 강 반장이 욕설을 내질렀다.
‘씹새끼가. 차 태워 먹으려고 환장했나!’
‘할게. 한다고!’
‘그래, 진작 그래야지.’
타이밍 좋게 진환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디 가?”
“할 일이 있어서.”
***
원룸에 돌아와 지갑을 챙기자 등골이 싸하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문밖을 본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박성수가 기다리고 있다. 또 박 회장님 호출하신 데에 나까지 끌고 갈 셈이겠지. 평소 같으면 싫어도 따라갔겠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진환은 신발을 양손에 들고 몸을 낮췄다. 박성수가 딴 곳을 보고 있는 틈을 타 달아날 셈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박성수 타입의 여자가 길을 지나간다. 박성수의 고개가 자석에 끌린 것처럼 건너편을 향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진환이 발을 내디뎠다. 조용하게, 발톱 눌리는 소리도 안 날 만큼 사뿐히 오리걸음을 하며 엉금엉금 앞으로 나간다. 거의 다 빠져나왔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이, 새끼 이거, 봐라.”
정수리 위로 누군가 혀를 찬다. 진환은 신발을 든 두 손을 툭 떨궜다. 뒤를 돌아보자,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어디 가냐? 똥 때리러 가냐?”
여지없이, 뒤통수에 손바닥이 날아든다. 진환이 소리를 질렀다.
“아! 이번만 좀 봐주십쇼, 형님. 저 조카 생일이란 말입니다!”
“뭐, 조카? 난 애미 생일도 못 챙겼다, 새꺄! 김 회장님 상 치르고 누군 좆방맹이 돌아가게 바쁜데, 이 새끼는 농땡이나 치려고-.”
진환은 귀를 틀어막았다. 박성수가 쏘아대는 꼴을 보니, 도무지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나.
경건하게 마음을 다잡는다. 주먹을 쥐고, 진환은 맑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번만 좀 봐주세요.”
최대한 불쌍하게. 최대한 귀엽게. 최대한 예쁘게.
“성수 형….”
그러자 박성수가 멈칫하는 것이 보였다. 진환의 가슴이 다시 희망에 차올랐다.
“씨발, 소름 끼쳐, 새꺄!”
아니, 역효과다. 박성수는 등짝을 내리치다 못해, 아예 구두짝까지 벗어 들었다. 정말로 방법이 없다. 진환은 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회장님?”
박성수가 곧바로 뒤를 돌아본다.
“박경준 회장님이 여긴 왜-.”
이 틈이다. 진환은 박성수가 허공에 대고 말을 거는 틈을 타, 신발을 든 양손을 힘차게 휘저으며 달려 나갔다.
“이 새끼가…. 허, 거기 서, 이 새꺄!”
구두짝이 허공에 날아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환의 뒤통수에 명중하지 않았다.
***
“아, 위험했네. 씨발.”
카트를 끌고 간다. 오늘이 그날인데, 갑자기 김 회장 상을 치르느라 선물 고를 시간도 없었다.
장난감 사이를 뒤지며 휘파람을 불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팽이 정도면 좋았건만.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에 인형 만드는 공장에, 별의별 장난감이 다 나와 있는 걸 보니 호강이다.
그렇게 따지면 동준이도 호강을 하니까, 상관없나. 피식 웃음을 지으며 진환은 장난감을 집었다 들기를 반복했다. 분명히 톡으로 무슨 아이언맨 뭐시기를 받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종류가 많으니 뭐가 뭔지 좀처럼 모르겠다.
혹시 진열대를 잘못 찾았나?
카트를 밀고 정글처럼 느껴지는 선반 사이를 지나갈 무렵, 행사 상품을 모아놓은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배구공과 큼지막한 돌고래 인형 사이로 번쩍거리는 자전거가 보였다. 신형인가 본데.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핸들을 만지고 있자, 관심이 있는 것으로 착각한 점원이 다가왔다.
“알루미늄 재질이라 가벼워요.”
“거기다 기어도 신형이네요.”
“자전거 되게 잘 아시네요.”
진환은 헛웃음을 지어 보이고 말았다. 점원이 정리를 하러 돌아설 때, 그를 불러 세웠다.
“저 근데. 아이언맨 장난감은 어디에서 파나요?”
***
발끝이 간신히 보일 만한 어두운 지하. 납작한 모니터 화면마다 화투패며 물고기가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영상이 번뜩거렸다. 자리에 앉은 사람마다 눈이 벌겋고, 맥주와 담배와 땀이 켜켜이 밴 쉰내가 나고, 더러운 옷을 입었다.
경준이 관리인과 사업 얘기를 하는 동안 정윤은 까칠까칠한 시멘트벽에 기대어 바로 앞에 보이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변종 블랙잭인 것 같았는데, 규칙은 모르겠지만 마우스를 눌러대는 소리가 못을 박는 것처럼 요란했다. 다리를 덜덜 떠는 것을 보아 이기는 중인 것 같지는 않았다.
칸막이 건너편의 공간은 한결 더 세련됐다.
크림색 벽지가 발라진 접객실. 녹색 깔개와 유리 덮개가 씌워진 탁자 위에 도자기 컵 두 개가 올라갔다. 하나는 청와대 문양이 찍혀 있었다. 경준은 그 옆의 잔을 들었다.
“아니, 태국에 있으셨다더니.”
능글맞게 웃으며, 정 사장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넓적한 얼굴에 개기름까지 떠 개구리 같은 양서류 인상이 더해졌다.
“어떻게 하나도 안 타셨어, 그래.”
“별말씀을요.”
경준은 커피를 머금었다. 믹스커피의 값싼 단맛이 입 안에 맴돌다, 혓바닥을 까칠하게 만들고 내려간다.
“경기는 어때요?”
“근근이 벌어먹고 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
“애들이 일은 잘하고요?”
“그럼, 잘하지. 얼마 전에도 식칼 들고 행패 부리려는 새끼가 있었는데, 그냥 맨손으로 데려다가- 이야. 김 회장님 신세를 얼마나 졌는지 몰라, 그런 거 보면.”
경준이 미소 지을 때였다.
“근데.”
정 사장이 운을 뗐다.
“단속이, 좀….”
경준의 눈초리가 내려앉았다.
“그쪽 관리가 안 되던가요?”
“아니, 뭐 못한다는 건 아니고. 사정이 다 있겠지. 그, 윗선에서 물갈이도 한번 됐다고 들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떡값 돌릴 돈도 없나 싶어서, 원….”
정 사장이 오물을 떨굴 때처럼 맨손바닥을 마주 대고 비볐다. 알 만한 얘기다. 경준은 반도 마시지 않은 잔을 내려놓았다.
“한번 알아볼게요.”
“아이고. 너무 마음 쓰지는 말고. 김 회장님 그렇게 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마음 추스를 시간은 있어야지.”
“그런 말씀 마세요. 남도 아니고. 정 사장님이나 저희나,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인데.”
벗어둔 재킷을 챙기며 경준이 일어섰다.
“최근에 쥐새끼 한 마리를 잡았거든요. 곳간 갉아먹던. 떡값은 나와요.”
“고맙네, 그래. 역시 박 이사가 오니까 일이 척척 풀려. 척척.”
정 사장이 손을 붙들고 흔들었다.
“여기 계속 있지 그랬어. 회장님 도와서 JS 그룹 대기업 만들고. 이 바닥 쫙 정리도 하고. 웬 염병할 새끼가 찌르지만 않았어도-.”
“다 지난 일이에요.”
경준의 시선이 저편을 향했다. 정윤은 눈을 비볐다.
***
“형님, 나오셨습니까.”
건물 밖에서 대기하던 박성수가 두 사람을 맞았다.
“정 사장은 좀 어떻답니까?”
“여전하던데요. 둥글둥글하시고. 욕심 없으시고. 꾸준하셔서 보기 좋더라.”
차에 다가가기도 전에 박성수가 대동해 온 젊은 놈에게 형님 타시게 차 문을 열지 않고 뭐 하느냐고 눈치 좋게 호들갑을 떨었다.
차 안으로 들어가려고 보니, 정윤이 차체 옆에 멈추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윤 씨.”
“…….”
“정윤 씨.”
두 번을 불러서야 시선이 돌아왔다. 경준이 차 안으로 고갯짓을 했다.
“안 타요?”
“달라.”
“뭐가요?”
졸음이 찾아오는 사람처럼, 정윤이 갑갑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물끄러미 문을 잡아주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 얼굴을 살피다, 경준은 곧 정윤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운전수가 바뀌었네요.”
조수석에 막 타려던 박성수가 고개를 들었다.
“네, 형님.”
“걔는 어떻게 됐어요? 박 상무가 데리고 다니던.”
“진환이 말씀이십니까?”
박성수의 얼굴에 곤란한 미소가 퍼졌다.
“그… 잠깐 어디 다녀온다길래 보내줬습니다.”
“그래요?”
“걔는 왜…. 걔가 뭐 잘못했습니까?”
경준은 가만하게 정윤에게 눈길을 던졌다. 불안감을 부추기는 눈빛. 정윤은 구두코를 쳐다보며 고개를 꺾었다가,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경준의 입가가 비틀어지며 올라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박경준이!”
경준이 고개를 돌렸다.
철창에 갇힌 곰처럼 등이 넓고 굽은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걸렸지만, 경준은 곧 그를 알아보았다. 곽종철. 김 이사 라인에 서 있던 최측근이다.
곽종철은 썩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 울긋불긋하게 혈관을 세우고, 쌀쌀맞은 날씨에도 안색이 삶은 문어처럼 붉었다. 다짜고짜 경준의 앞에 다가온 그가 멱살을 틀어잡았다. 경준은 놀라는 기색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이 배은망덕한 새끼…. 김 이사님 어떻게 했어?”
“무슨 말씀이세요.”
“외대지 말고 털어놔라, 경준아. 피 보기 전에.”
정윤이 다가오려는 것을 보고, 경준은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대신, 달려든 박성수가 곽종철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이 새끼, 미쳤어?! 회장님한테 무슨 짓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누가 회장이야, 오사리잡놈 새끼가!”
곽종철이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날아가는 궤적이 은빛으로 번뜩였다. 손잡이에 빨간 플라스틱이 덧대어진 스위스 아미 나이프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콧등에 스친 상처를 감싸고, 박성수가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곽종철의 칼끝이 경준에게로 향했다.
“그러면 안 돼, 새끼야. 너 그따위 식이면 안 돼.”
경준의 목젖 바로 앞으로 칼이 닿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곽종철은 잠이라는 걸 잊은 인간처럼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개천 똥물에서 굴러들어 온 새끼가 형님이 얼마나 쎄빠지게 몸 바쳤는지 알기는 하냐. 내한텐 아버지 같은 분이시다. 아버지!”
“몰라요. 난 후레새끼라.”
“이 씹새끼가!”
칼이 파고들기 전, 경준은 무릎을 세워 단번에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칼날이 스치며 턱 아래에 피가 난다. 비틀거리는 사이에 팔꿈치가 등을 찍어 내렸다. 아미 나이프가 떨어졌다.
곽종철이 추슬러 주워 들 틈도 없이, 뱃가죽을 오목하게 만들 듯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빙글빙글 돌며 미끄러져 나간 칼은 정윤의 손안에 안착했다.
“이러지 마세요. 곽 상무님. 저라고 김 이사님 안 보고 싶겠어요? 가족 같은 분인데.”
“지랄 맞은 새끼….”
경준은 곽종철이 일어서기 전 그를 걷어차고, 허리를 세웠다. 손짓 한 번에 정윤이 나이프를 고쳐 들고 성큼성큼 발을 디뎠다. 경준의 구둣발이 곽종철의 가슴을 짓눌렀다. 경준은 정윤이 내민 나이프를 집어 올렸다. 은색 날이 날렵한 원을 그리며 허공에 돌았다.
“진짜인데.”
칼날이 손바닥을 관통한다. 손뼈에 나이프가 닿으며 칼끝으로부터 우드득하는 진동이 전해졌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저주 같은 욕설을 뒤로하고, 경준은 두 손을 털어낸 후 얼이 나간 박성수를 향해 돌아섰다.
“박 상무님. 오후 일정 비었죠?”
“예, 예….”
“그럼, 어디 좀 갈래요?”
***
제 허리까지 오는 조그마한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나간다. 몇몇은 손을 꼭 잡았고, 몇몇은 시답잖은 주제의 얘기를 진지한 얼굴로 늘어놓으며 떠드는 중이다.
습관적으로 담배를 물려던 진환은 시선을 느꼈다. 안경을 쓴 똘망똘망한 꼬맹이가 책가방 끈을 양손에 잡고 저를 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쯧. 고개를 돌린다. 도로 담뱃갑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고, 진환은 허전한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병아리 떼 사이에 선 시커먼 늑대가 된 기분.
“삼촌!”
반가운 병아리가 삐약삐약 한다. 한가득 웃음을 머금고, 진환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똥준!”
트레이드 마크인 퍼런 점퍼를 입은 조카 1호가 종종거리며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지난주부터 방과 후 다녀. 한문반.”
“이야, 너 이 자식, 완전 다 컸는데. 엄마 근처에 있냐?”
동준이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다. 진환은 조카의 손을 잡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향했다.
“뻘건 놈. 맞지?”
내일모레는 조카 1호의 생일이다. 선물로 아이언맨 어쩌고가 받고 싶다기에, 얼마 전에 마트에 들러 사 온 참이었다. 진환은 뒷좌석에 놓아둔 종이백을 내밀었다. 동준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진환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조카의 얼굴을 계속 살피면서, 여유에 넘치던 웃음이 점차 잦아들었다. 박스를 유심히 보던 조카가 미묘하게 표정이 굳는 것이었다. 예의상으로 웃는 것 같기는 했지만 아이가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대가리를 굴려보다가, 진환은 곧 뭐가 문제인지 알아차렸다.
“잘못 샀구나. 그지.”
“아냐, 삼촌. 이것도 좋아.”
“아, 씨…. 이리 줘.”
진환이 손을 내밀었다. 동준은 고개를 저으며 한사코 마음에 든다는 표현을 하려고 애썼지만, 진환의 우악스러운 행동에 마지못해 종이백을 반납해야 했다.
“진짜 좋은데….”
“야!”
뒷좌석에 봉투를 던져버린다. 진환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너 막 참고 그러는 거, 삼촌한텐 안 그래도 된다고 했지? 카톡으로 다시 보내. 삼촌이 다음엔 절대로 실수 안 할 테니까.”
작게 입가를 떨다가 동준이가 미소 지었다. 동그란 볼이 말려 올라가고 보조개가 팬다. 새끼. 웃는 건 지 아빠랑 똑같아. 가슴에 찌르르 울리는 통증이 인다. 가볍게 볼을 꼬집었다.
“간식 먹고 들어가자. 삼촌이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을래?”
“동준아.”
저편에서 신중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환은 조카의 볼에 댔던 손을 떼어냈다.
형수는 지쳐 보였다. 결혼식 사진에서 빛나던 고운 곱슬머리는 언제부터인가 짧아졌고, 늘 생기 있던 입술은 각질이 쌓여 갈라졌다. 그녀가 달려와 동준이의 어깨를 감쌌다. 아들을 제 뒤로 보내고, 똑바로 진환을 마주 본다.
“여기 오지 말랬잖아요.”
“그, 보고 싶어서….”
“왜 이렇게 이해를 못 해주세요, 대체.”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환은 난처했다.
“선물 주러 잠깐만 온 겁니다. 형수님.”
“…….”
“형수님.”
진환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방법 알아보고 있습니다. 형, 잘하면 금방 풀려날 수 있어요. 동준이 고등학교 가기 전에.”
“이거 놓으세요.”
“정말로. 자세히는 말 못 하고, 제가 사람을-.”
“진환 씨.”
형수가 얼굴을 쓸었다.
“그만 가보세요. 제발.”
***
형수와 헤어지고 한참 후에야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핸들을 쥐고, 80년도에 유행한 가요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볼륨을 귀 따갑도록 키운 채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형수 입장도 이해가 간다.
요즘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형이 구속된 직후, 형수는 없는 살림을 털어 두 번이나 이사를 갔다. 돌고 돌아 새로 온 학교는 형수 형편에 빠듯할 만큼 학군이 좋은 곳이었다. 여기에서까지 쫓겨나고 싶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양아치 삼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메마르고 짧은 울음이었다. 핸드폰이 울리면 집어삼켜야만 하는. 눈가를 문지르고, 진환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 형님.”
- 어어. 너 볼일은 다 끝났냐?
“예. 대충 봤습니다, 형님.”
- 그럼 이리 좀 와봐라.”
“왜 그러십니까?
- 와보라면 와봐.
박성수는 여느 때보다도 들떠 있었다.
- 형님 로또 맞았다, 새꺄.
***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베이스가 여기까지 쿵쿵 들려왔다. 궁궐 입구처럼 들어선 기둥 두 개에 대문짝만한 간판. 번뜩번뜩한 조명까지. 밤을 맞은 서울, 젊고 돈 있는 것들이 줄을 지어 벌집 찾는 말벌 떼처럼 몰려든다. 반짝반짝한 은박이 붙은 짧은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 그룹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쳤다. 진환의 시선이 그녀들을 무심코 돌아보았다가, 다시 건물에게 돌아갔다.
“어떠냐?”
박성수가 다가왔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눈을 뜬 채, 진환이 물었다.
“진짜 형님 준답니까? 다? 홀랑?”
“그래, 새꺄.”
박성수가 어깨에 손을 둘렀다. 감격이 서려, 목소리가 덜덜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 나 내 거다, 이게.”
클럽 블랙웨일. 김 이사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김 영감이 돈 빼돌린다는 소문이야 공공연한 것이지만, 이렇게 둘러보니 한낱 시다바리인 제가 보기에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강남 한가운데에 선 위치에 크기는 웬만한 초등학교만 하다. 더 억 소리가 나오는 건 통화로 박성수가 읊어준 VIP 명단들이었다. 연예계, 정치계 거물들 이름이 줄줄 이어졌다. 이런 걸 굴리면 수익이 얼마나 나올까? 억대, 수십억대는 되겠지?
마른침이 넘어갔다. 떡고물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설마 시작부터 떡하니 이런 걸 던져줄 줄은 몰랐다. 박성수가 경준이 형님, 경준이 형님, 하면서 손바닥을 비비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사주를 보니까 말년에 귀인을 봐서 인생이 편다더니. 경준이 형님 덕인 게지. 햐…. 이게, 부동산만 쳐도 얼마냐 이게.”
“축하드립니다, 형님.”
“나도 내가 축하스럽다, 새꺄.”
박성수가 세차게 어깨를 두들겨대며 끅끅 소리를 내고 웃었다. 하도 거칠어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구분도 안 간다.
멍청한 새끼. 박경준 끌려가면 이것도 쫑이야. 따라서 웃음 지으면서도, 진환은 썩 마음이 개운하지 못했다. 박성수가 어깨에 이마까지 대고 끄윽, 웃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애들 소집해. 오늘은 내가 쏜다.”
“진짭니까?”
“그래. 뭐 먹고 싶냐? 돔 페리뇽? 나폴레옹?”
이 짠돌이 새끼가 웬일이래. 진환의 가슴이 얼핏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박성수가 말을 이었다.
“아니다. 한국인은 맥주지. 비어.”
그럼 그렇지, 저 꼴통.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왔다. 훅하고 체온이 식는 탓에 절로 재채기가 나왔다. 진환은 문득 형수의 얇은 남색 카디건을 떠올렸다. 날 더 추워지기 전에 겉옷이라도 한 벌 사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 형이라면 그랬을 텐데.
***
댄스 플로어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얼마나 요란한지, 방음 시설이 설치된 벽을 통해서도 은근하게 진동이 전해진다. 하지만 인테리어만큼은 마음에 든다. 검은 가죽으로 된 소파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젖힌 채, 경준은 남은 위스키를 홀짝 입에 머금었다. 비강을 채우는 향을 음미하며, 그가 통화를 이어갔다.
“그래요? 그 정도 주니까 만족한대요?”
그의 시선이 무릎 사이로 향했다. 정윤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귀두만 머금어도 한계까지 입이 벌어져, 벌써부터 턱 아래로 볼썽사납게 타액이 흘러내렸다.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별말을요. 김 사장님이 들으면 좋아하시겠네.”
격려해주는 차원에서 머리를 쓰다듬는다. 짧게 깎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이 파고들어 두피 위를 간지럽게 문질렀다. 정윤의 눈매가 부드럽게 이완되더니, 이내는 눈을 감고 볼이 오목 들어가도록 좆대를 빨기 시작했다. 조금만 다정하게 해주면 어리광을 부린다. 들으나 마나 한 상황 보고를 흘려들으며, 경준은 입술을 핥았다.
발을 뻗어 정윤의 고간을 문질렀다. 발가락이 헤집는 그곳은 이미 꼿꼿하게 윤곽이 생기며 부풀어 있었다. 발에 지그시 힘을 주어 뭉개자 정윤의 얼굴이 울먹이며 일그러졌다.
정윤이 고개를 들었다. 펠라티오를 하느라 볼이 움푹하게 패여 있어 볼만하다. 경준은 심드렁하니 시선을 내리깔며 미소 지었다. 입 모양이 말했다.
‘쉿.’
정윤은 다시금 좆대를 붙잡고 귀두를 머금었다. 애써 혀 놀림에 신경을 집중하려 했지만, 자꾸만 앞섶이 희롱당하자 머리는 멍해지고, 오물거리던 입술이 멈칫거렸다.
발가락이 까딱거리며 기둥 아래를 쓸어 내려가다가, 지그시 뿌리를 밟았다. 좆을 입에 문 채로 새 나오려는 교성을 참다가, 이빨이 다물어질 뻔한다.
정윤은 서둘러 정신을 되찾고 입을 똑바로 벌렸다. 성기 끝을 목구멍에 밀어 넣고 쑤신다. 빨리 가게 만들어야 한다. 빨리 만족시켜야만 한다. 그래야 이 모든 게 조금이라도 금방 끝이 난다. 그 일념으로, 성기를 문지르며 농락하는 자극을 무시하려 애썼다. 그러나 발끝이 귀두 위를 짓누르자 견딜 수가 없었다. 프리컴이 흘러나와, 얇은 정장 바지 위로 음란한 얼룩이 졌다. 이제는 혀를 거의 놀리지 못했다. 정윤은 좆 끄트머리만 간신히 입에 문 채, 어떻게든 발을 피하려 허리를 들썩였다. 그래도 경준은 발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똑바로 빨아요. 밤새우겠어.”
“응. 알, 알았….”
발가락이 섶 위로 기둥을 스치고 재빠르게 내려간다. 기어이 입을 떼고, 정윤은 새된 신음성을 뱉으며 둥글게 등을 말았다. 갑자기 전해진 오싹한 자극에 몸을 추스르기가 어렵다. 계속 참고 있었는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빨리.”
“응. 응….”
정윤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들어 좆을 입에 물었다. 눈을 감고 목구멍까지 담는다. 숨통이 막혀오고, 괴로워 머리가 아찔하게 질릴 때까지 밀어 넣었다가, 헛구역질을 참으며 빼낸다. 혓바닥을 펼쳐 귀두를 문질렀다. 좆대가리 아래의 틈까지 할짝대며, 동그랗게 손가락을 모아 남는 기둥을 쓸어내린다.
경준의 손가락이 계속해서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러다 손길이 멈추며 꼿꼿하게 떨렸다. 흥분을 참고 있는 것이다. 인정받는 것 같아, 정윤은 비죽이 입꼬리를 들고 시선을 올렸다. 기분 좋으냐고 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손아귀가 머리카락을 뿌리부터 바짝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머리를 억눌렀다. 예고 없는 손짓에, 대비 없이 목구멍에 좆대가리가 쑤셔 박혔다. 한 번에 숨이 턱 막혀 눈물이 고였다.
짓누르던 손에 팽팽하게 힘이 들어간다. 안쪽으로 뜨거운 게 쏟아졌다.
손가락이 벌어진 입 안으로 불쑥 비집고 들어갔다. 혓바닥을 누르며 거침없이 파고들어, 정액이 퍼진 안쪽을 틀어막는다. 콜록거릴 새도 없이 목구멍에 들어찬 이물감에 정윤은 반사적으로 경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잠깐이었다. 차가운 눈길이 와 닿자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정윤은 몰려오는 구역질을 견디며 물에 빠진 사람처럼 껄떡거리고 소리를 집어삼켰다.
“나머지는 내일 얘기해요. 그럼.”
통화가 끊어졌다. 손가락이 자비롭게 빠져나갔다. 내장을 뱉을 듯이 콜록거리며, 맥없이 상체가 고꾸라졌다. 경준이 정윤의 턱을 감싸 위로 당겼다. 오렌지빛 조명을 맞으며, 경준의 작고 고운 얼굴의 가장자리가 옅게 빛났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가가 꼬리 치듯 휘어져 올라갔다.
“엎드려요.”
그가 명령했다.
정윤은 탁자를 짚고 돌아섰다. 낮은 높이의 탁자라 상체를 밀착하기만 해도 엉덩이를 들어 올린 자세가 된다. 처음에는 차가웠던 합판에 금세 체온이 눌러앉았다. 오른팔이 허리를 두른다. 선이 얇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리고, 허리춤 사이로 스르르 파고들어 갔다. 자각시켜 주듯이 느릿한 동작에 당겨진 오금이 저릿했다.
타액에 젖은 손가락이 단번에 밀부 안을 파고들었다. 손마디가 구부러지며 전립선이 있을 곳만 툭툭 건드린다. 열이 오른 짐승처럼 단박에 허리가 튀어 올랐다.
“잠, 잠깐…! 거기, 거…기!”
“네. 여기요.”
눈앞이 점멸하는 것 같다. 꾹 눈을 감은 채, 정윤은 움츠러든 목소리를 뱉었다.
“…위…험해. 여기. 사람이… 오면… 흣…!”
손끝이 스폿 위를 문지르자 몸통이 발버둥을 치며 꿈틀거렸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짓누른다. 경준이 물었다.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싹한 쾌감에 정복당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굴리며, 정윤은 더듬거렸다.
“아… 아냐. 아냐.”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오답이었나? 무서워하기도 전, 묵직한 열감이 둔부 사이로 파고들었다. 무엇인지 의심할 것도 없었다.
“아, 아흐… 아….”
파고든 좆기둥이 구멍을 찾아 맴돌았다. 어제의 격한 성행위로 인해 퉁퉁 부어 있는 곳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생생한 감각에 머리 위가 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바로 삽입하지 않고, 부피감을 각인시키려는 듯 비벼대자 더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봐요. 정윤 씨, 좋아하면서.”
드디어 안으로 귀두가 들어왔다. 끄트머리만 들어갔는데, 팽팽하게 벌어진 곳이 바르르 경직되며 떨려왔다.
“읍….”
크게 소리를 내면 들릴지도 몰라. 정윤은 탁자에 올린 팔을 물며 속으로 교성을 틀어 삼켰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 들어가는가 싶었던 좆대가 예고도 없이 뿌리까지 뚫고 푹 들어왔다. 충격에 헉하고 숨이 들어찼다. 본능적으로, 팔이 앞으로 뻗으며 허우적거린다. 도망가려는 듯이. 도망을 칠 순 있으려나 자문하듯이. 경준은 조소를 머금고 그 허무한 동작을 감상했다. 턱이 꺾일 만큼 거세게 목덜미를 쥔 채로 박아대기 시작한다.
“아…! 흑… 하… 읍… 잠, 잠깐. 경준, 으, 흑….”
숨이 막히도록 쳐 올린다. 그렇게 길들여진 몸이 성기가 들락거릴 때마다, 안쪽 깊은 곳을 쿵쿵거리며 박아댈 때마다 움찔거리며 들썩였다. 팔에 잇자국이 나도록 깨물고, 고개를 아무리 저어도 떨쳐낼 수가 없다. 머리가 징징 울렸다.
누르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경준이 팔뚝을 붙잡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팔이 뒤로 향하고 배는 눌린 것이 영락없이 사로잡힌 짐승 꼴이었다. 허리가 무리하게 휘어져 뒤로 젖혀지는 통에 등이 아팠지만, 그럼에도 박힐 때마다 등골에 전율이 오싹하게 흘러 몸을 비틀 수조차 없었다. 기어이, 성기가 울컥이며 정액을 뱉었다.
절정에 치닫는 중임에도 좆질이 이어지며, 쿵쿵거리고 안을 휘젓는다. 남아 있던 자제심마저 끊어져, 정윤은 턱을 치켜들고 울기 시작했다.
몸통을 뒤집어 카운터에 등이 닿게 눕혔다. 은색 피어싱이 볼록 튀어나온 유두가 보였다. 경준이 몸통을 기울였다.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는다.
“잠깐. 경준, 잠깐, 잠….”
뭐라고 말하기도 전, 입술이 유두를 물었다. 가뜩이나 자극에 절어 있는 몸뚱어리가, 보드랍고 말랑한 감각이 유두에 닿자마자 받아들이지 못하고 넘쳐흐른다. 사정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윤이 다시 몸을 떨었다.
“정윤 씨 혼자 즐기는 것 같네요.”
그곳을 빼내자, 벌어진 구멍으로 정액이 흘러나왔다. 쾌락에 익숙해진 구멍은 의지와 다르게 조금이라도 머금고 싶은 것처럼 벌름거렸다.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싫어 고개를 젖히자, 아까의 생리적인 것과는 다른 눈물이 흘렀다.
“좀 참아볼 순 없어요?”
근육이 잡힌 다리가 허공에서 속절없이 흔들거렸다. 무릎째 쥐어 어깨에 걸쳐 틈을 만들고, 경준은 다시금 느슨해진 애널 안으로 좆을 쑤시고 넣었다.
“이러니까 자꾸 기절하잖아.”
“으힉…! 힉, 악…!”
꿀렁거리며 사정액이 넘쳤다. 가슴이 부풀다 내려갔다.
“참, 참을게. 가는 거 참을… 힉!”
말을 마치기도 전에 또 좆이 쑤시고 든다. 박아대기 시작하자 아찔하게 천장이 돌았다. 아무리 쾌감을 억누르려 해보아도, 몸이 들썩이도록 내벽을 비비며 안쪽부터 박아대어 자꾸만 머리가 어질거린다. 입 안을 깨물어 보았지만 턱에 힘이 빠지며 꼴사나운 우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경준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손이 돌기 주변을 빙 돈다. 어서 가장 민감한 곳을 건드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에 애가 들끓어 정윤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참아야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의식이 손길만을 따라 흘렀다. 손끝이 유두 위를 퉁긴다.
“흐…!”
반응하듯이 소리가 튀었다. 미칠 것 같다. 저릿하게 몸을 지배하는 쾌감에 미치도록 기분이 좋아 고개를 흔들어댄다. 이제는 더 만져주기만을 기다리며 온몸이 바르작거렸다. 손끝이 피어싱을 퉁기고, 말랑한 유두를 꼬집고, 예민해진 끝을 손톱이 콕콕 건드릴 때마다 여지없이 허리가 치켜 올라갔다. 절정과 함께 계속해서 몸이 떨렸다. 열에 취해 몽롱해진 가운데, 익숙해질 틈도 주지 않고 장벽을 쑤시며 좆대가리가 박아들었다. 가. 조금만 더 하면 가. 갈 것 같은데….
그 순간, 경준이 뿌리를 움켜잡았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귓가에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정윤은 흐느끼며 얼굴을 가렸다.
“미안, 하으! 아, 흐으… 미안, 미안해. 미안….”
“정윤 씨 허락도 없이 질질 싸는 버릇. 제가 언제까지 참아줘야 해요?”
“다음엔, 이제, 부터는… 악!”
뿌리를 쥔 채로 허리 짓이 거세어진다. 마구잡이로 스폿을 비벼대는 통에 머리가 멍했다. 절정이 가까워졌지만, 도무지 사정할 수가 없었다. 경준의 좆대가리가 깊은 곳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하지 마. 놔, 놔줘. 제발.”
기어이 울음이 튀어나왔다. 열감을 떨쳐보려는 듯, 그가 애타게 고개를 내저었다.
“뭐든 할게. 기절 안 할게.”
“못 믿겠어.”
“정말이야. 정말….”
말소리가 울음에 집어삼켜지며 흔적을 감추었다. 정윤은 곧 목을 놓아 울기 시작했다. 건조한 시선이 정윤에게 향했다.
손목을 붙잡아, 정윤은 연거푸 손바닥 안에 입을 맞췄다. 열에 달고 축축해진 뺨을 비비적거리더니, 손가락까지 빨며 자비를 구원한다. 웃음을 머금고 한참을 그 모습을 감상하다가, 경준이 입을 열었다.
“자위해 볼래요? 오랜만에.”
정윤이 눈길을 들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어렸다. 경준이 손을 그러쥐었다. 빡빡한 통증과 생리적인 욕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할게… 할게. 경준아. 놔 줘….”
“그래야죠.”
손을 놓자마자, 억지로 막아두었던 사정액이 흘러나갔다. 절정에 들뜰 틈도 없이, 경준이 유두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느슨하게 힘이 풀려 여운에 잠기려던 정윤이 날 선 교성을 질렀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테이블 위를 손톱이 바득거리며 긁는다.
“해.”
“응. 으응….”
경준이 등받이에 기대어 오만하게 지켜보는 동안,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만진다.
“잘, 보… 보여?”
방금까지 만져진 탓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름 위로 손이 오가며 파고들었다. 어느새 손가락을 들락거리며 제 손으로만 자극을 탐색해 들어갔다. 머릿속이 혼탁해지다, 쾌감에 빙빙 돌았다. 흰 허벅지와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채, 가슴을 조몰락거리며 자위하는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상상이 갔지만, 한편으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사정해야 끝날 텐데. 그래야 경준이가 화를 안 내는데. 그러나 제 손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지친 것도 원인이었다. 그저 훌쩍거리며, 조금이라도 절정에 가까워지고 싶어 허리를 들썩였다. 애가 타, 정윤은 이성을 놓고 목놓아 울었다.
“도와줘. 경준아. 나, 나, 도와줘…. 가고 싶어. 가게 해줘.”
“정윤 씨.”
경준이 손목을 붙잡았다.
“버릇없어요.”
목덜미를 물면서 삽입한다. 원하던 자극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끝까지 들어가자 그저 벅찼다.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가슴을 들썩거렸다. 넣자마자 사정했음에도, 경준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갔는데. 나, 아까도, 계속, 갔는데. 갔는데에….”
“버텨요.”
“죽어. 나, 죽… 으… 흐윽. 하읏, 읍, 아흐…!”
목젖이 튀어나오도록 박아대니 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다.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구멍이 안쓰러우리만치 좆대를 받아들였다.
“아흑. 아… 악!”
기어이, 몰아붙여진 몸이 절정을 맞는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경준이 몸통을 붙든다. 다부진 사내의 몸이건만, 절정으로 늘어져 간단하게 뒤집힌다. 다시 좆질이 이어진다.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안쪽을 들락거리는 감각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정윤 씨.”
미약한 웃음을 띤 목소리로, 경준이 속삭거렸다.
“아직 안 끝났어요.”
***
클럽 블랙 웨일에는 드나드는 문이 두 개가 있다. 정문. 그리고 주차장과 마주 보는 뒤편의 쪽문.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으리으리한 정문과 다르게 뒷문은 문고리가 달려 있을 뿐, 잘 보기에는 문이라는 것도 알 수 없게 생겼다. 그래도 문지기는 필요했다. 술을 먹고 필요하지도 않은 용기가 생긴 머저리들이 줄을 피하겠다며 뒷문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꼭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 나셨네, 다들.”
뒷짐을 진 사내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복도를 두고 닫힌 문짝 사이에서도 둥둥거리는 음악 소리가 새어 나왔다. 밤이면 밤마다 어디에서 돈이 그렇게 나는지, 새벽 해가 뜰 때까지 저렇게들 보낸다. 주정뱅이들 내쫓고 시비 거는 놈들 없도록 막아주는 게 전부인 간단한 일이지만 짜증이 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쏠려서 나왔는지, 달라붙는 차림새의 젊은이 하나가 비틀거리며 나오는 게 보였다. 저러다 큰일 나려고. 찌푸린 눈살을 하고 휘청거리는 취객을 쳐다보는 중, 그의 시야에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후드를 쓴 남자였다. 어깨가 굽고 자세가 구부정했는데 어둠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두 눈이 번들거렸다. 눈꺼풀이 조금도 깜빡이지 않는다. 밀랍인형처럼, 인간을 흉내 내는 어떤 존재 같이 느껴졌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제 테이저건 위에 손을 올렸다. 기대를 무참히 배신하고, 불쾌한 남자는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압박감이 더해졌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일그러지고 뻣뻣한 얼굴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덩치 탓에 전봇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긴장감,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밀려오는 본능적인 공포를 억누르며,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명단에 들어 있으십니까?”
마치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후드를 쓴 남자는 바로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발의 차이로 경호원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여기는 출입문 아닙니다.”
후드를 쓴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 앞을 막은 손을 뿌리치고, 덜컹거리며 문고리를 잡아 흔든다.
경호원의 인내심이 빠르게 바닥났다. 지긋지긋한 일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상또라이한테 쫄기까지 해야 하다니?
바닥에 가래를 뱉는다. 조금이라도 위협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이내 그는 테이저건을 뽑아 들어, 겨누었다. 이마에 힘을 주자 볼록하고 혈관이 튀어나온다.
“가라고, 미친 새끼가. 어디서 술 처먹고-.”
남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테이저건의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 손가락이 뻣뻣하고 차갑게 굳어간다.
툭. 툭, 툭. 구두 위로 핏물이 떨어졌다. 경호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아래를 바라보았다. 복부. 빳빳하게 다려 입은 셔츠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그 위로 새카맣고 길쭉한 물체가 보인다. 칼자루다. 숨이 들이마셔지질 않는다.
그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남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박경준이 아지트지?”
박경준. 이번에 새로 온 언더보스 얘기다. 그저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경호원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이 흡족했던 모양이다.
후드를 쓴 남자가 손짓한다. 가로변에 세워진 차 문이 열리고, 비슷하게 무채색의 옷을 입은 사내 둘이 걸어 나왔다. 모두 인간 같지 않은 얼굴이다.
세 남자의 시선이 피를 흘리는 경호원에게로 향했다. 남자는 배에 박힌 칼자루를 건드리고, 처음으로 입꼬리를 들었다.
“허튼짓 안 하면 병원까지 보내줄게. 알겠어?”
이제는 눈물까지 흘리며, 경호원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그럼.”
남자가 문을 연다. 후드를 쓴 남자는 경호원의 등 쪽 옷자락을 자루 머리 붙잡듯 움켜잡았다. 그가 끌려 들어갈 때마다 내부로 이어지는 복도에 긴 핏자국이 남았다.
남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덜컹거리던 뒷문이 이내 닫힌다.
***
“위하여!”
맥주잔이 요란하게 부딪혔다. 종목이 대단히 실망스럽기는 했다만, 박성수 본인이 기분이 좋아 보이니 되었다고 치자. 잘 꼬드기면 호구처럼 줄줄 뱉어낼지도 모른다. 그 기회를 노리며 진환은 박성수가 금방 비워낸 술잔을 채웠다.
“이제 형님, 정말 인생 펴시는 겁니다.”
빡빡 민 머리에 주먹으로 으깬 듯한 생김새의 김종식이 말했다. 따라놓은 박성수의 술잔에 제 잔을 가져다 부딪히더니 형님, 형님, 부르면서 애교까지 부리는 게 아닌가. 눈 뜨고 못 봐줄 광경이다.
얼마 전까지 박성수 저 새끼 오래 못 갈 거라고 뒷공론을 까더니, 여길 보고는 눈에 껍데기가 붙은 모양이다. 신사임당 얼굴이 그려진 껍데기가.
진환은 은근슬쩍 잔을 기울이느라 쥐고 있던 손에서 중지만 들어 올렸다.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묘기를 부리던 중지는 김종식이 고개를 들자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대고 있었다.
“캬, 쉴 틈이 없네, 그냥.”
박성수가 언질을 주자, 역시 차기 부사장님은 쉴 시간이 없으시다며 개떼 같은 아부가 이어졌다. 전화를 받던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통화를 마치고, 박성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고…. 형님이 갑자기 찾으시네.”
박성수는 곧바로 진환에게 고개를 틀었다. 그 자리에 앉은 다른 사내들과 달리, 진환은 놀라지 않았다.
“진환아. 부탁 하나만 하자.”
“말씀하시죠, 형님.”
박성수가 내내 옆자리에 두고 있던 갈색 봉투를 내밀었다.
“이것 좀 위층에 올려놔. 경준이 형님 거다.”
진환은 멀뚱히 봉투를 받아 들었다. 평범한 서류 봉투였는데, 인장이나 라벨이 붙어 있지는 않았고, 공구리에나 쓸 법한 녹색 테이프로 꽁꽁 봉해져 있었다. 바닥에 불룩한 것이 있는 걸로 보아 서류만 든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박성수는 이어서 까만 카드 키를 그의 손에 쥐었다.
“이거, 카드 필요하니까 가져가고. 어?”
“예. 예….”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박성수를 뒤로하고, 진환은 쇼케이스처럼 지어진 투명한 계단을 딛고 2층으로 향했다. 박성수가 말한 방은 댄스 플로어가 내려다보이는 난간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코드가 있는 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VVIP룸.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이런 곳은 가오 잡는 용도로도 발을 들여본 적 없다. 목뒤가 뻣뻣해진다. 심호흡을 하고, 받아온 마스터키를 긁으려는 때였다.
“와 있었네.”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열린 문 너머에는 언더보스 본인이 서 있었다.
진환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날, 술 한잔하자는 말에 찾아갔던 이후로 언더보스를 다시 본 건 처음이다. 아무래도 각오한 만큼 마음의 준비가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혀가 부어오른 것처럼 아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박경준은 여전히 반드르르한, 흐트러짐이라고는 없는 고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언더보스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된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경준의 머리 너머로 방의 내부가 보였다. 누군가 누워 있다. 정윤이다.
“걱정하지 말아요. 잠든 거니까.”
진환의 시선을 읽은 듯, 언더보스가 입을 열었다. 속내를 읽힌 기분에 숨을 들이마신다. 언더보스 박경준은 고개를 기울여 진환의 손에 든 봉투를 바라보았다.
“계약 서류 가져오셨네. 박 상무가 보냈죠?”
“예, 예….”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저 위에 두고 가요.”
얼어붙은 다리는, 경준이 다가오자마자 조종당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옆으로 비켜섰다. 고마워요. 언더보스의 작은 인사말이 허무하게 고막을 지나갔다. 박경준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진환은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손바닥에 땀이 차, 주먹을 펼치자마자 바람이 일며 한기가 들었다.
씹창 낼 새끼.
신경질적으로, 진환은 유리판으로 된 탁자 위에 서류 봉투를 던졌다. 묵직한 봉투가 던져지며 양주를 놓는 은쟁반이 덜그럭거린다. 뒤늦은 취기가 몰려오는지 눈알이 근질거리고 빡빡했다.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고 있자 다리 바로 옆에서 들썩이는 인기척이 훅 끼쳤다. 정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또 씹질을 했겠지.
잠든 정윤을 보며, 진환은 인상을 찡그렸다. 셔츠는 반 이상 풀어졌고, 그나마도 엉망으로 구김이 가 있었다. 빵빵하게 부어오른 불그스레한 눈가가 방금 배때기에 구멍 나도록 박혔다고 동네방네 광고라도 하는 꼴이다. 소맷자락 사이로 손에 눌린 붉은 자국이 보였다. 역겨운 새끼들. 비역질을 해도 꼭….
곧바로 방을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동시에, 들썩이는 정윤의 등짝에서 시선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 너머에 무언가 숨겨진 것처럼. 무언가 자라나거나, 금방이라도 살갗을 뚫고 빠져나갈 것처럼.
“씨발.”
한숨처럼 욕설을 뱉으며, 진환은 옆의 둥그런 가죽 의자에 엉덩이를 얹었다. 두어 번 마른세수를 하고 나서야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좁았다. 호화스럽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인테리어는 전체적으로 검은 톤을 사용했는데, 군데군데에 놓인 가구며 설비가 예사롭지 않았다. 벽이 푹신한 것으로 보아 방음 처리도 되어 있는 듯했다. 천장을 응시하던 중,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진환은 곧바로 찬찬히 방을 둘러보았다. 예상대로였다.
CCTV는 없다.
상상하지도 못한 기회였다. 언더보스씩이나 되는 놈이 이런 곳을 굳이 제 앞으로 빼놓았다는 건 비즈니스 얘기를 주고받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보다시피 제 애완견과도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니, 강 반장이 원하는 정보를 대화 속에서 흘릴 가능성도 높았다. 블랙웨일은 기본적으로 박성수 관리 아래에 있는 장소이니 여차하면 진환의 손으로 회수할 수도 있었다. 문자 그대로 완벽한 조건이다.
조심스럽게, 진환은 눈을 감은 정윤의 얼굴 앞에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미동도 없다. 깊게 잠이 든 것을 확실히 확인한 후, 진환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난 강 반장과의 랑데부 이후로 내내 도청기를 가지고 다녔다. 기회가 오자마자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솔직히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건만, 이렇게 써먹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주머니에서 둥그렇게 생긴 장치를 꺼내 든다. 테이블 아래, 합판이 세워져 잘 보이지 않는 안쪽 구석에 도청기를 부착한다. 이제 전원을 켜기만 하면 된다. 스위치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음.”
손마디가 뻣뻣해지도록 한기가 스쳤다.
얼어붙은 채 서 있는 진환의 동공이 옆으로 굴렀다. 온몸의 피가 식어 내린다. 죽은 것처럼 감겨 있었던 정윤의 눈이, 어느새 말갛게 떠져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말로 적힌 글을 읽는 것처럼, 한참을 시선을 위로 해 쳐다보다가, 정윤이 입을 열었다.
“일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어낼 수 없는 불투명한 눈이 깜빡거렸다. 진환은 새하얗게 된 머릿속과 정윤의 표정 사이에서 미로 찾기를 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오전에 동준이 만나러 가느라 박성수를 따돌리고 잠깐 도망갔는데. 그 얘기가 돌고 돌아 이 녀석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다.
“아. 예…. 오전에, 잠깐.”
“오늘만이야?”
“네?”
새까만 눈이 다시 깜빡인다. 몸을 일으키자 가슴이 드러나, 정윤의 셔츠 위로 볼록하게 나온 흔적이 도드라졌다. 아직도 달고 있구나. 언더보스의 위에 올라타, 빨통에 피어싱을 박고, 엉덩이를 흔들어대면서….
가랑이 사이에 피가 몰린다. 미친 짓이야. 진환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대한 천천히, 손동작이 드러나지 않도록 탁자 밑에서 손가락을 떼어내며, 진환이 고개를 숙였다.
“예. 오늘만.”
진환이 더 이상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자, 정윤은 들었던 머리를 다시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듣고 진환이 고개를 틀었다.
천박할 정도로 볼록하게 나온 빵빵한 가슴과 대비되게, 천장을 바라보는 얼굴은 선이 묘하게 갸름하다. 축 내려간 눈꼬리가 유난히 처진 것처럼 느껴졌다. 우울해하거나, 안심하는 것처럼. 뿌연 눈이 네온 빛의 조명을 담았다.
“더럽지.”
정윤이 뻐끔거렸다. 잠깐의 공백을 두고, 그가 말을 이었다.
“네?”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럴 때는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는 편이 나았다.
“아니. 전혀 아닙니다. 살다 보면 그, 별짓을 다 하게 되는 법이고….”
정윤은 특별히 그 대답에 감동받은 것 같진 않았다. 스르르 감겨오던 눈꺼풀이 이내 탁한 눈동자를 덮어버리고, 가느다란 입술이 벌어진다. 그 사이에서 나온 말은 완전히 뜻밖의 것이었다.
“고마워. 그래도.”
“예…?”
“말 안 해줘서.”
눈가가 벌어진다. 진환은 말을 잃고 정윤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새끼가, 감사 인사를 한 건가? 네가 걸레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아 줘서 고맙다고. 나한테 하겠다는 말이 고작 그거 하나야?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역한 짜증이 일었다. 무릎을 붙잡은 손이 옷에 구김이 가도록 움츠러든다. 갈비뼈를 부술 듯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새끼는 쪽팔리지도 않은 건가? 화가 나거나 싫다는 마음도 안 드나? 그 취급이 괜찮은 거야?
“왭니까?”
자기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 그것마저도 기분이 나쁘다. 어금니를 한 차례 악물었다가, 진환은 기어이 말을 이었다.
“왜 박 회장님 옆에 있는 겁니까?”
정윤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목각 인형처럼 딱딱했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떠올랐다. 하늘은 왜 파란색이냐거나, 지렁이는 어디에서 생기냐는 종류의 질문을 받은 것 같은 표정.
“그럼, 어디로 가?”
적막이 흘렀다.
준비된 대답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떠오르질 않았다. 뭐라고 말하려던 혀가 꼬이고, 아, 그게, 하는 멍청한 소리를 뱉은 후, 진환은 결국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걸 본 정윤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것 보라는 듯이.
널찍한 등이 둥글게 말려들어 갔다. 몸통 속에 무언가 숨기는 것처럼. 호흡이 가지런해지고, 평화로운 고요함이 돌아왔다.
진환은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도청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전원이 켜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늘게 눈을 뜬 채 손가락을 뻗어 스위치를 누른다. 똑딱. 손끝으로만 느껴지는 버튼의 진동이 전해진다.
끝났어.
운이 따라준다면 한 달 내로 박경준은 철장 너머에, 저 자식은 쪽박 신세가 된다. 재수 없는 강 반장 새끼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고, 형은 감옥에서 나온다.
해방감이 들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기분만큼은 좋아야 했다. 그런데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잔여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은 듯한, 미칠 듯한 갑갑함만이 남았다.
진환은 무의식적으로 저를 등진 정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도드라진 목선을 따라 선명한 멍 자국이 보인다. 뒤에서 누른 자국이다. 뒤에서. 억지로.
쾅. 적막을 뒤흔드는 소리에, 진환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문가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발길질이라도 하는지 노크 소리가 요란하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진환은 정윤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걸었다.
“누워 계시죠. 제가 가겠습니다.”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정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까.
문고리를 잡는 그 짧은 동안에도 문을 두드려대는 요란한 소리는 거세어져만 갔다. 어떤 놈이 술을 처먹고 난동을 부리는 건지 혼쭐을 내주겠다고 생각했을 때, 건너편에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박 회장님. 박 회장님 거기 계십니까?!”
절규 같은 목소리였다. 생사가 걸린 것처럼 다급한 목소리. 하지만 어딘가 비굴하다.
싸한 기척이 스쳤다.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 진환이 뒷걸음질을 쳤다. 대답하지 않자, 상대가 다시 악을 지른다.
“박 상무님!! 그래. 바, 박 상무님께서 찾으셔서 그렇습니다. 회장님. 제발, 씨발- 악!”
단말마와 함께 우득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문짝이 박살 날 것처럼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씨발.
진환은 본능적으로 행동했다. 꽃병이 놓여 있던 장식대를 끌어 문고리 아래에 고정시킨다. 병을 내리쳐 깨트리고, 가장 큰 사기 조각을 손에 움켜쥔다. 뒤를 돌아, 진환이 소리쳤다.
“형님. 정윤 형님! 일어나십쇼. 도망가셔야 합니다. 당장!”
마치 다른 공간에 빠진 것처럼, 정윤은 꼼짝도 하질 않았다. 저 등신 같은 새끼. 두고 가기 전에 정신 차리라고 외치려는 순간, 괴물 같은 진동이 들려왔다.
문을 돌아본 진환은 등골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화재 탈출용 도끼가, 문짝을 갈가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짝이 패이며 나무 조각이 튀어 오른다. 도끼날이 문짝에서 뽑히자, 눈꺼풀이 잘려나간 것처럼 괴이하게 눈을 뜬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진환과 눈이 마주친 그는, 귀까지 찢어지도록 입꼬리를 들었다.
“여기 숨었네, 다들.”
남자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발길질과 함께, 넝마가 된 문짝이 허물어졌다. 낡은 천 운동화가 나무 조각을 밟는다. 남자의 뒤로 비슷한 행색의 사내 둘이 걸어 들어왔다. 앞서 있는 남자는 덮어쓰고 있던 회색 후드를 벗어 내렸다. 박박 민 머리, 정수리까지 용 비늘 같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도낏자루로 제 손바닥 위를 턱턱 두드리며, 남자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띤 채 물었다.
“박경준이를 보러 왔는데. 여기 없어?”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다. 사기 조각을 눈앞으로 들어 올리며, 진환이 초조하게 자세를 잡았다.
“당신들 뭐야.”
“보면 모르겠냐.”
남자가 목을 모로 꺾자 우드득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관절이 퉁기며 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뒤에 선 사내가 시체의 배에서 칼을 뽑아내며 나는 소리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니들 죽이러 온 놈이지.”
위험하다.
본능이 그렇게 말한다. 누군지는 몰라도 단단히 벼르고 온 놈들이었다. 사람 하나 담그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닐 것이다. 죽은 문지기의 가슴에서 쏟아진 핏물이 신발 밑창까지 스며든다. 아찔한 공포가 뇌리를 사로잡았다.
혼란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지만, 도망갈 길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여긴 창문 하나 없는 밀실이고, 하나뿐인 출구는 ‘저것들’에게 점령당했다.
“씨발….”
이렇게 된 이상,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사기 조각이 손바닥을 파고들도록 움켜잡는다. 다리에 힘을 실어, 진환은 갑작스러운 침입자에게 달려들었다.
“근데, 이 새끼가.”
나직한 욕설이 귓전에 들린다. 동시에 시야가 뒤집혔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남자는 진환의 공격을 제압해버렸다. 걸어서 넘어뜨린 다리가 바닥을 구르는 진환의 옆구리를 걷어찬다. 도끼날이 어깨로 내리찍힌다. 어깨 바로 위로 내리찍힌다. 팔이 쪼개지는 듯한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쇼하지 말고 대답하는 게 네 신변에 좋을 거다. 박경준이 어딨냐?”
“…몰라.”
“솔직히 대답해. 대답하면 살려는 줄 테니까.”
숨을 쉴 때마다 통증에 온몸이 뒤틀릴 지경이었지만, 저게 헛소리라는 것쯤은 알겠다. 뒈진 문지기의 시퍼런 얼굴이 알려주지 않는가.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까뒤집듯 눈을 부릅뜨고, 진환은 남자를 마주 봤다. 벌벌 떨며 손을 들어 올린다. 잘 오므라들지 않는 손가락을 서서히 오므린다.
그사이, 혼자 꼿꼿이 선 진환의 중지가 남자의 얼굴 앞에 들이밀어졌다.
남자는 흥미로워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단 한 번도 깜빡거리지 않은 불쾌한 눈이 데구루루 구른다. 어깨에 박혔던 도끼날이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나갔다.
“그래, 그럼.”
묵직한 날 끝이 천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단두대의 칼날처럼 빠르게 아래로 내려앉는다.
쿵. 굉음이 들려왔다. 눈을 뜨니 직전까지 도끼를 내리찍으려던 남자의 머리가 직각으로 꺾여,)튀어나오기 직전인 듯한 두 눈깔로 진환을 마주하고 있었다. 박살 난 나무 조각이 휘어진 그의 머리와 함께 남자를 저 멀리 날려버린다.
벽에 관자놀이가 찍힌 남자는 곧 정신을 잃었는지 시퍼런 눈을 뜬 채로 미동도 않았다. 진환은 곧 남자를 후려친 나무 조각이 방금 전까지 얌전히 소파 앞을 장식하던 테이블임을 알아차렸다. 테이블을 든 것은 정윤이었다.
언제 일어난 거지?
“괜찮-.”
숨도 차지 않은 목소리로, 정윤이 말하려던 때였다. 정윤의 목둘레로 벨트를 두른 손이 덮쳐왔다. 침입자 중 한 명이었다.
가죽 벨트가 살갗을 베며 숨골을 압박한다. 그를 떼어내려는 듯, 정윤이 제 등을 벽에 내리쳤다. 하지만 손을 다 쓰기도 전, 또 한 명의 침입자가 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청부업자의 칼날이 직각으로 세워져, 정윤의 미간을 겨누었다.
“비켜, 씹새끼야!”
그 순간, 진환이 칼잡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칼을 든 남자의 몸통이 기운다. 진환은 상대와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균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 칼을 빼앗으려 했지만, 생긴 것만큼이나 힘도 괴물 같은 놈이었다. 근육이 터져 나갈 정도로 힘을 주어도 팔이 옆으로 기운다. 도끼에 찍힌 어깨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랑이야. 그런 직감이 들었다.
사타구니를 걷어차서 틈을 벌리자.
지금으로서는 승산이 있을 방법은 그뿐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진환은 사내를 향해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기우뚱한 사내가 칼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진환의 옆구리를 파고든다.
배를 찔렸어.
자각과 함께 불타는 통증이 이어졌다. 벌어진 살 사이로는 뜨거운 피가 꿀렁꿀렁 흘러넘쳤다. 손끝부터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몸통이 뒤집힌다. 어둠이 찾아온다.
“씨발. 씨발….”
기어서 도망치려 해보았지만, 다른 한 명의 남자가 진환을 붙들었다. 멱살을 틀어잡혔다. 벽에 메다꽂힌다. 진환은 아래로 시선을 깔았다. 뒤집힌 테이블 아래, 합판이 부서지면서 함께 쪼개진 도청기가 눈에 들어왔다. 씨발, 비싼 거랬는데. 강 반장 그 새끼가 물어내라고 지랄할 텐데.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가까스로 뻗는다. 그러나 손에 잡히기도 전, 청부업자가 진환의 멱살을 쥐어 그를 집어 던졌다.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오는데 산소는 조금도 들어가질 않는다. 뚜벅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청부업자의 발에, 기어이 도청기가 채여 손도 닿지 않을 구석으로 튕겨 날아갔다.
남자의 어깨 너머로는 둥글게 말린 등짝이 보였다. 이미 죽은 것인지, 정윤은 차갑게 굳어 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씨발. 다시 생각해보니, 저 새끼가 당하고 있을 때가 찬스였다. 눈 딱 감고 튀었으면 목숨은 건졌을 거다. 무슨 개폼을 잡겠다고 달려들긴, 달려들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죽어도 이런 개죽음을 당해, 재수도 지지리 없는 새끼가. 피를 흘린 탓인지, 칼이 허파를 찢어버렸는지, 머리를 두들겨 맞아 그랬는지, 방 안이 빙빙 꼬리돌기를 하는 것 같았다. 터진 입술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눈을 감기 전, 진환은 마지막으로 시선을 들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남자의 팔이 허공에서 멈춘 채 움직이질 않았다. 뒤로 팽팽히 당겨진 것처럼.
자세히 보니, 누군가 그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있었다. 가축을 도살할 때처럼 뒤로 잡아당기며, 목덜미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만든다.
거무죽죽해 보이는 선이 목을 가로질러 드리운다.
그것이 가로로 날을 세운 식칼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진환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