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31)

#1

나프탈렌과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하는 경찰청 화장실 세면대 앞, 강 반장은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넥타이 매듭을 다듬었다. 지하실에 사흘간 갇혔다 나온 듯한 꼴이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니, 소가 핥고 지나간 것처럼 눌린 옆머리가 보였다. 이틀간 책상에 엎드려 잤으니 당연한 일이다. 머리카락 뿌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어떻게든 모양을 고쳐보려 애쓰던 그는 곧 무의미한 일임을 깨닫고, 수건걸이에 걸쳐둔 재킷을 집어 올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브리핑 룸은 어두웠다. 프로젝터가 기다란 테이블을 가로질러 쏘아 올리면서, 누리끼리한 불빛이 둥둥 떠다니는 먼지를 비췄다. 강 반장은 테이블에 앉은 인물들을 살폈다. 박 경위, 청장, 먼저 도착해 회의를 이끌고 있던 이 형사, 마지막으로 테이블의 맨 끝에 앉은 김 검사의 옆얼굴까지. 인사치레가 필요한 일행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 파일을 올려두고, 양손을 테이블 위에 내리치며 몸을 기울였다.

“청명파 언더보스가 입국했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빙 돌리며 신호하자, 스크린 위로 사진 세 장이 떠올랐다. 인천 공항, 검은 양복을 입은 양아치 대여섯 명 사이로 유유히 걸어 들어오는 사내. 머리를 뒤로 넘기고, 심드렁한 표정을 한 삼십 대 중후반의 얼굴이다. 위협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지만,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을 보이자마자 순식간에 방 안의 공기가 요동쳤다. 김 검사가 헛웃음을 지었다.

“저거 저, 진짜 박경준이네. 후레자식 박경준.”

“김 회장이 혼수상태가 되면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지 않습니까?”

박 경위는 의연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청장이 혀를 찼다.

“안 잡힐 자신이 있다는 거지. 오만한 놈이니까.”

“지랄….”

“그래서, 바로 수술 들어가?”

“삼 년 전에 박경준이 날면서 수사는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지금도 박경준을 체포하기는커녕, 영장을 청구할 만한 명분을 찾아내지 못했고요.”

“거, 프락치 몇 명 심어두지 않았어?”

김 검사가 강 반장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다섯 명입니다.”

“쓸 만한 거 못 건졌고?”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연락 두절입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얼어붙은 얼굴들을 빙 둘러보던 박 경위는 브리핑 자료 파일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탁자 위에 두드렸다.

“어쩔 겁니까? 저거 그냥 내버려 둘 겁니까?”

“그게, 이번에는 방법이 생길 것 같습니다.”

강 반장의 고갯짓과 함께 다음 사진이 비췄다. 박경준의 바로 뒤, 한 남자를 클로즈업한 사진이었다. 눈 아래로 뺨을 가로지르는 칼자국이 있고, 키가 박경준보다 한 뼘은 더 컸다. 강 반장이 팔짱을 꼈다.

“이놈입니다.”

청장이 가늘게 눈을 떴다.

“이게 누군데?”

먼지가 떠다니는 프로젝터의 불빛이 뺨을 비추는 가운데, 강 반장이 독버섯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넥타이를 거듭 고쳐 매면서 정교하게 다스린 전율이 팔 위의 잔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속은 메스껍고 정수리는 개운하다. 롤러코스터가 출발한 것이다.

“박경준이 변기랍니다.”

***

이 주일 전.

“그러니까 새끼가 똥 싸는 개새끼처럼 벌벌 떨면서 헛소리를 해. 살려주세요, 돈 드릴게요, 저 모셔야 하는 어머니가 있어요. 하여간 별의별 소리는 다 하는 거야. 씨펄 어머니는 얼어 죽을. 어이구, 그런 효자이신 줄 몰랐습니다, 했더니 또 실실 웃어, 그놈이. 나도 따라 웃었지, 실실. 그러다가 그놈이 이제 살겠구나, 할 때, 따악!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놈 눈깔이 튀어나오는데-.”

행동대장 박성수는 오늘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똑같은 소리를 몇 번이나 지껄이는지, 진환은 몇 번이나 운전대를 꺾어 가드레일을 박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진환은 파르르 떨리려는 눈꼬리를 억지로 접어 올렸다.

“어우, 겁납니다, 형님.”

“뭘 겁까지 먹고 그래, 새끼가. 옛날 일이야, 옛날 일.”

그러시겠지.

진환은 박성수가 입만 산 쥐포 대가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 십 년 전, 그러니까 박성수의 똥배가 나오고 볼이 불그죽죽해지기 전에는 멍키 스패너로 짭새 코를 비틀어 콧구멍이 하늘로 가도록 만들어 놓은 적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자리가 그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는 뒤에서 여기로, 저기로 가라고 윽박이나 지르지, 힘든 일을 나서서 하려 하지 않는다. 요즘은 슬금슬금 돈을 빼돌리는 것이 한몫 단단히 챙겨 동남아로 튀려는 속셈이 역력해 지켜보기 딱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존경하지 않는다고 해서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진환은 행동대장 박성수의 가장 아끼는 따까리이자 술친구였다(이 바닥에서는 대부분 그 두 가지가 같다). 그래서 행동대장 박성수는 삼 년 만에 귀국하는 언더보스를 마중 나가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진환을 데려가는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설렁설렁 웃으며 그의 바람 든 헛소리에 맞장구를 쳐줄 이유는 충분했다. 진환에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너, 경준이 형님한테 잘 보여라. 내가 피래미 때부터 주먹이 피떡 되도록 굴러서 언더보스 만들어 놓은 사람이야.”

“물론입니다, 형님.”

“형님까지 들어오시면 우리도 앞날이 밝다, 밝아.”

수배까지 걸릴 뻔한 요주의 인물인데, 퍽이나 그러겠다. 진환은 핸들을 돌리며 머릿속의 음 소거 버튼을 눌렀다. 적당한 시점에 맞장구만 넣어주면 박성수는 말을 듣고 있는지 아닌지 쥐 불알만큼도 알아채지 못한다. 대신, 진환은 머릿속으로 입국하는 언더보스의 모습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또라이 후레자식 박경준. 제 아버지 머리를 벽걸이 박제로 만들어서 침실에 뒀다지.

이태원에 있는 뽕쟁이는 모두 박경준에게 감사해야 한다. 러시아 놈들하고 협정을 맺어서 일 년에 십오 톤씩 코카인이 든 냉동 대구를 들여오게 해준 게 그 사람이니까. 물론 화물선이 오가는 인천 앞바다 바닥에서 시멘트 밖으로 머리털만 달랑거리고 있을 빙화파 열댓 명은 생각이 다를 테지만, 사업상에 생긴 일에 개인적인 감정을 들먹일 수는 없다.

전설처럼 수군거리는 소리를 전해 듣기는 했어도 직접 그를 보는 건 처음이다. 삼 년 전, 언더보스는 짭새의 소탕 작전을 피해 태국으로 피신을 갔다. 진환이 이 바닥에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언더보스가 자기 등을 찌른 짭새 끄나풀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를 물으면 모두가, 심지어 박성수마저도 입을 다물었다. 덜 갈린 새끼발가락만 남았다는 얘기를 할 뿐이었다.

그가 오늘, 한국에 돌아온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두 시간을 죽치고 기다린 후, 드디어 관짝 같은 입국장 유리문이 반으로 쪼개졌다. 문이 열리자마자 박성수가 호들갑을 떨며 준비하라고 외쳤다. 인파 사이로 검은 정장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진환은 정수리 선이 무릎과 직선이 되도록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이는 순간에 궁금해졌다. 어디 있다가 왔다고 했더라? 태국? 베트남? 거기 더운 나라 아닌가? 거기서도 까만 옷을 입나?

“형님, 오셨습니까!”

머리 위로 박성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환보다는 허리를 덜 숙인 모양이다.

“뭘 마중을 오고 그래요.”

모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질감이 흘러넘쳤다. 진환에게 언더보스 박경준은 전철역에 붙어 있는 공익 광고 포스터 속 배우 같은 존재였다. 지겨울 정도로 잘 알지만,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박성수 또래의 걸걸한 목소리일 줄 알았더니,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말끔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저 샌님 같은 말투는 또 뭐람.

“별일은 없었어요?”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안 계시는 동안 정리 다 끝내놨습죠. 짭새 대가리에 오줌을 갈겨도 됩니다.”

“경기도 좋고요?”

“물론이죠.”

박성수 저 새끼는 하여간 허풍이 타고났다. 경기는 좋지 않다. 경찰은 군대까지 대동할 기세고, 피래미 같이 작지만 살을 뜯으며 약 올리는 데에는 도가 튼 경쟁 조직이 잡아도 잡아도 계속 생겨난다. 장부에서는 자꾸만 돈이 사라진다. 보스가 혼수상태에 빠진 건, 모르긴 몰라도 과로가 원인일 것이다.

“영역 관리도 잘해 놓았습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새 물꼬를 트려는데, 아, 섭섭하게 또 형님이…. 짐 저 주시죠.”

“됐어요. 정윤이가 들어줄 텐데.”

진환이 겁도 없이 고개를 치켜든 건 그때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 자리에 있는 인물이라고는 싸락눈 같은 행동대장 박성수, 더운 나라에 있다 왔으면서 까만 정장을 입는 샌님 말투의 언더보스, 에어컨 빵빵한 인천 공항에서 등줄기가 후들후들 떨리도록 인사를 하고 있는 자신, 이 셋뿐이었다. 목뼈가 조각조각 흩어지도록 허리를 숙이고 땅바닥만 보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이 들어올 새가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제3의, 아니, 제4의 인물이 등장한 것이었다.

고개를 든 한순간 진환의 눈에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넥타이는 하지 않았지만 검고 비싼 정장을 입고서 표범처럼 머리를 뒤로 넘긴 미형의 남자였다. 기품이 흘렀고, 미소 짓고 있었음에도 인간다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점에서(그 기생오라비 같은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진환은 그가 언더보스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 뒤의 남자는 볼품없었다. 보스보다 한 뼘이나 키가 크고 한쪽 눈에는 해적같이 흉터가 났는데도 조금도 고압적이지 않았다. 눈꼬리가 퍼그처럼 내려앉은 탓인지, 셔츠 단추가 어긋난 것도 모르고 양손에 가방을 든 채 우왕좌왕 공항을 둘러보고 있어서인지. 프린트된 듯이 완전무결한 보스의 모습과 달리, 그는 고장 나고 벌건 녹으로 뒤덮여 있어, 보고 있기에 질리지 않았다.

저게 ‘정윤’인 모양이다.

진환의 시선이 정윤의 얼굴 위에 머무르고, 정윤과 그는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정윤은 태어나서 한 번도 타인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당황했다. 그가 발을 헛디뎠다. 짐 가방 탓에 무게가 쏠려 휘청거리고, 근육질인 몸에 비해 지나치게 꼭 맞는 셔츠가 판판하게 튀어나오며 가슴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진환은 눈을 의심했다. 가슴팍에 동그란 모양이 비친 탓이었다. 셔츠가 얇으니 젖꼭지가 나와 보이는 정도야 이해할 수 있다지만, 그가 우연히 목격한 그림자는 그것과 달랐다. 은색이었고, 단단했고….

진환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 행동대장 박성수가 그의 머리를 잡아 눌렀다.

“이 새끼가 미쳤나!”

성수가 소리쳤다.

“눈 안 깔아? 씹새끼가 버르장머리가 없어, 버르장머리가.”

“죄송합니다, 형님!”

진환은 최대한의 진심이 느껴질 수 있도록 우렁차게 소리쳤다. 박성수가 배를 몇 번 걷어차도록 내버려 둔 후에서야 보스가 말했다.

“그만하고 가요. 해 떨어지겠다.”

행동대장 박성수는 알랑방귀를 뀌며 언더보스의 옆에 붙었다. 진환은 박성수의 정수리에 오줌 갈기는 상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그와 비슷한 뒷발치에 정윤이 나란히 걸었다. 어깨를 구부정하게 안으로 구부려 아까 가슴에서 보였던 음영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어색하게 새가슴을 만드는 모양이 어쩐지, 일부러 가슴을 가리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끝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지 못했으니 약이 올라 그렇게 느낀 걸지도 모르지만.

언더보스를 차 앞까지 모시고(수박도 이빨로 까먹을 놈인 박성수는 당연히 리무진을 준비했다) 박성수가 문을 잡고 있는 동안 정윤은 트렁크에 짐을 실었다. 이 년이나 해외에 있었던 사람임을 감안할 때, 짐 가방 세 개는 놀랍도록 단출한 숫자였다. 생색이야말로 모든 직장 생활의 기본이다. 진환은 정윤이 마지막 가방을 들기도 전 달려와 냉큼 잡아 올렸다.

“막내한테 시키세요, 이런 일은.”

“막내?”

“저 말이죠, 저.”

그러자 정윤은 진환이 대비되어 있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행동을 했다. 축 처진 눈이 휘어지도록 미소 지은 것이었다. 날이 좋아 짧게 자른 까만 머리카락 주변에 내려앉은 볕이 붕 뜬 은색 띠를 만들었고, 지구가 곧 끝날 것처럼 빽빽대는 트럭 경적이 먼 곳에서 아득하게 울렸다. 남자의 흉터가 눈살을 따라 구부러져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 모양이 됐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다. 이해받는 듯한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고마워.”

정윤이 트렁크 문을 닫았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진환은 허겁지겁 뒷문을 열고 정윤을 안내했다. 방금 전의 웃음은 사라져 있었다.

***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앞에 언더보스를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 진환은 뒷좌석이 기묘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미러를 보니 박성수가 턱을 괴고 아득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진환의 앞에서 박성수는 항상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추억에 잠겨 있거나, 추억을 떠들어 대거나.

조용히 운전만 할 수 있으니, 평소라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일이었다. 그러나 진환은 까끌거리는 옷을 입은 듯 안절부절못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서 좌회전을 두 번 한다. 진환이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입니까?”

“뭐?”

“그, 정윤인가 하는 사람 말입니다. 형님이랑 친해 보이던데요.”

“아, 걔.”

박성수가 편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높은 인간은 아니다.

“나도 잘 몰라. 태국에서 사업하는 걸 도와줬다는데, 형님이 꽤 좋아하신다.”

“우리 조직 사람은 아니고요?”

“경준 형님이 거뒀는데, 그럼 우리 식구지.”

진환은 정윤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 한둘은 죽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생김새였지만, 그 웃음은 억지로 기워 놓은 듯이 이 바닥과 어울리지 않았다.

“…같이 일하게 될까요?”

“아, 새끼.”

박성수가 몸통을 세웠다. 진환은 대비하듯 바짝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다렸다는 듯 박성수가 앞좌석을 걷어찼다. 등짝이 간질거렸다. 꽉 붙든 핸들이 흔들거렸다.

“말이, 많아. 새끼가. 어? 나도, 모른다고, 새끼야. 몰라. 어? 몰라. 몰라! 네가 물어보든가, 씨발….”

“죄송합니다, 형님.”

“잠 좀 자보려니까, 씹….”

카악, 박성수가 가래를 끌어 올렸다. 침 뱉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진환은 고개를 들었다. 신호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뭐, 친해져서 좋을 거 없다.”

“무슨… 뜻입니까, 그게?”

“못 봤냐? 그 새끼 경준 형님 졸졸 따라다니는 거.”

박성수는 턱을 괸 채로 들으라는 듯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이 얘기를 해도 좋은지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묘하게 바람을 잡는 효과가 있다. 이마에 댄 손이 톡톡 움직였다.

“경준이 형님이 개를 키웠거든, 한 번?”

그가 입을 뗀다.

“개새끼를 아주 동생처럼 이뻐하셨어. 밥도 존나 좋은 거 먹이고. 개새끼 털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게 존나….”

“뭐. 동물 좋아하시나 보네. 그게 어떻다고 그러십니까?”

“근데 그 개새끼가 죽었어. 짭새 새끼들 몰려왔을 때. 차에 치였지, 아마.”

삼 년 전에 있었던 습격 얘기다. 짭새 놈들이 수색 영장까지 들고 쳐들어와 사무실을 뒤집어놨더랬다. 찾아낸 거라곤 다 낡은 원양어선 거래 기록뿐이었지만 분위기가 어지간히 살벌했다고 들었다.

신호가 바뀐다. 백미러에서 눈을 떼고 핸들을 돌렸다.

“안됐네요. 아끼시던 갠데.”

“그래서 담근 거다.”

“예?”

되묻는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새끼발가락만 남았다는 프락치 새끼.

“그 개새끼 때문에 그런 거 아니냔 말이 돌았다. 그때. 경준 형님 꼴이 그냥, 씨발…. 아수라도 그런 아수라가 없었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얘기다. 천하의 후레자식 박경준이 고작 개 한 마리 때문에 열을 냈단 말인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개새끼하고 사람하고 같습니까.”

박성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숨을 내쉬었다. 구름이 낮게 깔렸다.

“우리 팔자가 개 팔자지 뭐겠냐.”

***

경준은 양복 재킷도 벗지 않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목이 간질거리는 소리로 한숨을 내쉬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집에 온 기분이 드네.”

침대 옆의 창문 너머, 공사 중인 부지와 차로가 균열처럼 얽힌 주택 단지가 내려다보였다. 수영장이 딸린 집도 좋지만, 도시가 체질에 맞는 그는 이런 풍경이 더 반가웠다. 공기는 서늘하고 주위는 조용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옷장 냄새를 제거하는 인공 방향제 냄새가 났다. 재스민.

정윤은 침실 안에 발을 딛지 않았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경준이 물었다.

“안 누워요?”

“…걱정 안 돼?”

“뭐가요?”

“보스는 하고 싶지 않다면서.”

정윤이 눈을 위로 굴렸다가, 다시 비스듬히 틀었다. 덩칫값을 못한다니까. 정상위로 섹스할 때가 아니면 눈도 마주 보기가 어려우니. 경준은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와요.”

경준이 매트리스 위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망설이다가, 정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매트리스가 흔들리며 사뿐히 무게 중심이 기울어진다. 정윤은 고개를 들 줄 몰랐다. 무릎 위에 얹은 손이 어쩔 줄을 모르고 꼼지락거렸다. 경준이 손목을 쓸어내렸다.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그가 단정한 얼굴을 내밀었다.

검지 끝이 콧등에 닿는다. 콧날을 쓸어, 입술을 만지고, 흉터가 새겨진 뺨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가, 귓바퀴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만지작거린다. 다른 편의 손이 넌지시 가슴팍 위에 닿았다. 쇄골 밑으로 손이 미끄러졌다. 흠칫, 정윤의 어깨가 떨렸다.

“공항에서 넘어질 뻔했죠?”

경준이 속삭였다. 움직이는 입술과 함께 온기를 담은 숨결이 불규칙적으로 귓가에 끼쳤다.

“조심하지 그랬어요. 다 보이던데. 그 애송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몰라. 뭐 이런 상변태 새끼가 다 있나, 그랬으려나?”

눈을 감는다.

그러길 바랐으면서. 얇은 셔츠를 입힌 것도, 그 사람이 고개를 든 순간 등을 밀친 것도 모두 자기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경준이 가장 좋아하는 게임의 규칙이다. 정윤이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게임의 일부.

“안 그랬을 거야.”

셔츠의 가슴팍 위를 문지르는, 서걱거리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짐 나르는 것도 도와줬고. 좋은 애 같아.”

귓바퀴에서 조곤조곤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한기에 소스라치며, 정윤이 눈길을 들어 올렸다. 경준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벗어요.”

그가 말했다.

화났구나.

정윤은 지체하지 않고 단추를 풀었다. 반도 풀어지기 전, 경준이 참을성 없이 손목을 붙들어 당겼다. 동작을 멈추고 허리를 세우자, 경준의 시선이 생선 배를 딸 때처럼 찍고 내려갔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도 신체가 반응한다. 유두가 꼿꼿하게 달아올랐다. 정윤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유두가 서면서 자연스러운 통증이 이어졌다.

탐스럽게 근육이 잡힌 가슴, 오른쪽 유두에 동그란 은색 구체가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였다. 피어싱이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날, 태국에 남아 있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가 받은 대답.

경준이 피어싱 표면을 건드렸다.

“벌써 아물었네요.”

“아파.”

손이 유두를 퉁겼다. 비명을 삼키려, 정윤이 세차게 입술을 깨물었다. 경준은 미소 지었다.

“그래서?”

덧붙이지 않고,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경준은 저 좋은 대로 피어싱 주변을 문지르며, 민감한 부분에 박혀 있는 그것의 존재감을 은밀하지만 선명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아래를 보니 정윤은 어느새 앞섶이 젖어 있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코웃음을 흘리고, 경준은 천 위로 손바닥을 눌러, 앞섶을 마찰해대기 시작했다. 정윤의 몸통이 흔들거렸다.

“하지 마, 경준아….”

“가만히 있어요.”

“옷이 더러워지잖아. 네가 사준 건데. 내가 움직일게. 잠깐만….”

정윤은 입술을 깨물고, 말소리가 빗겨 나가 꼴사나운 교성이 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눌렀다. 경준이 서서히 손을 풀었다. 옷 위까지 쿠퍼액이 흥건해, 손바닥에도 얼마간의 끈적임이 묻어나올 지경이었다. 정윤이 나직하게 우는 소리를 냈다. 조금만 흥분하면 어쩔 줄을 모르고 울어버린다. 성가신 새끼. 뺨이 완전히 젖어버리기 전에 얼굴을 움켜잡고, 똑바로 눈을 보도록 한다.

“요즘 많이 기어오르지 않아요, 정윤 씨?”

경준의 관심은 다시 정윤의 피어싱으로 옮겨갔다.

“하나로는 부족한가?”

“미안, 미안해.”

“말만 늘 그렇지. 내가 왜 서운한지는 관심도 없죠?”

“아냐. 잘못했어.”

“조심하란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탓하는 게 아니라.”

경준이 피어싱 위에 손을 퉁겼다. 살이 찢겨 나가는 듯한 예리한 통증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정윤이 입술을 물고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등줄기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손바닥이 그를 달랬다. 쉬, 쉬잇. 잇새로 바람 소리를 내며, 경준은 다정하게 이마를 맞댔다.

“한국 온 거 오랜만이죠, 정윤 씨?”

“으, 응. 어….”

“기념으로 여행 한번 갈래요?”

정윤이 재빠르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경준은 침대 옆에 세워둔 슈트케이스를 뒤적이고 있었다. 고운 손가락이 지퍼백에 든 짐 사이를 헤집어, 주사기가 든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안 돼…!”

정윤이 그의 손을 낚아챘다. 곧바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명치. 경준은 구구단이나 알파벳 순서를 외는 것처럼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을 머릿속에 새기고 있었다. 무릎이 체중을 실어 복부를 짓누르고, 주삿바늘이 목덜미의 동맥 바로 위를 향했다. 끄트머리가 따끔하게 표피를 긁는다.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여기서 약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

경준이 눈썹을 내렸다.

“남들은 없어서 못 하는데.”

“싫어. 제발, 경준아. 싫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껄떡거리며 말한다.

다섯 달. 이번이 최장 기록이다. 다섯 달 동안 저것 없이 지냈다.

대장이 죽고, 약물 중독에서 빠져나오려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전신의 피부가 쥐 이빨에 갉아 먹히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편두통과 이명에 지배받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쉽지 않았다. 경준은 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할 때마다, 팔뚝 혈관에 주삿바늘을 박았으니까. 경준은 절대로 벌이나, 화풀이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늘 그렇듯, 책임은 정윤에게 있었다.

애원해도 소용없다. 경준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정윤은 용서를 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다. 그는 경준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경준은 아량 넘치는 임금처럼 정윤이 바짝 엎드리는 것을, 구걸하며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넣어줘.”

정윤이 말했다.

“지금 넣어줘. 그게 더 좋아. 응?”

정윤이 그의 아랫배에 가랑이를 비비기 시작했다. 쿠퍼액이 질질 흐르던 그곳은 아직도 팽팽하게 부어 있었다. 경준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는 필사적으로 허리를 달싹거렸다. 목덜미를 감싸 안고 뺨에 입을 맞추다가, 바지를 끌어 내려 버릇이 덜 든 짐승처럼 음란하게 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인두로 지진 자국 위, 상스러운 글자를 강조하듯 손가락이 아른거렸다. 결실이 있었다. 목에 닿았던 바늘이 떨어지고, 경준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귀엽다니까.”

턱을 잡아 올리며, 경준이 속삭였다. 정윤은 입맞춤을 기다리며 입을 벌렸다.

***

초인종 소리에, 경준은 기분 좋은 꿈에서 깨어났다. 이불에서 나오자 한기가 들었고, 방 안은 어느덧 어둑했다. 마룻바닥 위는 기우는 해에서 쏟아진 붉은빛에 물들었다. 알몸의 정윤은 아기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짧게 친 머리카락을 쓸었다가, 경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한 인물이었다. 회계사 최진영. 초로의 나이에 가르마를 해서 머리를 넘겼고, 넥타이 취향이 끔찍하다. 일 처리는 선임자에 조금 못 미쳤지만, 그처럼 욕심이 많지 않으면서 도덕관념이 희박한 균형 잡힌 인재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경준은 그가 좋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네요.”

회계사는 말을 끌지 않았다. 그가 파일을 건넸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 경준이 직접 연락해 부탁한 자료였다. 지난 세 달간의 물량 유통, 수익, 대포 통장 관리 이력까지. 태국에 있는 동안에는 손을 놓았지만, 긴 휴가는 이제 끝이다.

서너 장을 넌지시 훑다가, 경준이 고개를 들었다.

“숫자가 안 맞네요?”

회계사는 각오가 된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뭘 빠트린 거 아니에요?”

“수익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현찰도 제 눈앞에서 세어봤고요. 다만 세탁하기 이전 단계에서 교묘하게 액수가 증발하고 있습니다.”

경준이 입술을 핥았다.

“그건 간부들 담당인데.”

“그렇습니다.”

“짐작 가는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청소를 했는데….”

경준이 장부를 흔들었다.

“아직도 쥐새끼가 남아 있을까?”

회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준은 이해했다. 회계사는 돈세탁을 하고 액수를 받아 적으면서 짬이 날 때 세무청 직원들 엿 먹일 방법이나 궁리하는 존재다. 전쟁을 선포하는 건 그의 일이 아니다.

언더보스가 할 일이지.

***

세 개비째.

반도 타들어가지 않은 담배를 던져버리고, 행동대장 박성수가 목덜미를 슬슬 주물렀다. 진환은 그를 보지도 않으며 라이터를 내밀었다. 리듬감 있게 부싯돌이 긁히고, 새로 문 담배에 불이 붙는다. 뿌연 날숨이 새벽하늘 위로 흩어졌다.

“일찍부터 사람 불러놓고 좀 늦으신다, 그래.”

박성수가 말했다.

진환은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삼십 분이 넘도록 박성수와 단둘이서 번드르르한 인간들이 드나드는 골목에 나란히 서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긴 하다.

“한 일주일은 쉬실 줄 알았더만. 바로 간부 회의를 소집하시고.”

“회장님 때문에 마음이 급하신 모양입니다.”

“왜 안 그러겠냐. 나도 잠이 안 오는데.”

머리를 고불고불하게 볶은 아주머니 한 명이 안쓰러울 정도로 쳐다보지 않는 시늉을 하며 지나갔다. 벤츠에 두 떡대가 기대고 서 있으니 이상할 만도 하지. 박성수가 손을 흔들자, 아주머니가 번쩍 뛰어오르며 역력하게 가려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거슬러 걸어갔다. 박성수는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속내가 훤히 보이는 소리였다. 박성수는 누가 봐도 양아치 새끼처럼 생겼고, 그 사실을 가장 즐기는 건 박성수 본인이다.

멧비둘기가 운다. 담배 개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라이터 가스가 남아나질 않겠다고 생각할 즈음, 정문에서 언더보스가 걸어 나왔다. 재킷 없는 셔츠 차림에 낯빛이 좋았다. 정윤도 함께였다. 밝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언더보스의 바로 뒤에 선 그는 그림자 같았다.

“미안해요. 좀 늦었죠?”

“아이고,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형님. 어디 좀, 푹 주무셨습니까?”

박성수의 표정이 경극에서 가면이 벗겨질 때처럼 바뀌었다. 진환은 문을 열고 언더보스와 정윤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정윤이 거대한 몸집을 욱여넣는 것을 보며, 진환이 미소 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정윤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고개가 움직이려는 것 같았지만, 그 시선이 진환을 마주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혼잣말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형님 아닌데.”

무슨 뜻이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야, 운전 시작 안 하냐! 너 사람 새끼냐, 굼벵이 새끼냐. 빠져가지고….”

박성수가 게거품을 문다.

진환은 문을 닫고 돌아섰다. 멧비둘기가 울음을 멈추고, 언더보스를 태운 차는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기자기한 주택가와 낯빛 좋게 웃는 선남선녀들이 드문드문 사라진다. 휘어지는 도로를 따라 간부 회의가 열릴 예정인 회장으로 향했다. 회장은 영등포 외각에 위치한 팔 층짜리 빌딩으로, 김 회장과 그 따까리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기도 했다. 김 회장이 쓰러진 지금은 아무도 안 쓰는 건물이었지만.

회장 입구에 다가가자 들어찬 검은 인파가 눈에 들어온다. 벤츠 문짝 사이로 언더보스의 넓적다리가 나오는 순간부터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일사불란하게 그를 맞이했다. 이렇게 많은 조직원이 한자리에 모인 건 처음 봤다. 뼈 좀 담갔다 자신하는 진환도 긴장이 되는 광경이었으나, 언더보스는 아침 산책이라도 하듯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을 뿐이었다.

회의 장소는 오 층. 층수가 올라가자 점점 더 어깨가 넓은 조직원들이 자리를 잡고, 오래 본 얼굴들이 늘어난다.

컨퍼런스 룸으로 들어가기 직전, 박성수가 따라 들어가려는 진환의 어깨를 눌렀다.

“어허, 이 새끼가, 근데.”

진환은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뒷짐을 졌다.

“대기하겠습니다, 형님.”

“그래야지.”

침을 뱉고, 박성수는 곧바로 돌아서 언더보스의 뒤를 따랐다. 진환은 크게 눈을 굴리고 벽에 등을 기댔다. 하긴, 내가 저 안에 들어갈 짬밥은 아니지.

사실상 하나 마나 한 회의였다. 박경준은 김 회장의 후계자였다. 김 회장이 죽고 나면 ‘법적으로’ 보스 자리는 그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가 태국으로 피신 간 동안 뒷정리를 하느라 애 좀 먹은 김 영감이 반론을 제시할지도 모르지만, 저들도 살고 싶으면 조용히 있는 게 낫다는 걸 알 터였다.

박성수에게는 잭팟이다. 그는 진환이 들어오기 전부터 언더보스 라인을 타고 있었다. 이제는 적성에 맞지도 않은 현장직에서 은퇴하고, 부수입이 빵빵하게 들어오는 타이틀 하나 걸치며 여생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진환은 그 시나리오가 싫지 않았다. 이 정도로 똥구멍을 빨아줬으니, 콩고물 정도는 떨궈주겠지.

아, 담배 말린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누군가 컨퍼런스 룸 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정윤이었다. 그는 솜씨 나쁜 도둑처럼 기척을 내지 않으려 기어 나오다가 발을 헛딛고, 한바탕 뒤뚱거린 후에야 벽에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러고는 피로감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쉰다. 그 모습에, 진환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한 대 피우시겠습니까?”

꼬리가 축 처진 눈두덩이가 널찍하게 벌어졌다. 정윤이 눈을 굴려 진환을 마주 보았다. 진환은 목례하며 담뱃갑을 흔들었다. 개비 하나가 시원하게 뽑혀 나왔다. 정윤은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멘톨 안 피우십니까?”

“아니.”

대화가 끊어졌다. 진환은 정윤의 안색을 살폈다. 무뚝뚝한 생김새에 비해, 표정을 읽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귀찮아하는 기색은 없다. 조금만 더 밀어붙여도 될까? 이러다 뒈지게 두들겨 맞으면 어쩌지?

튀어나온 개비를 손으로 지그시 눌러 담고, 진환은 목에 뭉친 가래를 꿀꺽 삼켰다.

“태국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반응이 없다가, 정윤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이사님은 얼마나 알고 지내셨습니까?”

“삼 년.”

“와, 그럼 뭐, 거기서 쭉 모신 겁니까?”

“아마도.”

“태국은 일하기 좀 어떻습니까? 애들 안 사납습니까?”

삐걱거리듯, 정윤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진환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정윤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보이지 않았다. 정윤이 입을 열었다.

“더워.”

침묵이 돌아온다. 온몸에 힘이 빠지며 정전기처럼 서늘한 소름이 찾아왔다. 한 대 맞는 줄 알았네. 무심결에 담뱃갑을 내려다보니, 힘을 주어 잡은 탓에 가운데가 움푹 패었다. 진환은 구겨진 담뱃갑을 집어넣었다. 정윤은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진환은 문득, 정윤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번들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정윤이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의자 가져오겠습니다.”

“괜찮아.”

딱 잘라 말하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답답해서 그래.”

진환은 정윤과, 정윤이 빠져나온 길쭉한 붉은 문을 번갈아 쳐다봤다. 삼 년이나 언더보스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해도, 태국에서 일했으면 이런 자리에는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한 사람 같으니, 모종의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진환은 다시 정윤을 살펴보았다. 그는 땀이 맺힌 이마를 팔뚝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잠깐 바깥 공기 좀 쐬시겠습니까?”

정윤이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다물린 입매가 미세하게 우물거렸다. 진환이 말을 무르려 하기 직전, 그가 되물었다.

“어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경준이 말했다. 테이블의 맨 끝에 앉은 그는 정중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다음 주에 이사회의 소집하고, 더 지체되기 전에 절차 밟죠. 회장 자리 너무 오래 비우면 안 되니까.”

“삼 년간 놀고먹은 놈이.”

경준은 말을 멈추고 사선으로 눈길을 던졌다. 왼편, 그에게서 두 자리가 떨어진 곳. 김 영감이었다. 이마가 반 이상 벗겨지기 직전인데도 젊은 놈들이나 입는 슈트를 입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을 구태여 변명하거나 감추지 않았다. 그럴 기회를 줄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경준은 마음 편하게 말을 이었다.

“김 이사님, 최근에 강남에 사업 하나 시작하셨죠?”

김 영감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럽 이름이 뭐였더라… 블랙웨일이던가. 맞나요? 아, 또. 인상 펴세요. 걱정이 돼서 묻는 거예요. 걱정돼서. 어제 잠깐 거기 장부를 봤는데, 들어간 돈이 자꾸, 앞자리 뒷자리가 안 맞길래.”

삐걱이는 소리가 울린다. 경준은 회의장 안을 훑었다. 붉어진 김 영감의 머리통 뒤, 밖으로 나서는 정윤이 보였다. 정윤은 갈등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준은 구태여 그를 붙잡지 않고, 김 영감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인사 개편도 한번 하죠. 아무래도 자리가 적성에 안 맞는 분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럴 때일수록 돌보면서 지내야죠, 식구끼리.”

경준이 미소 지었다.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정윤은 기운을 되찾았다.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멍청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는 게 대야에 담근 건미역이 물을 머금어 매끈매끈하게 돌아오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심호흡을 하고, 정윤이 말했다.

“고마워.”

진심이 느껴졌다. 진환은 작게 미소 지었다.

건물 옆, 주차장 옆으로 손바닥만 한 화단 앞에 칠이 다 벗겨진 벤치가 보였다. 정윤은 거기에 앉았다. 진환은 서 있겠다고 고집했지만 정윤이 따라서 일어서자 버틸 수가 없었다.

“혹시 폐소공포증이나, 뭐 그런 거 있으십니까?”

농담 삼아서 던진 말이었지만, 정윤은 웃지 않았다.

“…모르겠어.”

그가 투박한 손을 연신 문질러댔다.

“갑자기 어지러워졌어.”

“태국에서는 이런 거 잘 안 했죠?”

“응.”

“현장에서 일하셨습니까?”

“가끔은.”

정윤이 얼굴을 쓸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뺨에 패인 흉터가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칼자국이다. 넓은 날로 찢어진 후 서툴게 아문 자국. 꿰매지도 않은 모양이다.

“지압 같은 거 하십니까?”

눈을 깜빡이다가, 정윤이 되물었다.

“지압?”

“딱 맞는 혈 자리를 알아서 말입니다. 손 주시겠습니까?”

정윤이 거북이가 걷는 것처럼 느릿느릿 손을 들어 올렸다. 진환은 냉큼 그 손바닥을 움켜쥐었다. 더는 정윤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잘게 웃음을 머금고, 진환이 약지와 손바닥 사이에 패인 부분을 눌렀다.

“여기, 여기가 소부혈이라고, 긴장 푸는 데에 되게 좋습니다. 보세요. 이, 뭐, 자갈 든 것처럼 딱딱하잖습니까.”

사실, 정윤의 손바닥은 모든 부분이 딱딱했다. 특히 손바닥 바깥쪽에는 발꿈치처럼 굳은살이 박여 거슬거슬할 정도였다.

진환이 손바닥을 주물럭거리는 동안, 정윤은 멀겋게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이네.”

그가 말했다.

“편해졌어. 가슴도 천천히 뛰고….”

“그렇죠? 이래 봬도 우리 형님이 한의원에서 일했거든요.”

“그 아저씨가?”

“아, 성수 형님 말고요. 친형 말입니다. 친형.”

“의사야?”

“아뇨.”

진환이 말했다.

“감방에 있습니다. 사람 죽이고.”

손을 놓는다. 정윤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다, 지그시 진환을 응시했다. 대꾸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정윤이 어떤 말을 할지는 궁금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여기 있었네요.”

언더보스 박경준.

그사이 회의를 마무리 지은 모양이다. 그는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진환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뒤에서 박성수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목탁 소리가 나도록 진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너 이 새끼, 대기하랬더니 농땡이를 쳐?”

“죄송합니다, 형님.”

“너 요즘 왜 이렇게 빠졌냐. 웃겨? 인생이 환상특급 같아, 어?!”

“그 정도로 해요, 박 상무.”

박성수의 주먹이 코 바로 앞에서 멈추며, 오싹한 바람이 눈동자로 불어 들어왔다. 언더보스가 다가왔다. 그의 시선이 벤치에 앉은 정윤에게 향했다. 불시에, 경준이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정윤은 잠자코 경준의 손짓에 따라 머리를 좌우로 움직였다.

“멀쩡하네요.”

“…응.”

“왜 나간 거예요? 말도 없이.”

정윤은 입을 다물었다.

날 선 마찰음이 울렸다. 따귀를 친 손을 허공에 털고, 언더보스는 우아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가 진환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정윤이를 돌봐줘서. 많이 불편했죠?”

정윤은 돌아간 뺨을 제자리에 돌릴 생각도 않고, 멍하니 바닥을 쳐다봤다. 고장 난 것처럼. 본능적으로, 진환은 더 깊게 조아렸다.

“아닙니다, 형님!”

“착하네.”

언더보스가 머리 위에서 말했다. 그림자가 가깝게 드리워졌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그가 진환의 귓가에 속삭였다. 진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올렸다. 그러나 박경준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박성수가 등짝을 때렸을 때였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얼얼한 등짝을 안고 허리를 세우자 언더보스와 정윤이 멀찍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새꺄. 덜떨어져 가지고.”

속으로 중지를 세워준다.

“예, 형님.”

“가자. 경준 형님이 구역 한번 봐달라고 하셨다. 그, 청소 한번 하실 생각인 게지.”

군말 없이 박성수의 옆에 붙어 걷는다. 차에 다가갔을 무렵 박성수가 입을 열었다.

“…형님이 뭐라고 하셨냐.”

진환은 짧은 틈을 타 박성수를 관찰했다. 그는 안쓰러울 만큼 신경 쓰지 않는 티를 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아, 그거 말입니다.”

깍듯하게 차 문을 열며, 진환이 대답했다.

“수고했다고 하셨습니다.”

***

신호가 바뀐다. 그사이를 기다리지 못하고 김 이사의 호통이 이어졌다.

“뭐 해, 밟지 않고.”

운전사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김부광 이사는 헛기침을 하고 가슴을 내밀었다. 회의가 끝난 순간부터 그는 심기가 좋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고, 입술은 잘근잘근 씹는다. 그리고 강박적으로 휴대폰을 만졌다. 기다리는 전화가 있는 사람 같기도, 보내야 하는 소식을 미루는 사람 같기도 했다. 운전대를 잡은 깍두기를 슬슬 응시했다가, 김 이사가 전화를 들었다.

“강 마담. 아, 왜 전화를 안 받아, 그래! 이거 들으면 바로 짐 싸서, 항구에서 나 기다리라고. 돈은 내가 가져갈 테니까. 그리고 아무하고도 말 섞지 마. 알겠어?”

김 이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휴대폰이 손에서 미끄러진다. 김 이사가 소리 질렀다.

“이 육시럴 놈이, 운전 하나 똑바로 못 해?!”

“죄송합니다, 형님. 갑자기 우회전이 하나 끼어들어서….”

몇 마디의 욕설을 더 뱉으며, 김 이사는 떨어진 휴대폰을 찾았다. 앞좌석 밑으로 어슴푸레 빛나는 휴대폰 화면에 음성 메시지로 넘어간 것이 보였다. 김 이사는 혀를 차고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짤막한 비명 소리와 함께 좁은 차내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핸들에 맞댄 운전사의 관자놀이에 검붉은 구멍이 패었다. 그는 조수석 쪽으로 고꾸라졌다.

김 이사는 귀를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겁이 나면 땅속에 머리를 묻는다는 타조가 떠올랐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뾰족한 이명이 울렸다. 모빌 위에 올라탄 것처럼 세상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등 뒤로 차 문이 열리고, 다리를 횡단하는 타이어 행렬이 윙윙거리며 들이닥친다. 누군가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김 이사는 끌려 나갔다. 노란색 어린이 영어 학원 마크가 찍힌 봉고차 한 대, 그리고 소음기를 장착한 권총을 든 장정 하나가 그를 기다렸다.

김 이사는 부글거리는 배 속을 잠재우고자 외쳤다.

“너 이 새끼들, 이러고도 사지 멀쩡하게-.”

뺨이 당겼다. 입술이 마비되고, 머리통에 잡아 뜯는 통증이 일었다. 부욱, 테이프를 감는 손이 눈앞에서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동심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손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

물론, 언더보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일곱 시에 집으로 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양주 한잔 대접하고 싶으니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진환은 그 그림, 언더보스와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그 끝내주는 그림에 박성수가 끼어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경쟁 상대로 찍혀 미운털이 박히는 건 더더욱 사양이었다.

진환은 한 번 더 바지 안에 셔츠가 단정하게 들어갔는지, 손바닥이 기분 나쁘게 땀으로 젖지는 않았는지 확인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그가 초인종을 눌렀다. 언더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려 있어요.”

수류탄 손잡이를 쥐듯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내리니 거짓말처럼 현관문이 움직였다.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진환이 발을 디뎠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대한 공간이 아깝게, 가구라고는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와 동그란 유리 테이블이 전부였다. 벽처럼 자리 잡은 거대한 유리창 아래에는 붉은빛에 젖은 지붕과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지는 차들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 무언가가 반짝였다. 얼음이다. 다이아몬드처럼 세공된 유리잔 속, 떡갈나무 색 양주에 잠긴 얼음. 공백 위에 놓인 그것은 너무나 두드러져, 진환은 자기도 모르게 잔을 움켜쥘 뻔했다.

방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잔 위에 머물던 손이 멈칫하고, 진환이 고개를 세웠다.

“형님? 거기 계십니까?”

목소리였다. 말소리가 섞여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다투는 것 같았다. 진환은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

분명히 방 안에서 들려온다. 진환은 가볍게 문을 밀쳤다. 현관문처럼,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간단하게 문이 뒤로 밀려 나갔다. 모던한 회색 시트가 덮인 침대 모서리, 거실과 마찬가지로 벽면을 통째로 차지한 유리창이 보였다.

“왔어요?”

언더보스 박경준이 말했다.

“잔 들어요. 밖에 뒀으니까. 내가 지금, 보시다시피,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박경준은 멀쩡한 두 손을 흔들었다. 언더보스의 미소 지은 얼굴이 반쪽뿐이었다. 나머지 반은 등짝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얇은 티셔츠를 입은 등짝. 단순한 동물처럼 씩씩 숨을 몰아쉬는 등짝. 꿈틀거리는 등짝. 아래로 볼기를 드러낸 등짝.

박히고 있는 등짝.

“보지 마!”

정윤이 소리쳤다.

진환은 뒷걸음질을 치다, 문지방에 다리가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온몸의 땀샘이 열린 것처럼 피부 곳곳이 저릿저릿했다. 고개를 틀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입을 벌리고 코앞의 장면을 목격했다. 그 역겨운 장면을.

팽팽하게 한계까지 벌려진 엉덩이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허벅지가 들리고 둔부가 치들릴 때마다 충혈되어 선홍색으로 부푼 입구가 움찔거리며 새까만 좆을 빨아올리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입구는 핏줄이 생생하게 선 단단하고 두꺼운 물건을 아무런 가감도 없이 삼켰다가 뱉으며 들썩거렸다.

아랫배에 문대어지는 그의 성기는 이미 붉게 단단해진 데다, 거리를 두고서도 배 위가 번들거리는 것이 보일 정도로 쿠퍼액을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야릇한 영상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질러대는 소리에서는 아까의 절제되어 있고, 금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박경준은 멈출 줄을 모르고 위아래로 쿵쿵거리며 구멍 안에 귀두를 비볐다. 자지가 들어가는 순간마다 정윤이 턱을 젖히고 목 울림이 섞인 날숨을 뱉었다.

“정윤이가 그냥 하는 말이에요. 곧이듣지 말아요.”

박경준이 웃었다. 안경을 벗어 곱상한 얼굴이 또렷하게 도드라졌다. 창놈처럼 녹아내린 정윤에 비해,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단정했다.

“이 새끼가, 변태라.”

그가 둔부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 탓에 발버둥 치려던 몸짓이 오히려 안쪽에서 비틀린 각도로 내장을 긁는 꼴이 되어, 그는 다시 튀어 올라 남자의 목을 감싸 안았다. 경준은 둔부를 고정한 채로 허리를 치켜올렸다. 지금껏 반 정도만 들락거렸던 내부에 꼿꼿하게 선 물건이 단번에 끝까지 파고들었다.

정윤이 턱을 치켜들었다. 비명 같은 교성조차 흘리지 못했다. 숨도 쉬지 못하는 듯 입술이 뻐끔거릴 따름이었다. 뺨 위에 눈물이 흘렀다. 그가 자리에 무너졌다. 경준의 목에 둘렀던 팔이 침대 위로 떨어지고, 그는 시퍼렇게 눈을 뜬 채로 어깨에 이마를 댄 채 간간이 흐느꼈다.

“보지 마. 제발….”

“봐요.”

경준이 정윤의 아랫배를 길게 문지르고 손가락을 빼 올렸다. 반투명한 체액이 끈적하게 묻어 나왔다.

“박기만 해도 싸버리지.”

열기와 땀, 눈물이 뒤엉켜 엉망이 된 정윤의 뺨에서 핏기가 가셨다. 사정을 하자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 탓이었다. 정윤은 고개를 들 줄 모르다, 숨을 곳을 찾듯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경준이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언더보스 박경준이 게이 새끼였어?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박성수도 그런 소리는 일언반구 없었다. 몰랐던 건가? 아니면 감춘 건가?

나는 왜, 씨발. 진환이 고개를 숙였다. 왜 발기했지?

“태국에서 찾았어요.”

경준이 정윤의 머리를 눌렀다. 억지로 어깨에 턱을 댄 자세가 되어서도, 정윤은 내장에 좆대가리 닿는 것을 더 느껴보겠다는 듯이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어릴 때 한국에서 팔려 왔다는데, 거의 평생 이 짓을 하면서 살았다더라고요. 박히고, 보채고, 약도 하고.”

“그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만나자마자 좆을 빨아주더라니까. 살려달라고 그랬죠? 상해 놈들이 배를 갈라놓으려는 걸, 내가 비싼 돈 주고 달래 줬잖아.”

“그만해!”

정윤이 소리쳤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진환을 돌아보았다가, 바닥으로 떨궈졌다.

“…제발.”

눈물이 날 정도로 가녀린 반항에도, 경준은 잔인하게 응대했다. 경준이 그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정윤은 울컥 쏟아지려는 신음을 집어삼켰다. 그사이에조차 묘한 열락이 깃들어 있었다.

“소개해주는 거예요. 둘이 친하게 지냈으면 하니까. 한식구잖아.”

흐느낌을 참는 끅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놓고, 정윤이 골반을 퉁기기 시작했다. 들썩거리던 허리가 멈칫하며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정윤의 양팔이 경준의 목덜미를 감았다.

“정윤이가 펠라티오하는 거, 못 봤죠?”

정윤이 어금니를 물고 목 막힌 듯한 교성을 집어삼켰다. 한바탕 비명을 지른 탓에 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듣기에 딱할 정도로 갈라졌다. 한번 가버린 물건은 축 늘어져 남자의 아랫배 위에 덜렁거리는 듯하다, 몇 번의 추삽이 더해지자 금세 꼿꼿하게 돌아왔다. 그의 온몸이 좆을 받아들여 기쁘다고 요동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중에 부탁해봐요. 딥스롯이라고 알아요? 목구멍 안쪽으로 좆대가리가 들어가는데-.”

사타구니를 치켜올리며 그의 아래를 가를 때마다 정윤은 자지러지며 시트를 움켜잡았다. 구부러진 다리는 이미 힘이 빠졌는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따라 휘둘릴 뿐이었다. 볼기를 때리자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외설적인 비음이 섞여 나왔다. 남자의 눈가가 즐겁다는 듯이 휘어지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개 같거든.”

정윤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금방이라도 목에 맬 밧줄을 찾아 나설 듯한 절망이.

경준이 회음부를 단단히 움켜쥐어 아래로 눌렀다. 아랫배를 둔부에 맞춘 채로 허리를 뭉근하게 돌려댔다.

입술을 깨물었던 것도 잊고, 정윤이 반사적으로 외마디로 된 교성을 뱉었다. 그곳을 노리며 집요하게 비벼댔을 뿐만 아니라, 깊숙하게 들어간 그것은 닿기만 해도 정신이 휘어잡힐 듯이 연약한 장의 끄트머리를 사정없이 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발하는 듯한 자극이 부족해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몸을 비틀고 소리를 질러도 빠져나가질 못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그가 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발작처럼 몸통이 꿈틀거릴 때마다, 두 손이 장골을 지긋하게 눌렀다. 가게 해달라는 말이 무의미하게 허공에 맴돌았다. 경준은 쾌감에 질식된 듯 보이는 정윤이 미쳐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미안해. 제발, 제발….”

“좋으면서.”

“싫어. 가고 싶어. 싫어, 싫어….”

그 정도의 고문으로도 성이 한참 차지 않는 모양이다. 허리를 감싸 누른 채, 경준이 등줄기에 검지를 대고 쓸어내렸다. 비명 같은 교성이 터져 나오며 정윤이 허리를 뒤로 젖혔다. 벌어졌던 입술은 다시 악물어지고, 턱과 미간에 울음을 참는 주름이 잡혔다. 꾹 감은 눈이 가늘게 떠질 때면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터지지 못한 날것의 욕정을 드러내며 잘게 떨렸다.

경준이 다시 손가락을 들었다. 손끝으로 발가락이 희게 될 때까지 웅크린 발바닥 위를 간질였다. 껄떡이는 숨결이 더해졌다. 경준은 곧 피가 몰려 음란하게 선 유두 위에 손마디를 가져다 댔다. 피어싱이 박힌 유두 위에.

“그만.”

정신을 차리자, 진환은 언더보스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경준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올려보았다. 진환은 수세미인 줄 착각하고 독거미를 쥔 사람처럼 소스라치며 그를 놓았다. 뒈졌다. 진환은 되뇌었다. 씨발, 난 뒈졌다. 그가 말했다.

“…싫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경준의 훑어보는 듯한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진환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아랫배 위로 단단하게 서서 애처롭게 쿠퍼액을 뿜어내는 귀두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저런 모욕을 들으면서, 저런 희롱을 당하면서도 이렇게 꼿꼿하게 서다니.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제 물건에 다시 펄떡거리는 맥박이 느껴졌다.

“섰네요.”

경준이 말했다. 진환이 입술을 깨물었다.

“박아보고 싶죠?”

짓누르고 있던 허벅지를 놓는다. 해방되자마자 정윤은 상을 받은 아이처럼 참지 않고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사내의 목에서 울린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간드러지는 신음을 흘리며, 질척이는 마찰음이 훤하게 들리도록 벌어진 둔부가 오르내렸다.

“이런 건 처음 보잖아. 덩치 큰 사내새끼가, 좆대가리만 넣으면 껄떡거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귀 울음이 점점 더 심해진다. 침대를 남겨두고 방 안이 하얗게 점멸한다.

“궁금하죠? 내가 박아도 저러나? 저런 식으로 앙앙거리나?”

“아닙니다.”

“빌려줄까요?”

“아닙니다.”

“정윤이도 신경 안 쓸걸.”

“아냐….”

“좆이라면 개 자지도 좋아할 놈이니까.”

“닥쳐!”

머릿속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제정신이 아닌 공간에 있다 보니 미친 짓이 전염되는 모양이었다.

진환은 팔을 뻗어, 정윤의 양 뺨을 쥐고 저와 얼굴을 마주 보도록 만들었다.

“…달아나요.”

진환이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있잖아요.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정윤의 눈은 열에 젖어 혼탁하기만 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환은 마음을 다잡았다. 곧 정신을 차릴 것이라 믿었다. 이 모든 건 더러운 악몽으로 끝나고, 침대 위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뜰 거라고. 진환은 간절하게 정윤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뜨거운 정윤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자 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진환이 중얼거렸다.

“대체, 왜….”

입술이 맞닿았다. 정윤이 턱을 내밀어 덮쳐 온 것이었다. 반항할 틈도 없었다. 열에 달아올라 데일 듯한 혓바닥이 파고들어 감미롭게 입 안을 휘저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혀가 입 안을 헤집도록, 음란하게 휘어지며 입 안을 까딱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윤은 한계까지 숨이 막히도록 진환을 얽어맸다가 타액을 머금고, 아쉽다는 듯이 혀를 내밀면서 떨어졌다. 그가 젖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뜻을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던졌다.

“…미안해.”

진환은 멍하게 그를 바라봤다.

현실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악몽의 한가운데, 달아날 길은 없다. 구역질이 났다. 구역질을 했다. 입을 감싸고, 물러섰다가, 돌아서서 달린다.

“벌써 가게요?”

등 뒤로 경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낭이 흔들거리며 살과 매몰차게 부딪혀 거슬리는 마찰음이 방 안 가득히 울렸다. 정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절정이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진환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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