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나는 꿈을 꿔요, 달콤한 꿈을.
엘라 피츠제럴드의 간절한 음성. 후렴부에서 길게 늘어지는 화음과 함께 치켜 올라갔던 사내의 팔이 사그라든 거품 속으로 가라앉았다. 남자의 허벅지 위에는 코드가 꽂힌 전기 토스터가 설거지통에 둥둥 뜬 냄비처럼 반만 귀퉁이를 내밀고 있었다. 목욕물에 탄 로즈메리 향기 사이로 튀겨진 살갗 내음이 난다.
지윤이 벌거벗은 몸 위에 가운을 걸쳤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정윤의 뒤에 서, 그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우린 이제 자유야.”
지윤이 선언했다. 정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앞을 봐. 대장은 죽었어.”
“…그럴 리 없어.”
지윤은 제 쌍둥이 남동생이 짜증 났지만,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윤을 내버려 두고 욕조에 걸터앉아, 손을 샤워 가운으로 감아 조심스럽게 코드를 뽑았다.
“난 중국으로 갈 거야.”
지윤이 옷걸이에 걸쳐 둔 대장의 가운을 뒤적였다. 실크 가운의 주머니에서 시가와 라이터를 꺼내 든 그녀는 끄트머리를 자를 나이프를 찾아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는 사람이 있어. 북경어도 할 줄 알고.”
지윤이 가위처럼 생긴 커터를 찾아내어 시가를 다듬기 시작했다. 그녀가 서툴게 잘린 끄트머리를 허공에 털자 바스러진 담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대장의 축 늘어진 거시기가 담긴 물 위에 둥둥 떴다.
“원한다면 너도 데려가 줄게.”
정윤은 무릎을 꿇고 주먹을 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가 끄트머리에 불이 붙으며 길고 끈덕진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윤은 이슬이 맺힌 타일에 가볍게 머리를 기댔다.
“여기 있으면 넌 죽어.”
지윤이 말했다.
“이제 우두머리가 사라졌으니, 대장의 자랑스러운 오른팔은 새 자리에 오르기 위한 명분이 필요하겠지. 그걸 위해서 잠자리 시중드는 꼭두각시 하나 잡는 것쯤이야. 널 손에 넣고 나면 편하게 죽이지도 않을 거야. 쇼를 만들어야 할 테니까. 손톱을 모조리 뽑아버리겠지. 귀에서 시작해서 코, 불알, 새끼발가락까지 조각낼 거야. 마지막에는 산 채로 네 껍질을 벗겨서 벽에 걸어둘걸.”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발음했고, 어조의 높낮이가 일정했다. 동정심이나 안타까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지막 남은 가족에 쌍둥이 남매였지만, 이곳에 팔려 온 후로는 서로를 당장이라도 인생의 외다리에서 밀쳐버리고 싶은 장애물, 혹은 그림자만 보아도 소스라치게 증오스러운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게 됐다. 대장이 그의 영혼에 암 덩어리처럼 새긴 수많은 작품 중 하나였다. 그는 송곳처럼 살을 파고들어 본질부터 두 사람을 뒤틀어 놓았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지윤이 이 정도로 그를 염려하는 것도 놀라웠다.
정윤은 다시 도리질을 했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
지윤은 불이 붙은 시가를 빨았다가, 곧 잔기침을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상상한 것과 달랐던 모양이다.
“마음대로 해.”
지윤이 반 정도 타오른 시가 꽁초를 욕조에 던졌다. 허벅지까지 가운이 늘어져 있는 늘씬한 다리가 걸어 나가, 욕실로 들어서는 문 앞에 폭신하게 깔린 양털 러그를 밟았다. 올라선 발이 문가 앞에 섰다. 그녀가 돌아보았다.
“내가 만약에.”
지윤의 까만 동공이 정윤의 웅크린 등을 담았다.
“너를 위해서 죽였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거야?”
정윤은 대장이 움직이지 않게 된 이후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그는 제 뺨에 손을 올렸다가, 이마에서부터 입술 위까지 길게 벌어진 상처를 쓸어내렸다. 이마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왼쪽 눈의 속눈썹에 뭉쳐 시야의 반이 벌겋게 흐려졌다. 그는 약에 취해서 칼을 휘두르려던 대장의 모습을, 나이프의 끄트머리가 얼굴의 살가죽을 파헤칠 때의 소스라치는 차가움을 떠올렸다. 대장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외쳤다.
‘앞을 보지 못하게 해주겠어. 네 눈알을 파낼 거야.’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대로 두었다면 정말로 해냈을지도 몰랐다. 정윤은 눈을 깜빡이며 손바닥의 주름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을 응시했다.
“네가 틀렸다고 할 거야.”
정윤이 말했다.
“대장은 죽지 않았으니까.”
지윤이 문을 닫았다. 정윤은 대장과 단둘이 남겨졌다.
정윤은 그 후로 오랫동안 누나를 만나지 못했지만, 내내 그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대장은 죽지 않았다. 그는 죽을 수 없는 존재였다. 바람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상표 나이키를 죽일 수 없는 것처럼. 그는 상징이고, 자연 현상이며, 신이었다. 그가 선사한 욕설, 구타, 성폭행, 강제적인 또는 비강제적인 마약 투여, 이간질, 감금, 굶김, 그리고 찬란하게 빛이 나던, 오늘은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약속하며 아랫배를 쓰다듬던 손길은 뼛속 깊은 곳에 머물다 땀샘 사이로 새어 나오며,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정윤의 주변을 맴돌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