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8)

#에필로그 - 만개(滿開)한 계절

꽃이 만발한 계절에 푸릇한 새싹이 틀 때면 어김없이 까탈스러웠던 대기업 사장도 별수 없이 마당에 싹을 틔운 식물들을 돌봤다.

올해는 아내가 재작년 새로 심은 복숭아 나무에 작은 싹이 텄다. 철이 덜 든 사고뭉치 아들놈과 매번 수정 씨, 달링, 하며 사랑을 속삭였던 아내가 성심껏 돌본 아름다운 결과물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이 서울로 돌아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자신은 점차 일선에서 물러나는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부쩍 노후에 대한 계획을 세우곤 했다. 아내와 해변가에 작은 카페를 내고 그 앞을 아내가 좋아하는 꽃밭을 크게 내어 화원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잘 어울리는 푸른색. 하얀 거품을 머금은 파도가 연상되는 흰색을 곁들여 벽화도 그릴 생각에 늙은 사람 마음도 두근댔다.

유명한 사람을 고용해서 멋스럽게 디자인을 해 볼까도 고민했지만 아내가 한 말 때문에 꼼꼼히 계획했던 일들을 전부 다 엎어 버렸다.

‘여보 그냥 직접 칠해 봐요. 그건 그거대로 어설퍼서 좋잖아요? 완벽할 필요가 뭐 있겠어요. 우리 둘만 행복하면 되잖아요. 그것이 인생 사는 재미인걸요.’

“역시 혜안이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택했지.”

나이가 들어 주름져도 멋스러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올해로 눈가 주름 하나가 더 늘었다고 속상해했던 아내가 떠올라서 곧 웃음기를 거두었지만.

“날이 많이 풀렸어.”

바람이 불었다. 얼마 전 지나가 버린 매서운 바람과는 사뭇 다른 산들바람이었다. 올해는 사업은 자신보다 잘나가는 아들놈에게 맡겨 두고 아내와 놀러 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혼자서 아주 태평해 보이시네요, 아버지.”

“하민이냐.”

“네. 그간 건강하셨어요?”

안부를 묻는 말에 몸을 돌려 아들을 바라봤다. 이젠 제법 슈트 차림이 잘 어울리는 자태에 만족스러웠다. 저 녀석이 후계자로 올랐던 것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니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래, 어쩐 일로 들렀어.”

“이젠 저희 관계 인정 좀 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요?”

“갑자기 와선 그게 뭔 말이냐.”

“도윤 형과 저요. 일부러 형한테 이래라저래라 딴지 걸지 말라는 소리예요. 오늘만 해도 그래요. 왜 형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에요? 저보다도 착실한 사람이잖아요. 저번에 소개해 줬을 땐 어머니보다 더 좋아하셔 놓고선.”

“크흠.”

자신과 아내가 낳은 아들이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생김새는 똑같아도 성격은 아내와 털끝도 닮지 않아 애석했다. 아내를 빼다 박은 것이 외형뿐으로 그치지 않고 성격도 닮았다면 더더욱 살갑게 대할 수 있을 터인데 말이다.

종종 아들을 보면 비슷한 부류끼리 밀어 내는 동족 혐오가 생기는 듯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투덜거리고 고집을 부리는 것 또한 자신을 닮지 않았는가? 이런 것은 닮지 않아도 되는 부분인데도 어쩜 저리 똑 닮았을지 아이러니하고도 달갑지 않은 부분이었다.

“아버지. 저 이번 호텔 사업도 거의 막바지잖아요. 이제 그만 인정하세요.”

“무얼 말이냐.”

“이 호텔 사업 제가 아닌 도윤 형이 성사시킨 것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못난 아들 옆에서 잘 보좌하고 있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못쓰죠.”

“그래도 이놈 시끼가!”

촤아악- 하늘 위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화가 나서 몸을 확 돌린 덕에 물을 주고 있던 호수가 이리저리 날뛰며 사방으로 물이 흩뿌렸다. 먼발치에서 투덜거리던 사람한테도 닿을 정도의 강한 수압이었는지 잘 세팅된 머리가 축 처진 채 자신을 노려보는 아들이 보였다.

“아버지? 저 다음 스케줄 있는데요.”

“그래서!”

“하아- 대체 이 꼴로 어떻게 스케줄을 가요?”

“크흠. 뭐 편한 차림으로 가면 되는 게 아니냐.”

“무슨 소리세요. 어떻게 그래요?”

“다 방법이 있어.”

“네? 무슨 방법이요.”

하민이 말하는 스케줄은 제주도 호텔 사업 일부로 제주도 답사를 하는 일이었다. 계약과 더불어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긴 했으나 잠깐이나마 여행을 즐길 만한, 아주 약간의 시간적인 여유는 있는 일정이었다.

그토록 아들이 바라는데 아버지가 된 도리로서 못해 줄 건 없었다. 미친놈처럼 그 베타 놈이 좋다는데 어쩌겠나 싶기도 했다. 여태껏 지켜본 결과 하민이 그 베타 놈을 데려와서 동거를 한 이후론 사고 한번 치지 않고 철이 들었으니 자신에겐 그 베타 놈이 복덩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래도 알파라면 오메가를 만났으면 했는데…….

돈이 이리 많다 한들 사람의 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건실한 놈이긴 하지. 오메가였으면 애 다섯은 낳을 수 있을 체격인데…… 수정 씨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은 버리라곤 했지만 역시 아쉽긴 아쉬워.’

도윤의 첫인상은 굉장히 무뚝뚝했다. 커다란 돌덩이를 세워 둔 것처럼 이목구비 자체가 딱딱하고 위화감이 드는 인상이었다. 그런 그가 제 아들과 있을 때면 표정이 눈 녹듯 누그러졌다. 한없이 부드럽고 밝은 표정을 했던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마음이 동요되었고 꼬투리를 잡을 명분은 베타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허나 그것도 하민의 어머니였던 제 아내가 결식아동과 고아원 단체 설립을 시행하며 판도가 바뀌었다. 아이가 필요하면 부모가 필요한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입양하면 되지 않겠냐는 말로 설득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베타 놈이 혼자서도 여러 명 거뜬히 키울 재목이긴 하지.’

몸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고 있는 아들을 바라봤다. 참 누구 아들인진 몰라도 물에 쫄딱 젖은 생쥐 꼴이어도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어번 헛기침을 하다가 제주도 사업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그 베타- 아니지. 우도윤 그놈이랑 같이 가서 제주도 좀 여행하고 그러면 되잖느냐. 일정은 이쪽에서 하루는 미뤄 주면 되니 오늘 밤 비행기로 바로 출발하도록 해.”

“그게 뭔… 네? 진심이세요?”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썩 꺼져, 이놈아!”

“아버지……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셨어요?”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아들놈 얼굴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투영되었다. 꽃이 만발한 장소에서 어여쁜 얼굴을 한 채 강단 있게 말하는 그 사람이.

저놈은 아내의 아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 아들이 분명했다. 저리 반반씩 고루 섞여 나왔는데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변명이라도 해 보려고 하면 어김없이 변명할 건덕지가 보이지 않기도 했다.

‘별수 있나. 자식이 좋다는데 부모가 포기해야지.’

체념해 버린 아버지가 아들을 묵묵히 그러 봤다. 마음속에 담아서 느꼈던 많은 것들을 끄집어내며 못다 한 이야기를 전했다.

“그놈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하지 않았냐. 내가 수정 씨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놈을 꽃으로 꼬셨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럼 별수 없지. 그 정도로 원한다면야……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잘 알다.”

“…….”

“뭘 그리 얼빠진 표정 하고 있어? 빨리 썩 꺼져!”

손사래를 치며 멍청한 표정을 짓는 아들한테서 등을 보였다. 그런 아버지의 줄어든 등을 보며 하민은 깊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럼 이만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래. 둘이 시작한 사업은 이번에 꼭 성사시켜 봐.”

“네! 아참 그리고요 아버지. 뭔가 착각하신 게 있어서 제가 한마디 좀 해 보겠습니다.”

아들의 말에 아버지가 힐끔 그를 쳐다봤다. 하민은 고르고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짓궃게 말했다.

“제가 마찬가지로 도윤 형을 꽃으로 꼬시긴 했지만 아버지처럼 낯간지럽게 아직도 수정 씨 수정 씨 하면서 연애할 때처럼 그렇게 닭살 부리는 알파는 아니거든요? 일단 제 꿈은 아버지처럼 나이 들어도 사랑꾼이 되는 겁니다. 그건 참 존경하고 있어요. 뭐…… 아버지 사정은 잘 알겠는데 전 아버지처럼 유치한 행동은 못하겠어요.”

“아니 그래도 이놈이!”

“그러니까 앞으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저는 저대로 생각해 주세요. 제 사정도 좀 알아 달라고요. 그럼 가 보겠습니다.”

“허……?”

저 멀리 멀어져 가는 하민의 뒷모습을 아버지는 눈에 담았다. 공격 아닌 공격을 받아 버린 느낌에 찜찜했지만 우습게도 머리가 띵한 나머지 픽 실소가 터졌다.

“당돌한 놈.”

그가 다시 꽃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뻗어 나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하성그룹 회장은 여느 사랑에 빠진 평범한 사람처럼 헤실헤실거렸다.

“내가 그렇게 낯간지럽게 했던가……?”

낯간지럽게 했다 한들 어떤가 싶다. 매 순간마다 진정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면 상대방한테서도 그만큼 받을 수 있었으니까.

그걸 알았기에 제 아들도 자신처럼 꽃을 가져다 바치며 구애하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보고 배운 버릇 남 못 준다고 역시 피는 못 속이는 법이었다.

“놈들 사정이 그렇다면야 계속 함께 두는 게 좋겠지.”

누구나 언젠가는 사랑이 만개하는 날이 찾아온다. 젊은 날에 풋풋한 마음은 물도 잘 주고 잘 가꿔 주면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날 수 있을 시기가 생긴다.

푸릇한 잎이 촉촉해질 때까지 호수는 끊임없이 꽃밭을 향했다. 뻗어 가는 맑은 물을 바라보며 그는 하민의 어머니와 함께했던 옛 기억을 더듬었다.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할 때 향기는 더욱더 진해졌던 지난날을.

사람이란 본디 홀로 지내는 시간 속에서도 또 다른 누군가를 떠올린다. 사랑하는 연인이건 소중한 가족이건 잊을 수 없는 친구건 소중한 무언가를 하나쯤은 떠올릴 무언가가 마음속 한군데에서 존재했다.

“역시 꽃이 좋긴 좋아. 올해도 잘 만발했어.”

그것이 만발하지 못한 볼품없는 꽃 한 송이라고 할지라도 각자의 사랑에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었다.

에필로그 완결

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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