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8)

#우리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이유

재우와 술자리를 가진 뒤 몇 주가 지났다. 하민이 서울로 떠난 지 상당한 시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도윤은 결국 서울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결심이 서자마자 그는 하민에게 먼저 연락을 취했다. 그 전에도 종종 하민에게 톡을 보내 봤지만 묵묵부답이었기에 더 빠른 소통을 위해서 전화를 걸기로 했다.

맨 처음엔 기쁘고 설렌 마음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삐 소리가 나면….

“…….”

하민의 전화기는 먹통이었다. 몇 차례 더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역시나였다. 몇 번이고 연락이 닿질 않으니 설마 내가 부담스러웠을까? 하는 마음이 점차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 혹시나 싶어서 재차 톡도 넣어 보았지만…….

1 오전 11:35 하민 씨. 잘 지내시죠? 저는 일 그만두고 원주 집 정리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려고요.

“안 보시네.”

톡에서 1이라는 숫자는 며칠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도윤은 나중에 연락을 취해 보기로 하고 우선은 당장 해야만 하는 일부터 해 나가기로 했다. 언젠가는 그와 연락이 닿을 거라고, 지금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것뿐이라고 이해하려고 애썼다.

현재로썬 큰맘 먹고 퇴직을 감행한 이상 굳이 강원도 원주에 거주할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재우가 소개시켜 준 경호 전문 업체는 서울에 사무실을 둔 상태였기에 이곳은 이젠 떠나야만 했다. 앞으로의 일을 정한 이상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고, 그는 곧바로 시행으로 옮겼다.

가장 먼저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나름대로 정이 깃든 집이었으나 빌라는 최적의 위치에 자리했기 때문인지 며칠 안에 새로운 입주자가 결정되었다.

두 번째로 필요 없는 짐을 정리했다. 몇 가지는 중고 앱에 싸게 팔아넘기거나 공짜로 올렸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 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도윤은 하민이 손수 만들어 준 향낭은 꼭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잘 보관해서 상자에 담아 두었다.

향낭의 향이 점차 옅어질수록 도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서울로 떠난 이후 그에게서 연락이 전혀 없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허나 이런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세 번째로 시행했던 일의 결과물이 매우 좋았던 까닭이다.

셋째로 그가 한 일은 경호 업체 즉, 경찰경호학과 선배였던 기호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흐르든지 간에 도윤은 하민이 지내는 곳으로 갈 참이었으나 아무래도 전공을 살려서 일을 시작하는 편이 미래를 생각해 보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 예정지가 서울이라는 점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말로 하민과 가까워질 절호의 찬스였으니까.

-도윤아 잘 지냈냐? 당연히 너라면 환영이지. 뭐 팀장직이라도 내어 줘?

“아뇨, 선배. 그냥 자리만 하나 내어 주시면 제가 알아서…….”

-근데 너 집은 구했어?

“아… 집이요?”

-그래.

도윤은 묻는 말에 쉬이 답할 수 없었다. 그랬던 이유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평소 그답지 않게 즉흥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무턱대고 경찰직에서 물러났고 무턱대고 원주 집을 정리했다. 더 나아가선 그저 하민과 더 가깝게 지내고자 하는 마음 하나로 집도 구하지 않고 곧바로 서울행을 감행했다.

기호의 말을 곱씹은 도윤은 자기가 얼마나 대책 없이 일을 벌이고 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말문이 턱 막힌 채로 숨만 쉬던 그에게 기호는 달콤한 말로 믿기 힘든 제안을 내걸었다. 방금 전 했던 고민을 몽땅 타파시켜 줄 정도로 신박한 내용들로만 구성된 일종의 배려였다.

-왜 지낼 곳 없으면 사무실 옆 원룸이라도 내어 줘? 안 그래도 그 원룸 세줄까 생각했거든. 어때?

“가격은요?”

-그냥 보증금 500에 월 35만 내. 원랜 보증금 2000은 걸어야지 35까지 가능한 집이다 너? 이만한 집 구하기 이 일대에선 힘들어.

거절하기 힘든 제안에 도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정말… 그거로 괜찮아요?”

-그래. 대신, 너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가능하지?

“부탁이요?”

-뭐 별거 아냐. 겁낼 필요 없어. 자세한 사항은 서울 올라와서 이야기하자. 톡으로 주소 바로 찍어 줄 테니까 이번 주 안에 가능하지?

“네. 가능해요.”

-오케이! 그럼 결정했다? 오랜만에 보겠네. 그때 보자.

“네 선배. 들어가세요.”

전화가 끝나고 도윤은 중고 앱에다 정리해서 이젠 없는 침대 자리에 털썩 몸을 뉘었다. 너무 쉽게 모든 일이 정리되니까 오히려 이래도 되는 건지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괜찮을까.”

불안한 마음에 도윤이 몸을 태아처럼 웅크렸다. 가뜩이나 둥글고 큰 어깨가 더 둥글게 말려 단단해 보였다.

“역시 날 잊었나.”

하민의 연락은 여전히 없다. 불안하리만큼 없었다. 그가 운영하던 아망떼도 이젠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횡단보도 앞을 지나치면 늘 향긋하게 흐르던 꽃내음도 더 이상은 없었다. 이미 아망떼의 꽃은 다 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일까? 헤어질 당시 언덕에서 괜한 말을 한 건 아닐지 후회도 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 잘난 사람이 별 볼 일 없는 자신에게 좋다고 매달리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인 일이었다.

“하민 씨는 알파잖아. 베타인 내가 뭘 어떻게 해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자책 어린 말을 중얼거리던 도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의 관계에서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가져 본 적이 없었던 기억이다.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너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겪고 나니 제 처지를 간과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곱씹어 본 것뿐이었다.

하민과 지냈던 기간은 결국 사라질 꿈같은 것이라는 걸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는데…….

이젠 더 이상 있지도 않은 행복을 허우적거리며 찾을 때가 아니었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하민은 짐을 풀고 나서 얼마 뒤 아버지 회사로 불려 갔다. 정식으로 후계자 경영 수업 코스를 밟아 가며 차곡차곡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든 지도 어느덧 반년이 다 된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그 누구와도 연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도윤에게 잘 지내고 있다고 연락이라도 넣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상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오해라도 쌓일까 전전긍긍하며 아버지께 도윤의 존재를 어필하고 나섰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처음 하셨던 말이랑 지금 너무 다른 거 아세요? 저한텐 그런 말 한 번도 없으셨잖아요! 어떻게 형하고 연락도 못 하게 만들어요? 대체 왜요!’

‘그럼 군말 없이 미국으로 가거라. 가서 경영 코스라도 빠르게 밟고 와. 네가 우리 가문의 우성 알파라면 그 정도 능력은 보여 줘야지. 사고 치지 않고 얌전히 MBA 과정이라도 밟고 돌아오면 그땐 그 베타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마.’

서울로 불러들였을 때의 약속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조건이라고 악도 써 보았다. 처음부터 이런 말은 전혀 없지 않았냐고 화를 내 보기도 했다. 답답함과 분통함에 어린애처럼 단식 투쟁도 해 봤지만 역시나 먹혀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고 전부 속았다는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민은 홀로 이를 악물며 칼을 갈았다.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워 가며 점점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하면서 이 고난을 이겨 내고자 했다.

하민은 우성 알파답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좋은 성과를 냈다. 고속 승진을 밟아 전무이사 자리까지 오른 시점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마음은 조금씩 풀리는 듯 보였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코피까지 쏟아 가며 무리해서 결과만을 바란 것이 현재 자신의 자리였다.

그렇게 하민이 숨만 쉬며 아버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지 상당히 오랜 기간이 흘렀다. 무려 도윤과 만나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은 지도 반년이 훌쩍 지나 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비로소 오늘, 하민이 숨죽여서 일만 한 대가가 공개되는 날이라는 점이었다.

여태껏 독을 품고 칼을 갈았던 결실을 내보이는 바로 그 시점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이사님.”

“그래요.”

드디어 가벼운 인사치레로 열린 파티장에 첫발을 내디딘 하민이 냉담한 얼굴로 건물 안에 들어섰다.오늘 스케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금 이 파티에 얼굴을 비추며 입바른 소리를 하는 자들을 상대하는 일이었고, 또 다른 자리는 윤하민이라는 존재를 소개하는 자리로써, 당당히 그를 완벽한 후계자로 앞세우고 앞으로의 비전을 공표하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경호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파티장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여러 방송국 기자들이 몰려 이리저리 몸을 치이는 경험을 하니 이곳이 답답한 미국이 아닌 서울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파티장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눈만 몇 번 깜빡한 사이에 하민의 존재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우글우글 몰리기도 했다. 그중, 예전 파티장에서 패드립을 했던 놈들은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벌벌거리며 하민에게 알랑방귀를 뀌기 바빴다.

하민은 우스운 그 알파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철저히 무시해 나갔다. 그렇게 하더라도 예전과는 달리 그를 향해 들려오는 모함이나 욕은 전혀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욕도 마찬가지였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지금의 그는 버러지 같은 알파들을 보더라도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들과 자신은 이제 급부터가 달라진 것을 스스로가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족족 아버지는 하민을 데리고 다니며 앞으로의 사업 확장에 대한 정보들을 줄기차게 늘어놓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숨 막힐 듯한 첫 스케줄이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이후 하민은 옆에서 고지식한 비서의 그다음 스케줄을 들으며 건물 뒤편으로 바삐 빠져나갔다. 일부러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빠진 것이었지만 이미 그곳에도 많은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 상태였다.

‘후우- 여기도 기자들이 쫙 깔렸군.’

골이 아파 올 시점에 날카로운 소리가 하민 쪽으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이사님! KTB 조규재입니다. 하성그룹이 얼마나 성장하게 될지,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기자를 저지한 비서와 그 앞을 가로막은 경호원들이 하민을 둘러싸고 거대한 벽을 새웠다. 그래도 키가 큰 하민을 다 가리진 못했다.

“실례합니다. 이사님께선 다음 스케줄 때문에 답을 하기 어려우십니다. 자세한 건 이다음 회견을 통해서 공개하겠습니다.”

비서의 말 한마디에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민은 이를 무시하며 걸었다. 가까스로 차량에 올라탄 하민이 크게 한숨 쉬며 차창을 살폈다. 언뜻 보아도 모든 언론사에서 싹 모인 듯했다.

예상은 했지만 올해로 우리나라 최대 기업 중 하나로 선정된 아버지의 회사는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 것인가 언론에서 멋대로 토론을 하며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었다.

이 정도로 떠들썩하게 나불거릴 줄이야 하민은 꿈에도 몰랐다. 원주에서 지냈을 당시에도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텔레비전이나 기사는 더욱이 보지 않았던 탓에 알 수 없었다.

원주에서 지냈을 당시 도윤이 자신을 캐묻지 않았던 까닭도 그 또한 텔레비전이나 기사를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그와 딱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뉴스에 관련된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은 없었다. 혹은 윤하민이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 기업과 결부해서 생각하기 힘들었다거나.

‘뭐가 됐든 형이 알아봤자 내 계획이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잡념에 빠진 사이 하민은 두 번째 스케줄을 이행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이 파티장 최상단에 서 있었던 것이다.

이번 스케줄은 방금 전 파티장 때와는 달리 매우 중요했다. 윤하민이라는 존재를 후계자로 공표하는 자리였으니까.

오늘의 하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멀끔하게 차려입고 상단에 선 상태였다. 깔끔하게 잘 다려진 최고급 정장 오른쪽 가슴엔 화려하게 핀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흰색 천을 덧대어 멋스럽게 연출하라는 코디의 말을 무시한 채 도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준 장미꽃을 잘 말려 금가루를 뿌려 둔 드라이플라워 브로치였다. 반년이 지나도록 자신처럼 소중한 장미꽃 또한 잘 버텨 주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하성그룹 윤하민입니다.”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려한 셔터가 터졌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긴장이 되어 목구멍이 타들어 갔지만 그럴 때마다 하민은 오른쪽 가슴에 꽂힌 빨간 장미꽃에 시선을 두고 도윤을 떠올리며 피로감에 찌든 마음을 다잡았다.

형과 함께하기 위한 첫걸음을 성공리에 마쳐야만 하는 것. 그것이 현재 하민이 자신의 위치에서 오늘 기필코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회견을 마치고 하민은 또다시 곧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급히 걸음을 옮기는 순간에도 무조건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은밀히 부탁을 해 둔 친구 강주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어, 강주야. 좀 알아봤어?”

-응. 네 예상대로 도윤 씨는 퇴직하셨다더라.

“정말? 잘됐다. 그럼 내가 부탁한 건은 해결했고?”

-그것도 호건이가 강기호 씨랑 잘 이야기해서 경호 업체 최종 인수하기로 했어. 처음엔 지원만 해 달라고 말이 오간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강기호 씨는 금액적인 부분에 대한 부담이 줄어드니까 이쪽을 택한 것 같아.

“그건 다행이네. 신경 써 줘서 고맙다 강주야. 호건이한테도 고맙다고 전해 줘.”

-인마 그런 건 직접 전해. 아 그런데 하민아.

친구인 강주가 부르는 소리에 하민이 ‘왜?’라고 물었다. 강주는 몇 초간 말이 없다가 크게 숨을 쉬더니 친구인 그에게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넸다.

-왜 전에 쓰던 폰은 사용 안 해? 아버지께서 이젠 너 완전히 인정하신 거 아니야? 게다가 그 폰으로 계속 도윤 씨가 연락했으면 어쩌려고 그래. 오해 생기면 안 되는 거 아냐?

강주의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하민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뜩이나 서울 올라오고 나서 몇 날 며칠 도윤 씨 보고 싶다고 사납게 굴던 애가…. 그냥 직접 연락하고 사실대로 말하지 그랬어.

“그건…….”

하민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함구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강주가 절로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하민아. 이럴 땐 숨기기보단 직접 부딪혀야지. 아버지랑은 이야기 다 끝났다며. 왜? 여전히 아버지는 도윤 씨가 싫으시대? 베타라서?

채근하는 말투에 결국 하민이 가던길을 멈추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도윤에게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 내기엔 그도 이젠 한계치에 도달한 상태였다.

“그것보다도 아버지가 내건 조건을 완벽하게 수행해야지만 형과 함께할 명분이 생겨. 지금은 미국에서 원하는 대로 공부하고 하니까 좀 인정해 주신 눈치지만. 너도 잘 알잖아. 우리 아버지가 내가 좋아했던 그 짝사랑 베타 놈 때문에 엇나간 이후로 베타라면 날부터 세우는 거. 이번만큼은 확실히 쐐기가 필요한 시점이야.”

-그건 그렇지…….

“아버지한테 내가 서울로 돌아올 때 억지를 써서 조건을 좀 내걸었거든? 그리고 그 조건이 충족되려면 며칠 더 걸릴 것 같다. 그 전까지만 너랑 호건이가 고생 좀 해 줘.”

-그 조건이 대체 뭔데?

친구인 하민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강주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질문했다. 하지만 끝끝내 강주는 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강주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하민은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을 이행하기 위해서 차량에 올랐다. 공식적인 하성그룹 후계자가 된 시점에서 그에게 붙은 경호원의 수는 상당했다. 평소 받아 본 적 없던 거추장스러운 경호를 받자니 행동에 제약이 많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하민은 조금 더 자신의 사람들로 주위를 채워 나가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차량에 탑승하자마자 룸미러를 통해 눈짓을 해 오는 전담 비서가 하민에게 눈짓을 건네며 최종 목적지를 물었다.

“이사님. 어디로 모실까요?”

“회사로 바로 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목적지가 정해지자 극심한 피로가 몰렸다. 평생 받을 법한 플래시 세례를 오늘 하루 만에 받은 터라 눈이 뻑뻑해진 하민이 두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며칠만. 딱 며칠만 버티면 돼. 그럼 형하고 만날 수 있어.’

하민은 건조해진 눈으로 차창에 비치는 멀끔한 제 얼굴을 바라봤다. 조금 전 통화했던 강주의 질문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러 번이고 되뇌고 되뇌다가 도윤의 얼굴이 떠오를때가 되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 얼굴이 차창에 반사되어 비추는 꼴을 보였다. 이토록 형을 원하는 모습을 보자니 매번 고통이 가시질 않았다. 하민은 당장에라도 도윤을 만나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아버지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던 때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뜻대로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 하나 정도는 토 달지 않고 마련해 달라는 조건을.

그 조건의 중심에는 도윤이 있었다. 이를 알아챈 아버지가 그놈의 베타 때문에 네가 지낸 지난날의 세월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딴지를 걸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민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버지도 제 아들이 쉽사리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하나의 조건을 더 내걸었다.

‘다 네가 하기 달렸지. 어디 그 베타밖에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날 납득시키면 되지 않느냐. 그런다면 내건 조건도 따라 주기로 약속하고 말고. 대신 후계자가 되기 전까진 그 베타랑 연락을 취하는 건 금물이니 이 말 꼭 명심해.’

아버지의 최종 보고를 받고서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이런 문제로 인해 계속 끙끙거리기만 하는 아들 때문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설득시키겠노라며 회유를 하고 나섰지만, 하민은 한사코 거절했다.

매번 어머니의 도움을 받자니 아버지에겐 자신이 늘상 철부지 아들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 때문에 늘 신뢰도 바닥을 치고 누군가를 만나고 사귈 때마다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라는 마음은 더더욱 확고해져만 갔다.

하민은 이참에 아버지와의 내기에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고 싶었다. 자신의 삶의 주체는 오로지 자신이어야 했다.

“최 비서님.”

“네, 말씀하시죠, 이사님.”

“제가 회장님과 내기에서 이길 것 같거든요. 예상했던 대로 후계자 공표도 했고 조만간 승계도 끝나는 시점입니다. 제 말에 이견이 있습니까?”

묻는 말에 최 비서가 이견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맞습니다. 저도 이사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러면 이제 강기호 실장님께 연락을 좀 넣어 주시죠. 그리고 형-, 아니. 우도윤 씨 행방도 어떻게 됐는지 보고도 바로 올려 달라고 하세요.”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데려오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을까?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최비서는 마지못해 말문을 텄다.

“정말로 데려오실 생각이십니까?”

어찌 보면 도발에 가까운 질문일 수도 있었다. 하민도 최 비서의 말을 ‘왜 잘난 알파가 뭣도 아닌 베타에 집착하느냐.’라고 해석했다. 이것이 왜곡된 해석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부분은 하민의 생각은 고작 그런 되물음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확고할 뿐이라는 점이다.

하민이 룸미러를 통해 운전대를 잡은 최 비서를 싸하게 쳐다봤다. 그건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우성 알파다운 권력이 엿보이는 순간이었다. 열성인 최 비서는 감히 낼 수 없는 묵직한 살기로써.

“당연히 데려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뭣 때문에 지금 이 시간을 견디는 건지 최 비서님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우성 알파의 살기에 눌려 버린 최 비서가 간신히 목구멍에 침을 삼켰다. 알겠다 답하는 그에게 하민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울로 상경한 도윤은 기호가 마련해 준 원룸에 짐부터 풀었다. 방은 하나였지만 실평수는 혼자서 지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침대는 퀸 사이즈로 덩치 큰 도윤도 충분히 넉넉하게 사용이 가능했다는 점이 좋았다. 그 외에도 생활하기 부족함이 없는 기본 옵션들이 다 딸려 있으니 서울로 올라오기 전 짐을 정리하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도윤은 서울로 직장을 이동했다는 말을 가족에겐 하지 않았다. 동생인 재윤에게는 말할까 했지만 괜히 걱정을 끼칠 듯하여 그만두었다. 조금 더 안정을 되찾으면 그때 말하는 것이 나을 법했으니까.

하민에게선 여전히 연락 한 통 닿지 않았다. 몇 번이나 톡을 더 보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1이라는 숫자는 사라지지 않았고 연락도 못 해 본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갔기에 이쯤 되면 기대하지도 말고 단념하는 것이 맞았다.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구석이 휑했지만 상처만 떠안고 늘 천천히 극복하기만을 반복했던 그에게는 그닥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지금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다 됐나.”

빠진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던 도윤이 초인종 소리에 바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정리 다 했어?”

“아 선배.”

“오- 깔끔하네.”

이곳에서 지내게 해 준 기호의 방문이었다. 기호는 양손에 집들이 선물인 듯한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얼핏 보아하니 휴지나 샴푸 등등이었다.

기호가 가져온 물품들을 건네받으며 구석에 정리하던 도윤이 원룸을 두리번거리던 선배가 시선을 멈춘 곳을 따라 보았다.

그곳엔 하민이 선물했던 향낭과 디퓨저, 그리고 곱게 잘 말린 파란 장미가 자리했다.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잊어야만 하는 물건 투성이일 뿐이라 치워야 했지만… 그러기 힘들었던 것들.

“이건 핸드메이드 디퓨저야? 파란 장미는 처음 보네.”

파란 장미의 꽃말을 끝끝내 알려 주지 않았던 하민 때문에 도윤은 직접 검색해서 꽃말을 알아냈다.

파란 장미의 꽃말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 혹은 기적.

아쉽게도 자신에겐 기적이라는 단어 자체가 호화스럽고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랬으니 하민 씨가 연락도 없을 만큼 쉽게 잊었을 수도 있다.

하민 씨는 나를 포기하신 걸까. 기적이 없는 그저 그런 사람이라서?

상념에 사로잡혀 안개가 뿌옇게 끼어 버린 마음은 희망이라는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용히 실망스러운 마음을 꽁꽁 숨기는 일이 전부였다.

“네. 선물 받은 것들이에요.”

겨우겨우 ‘선물’이라고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답했다. 기호는 향낭에 코를 대고 향을 한번 맡더니 이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드러운 호선이 입가에 밝게 드러났다.

“그래? 이렇게 진열해 놓은 것 보면 소중하게 잘 간직했나 봐. 보기 좋네.”

“네…… 뭐 그렇죠.”

기호가 하는 말에 도윤은 쑥스러움을 느끼며 시선을 흐렸다. 모두 소중하게 간직할 수밖에 없는 물건들이었다. 저 모든 것들이 오로지 한 사람이 선물해 준 것들이었고 도윤이 아직 잊지 못한 사람이 남긴 것이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들뿐이었다.

뻘쭘함에 뒷목을 긁적거리던 도윤에게 기호가 물 한 잔만 달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껏 들러 준 손님에게 아무것도 내오지 않은 걸 깨달은 도윤이 아차 싶어 무언가 마실 만한 것이 있을지 떠올리며 부엌을 뒤적거렸다.

우습게도 현재 남아 있는 것이라곤 페퍼민트 차밖에 없었다. 하민과 헤어지고 난 이후로 줄곧 이 차만 손에 대었더랬다.

“선배, 혹시 페퍼민트 차도 괜찮아요?”

“어, 그래. 차 좋지.”

“네. 금방 끓여 드릴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천천히 해.”

배려하는 말에 도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붓자 싸하고 시원하게 올라오는 향이 꼭 하민이 설명했던 그의 알파 페로몬 향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을 다 붓고 찻잔에 차를 옮겨 담아 내오려던 찰나, 도윤은 기호가 내뱉은 한마디에 우뚝 멈춰 섰다.

“도윤아. 너 개인 경호 안 해 볼래? 무조건 네가 해 줬으면 한다는 분이 계시거든.”

“개인 경호요? 근데 선배. 저 경호는 처음이라……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은데요.”

찻잔을 내려 두며 도윤이 거절 의사를 밝혔으나 이에 기호는 곧바로 맞받아쳤다.

“응. 그거랑 상관없이 널 콕 지목한 지체 높으신 분이 계셔서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널 스카우트한 것도 있거든. 재우한테 일부러 설득 좀 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도 이분 때문이라서……. 어때? 해 볼래?”

페퍼민트 차를 후후 불어 몇 번 홀짝이던 기호가 멋쩍게 웃어 왔다.

“…….”

거절 못하는 성격이라는 이점을 이용한 전략일까. 함께 대학교를 다녔던 기호가 자신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다.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서 그런지 도윤은 적잖게 당황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크게 동요되었다.

‘어차피 고민했던 상황이었잖아.’

앞으로의 일이 막막한 상황이었기에 별수 없긴 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좋다고 대책 없이 서울로 오게 된 자신을 탓해야지 누굴 탓할까 싶기도 했다.

실상 하민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황홀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서 생긴 바보 같은 상황에 도윤은 굴복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해 볼게요.”

“좋아. 그럼 내일 바로 만나러 가자.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볍게 손만 흔들고 기호가 떠났다. 도윤은 곧장 그가 먹다 만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손님이 떠난 자리에선 짙은 페퍼민트 향이 났다. 하민한테서 났을 그런 향이었다.

습관적으로 도윤의 시선이 파란 장미를 향해 스쳤다.

하민이 자신을 포기해 버린 것만 같아서, 기적이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 속이 말도 못하게 쓰라렸다.

“아냐. 그래도 다 이유가 있었겠지.”

그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에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다. 정말로 그가 절 포기해 버린 건 아닐 거라고. 기적은 사라지지 않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뿐이라고.

소식이 끊긴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작 반년밖에.

오늘은 경호원으로서 첫 근무 날이었다. 오전에는 같이 입사하게 된 동기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각자 배속받은 업무를 체크하는 등의 일들로 시간을 때웠다.

저녁에는 뿔뿔이 흩어져서 A팀으로 배속받은 사람들은 올림픽 경기장으로 B팀으로 배속받은 사람들은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별다른 배속 없이 남아 있게 된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한 명은 경호 업체 팀장이자 대표인 강기호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오늘 막 들어와서 개인 경호를 맡게 된 도윤이었다.

기호는 혼자 남은 도윤에게 손짓하며 따라오라 했고 도윤은 그 뒤를 군말 없이 따랐다.

기호의 개인 자가용으로 보이는 차량에 탑승한 도윤은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긴장으로 굳어 버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기호는 트로트 한 가닥을 틀고 가볍게 흥얼거렸다.

“이번에 네가 모시게 될 사람은 하성그룹 후계자야. 설마 하성그룹 모르진 않지?”

“아… 네. 알긴 알아요.”

말 그대로 알긴 알았다. 깊게 아는 것도 아니고 딱 이름만 듣고 어느 곳이다 하는 수준으로만. 더군다나 자신이 범접하기 힘든 대기업이었기에 깊게 알 필요조차 없던 것도 있었다.

그런 자신이 하성그룹 후계자를 개인 경호하게 되었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지금 상황이 도윤에겐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일들뿐이었다. 물어봐 봤자 큰 소득은 얻지 못할 것이고 보안이 생명인 직업이었기에 자잘하게 알고자 하는 것도 위험하다는 걸 잘 안다. 그것이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대기업인 하성그룹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성그룹 후계자분께서 직접 의뢰하신 거야. 이번에 막 후계자 자리에서 공표도 마치셨고 오늘부터 부회장 타이틀을 달으신 것 같더라.”

“네.”

“내가 듣기론 다른 경호원도 있다고 했어. 근데 그 경호원들은 멀리서 경호하기 위해 배속된 사람들이고 넌 그분을 특별히 밀착 경호해야 하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아… 네. 근데 그럼 어느 정도까지요?”

도윤이 알기로는 밀착 경호라고 해도 업무실 내부까지 따라가는 경우는 잘 없다고 들었다. 대개는 업무실 앞에서 2인 1조로 대기를 타고 경호 대상자가 이동할 시에 바로 옆에서 보좌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었다.

도윤은 그 정도의 밀착 경호를 원하는 것인지를 물었던 거였지만 기호는 알 수 없게도 애매모호한 답변만 내놓았다.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영양가 없는 것들로만.

“일단 가서 직접 들어. 그분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줘. 그러라고 널 지목하신 것 같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기가 무섭게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다. 어렴풋이 앞 유리창 끝 너머로 하성그룹이 보였다.

하성그룹에 들어가는 절차는 경호를 맡은 업체도 굉장히 까다로웠다. 이미 고용되어 있는 경호원들이 기호와 도윤의 몸을 세세하게 만져 가며 혹여라도 숨긴 무기는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눈짓이 오가고 나서야 그 둘은 하성그룹 입구 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도윤은 하성그룹에 대해서 아는 바가 크게 없었는데 오늘 오전 업무를 보면서 찾아본 결과 자신이 경호해야 할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하민 씨와 성과 이름까지 같다는 걸 알았다. 우연의 일치인지 하필이면 머릿속에서 떠나라고 해도 떠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라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하민 씨도 부잣집 아들이랬지…… 그래도 설마… 아닐 거야. 윤하민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흔한데.’

이쯤 되니 도윤은 하민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명은 아닐까? 원래부터 그 사람은 없던 존재였고 그냥 허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망상만 늘어 간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자꾸만 그러고 싶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는 본인도 모른채 기호의 발자취를 따라서 고대로 걸었다.

엘레베이터는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언뜻 듣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대표실은 가장 높은 층에 자리한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기정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말이 현실이 되는 그 시점이었다. 어느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재료로 만든 문 옆에 비서가 총 세 명 앉아 있었다. 모두 부회장을 위해서만 고용된 인력들이었다.

그중 한 명도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제야 제 처지가 실감 났다.

“어서 오세요. 부 대표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같이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기호가 묻는 말에 옆에 앉은 또 다른 비서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우도윤 경호원께서만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강기호 경호원께선 앞에서 대기해 주세요. 들어가세요, 우도윤 경호원님.”

“네.”

비서의 안내를 받고 선 자리 앞엔 가장 먼저 오크색 문에 금박으로 세공된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성그룹 윤하민>

‘윤하민.’

익숙한 이름을 곱씹은 도윤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곧이어 비서가 그가 들어갈 것을 알렸다.

“부회장님. 우도윤 경호원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경호원님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한 발자국 비서가 물러서자 도윤이 직접 문을 열고 부회장실로 들어섰다.

도윤은 그곳에 입성하자마자 고개부터 숙이며 예의부터 차렸다. 특이하게도 방에선 강한 페퍼민트 향이 났다. 매우 익숙한 페퍼민트 향이.

긴장되어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계속 조아리고 있자 그를 집어삼킬 듯한 그림자가 도윤의 앞에 섰다. 대충 봐도 자신과 키가 비슷해 보이는 훤칠한 사내였다.

“우도윤 씨.”

“네. 부회장님.”

“반년 동안 어떻게 잘 지내셨어요? 살 만은 했고? 설마 아무한테나 꽃 주고 친절하게 다 받아 주거나 그런 건 아니었겠죠?”

“…….”

이상한 질문 폭격에 도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둔 채로 두 눈만 깜빡였다. 더군다나 익숙한 목소리에 아까 전부터 심장이 빠르게 쿵쿵거렸다.

조금 심통 난 목소리가 꼭 그를 닮았다.

“이제 고개 좀 들죠? 얼굴이 하나도 안 보여서 화나려고 하거든요. 난 무려 반년이나 이날만을 기다렸다고.”

“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상해. 정말 이상했다. 부회장이란 사람에 목소리를 여러 번 듣고 나서 도윤이 생각한 한마디는 고작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익숙하고 그리워한 목소리에 혼란스러워진 도윤의 눈이 잔잔하게 일렁였을 그때였다.

다시 한번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부드럽게 자신을 불렀던 것이.

“도윤 형. 저 안 보고 싶었어요?”

“어…. 하민 씨?”

“네. 저예요, 윤하민. 이제야 알아보겠어요?”

‘윤하민’이라는 말 한마디에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바로 코앞엔 헐렁하고 자유로웠을 때의 모습과는 다른 또 다른 그가 서 있었다.

아주 말끔하고 그 누구보다도 멋진 모습을 한 채였다.

“하민 씨? 제가 아는 하민 씨가 맞아요?”

“그럼요. 형을 매우 사랑하는 하민이죠. 진짜 여태껏 보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는데, 형은 아니었어요?”

“아…….”

사랑이라는 단어에 도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자기 가슴이 옥죄듯이 아프고 숨을 쉬기가 곤란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또다시 제 인생을 잡고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처럼 어지럽고 괴로웠다.

일순 아버지를 잃었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미친놈처럼 크게 울며 떼를 쓴 날. 날 두고 가지 말라고, 허망하게 혼자 가 버리지 말라며 화장터를 들어가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랐던 때. 평생 흘릴 눈물을 하루아침에 쏟아 냈던 지난날이.

그런데 어째서 지금도 눈가가 아플 정도로 따가워지는 건지 그는 제 마음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포기하고자 다잡았던 마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무뚝뚝했던 눈썹과 입매를 고수했던 얼굴이 완벽하게 일그러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자 긴장에 힘이 꽉 차여 있던 몸이 튜브에 바람을 빼내듯 맥없이 줄어들었다.

“날 잊은 줄 알았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대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걸 바라만 보고 있던 하민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그는 처음으로 형이 입술을 깨물고 울려고 하는 표정을 마주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려가는 모습을 보여 주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이성이 마비되어 갔다. 심장이 너무 아파 쿡쿡 쓰려서 일단은 저 사람을 안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하민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사람의 팔을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덩치는 산만 한 사람이 처음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하민은 조금 더 늦었다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는 생각이 미쳤고 더 일찍 형을 찾지 못한 마음에 다잡았던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또 다른 의미로 심장이 터질 듯했다.

“흐으…… 하민… 하민 씨.”

“네. 저예요. 형 나라고. 그러니까 울지 마… 형 울지 마, 좀.”

자기 자신도 울고 있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도윤이 그의 한마디에 하민의 어깨를 부여잡고 숨을 묻었다. 울지 안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더 짠했던 나머지 하민은 떨림을 지속하는 둥근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북받치는 감정을 천천히 다스렸다. 서로가 한참 동안 껴안은 채로 숨 쉬기만을 반복했다.

드디어 만났다는 안도감. 처음으로 흘려 본 눈물에 찾아온 혼란스러움.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 꿈이 아니라는 현실과 바로 마주 보고 있는, 빛날 만큼 그리운 모습.

이 모든 것들이 도윤에게 불과 몇 분 만에 일어난 감정들이었다.

겨우 진정이 된 도윤이 하성그룹 부회장으로 나타난 하민과 소파에 마주 앉은 채로 눈을 맞췄다. 너무나도 달라진 위치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딜 보나 앞에 앉아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은 하민이 맞았다.

“자요, 형. 마시면서 진정해요.”

“고마워요.”

하민이 건네는 찻잔을 받아 든 도윤이 홀짝거리며 첫입을 뗐다. 산뜻한 레몬 향과 시원한 페퍼민트 향이 곁들여진 허브티였다. 몸 안에 따뜻한 무언가가 퍼지니 잘 쉬어지지도 않았던 숨이 트이고 이제야 살 것만 같았다.

도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감정을 내보이며 울어 보였던 것이라서 적잖게 당황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건 하민도 마찬가지였다.

금세 도윤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언제 불안했었는지 모를 정도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하민은 그를 바라보며 내심 안심하면서도 또다시 도윤을 울려 보고 싶었다.

‘꽤 좋았지…?’

침대에서나 박아 대며 울려 봤지 정상적인 상태에서 형을 울려 본 건 처음이 아니던가? 나라는 존재가 저 무뚝뚝한 사람을 울렸다는 알 수 없는 짜릿함에 변태가 되어 버린 듯했다. 지금 당장 어딘가에 눕혀 들고 처박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는 누군가를 종종 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아주 지독하고 고약한 심보였지만 조금 전 도윤의 표정과 행동을 다시금 상기시키면 하민은 울컥이는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요?”

“네. 그럼 누구예요.”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저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그건.”

“했죠?”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서 하민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적잖게 놀란 모양인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연락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요.”

“으음…….”

한층 더 침울해져 눈을 내리까는 도윤의 모습을 응시하던 하민이 바짝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형. 혹시 제 연락 기다렸어요?”

도윤이 살짝 눈을 맞추더니 재차 내리깔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렇다면 저한테 연락은 했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했다는 말에 하민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췄다.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해도 단박에 이해가 갈 듯했다.

“그럼, 그럼요. 제가 연락 안 하고 계속 답장도 없었을 텐데 그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어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하민이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본 하민이 미소를 띠우던 표정을 굳혔다.

“절 잊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게 맞다면 저도 잊어야 한다고 생긱했어요. 잊으려고 노력했는데… 쉽게 안 되더라고요.”

“형.”

“하민 씨는 우성 알파니까요. 분명히 형질자를 만나는 편이 더 좋을 거라는 생각도 했어요. 저야 몸만 무식하게 크고 성격도 살가운 타입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하민 씨와 미래를 생각하면 그 편이 더…….”

“하-.”

결여된 자신감에 미련이 뚝뚝 묻어 나오는 진심이 하민의 마음을 후벼팠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말을 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한 원흉이 본인이라는 것도 깊게 느낄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이 베타와 이 사람과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함께해야겠다는 다짐을 만들기에도 충분했다.

드디어 하민은 분위기가 이러하더라도 이번에는 여태 생각했던 진심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민이 도윤을 ‘형.’ 하고 불렀다. 도윤은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고 하민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말했다.

“전 형 없으면 절대로 안 되거든요. 형질자요? 그건 제겐 그냥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전 형이 필요해요. 형이 내 곁에서 계속 함께해 줬으면 좋겠어. 형의 미래도 내가 책임지고 싶고요. 형과 어떻게서든지 떨어지고 싶지가 않아요.”

“하민 씨.”

“그래서 제가 고안해 낸 방법이 밀착해서 절 경호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어 낸 거거든요. 이래 봬도 절 노리는 사람이 많거든요? 봐요. 저 같은 알파를 눈독 안 들이면 이 세상 사람들 눈이 삔 거죠.”

“…….”

당당한 자기애 발산에 도윤은 할 말을 잃고 그가 하는 말을 주시하며 들었다.

“근데 형도 잘 아시잖아요. 저는 베타 취향인 거. 도윤 형밖에 없다는 거요. 제 히어로는 우도윤 한 사람뿐이거든요? 형이라는 사람이 평생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 형만 있으면 돼요. 그니까 있잖아요, 형.”

“네?”

진지하게 눈을 빛내던 하민의 눈동자가 노랗게 색을 바꿨다. 금세 그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번졌다.

“절 잘 경호하려면 역시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야 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그건 동감하시죠?”

“네.”

도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적인 행동에 하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윤의 뒤로 돌아가 섰다.

페퍼민트 향이 나는 차를 직접 우려 줘서인지, 아니면 그 사람의 페로몬이 페퍼민트 향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민이 도윤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자 코끝이 뻥 뚫릴 것만 같은 강한 향이 오감을 자극했다. 그걸 모르는 하민은 최대한으로 몸을 밀착해서 도윤을 알았다.

그의 살 내음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강하게 끌어안으며 잠에 빠질 듯 하민이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럼 우리 둘…… 역시 동거부터 할까요?”

“네? 동거요?”

“싫어요?”

야구로 따지면 스트레이트. 꽃으로 따지면 정열의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진 빨간 장미.

“사랑해요, 형. 진심으로요.”

“…….”

그 모든 낱말은 윤하민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며 착각하게 되어 버린다.

무덤덤한 사람을 점점 꽃향기에 스며들듯 바꿔 놓은 하민의 끈기는 인정할 만했고, 도윤은 그런 하민의 곁에 온전히 있길 바랐다.

그도 윤하민이라는 존재가 곁에 없다면 더는 힘들 것을 알았기에 그랬다.

“하민 씨.”

“네.”

아직도 목을 감고 있는 그의 팔을 도윤이 붙들었다. 그러고선 다짐한 듯 눈을 감고 말했다.

하민 씨를 따르고 싶다. 그것이 동거가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의 옆에서 늘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윤은 더욱이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았다. 한 자씩 진심 어린 말을 내뱉을 때마다 무뚝뚝했던 감정이 두근대며 벅차올랐다.

“좋아요.”

“뭐가요? 내가? 아님…….”

“동거요. 우리 해요, 동거.”

“와…… 저 순간 무진장 설렌 거 알아요? 무슨 동거하자는 말을 그렇게 띄엄띄엄 말해요? 우리 하자고 해서 지금 당장 호텔 잡자는 줄 알았잖아요. 역시 형 선수였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농담 좀 그만해요.”

“네. 알겠어요. 농담은 그만할 테니까 우린 다음 스케줄로 바로 이동할까요?”

처음으로 스케줄을 제시하는 모습에 도윤이 군말 없이 일어나 그의 옆에 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매우 감격한 표정을 지은 하민이 도윤에게 다정스레 팔짱을 끼더니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우리 부모님부터 소개해 드릴게요. 형이 어떤 사람인지 매우 궁금해하시더라고.”

“……네?”

너무 놀란 도윤이 한 발짝 거리를 벌리고선 벌게진 귀를 모난 손으로 숨겼다. 또다시 심장이 내려앉을 듯 쿵쿵 뛰었다.

하민은 짓궂은 표정을 하며 웃기만 했다.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불현듯 야구 할 때가 떠올랐다.

만루인 상황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공을 포수 자리에서 받았을 때. 기적이 일어나서 삼진아웃을 시켰을 때의 벅찬 심장 소리와 매우 흡사하다는 걸 떠올린 것이었다.

줄곧 배회하던 마음이 결국 곧게 앞을 바라보며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마치 아무런 회전 없이 올곧고 정직한 공을 던진 느낌이었다.

그 마음이 닿은 사람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뛰었고 순수하게 진심으로 기뻐했다. 두근거림을 참지 못하고 목덜미에서 자신이 새겨 둔 페퍼민트 향이 나는 살 내음을 흡입할 정도로.

이 순간 도윤도 마침내 연애에 대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뭐가 됐든지 간에 하민의 부모님을 만나 뵐 생각이었다.

드디어 그 둘한테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만의 사정이 있고, 나는 나만의 사정이 있더라도 우도윤은 윤하민이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한다는 점은 변함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함께함에 있어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만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을지도 모른다.

무슨 사정이 있더라도 모든 의미를 천천히 곱씹은 채 앞으로도 함께 나아가면 된다.

도윤은 하민을 생각하며 무뚝뚝한 마음 한 곳에 씨앗 하나를 뿌렸다. 그리고 앞으로는 행복해질 것이라며 다짐했다.

이미 기적은 일어났고 그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언젠가는 베타의 마음에도 그 어떠한 향보다 더 화려한 향을 내는 꽃이 필 날이 올 것이다.

분명히.

그 알파, 그 베타의 사정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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