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그 끝에 머물다.
여름이 지나가는 밤은 굉장히 고요했다. 정적이 가득한 공간에는 간간이 시계추 소리만 들렸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탓에 풀이 흔들려 부서지는 소리 따윈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 하민이 도윤의 몸을 탐닉하는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였다.
맨 처음 들린 건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도윤의 크고 말랑한 가슴 위로 이미 절정을 겪은 듯 부풀어진 성기가 움푹 패인 가슴골을 툭툭 때리는 소리였다. 타격 때문인지 진동에 구릿빛 살결이 튕겨져 올라왔고 피부결이 쓸려 따가울 때까지 하민은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도윤은 낯선 감각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참아 보려고 노력했다. 어금니가 뻐근해질 때까지 힘을 주고 나니 이미 묽은 액체를 귀두 끝에 뚝뚝 흘린 하민이 그 희멀건 것을 제 가슴에다 대고 당연하다는 듯 문질렀다.
천천히 쇄골 위쪽을 문지르던 성기가 어느새 아직 채 서지 않은 유두 쪽으로 옮겨졌다. 몇 번이고 살결이 쓸리는 통에 납작했던 유두는 결국 봉긋하게 솟아올라 금세 터질 듯한 탄력감을 머금었다.
하민은 때를 놓치지 않고 한 손으로 도윤의 솟아오른 유두를 꼬집으며 비틀었다. 나머지 쪽은 귀두 끝에 꼭 맞도록 유두에다 대고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양쪽 가슴이 동시에 희롱당하는 꼴이 되자 소리가 나지 않도록 겨우겨우 침만 삼키며 긴장만 타던 도윤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에 커다란 가슴이 들썩거리다가 금세 턱 끝이 위를 향하더니 짧은 교성을 내뱉었다.
“허억-.”
“여기 좋아요 형?”
바들바들 떨며 도윤이 물음에 대해 고개를 내저었다. 어느 누가 봐도 기분 좋고 쾌감에 찌들어 야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대답은 고개를 젓는 행위라니. 사람을 미치게 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란 말인가.
하민은 싫다는 그의 제스처에도 몇 번이고 빳빳하게 솟은 유두를 핥기도 하고 꼬집기도 하고 둥글리기도 하면서 진한 핑크색으로 물들 때까지 몇 번이고 괴롭혔다.
양쪽 유두가 크게 부풀어 터질 것같이 된 후에야 하민은 희롱을 멈췄다. 아직도 힘을 주며 버티고 있었는지 옆으로 돌아간 도윤의 턱이 우글해진 것이 보였다.
솔직한 몸에 솔직하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하민은 오기가 생겼다. 저 큰 덩치 정도쯤이야 한 방에 들어서 바로 성기를 꼽고 흔들고 싸 댈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그렇다면 미움을 받고 말 게 분명했다.
오메가라면 금방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페로몬으로 따먹어 달라 유혹할 테지만 베타는 그럴 수 없다는 걸 하민도 잘 알고 있었다.
일단은 자신의 성기를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있도록 형의 몸을 넓히는 것이 중요했다. 저번엔 실패했었고, 그 이후로도 뚫려 본 적 없는 좁디좁은 공간이 점점 자신의 성기와 꼭 맞는 형태로 변해 갈 것을 생각하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하민은 아쉬운 대로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고 있는 도윤의 입에 제 손가락을 불쑥 집어넣어 휘저었다. 길고 곧은 손이 타액으로 흥건해진 부드러운 공간을 몇 번이고 꼼꼼히 탐닉했다.
“하… 미….”
“응? 뭐라고요? 똑바로 말해야 알아듣죠.”
부드러운 도윤의 혀를 꾹꾹 눌러 가며 괴롭혔다. 그 때문에 도윤이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민은 자꾸만 짓궂게 굴었다. 도윤은 점점 깊숙이 들어오는 손가락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틀어 숨 막힐 듯한 행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컥컥거릴 정도로 손가락이 목젖 언저리를 건들자 이번에는 하민이 좀 더 고약한 말을 해 댔다.
“숨 쉬기 곤란해요? 위쪽도 못 참으면 아래쪽은 어떻게 참으려고 그래요. 형 몸도 이렇게 크면서 이런 것 하나도 못 버텨요? 아, 그거랑은 상관없나.”
“우으읍….”
고개를 이리저리 흔드는 도윤이 아니라는 것처럼 거부를 해 댔다. 하민은 누군가를 괴롭히는 취미도 없었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도윤을 보면 이런 추악한 마음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형. 위쪽은 싫어요?”
도윤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한 번 더 묻는 말에 역시나 고개를 끄덕였다.
“빼 줘요?”
마찬가지였다.
“좋아요. 빼 줄게요. 대신 다른 쪽은 잘 버텨야 해요.”
“…….”
노란 눈빛을 하고 씩 입꼬리를 당긴 하민을 보면서 이번엔 도윤이 고개를 끄덕일지 말지를 고민했다. 끝내는 더 참지 못해서 끄덕이게 되었지만.
“콜록, 콜록!”
“아 힘들었죠? 미안해요 형.”
“괜찮…아요.”
일부러 그러는 건지는 몰라도 하민은 울상이 된 표정으로 찡그린 도윤의 눈가에 입술을 맞추며 그를 달랬다. 하는 수 없이 괜찮다곤 말했지만 하민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다음에 이어질 행위의 수위는 지금보다 더할 듯해서 괜히 몸 전체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다음은 또 무슨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누군가와 제대로 잠자리를 가지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만 했던 도윤은 하민의 손길이 스치는 곳마다 민감하게 반응하며 떨 수밖에 없다.
“형 많이 긴장했구나. 가슴이랑 복근 단단해진 것 좀 봐. 힘 풀어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네.”
눈치를 보며 겨우 답한 도윤은 현재 하체 쪽으로 피가 쏠려 간질간질해진 걸 느꼈다. 방금 당한 일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감정이 되풀이되었음에도 자극이 심해서 감각 전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기준치를 벗어난 상태였다.
그래도 도망치고 싶진 않았다. 몸이 조금 다치고 이상해진다 한들 그건 그거대로 버틸 수 있었으니까.
“제가 만져서 너무 긴장되면 다른 거로 좀 풀어 줄까요?”
“다른 거요?”
“네.”
숨과 신음을 끙끙거리며 참느라고 목에 힘을 주었더니 벌써부터 쉰 소리가 났다. 답을 한 소리에 쇳소리가 섞이자 하민이 피식대며 눈썹을 찡그렸다.
“잠시만 기다려 봐요. 형도 제대로 하는 건 처음이니까 조금이라도 풀어 줄 게 있는지 찾아볼게요.”
“풀어 준다니 뭘요?”
“형 애널이요.”
“…네?”
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은 하민이 어디론가 자리를 이동하더니 몇 초 뒤에 ‘찾았다’고 말하며 꽤 묵직해 보이는 핫핑크로 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현재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몰라서 눈만 깜빡이던 도윤은 그가 핫핑크색 상자 뚜껑을 여는 순간까지 별 반응 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형형색깔의 특이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침대 위로 놓이자 도윤은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늘어놓은 물건들 중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핑크색으로 된 작은 기구 하나를 하민이 들어 올렸다.
“형은 이런 거 써 본 적 있어요?”
“아뇨.”
“이게 초보자들한테는 좋다 하더라고.”
“그걸로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떻게 하기는요. 형 기분 좋게 해 주려고 그러죠.”
하민은 뭔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도윤이 알기로는 하민은 알파였다. 그것도 소유욕도 강하고 욕구욕도 강한 우성 알파. 그런 사람이 저런 성인 용품을 수집하고 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기에 도윤은 적잖게 당황했다.
이해가 가질 않아서 그런지 자꾸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민 씨 설마 삽입 자위 하세요?”
“제가요?”
“네. 지금 들고 계신 것도 삽입 도구 아니에요?”
“아- 맞긴 한데, 전 그렇게 사용 안 해요. 게다가 이걸로 형한테 삽입해 봤자 형이 만족이나 하겠어요?”
“하민 씨.”
핑크색 기구를 든 하민이 서서히 도윤에게로 다가왔다. 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되었고 하민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오른쪽 발목을 낚아채며 휙 허공으로 들었다.
덜컹 소리를 내며 도윤이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에 떨어진 것이어서 아프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느낀 충격 때문인지 말조차 나오지 않아서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형이 저처럼 기분 좋았으면 좋겠어요.”
“하민 씨. 전- 윽!”
“역시 형 거 크다. 이거 다 안 선 거죠?”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하민은 조금씩 발기 과정을 겪는 도윤의 성기를 한 손 가득 움켜쥐었다. 단단한 강도에 두꺼운 굵기가 웬만한 알파들보단 사이즈가 커 보였지만 오늘 그가 이 무지막지한 크기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허공에서 꺼떡거리며 휘둘리기만 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생각들로 하민은 기대감에 부풀어 도윤에게로 달려들었다.
“봐 봐요 형. 이건 이렇게 쓰라고 있는 거예요.”
“장난치지 말고 놔 줘요 하민 씨…… 아!”
차가운 핑크색 기구가 뜨거운 도윤의 귀두 표면에 닿았다. 그것을 슬슬 둥글리며 움직이던 하민이 길게 줄에 딸려 있는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요란하게 ‘위이잉’ 하고 울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서 시끄러운 잡음을 내었다.
“아아! 아흑 아흥…!”
“형 좋아요? 좋나 보네.”
“아니, 흐윽 아니에요… 꺼 줘요 하민… 읏.”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이거 봐요 벌써부터 질질 싸잖아요.”
가늘고 긴 검지가 도윤의 요도 구멍을 톡톡 건드렸다. 그때마다 도윤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헉대며 몸을 비틀었고 하민은 그런 그를 힘으로 찍어 눌렀다.
하민의 손가락이 도윤의 귀두를 둥글게 문지르다가 곧게 뻗은 음경을 지나치더니 바로 아래 자리한 고환 쪽으로 향했다. 그의 손은 진득한 액체로 미끄러운 상태였다. 두어 번 주물대며 고환 가장 안쪽을 건들이다가 하민이 느릿하게 손을 떼어 냈다. 쿠퍼액으로 보이는 액체가 긴 손가락을 타고 끊임없이 길게 늘어났다. 반짝거리며 실처럼 붙어 있는 그 묽은 액체를 끊어 낸 건 입을 벌려 혀로 핥은 하민의 행동이었다.
“흐윽 하…! 그, 그만… 제발 흐….”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야해요 형.”
“아니… 그게…… 하민….”
“네. 저 여기 있어요 형.”
하민은 짧게 답하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조심스레 붉은 그의 입술이 도윤의 성기 끝을 핥고 지나갔다. 핑크색 기구는 금세 뻐끔거리며 무언가 넣어 달라고 하는 애널 속에 안착해서 달라붙는 중이었다.
쪽쪽대며 도윤의 커다란 성기를 핥는 하민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몰려드는 괘감과 흡입에 참지 못한 도윤이 파르르 떨며 무릎을 모아 봤지만 이미 녹진하게 풀려 버린 근육은 완벽한 알파로 변해 버린 하민에게 속수무책으로 도로 벌려졌다.
“됴아여?혀엉?(좋아요? 형?)”
“안 돼… 입에 넣고 흑, 말하지 마.”
“녜(네).”
“아, 안 돼 빼요!”
큰 흉곽이 들썩거리며 쾌락에 몸부림 쳤다. 곧 도윤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처져 쌕쌕 숨을 골랐다. 허벅지 안쪽은 아직도 내벽 안을 윙윙대며 긁고 있는 성인 기구로 인해 저절로 흔적을 남기며 떨고 있었다. 하민의 입 안에서 가 버렸다는 수치심에 도윤이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아직까지도 민감함에 멈추지 못한 신음을 죽였다.
“허억… 헉….”
“저 정액은 처음으로 먹어 봐요. 꽤 먹을 만한데요.”
“그만… 그만요 하민 씨. 그런 말 그만해요.”
“왜요? 아직도 부끄러워요?”
“…….”
어린애처럼 칭얼대는 말투에 도윤은 이게 맞는 것인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수많은 고민과 혼란을 겪는 중이었다. 이걸 알 턱이 없는 하민은 재차 부끄러운 말들을 쉼 없이 쏟아 낼 뿐이었다.
“지금부터 더 부끄러운 짓 할 건데 어쩌려고 그래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다음 행위를 예고하는 하민에게 도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끝까지 하실 거면 그냥 빨리 넣어 줘요.”
“왜요.”
“빨리… 그냥 좀.”
“안 돼요. 다치면 어쩌려고.”
단호한 말에 도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능글맞게 여우처럼 야한 말만 내뱉은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분위기에 도윤은 가렸던 입에서 손을 떼어 냈다.
알파와의 섹스는 원래 이런 걸까? 몇 분 몇 초마다 시시때때로 감정이 바뀌고 분위기가 바뀌어서 상대방이 맞춰 주기 버거울 정도로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것일까? 누군가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인 광경을 자신이 직접 겪고 있자니 안 그래도 둔한 그는 보폭을 맞춰 걷기조차 어려웠다.
왜 그러냐 말로 묻지 않아도 이미 도윤의 눈에는 의문을 내보이고 있었다. 하민은 형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형 애널이 좁아서 이대로는 안 들어갈걸요.”
“괜찮아요. 그냥 넣어요.”
무턱대고 넣어 버리라는 말에 하민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이 형이 겁도 없네 싶어서 알파 페로몬 때문에 노랗게 변한 눈을 더욱 강하게 부릅뜨며 겁을 줬다.
“안 돼요. 다친다니까요? 젤이나 다른 기구로 좀 더 넓힌 다음에-.”
“전 정말 괜찮아요. 하민 씨.”
“…….”
도윤의 손이 자신의 허리를 잡고 있는 하민의 손에 포개졌다. 하민은 크게 한숨을 쉬며 이번에는 또 다른 기구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하민 씨?”
누가 봐도 모조 성기로 보이는 커다란 크기에 도윤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저 크기가 들어간다면 무조건 숨도 쉬지 못하고 헉헉거릴 제 모습이 여실히 그려졌다. 하지만 하민의 발기한 성기는 저것보다 더 거대했다. 못 넣을 것도 없는 크기였지만 이왕 넣는다면 하민의 성기가 먼저 들어와 주기를 바랐다.
힘들더라도 그는 하민의 성기는 받아 낼 자신이 있었다.
“이걸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 형 이거부터 넣어서….”
“기구는 사용하기 싫어요.”
“형.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그러면 하민 씨야말로 왜 그렇게 고집을 피워요? 베타랑 하는 게 두려워서 그래요? 간 보는 겁니까, 지금?”
“뭐라고요?”
도발하는 말에 하민의 눈빛이 살벌한 기색을 띠었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기껏 생각해 줬더니만 말도 안 되는 도발로 이성을 무너트리려는 형이 밉다가도 얼마 못 가 금세 좋아 죽을 것만 같았다.
“하아…… 제발요 형. 사람 미치게 하지 마요.”
“처음 하는 거라면 하민 씨가 해 주는 게 좋아요.”
“그 말 후회 안할 자신 있어요?”
“네.”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하민을 바라보며 도윤이 구겼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섹스를 하기 위해선 콘돔이 필요했다. 자신의 크기를 버틸 수 있는 질긴 고무 쪼가리 말이다. 노팅을 하게 되는 순간에는 발기된 지금 상태보다 더 부풀어 오르기 때문에 내구성이 강한 것이 필요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콘돔은 집 안에서 보이질 않았다.
이대로 삽입도 못하고 결국 자위나 하고 끝내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에 하민은 점점 커져만 가는 성기를 부여잡고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로 눈앞에서 너무나도 완벽한 도윤이 멀뚱멀뚱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걸 눈치채고 나니 이미 자욱하게 퍼트린 페로몬보다 더 본능이 잘 드러난 거친 페로몬 향이 뒤엉켜 새어 나왔다.
‘이러다가 좆 터지겠어. 미쳐 버리겠네.’
결국 콘돔 찾는 걸 포기해 버린 하민은 최대한 침착하게 도윤에게 말했다.
“형. 지금 맞는 사이즈의 콘돔이 집에 없거든요? 그니까 오늘은….”
머뭇거리며 마지막 말을 뱉지도 못하는 하민을 살핀 그가 즉각 해답을 제시하고 나섰다.
“그냥 해요.”
“아… 그러면 그냥…… 어, 네?”
“콘돔 안 끼고 하자고요.”
황당무계한 제안에 하민은 당황하며 도윤의 곁으로 달려가 앉았다.
“아니, 잠깐만요 형. 그건 아무래도 형한텐 몹쓸 짓이에요.”
“기구 사용한 건 몹쓸 짓이 아니고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요!”
윽박지르는 그를 보곤 도윤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정신이 없었는지 뭔지는 몰라도 하민은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 까먹은 듯 보였다.
어차피 안 끼고 해도 상관없는 몸이었다. 혹여라도 흥분해서 안에 싸더라도 그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데도 나름대로 아껴 주려고 하는 것인지 하민은 고집 아닌 고집을 부렸다.
기구를 사용하며 무참히 자신의 몸을 희롱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도윤은 아직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는 하민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도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도윤은 하민과 눈을 맞춘 상태로 제 입에다 손가락을 쑥 넣고 침을 묻혔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하민은 멀뚱히 상황을 지켜볼 따름이다.
흥건하게 침을 묻힌 손가락 두개를 입 안에서 빼내 든 도윤이 하체를 들썩이며 엉덩이와 침대 사이에 공간이 생기도록 들었다. 가뜩이나 큰 하민의 눈이 더더욱 커졌고 그 모습을 무덤덤하게 지켜보며 도윤은 침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자신의 주름 진 곳 사이로 쑥 밀어 넣었다.
“으읏.”
“지금 무슨…….”
“풀어 줘야죠.”
“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민을 보며 도윤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흐윽-. 바로 넣을 거니까 이렇게라도 풀어서 뒤를 넓혀야죠. 안 그러면 다친다면서요?”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이 애널 사이로 손가락 하나를 더 늘려 몸 안을 휘저었다. 그나마 조금 전 하민이 기구로 조금 자극을 줬던 탓에 무리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도윤은 힐끔거리며 하민의 다리 사이에 솟은 성기를 쳐다봤다. 눈대중으로 크기를 가늠하니 대충 손가락 세 개로는 부족할 듯싶었다.
“잠시만요. 잠시 기다려 봐요. 그, 금방 윽- 끝나니까. 조금만 더….”
마지막으로 네 번째 새끼손가락을 펴고 넣으려던 찰나였다. 하민은 도윤의 팔을 한 번에 잡아채더니 그대로 두툼한 몸을 침대 시트로 처박았다.
“형. 지금 제 앞에서 자위한 거예요?”
“하민 씨?”
“콘돔도 없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무모하게 굴지?”
“없어도 괜찮아요.”
“전 안 괜찮아요.”
“괜찮아요. 베타니까.”
“…….”
“그러니까 좀…… 오메가 취급은 그만해요. 베타니까…… 그니까 안전해요.”
베타라는 말 한마디가 하민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고작 단어 하나가 이 정도로 파장이 셀 줄 몰랐다. 일순 들끓었던 마음이 차갑도록 식어 갔다.
하민은 입술을 깨물며 도윤에게 물었다.
“지금 베타니까 안에다가 싸도 된다고 말하는 거예요? 임신할 일도 없다고?”
“네.”
“형 그거 엄청 위험한 발언이에요.”
“알아요.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민 씨니까 이해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라 다 괜찮다 말해 주는 도윤을 그가 조심스레 다시 눕혔다. 하민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누그러진 상태였고 도윤도 보다 평온한 얼굴로 그를 올려봤다. 더 말하면서 입씨름해 봤자 하민은 형을 이길 재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도윤의 양다리를 번쩍 허공으로 치켜들며 말했다.
“아프면 꼭 말해요 형.”
“걱정 말아요. 몸 하나는 튼튼합니다.”
“진짜 말이나 못하면….”
평소와는 달리 고집을 부리는 쪽은 도윤이었고 안 된다며 막아서는 쪽은 저라는 사실이 하민으로선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건 도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두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을 참지 못하고 동시에 웃음이 터져 버렸다.
“빨리 넣어요 하민 씨.”
도윤이 하민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하민은 대답 없이 그대로 자신의 성기를 한 손으로 잡고 적당히 풀린 주름진 사이를 꼭 맞춰 비집고 들어갔다. 끝부분부터 조금씩 밀어 넣으니 찌걱거리는 살과 정액이 쓸리는 소리가 만연하게 들렸다. 귀두가 완벽하게 내벽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한번 숨을 크게 뱉던 하민이 뒤이어 반도 채 들어가지 못한 음경을 서서히 밀어 넣었다.
“헉……!”
반 이상 몸에 밀어 넣자 도윤의 엉덩이와 다리 사이가 파르르 떨렸다. 기구를 사용하지도 않았음에도 진동이 일듯 작은 떨림이 가속되었다. 하민은 도윤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페로몬이 파동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괜스레 가슴이 간질간질거리며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형 아파요?”
상냥하게 물으며 도윤의 왼쪽 뺨을 쓰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질문을 받게 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숨을 쉬고 힘을 풀다 보니 예상보단 참을 만했으니.
“더 들어와도 돼요.”
단순한 말 한마디는 누군가에겐 신호탄이 됐다. 어떻게 해서든 형의 몸 안을 뚫고 휘젓고 싶은 이성을 완벽하게 끊어 놓고 소유욕을 더욱더 증폭시키는 신호탄 말이다. 도윤이 숨을 고르기도 전에 하민은 그의 다리를 어깨에 올린 채로 한방에 몸 안 깊숙이 굵다란 성기를 밀어 넣었다.
퍼억-!
“허억…!”
“큭.”
살결이 부딪히는 소리가 무섭도록 크게 울렸다. 도윤이 벌벌 허벅지를 떨며 몸을 비틀어 댈 정도로 충격이 컸다. 굳은살이 박인 두 손은 허리 안쪽에 자리한 시트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끝까지 삽입된 한방으로 도윤의 허리가 공중에서 뒤틀려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 모습이 하민의 시선으론 흡사 종이 위에 붓으로 선을 그려 둔 듯 아름답게만 보였다.
제 아래 깔린 채로 꾹꾹 입을 다물고 자신의 것을 받아 내는 형을 바라보곤 그가 눈을 휘어 물었다.
“어때요, 형. 이제 마음에 들어?”
“아… 아흑… 하민 씨.”
“네. 저 여기 있어요 형. 나 어디 안 가. 왜 자꾸 부르는데?”
끝까지 들어온 단단한 성기가 몸 안쪽을 그 형태로 바꿔 놓는 것이 선연했다. 조금씩 움직이며 쳐올릴 때마다 풀렸던 공간으로 다시 똑같은 모양대로 채워지며 자잘하게 살이 달라붙었다. 더는 상세하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이리저리 몸이 침대에 처박히고 나니 그제야 도윤은 실감이 났다.
하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흥분했으며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런 그와 눈을 마주하고 허리를 움직이는 것이 너무나도 버겁다는 것을.
여러 번이고 하민이 허리를 강하게 쳐올리며 움직임을 지속했다. 철퍽이고 찌걱대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도윤은 손끝이 새하얘질 정도로 시트를 움켜쥐며 쾌감 어린 행위를 버텨 내려 애썼다.
“우리 형 착하다. 힘 조금만 더 풀어 볼래요? 이러다가 내 거 끊어지겠다. 응?”
여름 볕처럼 따뜻한 목소리가 도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 도윤은 숨을 고르며 힘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민은 그가 조금 더 편하게 힘을 풀 수 있도록 뚜렷한 형상의 복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도윤은 뜨거운 하민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안정을 느꼈다. 말로 하기엔 벅찬 쾌감에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 사랑해요.”
“헉, 헉.”
“사랑해 형.”
끊임없이 하민은 도윤의 사랑을 갈구했다. 확인받고 싶어 하듯 쉴 새 없이 익숙한 이름을 부르며 사랑에 대한 대답을 주기 원했다. 하지만 현재 도윤은 그리 여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몸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딱딱한 성기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고 그걸 겨우 버텨 내며 헉헉 거친 숨만 쉬어 댔다.
집요하게도 건네 오는 사랑한단 말에 도윤은 머리가 멍해지며 이명이 일었다. 삐- 소리가 심장이 멈췄을 때의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아니게 된 것만 같은 그 기분이 참으로 이상했다.
도윤은 그 소리를 언제 한번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상세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그저 삐- 길게 울리는 이명 소리에 예전 상처로 벗어나지 못한 우도윤은 완벽하게 소멸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헉헉대며 까무룩 꺼져 버릴 정신을 부여잡은 도윤이 드디어 사랑한다는 말에 대답했다.
“저도 하민 씨가 좋아요. 사랑해요.”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해서 그럴까. 고작 한 단어를 입 밖으로 끄집어낸 것에 불과한데도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조이며 거친 숨을 토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하민이 박차를 가하며 피스톤질 속도를 높여 갔다.
“하윽 아! 하민 씨 천천히 해요, 제발… 천천히.”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이자 이를 견뎌 내지 못한 도윤이 호소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하민은 그 목소리를 들을 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여유는커녕 다 쉬어 버린 부탁에 더 쾌감만 일 뿐 자비를 보이긴 어려웠다.
내벽 자극이 점점 더 심해졌다. 선명하게 드나드는 하민의 성기가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지 이젠 눈을 감고도 다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몇 번이고 내벽을 쑤셔 대며 자신을 각인시켜 나가는 하민에게 도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계라는 걸 깨달을 시점이 되자 하민이 도윤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바뀐 자세 탓에 배 안쪽 가장 깊숙한 부분이 불룩 튀어 올라 배 밖으로 선명한 흔적을 남겼다.
“으… 으학-!”
척추가 곧게 펴지면서 고통스러운 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자욱했던 페로몬은 요동쳤고 하민의 눈은 더욱 차가운 레몬빛으로 변해 갔다.
도윤의 아랫배에 드나드는 굴곡진 흔적에 자꾸만 시선이 갔던 하민이 노골적으로 불룩 튀어나온 곳을 지그시 손바닥으로 눌렀다. 압력이 가해진 배가 응축되며 가뜩이나 좁아터진 몸 안이 더 꽉 조여지는가 싶더니 안쪽 깊숙한 곳에서 두근대는 맥박이 또렷이 들렸다.
“흐윽 아아… 하민 씨, 하민… 안 돼.”
“형 배가 생각보다 지방이 많이 없나 봐. 배 안쪽에서 드나드는 게 다 보여요.”
“흐윽- 그, 그건 커서….”
“아아. 내 좆이요?”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민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한 듯 헐떡거리는 도윤의 귀를 잘근 씹더니 픽 웃었다.
“그래서 형도 울 정도로 좋아하잖아.”
“흐으…….”
어금니를 꽉 물어도 고통스러운 신음은 멈추지 않고 새어 나왔다. 넋을 놓아 버릴 듯 진한 쾌락은 매번 무서웠고 적응하기 까다로운 것이었다. 도윤은 쩔쩔매며 하민의 뒷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힘겹게 숨을 골랐다. 몸 안에서 터질 듯 불어난 하민의 성기가 엉덩이부터 입 안까지 일직선으로 뚫고 나올 기세였다.
오메가들은 항상 이런 쾌락을 느끼는 걸까. 지금 같은 행위로 몸의 감각이 새겨지는 것을 참아 낼 수는 있는 걸까. 도통 알 수 없는 형질자들 간의 섹스를 하민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윤은 묘한 죄책감과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 행위가 끝나 버리면 끝에는 무엇이 남을지 두려웠다. 그를 더 물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들었고 더는 못하겠다고 엉금엉금 기어가 피하고 싶기도 했다. 난잡한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불규칙적으로 튕겨지는 허리를 움직여 어떻게 해서든지 하민이 드나드는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흐윽- 아아… 배가 터져…… 더는 안 돼.”
“괜찮아요. 쉽게 안 터져요.”
“아닌데… 아니야.”
“형이 침대 위에선 앙탈이 심하네.”
“으흑.”
가스가 찬 것처럼 배가 빵빵하게 부풀었다. 점점 더 격렬해지는 허릿짓에 하민만큼이나 커다란 도윤의 성기가 꺼떡거리며 진한 액체를 길게 늘어트렸다. 삽입으로만 질질 싸 대는 몸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자꾸만 도윤이 머리를 숙여 제 몸을 부정하고 나섰다.
“형 먼저 갈 정도로 그렇게 좋아요? 너무 야해요.”
“그만, 그만 말해요.”
“왜요. 야한 거 맞잖아.”
“빼… 빼 줘요 하민 씨. 배 속이 정말 이상해. 이상한데….”
이상하다는 말을 할 때마다 가까스로 버티고 선 도윤의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자신을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좁아터진 내벽은 움찔움찔 떨림을 반복했다. 이것이 쾌감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듯 입과 몸은 따로 노는 도윤의 모습에 하민은 점점 몸 안 깊숙이 분출하고 싶은 한계에 치닫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좋아서 그런 거야. 내가 좋아서요.”
“아아… 아!”
“나도 곧 쌀 거예요. 형 조금만 더 버텨 봐요.”
도윤이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도 이 이상은 무리였다. 한계점에 도달한 배 속도 몸도 모든 감각도 다 망가져 버릴 듯해서 무서웠다. 덩치가 큰 것과 섹스는 별개의 문제니, 그만두라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숨을 고르는 시간조차 부족했다. 겨우 한숨을 뱉을 때면 그때마다 하민은 숨 쉴 기회도 주지 않고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며 자신의 형체를 선명하게 남겼다.
“흐응 헉- 제발… 빼, 빼 줘….”
배 속이 너무 간지러워 하민에게 붙잡힌 손이 풀릴 때마다 주기적으로 배 아래로 향했다. 시원하게 사정하지 못하고 뚝뚝 흘려만 대는 것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안 돼요. 만지지 마. 왜 자꾸만 손이 아래로 가요?”
“흐으… 만지게 해 줘. 싸고 싶어.”
배로 향하는 구릿빛 손을 꽉 움켜쥐며 하민은 그의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잡힌 손을 벌벌벌 떨면서 눈물이 고인 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미치도록 사랑스러워서 정신이 나가 버릴 지경이었다.
“제발… 하민 씨 제발.”
“그럼 같이 싸요. 나도 쌀게.”
갈증이 일 정도로 기다렸던 말에 도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자신의 성기가 고개에 맞춰 하늘로 처박힌다는 생각도 못하는 듯했다.
줄곧 애원만 하며 어쩔 줄 모르던 도윤의 발가락이 안으로 둥글게 말렸다. 슬슬 절정에 다다른 듯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이제는 잘 쉬어지지도 않는 숨을 억지로 고르며 도윤의 입술이 창백하게 변할 때까지 하민은 그를 꽉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정 안 되겠는지 도윤은 등을 둥글게 말더니 꽉 찬 배를 부여잡았다. 섹스를 하며 흘린 땀이 구릿빛 피부에 번들거리는 모습이 하민의 시야에 노골적으로 들어왔다.
“하-. 씨발. 못 참겠네.”
버티기 힘든 자극에 떠는 참지 못한 하민이 은연중 튀어나온 거친 욕설과 함께 한계를 토해 냈다.
“아! 나, 나와!”
“흣.”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하민의 성기가 여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었다. 진한 액체가 도윤의 배 속 깊숙이 흩뿌려졌고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 내는 도윤도 선연하게 배에 뿌려진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소유욕이 짙은 우성 알파의 노팅이었다.
윗배를 가득 채운 정액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도윤도 허공에서 참아 왔던 사정을 끝냈다. 투툭 소리를 내며 침대 시트 위를 더럽힌 정액은 땀과 함께 뒤엉켜 묽은 빛을 띠었다.
도윤은 무릎을 세운 채로 힘겹게 남은 숨을 몰아쉬었고 하민은 그런 그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고 체온이 식지 않도록 도왔다.
“있잖아요.”
“네.”
옆에 거추장스럽게 굴러다니는 핑크색 성인 기구를 쳐다보다 손에 든 하민은 도윤의 눈앞에 가져다 대곤 물었다.
“형, 이것보다 제가 더 좋죠?”
“……네.”
머뭇대며 대답한 목소리에 약간의 거친 숨이 섞여 흘렀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사람을 더 나쁘게 몰아넣는다. 노팅을 끝내도 영영 형 몸 안에서 나가기 싫은 고집을 세우게 만드는 것이다.
“역시 형은 솔직해서 좋아요.”
“하민 씨도 솔직하네요.”
여운이 가신 건지 다시 무뚝뚝함이 배어 나오는 도윤의 말투에 하민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형. 저 몸 안에다가 했는데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배앓이할 수도 있는데도?”
“상관없어요. 전 어차피 임신할 수 있는 몸도 아니라서…… 아무리 안에 싸 봤자-”
“그 말, 앞으로 절대 제 앞에서 하지 말아요. 또 그러면 진짜 화낼 거야.”
“하민…….”
“부탁해요.”
진정 어린 말에 도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그러라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요.”
“형… 도윤 형…….”
“네.”
그저 그가 무덤덤하게 건넨 말인 줄은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하민이 마음을 안 쓰는 건 아니었다. 괜히 마음이 쓰였고 미안했다. 어린 놈의 고집을 억지로 받아 주느라고 고생하진 않았을까 혹은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다.
수많은 생각이 미치자 하민은 도윤의 몸 안에서 나가지 않은 채로 조금 더 강하게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도윤은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미안해요 형. 앞으로는 제가 더 잘할게요.”
“제가 원해서 그러라고 한 건데 하민 씨가 왜 사과를 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에 놀랐는지 도윤이 고개를 돌려 한번 하민을 슬쩍 쳐다봤다. 표정은 평소처럼 무덤덤했지만 두 눈은 작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민은 그 모습이 또 너무 좋고 행복해서 도윤에게 쪽 소리가 날 정도로 뽀뽀를 해 댔다.
“하아-. 형 진짜… 아무한테나 그렇게 친절하게 굴지 말아요. 다음번엔 콘돔 꼭 끼고 할게요. 꼭이요. 그리고 앞으로는 저런 기구 같은 것도 안 쓸게요.”
“네?”
마지막 뽀뽀 세례를 받은 도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성인 기구를 바라봤다. 이 많은 것을 버린다는 소린가? 한눈에 보아도 족히 몇십만 원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사신 것들 다 비싸 보이는데요?”
“뭐 비싸긴 비싸죠. 그래도 형이 기구로 가는 것보다 제 거로 가는 게 더 꼴리거든요. 이성이 달아나 버릴 지경이라니까.”
“아…… 네.”
어려서 그런가 하민은 못하는 소리가 없었다. 평소에는 그런 말을 전혀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야한 농담을 내뱉는 것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따지고 보면 관계를 가진 시간 내내 침대 위에서 하민은 참으로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댔다. 그리고 많은 말들 중 정상적인 것보단 야한 내용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도윤은 용케도 저질스러운 농담을 받으며 잘도 버텼다 싶었는지 뒤늦게 몰려오는 수치심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더군다나 노팅을 끝냈음에도 아직도 몸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하민의 성기는 여전히 팔팔한 듯 보여서 더더욱 그랬다.
“배 아프니까 이제 그만 빼요.”
시선을 피하며 도윤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땀 때문에 반질반질해진 감자 같은 이마엔 힘을 써서 그런지 굵은 핏줄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하민은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워 그에게 입맞춤을 했다.
“에이- 계속 꽂고 있으니까 부끄러워요? 괜찮아요. 섹스할 때 형 진짜 사랑스러웠어요. 그러니까 저 피하지 말고 얼굴 좀 봐 줘요. 네?”
능글맞게 또 이상한 말을 해 대는 하민을 향해 도윤이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은 좀-.”
쪽.
“…….”
하던 말을 완벽하게 집어삼키려고 작정했는지 새처럼 쪼아 대는 가벼운 키스가 다시 한번 도윤의 입술을 덮쳤다.
도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물끄러미 하민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느새 하민의 길고 큰 손이 도윤의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형. 저기 있잖아요? 제가 한 번으론 부족한 것 같거든요. 미안한데 우리 몇 번만 더 할래요? 일단 잠은 재워 줄 테니까 조금만 더요. 버틸 수 있잖아요.”
“진심이에요?”
“아 물론!”
벙찐 도윤의 얼굴을 보며 재차 노란 눈을 희번득거리던 하민이 도윤을 빠르게 침대에 도로 눕혔다.
“당연히 진심이죠.”
여우같이 새초롬하게 눈을 빛내는 하민은 도윤의 다리를 들어 발목을 핥으며 눈을 맞춰 왔다.
“더 해요 형. 지금보다 더 잘해 줄게요.”
자신있다는 어투로 말하는 그를 보니 도윤은 거절할 명분도, 당해 낼 재간도 서지 않았다. 분명 자신이 형인 데다 덩치까지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여러 번 그에게 끌려만 다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건 말하지 말고 그냥 해요.”
똑바로 하민의 눈을 마주보며 도윤이 최종 답변을 내놓자마자 하민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쓰러지듯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뭉근하게 잘 풀려 버린 엉덩이 사이로 무리 없이 두 사람이 겹쳐졌다.
다행인 것은 무더운 더위가 곧 가시려는지 여름의 밤은 몇 개월 전보단 많이 길어져 있었다.
바스락바스락대는 소리가 아침 잠을 깨웠다. 어디서 들리는지도 모를 저 먼 곳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아침을 알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체온이 하민의 발끝에 스쳤다. 굳은살이 상당해 보이는 표면과 더불어 묘한 감각이 아침부터 심장을 난동질하게 만들었다.
“……진짜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하민이 넋을 잃고 눈을 꿈뻑였다. 숨결이 닿을 만한 코앞에 자신이 어젯밤 물고 뜯고 흡입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한낱 꿈인 줄로만 알았던 어젯밤의 행위들이 알고 보니 명백한 현실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순간 배 속 안에서부터 이리 튀고 저리 튀는 페로몬 통에 하민은 꽤 고생했다. 혹여라도 아침부터 짐승처럼 변해 버릴까 봐,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베타임에도 함부로 페로몬을 뿜지 않도록 노력했던 것이다.
자꾸만 배가 알싸하게 아팠지만 그래도 좋았다.
형이… 우도윤이 자신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 참을 수 있었다.
“형, 자요?”
“…….”
고요한 움직임을 향해 하민이 물었다. 1초, 1분, 더 나아가서 5분이 지나도록 숨소리만 들릴 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형 꿀잠 자네. 자는 모습도 잘생겼어.”
하민은 지금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마냥 행복해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몇 초 동안 바보처럼 픽픽거리다가 꼼지락대며 침대 옆 협탁 쪽으로 손을 뻗었다. 기나긴 밤 둘이서 함께 몸을 섞고 있을 때 시끄럽게 울려 댄 핸드폰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돌겠다.”
핸드폰을 확인한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화면에는 온통 아버지가 남긴 부재중 전화와 짤막한 메세지가 남겨져 있었다. 곧 돌아오라는 등의 듣기 싫은 말만 잔뜩인 채로.
하민은 메세지를 읽었으나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겨우 이어진 마음에 재 따윈 뿌리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와- 싫다. 시간이 뭐 이렇게 빨리 가.”
투덜투덜거리다가 하민은 투정을 부리듯 벌거벗은 도윤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금세 단단한 아니, 말랑하게 풀린 구릿빛 엉덩이 사이로 아침부터 건강한 자신의 성기가 맞닿았다.
“아 존나 떨어지기 싫다. 이제 내 건데… 내 거잖아.”
도윤의 참기 힘든 살 내음과 포근한 체온이 하민에게 고통과 행복을 동시에 안겨다 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떠나기 싫은 마음과 떠나야만 한다는 마음이 이리저리 충돌해서 골이 아팠다.
그냥 계속 함께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 진짜 서울 가기 싫어. 6개월 안에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지금은 형 때문에 너무 가기 싫은데, 저 어쩌죠? 형 나 좀 잡아 줘 봐. 어제처럼 꽉 물고 놓지 말라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갈증이 일었던 하민이 도윤의 등 위로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곧 말랑했던 등이 꿀렁대며 움직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허리에 휘감긴 팔 위로 굳은살이 두툼하게 박인 손이 얹어졌다.
“…그래서 하민 씨는 돌아…갈 거예요…?”
“어, 형 안 자고 있었어요?”
잠에서 막 깬 도윤의 목소리는 목구멍이 다 말라 버렸는지 쩍쩍 갈라진 소리를 냈다. ‘언제 깼어요?’ 재차 묻는 말에 이번엔 아무런 답도 하지 않던 도윤은 어깨만 들썩이며 고른 숨을 쉴 뿐이다. 그 모습을 눈에 담은 채로 하민이 또다시 등에 이마를 묻고 부비적거리며 투정을 부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답답함에 하민이 애타는 목소리로 칭얼댔다.
“형… 무슨 말이라도 해 줘요.”
하민은 도윤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어 끌어 안았다. 아무런 말도 없는 형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런 마음을 쉽게쉽게 생각하며 실망하는 자신이 어리숙해서 짜증이 일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체온과 숨소리에만 의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고른 숨을 멈추고 먼저 목소리를 낸 건 다름 아닌 도윤 쪽이었다.
“돌아가기 싫어도 돌아가요.”
“…….”
“돌아가게 되면… 저한테 미리 이야기만 해 줘요.”
“……저 정말 돌아가요?”
처량한 목소리와 더불어 주위를 가득 채웠던 페퍼민트 향이 걷혔다. 도윤은 전혀 모를 잔향만이 그 주위를 간간이 배회할 뿐, 짙은 농도는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허리에 감긴 팔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걸 도윤은 고스란히 느꼈다. 눈을 보고 마주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삐졌다는 사실을 평소 둔했던 그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가야죠.”
햇볕에 잘 말려진 이불을 발로 밀어 내며 도윤이 몸을 일으켰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아하니 평소보다 더 늦은 아침을 맞이한 참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제야 허리에 감겨 있던 하민의 팔이 완벽하게 떨어져 나갔다.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함께 뜨거웠던 여름 끝자락에 열기가 올랐던 체온도 사라졌다.
“형.”
쨍한 햇빛으로 일광욕하는 등을 바라보며 하민이 나지막하게 도윤을 불렀다.
뜸을 들이는 듯하다가 여태 등을 지고 있던 고개가 하민을 향했다. 목을 시작으로 허리 위쪽까지 봉긋하게 솟은 엉덩이까지, 모기한테 물린 것처럼 울긋불긋한 흔적들이 근육 결을 따라 변형하며 뒤틀렸다.
그리고…….
“잘 잤어요? 하민 씨, 좋은 아침이에요.”
도윤의 눈도 입가도 매끄럽게 변형했다.
그건, 격렬하고 뜨거웠던 하룻밤에 첫 정사를 치른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태연한 미소였다.
그 후 몇십 분 뒤, 하민과 도윤은 간단히 늦은 아침을 차려 먹기로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처음으로 끝까지 했던 터라 도윤은 어기적거리며 낯선 공간을 배회했고 하민은 그런 그를 힘을 써서 억지로 눕혀 둔 채 허리를 주물렀다.
중간중간 윽윽 터지는 도윤의 신음 때문에 다시 하체로 피가 쏠렸지만 하민은 기어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참았다.
하지만 이는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허리를 주물러 주는 손길이 점점 아래로 향하자 어제의 낯뜨거웠던 행위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도윤도 오늘 하루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고,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테니 더 밍기적거리면 난감했다.
“…하민 씨. 이제 그만 됐어요.”
“아… 그래요? 더 해 줄 수 있는데.”
“네? 무얼….”
“어…… 형?”
순간적으로 지나간 짧은 대화에 야한 생각이 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하민도 도윤도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서로 귓가를 붉히고 저 멀리 쨍쨍한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 가라앉히기를 수십 번 하고 나서야 둘은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었다.
이토록 눈만 마주쳐도 이젠 너무 행복하고 좋은데… 그런데 깊은 마음속 어딘가에선 조만간 다가올 미래가 떠올랐다.
‘이제 하민 씨는 서울로 돌아가시겠지.’
‘형도 여기 있는데…… 집에 가기 싫어.’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웃고 떠들며 눈을 맞추는 순간에도 하민과 도윤은 매순간 같은 상념에 사로잡혔다.
떨어지기 싫어하면서도 보내 줘야 한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천천히 그다음 과정을 떠올렸다.
그와 헤어지기 싫었다.
하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메세지를 보내도 답이 없던 아들을 나무라기 위해서 아버지께서 손수 전화를 한 것이었다.
가벼운 다툼이 오갔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았으나 얼마 안 가 언성은 점점 높아졌다. 그러면서도 하민은 계속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어필하고 나섰다.
돌아가는 조건하에 내걸은 것들이었다.
“쫓아낼 땐 언제시고 무턱대고 돌아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냥 아버지께서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시면 갈게요.”
-네 녀석은! 못난 아들 때문에 어머니가 속이 타들어 가는 건 나 몰라라 하겠다는 거냐?
아버지의 말을 들은 하민은 재차 언성을 높히며 말했다.
“그러시면 절 쫓아내지 말았어야죠! 전 여기서 잘 지내고 있으니까-.”
-수정 씨가 아들놈 잘 못 지낸다고 말하길래 걱정 좀 했더니…… 뭐? 잘 지내고 있어? 거기에 좋은 거라도 숨겨 놓은 게야?
“……아버지가 알 게 뭐예요.”
-…….
입씨름을 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정적이 흘렀다. 한숨은 깊어졌고 더 말을 끌어가기엔 하민의 상태는 너무나도 안 좋았다.
가뜩이나 도윤과 더 있고 싶은 마음을 접고 아망떼에 억지로 출근을 한 터였다. 혼자서 점심을 꾸역꾸역 먹고 나니 속이 얹힐 것 같기도 했다.
꽃에서 나는 향이 처음으로 지독하다고 느꼈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현재 페로몬을 숨기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보다 더 강한 향을 뿜어 대는 꽃들 사이에서 하민은 혼자서 숨을 죽이고 몇 번이고 고개를 떨궜다.
그 와중에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감정이 가장 날뛰고 불안정할 바로 그 순간에.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끊을게요.”
-윤하…!
제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전화를 끊은 하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 한 켠이 좋지 않았다. 뒤늦게 미안한 감정이 들어 죄송하다며 문자라도 남길까 고민도 했다.
몇 분을 허비하며 핸드폰만 쥐며 끙끙거리던 끝에, 갈팡질팡하는 하민을 붙들어 줄 연락이 뒤이어 당도했다.
다름 아닌…….
엄마남편
아버지가 잘못했다. 서울로 삼일 안에 돌아 와. 이제 나도 많이 늙어서 후계자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거 너도 잘 알테다. 와서 딱 반년만 얌전히 경영수업 들으면서 후계자 절차 밟아. 그럼 원하는 대로 소원도 들어주마. 엄마 아빤 네가 필요해. 오후 14:15
아버지의 회유라니.
“허…….”
그걸 본 하민은 헛웃음이 터졌다. 능구렁이 같은 아버지의 행동을 보자니 자신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아버지는 날 너무 잘 아신단 말야. 근데 반년이라…… 반년.”
후계자가 되면 오메가나 만나라는 고지식한 아버지의 뜻을 꺾을 수도 있고 권력도 생긴다. 원하는 일을 모두 이룰 수 있는 밑거름을 더 튼튼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뜻이다.
‘한국대 경찰경호학과라고 했지.’
딱 반년이다. 죽은 듯이 반년만 잘 참으면 도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서울로 데려와서 평생 묶어 두면 되지 않을까?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거야.’
그럼 돌아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고민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도윤과 함께하기 위해서라도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그날 하민은 평소보다 일찍 아망떼의 문을 닫았다. 정성스레 손수 포장한 꽃을 도윤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기대감은 부풀었다.
고민이 해결되어 산뜻해진 걸음과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묵직한 걸음을 동반한 채 아망떼를 나섰다. 하민이 고른 꽃은 제 상황의 의미가 잘 담겨 있었다. 품엔 어둠 속에도 차갑게 색을 빛내는 파란 장미가 들려 있었다.
안개꽃에 싸여 더 차갑게 보이는 파란 장미는 흡사 파도같이 보일 정도로 강렬했다.
맨 처음 도윤을 향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어 사랑을 전달한 지난날이 떠올랐다.
막무가내인 파도. 시원한 페퍼민트를 머금은 페로몬 향. 그리고 파란색 장미.
파란색 장미는 불가능함,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녔지만 그 의미가 퇴색되어 새로운 꽃말이 생겨났다.
파란 장미의 현재 꽃말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 기적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이고 있었다. 도윤에게 빨간 장미가 아닌 또 다른 꽃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하민은 고민과 고민을 거듭하여 파란 장미를 떠올렸다.
자신과 똑 닮은 파란 장미.
윤하민의 마지막 마음을 대변하기로는 원주에서 헤어지기 전 도윤에게 줄 꽃 선물로 제격인 듯했다.
“만나면 바로 영화부터 볼까. 아니지. 형 아직 밥 안 먹었겠지? 밥부터 먹어야겠다. 뭘 먹이지? 형이 뭘 잘 먹었더라.”
하민이 톡을 하며 길을 걸었다. 깔끔하게 ‘형 밥 먹었어요?’라는 말을 보낸 게 전부였다. 답장은 금방 받았다. ‘이미 먹었어요. 하민 씨는요?’ 하는 상냥한 글이었다. 실은 속이 좋지 않아서 입에 음식이 안 들어간다는 말을 하려다가 걱정할까 봐 애써 둘러댔다.
‘저도 이미 먹었어요. 조만간 봐요.’라고 톡을 보내고 하민은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빌라 앞 자갈길을 사부작사부작 걸으며 그 순간에도 도윤을 떠올린다. 매번 지치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을 습관처럼 떠올렸다. 이젠 그가 없는 삶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자신도 모르고 지나갔을 곪아 버린 상처를 알아봐 주고 아물게 도와준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냥 우도윤이라는 그 저체가 절실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다.”
파란 장미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하민이 깜깜한 하늘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선 고개를 들었다. 어둑해진 길가를 밝혀 주기 위해 가로등이 켜졌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형…?”
가을에 맞게 머리카락이 길어진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하민과 마찬가지로 꽃다발을 들고 가로등 아래서 서성이고 있었다. 얼마나 자신을 기다린 걸까? 과연 얼마 동안이나.
일순 하민의 숨이 멈췄다. 어김없이 귀 끝이 달아올랐고 마음이 아플 정도로 두근대었다. 마지막으로 그런 도윤과 시선이 마주했을 땐…….
“아, 하민 씨 왔어요? 보고 싶어서 기다렸어요.”
“…….”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하민은 파란 장미를 도윤은 빨간 장미를 서로에게 건넸다. 하민이 도윤에게 왠 꽃이냐고 물었고 그는 매 순간 단순하고 덤덤한 그답게 답했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한테 주는 꽃 선물로는 이게 가장 기본적이라고 추천해서요.”
“아… 좋아…하는 사람이요.”
“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숨에 말하는 도윤은 특별한 표정이 없다. 너무나 그다운 행동에 하민은 부끄럽다가도 재미있어서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 도윤을 보았을 당시만 해도 꽃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자신이 준비해 간 빨간 장미를 들이밀 때면 저 무뚝뚝한 얼굴도 금세 표정을 한층 더 굳히며 어쩔 줄 몰라 했으니까.
그때를 떠올려 보면 지금 이 사람은 장족의 발전을 거둔 셈이다. 다 자신을 만나면서부터 바뀌어 나가더니 마침내 이루어 낸 쾌거 같은 것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꽃 선물 해 봐요.”
“정말요? 이거 영광인데요. 처음엔 형이 꽃 정말 안 좋아했잖아요.”
“그냥 어색했던 거지 안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그랬어요? 형이 한 말이니까…… 그럼 믿어 주죠, 뭐.”
손끝으로 꽃잎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입매도 행복에 겨워 올라간 것이 보였다. 두 눈은 감동한 듯 물기 어린 빛을 띠었다. 하민은 그렇게 자신의 행복감을 풍부하게 표현했다.
“형 너무 고마워요. 저 정말 기뻐요.”
도윤한테서 꽃 선물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민이 기뻐하며 빨간 장미의 향기를 맡으며 행복하게 웃었다. 도윤도 그를 따라서 웃으며 색만 다를 뿐 똑같은 형태의 장미를 바라봤다. 문뜩 파란 장미의 꽃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파란 장미도 무슨 뜻이 있어요?”
“뜻이요?”
“네. 왜 있잖아요. 꽃말? 그런 거요.”
“아…… 꽃말.”
궁금함에 뚫어져라 하민을 쳐다보던 도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대방을 바라보며 그가 꽃말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도윤은 단념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이어지는 하민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냥 형이 저랑 데이트하고 나서 직접 찾아봐요. 우리 지금 당장 데이트하러 갈래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거리를 보폭을 맞추며 손을 맞잡고 걸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손을 잡다가 하민이 먼저 도윤의 손가락을 매만지더니 불쑥 단단히 깍지를 꼈다. 이에 화답하듯 도윤은 고개를 빳빳이 든 상태로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맨 처음 만났을 때 절뚝거리던 도윤의 걸음은 이제 온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민은 도윤을 배려하며 걸었다. 아주 천천히 이 시간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길 바랐다.
“형이 먼저 데이트하자고 제안해 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요?”
“네. 제가 형보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선수 쳐 버린 형한테 분하기도 하고…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저도요.”
“네?”
기분 좋은 가을 밤바람을 느끼던 하민이 바람결에 묻혀 버린 도윤의 목소리를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점점 거세지는 바람 소리에 그가 자신의 말을 못 들었다는 걸 알아차린 도윤이 한 번 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제 마음을 전했다.
“저도 하민 씨랑 데이트할 수 있어서 기분 좋아요.”
“……와 …네.”
단도직입적인 말에 하민이 붕어처럼 입만 뻥긋대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휙 돌렸다. 목이 칼칼한 것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으로 여기면서도 이 분위기가 긴장되고 좋아서 옆에 있는 사람과 키스하며 목을 축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한번 몸을 섞고 나니 주체하기가 힘들 정도로 성적인 마음까지 불어난 상태였다. 하루에도 여러 번 형을 붙들고 자신을 받아 주길 바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고 나면 몸을 웅크리며 가고 싶지 않아서 밤새 발버둥 쳤다.
하민은 그토록 도윤을 두고 서울로 돌아가기 싫었다. 6개월이란 시간이 무색했다.
씁쓸한 쓴맛이 입 안을 감돌았다. 기뻤지만 한편으론 슬펐다. 그런 하민의 마음을 도윤도 똑같이 느끼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려고 애썼다. 지금도 함께하는 시간은 자꾸만 흐르고 있는데 헛되이 시간을 축내긴 싫었다.
좋다는 감정을 깨달아 버린 도윤은 끝도 없이 처음으로 욕심을 갈구했다. 그건 별거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욕구 같은 것이었다.
“어느 장르 영화를 좋아해요?”
“저요? 전 그냥 아무거나 잘 봐요. 근데 오늘은 로맨스 영화보단 다른 게 끌리는데… 형은 어때요?”
“저도 다 잘 봐요.”
“그럼 우리 영화관 가자마자 가장 빠른 영화로 예매할까요? 제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어차피 평일 심야 시간대는 사람도 많이 없을 거래요.”
그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갈까요? 근데 형 우리 더 천천히 걸어요. 날도 선선하고 좋은데 마지막이라도 조금만 더 형이랑 걷고 싶어요.”
도윤은 답하지 않고 맞잡고 흔들던 손을 멈췄다. 천천히 고개가 상대방을 향해 돌아갔다. 역광으로 깜깜해진 하민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눈치가 없는 자신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하민은 지금 순간을 더 늘리고 싶은 듯 보였다. 마지막이라는 그 단어 하나로 모든 걸 알게 되었다.
하민이 고개를 떨궜다. 맞잡은 손에서 가을바람에 식은 체온이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 둘의 시간도 점차 사라져 갔다. 저 멀리 훌쩍 떠나 버린 올해의 여름처럼.
“저… 내일모레 서울로 돌아가요.”
“…….”
‘그렇게 빨리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도윤은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말하게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하민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까 전보다 더 천천히 걸으며 맞잡은 손을 놓지 않고 흔드는 수밖에 없다는 걸 도윤은 누구보다도 깊게 깨달았다.
즉흥적으로 고른 영화는 의외였다. 영화관에 도착했을 때 바로 상영 준비 중이라는 장르는 아포칼립스물이었다. 하민은 그걸 보며 뭐든 잘 본다는 말과는 달리 사색이 되어 핸드폰으로 급히 서치를 하는 것 같았지만 도윤은 예상대로 무덤덤했다.
한참을 살펴본 끝에 하민은 마른 목구멍에 침을 삼키며 몸통 반이나 되는 패널을 바들바들 떨며 터치했다. 몇 번이나 심혈을 기울여 고른 끝에 결제까지 마친 그의 손엔 영수증처럼 생긴 영화 티켓 두 장이 들려 있었다.
예상과는 전혀 빗나간 영화였지만 상영관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무도 없이 휑한 자태에 하민은 이 영화를 고른 자신을 흡족해했다. 반면 그런 그를 바라보던 도윤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형 저 거짓말 친 게 있어요.”
“뭔데요?”
되묻는 도윤의 팔목을 꽉 붙들며 하민이 어색하게 웃더니 이실직고했다.
“실은 저 아포칼립스물은 잘 못 봐요….”
“아……. 그럼 딴 영화 볼까요? 일어나요, 하민 씨.”
“자, 잠깐! 잠깐만요 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벌떡 일어서는 도윤의 허리를 낚아채며 하민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도윤이 방금 전 앉았던 자리 위로 쓰러지듯 다시 앉았다. 조금 놀란 눈으로 하민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하민이 ‘그냥 봐요.’라며 작게 읊조렸다. 하는 수 없이 도윤은 자세를 고쳐 잡고 다시 영화 감상 할 준비를 마쳤다.
그래도 여전히 긴장된 얼굴을 한 하민이 영 신경이 쓰였다. 못 보면 못 본다고 미리 말하지… 은근히 미련한 구석이 있구나 싶었다.
“하민 씨 정 못 보겠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도중에 나가도 전 상관없으니까요.”
“하하, 네……. 역시 형밖에 없어요.”
“…….”
하민이 어색하게 웃었지만 입과 눈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도윤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아주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포칼립스물답게 종종 잔인한 부분이 튀어나오면 하민은 예상대로 ‘으악!’ 소리를 치며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그때마다 도윤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상영관에 몇 번이나 괴성이 울렸지만 하민은 끝끝내 영화의 엔딩까지 참아 냈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연신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하민이 재잘재잘 영화 내용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또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윤은 열심히 경청해 줬다. 크게 리액션을 보이며 맞장구를 쳐 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던지라 화려하게 ‘맞다, 맞아’라고 말하진 못했지만. 아포칼립스 장르를 보고 신나게 떠드는 그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려 애썼다.
영화관을 나와서 두 사람은 각자 파란 장미와 빨간 장미를 든 채로 다시 빌라까지 걸어갔다. 길게 쭉 나 있는 도로 옆 보도를 걸으며 영화관에 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천천히 걸었다.
멀리서 보면 덩치 큰 감자같이 잘 그을린 남자와 하얀 점토를 성심껏 빚어 놓은 인형 같은 남자가 서로를 의지하며 둘만의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걸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잘 알았기에 헤어짐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잡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점점 빠져나갔지만 각자 든 서로 다른 색의 장미 꽃다발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하민도 도윤도 어느샌가 잡고 있던 힘이 다 반대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날씨 참 좋다. 벌써 가을이네요.”
“그러게요.”
익숙해진 경치를 훑으며 운을 뗀 하민이 눈을 감았다. 밤바람 결에 살랑이는 얇은 하민의 머리카락이 그의 눈가와 콧날을 가렸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형상에 도윤은 마치 꿈이라도 깨려는 듯 두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아무리 그렇게 한들 사라지지 않는 그 광경에 꿈이 아님을 깨닫게 될때까지 한참 동안 그랬다.
어느새 자갈길 옆에 나 있는 언덕길까지 당도했다. 저 언덕을 오르면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하민으로서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었으나 도윤은 마음이 답답하고 무언가를 정리할 시점에는 늘상 오르던 길이었다.
빌라 옥상이 하늘 끝에 걸리자 하민의 발걸음은 거의 멈추다시피 느려졌다.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좀 차네요. 그러고 보니 형은 체온이 저보다 높던데… 같이 있을 때마다 느껴지더라고.”
“그건 하민 씨랑 있어서 그런 거예요. 원래는 체온이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에요.”
“아- 그래요? 왜 체온이 높았을까? 제가 너무 잘하긴 했죠?”
“……지금 저 놀리는-.”
야한 농담에 생색이라도 내려고 하민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표정을 보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하민은 곧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스로 자각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고 도윤은 아무 말 없이 하민의 손을 힘주어 잡고 언덕 위로 이끌었다.
하민은 아무런 말 없이 도윤을 따르면서도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여러 번이고 소매로 흠치며 훌쩍였다. 헤어져야 한다는 서운함에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니 눈물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흘렀다.
……어쩌면 가을바람이 차서 눈가가 쓸린 걸지도 모른다. 아파서 그럴 것이다. 이곳에 형을 혼자 두고 가야 하는 마음이 아파서.
하민은 소매로 눈물을 닦는 행위를 그만두었다. 침착해질 필요가 있었다. 다 큰 사람이 얼마나 이곳에서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 하민은 그냥 시간이 흐르는 대로 정처 없이 그에게 이끌린 채로 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그리고 얼마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정상에 올라섰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눈물로 얼룩진 두 뺨을 스쳤다. 금세 볼은 메말라서 따가워졌다. 역시 아파서 흘린 것이라며 변명 따위를 만들어 주는 듯했다.
고개를 들었을 땐 눈앞에 도윤이 슬픔이 어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또 무언가 터질 것 같았던 하민에게 묵직한 도윤의 목소리가 와 닿아 그를 달랬다.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멋진 목소리였다.
“하민 씨. 여기서 힘들었던 건 다 털어 버리고 떠나요.”
“형…….”
“저는 힘들 때마다 여기 와서 늘 다짐하거든요. 다 잘될 거라고 반복해서 주문을 거는 거예요. 그럼 또 살아갈 의미를 찾아요.”
“…….”
“하민 씨.”
아무 말 없이 탁 트인 야경을 바라보던 하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를 바라봤다. 도윤이 오늘 처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황홀한 미소였다.
“전 하민 씨를 절대로 잊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하민 씨도 절 잊지 말아요.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그러다가 후에 제가 생각나지 않게 되더라도 원망은 안 할 테니까… 그냥 행복하게만 살아요. 전 그거면 돼요.”
“제발, 형.”
도윤의 말에 하민이 주저 앉았다. 더는 울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그를 망가트렸지만, 재미있고 신기하게도 마음은 더 잘 메운 듯 굳건해졌다.
그는 도윤이 없는 반년을 버틸 의미를 오늘 여기서 찾는 중이었다.
마음을 잡은 하민은 뒤늦게 쪽팔렸다. 도윤과 있으면 항상 감정이 제멋대로 삐죽거렸다. 눈물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맨날 질질 짜는 모습만 보인 듯해서 창피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눈물이 온데간데없이 쏙 들어갔다. 괜한 헛기침을 몇 번 하던 하민이 난간에 기대어 야경을 보는 도윤의 옆에 선 채로 똑같은 행동을 취했다.
“아- 날씨 좋다!”
“아깐 춥다면서요.”
“에이- 했던 말은 다 잊고 같이 즐겨 줄래요? 그냥 지금은 다 좋아요.”
언제 울었냐는 듯이 배시시 웃는 하민을 바라보며 도윤도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울지 말아요. 하민 씨 너무 자주 우시는 거 아닌가요.”
“그러게요. 저 맨날 우는 것 같은데 원래는 이렇게 울보는 아니란 말이죠.”
“아…… 네, 믿어 줄게요.”
“잠깐만요, 형 표정을 보니까 별로 믿어 주는 눈치가 아닌데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쳐다보니 도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큭큭거렸다. 너무나도 즐거워하는 도윤을 바라보니 모든 것이 다 신기해진 참이었다. 그를 처음 봤을 당시를 돌이켜 보면 결코 웃지 않을 것만 같은 얼굴로 자신을 대했던 것이 떠올랐으니.
이번 일로 깨달은 것이 많았다. 자신만큼이나 형도 많이 변했다는 것. 그걸 완벽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것. 혼자가 아닌 함께 걸어온 길 끝엔 각자가 성장한 듯하다는 착각이 일었다는 것.
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끝없이 펼쳐진 야경만 쳐다봤다. 앞으로는 볼 수 없을 것을 구경하는 재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 좋은 광경을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헤어지고 잠들기 전까지 통화를 주고받았다. 못다 했던 진지한 대화도 나눴고 시답지 않은 농담도 주고받았다. 그중 단연 많이 오갔던 내용은 앞으로 두 사람이 헤쳐 갈 길에 대한 부분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단 돌아가는 시기가 빠르네요.”
-그쵸? 저도 갑자기 아버지가 전화하셔서 그러니까 놀랐다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러게요.”
-그래도 전 꼭 형이랑 다시 만날 거니까 시끄러운 울보 놈 갔다고 바로 딴 놈 만나지 말고 내 생각만 해요. 아셨죠?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는 하민이 매우 진지해 보여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어요. 전 걱정하지 말아요. 누가 저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고 계속 그래요?”
-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잖아요!
“네, 그러니까 하민 씨만 빼고요.”
‘치-.’ 하는 소리가 통화 너머로 울렸다. 도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할 정도로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
-제가 톡으로 집 주소랑 다 남길 테니까 언제든지 생각나면 찾아와요. 서울로 돌아가면 저 바빠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요. 연락이 잘 안 될 수도 있는데 무조건이에요. 알았죠?
“그래요 알았어요. 걱정 말고 푹 주무세요. 내일 이삿짐 싸야죠. 저도 내일은 도와드리고 싶은데 슬슬 서에 가 봐야 해서…….”
말을 흐리는 도윤에게 이번엔 하민이 괜찮다며 밝게 말했다.
-에이, 제가 앤가?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고 이삿짐센터도 불러서 크게 할 건 없을 거예요. 형이야말로 경찰서 잘 다녀와요. 근데…… 복직…하실 거예요?
“아, 그건.”
복직이라는 단어에 도윤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애석하게도 복직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어떤 식으로 일을 갈무리해야 할지 고민만 늘어 가던 차였다.
그 마음을 재빨리 눈치챈 하민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재미있는 말만 꾸준히 늘어놓았다. 고민 많은 도윤이 편하게 잠들 시점까지 계속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지났을까? 띄엄띄엄 들리던 도윤의 대답도 완전히 끊겼다. 하민은 그가 잠들어 듣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말을 남긴 채 통화를 마쳤다.
-잘 자요 형. 다 잘될 거예요.
내일은 각자의 시간을 보낼 차례다.
짹짹짹 울리는 아침 새소리와 덜컹대며 빌라가 무너질 것 같은 소리에 도윤이 눈을 떴다. 누군가가 이삿짐을 옮기고 있는지 처음 듣는 목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공존해서 시끄럽게 울렸다.
“하아암-.”
찢어지게 하품하고 일어난 도윤이 티셔츠 사이로 손을 넣고 배를 벅벅 긁었다. 어느덧 그의 옷차림은 여름때와는 사뭇 달라진 긴팔 티셔츠와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채였다.
벽에 걸린 시계를 살피니 시간은 느즈막한 아침이었다. 오늘은 도윤도 바삐 움직여야 하는 날이어서 서둘러 침구를 정리하고 이불을 햇볕에 널었다.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페퍼민트 향이 가득한 차를 따뜻한 물로 우렸다. 차를 든 머그잔을 들고 도윤은 햇볕에 널어 둔 이불 옆에 섰다. 그러한 그의 눈앞엔 얇은 유리창 너머로 몇 개월 전 익숙했던 장면을 로테이션 시키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나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모르는 사람이 아닌 아는 사람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었다.
서서히 405호의 짐들이 꼬리를 물며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빠지지 않을 것만 같은 405호의 공간이 텅 비어 가는 중이었다.
“다들 고생하시네.”
후루룩 소리를 내며 따뜻한 페퍼민트 차를 들이켜던 도윤이 익숙한 하나의 인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마지막 짐이 트럭에 실릴 때까지 눈을 돌리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시고 있던 페퍼민트 차가 어느새 동이 나 버렸다. 도윤의 핸드폰은 여전히 아무런 톡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그렇게 한낱 여름날의 꿈처럼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푸릇했던 이파리가 붉게 물들어 자취를 감춰 버린 것처럼 그렇게.
“……정말 가네.”
턱을 괴고 인부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하민의 모습을 넌지시 지켜보며 한다는 말이 고작 이런 말 따위다.
모든 정리가 끝났는지 인부들이 부랴부랴 차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뒤편에 세워져 있던 승용차에서도 익숙한 인영이 우뚝 멈춰 섰다. 손에는 한번 본 듯한 핫핑크색 상자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 상자를 뒷좌석에 실었다.
도윤은 방금 실린 핫핑크색 상자가 무엇인 줄 잘 안다. 그가 자신에게 사용했던 형형색깔의 여러가지 물건들이 담겼으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부끄러워.’
핑크색 상자에 어느 것들이 들어가 있는지 익히 깨닫고 상기시키자 이상하게도 귀가 홧홧 달아올랐다. 가슴도 뜨거워졌고 더웠다. 마지막으로…….
‘형, 이것보다 제가 더 좋죠? 역시 형은 솔직해서 좋아요.’
“미쳤어.”
입으로 중얼거리며 야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다그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날의 정사가 떠올라서 부끄러움에 자꾸만 고개가 땅바닥을 향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익숙한 얼굴의 눈빛이 도윤을 향해 또렷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다. 다름 아닌 윤하민이라는 존재였다.
삽시간에 도윤의 눈이 커졌다. 곧장 부랴부랴 핸드폰을 찾아 톡을 켰다. 화면 위로 두툼한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마지막으로 전송 버튼을 누르며 그가 바깥에 있는 인영을 주시했다.
하민은 바지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어 빠르게 읽어 나갔다. 그의 입가에서 미소가 걸렸고 바로 고개를 들어 또다시 도윤과 눈을 맞춰 왔다.
하민은 활짝 웃으며 505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한마디뿐이었다.
잘 가요, 하민 씨. 연락할게요.
텅 비어 버린 405호는 또 다른 누군가로 채워질 것이고, 그를 떠나보낸 도윤도 피하지 않고 결단을 내릴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일은 피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떠난 이를 통해 배웠으니까.
때는 하민이 이사를 떠난 지 몇 주가 된 시점이다. 도윤은 그 때문에 정신없어 미뤄 두었던 일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나가는 중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복직 신청을 했으며 오랜만에 경찰서로 출근하여 얼굴을 내비췄다. 경찰서에 돌아가자마자 이미 커다란 후폭풍이 지나갔는지 시끌시끌하게 말을 옮기는 경찰들이 눈에 들어왔다.
“박재우 그만뒀다며?”
“그렇습니다. 아마 오메가로 발현해서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요.”
“어휴-. 세상사 모른다더니만 딱 그 꼴 아녀?”
“말도 마요. 베타인 줄 알았더니만 오메가라잖아. 아주 냄새를 뿌리고 다녔다더만. 그때 우 순경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치를 뻔-.”
“뭔 큰일을 치러요.”
“…….”
서 안으로 들어온 도윤이 내뱉은 한마디에 경찰서 내부는 쥐 죽은 듯 싸해졌다. 다들 자기 할 일을 하러 떠나거나 대화에 참여하지 않은 척 딴청을 피웠다. 누군가는 도윤을 바라보며 어깨를 툭툭 치더니 ‘고생해라’ 하는 뜬금없는 말을 하고 지나가기도 했다.
처음 느껴 보는 불편한 내부 상황에 골이 아파 왔다. 둔감한 그도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경찰서 내부의 가십거리는 단연 친구인 ‘박재우’에 관한 일이라는 것쯤은.
오랜만에 출근해서 그런지 도윤은 어째서 상황이 이 지경까지 흘렀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기를 무시하며 지나치는 다른 경찰관한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가십거리를 더욱더 늘려 주는 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그러지 않았다.
그냥 ‘우 순경은 박재우랑 친하잖아.’ 하며 보는 체 만 체 하는 몇몇 양심 없는 경찰들한테 신물이 날 뿐이었다.
분함에 주먹 쥐는 것밖에 할 수 없던 도윤이 크게 한숨을 지었다. 그 소리에 또다시 수군거리며 다들 그의 눈치를 봤다.
불쾌한 마음을 감추려고 하는 수 없이 겉옷을 챙겨 입고 경찰서 밖에 나와 쭈그려 앉았다. 담배가 많이 당겼지만 하민을 생각하며 참았다.
담배 냄새를 그가 좋아하진 않았던 기억이다. 물론 대놓고 싫다고 말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민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 눈치를 챈 후로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우 순경 답답하나?”
“김 경장님. 어쩐 일로 나오셨어요.”
한참 분을 삭이다가 익숙한 소리에 고개를 든 도윤이 김 경장이 나온 걸 확인하곤 아는 체를 했다. 김 경장도 그를 따라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냥 내도 답답해서 그런다. 저 양반들이 저리 떠드는데 내 기분이 뭣 같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뭐 니도 안카나?”
“네. 저도 똑같죠.”
심드렁하게 답한 도윤이 애꿎게 땅만 쳐다봤다. 그의 등에 쭈글쭈글한 손이 닿더니 두어 번 토닥거렸다. 김 경장 또한 유독 재우를 아끼던 분이었다. 재우 놈은 마음이 약하고 심성이 고와서 험한 경찰 양반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는 게 늘 마음이 쓰인다 그랬다.
“김 경장님은 저 없는 동안 별일 없으셨죠?”
안부를 묻는 말에 담배를 꼬나물던 김 경장이 힐끗 도윤을 쳐다봤다. 그의 행동이 ‘그래 보이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의미를 알아들은 도윤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턱이 우글우글해질 정도로 힘을 꽉 주며 무언가 말하고자 하던 것을 꿀떡 삼켰다.
김 경장은 담배 연기를 한 움큼 뿜더니 피식 실소했다.
“니도 가려면 가라. 재우 놈도 갔는데 우 순경도… 아니지. 도윤이 니도 이 양반들 죽도록 싫다카지 않았나. 내가 봐도 여긴 썩었지. 오메가가 뭔 대수라고 차별을 이리 해쌌는지.”
“……김 경장님은 제가 갔으면 좋겠습니까.”
“니가 간다카면 내 뭐라 말 못하지. 됐다, 마.”
씁쓸하게 뱉어진 말을 듣곤 도윤도 피식 실소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끈기 없는 놈이라고 김 경장님은 저 원망하지 마세요.”
“어허-! 원망 안 한다. 뭘 원망을 해싸. 안 한다. 안 해.”
“그럼…….”
도윤이 김 경장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안녕히 계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더 잘되면 연락드릴게요.”
재우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곳은 어느 한적한 횟집이었다. 고등학교 때 했던 말 중, 돈을 많이 벌면 거하게 횟집 풀코스를 즐기고 싶다는 재우가 그 기억을 끄집어내어 도윤을 이곳으로 부른 것이었다.
도윤이 횟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재우가 주문을 다 마쳐 둔 상태로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도윤은 가끔 재우가 이럴 때마다 두렵고 무서웠다.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이런 식으로 홀연히 떠나 버린 것을 은연중에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뭘 벌써부터 달리고 그래.”
“왔어?”
재우가 자작하려는 소주병을 뺏어 든 도윤이 빈 잔에 맑은 술을 가득 채워 넣었다. 그리고 본인 몫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두 사람은 익숙한 듯 한마디도 없이 술잔을 부딪혔다. 첫 잔은 원샷이라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스스럼없이 목구멍에 털었다. 쓴 향이 매웠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너무나 매웠다.
코끝을 찡그리며 이를 참던 도윤을 바라보며 재우가 픽 웃으며 놀려 먹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주는 고약하게도 못 마시는 놈이라고.
둘의 시간은 아무런 걱정도 지니지 않은 채로 몸만 커 버린 소년처럼 보이는 시기는 이미 저 멀리 지나 버렸다. 제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성인은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그다음 삶을 위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도윤도 재우도 그 끝에 함께할 친구가 이제는 없다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았기에 더욱더 그랬다.
침통한 마음이 들었다.
“도윤아. 나 그만뒀어.”
“……그래.”
씁쓸한 술맛이 입 안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도윤은 술병을 들었다. 혼자 따르지 말라며 친구를 말리던 재우가 도윤의 술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오메가로 몇 달 살아보니까 이것도 적응은 되더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너 그걸 말이라고 해?”
“야- 내가 뭐 애냐? 그냥… 친구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친구는 무슨. 먼저 꼬신 놈이 상의도 없이……. 말마따나 멋대로 그만둔 웬수 놈이 뭔 친구야.”
시간이 지나면서 투덜거리지 않게 된 친구가 도윤이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재우는 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친구는 하루아침에 어른이 되어 갔다. 본인만 남겨 두고 그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멋대로 감정을 잃어버렸다.
재우는 도윤이 행복했으면 했다. 울지 않았으면 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삶에 대한 의지를 찾길 바랐다. 마지막까지 그 길을 묵묵히 도와주며 지지해 주고 싶었지만….
재우는 이제 그럴 수가 없다. 자기 앞가림하는 것조차 삶은 너무나도 팍팍하고 힘들었다. 친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 봐.”
“오냐.”
이번에는 도윤이 재우의 술잔을 채웠다. 홀짝거리며 도윤의 눈치를 보던 그가 눈가를 찡그리며 작게 ‘크흐-.’ 소리를 내었다. 다 비우지 못한 술잔이 탁자에 놓였다. 재우는 그걸 하염없이 초점 나간 눈으로 바라봤다.
“도윤아. 나 없다고 끼니 거르지 마.”
“안 그래.”
“너도 그만뒀다는 말은 들었어. 김 경장님이 오늘 연락하셨더라고… 내가 네 앞길을 막은 건 아닌가 걱정이야.”
“뭔 말이 그래? 그냥 내 결정이야.”
“그래… 그렇지 참. 넌 원래 그런 놈이었어.”
반쯤 눈이 풀린 재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도윤은 그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두려웠다. 홀로 서는 자리에서 더 깊고 깊은 어둠만 느끼고 있진 않은지 그것이 두렵고도 염려스러웠다.
“재우야. 내 걱정 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
“뭐야? 우도윤이 요즘 계속 위로만 하네.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럼 더 오래 살아. 그래야지 이런 모습 평생 보지.”
“뭐라는 거야? 징그럽게. 이제 너랑 나랑은 여기서 각자 갈 길 가야지! 아 맞다, 안 그래도 너한테 할 말 있어서 불렀어.”
“뭔데?”
궁금해하는 도윤을 바라보며 옆에 둔 카디건 주머니에서 재우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으로 코팅된 네모반듯한 종이 한 장이었다.
“이거 받아.”
“명함?”
“어. 너도 기억할까 모르겠네. 우리 경찰경호학과 입학하자마자 군기 바짝 잡았던 선배 있잖아.”
“아-. 강기호 선배?”
“기억하네.”
“근데 그 선밴 왜…….”
앞에 있는 광어회를 낼름 집어 먹던 재우가 손을 번쩍 들더니 크게 소리쳤다.
“사장님! 여기 매운탕 소짜 하나요!”
이번에는 재우가 쿠킹 호일에 싸인 옥수수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내가 저번에 언뜻 말했지? 경호 업체 준비한다고 소식 들었다고 했던 거.”
“그랬지.”
“그 선배가 진짜 이번에 경호 업체 설립했다더라고. 꽤 크게 세운 모양이야. 들어 보니까 어느 기업에서 지원도 좀 받았다고 하더라. 동문들한텐 쭉 연락 돌린다고 했는데 선배가 네 안부도 겸사겸사 묻더라니까.”
“그래서 이건 왜 나한테 주는 건데?”
자신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는 듯 무뚝뚝하게 말하는 도윤을 보며 재우가 쯧쯧 혀를 찼다.
“왜긴. 너 퇴직했다며. 지금 백수 아니야? 관심 있으면 기호 선배한테 가 봐. 너라면 환영하실걸. 엄청 예뻐하셨잖아.”
“재우 넌-.”
“야. 놀리냐? 내가 거길 왜 가.”
“…….”
단도직입적인 친구 말에 인상만 쓰던 도윤이 결국 자작하는 재우를 빤히 응시했다.
연거푸 두 번이나 술을 비워 낸 그가 도윤을 향해 말했다.
“그쪽 계통 자체가 오메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거 알면서 그런다. 이제 익숙해져야지. 네 친구 박재우 새끼 오메가라고 말이야. 앞으론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아보려고. 아, 물론!”
“뭐.”
재우가 젓가락으로 도윤을 콕 찝으며 짓궂게 낄낄거렸다.
“합법적인 일로 찾아볼 거야. 유교맨의 친구를 뒀다면 응당 그래야지.”
“나참-, 또 뭐라고.”
도란도란 몇 마디 더 나누다 보니 광어회 반이 비워졌다. 저 멀리서 서빙하는 직원이 ‘매운탕 소짜 하나 갑니다!’ 소리쳤다. 아무렇지 않게 ‘네! 여기요!’ 외치는 친구를 도윤은 턱을 괸 채 쳐다봤다.
자긴 마음이 안 좋아서 썩어 갈 지경인데 친구라는 저놈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것이 화가 났다. 혹시 내가 걱정할까 봐 숨기며 괜찮은 척하는 건 아닌지 싶었고 그 모습 속에서마저도 그는 하민을 떠올렸다.
경우가 달랐지만 친구인 재우도 그처럼 상처를 숨기지 않고 자기한테 이야기하고 풀어 줬으면 했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야, 먹자. 여기 매운탕 맛집이랬어.”
“재우야.”
묵직하게 내리까는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재우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확고하게 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우도윤. 내 걱정 하지 마. 난 네 동생이 아니잖아.”
“아…….”
“이젠 각자 위치에서 힘내면 되는 거야. 앞으로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면 나 너 뒤져도 장례식장에 안 갈 거다?”
쐐기를 박는 말에 도윤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헛소리 그만하고 숟가락이나 들라며 채근대는 말에 도윤은 마지못해 매운탕을 한 술 떴다.
“그래 알았어. 잘 먹을게.”
“응. 맛있게 먹어라, 오늘은 이 형이 쏜다.”
“참 고맙다.”
“그래 알면 팍팍 좀 먹어. 이것도 더 먹고.”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리는 재우를 따라서 도윤도 열심히 국물을 퍼다 날랐다.
그러는 순간에도 그의 한 손 끝은 반듯한 명함 귀퉁이를 튕겼다.
경호 쪽 일에 대해서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짐을 진 것만 같은 고민이 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