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하민은 도윤을 챙겨 주며 비장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비장한 마음가짐을 품은 채 자가용에 탑승했다. 불과 며칠 전 어머니는 아버지가 유순해진 틈을 타서 하민에게 서프라이즈 선물로 자동차를 마련해 주셨다.
어머니께 감사의 말은 충분히 전했다. 그리고 넌지시 말을 건넨 어머니의 말씀도 떠올렸다.
‘아버지 화가 좀 풀리셨어. 차도 아버지가 주신 거야. 외딴곳에 널 홀로 보낸 걸 많이 미안해하고 계시더구나.’
어머니가 하신 말씀에 하민은 아무런 말도 얹지 않았다.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시선은 계속 도윤에게로만 향하는 나날이 늘어 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행복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덧 이 삶에도 적응이 된 터였다. 이런 가운데 아버지의 화가 풀린다 한들 하민에겐 그리 달갑게만은 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출발할까요?”
조수석에 앉은 도윤을 바라보며 하민이 빙긋 웃었다. 도윤은 아무 대답 없이 자신의 손 위에 포개져 있는 하민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밉살스럽게 튀어나온 손등 위에 핏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손끝이 가장 안쪽 손바닥을 파고들더니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도윤은 시선을 돌리며 이제 함께 출발할 길을 바라보며 담담히 답했다.
“네.”
가볍게 걸린 시동 소리가 들리고, 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더는 도망가지 못하게 그렇게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됐다.
빠르게 지나치는 풍경 속에서 매미는 짝을 찾았는지 생을 다했는지 아무런 울림도 없다. 자꾸만 목에 갈증이 일 듯하고, 익숙하지 않은 넥타이가 어색해서 도윤이 여러 번 목 주위를 만지작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자 차 안에선 로맨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노래가 틀어졌고 멜로디와 잘 어울리는 하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답답하면 창문 좀 열까요?”
“…….”
도윤은 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하민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보조석 창문을 도윤의 눈가가 걸릴 때까지 내렸다. 곧장 여름 바람이라고 보기에 어려운 찬 바람이 도윤의 두 뺨을 스쳤다. 이내 목을 만지작거리던 행동이 멈췄다. 공기는 사뭇 추웠고 어느덧 여름이 점차 끝나 간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른 감 있게 새로운 계절이 선뜻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의 시간이 참 빨랐다. 지나가는 시간이 순식간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서로가 이렇게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신을 차려 보니 각자가 남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수준까지 스며들었던 건 여름날의 끝자락 무렵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이 모든 감각이 도윤은 싫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무슨 감정인지는 명확하게 몰랐으며 정의를 내릴 수도 없었다.
어설픈 감정이 하민을 위태롭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비상식적으로 겪은 하민의 러트를 떠올리면 자신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마음가짐은 가지면서도 그랬다.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님에도 자꾸만 감추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재 도윤은 어중이떠중이 같은 자신을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그와 반대로 하민은 그런 그를 천천히 기다려 주고 싶어 했다.
형은 많이 느린 사람이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다. 감정에 더딘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하면서 그의 기다림은 나날이 늘어 갔다.
하민에게 느림보 같은 도윤의 존재는 세월 없이 기다려 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람이었다.
하민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꽃 장식의 대미를 장식해야 한다는 말은 덤이었다. 도윤은 하는 수 없이 하민을 먼저 보내고 혼자 들어가 서성이기 뻘쭘해져 곧장 웨딩홀 근처 카페로 항했다.
오늘의 날씨는 선선했지만 좋았다. 흡사 하민의 알파 페로몬과 비슷한 시원한 향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숨을 들이켜면 차디찬 공기가 코끝을 타고 스며들어 몸 전체를 배회하듯 퍼졌다. 담배가 당기는 순간이었지만 도윤은 이를 감내했다. 전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니까 존멋으로 가야죠! 하던 하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묻혀 둔 알파 페로몬을 쉬이 담배 향기로 짓누르고 싶지 않았다.
“참자.”
카페에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곤 눈만 돌리면 웨딩홀이 가장 잘 보이는 창가 자리로 엉덩이를 틀고 앉았다. 웨딩홀의 외관은 흡사 디즈*랜드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풍경 내지는 꿈만 같은 광경으로 다가왔다.
‘이건 제 선물. 형 오늘 이 시계 차고 가요. 까만 피부에는 역시 실버가 가장 잘 어울리잖아요. 와- 이거 봐. 딱 형을 위해서 산 시계 같네!’
“정말 이상한 분이야.”
얼음에 묽어진 커피를 들이켜던 도윤의 입가에 넘칠 정도로 미소가 번졌다. 하민만 떠올리면 실없이 웃음이 샜다. 능구렁이처럼 말은 또 번지르르하게 잘해서 사람이 가벼워 보이다가도 종종 묵직한 울림을 주는 사람이었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알파’라는 존재가 점점 다르게 새겨졌다. 고마움 가득한 감정과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 거리는 감정과 처음으로 느껴 보는 감정들이 수채화 물감처럼 퍼져 갔다.
언제부턴가 그랬다. 반복해서 가슴에 손을 얹고 반문해 봐도 하민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단 여름 향기에 취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었다.
도윤은 그렇게 생각 없이 시간을 축냈다. 한 켠에 갑갑한 일들을 제쳐 두고 지금은 오로지 그만을 떠올렸다.
“잘하고 계시겠지? 조금 기대된다.”
오늘 예식장에 들어가면 하민이 정성스럽게 꾸며 둔 꽃들로 만발해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하민이 화사하게 웃고 있을 것이고 자신은 그를 바라보며 늘 그랬듯이 딱딱하게 굳어서 머뭇거릴 것이다. 끝내는 우습게도 남몰래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소 지을 것이 뻔하면서.
손목에 반짝이는 은빛 바늘을 바라봤다. 어느덧 예식이 시작하기까지 30분 남짓 남았다. 도윤은 미처 다 비우지도 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버려 둔 채 카페를 나섰다.
지금은 하민이 있어서 두렵지 않다. 그 사람이 약속해 줬으니까. 계속 자신의 옆에서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을 것이라던 귀여운 약속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도윤은 웨딩홀에 들어서자 예식이 시작되기 전 신부 대기실 근처를 서성였다. 앞엔 서하리, 김채민이라는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자 합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도윤은 그걸 한참을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근처에 있을 하민을 찾았다.
바로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세한 떨림이 가미된 목소리가.
“도윤아. 왔어?”
도윤은 자신을 부른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풍성하고 새하얀 블라우스에 흰 정장 바지를 입고 선 당당한 모습이 보였다. 떨리는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인영에 도윤이 일순 숨을 멈추다가 답했다.
“응.”
“넌 여전하네. 잘 지냈어?”
여전하다는 말이 도윤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안다. 서하리는 항상 자신에게 ‘무뚝뚝하고 너무 단답형이야.’라고 말하며 곧잘 불평불만을 드러내곤 했다.
오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오늘의 주인공인 하리가 도윤에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언뜻 보아도 긴장을 한껏 머금은 웃음이었다. 이에 짧게 숨을 쉬며 도윤이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웃음도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예전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다 지나간 과거였고 잊어버린 일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하리는 머뭇대며 도윤과 맞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들더니 곧바로 놓았다. 그가 긴장했는지 도윤은 인사했던 손안이 축축해짐을 느꼈다. 천하의 서하리가 긴장을 한다고? 놀라서 시선을 보내니 하리는 멋쩍게 손을 꼼지락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한지…….
“설마 긴장했어?”
“아니라고 하면… 역시 거짓말이겠지?”
인상을 찌푸리며 픽 소리를 내던 하리가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오늘의 신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도윤에게 말했다.
“오늘 결혼식에 오기 싫었지?”
“뭐 그래.”
“아니라고는 말 못하네. 너도 나름대로 발전했구나? 예전엔 그런 말도 못했잖아.”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까. 너야말로 많이 변했네. 긴장 같은 거 전혀 안 하지 않았어?”
“그래… 그랬지.”
하객들과 사진을 찍으며 깔깔 소리를 내며 웃고 있는 신부를 바라보며 하리가 씁쓸히 웃었다. 도윤은 그와 똑같이 시선을 따라 시야를 넓히다가 저 너머에 자리한 하민을 발견하고선 슬며시 눈가를 휘었다. 입매는 딱딱하게 굳힌 채로.
그걸 몇 초 만에 캐치해 낸 하리 쪽에서 도윤에게 물었다.
“오늘 꽃 장식 맡아 준 플로리스트님 말이야. 너랑 아는 사이라고 하던데? 나도 플로리스트님이 하시는 말 듣고 알았어. 세상 참 좁긴 좁아.”
“그러게. 나도 듣고 놀랐어.”
하리에게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도윤은 여전히 하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계속 그에게만 시선이 머물렀으며 대화를 나누건 상대가 그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우리 엄마… 너랑 헤어지기 전 몇 개월 전에 돌아가셨던거 알아?”
“뭐…?”
처음 듣는 소식에 하민에게로 향했던 시선이 그를 돌아봤다.
“말 그대로야.”
“처음 듣는 소리야. 너 나한테 그런 말 안 했잖아.”
하리가 어깨를 으쓱대며 말을 이었다.
“엄마를 잃으니까 네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는데 그래도 무심했던 너한테 화는 나더라. 네가 왜 그렇게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했는지도 알아. 왜 종종 내 말도 안 듣고 멍하게 딴 곳을 바라봤는지도 알고… 근데 이제 와서 말하지만 난 그게 참 싫었던 것 같아.”
“그랬어?”
반문하는 말에 하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나 한 부모 가정이었잖아. 엄마가 돌아가셨을 땐 유일한 내 가족을 읽은 기분이었어. 널 떠난 건 그래서였어. 엄마 유언대로 내 아이를 가지고 내 가정을 꾸리고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고 싶었거든. 완전 제멋대로지? 내가 이래. 알잖아. 너랑 사귀자고 달려들었을 때부터 그랬었으니까.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난 그랬어. 이기적이지.”
“…….”
도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리는 도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다시금 오늘의 신부인 채민을 바라봤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도윤에겐 미안했지만 그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부분을 충족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도 내 가정을 이루고 싶었어. 돌이켜 보니까 너한테 했던 행동은 너무 미안하더라고. 내 생각이 많이 짧았어.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꼭 사과하고 싶었어.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됐어.”
도윤이 괜찮다며 고개를 젓자 하리는 주먹을 쥔 채 도윤의 팔뚝을 가볍게 툭 때렸다.
“야, 그래도 나 후회는 안 한다?”
“그래. 영영 하지 마. 그래야 서하리답지.”
툭 뱉은 말 한마디에 그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무언가 깊게 결심한 듯했다.
“응. 안 해. 안 할 거야. 웃긴 말이지만 아무 말 없이 나랑 헤어져 줘서 고마웠어 도윤아.”
“별게 다 고맙네.”
“뭐 어때. 왜? 나 방금 싸가지 없었나?”
“조금.”
“어휴, 빈말 못하는 건 여전해!”
그가 도윤을 한 번 더 치려다가 손에 힘을 풀고 어느새 또다시 도윤이 머문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신부인 채민과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하민이 자리했다.
순간 하리는 여태 궁금했던 부분을 끄집어냈다.
“저 플로리스트님. 아니, 윤하민 씨랑 친해?”
“그냥. 친한 거 같기도 하고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 저 사람은 너랑 친하다던데?”
“그럼 친한가….”
“뭐어?”
멍청한 답을 내놓은 도윤은 하민이 움직이는 족족 시선을 이동하며 놓치지 않았다. 하리는 그러한 모습에 웃고 싶어도 웃을 수가 없다. 딱 봐도 좋아하는 모양새인데 어리숙한 말이나 꺼내는 도윤을 바라보자니 하민의 고충을 들여다본 듯 훤했다. 자신도 도윤과 사귀었을 적엔 꼭 그러했으니까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더딘 옛 친구를 바라보며 그는 말했다.
“윤하민 씨도 우성 알파 맞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고 도윤이 말하려던 순간, 하리가 말을 가로챘다.
“야, 나도 우성 알파야. 그새 잊었어?”
“아, 맞다.”
“으휴 이 답답아.”
하리가 가슴을 턱턱 두들기더니 도윤의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남몰래 하민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이걸 도와줘 말아? 하는 만감이 교차했지만 그는 여지껏 느낀 바를 말하기로 했다. 느릿한 거북이 같던 저놈을 도와줘야지만 각자가 서로의 행복한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혼자만 행복해지면 체증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너 설마 저 사람 좋아해? 계속 저 사람만 보는데 아주 얼굴 뚫리겠다 뚫리겠어.”
“나도 잘… 모르겠어.”
이건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고 해야겠지…?
자신의 감정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으니 잠깐 지켜본 사람도 답답한데, 하민은 어떠했을지 뻔해 보였다.
거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간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혁명가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뭐… 네가 그럼 그렇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리는 도윤에게 진심 어린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래도 곧 알게 될 날이 올걸? 너무 속 썩이지 말고 금방 깨닫길 바라. 도윤아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
“그래. 결혼 축하한다. 행복하게 잘 살아.”
진심 어린 축복에 ‘응 너도 꼭 행복해져, 잘 살아.’ 하며 답을 한 하리는 오늘 도윤을 만나고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홀 안엔 꽃내음으로 가득했고 오늘 예식 주인공인 두 사람을 축복하러 모인 사람들은 진심을 다해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그 속에서 서하리와 김채민은 누구보다도 행복에 겨운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가운데 혼자서 저 멀리 동떨어진 사람이 도윤의 눈에 들어왔다. 이번 일을 성황리에 끝마친 일등 공신 하민의 모습이었다.
오늘의 하민은 환한 민트색 셔츠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었고 깔끔한 갈색 로퍼를 신었다. 페로몬은 완벽히 감췄을 터인데 사람들은 자꾸만 하민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누가 보면 오늘의 주인공은 서하리와 김채민이 아닌 윤하민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도윤은 아무 말 없이 잘난 하민의 곁에 다가가 섰다. 곧 두 사람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 가르마가 맞닿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의 눈높이는 비슷했다. 아슬아슬하게 도윤이 조금 더 컸지만, 예상외로 하민의 체격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래서 그런지 둘은 제법 잘 어울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히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왔어요?”
하민이 웨딩마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도윤에게 물었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시선이 닿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행복한 시간은 자신이 결코 느껴볼 수 없는 벅찬 광경이었다.
화창한 날씨. 아름다운 조명. 그 사이로 환히 빛나는 아름다운 의복을 입은 두 사람이 앞으로의 인연을 굳게 맹세하는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황홀하고 누군가에게는 씁쓸한 감정을 남길 만한 자태일 뿐이었다.
이내 도윤은 몸에 있는 힘이란 힘이 전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매섭게 올라간 눈썹도 눈매도 더 나아가선 곧고 길게 뻗은 둥근 두 어깨도 전부 축 늘어트렸던 것이다.
하민은 이런 도윤의 모습을 곁눈질로 몰래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었다. 온전히 그를 느낄 수 있었고 그랬기에 더욱더 형의 얼굴 마주하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도윤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 바라보며 같은 장면을 두 눈에 담았다. 모든 게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광경에 무감해서 두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을까.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을 깨 버린 건 하민의 사소하고 대범한 버릇이었다. 늘 도윤의 손을 깍지 껴 잡는 그 버릇 말이다.
손이 강하게 결박된 채 피가 손가락 끝으로 쏠려 붉게 변해도 도무지 미동조차 없는 하민의 악력은 실로 대단했다. 도윤은 손끝으로 몰리는 살아 있다는 온기를 느끼며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린 이름을 불렀다.
“하민-.”
“형. 참 아름답지 않아요?”
도윤의 말이 단번에 삐진 듯한 퉁명스러운 말투에 가로막혔다. 하민은 주장이 뚜렷한 사람이라는 걸 방증하듯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근데 좀 질투 나네. 저렇게 행복해하는 주인공들을 보니까 제 행복한 마음이 묻히는 느낌이에요.”
“아, 그래요?”
“네.”
하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내가… 내가 더 행복한데 말이야.”
“……네?”
도윤은 잘못 들은 줄로만 알고 맹한 표정을 고수한 채 하민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정면을 향하는 기나긴 속눈썹이 밝은 조명에 물들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다시 이어지는 진중하고 달달한 목소리 사이로 웨딩마치의 하이라이트인 결혼 행진곡이 덧씌워졌다. 그럼에도 도윤한테선 또렷이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형도 지금 이 순간 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
“…….”
하민은 그 말을 끝으로 더 무언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입매를 끌어 올리기만 했다. 신기하게도 도윤은 이 순간 하민의 진심을 엿보았고 알 수 없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아주 작게 두근거리는 울림이었지만 이건 분명 설렘이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아득한 것.
어설프게 반응한 심장 고동이 도윤의 온몸 전체를 천천히 감싸며 울렸다. 절대로 하민의 페로몬을 맡고 느낄 수 없음에도 시원한 페퍼민트 향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맞춰 아득해질 만큼 정신을 침범하는 듯했다.
그날부로 도윤은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고 여태 깨닫지 못한 마음을 깨달아 버렸다.
이토록 누군가에게 불온전한 기분을 느끼지 않은 건 난생처음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도윤은 처음으로 하민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별거 아닌 둘이서 조촐하게 술을 마시자는 가벼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하민은 별거 아니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도윤에게 이런 말을 처음 들어 봐서 그랬던 것인지 두근거림을 숨길 수도, 숨기지도 못했던 까닭이다.
갑자기 형에게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그 짧은 시간 내내 깊게 생각하고 탐구해 봤지만 하면 할수록 더욱이 의문만 늘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차에서 내린 후 빌라 앞 자갈길을 들어서기 전, 둘은 골목 앞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를 다량 샀다. 마른 안주와 과자 등등 간단한 요깃거리도 골라 담았다.
자갈길 위를 걷는 소리가 자박자박 들리자 어느덧 끝물처럼 옅어진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에 맞춰 하민이나 도윤은 오늘부로 완벽히 깨달아 버린 서로에 대한 설렘의 감정을 한층 더 키워 갔다.
슬며시 하민이 도윤의 손을 맞잡았다. 이를 도윤은 피하지 않았다. 그냥저냥 흘러가는 인생처럼 순응하며 하민을 받아들였다.
하민의 손에서 캔 맥주가 담긴 편의점 봉지가 달랑거렸다. 콧노래가 나올 것 같았지만 하민은 소리를 내지 않았고 꾹 참았다. 도윤은 이를 몰랐지만 지금 그가 기뻐 보인다는 생각은 했다.
“저….”
두 사람 중 설레는 마음을 흔든 건 도윤이었다. 도윤이 하민을 부르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배시시 웃었다. 눈으로 ‘왜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민 씨. 저희 집으로 갈래요? 아니면 하민 씨네 집으로 갈까요?”
“저희 집으로요!”
하민이 즉답했고 도윤은 이 낯간지러운 상황이 우스워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보는 도윤의 큰 웃음에 하민이 놀라워하며 고개를 돌리곤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형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생각하면서.
“형, 들어와요.”
“실례할게요.”
“편한데 앉아 계세요. 제가 다 세팅해 올게요.”
“같이 해도 괜찮은데… 뭐 도와드릴 건 없어요?”
“아뇨! 괜찮아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부터 걷어붙인 하민이 안줏거리와 술을 예쁘게 늘어놨다. 그걸 멀뚱멀뚱히 서서 보고만 있던 도윤은 쇼파가 있음에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철퍼덕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오랜만에 들른 하민의 집은 낯설었다. 러트 때 방문한 뒤로는 처음이니 어련할까.
주위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널브러진 약 봉투도 주사기도 강한 억제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윤으로선 전혀 알 수 없을 테지만 이상하게 안정된 하민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평온하고 시원하고 맑은 하민의 페로몬은 도윤의 일상 속에 스며든 지 오래전이 되어 버렸다.
“자- 이 정도면 되겠죠?”
하민은 어느덧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와서 도윤에게 언제 꺼내 왔는지 모를 편한 옷을 툭 건넸다. 그 옷을 받아 들고 머뭇대던 도윤이 바지 버클을 풀고 와이셔츠를 벗고는 갑갑했던 옷가지들을 하나씩 바닥에 떨궈 냈다.
“…….”
그 모습을 하민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단단한 도윤의 뒷모습에 이상하리만큼 숨이 턱 막혔다. 구릿빛 피부와 언제 봐도 잘 짜인 근육들은 항상 날을 세우며 성이 나 있는 듯했다.
맨 처음 도윤과 마주했을 때의 감정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처럼 잔뜩 벽을 새우고 앞을 막아서는 도윤도 떠올랐다.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은 근래의 일이었음에도 이미 오랜 추억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이젠 도윤이 없는 삶은 하민에겐 떠올리기 힘든 것이 되어 버렸다.
하민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은 얼굴로 근처에 둔 맥주부터 찾았다.
등을 돌리고 선 도윤의 귓가로 그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되고 몸이 움찔움찔 떨리는 소리였다.
옷을 다 갈아입고 선 도윤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하민이 챙겨 준 옷이 생각보다 잘 맞아서 그의 체격이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스레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맞는데요?”
“그러게요.”
“저 이런 거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좋아하는 사람하고 단둘이 집에서 술 마시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거요.”
“그랬…어요?”
앞에 놓인 캔 맥주 하나를 뜯던 도윤이 하던 행동을 멈추며 물었다. 그의 집에서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고심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하민과 따로 시간을 잡고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는 듯했다. 괜히 분위기가 진지해지고 목 근처가 근질근질거려 몇 번을 긁어도 해소가 되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도윤은 자신이 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칙- 하고 시원한 소리가 두 사람이 함께한 공간에 울렸다. 하민이 먼저 캔 맥주를 뻗었고 도윤도 그 앞으로 가져가 소리가 날 정도로 맞부딪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표면에 물기가 맺힌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크흐-! 진짜 좋다.”
CF에서나 나올 법한 소리를 내며 하민이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하민은 소리뿐만이 아니고 얼굴도 정말 CF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하민을 빤히 쳐다보며 도윤이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술이 들어가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말들이 나올 것이란 걸 둔한 그도 예상할 수 있었다.
“형. 제가 있잖아요.”
“네. 말해요 하민 씨.”
아니나 다를까 하민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도윤을 불렀다. 이미 알코올이 꽤 들어갔는지 눈이 뭉근히 풀려 있었다.
“제가 이 동네로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이사 오는 데 이유가 뭐 있나요. 그냥 오면 오는 거죠.”
“하하, 그건 또 그렇지.”
하민이 캔 맥주를 탁 내려놓고는 조금 크게 웃었다.
“저… 사고 쳐서 이곳으로 내려온 거예요.”
“사고요?”
“네. 우리 집 꽤 부자거든요. 보는 눈도 있고 하니까 아버지가 사고 치는 걸 절대로 용납 못 하시는 편이에요. 그래서 거의 유배지 끌려가듯이 내려온 거죠.”
하민이 원주로 오게 된 사연을 처음 들어 본 터라 기분이 묘해진 도윤은 앞으로 몸을 바짝 숙여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걸 바라본 하민이 서서히 속내를 털어놨다. 조금은 답답할지도 모르고 아무한테나 쉽게 까놓고 말할 수도 없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저 엄마랑 많이 닮았어요. 아, 엄마가 오메가인데 엄청 아름다우신 분이시거든요. 제가 그 미모를 딱 빼다 박았다는 말이에요.”
“아… 네.”
도윤의 대답에 김이 팍 새 버린 하민이 입을 삐죽거렸다.
“아, 네가 뭐예요. 역시 하민 씨 미모는 세계 제일이다 뭐다 뭐 그런 립서비스는 없어요?”
“그건….”
“그건?”
되묻는 말에 도윤이 난감한 듯 맥주를 홀짝이며 말했다.
“말 안 해도 알 거라 생각했어요. 하민 씨 얼굴은 정말… 네. 잘생기셨으니까.”
“형도요.”
“어… 네? 방금 못 들었어요.”
하민이 턱을 괴면서 빙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형도 잘생겼다고요. 그걸 형은 모르는 것 같지만요. 그래서 오히려 참 다행이에요. 알았으면 그 얼굴로 이놈 저놈 꼬시고 다녔을 거 아냐. 그 꼴을 어떻게 봐? 절대 못 보지.”
“그런 소린 처음 들어 봐요.”
“에이-. 여태 만난 사람들이 눈이 삐었나 보네. 형 잘생겼어요. 딱 제 취향으로… 눈매도 길고 간혹가다 웃어 주는 표정도 절 미치게 만드는걸요?”
‘하여튼’이라며 말을 돌린 하민이 못다 한 말을 했다.
“믿을진 모르겠는데 저 어렸을 적에 왕따를 당했어요. 제가 엄마랑 얼굴이 똑 닮아서 그런지 알파로 발현하기 전엔 쟨 분명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거든요. 그런데 저를 내내 왕따시켰던 그 자식들을 중요한 자리에서 딱 마주쳤지 뭐예요? 여전히 입에 걸레를 물었더라고. 참나. 할 게 없어서 패드립이나 치고.”
“패드립이요?”
“네. 제가 딴 건 다 참을 수 있거든요? 그냥 내 욕이나 들었다면 참았을걸요. 근데 저 때문에 엄마가 욕먹는 건 참을 수가 없었어요. 바로 욱하더라니까요? 따지고 보면 참지 못해서 그놈들 좀 줘 패느라고 일 좀 크게 벌여서 여기로 온 거예요. 이 나이 되도록 울컥해서 참지도 못하고…… 참 웃기죠?”
“음… 별로 웃기진 않은데 이해가 안 되네요. 왜 오메가 같다고 왕따를 당해요?”
돌직구와도 같은 물음에 하민은 픽 실소했다.
“그러게요. 왜 왕따를 당했는지 저도 그 이유를 모르겠는데 형이 좀 가르쳐 줄래요?”
“음…… 제가 볼 땐 그냥 하민 씨가 잘생겼으니까 시기나 질투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와- 그건 미처 몰랐네.”
헤실헤실 웃으며 화답하던 하민이 얼마 남지 않은 맥주를 털어 넣고 한 캔을 더 땄다.
“그런 이유였다면 이건 이거대로 짜증 나긴 하네.”
“동감해요.”
“그래요? 참 세상엔 상식 밖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 말도 동감해요.”
“근데 그중에 나도 포함이고요.”
“네? 그게 뭔 소리예요.”
“저도 상식에서 어긋난 사람이거든요. 물론 남들이 보기에 그렇다는 소리예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도윤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민 씨가 뭐가 상식에 어긋난 사람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제가 베타를 좋아하잖아요.”
도윤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하민이 평소와는 달리 씁쓸히 고개를 떨궜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평소라면 잘 꺼내지도 않았을 말들이 술술 나왔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두서없이 터졌다. 이런 말을 했다가 저런 말을 했다가 누가 보면 흡사 미친놈 같다 생각할 만큼 감정 기복도 널을 뛰었다.
하민은 자신이 취했다고 생각했다. 술에 취해서 앞뒤 구분 없이 진상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왜 왕따를 당했고, 왜 첫사랑이 베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따위를 줄줄 늘어놓았으니까.
이런 하민을 도윤은 조용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떨어진 안주를 챙겨 주거나 하며 턱을 괴고 그의 말에 집중했다.
“많이 맞았어요. 아파서 혼자 끙끙거리기도 했는데 그러면 엄마가 슬퍼하실까 봐 꾹 참은 적이 더 많았던 거 같아요. 한번은 제 얼굴 때문에 오메가로 발현할 거라면서 미리 선점한다 어쩐다 한 새끼들이 있었거든요. 그 새끼들이 절 학교 뒤편으로 끌고 가서 끝장을 보려고 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드디어 나타났죠.”
“누가요?”
진지하게 묻는 도윤에게 하민이 총을 겨누는 듯한 포즈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했다.
“이름하여 완전 멋진 놈!”
그의 귀여운 제스처를 바라보며 도윤의 입가에선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게… 그놈이 말이죠. 평소에도 과묵해서 친구 하나 없는 덩치 큰 베타 놈이었어요. 내 앞자리에 떡하니 앉아서 칠판을 가로막는 덩치만 큰 무식한 놈이라고 생각했던 애였는데……. 음… 그게 아니라 실은 히어로였어요. 진짜 멋진 히어로요.”
“히어로….”
“네. 뭐 얼굴은 진짜 별로였지만요.”
하민이 맥주를 들이켰다. 크으- 소리를 내더니 한번 픽하고 웃었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저처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멋진 녀석이었어요. 그때부터 그놈과 비슷한 사람이 동경 내지는 이상형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아요. 사람이란 게 참 우습지. 고작 사소한 일 하나로 이상형이 바뀌거나 한다는 것이 참…….”
하민의 말에 한참을 답하지 않던 도윤은 굽은 등과 허리를 펴고 곧게 앉았다. 그에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하민 씨는 그런 식으로 이상형이 굳어진 걸 후회해요?”
“어… 후회요? 뭐 처음에는 후회하긴 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후회 절대로 안 해요. 후회했으면….”
하민이 도윤을 바라보며 종종 나오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면 제가 형을 못 만났을 테니까.”
곧장 목을 가다듬은 하민이 재차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의 주위가 빠르게 환기되어 가는 듯했다.
“흠흠, 그래서 제 이야기 더 해 줄까요? 저 알파로 제대로 발현하고 나서 고등학교 막 입학할 쯤이었을걸요. 베타로 산 세월이 더 긴 놈이라고요, 제가!”
술에 취한 하민은 이야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헤실헤실거리며 가볍게도 자신의 과거를 끊임없이 말했다.
알파로 발현한 이후로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라 자연스레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일과 그 이후에도 어째서인지 자기 주위에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서 쓸쓸했던 일.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다행히도 저번에 빌라 앞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처음 사귀었던 일, 등등등.
많은 내용을 쉴 새 없이 쏟아 내며 하민은 자신도 모르게 담아 두었던 모든 치부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도윤은 또 다른 하민을 보았다. 겉으로는 환하게 웃고 있던 태양 같은 존재가 알고 보니 환한 빛을 내려고 부단히도 노력하고 자신을 숨기려 했다는 사실을 찾았던 것이다.
도윤은 그의 말을 하나하나 끝임없이 경청했다. 토씨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집념이 엿보일 정도로. 이런 와중에도 하민과 도윤의 시선이 여러 번 마주쳤다.
그때마다 하민의 눈빛은 흔들렸고 도윤의 눈빛은 고요한 물결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뒤늦게 많은 걸 주절거렸다는 부끄러움 때문인지 하민은 시선을 회피하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이상하게도 목이 탔고 술 때문인지 몸 안쪽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바로 그때였다. 여름 끝자락에 다 져 가는 더운 바람 소리와 더불어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
몇 분 만에 겨우 듣게 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 베타는 참 착한 사람이었네요. 하민 씨가 왕따를 당할 때 유일하게 올바른 소리를 해 주고 제지해 준 사람이니까. 하민 씨가 반할 만도 해요.”
진심으로 말하는 소리에 하민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도윤을 바라보며 우물쭈물댔다.
“형은 이런 제가 이상하지 않아요? 고작 그런 일로 여태껏 베타만 바라보는 것이 정상은 아니잖아요.”
기운 빠진 소리로 묻는 하민을 바라보며 도윤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정상이 아니라면 자신도 정상이 아닐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여태껏 베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었기에 자신도 마음을 열 수 있었고 결코 손에 닿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그와 이제는 이렇게 닿았으니까.
무거운 내용을 듣고서도 행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도윤은 뭐가 됐든지 다 좋았다. 속도 없이 모든 걸 털어놓는 하민이 좋았다.
도윤이 마지막 남은 맥주를 들이켜며 진심 어린 말을 건넸다. 어찌 보면 형식적으로 보일 법한 위로의 말이었지만, 도윤에게 있어선 결코 가벼운 위로가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겠다. 하민 씨는 힘든 것 없이 밝게 자랐을 줄로만 알았어요. 그렇게 생각한 점 미안해요. 전 여태껏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나만 가지고 살아간다 여긴 적이 있어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윤도 슬슬 취기가 올랐다. 평소보다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을 하민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절주절 많은 말을 얹고 또 얹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이런 사소한 것뿐이니까.
“하민 씨도 다 말해 줬으니 저도 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친구한테도 전혀 한 적 없는 말인데….”
묵직한 고백에 하민이 눈을 반짝거리며 빛냈다. 도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지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도윤도 담담하게 입을 뗐다. 정말 그 누구에게 단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그런 말들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어요. 제가 야구를 했을 때 가장 중요한 대회가 있던 시점이었는데…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저는 바로 야구 선수의 꿈을 접었고. 정말로 그땐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 기둥이 무너진 날이었으니까.”
하민은 ‘기둥’이라는 무게 있는 단어에 아무런 위로조차 건넬 수가 없다. 어떠한 말로 위로를 전할 수 있을지도 가늠이 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냥 듣기만 했다. 도윤이 덤덤하게 입에 담는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뇌리에 새겼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형질자한테 유독 민감하게 구는 이유도 분명 있어요. 저와 배터리를 짰던 후배 투수 녀석이 갑자기 오메가로 발현한 뒤론 자취를 감춘 적도 있었고, 제 친동생도 오메가라서 약 때문에 위험할 뻔한 적이 있었거든요. 친한 친구도 이번에 오메가로 뒤늦게 발현해서 경찰도 그만둔다 하네요.”
“정말요? 그럼 형은요.”
“네. 뭐…… 저도 그만둘까 고민 중이에요.”
미래에 대한 일인데 당사자는 너무나도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 말에 오히려 더 걱정이 커진 하민은 가뜩이나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만두게 되면 어쩌시려고요? 차선책은 생각해 두셨어요?”
“음… 제가 한국대 경찰경호학과를 나와서 경호 쪽으로 취직도 가능할 것 같고 그래요. 동문인 선배가 업체를 직접 만든다는 말도 있긴 해서 길이 아예 없진 않겠죠.”
“아하. 경호원…….”
세부적인 내용을 들은 하민이 머리를 열심히 굴려 봤다. 경호원으로 일하는 도윤의 모습을 떠올리니 괜히 입꼬리가 귀까지 걸릴 지경으로 기뻤다. 참 멋있고 잘 어울릴 듯했다.
‘한국대 경찰경호학과라고 했지? 한번 수소문해 볼까.’
어쩌면 형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참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진지하고도 가벼운 이야기를 보따리라도 풀어놓듯 쉴 새 없이 떠들고 풀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하민은 지난날 동안 자신에게 보였던 도윤의 행동들이 세부적으로 떠올랐다. 경직되어 있던 그 모습들이 차례차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타당한 근거들로 채워졌다.
어느새 답답했던 마음이 말끔해졌다.
“아… 그래서 그때…… 형이 제가 형질자라고 했을 때 그런 반응을 보였구나.”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건데, 저도 참 한심하죠.”
그 말에 하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심하다뇨. 그럴 리가… 형은 항상 멋져요. 무조건 멋져요. 그냥 멋져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절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하민 씨뿐일걸요?”
도윤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민은 입을 틀어막고 감격에 겨워했고 그런 그를 보며 도윤은 한없이 다정하게 웃었다.
하민이 목구멍 밖으로 ‘형이라서 좋아요.’라는 말을 하려다가 도로 삼켰다. 언젠가는 기회가 되면 베타라서가 아닌 그냥 우도윤이라는 사람이 좋은 거다라고 말할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은 이 떨리는 순간을 온전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느끼하게 보일 말로 흘러가는 시간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하민은 씁쓰름한 다크 초콜릿을 입에 머금은 듯했다. 너무나 행복하면서도 아까전부터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하민이 혼란스러워하다가 도윤이 하는 말에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도윤이… 형이 매우 지쳐 보였다.
“아무래도 최대 관심은 그거예요. 같이 입사한 경찰 동기생이 퇴직하는 거요. 그래서 그런지 생각이 많아지네요. 야구 했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놈이기도 하고 같이 경찰경호학과에 진학도 했던 친구라 마음이 많이 쓰여요. 그 친구는 오메가로 발현해서 경호 일도 못 할 거라 더 그래요.”
“형… 정말 힘들었겠어요.”
“하민 씨도요.”
“네? 저요?”
“네.”
도윤이 아무 말도 없이 하민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당황한 그거 머뭇머뭇대며 도윤에게 자신도 모를 말을 건넸다.
“제가…요?”
“네. 상처였겠죠. 그런데도 여태껏 말없이 참아 가며 버텨 줘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하민 씨는 참 강한 사람이네요. 지금까지 잘 버텨 줘서 정말 고마워요.”
진심이 담긴 상냥 어린 말에 하민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남긴 고맙다는 말을 되새기며 그렇게 또 상처인지도 모를 상처를 더듬거려 봤다.
“상처… 이게 상처라구요?”
상처라는 단어에 하민은 혼란스러웠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납득하려고 애쓰는 하민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줬다. 그가 머뭇대며 손등을 가린 도윤의 손가락을 만지작댔다.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찌르는 아픔이 끝없이 느껴졌다. 상처라고 생각한 적이 없이 그저 숨기기만 급급했던 지난날도 떠올랐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저렸다.
“아… 상처구나. 이게 상처였던 거네요… 어쩐지. 막 떠올랐는데 저 있죠. 계속 엄마가 누군가에게 무시받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왕따당할 땐 무조건 괜찮은 척했었어요. 저보단 엄마가… 엄마한테 더 상처가 될까 봐요.”
“그랬어요?”
따스하게 되물어 오는 도윤이 조용히 그에게 제 손가락을 내어 준다. 얼마든지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매만져도 된다는 뜻이었다.
하민은 마디가 굵은 도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꼼지락거리며 주름들을 펴거나 둥글렸다. 그러는 순간에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두근대고 버거웠다.
“아… 괜찮았는데 괜찮은게 아니었나 봐요. 아니었어.”
여태껏 하민은 자신이 상처를 혼자서 감춰 두고 묻어 둔 채로 그 위로 단단한 시멘트를 발랐다는 걸 깨달았다. 아래는 다 곪아서 나아질 리가 없을 텐데도 상처를 숨기기 위해서 아닌 척 밝게 웃으며 지냈던 날들까지 모두 떠올렸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상처가 곪아 터져 버린 거였다. 언젠가는 갑자기 예고치 못한 상황에서 터져 버렸을 상처 따위가.
하민이 여태 혼란스러워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웃으며 울고 있었다.
“하민 씨.”
처음으로 도윤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제 눈앞에서 웃으면서도 울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자니 아팠던 지난날의 기분처럼 가슴 안쪽이 저릿하게 울렸다.
처음 본 그의 눈물에 놀란 도윤이 울고 있는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 아니, 형. 이건 있잖아요! 그, 그게…!”
갑작스러운 스킨쉽에 놀란 하민이 급하게 양팔을 휘적거리며 우는 모습을 감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민의 눈에는 자꾸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울어서 미안해요… 형.”
“…….”
필사적으로 얼굴을 숨기며 쪼그려 앉은 하민이 영 신경 쓰였다. 미세하게 들썩이는 저 어깨도, 힘들면 크게 울어도 되는데 꾹꾹 눌러 담는 저 눈물도. 도윤에게는 모든 것이 신경 쓰여서 보듬어 주고 싶게 만들었다.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은 작은 얼굴을 덮고 있는 손 사이로 끊임없이 삐져나왔다. 계속 저리 두면 눈가가 빨갛게 쓸릴 듯해 하는 수 없이 도윤이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려고 다가갔다.
“잠깐, 저 좀 봐요. 하민 씨.”
조심스러운 손길에 움찔 어깨를 떠는 하민이 ‘안 돼요!’ 하며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마음은 계속 아픈데 해 줄 수 있는 것이 소소해서 도윤의 고민은 자꾸만 불어났다.
‘어쩌지. 내가 뭘 하면 좋을까.’
몇 초간 심각하게 고민하던 끝에 도윤은 결단을 내렸다. 언제까지고 하민을 저리 둘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현재 마음에 여유가 없던 자신을 위해서라도 멈추지 말고 행동해야만 했다.
“하민 씨.”
“네에….”
거의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하민이 답하자 도윤은 부드럽게 말하며 그와 몸을 밀착시켰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할게요.”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도윤이 한 손의 힘만으로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 냈다. 깜짝 놀란 하민이 소리를 칠 새도 없이 재빨리 좀 더 투박하고 거친 손이 눈물로 가득찬 눈가에 얹어졌다. 하민은 그것이 도윤의 손임을 알아차리곤 그의 손목을 붙들었지만…….
“혀엉- 우읍….”
순식간에 치고 들어온 말캉한 촉감과 맥주의 쓰디쓴 향이 입가를 타고 혀끝에 머물더니 코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일순, 하민은 그의 손이 시원하고 혀는 뜨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로 멈출 것 같지 않던 눈물은 멈췄고 쓰라렸던 눈가는 차갑게 식었다.
상처라고 깨달았던 마음도 다 잊게 해 주는 그의 행동에 하민은 조용히 눈을 감고 도윤의 뜻대로 따라 주었다.
이건 이상하게도 달콤한 맥주 맛이 감도는 그런 키스였다.
뜨거운 피부에 차가운 손이 점차 미적지근하게 변해 갔다. 술기운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붕 뜨는 느낌을 받은 하민이 도윤의 어깨를 밀더니 바닥에 눕혔다.
하민이 양팔을 들어 윗옷을 벗었다. 팔꿈치에 천이 달랑 걸려 있다가 툭 떨어졌다.
금세 단단한 복근과 가슴이 도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하민의 피부는 새하얗게 빛났고 도윤의 피부와는 상반되어 보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눈을 맞추고 무언가를 갈구했다. 곧이어 하민이 물건을 붙잡듯이 손을 뻗자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도윤이 자신도 망설임 없이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아… 형-.”
애가 탔는지 앓는 목소리로 하민이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이상하리만치 헉헉거리며 숨이 찼다. 백 미터를 단숨에 질주한 것만 같이.
술기운 때문이라는 주문을 읊조리며 하민은 왼손으로 자신의 바지 버클을, 오른손으론 도윤의 바지 버클을 동시에 풀렀다. 지퍼를 내리는 소리와 헉헉대는 신음이 맞물리고 나니 술기운에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민은 그제야 이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깨닫고 바닥에 널브러진 도윤의 몸 위로 올라탔다. 얼마 후 억눌리듯 조여 있던 강한 페퍼민트 향의 페로몬이 자욱하게 폭탄을 터트리듯 사방으로 퍼져 넘실댔다.
자극을 참지 못하고 숨이 찬 하민이 발악하듯 내뿜은 페로몬이 도윤에게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좁혀 갔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시원한 페로몬은 이를 알 턱이 없는 베타에게 스멀스멀 기어갔고, 그렇게-.
한차례 정적이 흘렀다. 하민이 입술을 혀로 흠치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려올 정도로 정적의 파장은 상당했다. 뜨거운 여름밤의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하민은 요염하게 웃으며 도윤의 볼쪽으로 손을 대고 지분거렸다.
영영 닿지 않을 것 같은 체온이 자신의 손안에 들어옴을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입을 달싹거리며 하민은 도윤의 이마와 귀와 입술까지 커다란 개처럼 잘근잘근 씹거나 혀로 핥거나 입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때마다 코에서 느껴지는 작은 숨소리가 도윤의 모든 것을 빠르게 앗아 갔다.
오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걸 하민에게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듯한 벅찬 감정이 일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하민은 유혹하듯 도윤의 귓불을 미적지근한 손으로 연신 비벼 대며 말했다.
“형, 제가 지금 페로몬 흘리고 있거든요? 형은 베타니까 아쉽게도 이 페로몬을 못 맡을 거야. 근데 있잖아요. 그래도 전 형이 좋아요.”
하민이 생김새도 크기도 체온도 다른 도윤의 손을 마주잡고 자신의 심장 쪽으로 데려갔다. 두근거리는 큰 고동이 도윤의 손가락 끝을 타고 점점 퍼져 나갔다.
시끄러운 하민의 심장 소리 때문인지 도윤의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아주 시끄러워서 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소음이었지만, 이건 이거대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민은 도윤의 귀 끝이 빨개진 것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긴 속눈썹 위에 짙은 그늘과 쨍한 빛이 공존한 채로 도윤을 바라봤다.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순간에 도윤의 심장을 터져 나가게 할 것만 같은 달콤한 말이 흘렀다.
감정이 벅차올라 숨을 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달콤한 말 등이.
“형이 베타라서 좋아요. 아니… 그냥 우도윤이라는 사람 그 자체라서 좋아요. 형이…… 형이 너무 좋아요. 다 좋다고.”
이번에는 어리광을 부리듯 하민이 도윤의 큰 가슴 위로 이마를 부비적거렸다. 그때마다 두 사람의 심장 소리 역시 함께 커졌다. 지금만큼은 서로의 마음을 부정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때였다.
도윤은 이 두근거림이 좋았다. 그는 두근거리는 감각을 간직한 채로 하민에게 말했다.
“하민 씨는 기억 안 나요? 페로몬 향이 시원한 향이라는 말은 계속 말해 줬잖아요. 그 향을 구현해서 선물로 주기도 하셨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렇긴 했죠. 그래서요…? 그래서 지금도 다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반문하는 말에 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메가처럼 맡지는 못해도 느낄 수는 있어요. 지금 제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는지 하민 씨도 느낄 수는 있잖아요. 저도 그래요. 눈에 보이진 않더라도 하민 씨의 페로몬과 지금 심정도 어떤지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바보는 아니거든요.”
“와…… 우리 형.”
하민이 도윤의 목덜미를 얕게 빨더니 푸스스 웃었다. 잇다 만 말을 이어 가며 하민은 빠르게 거추장스러운 바지와 속옷마저 싹 다 벗어 던지곤 한차례 숨을 들이켰다.
고개를 든 실루엣은 긴장으로 침을 삼키며 꿀렁거리는 목젖을 적나라게 보여 주는 듯했다.
이후 다시 시선을 마주했을 땐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다는 걸 도윤은 알아차렸다.
“도윤 형. 이번에는 우리 끝까지 가 볼까요?”
노랗고 가느다랗게 변한 눈이 도윤의 배꼽 언저리를 탐닉했다. 이미 하민의 배 아래쪽은 곧게 뻗은 채로 꺼떡거렸다. 도윤은 아무 말 없이 말라 가는 목구멍에 애써 침을 삼켰다. 그저 대답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인지했다.
그는 망연히 다음의 행위를 기다렸고 이내 도윤의 눈이 파르르 떨며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