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8)

#나와 당신은 매번 그렇게.

움직여서 땀으로 범벅된 티셔츠를 새로 꺼내 입고 아픈 발에 석고 깁스 위로 두꺼운 담요 하나를 감았다. 불편하다는 핑계로 밀린 집안일을 끝낼 심산이었는데 평소대로 돌아다니자니 쿵쿵거리는 소리 때문에 아랫집으로 이사 온 하민이 신경이 쓰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고작 담요를 감는 것 따위였다.

밀린 집안일을 위해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며칠 동안 돌리지 않은 청소기를 돌리며 덥다는 핑계로 환기조차 시키지 않은 집 창문을 다 열어 두고 한 탓인지는 모르겠다. 청소를 다 끝내고 나니 몸을 씻고 나온 지 불과 한 시간 만에 도윤은 다시 힘겹게 샤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기어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청소까지 다 마치자 극심한 피로감이 전신을 감쌌다. 밀린 집안일도 다 끝내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하늘에는 불긋한 노을이 무거운 눈꺼풀에 휘감긴 듯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렸을 적 남들이 다 학원을 간답시고 하교하는 길에 야구부원들은 운동장에 모여 마운드를 정비하고 훈련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딱 이맘쯤에 주전 선발에 변동이 생겼었는데, 자신과 1년간 배터리였던 투수의 어깨뼈가 나가 공석이던 적이 있었다.

‘선배. 저한텐 이번이 기회 맞죠? 근데 감독님이 절 주전으로 받아 주실까요?’

눈을 힐긋거리며 눈치를 보고, 그러다가 기껏 정리한 마운드에 땅이 깊게 파일 정도로 스파이크를 긁던 놈은 1년 후배인 투수였다. 성실하고 주전이 아님에도 꾸준하게 연습에 참여해서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후배.

더 실력이 좋았음에도 베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잠시간 주전 자리를 알파에게 빼앗겼을 때도 그 후배는 늘 자신의 곁에 있었다. 상념에 빠진 도윤이 눈을 한번 깜빡이자 깜깜한 현실로 돌아왔다. 제일 먼저 보였던 건 낡아 빠진 텔레비전이었다. 그리고 운동을 좋아하냐는 윤하민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도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리모컨을 들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조금 있으면 올림픽이 열리고 올해도 대한민국 야구팀은 예선 티켓을 거머쥐었기에 그에 대한 소식들로 지겹도록 흘러나왔다.

텔레비전으로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서 함께 야구를 하며 프로의 꿈을 키웠던 후배들과 부상을 입고 일찍이 코치로 전향한 동기가 텔레비전 안에서 바삐 돌아다녔다. 자신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버린 길을 가는 익숙한 얼굴들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던 도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안 되겠어. 다음번에 만나면 꼭 사과해야지.”

아무래도 서로 친하게 지내자고 먼저 손을 내밀어 준 하민을 쫓아내듯 한 것이 계속 마음속에서 뭉근히 걸렸다. 진통제의 효과가 맞물려 날카롭게 변했던 마음도 한결 누그러진 건지는 모르게 예전에 겪었던 일과 안 좋았던 과거를 고작 베타라는 단어 한 마디로 울컥한 것은 어른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윤은 단번에 칼처럼 잘라 내고 난 이후로 쉽게 털고 일어날 그리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별명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도윤은 텔레비전을 한 번 더 살폈다. 바깥에선 백색 소음처럼 규칙적인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고 올림픽 야구 소식을 전하던 화면은 뉴스로 전환되었다. 빠르게 흥미가 식자 혹여라도 더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텔레비전은 끄지 않은 채로 침대까지 조용히 발을 끌었다.

큰 소리가 나게 침대에 누운 도윤이 그리 넓지만은 않은 천장을 응시했다. 텔레비전 소리를 들으며 몇 번 눈을 깜빡이니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피로했는지 눈을 몇 번 더 감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얼마 전 핀 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날이었다. 분홍색 꽃잎이 하늘을 뒤덮으며 바람에 흩어질 때였는데, 운동장에 모인 제 또래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독 체구가 크고 단단해 보였던 우도윤이 감독님 옆에 우뚝 섰다. 2번이라는 등 번호를 단 거구의 등을 툭 친 감독님은 바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인 인원들 사이로 말을 전달했다.

‘이제 도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컨디션 조절 잘하고, 방과 후에 남아서 계속 맞춰 볼 거니까 다들 빠지지 말아라.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거, 너희들이 더욱 잘 알 거라 믿는다.’

감독님의 말을 새겨듣던 얼굴들은 각자 다른 결의를 담았다. 몇 주 전 시합에서 타격에서 손 언저리에 데드볼을 맞은 4번 타자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건지 손목을 빙빙 돌렸고, 이번에 주전으로 처음 선발된 투수는 도윤을 넌지시 쳐다보며 긴장한 표정을 내비쳤다. 그의 의미를 알아차린 도윤은 편안하게 눈을 풀며 입매를 올렸다. 굳게 힘준 입매가 파르르 떨려 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짝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지금 이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게 해 주었다.

우도윤이 고개를 들으려고 할 쯤엔 야구부원들이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괜히 발아래 흙을 긁던 곳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윤 선배.’

‘어. 너 왜 안 갔어?’

‘아니 그냥요. 선배 주전 자리 다시 꿰찬 거 축하해요. 그 선배 알파라고 했으면서 더럽게 못하더라고요. 하여튼 축하 의미로 나중에 떡볶이라도 쏠게요.’

‘됐어. 후배 놈한테 떡볶이 삥 뜯는 취미 없거든. 너나 많이 먹어라.’

1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공을 받아 주며 호흡을 맞춘 후배 투수였다. 다른 건 다 괜찮았음에도 제구력이 부족해서 늘 주전에서 떨어짐을 반복했는데 이번에는 주전에 들어 그 후배는 기쁨에 상기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 맞다. 저 처음으로 선발된 거잖아요. 앞으로도 제 공, 계속 선배가 받아 주시는 거 맞죠?’

‘음. 물론 그래야지. 갑자기 배터리 바뀌면 너도 적응 안 될 거 아냐. 이번 시즌은 네 공 내가 계속 받을 거니까 걱정 말고 너도 어서 들어가. 오후 연습 때 보자. 빠지지 마.’

적당한 말로 후배를 달랜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심했는지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인 후배는 눈동자에 담긴 선배가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선배, 저랑 약속했어요!’

말간 웃음을 보인 후배는 빠르게 운동장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간혹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힐끔댔지만 도윤은 어서 가라며 손짓만 할 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였을까.

약속을 얻어 냈다며 좋아한 그 투수는 뒤늦게 형질 발현이 나타나 오메가가 되었고 고열로 시달리다가 자퇴했다는 내용만 띄엄띄엄 들려왔다.

그건 우도윤이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난 뒤 장례식장에서 듣게 된 소식이었다.

삐이이——.

조금 기나긴 꿈을 꿨다. 착잡하면서도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어떨지에 대한 생각을 들게 해 주는 그런 꿈. 다시 잠에 들면 더 이어서 꿀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웅크려 눈을 감아 보아도 정신은 더욱더 또렷해질 뿐이어서 재차 꿈을 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키자 귓속을 간지럽게 거슬렸던 건 시간이 늦어 모든 프로그램을 마친 텔레비전에서 나는 바보같이 일정하게 흐르는 긴 잡음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주위에 손을 뻗으며 더듬대자 손끝에 딱딱한 네모난 것이 걸렸다. 그걸 들고 곧바로 가장 위로 위치한 빨간색 버튼을 누르자 소음이 뚝 끊겨 적막감을 이루었다. 너무 이른 시간에 깨어 버린 탓인지 정신은 몽롱했고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선지 조금만 길을 걸으며 산책하며 뻥 뜨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도윤이 어둠을 다시 살피며 주위를 더듬댔다. 이불 속에 파묻혀 버린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근처를 밝히고 있었다. 하체를 움직이지 않으며 최대한으로 팔을 뻗어 핸드폰을 들자 액정에는 익숙한 번호가 여러 번가량 부재중으로 찍혀 있었다.

<내 동생>

“재윤이? 얜 왜 전화했어.”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도윤이 미간을 구겼다. 전화가 온 시간을 살피니 5분 간격으로 총 여섯 번이나 왔었다. 집안일을 한답시고 온 방을 다 돌아다니며 움직였을 때. 텔레비전을 보며 멍하니 옛 생각을 할 때. 피로함에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을 때. 이렇게 총 세 번의 구간을 거쳐 울린 전화는 느끼고 싶지도 않은 불안감을 안겨다 줬다.

목석같은 도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심장이 쿵, 쿵 하며 얼어붙기라도 한 듯 느릿하게 펌프질을 해 댔다. 긴장하고 두려울 때마다 맥박과 호흡은 얼어붙었고 습관처럼 눈가가 시큰해졌다.

서 발령이 났을 당시와 오메가인 동생과 헤어졌던 시기를 떠올리자면 아비규환도 모자라서 인생을 송두리째 드러내는 사건과 마주하게 되었던 게 생각났다.

그날 동생이 챙긴 건 평소 먹던 억제제가 아닌, 가장 맞지 않는 억제제였다. 하물며 들어간 약 성분에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 약물까지 포함되어 있어 동생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열에 시달렸다. 응급실까지 가서 심폐 소생술을 받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평소 화도 잘 내지 않는 도윤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억제제를 제조해 준 병원에 쳐들어갔다. 의사에 멱살을 잡기까지 고작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내 동생 빨리 살려 내!’ 그리 고함을 치며 씩씩거리다가 울컥 치밀던 슬픔이 놀람과 두려움에 뒤엉켜, 되레 고요히 내려앉았다. 그건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났을 때를 이은 두 번째 감각이었다.

“뭔 일 난 건 아닐 거야.”

길게 호흡하며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손을 꽉 쥐어 보았다가, 폈다가. 여름이라고 최근 교체한 시어서커 소재로 된 이불을 꽉 쥐어도 본다. 까슬한 감각에 손바닥에 느껴지자 눈앞이 뿌예졌는데 이를 기점으로 연결음이 멈췄다.

-여보세요, 형?

아무렇지도 않은 동생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히고 나서야 도윤은 구겨졌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느리게 뛰던 심장이 안도감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치미는 짜증에 아랫니로 윗입술을 깨물었지만 끝내 퉁퉁대는 소리가 나왔다.

“아…… 씨. 너 뭐야?”

-나? 나 왜.

“아냐, 됐어. 형이 방금 욕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

태연하게 ‘뭔 일 있어?’ 하는 동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여태 전화하니까 받지도 않더만,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무슨 일인데 그래.

때아닌 안부 묻기에 도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눈을 푹 감자 시야를 어른거리게 만든 원흉이 후드득 이불보에 떨어졌다. 다시 눈을 뜨자 시야가 또렷했다. 도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혹시라도 목소리가 떨릴까 봐 큼큼대는 소리를 냈다. 목구멍 안쪽에 칼칼한 느낌이 사라지니 이번에는 도윤이 동생의 안부를 물어봤다.

“집안일 좀 하다가 깜빡 잠들어서 전화 못 받았어. 그래서 넌 왜 전화했어?”

묻는 말에 답도 하지 않은 동생의 한숨이 수화기를 타고 사무쳤다.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갑갑해서 말이 나올 듯 말 듯 선뜻 흐르지 않았다. 추근대며 말하라 하고 싶었는데 툴툴거리는 말만 뱉을까 봐 도윤은 꾹 손을 쥐고 눈을 감아 마음을 진정시켰다. 고요한 새벽녘에 어렴풋이 들리는 동생의 한숨은 마음을 이다지도 먹먹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어둠이 짙게 깔린 창가에 어스름한 달빛이 고루 비췄다. 밤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이다. 그냥 빨리 낮이 밝아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일었다.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혀 넋을 놓은 도윤은 문득 들려오던 한숨이 끊긴 걸 깨달았다. 대답 없는 애물단지여도 소중한 핏줄에게 한껏 목소리에 무게를 실었다.

“재윤아. 왜 전화했냐고 형이 묻잖아.”

-그게…….

얼버무린 채 선뜻 뒤를 잇지 못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답답함에 참고 참았던 말들을 도윤이 기어이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혹시 억제제 떨어졌어? 돈 모자라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지금 바로 보내 줄까?”

-아니, 그게 아니고.

“억제제 제대로 챙겨 먹고 있긴 하지? 형 없다고 거르지 마. 걱정되잖아.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하고 이번처럼 못 받으면 톡이라도 남겨 둬. 응? 재윤아.”

-형…. 난 괜찮아. 정말이야.

“……그래.”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너무 몰아치기만 했나 보다. 동생 일이라면 여유가 모두 지워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답답함에 잔소리를 퍼붓던 도윤 때문인지 재윤은 꺼질 듯한 한숨을 지었다. 제 형이 걱정되어 짓는 애정이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형. 이젠 형 없다고 예전처럼 억제제 놓고 살진 않거든. 잊을까 봐 알람 맞춰 놓고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어.

“새로 바꾼 억제제는 어때? 이상 반응은 없어?”

-응 정말로 괜찮아.

“그렇담 다행이고.”

-응. 근데, 전화한 건 다른 게 아니고.

이유를 설명하는 목소리가 나긋한 여름밤에 더위를 느끼지 못하게 해 주었다.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베타여도 자신을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이 담긴 페로몬은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후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니까.

-조금 있으면 아버지 기일이잖아. 어떻게 할 건지 엄마가 물어보라고 하셔서. 형은… 어떻게 할 거야?

“…….”

머리를 가격당한 것 같은 충격에 도윤이 아프지 않은 다리만 바짝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점차 정상적이던 고동 횟수가 줄어 버렸다.

-형…?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지? 오늘 왜 그래,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어… 괜찮아.”

꾸역꾸역 답한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 기일은 아무리 바빠도 챙겼었는데. 여태 잊고 지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기일까지 잊고 살 정도로 삶에 여유가 없었던가. 곱씹어 보면 그럴 만할 이유는 많고도 많았는데. 그 이후로도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던 거였다. 현실을 도피하며 급급히 살다 보니 지금이 되어서 올해의 더위와 마주하고 있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형. 진짜로 힘들면 이번엔 안 와도 돼. 내가 엄마 모시고 둘이서 다녀와도 되니까, 형은 좀 후에 따로 찾아뵐래?

도윤의 고개가 침대 옆 탁상 달력으로 향했다. 3일 뒤에 빨간색으로 쳐진 동그라미가 보였다. 각별한 경찰 동기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치만 아버지의 기일은 꼭 챙겨야만 한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마음이 잡히질 않는 걸까.

가슴에 통증을 느낀 도윤이 손바닥으로 옥죄는 따끔한 감각을 다독였다.

“그러게. 일단은 내가 스케줄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할게, 재윤아. 그래도 괜찮지?”

-응. 형이 편한 대로 해.

“고맙다. 그럼 끊을게.”

-아, 잠시만, 형!

핸드폰을 내려놓던 손이 멈칫하며 그대로 고쳐 잡았다.

“어, 재윤아 말해.”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도 말해 줘. 나 이제 어린애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걱정보단 형 걱정부터 해. 꼭 그러기야, 나랑 약속해. 응? 형 지금 보니까 좀 걱정돼서 그래. 알았지?

경찰 일을 시작하며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발령이 났을 때 동생이 억제제를 잘못 복용해서 아팠었고, 그래서 가족과 떨어져서 지내야 한다는 상황에 더 마음이 쓰였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이토록 가족들과 오래 떨어져 지내본 기억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화만 오면 뛰던 심장도 불안을 못 이기고 차갑게 식었다.

홀로 너무 오래 버틴 젊은 가장은 이미 낡고 지쳐서 상처가 많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뎌지는 척하는 법을 터득했다. 이 정도면 오래 잘 버텼잖아. 이쯤 해 주면 된 것 같아. 내가 떠나도 죽지 않고 살 만큼은 도와줬잖아. 홀로 마음을 다잡다가도 좀 더 곱씹어 보면 늘 동생인 재윤이와 어머니가 마음에 담석을 삼킨 듯이 껄끄럽게 걸렸다.

우도윤에게 가족이란 아버지를 대신해서 보살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오히려 보살펴야 한다고 정해 둔 고정 관념이 동생을 불안하게 했다는 것만으로 쉬이 깨져 버렸던 건. 그토록 도윤이 괜찮은 척해도 심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에 불과했다.

참고 꾸역꾸역 억지로 살다 보니 동생한테 걱정도 받아 보는구나. 입가에선 드물게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목소리는 한껏 축 누그러진 상태로.

“우재윤 까분다. 형은 잘 지내고 있으니까 넌 네 몸이나 잘 챙겨. 힘들겠지만 어머니도 잘 보살피고. 조만간 다시 연락할게, 잘 지내고 있어 재윤아.”

-응. 형도 잘 지내. 보고 싶어. 보고 싶은데 참을게.

“그래, 시간 너무 늦었다. 어서 자.”

-응, 형도 잘 자.

보고 싶다는 낯간지러운 진심이 묻은 말에 나도 그래. 하는 긍정도 보이지 못하고 전화가 끊겼다. 민망하거나 부끄러운 건 아니었는데 괜히 목덜미 언저리가 뜨끈했다. 다친 다리를 쓸어 보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끓어올랐던 열이 목으로 엉겨 붙은 것이라는 착각이 불러일으켰다. 머릿속으론 그게 아닌 걸 알면서도 마음으론 그게 맞을 것이라 정의를 내린 답답한 자신을 낮추며 도윤은 한숨을 지었다.

우도윤의 오늘날 새벽은 복잡하고도 고요히 흐르는 어둠에 불과했다.

윤하민은 이상형에게 한 번의 퇴짜를 맞고 나서 여태 벌인 일을 도를 닦듯이 차곡차곡 진행했다.

하민은 도윤의 집에서 쫓겨난 뒤로 일주일간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애써 찾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까닭은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시간만 뺏기고 아까울뿐더러 앞으로 있을 일을 대비하는 쪽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다. 며칠 전 마침내 설치된 에어컨은 윙윙대며 잘만 돌아가고 있었고, 오늘 오전엔 드디어 열심히 준비한 꽃집 인테리어가 완성되는 날이었다. 하민은 플로리스트였던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꽃집에 필요한 꽃들을 납품받고, 직접 싱싱한 꽃을 고르느라 요 며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장사는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뚝딱 끝날 줄 알았건만 막상 겪어 보니 결코 아니었다. 하민은 이번 기회를 통해서 역시 모든 세상사 호락호락한 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도윤에게 언제쯤 오픈할 거라며 미리 설레발을 쳐 놨던 부분이었다. 이후 차일피일 시일이 미뤄져 이제야 오픈 준비로 한창이라는 사실을 말하기엔 조금 쪽팔렸다. 손님인데도 내쫓긴 마당에 김칫국도 유분수였지만.

마지막으로 오픈 정비도 할 겸, 최대한으로 깔끔하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자락자락 서로 맞부딪히는 자갈이 깔린 낡은 빌라 마당 위를 걷다가 하민은 요 며칠 층간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걸 늦게나마 깨달았다.

층간 소음에 대한 걸 괜히 언급했나? 아주 잠깐 경험해 본 것뿐이지만 도윤은 사소한 피해도 신경을 쓰는 성격인 듯했다. 그의 아닌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유지하는 척, 굴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민감한 상처를 꾹 다문 입매에 숨겨 놓고 있으면서.

자갈길을 걷던 하민은 복잡한 마음에 들어가던 길을 멈추고 우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낡은 빌라에 정확히 도윤이 지내는 505호에 시선이 머물렀다. 얇은 커튼으로 창은 답답하게 가려져 있어선지 집 안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도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니까 이상형을 만난 게 꼭 꿈만 같잖아.”

혼잣말로 웅얼대던 하민이 실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실, 정말로 꿈이었다면 이다지도 가슴에 통증이 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아망떼에 도착했더니 이미 이른 아침 꽃 배달 온 트럭 덕에 시야가 온통 꽃으로 그득했다. 도심 속에 작은 숲속 정원이라도 꾸린 듯한 아망떼의 외관은 하민이 쫓겨난 본가 마당과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인테리어에 직접 참여하다 보니 살면서 여태 본 화원 같은 것이라곤 자신의 집 앞마당이 다였으므로 은연중에 모티브가 되었던 것 같았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망떼를 보면 하루빨리 서울로 다시 올라가야겠다는 마음뿐임에도 처음 이곳에 왔을 당시와는 다른 윤하민 일생일대의 이상형은 짓궂게도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고작 한 번의 만남. 알게 된 지도 일주일 조금 지난 기간. 어쨌거나 빠르게도 빠져 버린 사랑이라고 정의하기 애매한 마음속에 불을 지폈던 건 알다가도 모를 이웃사촌에다 형질자에 대한 무언가로 상처를 입은 듯한 베타였다.

우도윤. 아직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그 이름을 몇 번 곱씹던 하민이 ‘사장님 꽃 좀 받아 주세요!’ 하는 소리에 뿌옇던 정신을 차렸다.

느릿하게 깜빡인 시야에선 눈앞에도 없는 흐릿한 도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평생 원한 오아시스가 한낱 신기루가 된 것처럼.

“갈게요, 가요! 와- 꽃 싱싱한 거로 잘 골라 오셨다. 좋네요.”

꽃을 살피는 희멀건 손은 붉은색 장미꽃과 노란색 튤립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자신의 아버지는 유달리 장미를 좋아했지만, 집 내부에서는 기르지 않았었다. 그게 너무 이상했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한 끝에 이유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답변은 어렸던 하민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뿐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이 변명처럼 시답지 않은 소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장미는 화려하고 예쁘긴 하지. 근데 가시에 찔리면 아프잖냐. 수정 씨가 직접 정원을 손질하는데 손이라도 다칠까 봐 나는 그게 겁나는 거야. 그리고 꽃을 좋아하는 하민이도 만졌다가 다치면 아픈 상처가 될 테니까 일부러 멀리하는 거란다. 아버지 마음을 알겠냐, 아들?’

아직 받지도 않은 상처를 염려해 미리 치워 놓는다는 말을 로맨틱하게도 하신다 싶던 아버지의 발언이었다. 허무맹랑하다 여겼던 그 말씀에다 도윤을 접목하여 떠올리니 틀에 맞춘 것처럼 꼭 들어맞았다. 살면서 몰랐던 답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도윤은 튤립같이 곧고 강한 줄기를 가졌으나 실은 가시를 촘촘히 달은 장미와 더욱 흡사했다. 날카로운 가시에 하민은 찔려서 아팠지만 그렇다고 그 상처가 아프다며 넋을 놓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팠던 상처는 늘 그랬듯이 치유하면 되는 것이니까.

무더위에 꼼짝도 할 수 없어서 지쳐만 있던 도윤이 억지로 산책을 나갔다가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를 때였다. 가만히 멍하게 앉아 있다 보니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발끝에 걸린 쨍한 햇빛에 시선을 두다 보면 잊고 지내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윤하민. 아랫집 405호에 사는 남자. 자신보다 세 살 적은 나이에 웃음은 헤퍼서 자주자주 멀겋게 웃는 얼굴이 기억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니, 헤프다기보단 초롱초롱한 눈과 환하게 찢어지는 입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정도.

싫었던 거냐? 누가 물어본다면 그건 또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실제로 싫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부담감이 웃고 있는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묵직하게 가중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왕 나온 김에 도윤은 조금 더 걷고 싶었다. 앉아서 쉬고만 있자니 산책을 나온 보람도 없었고, 잡념도 너무 많이 떠올라서 오히려 더 부산스럽기만 했다. 큰맘 먹고 불편한 몸으로 나온 이상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서 기어코 아픈 다리를 끌며 일어섰다.

“힘들어.”

운동하며 거친 훈련을 했을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도 틈만 나면 몸을 구부정 수그리며 힘들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운동을 그만두고 나서는 그 힘들다는 말도 쉬이 입 밖에 꺼내 보지도 못했건만 어째선지 지금은 그 말이 술술 나왔다. 현재 주위에 누군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여태 참아 왔던 나약함을 꺼내 볼 수 있게 풀어져 버린 걸까.

도윤이 목발을 짚고 걸었다. 자갈로 된 빌라 입구와 연결된 거리를 푹푹 힘으로 찍으며 걷다 보니 정신을 차려서 내다본 광경은 올해 들어 처음 보는 신비로운 풍경이었다.

아망떼라는 글자가 금색으로 적힌 하얀색 간판에 쨍한 채도 높은 파란색과 티끌도 묻지 않은 하얀색으로 꾸며진 외관은 흡사 그리스 산토리니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가 강원도야 그리스야. 음절이 세 개라는 점만 똑같았지 전혀 다른 동네에 무슨 놈의 산토리니.

건널목 하나를 두고 선 도윤이 목발을 까딱거리며 지루함을 달랬다. 아망떼라는 이름을 구경이라도 하려고 폼을 잡던 와중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몰려든 손님들 틈 사이에서 해사한 웃음을 뽐내는 것이 저 멀리서 보였다. 손에는 흰색 꽃을 든 채로.

윤하민. 그 사람이었다.

언뜻 눈이 마주친 것처럼 서로의 시선이 스쳤다. 그 사이로 커다란 덤프트럭 하나가 먼지를 흩뿌리며 지나가는 듯하더니 신호에 걸려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도망갈까? 도윤은 저 꽃집이 하민이 운영한다던 꽃집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다. 실은 알았다. 알았음에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분명히 다시 만나면 사과하겠다, 피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마음이 하민의 티 없는 깨끗한 미소를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덧없이 사라졌다.

도윤이 결국엔 용기도 내지 못하고 등을 돌렸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생각에 까마득했다지만 그래도 하민을 마주하며 이야기할 재간이 더 까마득했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발을 집고 최대한 빠르게 걸었다. 도윤 뒤에는 아직도 덤프트럭이 신호에 걸려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하민은 열심히 꽃을 손질하며 오픈 겸 기념으로 찾아온 손님들께 서비스 꽃을 나눠 주었다. 화사하게 핀 꽃을 구경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백에 흰색 장미꽃을 건네며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그리 말했다.

꽃집 주위에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햇빛을 받아 더 청량해 보이는 쨍한 파란색 포인트로 칠한 페인트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침에 싱싱하게 잎이 살라고 물을 뿌려 밖에 놓아둔 작은 화분들도 햇빛에 비쳐 더욱 싱그러워 보였다.

그 속에서 하민이 웃고 있었다. 어느 때 보다 밝고 해사한 웃음이었다. 종종 허락하에 사진을 찍어 간 사람도 있었고, 빼어난 외모에 홀려 번호를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하민은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한사코 거절했다. 자신은 임자가 있는 몸이란 말과 함께.

그러던 중 쨍한 햇빛이 눈가를 어지럽혔다. 이를 피하려고 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한숨을 쉬며 덥다고 툴툴거리려다 문득 보이지도 않는 빌라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바로 코앞 건널목만 건너면 나오는 빌라였지만 아쉽게도 아망떼에서 바라본 전망에선 높다란 건물에 가려 그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어?”

아쉽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였다. 바로 코 닿을 거리에 건널목만 사이에 둔 채로 익숙한 인영이 타오르는 햇빛에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져 보였다. 보고 싶고 그렇지만 보지 않고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했던 사람의 모습이었다.

우도윤. 자신보다 세 살이 많고 505호에 사는 남자. 이상형과 부합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달려들고 싶은 그런 사람. 더 말해 봤자 입만 아팠고 말하면 할수록 마음만 더 벅차오르는 사람.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을 더 강렬하게 타오르게 한 사람.

하민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흔들려고 했다. 그 순간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덤프트럭 한 대가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활짝 웃던 햇살 같은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인사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와중에도 손님으로 가장한 사람들은 들이닥쳤고, 하민은 여태 그랬듯이 기계처럼 웃으며 하얀색 장미꽃을 넘겨줬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그리고 세 사람 정도까지 장미꽃을 넘겨주고 난 뒤에야 하민의 손이 꽃에서 자유로워졌다. 주위에 사람들도 어느새 다 사라져 버렸고 다시 한번 건널목을 살폈을 땐 덤프트럭과 함께 그리웠던 인영도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도윤은 그날 하루 같잖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분명히 하민과 눈이 또렷이 마주쳤고 그래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대로 둘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물이 사라지면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며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할 수도 있었다. 정작 그러지 못했지만.

어느덧 밖은 어둠을 깔기 위해 붉은 노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눈부신 여름빛도 물이 빠져 시들해졌고 그건 도윤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다. 죄책감 때문에 아픈 것도 모르고 안절부절못하며 부산히 돌아다닌 끝에 다리에는 뒤늦은 통증이 밀려왔다.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음에도 통증이 일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끝이 났구나. 별 의미 없이 흘렀구나. 하며 한숨을 지을 때였다.

찌르르릉-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도윤은 그것이 밖에서 나는 여름의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똑같은 소리가 또렷이 계속 울리자 그것이 진짜 풀벌레의 울음이 아닌 제집 초인종 소리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은연중에 낮게 심장을 울리던 소리가 갑자기 빠르게 뛰었다. 백 미터 달리기를 전력 질주한 것 같았다.

도윤은 저 초인종을 누른 사람을 익히 짐작했다. 그러니까 이토록 가슴이 뛰는 것이다. 자신이 바라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쉽겠지만, 그래도 맞았으면 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다가 손님을 다시 보낼까 싶어 쿵쿵대며 나가려고 하던 발걸음이 뛰지 않고 직직 끌렸다. 층간 소음이라는 말을 전달받고 난 이후로 생긴 사소한 버릇 중 일부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급히 외치는 목소리에 두근거림이 실렸다. 왜인지는 도윤도 몰랐다. 그냥 미안한 감정일 뿐이라며 그리 생각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도윤은 습관적으로 얼굴을 무뚝뚝하게 굳혔다. 사람의 습관이란 하루아침에 빠르게 바뀌는 일 따윈 없었다. 반평생 무뚝뚝하게 살아온 표정에 생기란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그런 자신의 표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거울을 볼 때면 어색한 자신의 얼굴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투영되어 보이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으며 애써 안 보려고 현실을 외면했다. 그러면 그리운 아버지를 겨우겨우 잊을 수 있어 바뀌지 않은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도 분명히 도윤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은 채였고, 곧 꽃을 들고 해사하게 웃고 있는 티끌 없는 사람과 마주할 수 있었다.

윤하민이다. 405호에 사는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남자였다. 그 남자 손에는 언뜻 보았을 때 사람들에게 열심히 나눠 주었던 하얀색 장미꽃이 아닌, 새빨갛고 강렬한 붉은색 장미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비현실적인 얼굴을 하고 하민은 아름다운 그림처럼 익숙하게 웃었다.

“형, 그간 잘 지냈어요?”

“아…….”

잘 지냈어요. 그럼 그쪽은 잘 지냈어요? 라며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도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선뜻 대답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마음속 깊숙이에서 눌려 빠져나오지 못했다. 돌덩이처럼 가득 얹힌 답답한 감정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우도윤이었다. 늘 그랬듯 답답한 우도윤.

그리고 그런 우도윤에게 한사코 밀리지 않는 한 남자가 붉은색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넸다. 여전히 입술 언저리엔 미소가 가득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빛을 띠었다.

“형, 받아요. 오늘 못 받아 가셨으니까 특별 서비스로 직접 배달 온 건데 이 정도는 괜찮죠?”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다음에도 다다음번에도 계속 문만 잘 열어 주세요.”

마음의 문도 열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안에 씨앗이라도 하나 뿌려서 싹을 틔울 텐데. 그렇게 오랜 시간 물을 뿌리고 잡초도 뽑고 비료도 뿌리면서 곱게 가꾸다 보면 화사한 잎이 돋아나고 무럭무럭 자라 아주 예쁘고 탐스러운 꽃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다독이던 하민이 등을 돌리려고 할 무렵, 어깨 너머로 부드럽고 상냥한 볕이 들었다. 매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흘러든 따스함이었다.

“윤하민 씨. 저 베타 맞아요. 저번에 대답 못 해 드려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들어오셔도 된다 해 놓곤 갑자기 가시라고 해서 그것도 기분 나쁘셨을 텐데 미안해요. 성격이 이래서 정말이지 드릴 말이 없어요.”

진지한 사과에 하민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하민은 뒤를 돌아보며 도윤을 바라봤다. 위로 삐죽 솟았던 눈썹이 어느새 부드러운 일자를 그리고 있었다. 한 걸음 용기를 내어 준 마음이 고맙고 사랑스러워서 하민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저 이미 알고 있었어요. 형한테는 페로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네?”

“저 알파예요. 형은, 알파 싫어해요?”

알파라는 단어를 들어 버린 도윤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도윤은 자신이 알파라고 고백한 사람을 바라봤다.

형질자라면 알파가 아닌 오메가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꽃처럼 곱디고운데 알파라니. 고정 관념이란 사람을 이리도 편협하게 만들었다.

그 알파는. 윤하민은 웃고 있었다지만 투명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입매가 어색하게 떨리고 있었다.

“알파….”

“네. 왜요? 제가 오메가인 줄 알았어요?”

“아, 그게.”

“괜찮아요. 저 그런 소리 원체 많이 들어서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희게 웃는 하민은 편안해 보였다. 화사하고 들뜬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한 얼굴로 차분하게 답하고 마지막으로 차분하게 인사까지 예의 바르게 꾸벅하고. 그렇게 미련 없이 한 발 물러섰다.

“아쉽긴 한데,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음에 또 봐요, 형. 오늘 만나 주고 목소리 들려줘서 반가웠어요.”

“가시게요?”

행선지를 묻는 말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민이 답했다.

“가야죠. 아직 꽃향기가 나려면 멀었거든요. 오늘은 때가 아니에요.”

“네? 그게, 뭔 말…….”

“잘 자요, 형. 좋은 꿈 꾸고 쿵쿵거려도 되니까 편히 다녀요. 전 형이 편하게 지내는 게 좋으니까. 알았죠?”

솔직히 쿵쿵거리는 소리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그 쿵쿵거리는 울림이 도윤이 움직이고 있구나, 도윤이 집에 있구나, 도윤이 나아가는 과정이구나. 생각하면 짜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그냥 도윤이 편히 지냈으면 했다. 하민은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바랐다.

다시 왔던 길을 홀로 되돌아 내려갔다. 저번과 달리 쓸쓸한 감정보단 좀 더 행복한 감정에 차였다. 하민은 한 계단씩 걸음을 옮기는 내내 얕은 페퍼민트 향을 흩뿌렸다. 습관적으로 흘린 페로몬은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스멀스멀 기어가 도윤의 곁에 머물렀다. 페로몬 샤워와는 전혀 다른 그저 머물다가 사라지는 보잘것없는 얕은 존재. 우도윤에게 윤하민은 고작 그런 존재일 뿐이다.

얕은 존재라도 좋아. 깊지 않아도 좋아. 이제 막 시작이라 그렇다. 지금은 도윤에겐 하민은 그저 표면에만 머무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조급하지 않고 싶은데도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상형이라서 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잡고 싶었다.

그러니 끊임없이 좋아하고 싶고,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다.

좋아한다며 곱씹고 떠올리며 숱한 감정을 마음속 깊숙이 물들여 놓으니 몸 안에 잔잔히 흐르던 페로몬은 꼭 궤도 없이 날뛰는 파핑캔디처럼 톡톡 튀었다. 표면으론 웃어도 내면으론 웃지 못하는 빨리 사랑을 쟁취하고 싶어 하는 감정을 상대방은 알까.

이런 조급한 마음은 형질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모를 것이다.

형이 베타라서 참 다행이었다.

꽃을 보며 도윤은 생각했다. 왜 어떠한 이유로 자신에게 꽃을 건네준 걸까. 그가 귀찮음에도 직접 찾아와서 붉은색 장미꽃을 건넸던 건 그저 그런 이웃을 위한 자그마한 배려일까. 하는, 그런 허무맹랑한 내용만 떠올랐다.

잘난 사람이었다. 윤하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아름답고, 젊은 나이에 꽃집 사장이고, 남들이 부러워한다던 최상위 계층인 알파였다. 애매함에 끝을 내달리는 자신과는 다른 존재. 매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알파들과 공통점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존재.

윤하민. 그는 말 그대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도윤은 꽃을 보면 매번 어색하고 어려워했다. 아플 때나, 슬플 때나 어느 누군가가 가져와서 내민 꽃은 불안정한 마음속엔 그저 그런 화려하기만 하고 금방 썩고 사라질 것에 불과한 정도였다. 남들은 꽃을 받으며 화사하게 웃고 ‘고맙다’는 말로 행복을 표현했다. 그것이 도윤은 부럽다가도 진심에서 나오는 소리일까 싶어 의문을 품었다.

피를 덜 닦아 내어 얼굴에 피떡이 진 채로 곤히 잠든 아버지. 그 옆으로 아름답게 피어 있는 새하얀 짓눈깨비와 꼭 닮은 안개꽃에 싸인 피에 물든 새빨간 장미꽃. 한 잎, 두 잎 시들어서 떨어진 꽃잎들은 흡사 아버지의 피를 흩뿌린 형상처럼 보이곤 했다.

‘아들. 꽃 좋아하냐.’

뒷머리를 긁적이며 넌지시 묻던 아버지의 음성이 아직도 또렷했다. 부끄러워하시며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아버지가 또렷했다. ‘그냥 그래요.’ 하며 멋쩍게 웃던 나의 대답도 또렷했다. ‘그러냐’ 답하던 아버지도, ‘네’라고 웃던 짧은 긍정의 의미도. 그 모든 것이 선명해서 마음이 아팠다.

도윤은 하민이 준 붉은색 장미꽃 한 송이를 오크색 책장에 엎어 둔 아버지의 사진 곁에 두었다. 어렸을 적, 자신을 무릎에 앉혀 두고 그 옆 벤치엔 야구공과 글러브를 둔 채 치아를 환히 드러내며 웃는 아버지가 보였다. 사진 속 그대의 웃음과 하민이 준 꽃이 매우 잘 어울렸다.

하민은 오늘도 꽃을 손질하며 고르는 중이었다. 꽃집은 꽃이 좋아선지 꽃집 주인이 좋아선지 늘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전 10시 오픈 시간이 되면 분무기에 물을 담아 뿌려 잎을 적셨고, 종종 꽃향기에 날아든 벌레를 휘휘 쫓으며 관리하다 보면 어김없이 사람들은 꽃향기를 맡은 나비처럼 몰렸다.

어떤 꽃을 찾으세요? 이 꽃은 어떠세요? 다른 꽃도 참 많아요. 오늘 아침에 들여온 아주 싱싱한 꽃이랍니다.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엄선한 꽃을 내밀고 포장하고. 그 속에서 시들시들해 보이는 꽃은 버리지 않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곁에 두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면 손님을 맞이해서 피곤해진 꽃들을 다시금 보살폈다. 오전 때처럼 꽃에 물을 뿌리고 약해 보이는 잎은 손질하고. 하루하루 언제 져 갈지 모르는 꽃들은 사랑에 목이 말라 애가 타는 하민과 비슷한 처지였다.

도윤에게 자신은 꽃과 같은 존재로 보일까? 언제든 떨쳐 낼 수 있고, 시들어 버리면 이미 익숙해진 무뚝뚝한 눈동자로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별거 아닌 꽃과 같은 존재처럼 말이다.

하민은 오늘도 도윤에게 들고 갈 붉은색 장미꽃을 엄선해서 꽃병에 꽂아 두었다. 퇴근길에 잘 포장하여 건넬 생각이었다. 부지런히 꿀벌처럼 꽃을 나르다 보면 베타여도 향기가 날 것이다. 하민은 꽃향기에 푹 파묻힌 도윤을 떠올리다가 입가를 미소로 물들였다. 생각만 해도 무척이나 행복했다.

도윤의 하루는 별 게 없이 지나갔다. 3일 후에 보기로 했던 경찰 동기와 약속을 미루고, 친동생인 재윤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함께 만나 뵙지 못할 것 같다며 연락을 넣었다. 아무래도 다친 다리를 보여 주면 또 걱정을 끼칠까 봐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동생은 역시 무리하지 말라며 도윤을 걱정스레 챙겼지만 괜찮다며 애써 웃었다.

아버지가 떠난 지 오래되었어도 여전히 과거 속에 머문 자신이 바보 같으면서도 우스웠다. 도윤은 언제쯤 아버지를 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도 잊으면 또 어쩌나 싶어 걱정을 달고 살았다. 마음을 숨기려고 무던히도 노력한 끝에 얻은 것이라곤 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툰 인상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도윤이 새로 찾은 직업과 매우 잘 어울려서 이대로 계속 살았던 것뿐이었다.

3일 후에 만나기로 했던 경찰 동기생과 도윤은 각별한 사이였다. 아버지를 잃고 실의에 빠진 도윤을 구한답시고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친구였다. 방과 후 야구부 연습이 다 끝나 갈 무렵, 도윤에게 들이닥친 폭풍은 고요함을 집어삼킬 무섭고 커다란 악몽이었다.

고등학생 우도윤은 막 연습을 끝내어 기진맥진 널브러져 있는 부원들과 숨을 고를 때였다.

‘도윤아. 지금 빨리 병원으로 가 봐라. 네 아버님께서…….’’

포수 프레임 마스크를 벗은 무심한 눈이 뚱딴지같은 말을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땀도 닦지 못한 도윤은 가만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전달받았다. 걱정이 묻어나는 감독님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도윤은 미친놈처럼 교문 밖을 향해 뛰었다.

그날 우도윤은 18세가 되던 해에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슬픈 스토리>라고 치면 한두 개씩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그런 삼류 게시글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거라며 무심코 넘겼던 그런 이야기. 고작 남들이 보면 몇 초간 눈물만 짓다 끝낼 꾸며진 이야기 따위가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급히 장례를 치렀다. 어렴풋이 정신을 차렸을 땐 이제 막 오메가로 발현한 아직 어린 동생과, 오메가라는 이유로 푼돈만 버는 힘든 일밖에 구할 수 없던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족을 보살필 수 있는 건 이제 도 대회를 목전에 둔 꿈 많은 자신뿐이라는 현실도.

그렇게 먼저 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도윤은 이른 나이에 가장이 되어 버렸다. 겨우 철이 들어 꿈을 펼치려고 할 나이에 행복한지도 몰랐던 꿈에서 깨어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가 든든히 버티고 서 계셨기에 여태 누릴 수 있던 행복한 꿈에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심한 눈이 노을 진 하늘을 응시했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이 야구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던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도윤은 울컥이는 감정을 겨우 감내했다.

야구를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경제적인 활동 제약이 있는 오메가 어머니와 오메가 남동생을 오로지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축 늘어진 둥근 어깨 위로 손이 얹어졌다. 도윤에게 늘 응원을 아끼지 않던 친구, 박재우였다.

‘여기 있었어? 야, 너 야구부에서 퇴부했더라? 이젠 야구 아예 그만두려고?’’

‘그래야지. 동생하고 엄마한텐 이제 나뿐이잖아.’’

주홍색 노을이 감청빛을 머금을 때까지 도윤은 여전히 똑같은 눈빛을 했다. 재우도 아무런 말 없이 똑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꾹 닫힌 입술을 떼어 낼랑 말랑 하다가 다시 다물고를 반복하던 끝에, 박재우는 그저 그런 형식적인 말로 도윤을 다독였다.

‘하긴, 아무래도 계속하긴 좀 힘들겠네.’’

재우는 한 곳만 응시하는 도윤의 옆얼굴을 살폈다. 역광을 받아 어두워진 친구의 얼굴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다 알 것 같았다. 열여덟 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친구에게 재우는 어쩌면 돌파구가 될지도 모를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거대했던 친구가 앞으로도 거대한 채로 있어 주길 바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도윤아. 저기, 계속 이러지 말고 너 혹시 나랑 같이 경찰 될래? 경찰이 안정적이고 좋대. 그래서 나도 경찰경호학과나 노려 보려고. 경찰 힘들면 나중에 경호원이나 하고. 넌… 어떻게 생각해?’’

경찰이라는 단어에 무심한 도윤의 눈이 일렁였다. 평생 운동만 해서 가진 것이라곤 누구보다 건강한 체력뿐이기에 살려면 노가다라도 뛰어야 하나 싶었는데…….

‘경찰이라고?’’

친구의 제안에 줄곧 하늘만 바라보던 눈이 그대로 재우에게 향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도윤은 집안일을 끝내고 겨우 앉아 무료하게 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름을 머금은 계절은 몇 개월 전보다 해가 더 길었다. 다리는 예상했던 것보단 회복 속도가 빨랐다. 조만간 병원 진료 날이었고, 금이 간 뼈가 잘 아물어 가는지 소식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리는 회복되고 있었지만 도윤의 마음은 더 심한 금이 갔다. 만나기로 했지만 약속을 미룬 경찰 동기, 그러니까 박재우라고 하는 그 친구와 전화로 나누던 대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고민 중이긴 한데…… 아무래도 경찰 일 그만둘지도 몰라. 그 말 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재우는 그만두기 전에 도윤에게 먼저 말해 주고 싶었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의 마음이 목소리에 깊게 묻어 나와 가벼운 위로의 말이나 그 무엇도 전하기 어려웠다. 고민 중이라곤 했지만 재우는 이미 모든 걸 정리한 듯 보였다. 먼저 경찰을 하자고 전했던 그 마음을. 공부도 뭣도 못하는 백지 같았던 도윤을 가르치며 넌 잘될 거라고 응원했던 마음을. 경찰학과에 합격해서 당당히 입학할 때 자신보다 더 신나하던 마음을. 근무지도 같냐며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씩 웃으며 내보인 마음을.

그리고 베타에서 오메가로 발현한 후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며 아파했던 그 마음까지도.

박재우는 남몰래 추억들을 정리하는 중인 듯했다. 마음을 정리하는 이유를 알았기에 도윤은 묵묵히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짧게 응, 응. 답하며 수많은 질문에 답을 내놓은 친구를 위로할 수 없는 자신의 말재간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자. 진지하게 건넨 도윤의 한마디에 재우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긴, 재윤이도 오메가였지? 네가 동생 각별하게 챙겼던 게 아직도 기억나긴 해. 재윤인 잘 있어? 준비성 철저한 우도윤이 잘 보살펴 줬으면 잘 지내고 있긴 할 거야. 그렇지?

도윤도 따라 웃으며 맞다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걱정했던 마지막 통화 속 동생을 떠올렸다. 역시, 같이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 그리 생각했다.

박재우는 언제 한번 만나자는 기약 없는 말 대신 잘 지내라는 말만 남겼다. 상대방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어 뚜뚜- 하는 소리가 길게 이어질 때까지 도윤은 한동안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그러다가 바라본 하늘은 참으로 예뻤다. 친우인 재우도, 동생인 재윤도 나름대로 한 발짝이라도 곧은 길을 가고 있었다. 자신만이 아직도 그 자리 그대로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한심함에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려던 때…….

찌르르릉-

익숙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었더니 또 손에 꽃을 든 하민이 서 있었다.

“형, 오늘은 어땠어요, 잘 지냈어요? 좋은 하루였죠?”

밝게 웃는 얼굴 뒤편으로 짙은 노을이 졌다. 검은색 사인펜으로 외곽을 딴 것처럼 하민은 붉어진 배경과 동떨어져 보였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걱정이 많은 자신과는 다르게 늘 행복만 안고 살 것 같은 그런 사람.

“자, 받아요. 오늘 형을 위한 꽃.”

“고맙습니다.”

얼떨떨했지만 건넨 꽃을 무시하기 어려워서 일단은 받아 들었다. 이번엔 한 송이가 아닌 두 송이었다. 이틀 새에 집엔 좋아하지도 않는 꽃이 벌써 세 송이가 생겼다. 꽃을 보살필 줄 몰랐던 도윤에게 난감한 기색이 서렸다. 한 송이는 아버지 옆에 두었다지만, 나머지 두 송이는 어디에 두어야 할지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도윤은 한 손에 움켜쥔 두 송이의 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녁 무렵 받은 꽃은 꽃잎 사이사이로 어둠이 짙어져 까맣게 물들었다.

꽃 한 송이를 받았을 때와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니 오늘은 왜 꽃을 건넨 건지 의아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참지 못하고 도윤이 입을 떼려던 찰나, 말을 뺏었던 건 의미를 알 수 없는 꽃을 가져다 바친 하민 쪽이었다.

“한 송이는 아무래도 좀 식상하잖아요. 그래서 이번에는 두 송이가 좋을 것 같았어요.”

“아, 그래요.”

“네. 그리고 아무래도 한 송이만 있으면 쓸쓸해 보이니까. 두 송이라서 외롭진 않을 거예요. 꽃도 외로움을 타거든요.”

처음 듣는 소리에 도윤의 눈이 커졌다. 가만히 깜빡, 깜빡. 두 눈을 깜빡이자 웃는 얼굴이 아닌 진지한 얼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꽃도 외로움을 타는데 사람은 오죽할까요?”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도윤은 폭격을 맞아 버렸다. 누가 봐도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듯한 하민이 그라면 전혀 상관없을 이야기만 꺼냈다.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활짝 웃다가도 종종 진지한 얼굴을 보이는가 하면, 때론 그 모습은 상처를 머금는 눈빛을 하곤 했다. 고작 두 번 남짓 본 진지함에 도윤은 하민이 정말로 외로워서 이곳을 잊을 만하면 찾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민 씨 같은 사람도 외로운가요?”

조급한 마음에선 가뭄에 공이 나듯이 처음 받아 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다. 뜻밖에 희망을 엿본 하민이 잔잔한 미소를 그렸다.

“당연한 소릴 하시네요. 저도 사람이니까 외롭죠. 사람은 누구나 외로워요. 형은 외롭지 않으세요?”

되돌려 받은 물음은 도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였다. 외롭냐 생각하면 외롭지 않다는 답을 내었고, 외롭지 않다는 답을 도출한 자신은 정말로 외롭지 않은 건가, 싶은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어느 날 박재우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이런 내가 외로워 보이느냐고.

그때마다 재우는 헤드락을 걸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주었다.

너는 외로워도 어쩔 수 없다고. 살면서도 스스로를 더 외로움에 방치시키고 있노라며. 지금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실상은 외로우니 자신이 히든카드처럼 내민 답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도윤은 그럼 내가 어쩌면 되느냐? 물었다. 그러자 재우는 ‘답은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 정직해지면 돼.’ 하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씁쓸한 웃음도 마찬가지로 내보였다. 도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숙제라는 의미를 알았음에도.

하민은 한참을 제 질문에 답하지 못한 도윤을 애석하게 바라봤다. 손을 달라며 손을 뻗으니 얌전히 두툼한 손을 내미는 도윤을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숙여 맞잡은 손등 위로 이마를 대니 시원함이 전신에 퍼졌다. 긴장해서 꽉 잡아 둔 하민의 페로몬이 느슨하게 풀렸다. 편안하고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돌에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하아- 형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데요. 그걸 형은 모르시는 것 같고.”

“네…?”

“맨날 무뚝뚝한 표정 지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좋아요? 답답하지 않냐고요.”

“……제 표정이 무뚝뚝하다고요?”

“네, 매우.”

손등에 한참 동안 이마를 문대던 하민이 고개를 들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습게도 도윤은 그 표정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냥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친구라는 놈과 비슷한 표정이라고 속으로 신기해할 뿐이었다.

“오늘은 얌전히 돌아갈게요. 제가 물어본 답은 다음에 와서 해 줘요. 알았죠? 저 요즘 꿈에서 형이 그렇게 자주 나오더라. 그럼 오늘도 잘 자요, 형.”

서로 맞잡은 손에서 머문 체온은 멀어져 갔다. 여태 잡고 있어 따스했던 온도가 떨어져 나가면서 시원해졌다. 그 위로 더운 여름의 열기가 도로 덮쳤다. 그리 달갑지 않은 더위였다.

하민은 무언가의 행동을 더 하지 않고 도윤에게서 등을 졌다. 한참 동안 도윤은 코앞에 있었다가 금세 멀어져 가는 인영을 좇았다.

낯선 촉감이 썩 나쁘지 않았노라고. 조금은 아쉬웠노라고. 도윤은 그런 생각을 했다.

도윤은 하민과 인사를 하고 헤어진 지 불과 하루가 지난 날 고열에 시달렸다. 단순한 감기라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다친 다리에서 오는 통증으로 생긴 열감이었다. 감기약이 아닌 진통제를 복용하고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서 도윤은 두꺼운 이불을 꺼내어 머리 끝까지 덮었다.

다쳐서 아픈 것이 아닌 고열에 시달려서 아픈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이 아픔이 언제 가실까. 생각보다 너무 아프다. 똑같은 말을 중얼중얼 주문처럼 읊던 도윤이 여지껏 감춰 두고 모른 체하던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렸다. 그건 ‘나는 외롭지 않는가’에 대한 답이었는데 친우였던 재우도, 아랫집에 이사 온 아직은 잘 알지 못하던 하민도 똑같이 묻는 것에 대한 답이었다.

“외로운 게 맞았어.”

몸이 아프니 주위가 유독 선선하고 휑했다. 가슴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뚤린 것처럼. 머리까지 푹 묻은 이불을 걷고 바로 누우며 도윤은 여러 번이나 한참을 곱씹었다.

외로웠구나. 그랬던 거였구나. 하며.

해답을 입 밖으로 뱉을 때마다 숨을 크게 쉬니 목부터 코까지 후끈한 열이 차올랐다. 도윤은 이 순간만큼은 신기하게도 아픈 감각보단 시원한 느낌을 받았다. 몇 년 동안 묵혀 두던 고민의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고단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가족만 돌보다 보니 여태 정작 제 몸이 어떤지도 모르고 살았다. 몸이 유난히 건강해서 남들이 다 아프고 앓아누웠을 때에도 본인만큼은 건강해서 더욱 그랬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 부서져 버린 마음이 힘들어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의연하게 감내하면 괜찮을 줄로만 알았다.

속이 다 썩어 문드러져서 고약한 악취가 풍겨도 방조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참을 때까지. 계속 그랬다.

미련하게 그걸 아프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살면서 줄곧 깨닫지도 못한 걸 나약해지는 시점에서 알아차린 건 도윤마저도 행운인지 불행인지 선뜻 말하기 어려웠다. 다만 해답을 하나 찾았다고 생각하니 그 해답에 적절한 생활로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변화를 반기지 않았던 도윤도 이 정도의 변화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막연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쌍꺼풀 없이 길게 찢어진 눈이 꿈뻑꿈뻑 일정한 행동을 반복했다. 진통제에 포함된 수면제 성분이 점차 체내에 깊숙이 스며드는 감각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도윤은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꿈뻑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하민은 몇 시간이 지나도록 현관문을 들어온 그때 그 상태로 바닥에서 널브러져 있었다. 오늘 하루의 감상을 말한다면 도윤에게 한층 더 가까워진 것만 같은 기분인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마음 한구석은 식초를 뿌린 듯이 시큰하고 허하다는 점이었다. 도윤이 자신에게 보였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던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답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했던 건, 그가 계속 일관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만 내보였기 때문이었고, 하민은 그게 누군가가 마음을 쥐어짜듯 아팠다.

도윤의 모습은 마치 제 어린 시절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발현도 안 했을 적, 쟨 분명히 오메가일 거라며 왕따를 당한 기억이 떠올랐다. 괜히 구설에 휘말리기 싫어서 부모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참고 견디던 그 시절. 부모님께 말하면 단번에 재력으로 제압될 하찮은 놈들의 질 나쁜 장난질을 온전히 받아 내야만 했던 때. 참아 보겠노라고 숨을 죽였으나 간혹가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꾸역꾸역 감내해야 했던 때. 하얀 피부에 상처가 하나둘씩 쌓일 때마다 더운 날씨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팔을 고수하며 고집스레 챙겨 입던 때.

게다가 그땐 한없이 감정 하나하나가 깨질 듯이 불안해서 지금처럼 조잘대지도 못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픔을 끄집어낸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 말 못 할 고민에서 허우적대던 끝에 알파로 발현했다. 본인을 괴롭힌 놈들과 똑같은 알파가 되어서 어쨌든 빠져나왔을 땐, 시원하다 못해 춥게만 느꼈던 해방감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괜히 예전 기억을 끄집어내어 등골이 서늘해진 하민이 한쪽으로 몸을 틀었다.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아프게 배겼다.

그러고 보니 이사 와서 이것저것 많은 일을 벌인답시고 부모님께 전화도 거의 드리지 못했다. 몇 주가 훌쩍 지나도록 연락 한번 없는 아들이 얼마나 꼴 보기 싫을까 싶어서 꾹 참다가도 하민은 가족과 이리 오래 떨어져 본 기억이 없었던지라 내심 마음 한구석이 허했다.

“톡이나 보내 볼까.”

가족의 우애를 중요시 여기는 어머니가 특별히 만든 가족 단톡방에 잘 지내세요? 안부를 물으려 하다가 멈칫댔다. 불같이 화냈던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민은 아직은 아버지와 껄끄럽다는 인식 때문에 결국 어머니께만 따로 톡을 드렸다.

202X년 7월 X일 목요일

1 오후 19:55 엄마 잘 지내시죠? 보고 싶어요.

1은 1분간 사라지지 않다가 하민이 물을 마시러 일어날 무렵에 사라졌으며 그에 대한 답도 받았다.

울 엄마님♥

어머? 이게 누구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 하나 없는 내 아들이네~♥♥ 오후 19:57

오후 19:57 아....; 엄마 화났어요?ㅜㅜ

울 엄마님♥

아니~~~~♥♥ 전혀요~~~~~ 오후 19:58

물결이 여러 번 적힌 걸 보아하니 화나신 것이 맞았다. 어머니는 화날 때마다 억지로 물결을 붙이며 하트를 남발하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하민은 고민만 하며 말을 유화 물감을 얹듯 차곡차곡 쌓아 봤자 전화 한 통 하는 것만 못 할 것이란 걸 알았다. 하는 수 없이 화를 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동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엄마?”

-어. 우리 아들 살아 있었네? 엄만 너어~무 네가 연락이 없길래 변기통에 코 박고 잘못된 줄 알았지 뭐니.

“에이, 설마요.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누구 아들인데.”

-아이고오, 참~ 말은 잘하네요, 울 아드님.

“음… 그게요. 그간 연락도 못 드려서 미안해요, 엄마. 계속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고요.”

-그랬어?

몇 번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귓가로 스미는 목소리에 냉랭한 기운이 빠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하민이 조금씩 조잘대며 떠드는 목소리를 듣다가 참던 화를 그냥 풀어 주셨던 거다. 그래도 홀로 힘겹게 타지 생활을 하는 아들이 가장 힘든 것을 아셨을 테니까.

하민은 어머니와 대화를 하다가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몇 초씩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이상하리만큼 저번처럼 무조건 반년만 버틴 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일까? 고민이 떠오를 무렵에 어머니가 하시는 질문은 뒷전이고 한 명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적응은 잘하고 있어? 꽃집 오픈도 잘했고?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 줘. 그래야지 엄마가 마음이 놓여.

“알았어요. 전화 끝나면 바로 보내 드릴게요.”

-그래, 꼭이야. 아 맞다, 얘! 정말로 6개월 뒤에 돌아오긴 할 거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건 알고 있긴 하니?

“네. 뭐, 그렇죠.”

6개월. 그렇다. 윤하민에겐 6개월이라는 유예 기간이 존재했지만 그 시간은 우도윤이라는 커다란 나무를 쓰러트리기엔 턱없이 부족해서 조급했다. 그래서였나. 자신이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가 껄끄러울 뿐만 아니라 막상 알았다고 답하려니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던 건.

이게 다 505호에 사는 그 이상형 때문이었다.

-근시일 내로 돌아와. 그리고 되도록 엄만 6개월을 다 채우기 전에 더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엄마. 저 있잖아요.”

-응, 왜? 무슨 일인데.

상냥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하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상냥한 애정 위에 괜히 부정의 말을 얹자니 불효를 저지르는 것만 같았다. 간절한 어머니의 마음은 나 몰라라 한 채,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건 아닐지 걱정도 앞섰다.

어쨌거나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사람은 본성에 충실한 생명체이고, 자신의 행복이 눈앞에 아른거리면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떠나기란 그 누구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단은 6개월 안에 돌아가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 엄마. 제가 정말 죄송한데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말할게요. 지금은 꼭 돌아간다곤 확답을 못 드리겠어요. 죄송해요.”

-……그래? 그렇구나.

“네…….”

긴 침묵의 끝에 선 하민은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떨궜다. 애꿎게 딱딱거리면서 엄지와 검지의 손톱을 맞부닥치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목소리는 점점 바닥을 기었고 서운함이 묻어나는 한숨 때문에 하민은 겨우 쉬던 숨 또한 멈췄다. 이토록 깊은 적막에 면역이 없어선지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만을 바랐다. 아주 빠르게.

그렇게 1분가량 정적이 이어진 끝에야 어머니가 말문을 떼셨다.

-아들. 엄만 항상 네 편이야. 그 사실을 잊지 말렴.

“엄마가 항상 제 편인 거 저도 잘 알아요. 저 역시 늘 엄마 편인걸요. 사랑해요, 엄마.”

-응, 엄마도 우리 아들 사랑해.

“그럼 끊을게요. 또 연락할 테니까, 푹 쉬시고 건강하세요.”

그래 아들도. 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짧은 대답과 함께 전화가 마무리되었다. 귓가에 대었던 핸드폰을 멀찌감치 떨구자 열기에 후끈거렸던 귓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서늘해졌다.

통화를 마친 후 하민에게 남은 것이라곤 먹먹한 감정뿐이었다. 적응되지 않는 마음을 달래려고 저 멀리 어스름한 감청빛이 감도는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신기하게도 가라앉은 감정이 조금씩 두근대었다. 앞으로도 도윤에게 최선을 다할 생각이 설렘으로 이끌었다. 끝이 존재하더라도 그 끝에 섰을 때 절대로 후회라는 단어가 티끌만도 남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왜 더 노력하지 못했을까? 하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하민은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나무에게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장미꽃 한 송이. 장미꽃 두 송이. 그리고 세 송이. 하민이 관리하는 꽃은 날이 가면 갈수록 채워졌다가 빠져나갔다가를 반복했다.

오늘 아침 10시에 정확히 발주를 넣었던 꽃을 받고. 가장 적절하게 뽐낼 수 있는 자리에 배치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부터 열까지 평탄한 게 없다는 것쯤은 알았다지만 이곳에 오기 전 처음 짜 둔 계획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6개월만 머물다 가려던 것치곤 생각보다 규모가 커진 탓에 유난스럽게만 보였다.

해는 뉘엿뉘엿 하늘과 땅 끄트머리에 걸려 하루의 마지막 인사를 건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민이 따로 빼 둔 붉은색 장미꽃은 날이 가면 갈수록 방대하게 불었고 워낙 바쁜 일상 탓인지 도윤의 집을 하루마다 꼬박 들르긴 어려웠다. 들르지 못하고 거른 날엔 걸렀던 날에 주려던 꽃에다 들르려던 날에 꽃을 얹어 찾아갔다. 작고 보잘것없는 꽃 한 송이가 그렇게 한 송이, 두 송이. 최종적으로는 열 송이가 넘어가자 하민은 없던 자신감도 붙었다.

이쯤이면 도윤이 마음을 열어 줄 것도 같았다. 실제로 외롭냐는 질문에 그다음 날 도윤은 정말 그랬던 것 같다며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해 왔다. 외로운 사람 마음을 파고드는 것쯤은 노력하면 꿰찰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이다지도 자신감을 얻은 것이리라.

하민은 오늘로써 정확히 백 개의 꽃송이를 품에 안고 4층과 5층을 잇는 계단을 올랐다. 좋은 예감에 흥분한 하민의 페로몬이 자욱하게 흐르는 장미 향을 보드랍게 휘어 감았다. 시원한 향에 묵직한 향이 얹어져서 형질자였다면 참으로 고급스러운 향이구나 느낄 정도였다.

하민은 그날따라 꼬질꼬질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이 정도까진 봐줄 만하잖아. 싶어서였다. 물론 이것은 윤하민의 일방적인 평가였고, 상대방이 어떻게 봐 줄지는 미지수였다.

하민은 날이 갈수록 교묘한 여우처럼 굴었다. 도윤에게 꽃을 가져다 바칠 때마다 그의 손을 잡아 고생으로 두꺼워진 마디를 꼼꼼히 둥글리거나, 손등에 솟은 핏줄을 여러 번이고 꾹 눌렀다가 슬슬 쓸었다가 농락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도윤은 볼을 타고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였는데 그것은 마치 햇빛에 잘 익어 길들여진 감자 같았다.

꽃송이가 50개, 60개. 나중에 되어선 앞자리가 9를 찍을 때가 되니 하민은 노골적으로 도윤의 몸에다 시선을 고정했다. 하얀색 얇은 반팔 티셔츠에 비치는 연한 젖꼭지 실루엣을 특히나 눈여겨봤다. 둔한 것은 알았지만 도윤은 남의 시선이 자신의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질적인 희롱처럼 보일 법한 시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하민은 도윤이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도윤의 무던한 성격이 좋았다. 무심한 눈빛이 살짝 스킨십을 할 때마다 얕게 떨리는 것도. 귀까지 빨개져서 마지못해 눈을 흘기는 것도. 그러다가 자신에게 만져지던 손을 빼내는 것도. 하나부터 열까지 따져 보면 없어서는 못 볼 사랑스러운 행동들이었다. 러트가 아님에도 도윤 앞에만 서면 페로몬이 난동 치기 일쑤였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행동이라면 더더욱.

도윤과 지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다음 계획을 생각하다 보니 어느덧 하민은 자신의 발걸음이 505호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식하지 못하며 걷고 있던 때와는 다르게 저 단단한 현관문 너머로 도윤이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에 하민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오늘은 기필코 도윤과 한 발자국 더 나아가리란 다짐으로 마음이 부풀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싶다며 핸드폰 번호를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톡으로 안부를 전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전화를 걸어 목소리도 들으며 좋아하는 감정을 더 크게 키워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하민은 오늘따라 목구멍이 바짝 마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장미꽃을 휘감았던 시원한 페퍼민트 향이 걷혔다. 긴장으로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수축이 일어나자 느슨하게 풀려 정처 없이 흐르던 페로몬이 꽉 잡혀 새장 속에 갇혔다. 평소에는 하민이 옥죄고 있던 바로 그 푸른 새장 속에.

길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굳게 입을 꾹 다문 입매가 어설프게 웃는 연습을 마쳤다. 똑똑 중지 손가락으로 문을 두들기다가 누렇게 빛바랜 초인종을 보고 하민은 두 눈을 크게 뜨며 픽 웃었다. 초인종만 누르면 되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그것조차 까먹은 자신이 우스워서 그랬다. 이번엔 초인종을 누르려고 손을 가져다 대려던 바로 그 순간 어렴풋이 귓가에 스치는 직직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소리에 하민이 한 발 뒷걸음질 쳤다. 굳게 닫혔던 현관문이 열렸고 틈 사이로 까슬까슬해 보이는 짧은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하민 씨?”

“쨘-! 형, 저 왔어요. 오늘도 좋은 하루! 잘 지냈죠?”

꽃이 몇 송이 없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꽃과 어색한 도윤도 감당할 수준은 되었으니까. 근데 그 한두 송이가 끝이 아니었다는 걸 전혀 몰랐던 그가 당황하게 된 시점은 그리 길지 않았다. 꽃집 사장인 하민이 퍼다 나르는 꽃송이가 두 자릿수를 기록할 즈음이었을까.

처음에는 오크색 장식장 근처에 장미꽃을 두었다가 포화 상태가 되어 버리자 꽃을 두는 위치를 바꿨다. 큰 가구를 들여놓지 않았던 탓에 꽃을 둘 장소는 많았다. 그중 햇빛이 가장 잘 드는 창가에 꽃을 차곡차곡 블록처럼 쌓아 두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감당이 가능했지만 하민은 보란 듯이 더 많은 양의 꽃을 가져다 바쳤다.

그때가 되어서야 도윤은 깨달았다. 꽃이라는 존재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노라고. 항상 빠짐없이 자신을 찾는 하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그가 꽃집 사장인 것과 자신이 휴직한 경찰이라는 것과. 그 외에도 그는 알파라는 것과 자신은 베타라는 것과.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다른 삶을 살아온 발자취는 섞이지 않고 흩어지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만 또렷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도윤은 하민이 자신에게 엿이라도 먹이는 줄 알았다. 난감한 기색을 보였음에도 끊임없이 꽃을 가져오길래 날 싫어하나? 여겼지만 얼마 못 가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깨우쳤다.

하민은 자신을 챙겨 주고 있었던 거였다. 굉장히 순수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서 손질하고 포장한 장미꽃을 보다 보면 굳이 내보이지 않아도 따스하고 정겨운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으니까.

문제는 도윤은 꽃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고 점차 가구도 없는 집 안에서 만발하게 피어 있는 꽃이 늘어날 때마다 처치 곤란한 상태까지 도달했다는 걸 인식했 땐 이미 사방에 꽃향기가 진동하는 상태였다. 돌이킬 수 없을 수준까지 꽃과 어울리지도 않는 몸에 꽃향기가 배어 사라질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모처럼 선물을 받은 것이었으니 나름대로 물도 줘 보고 성심을 다했다. 애석하게도 손재주도 없고 섬세함도 부족했던 도윤에겐 꽃이라는 존재는 조금만 손을 대어도 바스라져 형체를 무너트려 버리고 마는 약한 존재였다.

어쨌든 간에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눈 깜짝할 새에 더 시일이 흐른 뒤에 깨달은 건 열심히 보살핀 꽃들이 시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은 꽃들을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있던 도윤은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기가 질렸다. 누구세요라고 묻지 않아도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도윤에게 있어서 윤하민이라는 그림자는 파블로프 법이 적용된 사람처럼 공포로 다가왔다.

집에 없는 것처럼 행동할까 싶다가도 몇 번 더 기척이 느껴질 때면 굳게 먹은 마음도 쉽게 허물어졌다. 도윤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다리를 이끌었다. 현관문까지 나가는 거리가 곤혹스럽게 느껴져도 찾아온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움직여야만 했다.

문을 여니 예상대로 웃고 있는 하민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그의 품에 경악스럽게 불어나 버린 붉은색 장미꽃도 보란 듯이 반기고 있었다. 꽃향기가 진동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렇다고 향기가 딱히 싫은 것도 아니건만 지금은 피로감에 뭉쳐서 그런지 다 귀찮았다. 도윤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며 난색을 표했다.

“하민 씨. 정말 죄송한데요. 꽃은 더 가져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네?”

“보시다시피 집에 있는 꽃만으로도 지금 처치 곤란이라서요. 싫은 건 아닌데 제가 닿는 족족 다 시들어 버리니까 드리는 말이에요.”

도윤은 속에 담아 둔 말을 저질러 버리고 나서도 하민의 눈치를 살폈다. 좋은 마음으로 가져온 선물을 나쁘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싶었고, 그 말에 상대방이 상처받는다면 괴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이 무색하게 하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사람이 속도 좋지. 지금도 꽃을 가져와 놓고선 거절을 당하고서도 웃었다. 거절한 자신이 무안할 정도로 해맑은 웃음은 더욱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만 돌아가시라고 말하려다가 도윤은 자신의 품에 안겨 주는 꽃을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한숨은 끊이질 않았고 앞으로도 이 관계가 지속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민은 도윤의 마음도 알지 못한 채 가상 속에 만들어 둔 자신만의 꽃밭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하민은 홀로 세우는 계획을 차곡차곡 진행할 생각에 흥분된 말투로 말했다.

“그럼 형은 꽃 싫어하는 거였어요?”

“아뇨, 싫어한다기보단 보살필 줄을 모르니까요. 썩히는 것도 괜히 죄책감이 들어서 불편해서.”

“음- 그렇구나. 그럼 제가 언제 한번 집에 들러서 남은 꽃 정리라도 해 드릴까요?”

굳어 있던 도윤의 표정이 뜻밖의 제안에 한결 편해졌다. 쓰레기처럼 쌓이기만 하는 꽃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기에 대신 정리해 준다는 제안은 당연히 솔깃하게 만들었다.

도윤은 깊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게 좋겠다며 곧바로 화색하며 반겼다. 그러나 화색은 오래가지 못했으며 하민의 마지막 말을 기점으로 모두 거둬졌다.

“형. 그렇담 제가 꽃 정리도 해 드릴 겸 형이랑 더 친해지고 싶으니까… 저한테 폰 번호 좀 알려 주세요.”

연락처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은 잘 깔아 두었다. 꽃을 가져다 바치는 자신을 불편해하는 기색에도 하민은 한사코 백 송이의 꽃을 도윤의 품에 안겨 줬고, 그는 그걸 거리낌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생명을 잃어버리고 바스라져 버린 꽃이야 곱게 으깨어 향수를 뿌리고 작은 공병에 담아 두면 보관도 편할뿐더러 거추장스럽지도 않을 것이다. 향도 디퓨저만큼 오래가서 은은한 향으로 집 안을 보다 매혹적이게 만들어 줄 것임이 분명했다.

도윤은 꽃에 있어선 서툰 사람이었다. 하민은 이것을 익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우도윤이라는 나무를 찍어 쓰러트릴 용도로 그의 단점을 활용하고자 했었다. 운동만 하던 사람이 꽃을 다뤄 볼 리는 만무했을 터였다. 이 또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지도 모르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의 감은 무섭도록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정말로 도윤은 꽃에 관한 건 무지했으니까.

하민은 도윤이 긍정적으로 답할 때야말로 그토록 원하던 그의 연락처를 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꽃을 처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자연스레 따로 연락을 하고, 안부도 묻고, 시답지 않은 이모티콘을 섞어 가며 친근한 관계로 발전하고.

나무를 열 번이나 넘게 찍었는데 이쯤에서 마지막 도끼질을 하면 바로 넘어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정도로 괜찮은 계략이라고 여기면서도 그 외에 것은 세세하게 판단하진 않았다. 확신이 그토록 깊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그 기고만장한 확신이.

하민이 얼굴은 유약해 보이더라도 천성은 고집 센 알파였다. 원하는 것에 대한 소유욕도 강한 편에다가 자기 자신의 평가가 매우 너그럽기까지 했다. 하민이 긍정적인 성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이 그를 곱게 키웠고, 늘 소중한 존재라며 보듬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지방으로 오게 된 것도 하민에겐 살면서 크나큰 충격이었다. 주먹을 휘두르고 골프채까지 들었던 아버지를 겪을 날이 올 줄이야 상상도 못 했으니까.

처음에는 다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도윤을 보고선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도 접을 수 있었다. 자신을 때리고 지방으로 내쫓았던 아버지께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정 때문인지 하민은 당연하게도 도윤이 마음을 열고 넘어올 거라고 확신했고, 그런 오만함은 꺾일 줄도 몰랐으며 마음조차 졸이지 않았다.

알파란 족속은 대체로 그러한 행태를 보였다. 사회 구성원 안에서 겉도는 알파라고 하더라도 베타나 오메가보단 좋은 대우를 받았다. 하민 또한 뒤늦게 알파로 발현되고 난 이후, 오메가일 것이라는 누명을 벗은 날을 기점으로 자신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대우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낄 정도였다.

하민은 아버지께 맞은 충격을 뛰어넘어 버린 도윤의 철벽에 그의 인생에서 손꼽는 좌절감을 맛봤다.

집에 돌아온 하민은 풀이 죽었다. 곰곰이 떠올려 봐도 자신의 입장에선 도윤이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꽃도 잘 받아 줬다. 대답도 확실히 들었다. 암만 생각해 봐도 번호를 알아낼 타이밍은 그 순간이 가장 적기였고, 그 외에 더 좋은 시점은 없었다.

“……다 끝난 거겠지.”

평소보다 급하지 않게 접근했었다. 오히려 남들이 보면 답답하게 군다고 할 정도로 신중하게 시간과 공을 들였다. 하민은 이해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그 무엇도 하지 않으며 바닥에 앉아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이 속한 세계가 다른 색으로 점차 물들어 갈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실연을 당해도 시간은 멀쩡하게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는 핸드폰 진동이 울리면서부터였다.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하민의 고개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골반과 엉덩이가 바르르 떨게 만드는 감각 때문에 움직이기 싫어도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이 일었다.

“여보세요?”

핸드폰을 들고 당연하게 인삿말을 건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민은 그때서야 핸드폰의 진동이 전화가 아니고 톡 메시지가 왔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멍청하게 시간을 보낸 자신을 되돌아보다가 기어이 웃음이 터진 하민이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차가운 기운이 하민의 등골에 스몄다.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한, 그저 허망한 감정만 느꼈던 몸에도 느릿하게 어설프게나마 촉감이 되살아났다.

하민은 몸을 오른쪽으로 뉘우면서 핸드폰에 온 톡을 확인했다. 화면에서 새는 빛으로 가뜩이나 하얀 하민의 얼굴이 더욱더 창백하게 보였다.

202X년 7월 X일 금요일

호건

저기요~ 윤하민 씨 살아 있나요??? 오후 22:15 3

강주

1 사라진 거 하민이 아냐?ㅋㅋㅋ 오후 22:16 3

귀신같은 새끼들.

총 여섯 명이 모여 있는 곳에 하민을 포함한 호건, 강주까지 총 세 명이 톡을 확인했다. 슬그머니 줄어든 숫자를 단번에 눈치챈 강주가 하민을 유추해 냈다. 나머지 화상 같은 친구들이 속속들이 튀어나와 하나하나 숫자를 지워 내니 모든 숫자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라고 하기엔 빼박이 되어 버린 셈이다.

강주

하민아ㅋㅋ 이사 많이 바빴어...? 왜 이사한 뒤로 생존 신고도 안해?ㅜㅜ 오후 22:20

길남

얔ㅋㅋㅋㅋㅋㅋ 숫자 다 사라졌으니 그만 나와라 윤하민 이 새끼얔ㅋㅋㅋㅋㅋ 오후 22:20

호건

윤하민 너 이사간 곳이 강원도 원주랬나? 오후 22:21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친구들 톡을 염탐만 하려고 했다. 긍정적인 사람도 우울하면 잠수를 타고 싶은 법이니까. 누가 봐도 숫자는 계속 사라지는데 하민에게서 대답이 없다 보니 단톡방의 주동자가 된 호건이 위치를 물어 왔고, 맞다며 톡을 보낸 하민은 무의식적으로 답하는 손가락을 꼬집으며 울상을 지었다. 바보처럼 대답해서 염탐만 하려는 상황이 다 허사로 돌아가 버렸다.

오후 22:22 맞아 왜?

호건

왜긴ㅋㅋ 너 심심할까 봐 엉아들이 친히 찾아갈까 했지 오후 22:22

직접 찾아온다고? 어딜? 여길?

하민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계획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풍선이 다시 부풀기 위해선 새롭고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활력을 일으킬 수 있는 무언가가.

무기력함에 짓눌려 버린 하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벼운 일탈 같은 것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더라도 우울한 마음을 타파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기분 전환 정도면 충분한 일탈.

핸드폰을 붙들고 하민은 고심에 빠졌다. 결정하자니 막상 오라고 해도 괜찮을지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은 고심하는 척하며 답하지 않았다. 하민은 단톡방 분위기도 살필 겸 더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고 지켜봤다. 근데 쭉 읽다 보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친구들은 간다면 누구누구 갈래? 다 같이 갈 거지? 하는 내용으로 이미 저 먼 강을 주인 없어 멋대로 건너가고 있었다.

“이거 웃기는 놈들이네. 이럴 거면 애초에 내 의사는 왜 물어봐?”

하민의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표정은 한결 여유롭게 풀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동할까? 시점까지 나오자 그래서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물으려던 차였다.

하민은 본인 말고도 톡방에 답하지 않고 염탐하는 놈이 두 놈이나 더 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나머지 친구가 단톡방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깨닫게 된 것이었다.

재경

나랑 시호는 못가. 오후 22:45

강주

왜? 요즘 일 바빠? 오후 22:45

재경

아니. 일이 바쁜 건 아니고 시호가 임신했거든. 이런 말 톡으로 말해서 미안해. 결혼 전에 이렇게 된 거라... 오후 22:45

호건

? 오후 22:47

강주

임신??;; 오후 22:48

길남

???????이게 뭔 소리??? 시호 열성이어도 알파 아니었냐? 알파가 뭔 임신이야? 오후 22:48

최재경의 폭탄 발언에 민시호가 임신했다고?! 하는 말로 모두 물음표를 연발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두 사람의 뜻밖에 소식은 단톡방을 단 몇 초 만에 시끌시끌 시장통처럼 만들어 버렸다.

하민도 머리가 얼얼한 충격을 받았다. 허구한 날 시호가 재경이에 대한 내용으로 자신에게 연애 상담을 하던 때가 바로 엊그저께 같았는데…….

“와… 민시호 이 새끼.”

재경

아;; 그게;; 우리도 좀 얼떨떨해서 말을 못 하겠더라. 시호네 누나들이랑 다 오메가잖아. 오후 22:48

호건

근데? 설마 집안 유전자 문제 때문에 알파여도 임신이 가능하다…… 뭐 그런 말이야? 오후 22:49

재경

ㅇㅇ 오후 22:49

깔끔한 대답에 이번에는 단톡방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다들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더는 글이 올라오지 않는 채팅창에다 대고 하민이 기나긴 정적을 깨부쉈다.

오후 22:51 그래서 시호는 몸 괜찮대? 알파여도 임신해서 뭐 무리가 생기거나 호르몬 적으로 문제가 있는 건 없는 거지?

재경

다행히도 그런 건 없어. 오메가가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알파 상태 그대로야. 우리도 신기하더라…… 결혼하게 되면 아이는 입양해야 하나 고민했거든. 오후 22:52

현실적인 고민에 하민마저 말문이 막혔다. 두 사람은 나름대로 미래를 착실하게 설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지만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재경

요즘 산부인과 들르고 하느라고 정신도 없어서…… 시호도 미안하다고 하네. 지금 내 옆에서 톡만 확인 중이야. 오후 22:53

“하… 하하.”

하민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어이없어하는 웃음을 흘렸다. 둘이 연인 관계임을 모두에게 숨길 때에도, 친구들이 늦은 감 있게 저 둘은 이미 사귀고 있구나 눈치챘을 때에도, 자신은 두 친구 놈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사귄 지도 2년 넘짓인 것도 알았고, 이제 막 결혼을 준비하는 단계였던 커플이라는 것도 가장 먼저 알았다.

이 모든 게 다 입이 무거울 것 같다며 자신에게 접근해서 지겨운 연애 상담을 해 버린 민시호 때문이었다. 맞다, 그랬을 것이다. 하민이 둘의 관계를 알고 싶지 않아도 물 흐르듯이 당연히 알게 되었던 건.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놈들은 또 난리 통을 피웠다. 하지만 하민은 비견되는 자신의 처지에 대화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들의 연애 사업과는 다르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자신의 연애 사업은 자꾸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단톡방은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재경과 시호에게 축하 메시지를 남기거나 농담 섞인 말들로 빠르게 도배되었다. 빼곡한 글자들을 천천히 눈으로 읽어 내려가던 하민이 결국 다 읽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평소랑은 달리 저릿했다.

왜였을까. 혼자서 뒤처진다는 생각으로 치졸한 자격지심이라도 느끼는 걸까.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내가?

하민은 재경과 시호가 연애를 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던 때를 곱씹었다.

우성 알파 재경과는 달리 열성 알파였던 시호. 그 둘의 연애도 알파 대 알파 관계였기에 마냥 순탄대로를 걷진 않았다. 두 친구 놈이 사귀기까지 험난했던 것을 자신이 옆에서 줄곧 봐 왔으니까.

‘시호야. 그래도 넌 네가 좋아하는 놈이 형질자니까 페로몬을 맡을 수 있잖아.’

‘나는 그게 안 돼. 아마도 평생 안 될 거야. 베타가 좋으니까 어쩔 수 없어.’

이제 지친다며 다 놓고 싶다며 재경과의 관계를 비관적으로만 바라보는 시호에게 자신이 건넨 말은 우스웠다. 언뜻 보면 위로해 주는 말로 들렸지만 친구의 불행보다 내 불행이 더 크니 넌 견뎌야 해. 그런 저열함이 담겨 있던 말들. 그 말에 친구인 시호가 웃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마음들. 이런 건 잘못되었구나. 하고 느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시간은 많이 흘러가 버린 후였다.

하민이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감청색보다 더 짙은 어둠이 깔린 하늘이 제일 먼저 보였다. 하민은 멍하게 하늘을 응시했으며 그 시선은 손에 쥔 핸드폰의 진동이 멈출 때까지 지속됐다.

이내 진동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어 버리자 고요함에 먹힌 공간 너머로 스미는 달빛이 하민의 어깨에 닿았다. 이후 하민은 적당한 속도로 글자를 써 내려갔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단톡방 화면에는 원주로 놀러 오라는 최종 답변과 낡은 빌라의 집 주소가 아닌 현재 운영하는 꽃집, 아망떼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하민이 일부러 꽃가게 주소를 알려 준 건 가벼운 일탈을 도와줄 친구들에게 그래도 나는 잘살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좁고 낡아 빠진 집이 아닌, 조금이나마 아름다워 보이는 곳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민의 친구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놀러왔다. 무슨 놈의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선 한다는 소리는 네가 가장 팔자가 좋아 보인다는 장난스러운 말이었다.

하민은 친구들이 하는 말을 극구 부인하지 않았다. 여러가지 시각에서 보자면 자신은 정말이지 팔자가 좋아 보였으니까.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팔자가 좋아 보이도록 가면을 쓰고 아무렇지 않게 웃고도 싶었다.

도윤을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면 할수록 더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었으니.

“자, 이건 선물. 빈손으로 오긴 뭐해서 네가 저번에 가지고 싶어 했던 향수 좀 사 봤어.”

강주가 청록색에 금박이 덧씌워진 글자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쇼핑백을 건넸다.

“그냥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뭘 이런 걸 가져왔어.”

뾰로통하게 답하긴 했지만 하민의 얼굴에선 누가 봐도 고맙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와는 반대로 선물을 건넨 강주의 표정은 걱정스러움으로 얼룩이 졌다.

“하민아. 근데 너 잘 먹고 지내긴 해?”

조심스레 강주가 물었다. 하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지내지.”

지금 막 손질을 끝낸 파란색 수국이 하민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 꽃을 건네며 하민이 미소를 지었다. 탐스럽게 핀 수국을 받아 들며 강주도 따라 웃고는 재차 되물었다.

“정말? 얼굴이 아주 반쪽인데?”

“야, 이강주. 이놈은 또 사서 걱정하려 그러네. 꽃 옆에 있으니까 여전히 윤하민은 빛이 난다 빛이 나. 나보다 멀끔해 보이잖냐.”

“아~ 길남이 얘는 또 뭔 헛소리야.”

“헛소리는 인마! 형아가 말하는데 맞습니다! 해야지.”

강주에게 헤드락을 걸며 길남이 체중을 실어 매달렸다. 그 무게를 못 이겨 휘청거리는 강주를 받치며 선 호건도 걱정스러운 말에 한술 더 떠 거들었다.

“아냐, 강주 말대로 윤하민 삐쩍 말랐는데? 됐고, 바로 일 접고 이동할까?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우물쭈물하다가 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화답했다. 차마 선뜻 내가 살게. 라는 말을 하진 못했다.

가져온 돈은 집을 구할 때 다 꼴아 박았다. 그나마 꽃집이 예상외로 잘되고 있긴 했지만, 외딴 지역에서 혼자 살아남으려니 돈이라는 게 물 새듯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금전에 있어 한도를 모르고 살았던 하민은 펑펑 돈을 흩뿌리고 나서야 자신의 철없는 행동을 후회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남은 금액은 극히 일부분이었다.

“그래, 나도 너희 덕 좀 보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하민을 마주한 강주와 호건, 그리고 밉살스러운 길남까지. 하민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하는 것이 역력하게 묻어 나왔다.

호건은 하민의 상황이 무엇인가 위태롭다고 느꼈다. 무뚝뚝하지만 친구들 중 가장 섬세한 성격이었던 호건이 이를 모를 리가 없었다.

호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찰나에 가장 적절한 내용을 골라 말했다.

“그래서 너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넌지시 물어 오는 말에 하민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꽃집을 제집처럼 왔다 갔다 한 대학생들이 재잘대며 하던 말이 불현듯이 떠올랐다.

한국대 원주 캠퍼스 바로 앞에 있는 치킨집이 그렇게나 맛있다는 정보였다. 하민은 도윤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서 그 치킨집을 찜해 놓기도 했었다.

생각을 마친 하민이 답을 내놓자 친구들은 굳이 왜 치킨집을 가냐고 물었다. 하민은 대학교를 다닐 적 이 친구들과 처음 맛본 치킨과 맥주가 인상적이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때의 맛을 본 것이 아직도 충격으로 남아 있긴 했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양념이 고루 발린 치킨 한 조각을 씹던 그날을.

하민은 자신의 모습이 도윤에게 부잣집 도련님이 아닌 평범한 동생처럼 편히 보이길 바랐다. 누구나 좋아하는 치킨집은 가장 무난하고 괜찮은 코스였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엔 부담이 없었다.

‘또 생각하고 있잖아.’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도윤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무색하게 숨을 쉬듯, 물이 흐르듯 하민은 도윤을 당연하게 떠올렸다. 기가 찼다. 자신의 모습이 남들이 보기엔 우습고 하찮아 보일 것이라는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중증 중에 중증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하민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대학가 근처에 치킨 잘하는 곳 있대. 여름이니까 치킨에 맥주 어때. 거기로 가?”

의외의 메뉴 선택에 강주와 호건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얼굴을 굳혔다. 눈치가 둔한 길남만 제외하곤 모두 하민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시끌벅적한 치킨집에 우성 알파 넷이 둘러앉았다. 페로몬을 완벽하게 숨기며 들어왔지만, 맥주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한 말이 몇 번 오가자 분위기에 취한 알파들이 미세한 페로몬을 뿌렸다.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고 술집 안에 대다수가 베타였기에 치킨집 사장님은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가 테이블에 오갔다.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자 힐끔대며 하민과 친구들에게 많은 시선이 꽂혔다. 이를 아랑곳하지 않은 길남이 이미 취할 대로 취한 하민을 나무랐다.

“야, 이 시끼야. 그러게 파티장에서 왜 그랬냐? 어휴, 열받아도 좀 참지. 너 참는 거 하난 진짜 잘했잖아.”

빈정거리는 말을 섞는 길남에게 그 왼편에 있던 강주가 어깨를 치며 진정시켰다.

“다 사정이 있겠지. 하민이도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길남아 우리 가서 숙취 해소제나 사 오자. 하민이 많이 취했어.”

“에이씨. 알았다, 알았어.”

머리를 팍팍 긁더니 길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주는 호건에게 하민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며 길남과 치킨집을 나섰다. 한순간에 호건과 몽롱하게 눈이 풀린 하민만 남았다.

호건은 하민이 평소답지 않게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 이러는지 걱정도 되었고 친구 된 도리로써 합당한 이유도 듣고 싶었다. 호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너 오늘 컨디션 별로야? 지내면서 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어? 왜 이렇게 다운됐어.”

“그러게. 그냥…… 좀.”

하민은 배시시 웃어 보이다가 억지로도 말을 잇지 못했다. 호건은 침착하게 되물었다.

“이곳 생활 많이 힘들어?”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래? 그러면 언제 올라올 생각이야? 너희 아버지 그래도 너 외동이라고 엄청 챙기시는 분이잖아. 싹싹 빌어서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아무도 없는 곳에선 적적하잖아.”

적적하다는 그 말 한 마디에 하민은 잊으려 했던 도윤이 다시금 떠올랐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베타가 좋아졌을 때의 감정을 천천히 되돌아보는 한편, 문득 자신의 취향을 바꾸어 놓은 그 베타 놈도 잘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하민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추억에 머물러 버린 베타가 아닌, 현실에 살고 있는 우도윤이었다.

나에게 철벽 치는 우도윤. 끝끝내 번호도 주지 않은 우도윤. 난감한 기색이 얼굴에서 가시질 않던 우도윤. 그간 그와의 수많은 행적들이 마음속을 난장판으로 헤집었다.

고요한 바다에 작은 폭풍이 지나간 듯했다.

“호건아.”

“어.”

“그 베타 녀석 잘 지내고 있을까?”

“그… 베타 녀석?”

“응. 왜 있잖아. 내 취향 이렇게 괴상하게 바꿔 놓은 히어로 놈.”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하민은 피식대며 남겨 둔 맥주를 털었다. 취했는지 머리가 몽롱하고 입 안은 얼얼해서 술맛이 썼다.

“아, 너 따돌림당할 때 막아 주던 걔?”

“응.”

“걘 바로 졸업하고 나서 다른 베타랑 속도위반했잖아. 그 후로 바로 결혼했어. 지금은 애가 둘이라더라. 왜. 아직도 걔 못 잊었어? 계속 떠올라?”

“그건 아니야.”

옛 사람은 다 잊었다. 이미 흘러가 버린 사람에게 미련을 가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단지 이상형의 척도를 바꾼 그날의 기억은 삶에 이정표가 되었다.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취향 따위가 하민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단단했던 마음이 한 번의 난색으로 금이 갔다. 예상치 못한 실패의 씁쓸함은 생각 외로 컸다. 씁쓸함이 배가 되어 이내 술처럼 써졌다.

“아, 왔어?”

치킨집을 나섰던 강주와 길남이 돌아왔다. 호건이 둘을 반기면서도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하민을 보라며 턱으로 가리켰다. 길남은 나가서 한 소리 들었는지 조용했고, 강주는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하민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새 더 마셨어?”

강주가 하민에게 물었다.

“응. 오늘따라 술이 쓰네.”

“술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았잖아.”

숙취 해소용으로 사 온 음료를 하민에게 건네며 강주가 말했다. 음료를 뜯지도 못하고 계속 헛손질을 하자, 보다 못한 호건이 음료 뺏어 뚜껑을 직접 따 주며 물었다.

“그래서 지나간 그놈 이야기는 왜 꺼내는데? 설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그게 뭔 소리야?”

놀란 눈으로 강주가 호건을 쳐다봤다. 호건은 하민에게 뚫어지는 눈길을 고정했다.

머리가 웅웅 울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숙취 해소제를 몸에 들이부어도 여전했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민이 말했다.

“그냥. 내가 사는 곳 바로 윗집에 덩치 큰 베타 한 명이 있거든. 다리도 다쳐서 깁스도 하고 다니거든? 근데 그 사람 정말로 신기해. 꼭 잘생긴 감자같이 생겼어.”

도윤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하민은 곱게 미소를 지었다. 잊겠다 해서 잊힌다면 이다지도 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답답함에 머리를 벅벅 긁는 하민이 짜증을 내며 친구들에게 물었다.

“있잖아……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뭐?”

강주와 호건. 그리고 조용히 치킨 무를 퍼먹는 길남까지 하민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취한 하민은 자신의 말을 되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혼자서 답답했던 마음만 끄집어낼 뿐이었다.

“딱 이번이 기회였어. 내 취향이거든, 도윤 형이. 근데 나한테 왜 그랬을까? 왜.”

연신 왜, 왜만 웅얼대던 하민은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술에 절어 뻗어 버린 하민의 몸에서 여태 숨겨 둔 페로몬이 일제히 쏟아졌다. 익숙한 향에 놀란 셋은 취해 버린 하민의 몸에 담이라도 쌓듯 재빨리 물건이나 얇은 여름용 아우터를 벗어 가렸다.

“얘 대체 뭐 하냐? 우성 새끼가 페로몬 관리가 왜 이 모양이냐고. 설마 얘 늦게 발현해서 아직도 실수하고 그러냐?”

믿기 싫은 상황에 길남이 때아닌 짜증을 부렸다. 이에 강주가 호건에게 눈짓을 했고, 호건은 어깨를 으쓱이며 뻗어 버린 하민을 도우라며 눈치를 줬다.

오른쪽은 호건이, 왼쪽엔 강주가 하민을 부축하고 섰다. 길남은 그 뒤를 방어하듯이 가림막처럼 서서 따라나섰다.

짐짝처럼 끌려가는 중에도 하민의 입에선 똑같은 이름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도윤 형. 도윤 형. 몇 번이고 도윤의 이름이 쏟아졌다.

도윤은 다쳤던 당시보단 다리의 상태가 한결 나아졌다는 걸 몸소 느꼈다. 고단한 마음을 묻어 두었을 때처럼 다리의 통증도 시간이 흘러 무뎌진 것이었다. 집 안을 휘젓고 걸어 다닐 때에도 욱신거렸던 감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복직해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은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는데 벌써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이 싫었다. 해결되기 어려운 일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친구였던 재우와도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해야만 올바른 길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지도 못했는데. 중압감에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시간은 뒤쳐 진 사람은 기다려 주지 않고 흘렀다.

무기력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였을까. 재우가 경찰직을 내려놓았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도윤은 목소리라도 들으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재우는 일방적으로 끊기를 반복했다.

이로써 무언가를 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포기하려 하자 문득 서운함이 밀려왔다. 축 처져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오래된 인연이 덧없구나 느낄 때쯤, 재우가 톡 하나를 보내왔다. 배려가 엿보이는 문장이 가라앉은 도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잘 지내라는 말. 조만간 시간을 내어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말. 그리고 먼저 일을 그만두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

재우가 남긴 말들 속에서 도윤은 서운한 감정을 지우고 위로를 받았다. 한참 동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재우와 톡을 나누고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안부까지 남긴 후에야 도윤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어 냈다. 밖은 이미 가로등이 켜져 있을 정도로 어둑어둑해진 채였다.

밤하늘에 찌르르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깔렸다. 긴 시간 동안 핸드폰으로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문득 피곤함을 느낀 도윤은 환기하려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선 하민이 주고 간 붉은색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정말 많이도 받았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 봐도 온통 장미꽃이었고 집 안은 꽃향기로 가득했다. 문득 어색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감정이 일었다. 도윤은 하민이 핸드폰 번호를 달라고 했을 때의 표정을 곰곰이 그려 보았다. 하민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도 그가 자꾸만 스미는 것 같아서, 그 부담스러움에 무언으로 거절 아닌 거절을 했더랬다. 여기까지면 적당하다 싶었는데 자꾸만 떠오르는 걸 보면 실상 마음은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냥 알려 줄 걸 그랬어.”

돌이켜 보니 마음 한 켠이 짠했다. 하민은 괜찮다며 웃었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순순히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축 처진 어깨는 묘한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도윤은 궁금해졌다. 남에게 이러한 감정을 가진 적도 오래간만이라 어색하면서도, 어느 순간이 되면 어김없이 그의 행동이 떠올랐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지만 매번 건네는 꽃을 받을 때마다 꽃을 감싼 포장지에 축축한 땀이 서렸던 것도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감정을 깨닫는 것에 서툰 도윤마저도 꽃을 전달하는 하민의 상냥한 마음씨는 결코 꾸며진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민 씨는 지금 뭐 하고 계실까.”

풀벌레 소리를 듣자니 요즘따라 집 안에선 찌르르르한 초인종 소리로 가득했던 게 떠올랐다. 몇 주간 빠짐없이 집 안을 울린 익숙한 그 소리는 하민이 왔다는 신호였다. 도윤은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일과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찌르르르한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날은 무언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오늘은 그가 안 오는 걸까 하면서. 그렇게 하민에게 점점 익숙해졌다는 걸, 밤중에 들리는 일정한 벌레 소리로 깨달은 참이었다.

도윤이 가만히 밤하늘을 구경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늘 새벽은 분리수거 차량이 오는 날이었다. 그도 이젠 썩어 가는 꽃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지 않았다. 일반 쓰레기로 분류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늘 밤은 어째선지 저 꽃들을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분리수거나 해야지.”

도윤이 슬리퍼를 신고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양손 가득 폐품을 담은 비닐봉투가 들린 채였다. 어느덧 도윤의 커다란 몸집이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플라스틱, 캔, 종이 등등을 알맞는 곳에 수거하고 도윤은 빌라 입구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숨을 돌렸다.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정신없이 나온 바람에 챙기지 못한 나머지 손끝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도윤은 더 이상 아프지 않은 다리를 습관적으로 주물럭대며 지루함을 달랬다.

그가 앉은 위치에선 빌라의 외관이 한눈에 보였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505호에는 나오기 전 켜 둔 조명등으로 미약하게나마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그와는 반대로 하민이 살고 있는 405호에는 아무런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없거나 혹은 잠을 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두운 공간에 불빛 하나 없이 깜깜하면 어떠한 경우라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자신과는 달리 하민은 깜깜한 공간에서도 잠을 청할 수 있는 걸까. 이런 사소한 것마저 다른 것이 신기했다.

“일찍 주무시는구나.”

이름을 대지 않아도 도윤이 누구를 이야기하는지는 뻔했다. 그의 시선은 줄곧 405호에 닿아 있었으니까. 도윤은 문득 물지도 않는 담배를 피우는 것 같은 심정을 느꼈다. 폐 안쪽에 나쁜 공기가 들어찬 것처럼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쓰리고 아팠다.

석고로 덧대어진 단단한 다리로 자갈이 깔린 바닥을 쓸었다. 돌끼리 부대끼는 소리가 맑고 고왔다. 더운 날씨 속에서 들리는 여름 소리를 가만히 듣다가 미적지근하게 부는 바람이 찜찜한지 도윤이 목을 움츠렸다. 밖에 오래 앉아 있기엔 아직은 날이 더웠다.

더위에 참지 못하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거리가 있는 빌라 입구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난 것일까? 싸움이 났다면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도윤은 자신이 경찰 직에서 휴직 상태라는 것도 까먹고 성큼성큼 자갈길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와, 얘 아직도 정신 못 차린다.”

“평소보다 많이 마셔서 그렇잖아. 그러게 넌 가뜩이나 속 쓰린 애를 왜 볶아서 그래.”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마실 줄 누가 알았겠냐? 호건아 너도 한 마디 좀 거들어 봐. 나만 나쁜 놈 된 것 같잖냐.”

“강주 말 틀린 거 하나 없어. 네가 나쁜 놈 맞지 뭘 그래? 근데 여기 맞긴 맞아?”

“꽃집 앞에 있는 빌라라고 했으니까 맞을걸? 이 근처 빌라 여기밖에 없었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바로 코앞까지 소란스러움이 또렷해질 때였다. 익숙한 인영이 도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갈길을 밟고 선 다리가 우뚝 멈췄다. 잘생기고 건장한 남자 셋이서 여지껏 도윤이 떠올린 한 사람을 에워싸고 심각하게 떠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저릿해 짐과 동시에 콕콕 쑤셨다. 마음에 담이라도 걸린 것인지 처음 느껴 보는 통증은 도윤을 버겁게 했다. 숨을 가볍게 내쉬면서 가볍게 주먹을 쥐고 아픈 부위를 슬슬 둥글리며 달랬다. 그래도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쪽에서 부축하며 땅만 보고 걷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쿵쿵거리던 심장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시체라도 된 것처럼. 숨이라도 멎은 것처럼. 고장이라도 난 기계처럼. 이상하리만큼 기분이 언짢았다.

“어? 저기 저 사람…….”

“뭐가? 와… 설마. 맞는 거 같지?”

눈이 마주친 남자가 먼저 알아보고 운을 떼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는 척을 해 왔다. 도윤은 남자들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처져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대로 발도 딛지 못하는 하민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자 도윤의 심장은 더더욱 느릿하게 뛰었다.

“누구시죠?”

“잘생긴 감자… 다리 깁스… 아, 이분이 맞나 보네. 그렇지? 호건아.”

“…….”

호건이라 불린 사람이 오던 길을 멈춰 서서 도윤 쪽을 바라보았다. 한 번은 짧은 도윤의 헤어에, 또 다른 한 번은 깁스를 한 도윤의 다리에 시선이 꽂혔다. 일정한 부위로 눈빛을 받은 걸 느낀 도윤이 이들을 경계했다. 어느덧 하민을 둘러싸고 남자 넷이서 대치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도윤이 조금 더 가까이 하민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면 갈수록 바람을 타고 술 냄새가 짙게 풍겨 왔다. 호건이라고 불린 남자는 코앞까지 다가온 도윤에게 곧바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도윤 씨… 맞으시죠?”

“제 이름은 어떻게.”

도윤이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다가 도윤 형, 도윤 형, 여러 번 웅얼대는 하민의 입 모양을 바라보곤 도로 표정을 굳혔다. 명치 앞까지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도윤이 그 손을 맞잡고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제가 우도윤입니다. 그러면 그쪽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도윤은 하민을 양옆에 낀 남자들을 더불어, 뒤편에 위치한 남자까지 꼼꼼히 살폈다. 특히나 뒤편에서 하민의 몸을 붙들고 선 남자의 인상이 유독 거칠어서 거슬렸다. 도윤은 혹시 모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들 중 오메가로 보이는 남자는 없는 듯 보였지만, 만에 하나 형질자가 있다면 알파인 하민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힘 좀 봐. 저기요, 아픕니다. 손에 힘 좀 풀어 주세요.”

“아, 죄송-.”

“하민이 친굽니다. 반가워요. 권호건입니다.”

“…네?”

호건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정체를 밝혀 왔다. 친구라는 말 한마디에 도윤은 손에 힘을 푸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빼내었다. 이어서 하민을 부축하고 있던 나머지 두 명도 연달아 소개를 했다.

“저는 이강주라고 해요. 저도 하민이 오랜 친구고요. 이쪽도….”

“아 난 박길남인데, 그래서 그쪽이 우도윤 씨라고요?”

“네.”

“듣던 대로 건실하게 생기셨네.”

“네…? 듣던 대로? 건실?”

길남이 씩 웃자 강주가 또또 헛소리한다 하며 핀찬을 주었다. 잔소리를 들은 길남은 입술을 삐쭉이며 다물었다. 호건을 그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젓다가 도윤을 향해 말했다.

“하민이 좀 데려다 놓고 싶은데 집을 좀 알 수 있을까요?”

올곧은 눈빛을 내보이며 호건이 물었다. 이에 도윤은 양옆에서 잡고 있는 친구들의 손을 뿌리치며 하민을 강하게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제가 알고 있으니 직접 데려다주겠습니다. 친구분들은 이쯤에서 살펴 가세요.”

한순간에 친구를 빼앗겨 버린 이강주, 권호건, 박길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그들 사이에 묘한 정적이 일었다.

“저저…!!”

길남이 손가락질을 하며 도윤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듯이 버벅거렸다. 옆에서 강주는 나대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고 호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하민을 뺏어 간 도윤을 쳐다봤다. 하민이 술에 찌들어 도윤 형, 도윤 형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부른 게 저 사람이렸다.

호건이 바라본 도윤의 첫인상은 머리는 짧고 다부진 몸매에 유독 큰 가슴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이었다. 표정도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눈치가 빠른 사람에게까지 감정을 다 숨길 수는 없었다. 호건에게는 모든 부분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바라본 도윤은 분명히 하민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얕게 성을 내고 있었다.

이는 그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하민의 집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곧바로 취한 친구 놈을 가로챈 것을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길남이 빼앗긴 하민을 되찾아 오려고 손을 뻗었지만 이를 호건이 빠르게 제지했다. 붉으락푸르락하며 소리 지르려는 길남을 보며 이번에는 옆에서 상황을 살피던 강주가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 하민을 데려간 도윤을 붙들지 말라는 의미에서였다.

도윤은 주위를 힐끔대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 깁스로 불편해 보이는 걸음을 하며 그들과 멀어졌다. 점차 작아지는 알파와 베타를 바라보며 호건이 픽 웃음을 지었다.

“윤하민 삽질 좀 하겠어. 안 봐도 훤하다. 야, 우리도 그만 가자.”

호건이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길남과 강주도 등을 돌렸다.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각자가 오늘 일은 하민에게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삼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도윤이 하민의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걸었다. 뒤를 힐끔 쳐다보니 친구라는 사람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난 것 같았다. 그제야 안심이 되어 억눌려 있던 한숨이 샜다. 평소답지 않게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남의 일에 끼어든 것 같았다. 뒤늦게 이래도 되는지 도윤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졌다.

달은 밝았고 걷는 내내 들려오는 찌르르한 소리도 여전했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 미묘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 버린 도윤은 부끄러움에 귀 끝을 빨갛게 물들였다. 하민의 숨소리가 풀벌레 소리를 삼켜 버릴 정도로 크게 들렸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발걸음은 405호에 도착해 있었다.

“근데 비밀번호도 모르잖아.”

목적지에 도착하긴 했지만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허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바닥에 내려놓고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윤은 재차 하민을 들쳐 엎고 505호로 향했다. 어차피 둘이서 한 공간에 있다고 한들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베타와 알파는 그런 관계였다. 각자만의 사정을 품고 자신이 처한 곳에서 다른 이의 삶을 넘보지 않는 그런 관계.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그 무엇을 보더라도 더 나아갈 일은 없는 사정이 있었다.

도윤은 계단을 오르는 내내 숨을 쉴 때마다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하민의 얼굴을 살폈다. 고운 미간을 잔득 찌푸린 채로 끙끙거리는 모습이 몹시 마음에 쓰였다.

505호에 도착했다. 405호에 들렸을 때와는 달리 익숙하게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하민의 몸이 한껏 든든한 몸에 기대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술에 취한 그가 넘어지지 않게 허리를 붙잡아 안으면서도 도윤은 이 상황이 왜 일어난 것인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아-”

자꾸만 일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자 도윤은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상체를 들썩거리자 하민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져서 쓰려지려고 했고, 놀란 몸이 반사적으로 인사불성의 몸을 붙들었다. 한순간에 둘의 숨이 바짝 밀착되었다. 도윤이 공기를 흡입하면 하민은 공기를 내뱉었다. 둘의 숨은 각자의 사정을 담은 채로 뒤엉켰다.

음냐음냐 헛소리를 끄집어낸 하민이 몸이 받쳐졌을 때의 충격으로 서서히 눈을 떴다.

살짝 밝은 갈색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에서 조금씩 면적을 늘렸다. 일순 도윤의 숨이 멈췄다. 놀람에 깜빡이던 눈도 멈췄지만, 귀에 입히는 빨간 색소는 멈추지 않고 더욱 빠르게 퍼져만 갔다. 굳어 가는 심장은 한 번씩 피를 뿜을 때마다 터질 것처럼 크게 펄떡였다.

“어…? 이게 누구야. 도윤 형이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정신? 전 진짜 진짜 멀쩡하거든여? 진짜로.”

혀 꼬인 소리로 야무지게 말하는 입매가 쉬지 않고 오물대었다. 입술이 닿을랑 말랑 한 거리에서 하민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혀엉- 왜 치사하게 폰 번호도 안 알려 줘요?”

“하민…….”

“안대! 말하지 말아요! 저 상처받아요. 상처받는다고요…….”

“…….”

이름을 입에 담던 도윤이 손으로 제 입을 막는 하민의 행동에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치 않고 쿡쿡 쑤시는 통증만 일었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꿈이었던 야구를 그만두었을 때. 친했던 동료들과 멀어졌을 때. 통증은 차곡차곡 쌓이기만 하는 아픔을 감내했을 적에 감각과 꼭 닮아 있었다.

“형은… 내가 싫어요? 나 형한테 고백 전에 차인 거 맞죠? 그래요?”

“하민 씨…….”

“아 왜~! 왜 폰 번호 안 알려 줘! 대체 왜요. 그럼 이렇게…….”

하민의 손이 빨개진 도윤의 양 귀를 붙들었다. 반쯤 풀린 눈동자가 일렁이더니 이내 두 눈을 감고 서서히 다가왔다, 쪽.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났고, 아쉬웠는지 한 번 더 쪽 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도윤에게 입을 맞춘 하민이 헤실헤실거리며 웃었다.

“뽀뽀라도 해 주면 좋잖아. 왜 다 안 되냐고오…….”

“아.”

얼이 나간 도윤이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갑작스러운 하민의 행동에 분명히 밀쳐 내며 거부하고 빠르게 반응할 수도 있었건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저기요, 하민 씨? 하민…….”

“좋아한다고… 좋아해요, 도윤 형. 좋아…해.”

“…….”

도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심장은 더더욱 느릿하게 뛰었고 이것이 불안한 감정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인지 도윤은 알 수 없었을뿐더러 깊게 생각하지도 못했다. 착잡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도윤이 말했다.

“제가 뭐가 그렇게 좋은데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냐고요. 왜.”

“…….”

“하아- 미치겠다.”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놓고 하민은 도윤의 가슴팍에 기대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잠에 빠져 버렸다. 여태껏 도윤이 겪은 윤하민은 친구도 많아 보였고,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과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두른 옷가지들은 슬쩍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비싼 것들뿐이었다. 이 젊은 나이에 꽃집까지 운영할 정도면 재력도 상당해 보이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흠집 하나 없는 완벽한 외모를 가짐과 동시에 그는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으로 비춰질 알파였다.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큰 메리트를 가진 알파.

답답한 심정으로 도윤은 잠들어 버린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참으로 우습게도 침까지 흘려 가며 고단함에 빠져 버린 얼굴까지 예뻐 보여서 너무나도 기가 찼다.

도윤은 잠든 하민을 잡아끌어 안락한 침대를 내어 주었다. 햇살에 잘 말려 포근한 이불을 덮어 주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자, 하민이 몸을 뒤척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민이 입고 있던 얇은 실로 짠 카디건 주머니에서 핸드폰 하나가 빠져나왔다. 그 핸드폰을 바라보자니 번호를 달라며 칭얼대던 하민의 모습이 함께 겹쳐 보였다.

“내 폰 번호가 대체 뭐라고 이러는 거야.”

이다지도 속상한 마음이 들 거였으면 별것도 아닌 핸드폰 번호를 빼지 말고 알려 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이 사람이 이토록 서운한 감정을 내보일 일도 없지 않았을까. 그는 무척이나 긍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감정 표현에 서툰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반짝거리는 빛을 가졌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무시할 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데…….

“하민 씨. 그게 그렇게 속상했어요?”

당신이 뭐가 아쉬워서 이럴까 떠올려 봤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의문을 늘려 가 봤자 달라질 것은 없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자. 그러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도윤은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하민에게 목 끝까지 도로 이불을 덮어 준 뒤, 탁자에 올려 둔 곰돌이가 그려진 메모지 한 장을 꺼냈다. 저번에 동생인 재윤이가 곰같이 우직한 형이 생각나서 산 메모지라고 하면서 두고 간 것이었다. 너무 많이 샀다고 짐짝처럼 건네주길래 마지못해 받았었는데 이걸 사용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곰돌이 메모지에 도윤은 검은색 네임펜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와 핸드폰 번호를 정성스레 적어 내려갔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핸드폰 번호를 다 적고 나서 적당한 크기로 깔끔하게 접었다. 그리고 하민이 흘린 핸드폰 케이스 뒤편에 핸드폰 번호를 적은 메모지를 끼워 넣었다.

“이거면 되겠지.”

남의 핸드폰을 열어서 번호를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도윤에게 있어서 이것이 고심 끝에 나온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민이 누운 침대를 한참 동안 눈에 담던 도윤의 입가와 눈매가 평소의 모습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마음이 간질거리는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라고. 상대방이 주는 호의에 언제까지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자신이 변화하는 모습을 핑계를 대서라도 납득하고 싶었다.

현재 도윤의 얼굴은 여지껏 그의 인생에서 떠올릴 수 없을 만큼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민이 주고 간 장미꽃이 온 집 안의 공기를 장악한 지도 오래됐다. 이미 장미꽃의 향기로움이 도윤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을 형태로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이 사람 말대로 되었다. 윤하민의 말대로.

“잘 자요, 하민 씨.”

잠든 이에게 가볍게 하루의 일과를 나누고 도윤은 그가 잠든 가까운 발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평온하게 숨을 들썩이는 하민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도윤도 그제야 편히 눈을 감았다.

밝은 햇빛이 아직도 꿈나라에 빠져 있는 하민의 얼굴을 직통으로 때렸다. 행복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하민은 몸을 잔뜩 웅크려 햇빛을 피했다. 바로 그 순간 커튼 치는 소리와 함께 하민을 괴롭혔던 햇빛이 사라졌다.

문득 이상함을 느낀 하민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몸에서 평소 사용하는 향이 아닌 포근한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잘 마시지도 않는 술을 마셔선지 하민은 숙취에 시달리며 배를 비볐다.

“으…… 속 쓰려.”

“깼어요?”

“어?”

익숙한 목소리에 하민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눈곱이 낀 눈을 수차례 비벼 가며 눈을 깜빡이고 초점을 맞추려 노력했다. 깜빡깜빡, 가뜩이나 큰 눈이 흰자가 다 보이도록 크게 눈을 떴다. 또렷하게 하민의 눈동자 안에 국자를 든 도윤이 맺혔다.

“도윤… 형?”

“물 줄까요?”

“어… 네. 무, 물 주세요.”

도윤은 말없이 부엌으로 걸어가 바로 앞에 놓인 아일랜드 식탁 끄트머리에 설치해 둔 정수기에 컵을 가져다 대었다.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몇 초간 들리다가 멈췄고 도윤이 몸을 돌렸다.

하민은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도윤의 모습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도윤은 상체는 다 벗은 채로 바지만 덜렁 입고 깔끔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저게 뭐야……? 낯선 광경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엇보다도 좋아하고 호감 있는 사람이 눈앞에서 헐벗고 돌아다니다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멍하니 눈을 뜨고 있는 하민의 앞으로 물컵이 건네졌다. 하민은 컵을 받아 들고 꾸벅이며 물을 마셨다. 목구멍에 무언가 들어오니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도윤은 물을 다 마신 걸 확인하곤 컵을 가로채 갔다. 훤한 구릿빛의 등짝이 근육을 뽐내며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불룩불룩 위치를 바꿨다. 돈 주고도 못 볼 광경에 하민은 또 넋을 잃었다.

“속 쓰리죠?”

“…….”

“하민 씨?”

“아, 네! 네, 속 쓰려요!”

넋 놓고 도윤의 등판을 감상하던 하민이 묻는 말에 화들짝 놀라 답했다. 이미 답을 예상했는지 도윤은 분주하게 무언가를 날랐다. 그러고 보니 너무 놀라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집 안은 구수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식기 전에 와서 해장해요.”

반듯하게 아일랜드 식탁 의자에 앉은 도윤이 부드럽게 말했다. 하민은 쓰린 배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며 도윤의 맞은편에 앉았다. 좁은 식탁 위에 갓 차려진 따끈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기는 애호박 무침과 소량의 고춧가루를 풀었는지 불그스름한 콩나물 국도 보였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음식들이 아침부터 눈을 다채롭게 해 주었다.

“도윤 형. 왜 저한테 이런 걸 해 줘요?”

“어제 술 많이 마셨잖아요. 기억 못해요?”

“아니, 기억은 해요. 하는데…….”

“그럼 이런 음식 안 좋아…….”

“아뇨. 좋아요. 좋은데.”

하민의 눈길이 도윤의 단단한 상체로 향했다.

“형은 원래 그렇게 거리낌이 없어요?”

“뭐가요.”

“매번 헐벗고 돌아다니는 것 같아서요. 근육 때문에 불편한가…?”

조심스레 운을 떼는 하민을 바라보며 도윤이 제 꼴을 보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 운동할 때부터 더우면 다들 이런 것 신경 안 쓰고 지내서 버릇이 됐나 봐요. 설마 불편해요?”

“그럴 리가요! 아주 좋아요 아주!”

손사래를 치며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하민을 보며 도윤은 실없어했다.

“일단 식사부터 해요. 대화는 그 후에 하죠.”

“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하민이 숟가락을 들고 무엇부터 먹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도윤의 말대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차려 준 성의가 있는데 밥상머리 앞에서 딴생각을 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것쯤은 곱게 자란 하민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흰쌀밥부터 한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따끈한 밥에서 고소한 단내가 풍겼다. 밥을 씹지 않은 채로 바로 옆에 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나물 국을 펐다. 아삭아삭 씹히는 콩나물을 우물대던 하민이 맛이 좋다는 걸 느끼는 그 순간이었다.

“아악?!”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퍼뜩 떠올린 하민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손에서 놓쳤다. 쨍그랑대며 쇠붙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하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민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음식이 입맛에 안 맞아요?”

“아니, 아뇨! 맛있는데요. 맛있어요. 너무 맛있… 하….”

“하민 씨?”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던 하민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젠장. 밥 먹을 때 하필이면 어젯밤 도윤에게 했던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다. 자신이 도윤의 귀를 붙들고 여러 번 입술을 쪽쪽 부딪히며 마지막으로 좋아한다고 떼를 쓰는 모습이.

하민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밥을 해치운 뒤 도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집에서 도망치 듯 빠져나왔다.

한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잊고 있던 지난밤의 기억이 생생히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치킨집에서 웬수 같은 친구 놈들과 맥주를 마시며 도윤의 이야기를 꺼내고. 페로몬 조절도 못해서 그대로 술에 취에 뻗어 버리기까지.

수치스러운 지난밤의 기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도윤에게 기대어 도윤 형, 도윤 형 귀찮도록 몇 번이나 그를 부르고, 마지막으로는 투정을 부리듯이 멋대로 입을 맞추고 고백까지 해 버렸다.

“아 씨. 도대체 뭔 짓을 벌인 건데?”

계단을 내려와서 405호에 도착하자마자 하민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대었다.

앞으로 도윤 형 얼굴을 어떻게 봐, 윤하민 이 개자식아.

“아…… 씨발. 내가 앞으로 술 마시면 개다 개야!”

지난날의 추태를 모두 떠올린 하민이 울상을 지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신적인 타격은 회복이 불가능했다지만, 도윤의 배려로 아침부터 집밥을 대접받은 덕분에 배 속은 한결 편했다.

기운이 다 빠져 버린 하민이 느릿하게 침대까지 걸어갔다.

“아이고오… 죽겠다.”

그대로 이불에 파묻혀 버린 하민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의 감각을 되새겼다. 포근한 이불에 장미향이 적당히 섞인, 처음 맡아 보는 섬유 유연제 냄새가 코끝에 퍼졌을 때. 나긋한 중저음의 도윤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황홀한 아침을 맞았더랬다.

되새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짧은 반바지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 그 위로 깔끔하게 둘린 하얀색 앞치마와 표면에 봉긋하게 솟은 두 개의 돌기. 부드러운 입가. 전날 밤에 그 입술을 뺏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좋았던 것 같아.”

하민이 제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웅얼대었다. 술에 찌들어 있었음에도 입술에 닿는 감각이 자꾸만 심장을 간질거리게 만들었다.

“미치겠다. 너무 좋잖아. 너무 좋다고.”

맨정신에 그랬다면 더 좋았겠지. 아니, 아니다. 맨정신이었다면 시도조차 못해 봤을 일이었다. 그런데…….

“형은 맨정신이었을 거 아냐. 왜 피하지 않은 거지?”

모든 생각을 마친 하민이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봤다. 설마 꿈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가슴도 이토록 뛰는데 꿈일 리가 없었다.

“애들한테 물어보면 돼. 꿈은 아닐 거야. 실화다 실화.”

어제에 일을 친구들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나머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하민은 핸드폰 뒷면에 꽂힌 무언가를 발견했다. 작은 종이가 곱게 접혀 케이스 뒷면에 끼어 있었다. 하민은 종이를 꺼냈다. 한 번, 두 번 펼 때마다 무섭도록 심장이 뛰었다.

다 펼쳤을 땐 갈색 곰돌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다음으로는…….

“거짓말. 미쳤어.”

우도윤이라는 이름 석 자와 반듯하게 적힌 열한 개의 숫자가 보였다.

“하하…… 아. 너무 좋아. 미치겠다, 정말로.”

하민이 곰돌이 메모지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그러고선 코에 가져가서 숨을 흡입했고, 마지막으로 이마에 도윤의 이름을 묻었다.

하민의 입꼬리가 몇 분이 지나도록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민은 어제 찾아온 길남과 호건. 그리고 강주에게까지 놀림을 한 바가지 듣고 나서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정도로 믿기 힘들고 설레는 순간이었다는 것도. 도윤과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곰돌이 메모지에 정갈히 쓰인 연락처.

“형은 글씨도 잘 쓰네. 아휴 아주 그냥 완벽하세요. 앞으로 딱 내 거만 하면 되겠다.”

그것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실없이 웃고 또 웃었다.

멋대로 고백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아픔을 품었던 것도 말끔히 지워 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을 지금의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 듯했다.

그럼에도 하민은 숙맥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도윤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 같아서 그것이 너무나도 억울했다.

전화번호도 받았겠다, 이제는 당당하게 연락할 수 있는 사이였다. 이름은 뭘로 저장하지? 가볍게 문자로 이 기쁜 마음을 나눌까? 아니면 전화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톡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이라도 보내 봐야 하나.

어떠한 방식을 취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재를 기억 속에 보다 강렬히 남기게 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 방식은 톡을 넣는 것으로 정해졌다.

하민은 지금 바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단어를 조합해 봤다. 몇 번을 쓰고 지웠다 하면서 별것도 아닌 가벼운 문장임에도 여러 번이고 중얼중얼 썼던 글을 되짚어 봤다.

“딱 좋다! 이거로 가자.”

손가락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처음으로 도윤에게 보내는 시답지 않은 톡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고심 끝에 연락을 한 뒤로부터 마음은 간질간질거려서 참기 어려웠다.

(이모티콘)

1 오전 10:24 형. 지금 뭐해요?

귀엽게 벽 뒤에서 빼꼼하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1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정확히 1분이 지나자 숫자가 지워짐과 동시에 도윤에게서 답장이 왔다. 핸드폰을 집중해서 보는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내 도윤♥

그냥 있어요. 오전 10:25

“아, 어쩜 좋지? 너무 좋아. 진짜 좋아.”

하민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사라질 기미가 전혀 안 보였다. 몇 초간 뚫어지게 ♥내 도윤♥이라는 부분을 눈에 지겨울 수준으로 담고 담다가 행복에 겨워 발을 동동 굴렀다. 남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볼 것 같았다. 그토록 가슴이 벅찼다.

내가 우도윤이라는 사람을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기에 치기 어린 마음으로 다가갔을 뿐이었는데. 마음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일방적으로 향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더 간절했었던가 보다.

하민은 자신의 넘치는 마음이 비로소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미래가 보이지도 않는 삶을 헤매고 갈피를 잡지 못하더라도. 미운 오리가 백조를 흉내 내듯이 물 아래에서 열심히 발장구를 치며 난동을 부려도. 자신만이 지치지만 않으면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는 희망 고문으로 족쇄를 채우면서도. 다행히도 오늘에서야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족쇄에서 풀려났다.

하민이 도윤에게 답장하지 않은 채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여태 살아 있는 척하던 폐 안에 공기가 한꺼번에 들어옴과 동시에 만감이 교차했다.

“목소리 듣고 싶어.”

딱딱한 글자보다도 무뚝뚝하지만 배려심이 가득했던 도윤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고팠다. 하민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 순간 개인 톡 하나가 도착했다. 친구인 호건이었다.

호건

해장은 했어? 어제 보니까 너 페로몬이 너무 불규칙하더라. 꼭 열성처럼 굴었어. 이건 정말 내 노파심에 이야기하는 거긴 한데… 하민아. 너 병원 한번 가봐. 오전 10:35

간단한 안부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확인했더니만 실상은 마음을 철렁이게 만드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순간적으로 뒷골이 당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 바빴던 나머지 하민은 지금껏 페로몬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우성 알파답게 조절에는 완벽했으니 더욱더 그러했다.

“러트가 언제였지?”

하민은 피가 싹 식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남들보다 뒤늦게 알파로 발현했다고 하더라도 러트는 항상 일정하게 겪었었다. 그 정도로 지금껏 러트 주기는 한 번도 틀어진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 오고 나서 러트를 단 한 번도 겪지 않았다는 게 떠오른 것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이래?”

처음 겪어 보는 몸 상태를 늦게나마 알아 버린 하민의 낯빛이 창백하게 굳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몸 전체를 울렸다.

1이 사라졌는데도 긴 시간 동안 답이 없자, 호건이 재차 무어라 말을 얹었다. 진동에 정신을 차리고 나머지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하민이 불안함에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호건

충격받은 건 아니지? 읽었는데 답장이 없어서 조금 걱정되네. 혹시 모르니까 병원에 꼭 가서 페로몬 검사 받아봐. 너 스트레스 받으면 바로 페로몬 이상으로 이어지잖아.

러트 때 심하게 앓기도 하는 거 내가 옆에서 계속 지켜봤었기도 했고… 나 말고도 어제 돌아가는 내내 강주랑 길남이도 걱정하더라.

이 말 할지 말지 고민했는데 말할게. 너 어제 치킨집에서 필름 끊기니까 바로 페로몬 확 풀렸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하민아. 답장은 굳이 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또 연락할게. 오전 10:45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고 보니까 도윤을 만나고 인식한 이후부터 페로몬을 쉽게 쉽게 노출하곤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지금에서야 떠올린 걸까. 하민은 그제야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딘가가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얼빵한 상태로 머물다가 정신을 차렸을 땐, 도윤에게 톡이 몇 개 더 당도해 있었다. 물음표 몇 개와 더불어 속이 괜찮은지에 대한 따스한 말이 주를 이뤘다. 글자임에도 배려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하민이 스르르 미소를 보였다.

하민은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심란한 마음도 진정시킬 겸 그의 목소리라도 들으면 복잡한 심정에 안정을 되찾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신호 끝에 귓가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민의 입꼬리가 보다 더 올라가 있었다.

-하민 씨, 아직도 속 쓰려요?

“아니요. 누구 덕분에 전혀 안 쓰려요. 혹시 걱정했어요? 와- 저 정말 기뻐요. 형이 내 걱정도 다 할 줄이야. 이거 꿈은 아니죠?”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고 갔는데 당연히 걱정되죠.

“아, 맞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온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인사할게요. 이번에 챙겨 줘서 고마웠어요. 그리고… 폰 번호도 줘서 고맙고.”

-……네.

작게 들리는 수긍하는 말에 하민이 고개를 떨구며 웃었다. 누가 봐도 도윤은 자신이 건넨 말에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도윤이 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형은 지금 뭐 해요?”

-저요? 전….

뜸 들이며 잦아든 목소리에도 하민은 천천히 귀를 기울여 모든 것을 다 담으려고 애썼다. 낮게 흐르는 숨소리도. 뜨문뜨문 당황하는 듯한 목소리도. 그에게는 매우 기분 좋게 들렸다. 행복이란 것이 소소한 무언가에 의해서도 피어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냥 청소 중이에요.

“청소요? 아, 그렇지 참! 도윤 형. 꽃은 잘 정리하셨어요?”

-아… 안 그래도 그게-.

“네?”

우물쭈물대던 도윤에게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민이 그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이내 부드럽게 이어 흐르는 목소리에 눈꼬리를 휘었다.

-혹시 점심 약속 없으시면 제가 점심 살 테니까,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뭔데요?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게요. 근데 도윤 형. 이번엔 밥은 제가 살게요. 괜찮죠?”

-그래요 그럼.

귀 안쪽을 살랑이는 도윤의 목소리가 푸스스 웃는 시늉을 했다. 그로 인해 하민은 도윤이 더는 자신을 미워하고 있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무더운 여름날, 이곳에 온 뒤로 삶 자체가 시들어 버렸던 하민에게도 뜨거운 볕이 들었고 그 볕은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마냥 행복하다고 여긴 날이었다.

도윤의 부탁은 처치 곤란한 썩어 가는 장미꽃을 정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하민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몰상식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어렸을 적부터 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던 그는, 다른 사람도 꽃이라면 다 좋아할 줄 알았다. 지금까지 나이가 먹도록 꽃에 둘러싸여 곱게 자란 그다운 발상이었다.

하민은 목장갑 하나를 챙겨서 도윤의 집으로 향했다. 어느덧 하늘은 푸르다 못해 눈이 부셨다.

“아. 차림새가 좀 그런가…?”

거의 다다른 505호에서 하민은 옷을 체크하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편하게 입고 나온 옷이 눈에 많이 거슬렸다.

하민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도윤에게만큼은 티 없이 멋진 모습만을 보이고 싶었다. 405호에 도착해서 문을 따고 들어가 가장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흰색 셔츠를 꺼냈다. 바지는 감청색이 감도는 면바지를 골랐으며, 너무 꾸미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손목에 찬 값비싼 손목시계는 풀어서 협탁에 두었다.

빳빳한 깃을 몇 번 더 점검하고 셔츠 앞쪽을 깔끔하게 면바지 안으로 말아 넣었다. 거울 속 하민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였다.

“이걸로는 부족한데.”

전신 거울에 서서 몸을 이리저리 돌려 본 하민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을 완벽하게 보여 줄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부족해서 고민에 빠진 것이다.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켜던 하민이 바깥에서 스며 오는 햇살에 반짝였다. 그 순간 나부끼는 바람 속에 진한 풀 향기가 코를 찔러 왔다. 그제야 하민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졌고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눈이 반짝거리며 행복한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손을 뻗어 화장대에 놓아둔 향수에 손을 뻗었다. 얄상하게 잘빠지고 녹색빛이 가미된, 고급스러운 유리병은 얇은 손가락에 착 감겨 프리즘처럼 다채로운 색을 머금었다.

향수를 몇 번 손목에 뿌리고 목덜미에 문지르니 향긋한 페퍼민트 향이 퍼졌다. 하민의 알파 페로몬과 꼭 닮은 향이.

“향수라면 베타여도 맡을 수 있으니까.”

베타인 도윤에게 자신의 페로몬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운 하민은 머리까지 손질하고 나서야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익숙하게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린 지 몇 초도 안 됐는데 문이 열렸다. 평소와는 달리 깔끔한 옷차림을 한 도윤이 반갑게 하민을 맞았다.

“하민 씨, 어서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우렁찬 대답 소리에 도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길을 터 주며 손짓을 하자 하민은 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현관문을 닫고 앞장선 도윤의 큰 등이 하민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가 차려입은 얇은 셔츠가 커다란 상체 때문에 부풀어져 터질 것만 같았다. 뒤에서 저 등을 꽉 끌어안고 코를 묻어 몸에 잔향처럼 남은 체취를 흡입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일었다.

‘참자. 참아.’

하민은 멋대로 흥분하려는 페로몬을 억누르며 눈을 꾹 감고 숨을 천천히 쉬었다. 그렇게 본능을 가두고 몇 발자국 들어서니 공기 중에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하민에겐 매우 익숙하고 편안한 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렸을 적 향수를 자극하는 향이기도 했다.

도윤이 하민을 안내하며 끌고 간 곳에선 시들해진 장미꽃이 검거나 혹은 짙은 갈색으로 메말라 있었다. 썩어 버린 꽃 사이로 그나마 멀쩡한 빛을 내는 장미꽃 몇 송이를 챙겨 든 도윤이 멋쩍은 눈길을 보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이렇게 많은 꽃 선물은 처음 받아 봐서 관리가 어려웠어요. 노력한다고 열심히 이것저것 해 봤는데 계속 벌레도 꼬이고 혼자선 힘들더라고요.”

손에 든 단 몇 송이의 꽃을 도윤은 페트병으로 급조해서 만든 꽃병에 꽂으며 말했다.

“챙겨 주신 성의가 있어서 차마 버리기도 어렵네요.”

흐트러진 꽃잎을 손끝으로 정리한 도윤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민은 도윤의 마음이 참으로 상냥하고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심장 언저리가 간질간질거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이걸 정리해 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네.”

“좋아요. 금방 끝나니까 형은 옆에 앉아서 구경하고 있어요.”

“부탁 좀 할게요.”

“당연하죠! 맡겨만 주세요.”

씩씩하게 대답을 한 하민은 손만 대면 후드득 떨어지는 말라비틀어진 장미를 능숙하게 정리해 나갔다. 도윤이 건네준 종량제 봉투에 권연벌레가 꼬인 꽃들 위주로 차곡차곡 옮겨 담고 밀봉했다. 그 외에 이제 막 드라이 플라워처럼 변해 버린 꽃들은 손으로 곱게 으깨었다.

“형, 집에 작은 유리병 같은 거 있어요? 없다면 반찬통도 상관없는데.”

“잠시만요. 찻잎을 담아 둔 공병이 있긴 한데, 그걸로 괜찮아요?”

“베스튼데요? 주세요.”

찬장을 뒤져서 네모난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 든 도윤이 이를 하민에게 건넸다. 잎은 다 버리고 장미꽃잎은 으깨어 몽땅 공병에 담고 나서 그 위에 이곳에 오기 전 뿌린 페퍼민트 향이 나는 향수를 하민이 촉촉해질 정도로 뿌렸다. 온 사방에 시원하고 상쾌한 향이 감돌았다. 그와 동시에 유유히 공기 중을 배회하던 제조한 향은 어느덧 도윤의 코를 찔렀다.

향긋한 내음에 도윤이 코를 킁킁대자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민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빛났다.

“이거 무슨 향이죠? 향기가 좋네요.”

“그래요?”

“네. 시원하고 부드러워서 거부감도 없어요.”

“정말요?”

하민은 도윤이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해 주길 바라면서 여러 번 묻고 또 되물었다. 둔한 도윤이 알아차릴 수 있을 수준까지 이르러서야 늦은 감 있게 하민의 행동을 이해한 도윤이 부드럽게 입매를 고쳤다. 일자로 내려앉은 그의 눈썹이 처음보다 한결 편해져 있었다.

“네. 제 마음에 쏙 들어요. 고마워요, 하민 씨.”

“이게 뭐 별거라고요. 이 향 말이죠, 실은 제 페로몬이랑 같은 향이에요.”

그의 말에 도윤이 놀라워하며 말했다.

“하민 씨의 페로몬이라면… 알파 페로몬이요?”

“네. 형이 베타여도 제 페로몬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이거죠. 마음에 든다니까 좋네요. 가져온 보람이 있는데요?”

하민이 손에 든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밝은 햇빛이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에 굴절되어 일곱 빛깔의 빛을 담아냈다. 그 순간에 도윤은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의 존재가 처음보다 아름다워 보인다는 착각을 했다. 아니, 이건 착각이 아닌 현실이었다. 하민은 정말로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으니까.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모든게 착각처럼 느껴질 만큼 신비로워 보였다.

그렇게 하민과 밥을 먹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고 나니 하루가 짧다고 느낄 정도로 금방 지나갔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오늘 하루 즐거웠고 고맙다며 각자만의 방식으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마지막으로 도윤이 하민에게 악수를 청하며 배웅하려 하던 찰나에 하민이 아쉬웠는지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도윤을 바짝 끌어 안았다. 파묻힌 하민의 코가 당겨 안은 가슴골에 푹 묻은 상태로 연신 킁킁거렸다.

“…하민 씨?”

“아 냄새 진짜 좋다. 드디어 형한테서 꽃향기가 나네요.”

“꽃향기요?”

“네. 몰랐어요? 형 꼭 지금 형질자인 저처럼 페로몬을 두르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큰 가슴에 잡힌 골 한가운데 코를 묻고 숨을 흡입하는 하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윤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페로몬을 두르고 있는 것 같다는 표현을 했지만 잘 알다시피 자신은 형질자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쯤은 그 말을 내뱉은 장본인도, 그 말을 듣게 된 사람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 그가 스스로 향기를 뿜으며 누군가를 유혹할 만한 능력 같은 건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자란 베타였다. 그저 집에 오메가인 가족이 있을 뿐이었고 그래서 형질자를 접할 기회가 있던 베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하민 씨는 페로몬도 내보이지 못하는 내가 왜 좋다고 하는 거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도윤의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입에서 쓴맛이 차오를 정도로 씁쓸했다. 서로가 이토록 다르다는 상황만 깨닫는 계기가 되어 버리자 마음이 심란해져 한숨을 쉬려던 도윤이 일순 숨을 멈췄다.

‘간지러워.’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에 코를 묻고 있으니 쉽사리 숨을 내쉬기 어려웠고 민망했다. 가뜩이나 몸에 붙어 있는 면적 큰 살 두 덩이가 달갑지만은 않았는데 이런 치부를 다른 누구도 아닌 하민에게 들킨 것 같아서 내심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여태 하민 씨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었지.’

도윤은 지난날의 일들을 천천히 되돌아봤다. 처음으로 하민과 마주하게 된 날 그가 깔끔하고 비싼 무언가로 치장한 상태로 이곳에 올라왔던 때를. 그림처럼 생긴 사람이 상기된 목소리로 깔끔한 발음을 뱉던 기억이 생생했다. 윤하민이라는 사람을 갑자기 마주친 상대였음에도 그의 첫인상을 대번에 떠올릴 수 있을 만큼, 그토록 강렬한 인상이었다. 그 이후에도 하민이 집에 들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마다 자신은 어떠한 차림이었는가를 그려 봤다. 어떠한 차림…… 어떠한.

“어?”

“형 갑자기 왜 놀라요?”

“아…아니, 저 그게.”

“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본 하민을 눈에 담으며 도윤은 마른 목구멍에 침을 삼킴과 동시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덥다고 막 벗고 그랬지 않았나.’

그날은 처음 보는 윤하민이라는 사람이 그저 특이한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로만 가볍게 넘기며 크게 상관하지 않았었다. 그래서였을까. 더운 날에 짜증도 나고 찝찝함부터 없애야겠다 싶었던 나머지 더위를 참지 못하고 멋대로 옷을 벗고 활보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운동했던 때의 버릇을 그만두고 나서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같은 남자인데 뭐 어때?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것도. 그가 운동부에서 같이 지내던 사람도 아닌데도 그랬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모든 걸 알아차린 도윤은 지난날의 행동을 후회하고 당황했다. 하민이 자신에게 호감을 보였던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가 알파라는 사실도 알았더라면 더더욱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그랬다. 돌이켜 보니 그 당시에 얼마나 무지하게 행동했었는지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아 버렸다. 삽시간에 귓가가 홧홧해졌다.

쪽팔림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윤이 가벼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 틈을 파고들어 하민이 눈을 빛내 왔다. 기다란 속눈썹에 짙은 어둠이 깔려 눈이 유독 크게 비춰졌다. 맑은 눈동자에 도윤의 모습이 투영된 상태로 하민이 걱정스레 물었다.

“형 얼굴이 좀 빨간데,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잠깐! 설마 열 있는 거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어디 봐 봐요. 빨리!”

하민이 동그란 도윤의 뒷통수에 손을 얹어 안쪽으로 끌어당기자 툭하는 소리를 내며 둘의 이마가 겹쳐졌다. 부끄러움에 뜨끈하게 오른 도윤의 열이 차가운 하민의 피부에 그대로 전달됐다. 열을 고스란히 느낀 것인지 미간이 찡그려지는 형태가 맞닿은 피부결 사이로 세밀하게 그려졌다.

이 상황이 불편해서 머리에 힘을 주어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다시 턱 하고 부딪혀 오는 이마에 이도 저도 못하고 도윤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집 센 하민을 당해 낼 재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끝내는 여태껏 참고 참았던 모든 숨까지 다 토해 내느라 도윤이 커다란 가슴팍이 들썩였다.

이런 때에도 잡생각이 들었고 생각보다 뒷통수를 잡은 손이 자신만큼이나 크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머리가 안정감 있고 포근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싸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부터였다.

부끄럽다. 아주 조금. 아니 그것보단 좀 더 많이. 머리를 감싸는 온기가 더운 여름날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빼내려고 노력해 봤지만 역시나 쉽지가 않다.

이 사람,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손힘이 좋았다. 운동선수 출신에다 경찰인 자신과 비등할 정도로.

“으음… 열이 있는 건가? 잘 모르겠네.”

“하민 씨, 전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겨우 고개를 돌려 맞닿은 이마를 피하자 그때서야 하민이 도윤의 뒷통수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선 조금은 걱정이 밴 말투로 도윤에게 말했다.

“오늘 밤에 아프면 저한테 꼭 톡 해요. 아니, 전화가 좋겠다. 하여튼 꼭 연락해요. 꼭!”

“아니, 저 괜찮다니까요?”

“도윤 형.”

단호한 목소리로 하민이 괜찮다는 말을 제지하자 마지못해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현재로썬 하민에게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으므로 건네려던 모든 말을 포기한 것에 불과했지만.

도윤은 하민이 돌아가고 난 이후로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그에게 아프지 않다며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톡으로 남기고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평온한 단잠이었다.

그날 밤 도윤은 오랜만에 기나긴 꿈을 꿨다. 하필이면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가 나오는 꿈이었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모든 걸 다 내려놓은 듯한 표정을 하고 계셨다. 화창한 여름 날씨처럼 웃고 계셨고 그러면서 연신 ‘다행이다. 다행이야.’라는 말을 도윤을 향해 반복해서 말하셨다.

짧은 순간에 아버지가 많이 웃으셨고 안도감을 느끼는 말투로 말씀하시니 이 모든 것들이 잔잔하고 저릿하게 도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그렇게 한참을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하다가 잠시 목이 말라 눈을 뜨게 됐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자신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꿈을 꾸는 와중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 듯했다.

도윤은 쥐어짜는 듯한 괴로움에 얼굴을 감싸고 숨을 내뱉다가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이 반짝이는 걸 발견하곤 고개를 움직였다.

하민 씨

다행이다. 다행이에요. 오후 21:55

“뭐야… 아버지가 보낸 줄 알았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코끝이 찡해.

작은 핸드폰 세상 속엔 꿈속에서 들었던 익숙한 말이 보였다. 그 말과 똑같은 내용을 하민은 도윤이 괜찮다고 말한 톡 아래에 적어 두었다. 도윤은 흡사 아버지가 하민을 통해서 이제 다 괜찮다고 하는 것처럼, 가슴이 아플 정도로 찡한 말들을 대신 전해 주는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혀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는 걸 텐데도.

오랜만에 느껴지는 두근거림에 도윤은 온 힘을 다하여 몸을 웅크렸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은 밤이라고 여기면서.

오늘따라 참 밤이 밝았다.

하민과 연락을 하고 지낸 지도 꼬박 일주일이 됐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오늘도 어김없이 도윤의 핸드폰은 아침부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손쉽게 닿을 만한 곳으로 팔을 뻗으니 몇 분 간격으로 수차례 진동을 반복하고 있는 핸드폰이 잡혔다.

너무나도 짧게 짧게 진동이 일어 전화가 온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아주 약간 익숙해져서 어색함이 한층 수그러든 사람이 보내온 톡이었다.

하민 씨♥

형, 아직도 자요? 이번에 꽃이 완전 싱싱한 애들로 들어왔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오늘 구경 오실래요? 아직 멀리 걷기 힘드신가…?ㅠㅠ 근데 형 깁스 언제 풀어요? 꽤 오래 하고 있었잖아. 깁스 풀 때 저랑 같이 갈래요? 어때요? 오전 10:05

“물음표 봐. 이게 다 몇 개야.”

한두 개도 아니고 세어 보니 총 여섯 개의 물음표. 행동이 꼭 호기심 가득한 어린애 같아.

“아… 역시 하트는 부담스럽다.”

도윤이 하민의 번호를 저장했을 당시엔 단순히 ‘하민 씨’였다. 그런데 하민이 그걸 보고 냉랭한 기운이 돈다며 서운한 눈빛을 보내곤 슬픔이 뚝뚝 묻어 나오는 말투로 투덜거렸던 것이 떠올랐다. 이에 못 이긴 자신이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입맛대로 바꿔 보라고 달랬었다는 것도.

그렇게 바뀐 이름은 뒤에 하트가 더해져 ‘하민 씨♥’가 됐다. 그는 이것저것 더 붙이고 싶은 눈치였지만, 일단은 이것으로 만족한다며 꽃받침을 하고 눈을 감아 행복한 감정을 맘껏 드러냈다.

감정에 충실한 그때의 하민이 한 행동을 떠올리면 도윤은 왜인지 모를 종종 실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정말 못 말리는 사람이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목소리 끝에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하민이 조금 귀찮은 감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를 볼 때마다 처음 느껴 보는 낯간지러움은 감정 표현에 서툰 도윤에게도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 또한 나쁘지 않은 것 같노라며 귀찮더라도 봐 줄 만하다고 여기게 할 만큼 굉장히 특별했다.

그 외에도 도윤에게 약간의 변화가 따랐다. 윤하민라는 이 알파가 자신이 겪어 본 알파와는 다르게 귀여워서 챙기고 싶노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중 가장 커다란 변화였다.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부담이라고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지.

도윤은 막 일어났다고 답장을 하며 어느새 자신이 하민에게서 동생과는 또 다른 애착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가족을 챙기거나 친구를 챙기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의 종류라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일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조차도 몰랐다. 그저 돌연 찾아오게 된 변화들이 나쁘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민이 보낸 톡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던 도윤이 깁스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다가 핸드폰 캘린더를 살폈다. 오늘 날짜를 확인하고 나니 괜찮았던 마음이 다시금 갑갑하게 체증이 얹힌 듯 무거웠다.

“시간 참 빨라.”

몇 주 뒤면 그가 복직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 어느 중간쯤에 언제 적었는지도 모를 깁스 푸는 날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도윤은 이 무더운 여름 속에서도 더위에 익숙해졌는지 웬만해서 몸에 땀이 차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람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새로운 것에 적응해 나간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날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다가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늦게라도 받아들이곤 하는 자신을 떠올려 보면 누구라도 매한가지일 게 분명했다.

매해 계절이 바뀌어도 그 속에서 새로운 인연이 나타난다. 그 인연이란 것이 평탄하게 살아가는 삶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겨우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던 도윤에게도 하민이라는 존재가 나타나서 죽어 가던 마음에 싹을 띄웠다. 그 싹이 더 자라나서 꽃을 피우려면 또 얼마가 지나야만 할까?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단 몇 개월만 남은 시간은 두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고 여전히 흐를 것이다. 그 사실은 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오더라도 바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도윤에겐 하루빨리 깁스를 풀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버티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더디게 흐를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는데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 하민을 보다 보면 저릿했던 마음이 종종 괜찮아졌고 이러한 부분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민의 톡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윤은 끝내 어쩔 수 없었는지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터트렸다.

“대체 왜 이렇게 걱정이 많지? 누가 봐도 내가 더 건강해 보이잖아.”

한참 미소를 짓던 입가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도윤이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그냥 같이 가자고 하자.”

지금 도윤은 그 누구보다도 하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하민은 늘 웃고 지내길 바랐고, 그 티 없이 웃는 모습을 보며 자신도 치유를 받는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자 했다. 그랬던 까닭은 사소한 걱정을 하나라도 품고 있지 않을 것만 같은 하민에 대한 동경 내지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도윤은 점차 하민을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이 좋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이러한 사실을 하민에게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어느덧 시간이 흘러 도윤은 다친 다리의 깁스를 풀러 병원에 왔다. 예상대로 그의 옆에는 하민이 함께했는데, 굳이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두었지만 하민은 본인도 병원에 볼일이 있다며 기어코 도윤을 따라왔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자취를 감췄다.

“우도윤 환자분 맞으시죠?”

“네.”

“오늘 금요일이라 대기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래서 더 기다려야 하는데 괜찮으세요?”

“네, 부탁드립니다.”

“그럼 바로 접수해 두겠습니다. 오래 걸리니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접수를 도와준 안내원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도윤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제 다리가 아프다기보단 딱딱한 무언가에 싸여 간질간질하면서 답답하기만 한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말끔히 사라졌고 상처로 남았던 예전 일들도 조금씩 무뎌졌다.

도윤은 깁스를 한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같이 온 하민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어디에도 하민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이 들어 톡을 보냈더니 그는 다른 접수처 대기실에서 개인적인 진료를 보고 있노라는 답장만 보내왔다. 도윤이 멀뚱멀뚱한 표정을 하고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방금 읽어 내린 톡을 한 번 더 속으로 읽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어디 아픈 데라도 있는 걸까. 딱히 아픈 곳은 없어 보였는데. 멀쩡해 보였어. 무슨 병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여러모로 하민의 속을 썩인 지난날에 자신을 떠올린 도윤이 표정을 굳혔다. 그가 병이 걸렸다면 몇 그램 정도는 자신의 탓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죄책감이 밀려오는 때에 그럼에도 평소에 항상 웃고 지내는 하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한편, 그 웃는 얼굴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것도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꽃집을 찾아 주는 사람들에게도 매번 친절한 응대를 펼쳐서인지, 이미 상당한 단골들이 생겼던 하민의 꽃집은 종종 인터넷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굉장히 인기가 좋았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 끊임없이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아망떼는 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정도였다. 그런 하민을 도윤은 종종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루는 이유 없이 지치고 힘들었을 때 건널목 앞까지만 가서 먼발치에 서서 눈에 담은 적도 있다. 그러다가 보면 기분은 한결 나아졌고 하민의 웃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받는 듯했다.

시시때때로 미묘하게 표정을 바꾸며 생각만 일삼던 도윤이 땅이 꺼지더록 한숨을 쉬었다.

‘요즘 바빠 보였으니까… 하민 씨라도 피로가 쌓일 만해.’

행복하게 웃으면서도 이따금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하민의 모습이 차츰 떠오르자 없던 걱정도 밀려오는 것 같았다.

“우도윤 환자분.”

멍하니 톡 내용을 곱씹던 도윤이 이름이 불리자 정신을 차렸다.

“네, 여기요!”

“4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땀이 날 정도로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드디어 도윤의 손에서 떨어졌다. 뜨끈한 핸드폰이 떨어져 나가자 그는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의사가 하는 질문에 이런저런 이야기로 답한 도윤이 깁스한 다리를 어느 한 위치에 올려놨다. 곧장 의사는 전기톱 같은 것으로 요란하게 깁스를 갈라내었고 고등어 배를 가르듯이 깁스가 다리에서 떨어져 나가자 고약한 악취와 더불어 얄상하고 뽀얗게 변해 버린 살결이 드러났다.

“아주 홀쭉해졌네요.”

도윤의 다리를 꼼꼼하게 살피던 의사는 앞으로 다리를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다리가 얄상해진 건 근육량이 많이 빠져서 그런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잘 먹고 잘 자고 꾸준히 움직이면 다시 반대쪽 다리와 똑같이 돌아올 거니까요. 그래도 당분간은 과격한 운동은 삼가하시는 게 좋습니다.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가벼이 인사를 건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윤이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깁스가 떨어져 나간 다리는 아직 어색했다. 그래도 묵직하게 다리를 짓누르던 깁스가 사라지자 도윤은 쩔뚝거리는 불편한 걸음거리가 아닌, 한결 편해진 상태로 진료실을 나올 수 있었다.

어색하게 발을 딛고 천천히 걷다 보니 저 먼발치에서 꽤 두툼해 보이는 하얀색 약 봉투를 들고 도윤을 기다리고 있는 하민이 보였다. 도윤을 발견한 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좌우로 흔들리는 팔을 쳐다보며 도윤은 생각에 잠겼다. 의외로 하얀 팔뚝에 굵게 갈라진 근육들이 너무 잘 보였다.

“형, 여기요.”

예쁘게 들리는 음성에 도윤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하민의 모습은 무언가 닮아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다가 곧 떠올라 버렸다.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어렴풋이 하민과 닮아 있었다. 똘망한 눈동자에 반갑게 흔들리는 그의 팔은 프로펠러처럼 돌아가는 강아지의 꼬리와 겹쳐 보였다.

강아지와 하민을 대입해서 바라보던 도윤은 웃음이 터질 듯했다. 잘되진 않을 것 같았지만 고개를 수그려 입술을 깨물고 잇새로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 보려고 했다. 그러다가 하민이 무슨 얼굴을 하고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해져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이런 모습이 어리둥절했는지 입을 벌리고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멍하게 자신의 행동을 좇는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불현듯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도윤은 매우 묘하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누군가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떠올려 보면 쉽사리 말하지 못할 것 같았으므로.

도윤은 언제 웃었냐는 듯이 웃는 얼굴을 대번에 감추며 말했다.

“하민 씨는 볼일 다 보셨어요?”

“네!”

똥강아지가 주인을 마중 나오듯 쪼르르 곁으로 뛰어온 하민이 도윤과 나란히 섰다. 체구가 큰 도윤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눈을 마주한 하민은 뒷짐을 지며 손에 들고 있던 약 봉투를 숨겼다.

도윤은 힐끔거리며 하민이 숨긴 손을 살폈지만 일부러 감춘 것 같은데 무어냐고 묻기에는 쓸데없는 참견이라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다.

홀가분해진 다리가 아직은 어색해서 느릿하게 걷는 도윤에게 맞춰 걷는 하민이 제 옆에서 걷는 도윤을 한번 보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왠지 모를 불안한 기색이 하민의 눈에서 일렁였지만 도윤은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둘은 그렇게 병원에서 빠져나왔다.

하민 씨♥

형~ 저 이번에 저희 집 비밀번호 바꿨어요ㅋㅋ 오후 23:55

오후 23:56 ?

하민 씨♥

아니ㅠㅠ 물음표만 하지 마시고! 왜 바꿨는지 안물어봐요? 물어봐줘요…….

(이모티콘) 오후 23:57

오후 23:57 그래요 그럼; 집 비밀번호는 왜 바꿨어요?

하민 씨♥

형이 우리집에 언제든지 놀러왔으면 해서! 오후 23:58

오후 23:59 네…?;;

하민 씨♥

저번에 형이 생일 알려줬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 생일로 비번 같은 거 걸어보는 게 소원이라서..ㅋㅋ여튼 이번에 형 생일로 저희집 비번 바꿨으니까 나중에 꼭 놀러와요! 꼭!♥ 오전 00:00

“뭐가 뭔지 모르겠다.”

늦게까지 하민과 대화를 이어 가던 도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집 비밀번호를 왜 자신의 생일로 바꾼 것인지 아무리 곱씹어 봐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민은 늘 예상을 빗겨 가며 자신이 세워 둔 기준에서 항상 어긋나는 사람이긴 했다. 그의 존재는 이토록 상상 이상의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하민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조금 유별나다는 생각은 떨쳐 내기가 어려웠다.

“이상해. 알면 알수록 특이하다니까.”

도윤은 놀러 오라는 하민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요즘따라 부쩍 늦게 잠들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 생겨 버려서 그런지 억지로 눈을 감아 보고 뒤척여 봐도 쉬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도윤은 억지로 잠을 청하려던 것을 멈추고 일어났다. 잠도 오지 않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을 보내기가 아쉬웠을 무렵, 조만간 꼭 해야할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적당히 스트레칭을 마치고 식탁에 앉은 도윤은 동생이 주고 간, 거의 사용하지 않은 곰돌이 메모지에 앞으로 할 일에 대하여 써내려 갔다. 제일 먼저 숫자를 앞에 쓰고 그 뒤로 해야 할 일을 적어 나갔다. 멀리 떨어져서 사는 가족이나 동생에 관한 일. 그리고 복직을 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 등등 따위가 주를 이루었다.

“아, 오늘이 며칠이었지?”

4번까지 적어 내려가던 손이 납골당이라는 단어에서 몇 번이나 온점을 찍다가 멈췄다. 날짜가 떠오르질 않아서 캘린더를 확인해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임에도 유독 선선했던 새벽 공기가 가라앉을 때 마주했던 아버지의 사망 소식. 믿기도 어렵고 믿고 싶지도 않은 바로 그때의 그 순간이 최근에 들어서야 놀랍도록 수그러들고 있다는 걸 그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여태껏 수면 아래에서 혼자 숨 쉬지도 못하고 감정을 죽이며 감내하기만 했던 적이 많다는 것도.

그런 그에게 오늘날 누군가가 손을 내밀고 호흡할 수 있게 도와주는 시기가 찾아온 것은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도윤은 천천히 아팠던 마음에 딱지가 지면서 그 딱지가 떨어져 나갈 때쯤이 되고 나서야 모든 걸 깨달았다. 아버지에 대한 아프고 그리운 마음이 점점 지워지고 있노라고.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노라고. 윤하민이라는 사람이 함께하고 나서야 잔뜩 굳었던 감정이 말랑해졌다는 사실도 그랬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자신의 시간이 새로 알게 된 그 때문에 점차 흐르는 것 같다는 것도.

하민을 떠올리며 도윤은 4번까지 적은 메모지 끝에 화살표를 그렸다.

뒤이어 아망떼를 적고 나니 마음 한 켠이 평온해졌다. 이상하게도 하민이라면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어울리는 꽃을 잘 골라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올해 아버지의 기일에는 그가 직접 포장해 준 꽃을 들고 찾아뵈면 지치고 힘든 마음이 누그러질 듯해서 좋을 것 같았다.

도윤은 곰돌이 메모지를 가장 눈에 잘 띄는 냉장고에 자석으로 붙였다.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완성시키니 마음속 깊숙이에 꽉 막혔던 무언가가 시원하게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이 무언가를 뜻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도 일었다.

하민 씨 저 부탁할 게 있어요. 제가 조만간 아망떼로 찾아 가겠습니다. 그럼 그때 봐요.

1 오전 00:20 잘자요.

밤늦게 도윤의 톡을 받고 하민은 한숨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잠이 부족해서 두통이 일자 약을 꺼내 먹고 병원에서 처방받은 러트 유도제도 함께 챙겨서 복용했다.

하민은 도윤이 다리에 찬 깁스를 풀러 갈 때, 그가 걱정되기도 해서 따라나섰지만 겸사겸사 페로몬 검사도 받기 위해 도윤과 함께 병원에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윤하민 환자분이 러트가 안 오는 건 페로몬이 현재 체내에 꽉 막혀서입니다. 최근에 평소와 다른 일이 있었나요? 짝이라고 여겨질 상대를 만났다거나… 또는 일상에 변화가 생길 일들 말입니다.’

‘짝이라고 여겨질 상대.’

의사의 말을 들은 하민은 전례에 없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도윤의 존재가 가장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알파가 오메가가 아닌 베타를 짝으로 인식할 수도 있는 걸까? 여태 들어 본 적도 없거니와 자신조차도 도윤을 짝이라고 인식해 본 뚜렷한 무언가는 없었다.

다만 그를 보면 행복했고 마음이 벅차올랐으며 알 수 없게도 마음 한 켠이 저릿해서 장미 가시에 찔린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이것이 하민의 입장에서는 짝이라는 그 무언가보단 그저 도윤을 향한 애정 어린 호감 내지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하민은 자신의 러트가 오지 않고 있다는 것 또한 친구인 호건을 통해서 알았으니까. 가끔가다가 둔한 면모를 보인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스스로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경우도 더럿 있었다.

근래에 러트가 없었다는 것과 더불어, 도윤에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는 것도 불현듯 깨달아 버린 것 또한 매한가지였다.

“와…… 나 왜 이렇게 둔해?”

차각차각 묵직하게 쇠붙이로 만든 가위 소리가 정겹게 울리다가 오도카니 끊겼다. 하민의 손에는 방금 손질한 꽃줄기 따위가 들려 있었고, 가시도 없는 매끈한 줄기는 녹색빛이 아닌 짙은 갈색이 되어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듯했다.

이번에는 그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뜨거운 여름 햇살과 더불어 경쾌한 매미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깊은 생각에 빠진 하민을 더욱더 깊은 상념으로 밀어 넣었다. 매미는 짝을 찾느라 울고, 짝을 찾지 못한 매미는 몸을 울림통 삼아 열심히 울어 재끼다가 주어진 명을 다할 것이다. 이미 제 명을 다한 배를 보인 매미들을 아망떼 출근길에 여럿 확인했던 그였다.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 그의 눈동자가 햇빛에 반사되어 물과 같이 일렁였다.

자신은 매미처럼 짝을 찾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처지가 왜 그리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매미와 닮아 있는지….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눈 깜짝할 사이에 겨울이 온다. 그리고 그 전에 어쩌면 자신은 이 곳을 떠날 것이다. 강원도 원주를 떠난 이후에도 도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인지 깊게 생각해 보면 쉽사리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안개가 짙게 끼인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나 천하의 윤하민인데… 근데 왜 이렇게 힘들지. 대체 왜?”

‘천하의’라는 오글거리는 말을 덧붙히던 그가 초점을 흐렸다.

맴맴맴-

찌이이이-

매미의 긴 울음소리를 듣다가 이내 뚝 그쳤다. 때마침 하민이 들고 있던 줄기에 달랑거리던 이파리조차 바닥에 떨어져서 나뒹굴었다. 곧이어 시선은 작고 둥근 의자에 둔 하얀 약 봉투로 행했다. 한숨도 그 무엇도 나오지 않는 마음이 그저 답답하게 꽉 막힌 느낌이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어 보이기 급급했다.

러트가 와도 문제고, 안 와도 문제잖아.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고민을 하던 하민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선은 지금 도윤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은 무언가에 꽉 막힌 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안개도 걷힐 것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어 안개조차 사라질 수 있게 계속해서.

오늘분의 꽃을 다 정리하려 할 때쯤, 아망떼 출입문에 걸어 둔 풍경이 차라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손님이 찾아온 소리에 축 처졌던 하민의 어깨가 곧게 펴졌다.

“도윤 형!”

“안녕하세요, 하민 씨.”

무뚝뚝하지만 적당한 울림의 멋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망떼의 주인인 하민의 취향을 고스란히 드러나게 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꽃집에서만 신는 지압 슬리퍼를 황급히 고쳐 신고선 도윤의 곁으로 총총거리며 다가갔다. 매미를 보며 우울함에 취해 있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도록 밝은 눈웃음을 지은 채였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에요! 형도 그래요?”

“그러게요. 좋은 아침이네요.”

“근데….”

하민의 시선이 검은색 정장으로 쫙 빼입은 도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렸고, 당연하게도 귀 끝은 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늘 그랬듯이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고 싶었으나 처음 보는 도윤의 멋스러운 모습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입을 벌리고 서서 넋을 놓다 보니 도윤의 시선이 국화꽃이나 붓꽃 쪽을 향하는 걸 발견하곤 정신을 차렸다.

“형. 오늘 어디 중요한 곳에 가세요?”

“그래 보여요?”

“네…….”

도윤의 시선이 향한 곳은 상갓집에서나 주문이 들어올 법한 꽃들이었다. 죽음이라는 어둠이 짙게 깔려 조의를 표하는 사람들이 드나들면 축 처진 상주들이 기계처럼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모습이 하민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무거운 공기를 인지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넋을 달래기 위해서 마음 써서 향을 피우거나 묵념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조의를 위해 들른 사람들조차 암울한 기운이 옮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 놓일 꽃들. 차가운 맨바닥에 일렬로 길게 늘어선 하얀색 꽃들과 검은색, 혹은 흰색 리본에 정갈하게 쓰인 ‘조의를 표합니다.’와 같은 형식적인 문구들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것 또한 하민의 생각에서 당연하게도 떠올랐다. 그런 어두운 공간에서도 꽃은 항상 피어 있어야만 했다. 지지 않고 늘 화려하게.

“어디… 장례식장이라도 다녀오시려고요?”

머뭇거리며 물을지 말지 고민한 그 말에는 무거움이 서려 있었다. 도윤의 옷차림, 하얀 꽃으로 향한 시선. 그 모든 것이 빛을 삼켜 버릴 정도로 짙은 어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민의 감정을 알 턱이 없는 도윤은 묻는 말에 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는데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하민은 넋을 잃고 웃음을 흘린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며 얌전히 이후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몇 초 후 도윤이 편안하게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비슷하긴 한데 아니에요. 성묘를 가야 하거든요. 그래서 납골당 앞에 놓아둘 꽃이 필요해요.”

“아-. 납골당.”

무슨 말이 나올까 두근두근대던 하민의 마음이 답을 듣자마자 이내 차분해졌다. 보통 성묘를 갈 때 흰색 꽃을 준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리스처럼 동그랗게 만든 모형으로 된 꽃을 들고 가거나, 살아생전 납골당의 주인이 좋아했던 꽃으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다.

근데… 형은 도대체 누구의 성묘를 가는 걸까?

많은 것이 궁금했지만 깊게 물어볼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하민은 그저 짧은 침묵으로 호기심을 대신했다.

하민은 직직 슬리퍼를 끄는 소리를 내며 어느 한 방향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나지막히 도윤에게 따라오세요, 라는 말만 건네며 하민은 그가 자리한 위치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길게 나 있는 협소한 공간으로 쭉 이동하며 아망떼 입구와 점차 멀어졌다.

도윤은 말없이 그런 하민의 뒤를 따랐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넓게 열어 둔 창으로 새어 오는 따뜻한 바람에 나부끼는 가느다란 검은 생머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눈으로, 냄새로. 그것 외에도 지나칠 때마다 양옆으로 만발한 꽃들 사이에서 하민은 감성에 젖어 있을 만큼 이에 못지않는다는 듯이 빛나고 있었다.

꽃과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 꽃처럼 향기를 뿜을 수 있는 사람. 얇게 레이어드 된 꽃잎과 마찬가지로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사람. 어떠한 아름다운 수식어를 붙여 놓아도 모든 것이 하민과 잘 어울렸다.

여전히 하민과 발을 맞춰 걷던 도윤이 꽃에 둘러싸인 채로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향긋한 페퍼민트 향이 깊숙이 코 안을 파고든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쯤,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납골당에 성묘를 하러 갈 땐 굳이 흰 꽃을 고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프리저브드 플라워라고 해서 납골당에 장식용으로 두는 꽃다발이 있는데 요즘 고객들이 많이들 선호하시거든요. 원래는 넉넉잡아 미리 여유 있게 주문해 주실 때만 만들어 드리는 꽃다발인데, 형이니까 특별히 제가 만들어 둔 꽃다발로 드릴게요. 괜찮죠?”

“네, 괜찮아요.”

눈높이에 위치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윤이 답했다. 곧 흰색 페인트로 칠한 문을 목전에 두고 하민이 걸음을 멈췄다. 뚜벅거리며 울리는 발소리와 직직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동시에 멈추니 적막감에 바람 부는 소리만 들렸다.

“여기예요.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네. 기다릴게요.”

하민은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도윤의 얼굴을 바라보면 무언가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뜨끈한 열이 크게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여러 번 보아 익숙한 흰색 문을 열자 짙은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눈금으로 된 습도계가 벽면에 달려 있었고 표시된 습도는 매우 낮았다. 햇빛이 들지 않게 커튼을 친 공간에서 꽃을 다듬은 흔적을 치우며 하민이 무언가를 분주하게 찾는다. 그러자 곧 앙증맞은 꽃다발 하나가 나타났다.

앙증맞은 하얀 안개꽃을 주변에 배치하고 가운데에 보랏빛으로 빛나는 잎이 큰 꽃이 다섯 송이 정도 모여 있는 작은 꽃다발. 하민은 망설임 없이 그 꽃을 집어 들었다.

얇은 꽃이 내뱉는 숨결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에 꽃이 상할까 봐 입고 있는 옷에 포장이 뭉개지지 않도록 하민은 조심스레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형, 이 프리저브드 플라워로 추천하고 싶은데 어때요, 보라색 괜찮아요?”

“아, 좋아요. 아버지가 보라색을 좋아하셨어서 만족하실 것 같아요.”

“아버지…요?”

“네. 오늘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 뵈러 가는 날이거든요. 빈손으로 가긴 뭐해서 꽃이라도 들고 가야 할 것 같았는데… 꽃 하면 하민 씨가 가장 먼저 떠올라서 하민 씨한테 부탁드린 거였어요. 역시 제 선택이 옳았네요. 골라 주신 꽃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 하민 씨.”

무덤덤하게 뱉어진 말에 하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한 이명과도 같은 무언가를 느꼈다.

나와 형이 이렇게 깊은 대화를 서로 나눠 본 적이 있던가? 개개인의 사생활은 되도록이면 파고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에게 이런 말들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도윤 형은 날 신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하민은 특별한 말이나 사소한 말 그 무엇도 얹지 않았다. 다만 일반적으로 고객을 상대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하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골방에서 가지고 나온 꽃을 도윤 쪽으로 조심스레 건넸다.

“프리저브드 플라워는 직사광선이나 습기는 피하는 게 좋아요. 습도가 높으면 의복이나 벽 같은 곳에 이염이 되기도 하니까, 이 점만 주의해 주시고 세게 만지거나 하면 꽃이 찢어지는 경우도 생겨서 조심스레 다뤄 주세요.”

“그래요. 근데 생각보다 꽃다발이 작네요?”

한 줌에 다 잡히는 보라색 꽃다발을 받아 든 도윤이 꽃향기를 맡으며 물었다. 하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걸맞는 설명을 덧붙였다.

“맞아요. 그 꽃다발이 납골당 안에 직접 넣거나 앞 유리에 양면테이프로 붙이기도 하는 장식용 꽃으로 많이 이용되는 거거든요. 근데 양면테이프는 아무래도 자국이 남으니까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어서 고리 같은 거로 교체해 드리기도 하는데, 형은 어떻게 하실래요?”

“음… 전 역시 납골당 안에 넣어 두고 싶네요. 그게 더 꽃이 오래갈 것 같아요.”

원하는 바를 들은 하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앞치마에 크게 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작은 고리 하나를 꺼냈다.

“그럼 고리는 따로 챙겨 드릴게요. 혹시라도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그 꽃이 환경에 따라서 보존할 수 있는 기간이 다르긴 한데 적어도 5개월 이상은 보관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어요. 몇 년도 보관이 가능하니까 좋은 선택 하시는 거예요.”

“그렇군요.”

전문적인 설명에 도윤은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톡으로 어리광을 피우고 귀여운 이모티콘으로 하루 일과를 빼놓지 않고 알리던 하민과는 많은 부분이 달라 보였다. 사람이 종종 가벼울 때가 있긴 하지만 때로는 그가 그 어느 때보다도 에스프레소의 짙은 향처럼 묵직한 기색을 눈 안에 담는 경우도 있었다.

아름다운 꽃다발을 선사해 준 것에 감사함을 전달하고 싶어서 도윤은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수리를 드러낸 머리는 서로가 처음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많이 길어져 있었다.

도윤의 움직임에 검은색 양복을 입고 불편한 구두를 갖춰 신은 몸에서 향긋한 페퍼민트 향이 흘렀다. 하민의 알파 페로몬과도 똑같은 향이 깊게 밴 것인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코가 마비될 정도로 그 향이 짙게 다가왔다.

지독하게 익숙한 향을 뚫고 하민은 도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좁혀진 거리에서 보인 짙은 쌍꺼풀이 진 눈엔 미미한 물기가 깔린 듯했다.

누구보다도 떡벌어진 어깨가 하민의 눈에는 의기소침하게 웅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마음이 아파서 보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너무 좋다. 너무 만지고 싶다. 감정 없이 서 있는 형의 모습을 바꾸면 어떻게 될까?

당사자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하민은 도윤의 목을 당겨 힘껏 매달리듯 안았다.

밀어닥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페로몬이 옅게 새어 나왔다. 그의 페로몬이 도윤을 감싸 안지 않고 닿지 않는 거리에서 주위를 배회하듯이 일렁였다.

하민은 아랫입술을 꾹 물은 채로 도윤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천천히 흡입했다. 목덜미가 간질간질할 테지만 도윤은 굴하지 않고 하민이 하는 행동을 아주 조용히 받아들였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쓰고만 있던 하민이 조금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 오늘 아버님 잘 뵙고 오세요. 그리고 진짜로 걱정돼서 그러는데… 저 솔직히 형이 무감각한 게 오히려 보기 힘들어요. 형은 지금 혼자 있고 싶잖아요. 그렇죠?”

“……그걸-.”

마음을 들켜 버린 도윤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함구했다. 도윤을 더 꽉 끌어안은 하민이 말했다.

“지금 제 알파 페로몬을 형한테 묻혀도 괜찮아요? 아버님을 뵙고 오시는 동안 아무도 형한테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물론 형이 싫다고 하면 절대 안 할게요.”

도윤은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미남에다 멋진 사람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차려입은 그를 탐내며 접근할 사람이 분명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걸 당사자는 전혀 모를 것 같지만 말이다. 형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게 말이 쉽지. 무뚝뚝해 보여도 속은 깊고 상냥한 사람이라서 쉽게 상처받고 힘들어할 게 뻔한데,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강하게 열망했다.

하민이 목을 끌어안던 걸 풀려고 하는 그때였다. 도윤은 위로가 필요했는지 볼에 스치는 가느다란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빠져나가려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풀려고 했던 하민의 팔이 다시 위로를 찾는 몸을 힘껏 끌어당겼다.

아, 미치겠다. 이 사람이 너무 사랑스럽고 안쓰러워서 미치겠어.

울컥 치미는 감정을 다독거리며 하민은 자신의 알파 페로몬을 도윤의 목덜미에 묻혔다.

애석하게도 도윤은 이 향을 맡을 수가 없다. 창 너머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중화시켜 주는 향을 맡을 수가 없다.

하지만 순간적이나마 도윤의 머릿속엔 하민의 페로몬을 구현한 향낭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지금 자신 곁에는 하민의 알파 페로몬과 똑같은 향이 흐를 것이라는 걸.

몸에 묻은 페로몬이 자주 맡고 곁에 둔 향과 닮아 있을 것이라는 걸. 무감각한 그마저도 느낄 수는 있었다.

도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서로가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유추할 수 있는 향기의 존재 때문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하민의 노력 덕분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름 볕이 강했지만 이상하게도 덥지 않았다. 이것 또한 위로가 섞인 하민의 페로몬을 연상케 하는 페퍼민트 향 때문이었다.

이로써 하민은 그에게 할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형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하민이 챙겨 준 꽃을 아버지 곁에 놓아둔 도윤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얇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의 성함 석 자가 적힌 도자기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버지. 저 왔어요. 제가 좀 늦었죠? 올해는 혼자 와서 죄송해요.”

유리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어머니가 먼저 다녀가셨는지 포스트잇에 ‘여보 사랑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길게 쓰지 않은 절제된 그 마음이 얼마나 사무치게 외로움을 대변하고 있는지, 아들이라는 존재여도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늘 어려웠다.

손을 대어 얼룩이 진 유리를 뽀드득 소리가 나게 닦아 내면서도 도윤은 가족과 더불어 하민을 머릿속에 그려 나갔다. 부드럽게 흐르는 까만색 생머리가 볼을 간지럽히는 것이 뜻밖에 싫거나 나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러 온 이 순간에도 그를 떠올리는 것조차 예전 같았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실없이 웃음이 터졌다. 풍선에 바람이 빠져 가는 것처럼 한번 놓친 마음의 입구에서 수많은 감정이 터져 나올 듯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웃고 있는 사진과 그 옆에 둔 보라색 꽃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것보단 추모하는 마음이 가벼웠다.

“형…?”

익숙한 목소리가 도윤의 귓가에 박혔다. 전과 달리 말을 번복하여 함께 아버지를 보러 갈 수 있다고 톡을 넣고, 이에 답한 동생 재윤은 학원 수업이 마치는 대로 가겠다는 답을 내놓았다. 시간상 못 갈 수도 있다는 말을 추신으로 붙이면서.

형 혼자 가도 돼. 바쁘면 나중에 따로 와.

먼저 출발하겠다는 톡을 보내며 도윤은 만에 하나 재윤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동생의 얼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버스 안에서 내내 생각했다. 해답을 얻기 어렵다는 결론하에 동생과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다고 정말로 그럴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예상은 물거품처럼 덧없는 것이었다. 재윤은 바람과는 다르게 납골당에 나타났고 자신을 먼발치에서 불렀다.

도윤은 신기하게도 막상 그 시기가 되자 고민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자신이 여태 왜 고민했는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따스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본 도윤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왔어?”

도윤은 가볍게 재윤을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이에 평소대로라면 ‘혀엉-!’ 하고 반갑게 달려올 재윤이 인상을 팍 찡그리며 더는 다가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동생의 처음 보는 행동에 도윤도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재윤아, 오랜만에 봤는데 너 형한테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형.”

“어.”

걱정스레 물은 말은 금방 재윤이 맞받아쳐 돌아왔다. 하는 수 없이 간결하게 답한 도윤은 계속 말을 떼지 못하는 동생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다려 주었다.

얼마 후, 재윤은 결심이 선 듯 난생처음 보는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 착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있잖아, 지금 형한테서 알파 냄새가 나거든?”

딱딱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말하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누군가가 스치듯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알파 페로몬을 묻힌 사람. 여기 오기 전에 위로해 준 사람. 상냥하고 곱고 아름다운 사람.

도윤은 그런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저기, 재윤아.”

“형. 제대로 설명해. 형이야말로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얼버무리는 대답 하나로 재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래선 안 된다는 듯이, 왜 그러냐는 듯이. 똑바로 도윤을 쳐다보며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듯이.

“설마 또 알파랑…… 하아- 형.”

동생의 한숨 소리가 짙었다.

도윤과 재윤, 두 형제는 오랫동안 마주 본 상태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조용하고 한적한 카페에서 어색한 적막감이 여지껏 그들이 만나지 못한 긴 공백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적당히 시킨 적당한 온도의 적당한 음료를 마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동생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던 통에 이제는 누구 한 사람이라도 운을 떼고 대화를 이어 나가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재윤은 앞에 놓인 복숭아 아이스티를 한 모금 삼키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수십 번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 끝에 도달한 질문이었다.

“형.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혹시 알파야?”

“…그건 갑자기 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휘적거리던 도윤의 행동이 멈췄다. 머뭇대다가 질문을 한 재윤에게로 시선을 보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원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재윤이 재차 형을 향해 말했다.

“아니 예전에. 음…… 지금 형이 그때랑 비슷해 보이길래.”

“그때라니 뭐가.”

짧막하게 말을 끊은 도윤이 테이블 아래에서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동생인 재윤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은 예상이 갔다.

어떠한 물음이 나올지 이미 알고 있는데 그에 따른 대답만큼은 본인도 모르겠으니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기가 찼다. 세세한 부분을 알 리 없는 재윤이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도 형이 예전에 사귀던 사람이 여성형 알파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맞아?”

살짝 놀란 표정으로 도윤은 재윤을 바라봤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입이 떨어졌다 다물어졌다 여러 번 움직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바뀐 분위기를 조용히 눈에 담기만 하던 재윤도 아이스티로 적셔진 얼음을 뒤적거렸다.

“그 기간 동안 형 몸에서 알파 냄새가 진동했어. 그리고 종종 형이 전화할 때마다 매번 똑같은 여자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재윤아, 있잖아.”

“형. 나 바보 아니야. 그건 형도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자꾸 숨기기만 해?”

“재윤아.”

동생의 이름을 무덤덤하게 불렀다고 생각했지만 결단코 아니었다. 도윤의 목소리는 마지막에 공기 중에 닿아 떨렸고 이를 숨길 수가 없었다.

하아- 크고 묵직한 한숨 소리를 몸까지 들썩거리며 내뱉은 도윤이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상하게도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래서 네가 알고 싶은 게 뭔데 그래.”

“내가 뭘 물어볼지는 형이 더 잘 알지 않아?”

“지금 알파랑 사귀고 있냐고? 그게 궁금한 거야?”

가린 얼굴을 내보이며 도윤이 재윤을 매섭게 쏘아봤다. 형의 행동이 비이성적거나, 냉담하다고 느끼던 재윤은 이를 악물어 ‘어’라고 하며 피하지 않고 맞섰다.

대답을 들은 도윤도 이번엔 도망갈 구석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오로지 하민의 존재만 떠오르고 있다는 것까지도.

우리가 사귀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다고 하민 씨를 싫어하지도 않아. 그럼 대체 이건 무슨 감정이길래 이토록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답도 못하게 만들어 깜깜하고 아득한 감정만을 간직하게 하는 걸까.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 형.”

재촉하는 저 말에, 저 시선에, 자신도 깨닫지 못한 깜깜한 마음으로 재윤을 바라봤다. 담담히 웃어 보려고 애를 써 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우습게도 입꼬리는 자꾸만 내려가서 억지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노라며 티를 냈다. 이렇게 처음으로 하민에 대한 감정을 내보였다.

입 밖으로 끄집어내는 마음이 어떠한지는 중요치 않다. 그냥 진실만을 전할 뿐이었다. 동생이 진실만을 원하니까. 피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뭐라도 토해 내야 하니까.

“하민 씨는… 그냥. 그냥, 아직은 잘 모르겠고 볼 때마다 생각나는 그런 사람이야. 같이 있을 때는 잘 모르겠어. 근데 돌아서면 이상하게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고 있긴 한데 난 그냥… 하아-.”

“하민… 씨? 형은 그 사람이 좋아?”

야구로 빗대면 직구라고 할 물음에 도윤은 얼굴 전체를 찡그리며 웃기만 했다.

눈을 찡그리고, 코를 찡그리고, 입술을 찡그리며, 그 순간에 뜨거운 여름 볕이 들자 방금 지은 표정 따위가 짝사랑에 대한 아픈 감정인지 뜨거운 볕을 피하기 위한 감정인지 모른 채로.

도윤은 마냥 어린아이처럼 여겼던 동생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어어? 이 형 좀 봐. 왜 그렇게 웃어? 내 질문이 이상해? 질문을 좀 바꿔 볼까. 뭐가 좋지. 아! 그 사람은 형이 좋대?”

“아마도.”

조금 전과는 달리 바로 나오는 대답에 재윤이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와……. 그 사람 진짜 불쌍하다. 어쩜, 좋아해도 우리 형 같은 사람을 좋아하냐.”

“잠깐, 야. 너 평소에 날 뭘로 보고-.”

“됐고, 그 알파한테 힘내라고 전해 줘.”

“힘을 왜 내.”

“형 둔해도 너무 둔한 거 알아? 하아-, 뭐. 그 알파분 페로몬이 거칠진 않아서…… 불쾌하진 않으니까. 별 탈이야 없겠지. 그거면 됐어.”

“뭐?”

입을 멍하니 벌린 도윤의 말을 무시하며 재윤은 멍청해 보이는 형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선을 형에게서 떼어 낸 동생은 더는 말하지 않으며 솔직하지 못한 형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투덜투덜 대는 목소리로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은 형이 다 들으라는 듯이 조금은 크게 말했다.

어휴 덥다. 이 지긋지긋한 여름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 오늘도 덥겠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면서.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도윤의 입가는 딱딱하게 굳었다. 이 모든 건 방금 씹은 차가운 얼음 탓일 것이다. 얼음이 차가우니까. 그래서 생각도 차가워졌을 게 뻔했다.

오늘따라 하민의 하루는 길고도 험난했다. 도윤이 자신의 행동 반경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종일 신경이 쓰여서 꽃집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상황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던 탓이다. 더군다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러트사이클 약을 복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느끼기에 지속적으로 페퍼민트 향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성 알파 주제에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꽃을 손질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2시쯤이 되었다. 아망떼를 자주 찾아 주는 손님 중, 알파와 사귀고 있는 오메가 손님의 행동이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하다고 느낀 후로 그는 내내 불안함을 떠안다가 결국 아망떼 문을 닫아야 했다.

그랬던 이유는 매우 당연한 수순 같은 것이었다. 아까 들렀던 오메가 손님은 오늘 자신과 백년가약을 맺게 된 알파 애인의 생일을 위해서 꽃을 사러 들른다고 미리 가게 쪽에 예약을 넣었고, 밖에서는 그 알파 애인이 손님을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가벼운 종소리와 뜨거운 여름 햇살이 동시에 몰아치던 때, 오메가 손님은 아망떼에서 몇 발자국도 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춤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손님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알파 애인이 잔뜩 화가 나서 아망떼 안으로 쳐들어왔다.

‘해인아!!’

손님의 애인은 위협적인 알파 페로몬을 흩뿌리며 자신의 애인을 지키려는 듯, 온몸에 시나몬 향이 나는 페로몬을 자욱하게 둘렀다. 그런 알파는 눈빛이 매우 매서웠고, 눈동자 색깔도 변해서 동공까지도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정신 좀 차려 봐, 해인아. 나야, 괜찮아. 내 몸에 기대! 어서!’

성대를 긁는 날카로운 목소리. 과하게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 서늘하게 빛나는 짐승처럼 바뀐 눈동자. 그 모습을 온전히 마주하게 된 하민은 오메가 손님의 애인이 우성 알파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죽일 듯이 적의를 내보이고 있다는 불편한 사실까지도.

‘해인아, 이 가게 사장이 우성 알파였어? 별놈 아니라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오메가 손님의 얼굴을 반 이상 손으로 가린 채로 해당 알파는 이곳 사장인 하민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손님은 온몸을 벌벌 떨어 대며 애인 품 안으로 최대한 어깨를 말아 파고들었다.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고, 누가 봐도 겁에 질려 몸을 제어하기 힘든 상태로 보였다.

우드 향을 기초로 한 강한 시나몬 향의 페로몬을 걷히지 않은 상태로 그 알파가 말했다.

‘지금 제 애인한테 무슨 허튼짓입니까? 딱 봐도 러트 중인데 그 꼴로 가게 문을 열어? 당신, 미쳤어?! 제어를 못 할 거면 억제제라도 빨리 처먹었어야지!!’

러트라는 말에 얼빠진 자세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하민의 눈빛이 한순간에 냉담하게 변했다. 무어라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오메가 손님은 극심한 고통에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알파 애인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는 기색을 여실히 내보였다. 더는 하민과 마주하기 싫다는 듯이. 아니나 다를까 그 알파는 오메가 손님을 들쳐 업고 그대로 아망떼 문을 박차고 나갔다.

크게 울리는 쾅 소리에 하민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러트사이클 때 누구보다도 페로몬 조절이 완벽했던 그였기에 방금 겪고 들었던 상황들은 자신이 형질자라는 것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다소 충격이 크게 다가왔다.

“우욱-.”

하민은 또 다른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가게 안에 자욱하게 깔린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확 구역질이 일었다. 속이 매스껍고 불쾌해서 배 속이 타들어 가고 눈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뜨거웠다. 처음 겪어 본 일에 면역력이 전혀 없던 하민은 끝내 참지 못하고 그대로 속 안에 있던 모든 음식물을 게워 냈다.

“웨엑-!”

바닥에 무방비하게 쏟아진 잔해물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입 안에선 시큼한 맛이 감돌았다. 머리부터 어깨, 그리고 점점 온몸 전체로 나른하고도 지독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허억- 헉.”

아. 큰일 났다. 진짜 러트사이클이잖아.

불과 30분도 안 되는 시각에 일어난 일은 하민으로서는 매우 뼈아팠다. 이번 사건을 겪은 이후로 아망떼의 문을 빠르게 닫고 퇴근을 서두르면서 하민은 머릿속에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냉정하게 구분 지었다.

일단 집에 가자마자 창문부터 차단해야 된다. 페로몬이 새어 나갈 틈을 막고 견뎌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아… 아냐. 형…… 형.”

단 몇 초 만이었을까. 하민은 또 다른 무언가가 떠올랐다.

도윤.

우도윤이 생각났다.

“미치겠다. 나 진짜 왜 이러지? 안 돼. 지금은 절대 안 돼.”

이상하게도 도윤을 보고 싶었다. 보고 싶은데… 그런데도 지금 그를 만나면 위험하다는 판단이 무의식적으로 일었다.

절대로 만나서는 안 돼. 페로몬 조절도 불가능하고, 러트도 이겨 내지 못하는 우성 알파가 묵혀 두기만 한 러트사이클을 겪었을 때의 파장은 본인으로서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무서웠다.

일부러 다섯 정거장 전에 버스에서 내린 도윤이 평소보다 천천히 걸었다. 쭉 도로와 나란히 나 있는 길을 산책 삼아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무렵엔 익숙한 풍경부터 보였다.

짙은 그림자에 암전이 되어 버린 아망떼.

낮과는 또 다른 외관에 도윤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민도 없는 아망떼를 바라보며 장송처럼 서성였다.

꽃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자신, 꽃과는 담을 쌓은 자신, 꽃과는 앞으로도 접점이 없었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자신은 윤하민이라는 존재를 접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달라져 버렸다.

변화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던 도윤이었지만, 지금은 그 변화가 생소하지만 나쁘지 않게 다가왔다. 조금 더 하민과 맞닿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식으로 자신이 변화할지 두렵다가도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늘 하민의 걸음은 자신보다 빨랐고, 거침이 없었다. 느림보처럼 더디게 걷는 자신의 두 다리가 민망하게 느껴진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래서 종종 묻고 싶기도 했다. 이렇게 느릿느릿한 사람도 괜찮은지, 이렇게 모든 돌다리를 두들기고 건너야 하는 사람도 괜찮은지. 그냥 우도윤이라는 나라는 사람이 세운 벽을 부숴 버릴 강단이 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도윤은 동생이 전해 달라는 짓궂은 말을 전할지 말지 핸드폰을 붙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깨달음을 얻었다.

늦었으니 톡으로라도 동생이 말한 부분을 가볍게라도 전하자고.

(사진)

하민 씨. 전 지금 집에 도착했어요. 오늘 하민 씨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오후 11:45 그리고 제 동생이 하민 씨가 저에게 묻힌 알파 페로몬을 알아봐서 하민 씨에 대한 이야기를 동생한테 아주 조금 하게 되었어요. 동생이 하민 씨한테 힘내라고 전해달라네요.ㅎㅎ 그럼 내일 봐요. 잘자요, 하민 씨.

하민에게 아버지의 유골함 곁에 그가 챙겨 준 꽃을 두어 함께 찍은 사진을 한 장 보냈다. 도윤은 일부러 그 사진을 보낸 것이었다. 하민이 자신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대해 준 상냥한 그 마음이 너무나도 고마웠기 때문에 그랬다. 이러한 고마운 마음이 하민에게도 조금이나마 닿기만을 바란 단순한 마음에서였다.

톡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도윤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바라보며 1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정이 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그날은 하민의 답장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선 의미도 없고 기약도 없는 며칠이 흘렀다.

이후 도윤이 다시 하민을 보게 된 건 뜻밖에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권에서 계속>

P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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