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8)

#벼랑 끝에서 희망을 발견하던 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초여름. 작고 오래된 빌라 한가운데 이삿짐센터 차량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총 세 명의 인부들이 내리자마자 낡아 빠진 복도식 빌라를 대충 눈으로 쓱 훑었다. 인부들은 서로 무어라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끝에 부산히도 이삿짐 차량을 빌라 건물 앞까지 바짝 대었다.

드르르륵- 탁.

기다란 지게차가 반쯤 펴지면서 적당한 자리에 걸쳐지더니 단단히 고정을 마치자 건물 전체가 울리는 큰 소리가 났다.

쿵.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도윤은 눈을 비비며 베란다로 나갔다. 어설픈 걸음걸이가 인상적인 그 다리에는 단단한 석고로 덧댄 깁스가 둘려 있었다.

잠이 깨기도 전에 도윤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생이 하도 끊으라고 성화를 부려 참고 있었지만, 스트레스와 고민에 못 이겨 기어코 다시 피우게 되었다. 인생사 우울한 일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일 때문에 머리가 지끈 울렸다.

막 자다 일어나서 그랬던 건지 동그랗고 반질한 두상에 대충 빗은 짧은 머리가 둥지처럼 삐죽댔다. 이를 알 턱이 없는 도윤은 뜨거운 태양 아래, 뜨거운 담배를 입에 물고, 뜨겁게 볕으로 달궈진 단단하게 들어찬 복근과 넓고 큰 가슴을 벅벅 긁어 댔다. 언뜻 보아하니 저 멀리 이삿짐을 나르는 인부들이 강렬한 태양에 반사되어 하이라이트처럼 번쩍이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번에는 짝다리를 짚고 섰다. 큰 손은 탄탄한 근육이 도드라진 엉덩이를 긁어 대면서도 비로소 바로 아랫집에 베란다 창이 열리는 걸 살폈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이삿짐들이 꼬리를 물고 등반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잠이 덜 깬 도윤도 아주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후우- 아랫집 이사 왔구나.”

희뿌연 담배 연기를 뿜다가 심드렁하게 베란다 난간에 기대었다. 경찰경호학과를 졸업해서 경찰직으로 일하던 우도윤은 최근 취객을 상대하다가 다친 다리 때문에 곤혹을 치르는 중이었다. 아픈 다리가 햇빛에 노출되자 더욱더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물며 석고로 단단하게 고정했으니 그 사이로 땀까지 차서 습했던 관계로 영 찜찜하고 불쾌했다.

“더운 날에 다들 고생하시네.”

이삿짐 행렬을 좇던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몇 번 숨을 뿜던 도윤은 찌는 듯한 초여름의 열기를 참지 못하고 반도 채 태우지 못한 담배를 손가락으로 비벼 껐다. 쌍꺼풀 없이 길게 가로로 찢어진 눈매는 재차 무심하게 인부들을 살피었다.

이 더운 날에 누가 이사를 온 건지, 원.

가만히 두고 보기에도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었으나 보기와는 다르게 도윤은 남을 살뜰히 챙길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문뜩 자신의 집 바로 아래층에 이사 온 사람이 알파일지, 오메가일지. 혹은 자신과 똑같은 베타일지 조금이나마 궁금한 기색을 비쳤다. 눈은 여전히 작은 움직임조차 놓치지 않으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그중, 딱 봐도 인부로는 보이지 않는 희멀겋고 모델같이 키가 큰 한 인영을 발견했다. 눈곱이 잔뜩 끼어 뿌옇지만 진한 핫핑크색의 상자를 든 사람이라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핫핑크색은 강렬했다. 여름빛을 나타내는 초록색과는 전혀 다르게.

도윤은 눈을 비볐다. 그제야 눈곱이 손가락에 붙어 떨어져 나가며 시야가 한층 또렷하게 보였다. 그 인영은 키가 자신과 얼추 비슷하게 보였지만 체구는 더 호리호리해 보였고 피부도 허연 것이 힘도 못 쓰고 픽픽 나가 쓰러질 것만 같아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아.”

가벼이 혀를 차려는 도중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랫집에 이사 온 사람은 누가 봐도 남자였다. 그것도 기생오라비 같은 꽃처럼 곱디고운 남자. 뿌연 시야 때문에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외형으로 보면 오메가가 분명한데 무엇이 됐든 간에 도윤에겐 맡기 힘든 페로몬일 것이다.

그는 형질자가 아닌 베타였으므로.

몸집은 크고 그을린 피부를 한 도윤과는 한 점 닮은 것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웃이라 그런지 길게 그어진 눈은 그답지 않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연신 시선을 흘렸다.

“아, 눈이.”

아주 찰나에 몇 초간이었지만 상대방과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시선이 민망하여 도윤의 눈이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굴렀다. 마치 상대방을 훔쳐보다가 걸린 듯해서 머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큼큼.”

칼칼하지도 않은 애꿎은 목을 가다듬다가 도윤이 재차 시선을 흘겼다. 아쉽게도 상대방은 이미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멋쩍어져 크게 한숨을 내쉬다가 몇 번 더 밖을 쳐다봤지만 보이는 풍경은 여전했다. 결국 도윤은 불편한 다리를 쿵쿵대며 자리를 피했다.

어쨌거나 저 사람과 자신은 그다지 얽힐 것 같지 않았다.

하민은 분명히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거대한 인영에 두 눈을 비벼도 보고 여러 번 깜빡여 봤다. 날이 더워선지 쨍쨍한 햇빛은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따갑고 강했다.

“뭐야?”

하민은 강한 햇살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더운 날에 이사하는 제 처지가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여기서 이 개고생을 하고 있지.”

역시나 아버지께 싹싹 빌 걸 그랬다. 욱해서 깽판 치고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된 점을 깊이 반성하겠노라며, 입바른 소리라도 할 걸 그랬다. 그랬으면 처음 와 보는 이곳에서 땡볕에 이딴 개고생은 안 했을지도 모르는데.

아버지가 카드부터 스물여섯 될 때까지 모아 놓았던 자금마저 싹 다 뺏어서 쫓아낼 줄 누가 알았을까. 이 빌라도 겨우 구한 하민은 억울한 마음에 자신에게 처했던 며칠 전 일을 상기시켰다.

여름이라고 해도 유독 더웠던 때. 그날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어느 분야건 거물급 인사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고위층 파티가 한창인 날이었다. 클럽은 많이 돌아다녔어도 이런 파티의 파 소리도 들릴라치면 도망가기 바빴던 하민이 웬일로 참석했던 바로 그날 사건이 터졌다.

익숙한 얼굴이 하민을 향해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왔어? 야, 오늘 너 몸 좀 사려야겠더라.”

와인 잔을 들고 있던 하민의 미간이 구겨지더니 답했다.

“내가 왜?”

“왜긴 왜야. 오늘 온 놈 중에 그놈들도 있어. 너희 어머니가 초대장 받았다는 말 소문이 쫙 퍼진 것 같더라고.”

그나마 친분이 있는 놈의 조언에 조소를 내보이던 하민이 와인을 마시지도 않은 채 들고만 있었다. 기껏 즐기려고 온 파티에 불청객이 있다는 소리는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가벼운 파티라는 명목하에 진행된 숨 막히는 사교의 현장. 특별한 초대장이 있어야만 입장이 가능한 공간. 파티 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를 치던 하민도 오늘은 이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파티의 목적은 주로 정계 인사들의 자제나 연예인. 또는 전 세계를 통틀어 대기업이라고 일컬어지는 회사의 차기 상속자들이 드나들며 결속을 다지는 자리였다.

하민이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아버지가 대한민국에서 주식부터 시작하여 올해 진행한 평판 좋은 기업 순위에 당당히 1위에 오른, 손에 꼽힌 대기업 회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그 정도로 큰 기업은 아니었지만 올해 들어서 주가가 많이 오른 상태였다. 초대장은 어머니를 통해서 받았기에 그날만큼은 부모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특별히 더 공들여 자신을 꾸몄다.

“와- 윤하민 진짜 왔네? 잘 지냈어?”

“나야 늘 그렇지. 너도 잘 지낸 것 같다.”

“당연하지. 나 요즘 잘나가잖아.”

“아, 그래. 계속 잘나가길 바라.”

젊은 CEO로 이름을 날리는 어느 한 여성형 오메가에게 하민이 와인 잔을 기울였다. 그 오메가는 가볍게 화답하며 미소를 보이더니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사람에게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빽이 좋네. 이런 델 다 오고.’

그러고 보니 저 오메가가 좋은 알파를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더랬다.

‘파티 참석은 그 때문이군.’

와인을 여전히 한 모금도 가져다 대지 않은 채 하민은 조금 전 인사를 나눈 오메가를 바라봤다.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이 발랄한 그의 어머니를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뿌리부터 굳건한 우성 알파 집안에 장남인 아버지와는 달리 평범한 열성 오메가였던 어머니는 은연중에 사교장 안팍으로 온갖 무시를 당하시곤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 거래를 트며 지냈던 기업 중 어머니를 무시한 경우라면 보복을 가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조금 잠잠해지긴 했지만, 어머니는 늘 자신 때문에 아들인 하민한테도 피해가 갈까 봐 매번 조심스럽게 행동하셨다.

하민은 사람들이 어머니께 왜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늘 아들에게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좋은 것만 해주려고 노력하는 아주 아름다운 분이셨으니까.

하민은 남들이 무시하더라도 어머니를 존중하며 세상에서 가장 최고로 여겼다. 대단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토록 귀하게 여겼다. 남들이 무시하면 다 박살 내 버릴 정도로 그토록 귀하게. 그러한 모습들이 차곡차곡 모여 하민에겐 이 모든 게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아아. 다시금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 봤다. 매우 소중했던 어머니는 아름다운 웃음을 보이시며 이번에 특별히 아버지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초대장을 받았다며 행복해하셨던 그 모습을. 그걸 하민은 똑똑히 기억한 채로 그 싫던 파티에 참석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그래도 파티에 오긴 싫었다. 그런데도 왔던 것은 어쨌거나 때마침 저번 주 클럽 파티 때 만난 좋은 풍채를 가진 남성형 알파가 온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 알파는 클럽에서 만났을 당시 자신에게 먼저 호감을 보였고, 선뜻 접근해 와서 알게 된 인물이었다.

‘꽤 취향이긴 했지.’

같은 알파이긴 해도 미미한 페로몬 향에 우성이 아닌 열성임을 쉽게 알아차렸을 정도로 베타에 가까웠던. 어느 정도 하민의 취향과 많은 부분이 일맥상통해서 썩 나쁘지만은 않았던. 그 남자는 그런 인물이었다.

하민이 파티에 참석한 연유에 일부분에 그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그 사실이 자신의 상황을 오히려 더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따라 하민의 콧노래는 끊이질 않았고 아주 약간은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연애까진 아니더라도 썸은 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도 품었다.

“야 근데 그거 들었어? 아까 성하그룹 알파랑 나간 열성 놈 있잖아.”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알 법도 한 대화에 하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아~ 걔네? 둘이서 이미 호텔로 갔다던데?”

씨발.

입 밖으로 끄집어내진 않았지만, 그 욕은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진심이었다. 괜히 파티에 참석해서 알고 싶지 않았던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은 것만 같았다.

파티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선수를 친 또 다른 알파의 존재. 그리고 그 영역 싸움에서 밀렸다는 수치심과 모멸감. 그러한 감정들은 우성 알파로서 발현한 지 얼마 안 되어 주가를 올리던 윤하민이란 존재가 단시간 내에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오래전부터 알파로서 확고했던 자들에게 밀려 버린 개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민은 독특한 취향으로 자신이 고초를 겪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덩치가 큰 남자들만 선호했던 지난날들이 너무 어리석긴 했다. 더욱이 임신이 될 리가 없는 베타만 고집하기 일쑤였으니 어련했을까.

영역 싸움에서 밀린 걸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뜩이나 그가 알파로 발현했던 순간이 남들보다 조금은 더뎠기에 힘들었던 때가 많아서 더 노력하려 애썼다. 하민이 이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짜증 나 죽겠네.’

근데 이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되질 않는다는 것쯤은 당사자가 가장 잘 알았다.

긴 손가락 사이에 걸린 와인 잔이 빙빙 돌아갔다. 하민의 붉은 입술이 와인 잔을 물고 단숨에 스트레이트로 술을 넘겼다. 이상하게도 쓰린 술이 목구멍을 다 태워 버릴 기세로 내려가서 그런지 고운 미간에 주름이 팼다. 달콤해서 자주 즐기는 와인이었지만, 오늘따라 쓰게만 느껴지는 것이 제 처지를 더욱 비관적으로 몰아세우는 데에 일조하기 딱 좋았다.

하민은 자신의 미각이 왜 이토록 변했는지 이미 인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더 비참했다.

하필이면 점찍어 둔 남성형 알파는 성하그룹의 알파 차녀가 진즉에 와서 꿰찼다는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미 버스는 자신만 두고 떠난 상태였다는 걸 뒤늦게 인지한 것도 마찬가지.

하물며 둘이서 먼저 파티장을 빠져나갔다는 열 뻗는 말뿐으로 모두가 자신을 비웃으니 욕도 잘 입에 담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참기 어려웠던 건 당연한 이치였다.

‘지긋지긋한 알파 새끼들.’

하민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이도 바득바득 갈며 욕도 거하게 뱉었다. 자신도 알파였지만 알파의 욕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나쁜 새끼. 언제는 내가 좋아한다는 꽃까지 클럽 밖으로 나가서 사 오지 않았냐고. 그리고 한다는 말이 ‘너 참 내 스타일이다.’ 잘도 말해 놓고 그새를 못 참고 홀랑 나가 버리냐 나가 버리길.

‘이 새끼 깃털 같은 놈이었어. 미친놈이 덩치는 큰데 엉덩이는 또 왜 그렇게 가벼운 거야.’

기껏 시간과 공을 들여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천하의 윤하민이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런고로 이 분함을 참으면 병이 될 듯하여 그날 하루 망나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를 재간이 없었다. 파티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후, 한가운데에 서서 ‘커플들은 다 뒈지라지!’ 외치고 싶은 욕망이 간절하다 못해 피가 말렸다.

그럴 때마다 하민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내의 쓴맛을 겨우겨우 감당해 냈다.

그러나 장대한 포부를 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인생에서 희대의 망나니 같은 행동으로 남을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다짐하던 그 마음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휴지 쪼가리처럼 쓸모없고 하찮아졌다.

퍽 살이 짓이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놀란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을 무렵 이미 파티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린 후였다. 이번 파티엔 유독 어렸을 적 하민에게 왕따를 주동한 놈들이 주둔해 있었다. 우성 알파로 발현하기 전 무렵에 예쁜 그의 외모로 온갖 조롱을 해 대던 놈들이었다. 그래선지 노리던 사람에게 말도 한번 못 붙여 보고 차였다며 비웃는 말로 일부러 도발하려 드는 놈들이 많았다.

‘이야~ 뭔 배짱으로 왔어? 그 얼굴로 다른 알파라도 꼬시게? 아. 너 오메가 아니었나? 미안 미안. 네 얼굴이 워낙 뭐…….’

하민을 힐끔거리던 질 나쁜 한 놈이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며 탈탈 털어 댔다.

‘면상이 뒤 잘 대 주게 생겼잖아. 안 그렇냐?’

‘야야, 왜 그래? 얼굴이 저래서 연애 못 한대잖아. 우리 하민이 불쌍하게 봐줘라, 좀.’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라는 놈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긴 어려운 말들. 그 무수한 말은 자신을 향하는 말이어서 참을 수 있었다. 알파로 발현하기 전 당했던 일이니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했다. 그저 말리는 척하면서 실실대는 녀석이 더 싫은 법이었다. 불쌍하게 봐주라는 놈이 말하는 것치곤 싸구려 티가 났다. 역시 연애를 못 하는 이유가 오메가 같은 얼굴 때문이라는 같잖은 말을 하는 부류는 늘 그랬듯이 토가 쏠렸다.

하민은 오늘따라 유독 그들의 행동을 참기 어려웠다. 늘 적당히 웃고 맞받아치며 넘어갔는데. 그랬는데.

‘쟤네 엄마 배경이 별 볼 일 없는 오메가잖아. 쟤 얼굴이 그 오메가 엄마랑 얼굴 똑 닮았더라고.’

하민이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건든 것이 죄라면 중죄였다. 저 자신만 건드리면 됐을 일인데 감히 누굴 건드려? 끝끝내 부글거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어머니를 입에 담은 놈으로 골라잡아 먼저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난투극이 시작됐다. 금세 파티장은 시장터처럼 소란스러워졌다.

“넌 아직도 내가 우스워? 왜. 또 왕따 새끼 어쩌고 해 봐.”

비틀린 말투에 날이 바짝 섰다.

“너 나 아직도 우성 알파로 발현한 거 소식 못 들었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스물여섯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건망증이 심한가 봐.”

“으윽, 그, 그게.”

“왜. 아니야? 아님 말고. 근데 내 얼굴이 잘난 걸 어쩌겠어? 예쁘장하면 다 오메가? 얼마나 생각이 없으면 아직도 그러고 사냐. 내 얼굴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든가. 아- 맞다. 너 최근에 코 세웠다고 소문 쫙 났더라. 근데도 얼굴은 그대로인 것 같고… 뭘 고쳤다는 거야, 대체. 응? 왜 말이 없어. 어디 더 떠들어 보라고, 이 개새끼야.”

윤하민만의 장점인 거친 우성 알파 페로몬은 잔뜩 성이 나 어느덧 파티장 안을 자욱이 채우며 일렁였다. 이는 숨이 턱턱 막히는 고약한 향이었는데 똑같은 우성 알파끼리의 싸움이었다고는 하나, 톡 쏘는 페퍼민트 향에 지독한 스컹크의 향이 깃들어서 토할 수준이었다. 입에 게거품을 물 만한 매쾌한 향 때문인지, 짓이겨 올라탄 알파 놈의 입가엔 어느덧 부글부글 거품이 들끓었다.

이를 바드득 갈며 이미 뻗은 채로 입에 거품을 문 놈을 몇 대 더 때리려던 찰나 하민은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에 의해 끌어 올려졌다. 파티장을 소란스럽게 만든 원흉인 쾌쾌한 페로몬에 구애받지 않는 건, 베타로 이루어진 경호원들뿐이었다.

-하민아!

“아, 저 듣고 있어요, 엄마.”

-아니 뭔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그냥요. 이런저런 생각 좀 했어요. 근데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아니, 듣고 있다는 애가…… 너 혼자서 괜찮겠냐고 했잖니.

걱정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어머니의 말에 하민은 지끈거리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답했다.

“네. 괜찮죠. 저 진짜로 문제없어요. 엄만 뭔 그렇게 걱정을 하셔.”

-정말로?

하민은 며칠 전 끔찍했던 잔상들을 떠올리다가 걱정스러운 물음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문제가 없을 리가 없다. 실은 문제뿐만이 아니라 패기롭게 아버지한테 대들고 내려가는 고단한 길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는 중이었다.

평소처럼 대들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원래 그럴 분이 아니신데 그날따라 단단히 화가 난 아버지가 주먹질을 하다못해 분에 못 이겨 골프채를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필사적으로 웅크린 자신을 감싸면서 사건은 종료되었었지. 아버지가 그나마 어머니 말에 껌뻑 죽는 팔불출이었으니 그 정도로 끝난 거였다.

‘쓸모없는 놈! 내가 널 망나니짓 하라고 오냐오냐 키운 줄 알아?! 우리 수정 씨 때문에 참은 줄 알아!’

하민의 귓가에는 아직도 아버지의 화난 음성이 또렷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던 아버지가 오메가랑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지방으로 가서 혼자 살아 보라며 등을 돌렸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랬는데……. 여러 번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얼굴을 보며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은 통탄스러웠다.

그냥 무릎 꿇고 싹싹 빌걸. 그랬다면 강원도까지 내려올 일도 없었을 거잖아. 미련하기 짝이 없다.

“엄마.”

-응, 아들.

“저 이번에 꽃집 오픈해 보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꽃집?

의문 가득한 어머니의 말씀에 하민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부터 꽃을 다루는 법을 배우며 좋아했던 기억을 그려 봤다. 그때보다 더 행복한 날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던 것 같다.

“네. 저 어렸을 때부터 엄마랑 꽃시장도 많이 가고 돌보는 방법도 많이 배웠잖아요. 그래서 할 수 있을 것 같길래. 엄마도 엄만데, 아버지도 꽃 좋아하시잖아요. 부지런히 좋은 꽃들로만 엄선해서 금요일마다 퀵으로 보내 드릴게요. 그럼 아버지께서도 화가 금방 풀리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데…… 가게 하나만 차릴 수 있게 지원해 주세요. 괜찮죠?”

-어머, 좋은 방법이네! 당연히 지원해 줘야지, 누구 아들인데. 생활비도 필요하면 말만 해. 알겠지?

“고마워요, 엄마. 역시 엄마밖에 없다. 그래도 생활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얘는 무슨 소리니. 여태까지 모아 놨던 자금도 아버지한테 다 뺏겼는데 무슨 고집이야? 이럴 땐 그냥 네 하면서 엄마 말만 들어.

급조한 계략임에도 뭐든 좋다고 맞장구쳐 주는 어머니는 오로지 아들 편이었고 이런 어머니의 말이라면 곧 죽어도 따르는 게 아버지 스타일이었다. 차라리 꽃집이고 뭐고 번거로운 방식보단,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만 잘 해 줘도 금세 지방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래도 체면이 있지, 하민은 이번만큼이라도 스스로 해결을 보고 싶었다.

“길어 봤자 6개월이면 다시 올라갈 수 있을걸요? 장담해요.”

-그러면 좋겠는데. 뭐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만 해, 아들. 엄마가 다 해서 보내 줄게. 응?

“괜찮아요. 무조건 다시 서울로 돌아갈 테니까 제 방 정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요. 아셨죠?”

-그래, 알았어. 몸조심하고. 그러게 그냥 아버지 사업 잘 물려받고 하지 그랬어. 너도 참 고집은 네 아버지 닮아선….

“됐어요. 아직 나이도 어린데 무슨….”

-외동이니까 그렇지. 너 말고는 물려줄 놈도 없다고 아버지가 성화하잖니. 하여튼 항상 몸조심해. 알았지?

“네. 엄마도요.”

-엄마 걱정은 하지 마라, 얘. 그나저나 넌 꾹 참고 참다가 한 번씩 욱하는 버릇이 있더니 이번에 어째 딱 터졌다 싶었어.

어머니의 말에 뼈가 있고 진리가 있다. 반박할 재간이 없는 아들은 씁쓸하게 입맛만 다실 뿐이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패드립은 결코 참을 수도 참아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차마 그 말까진 어머니가 상처받을까 봐 말을 아꼈다. 말 없는 아들이 전화 너머로 어떤 행동을 할지는 어머니 입장으로선 다 꿰뚫고 있었다. 속이 쓰릴 테지. 하지만 아들이 주눅 들지 않았으면 하는 게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기라도 살려 주고 싶은 그 마음이 닿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머니는 발랄한 목소리로 못다 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들, 이번엔 참지 않고 터트린 게 한편으로 너무 기뻐. 알지? 엄마 마음.

“네… 알아요. 저 주눅 안 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응. 그럼 됐고. 잘 지내, 아들. 사랑해.

“네.”

똑같이 사랑한다, 고맙다. 하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서로 찰싹 달라붙어서 끝끝내 전하지는 못했다. 하민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앞으로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하며 지금 일을 잊지 않기 위해 일정한 간격으로 떠올렸다. 머릿속은 오로지 현재 처한 상황을 타파할 돌파구만 되뇌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필코 돌아가자.

딱 6개월이다. 6개월 뒤에 자신은 서울로 돌아간다.

이사 온 곳은 연식이 오래된 복도식 빌라였다. 신혼부부나 젊은 사람들은 거의 찾지 않고, 나이가 지긋하시거나 돈이 궁한 사람만 찾는다는 매물 중 가장 깔끔한 집으로 고른 데가 바로 이곳이었다.

하민은 여기에 오기까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입바른 소리를 들어도 원래 살았던 공간과는 매우 다를 테니까. 그나마 다른 매물보단 확실히 장점이 있었으니 주저앉고 계약해 버렸다. 내부 인테리어는 새로 싹 탈바꿈하여 깔끔한데도 연식이 오래되어 집값만큼은 싼 것이 장점이었다. 아버지가 뺏은 금액 중 극히 일부만 겨우 사수해선지 그나마 이 집이 지니고 있던 자금 안에서는 충분히 계약할 수 있는 금액대였다. 사실 더 좋은 집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정든 곳에서 쫓겨 나온 불쌍한 처지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만 했다. 지금 이 빌라보다 좋은 집을 계약했더라면 생활이 빠듯할 것 같았기에 뼈아픈 현실을 감내하기로 했다.

하민은 딱 6개월간만 살기로 마음먹은 협소한 내부를 매의 눈으로 쓱 훑었다. 까다로운 취향으로 보더라도 따로 인테리어를 할 필요도 없이 단조로운 색깔로 잘 꾸며진 내부 환경이 생각보다 제법 봐 줄 만했다. 예상외로 살기엔 불편하지 않을 듯했다.

물론 아주 좋게 말해 그 정도였고, 실은 서울 본가에서 지냈던 방에 비하면 턱없이 좁았다. 특히나 저 겨우 딸린 화장실에 욕조조차 없다는 사실이 하민의 열을 뻗치게 만들었으니까.

“뭐 저래도 이동식 욕조는 들어가겠지.”

짐 정리는 포장 이사를 부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홀로 의자에 앉아 느긋함을 만끽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짐을 나르고 물건을 정리하는 인부들의 손길만 멍하니 쫓아도 상관없었다.

“짐은 이게 다죠?”

“아, 잠시만요.”

앉아서 주위를 빙 둘러본 하민은 아직도 지게차를 타고 올라오는 짐을 살피다가 아차 싶어 벌떡 일어났다. 애지중지 아끼는 것들로만 엄선한 가장 중요한 물건을 빼먹을 뻔한 것이다. 아마도 보조석 발아래 두었던 것 같은데…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면 부끄러운 물건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부터 계속 정리해 주세요. 차량에서 두고 온 물건만 가져올게요.”

“예, 그러세요.”

인부의 말에 대꾸도 안 한 채 하민은 재빨리 신발을 구겨 신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인부한테도 정리해 달라는 언급조차 하지 못한 물건은 무사할지 어떨지 조급한 마음만 앞섰다.

“허억- 헉-”

1층에 도착하자 곧바로 차량으로 뛰어가서 타고 온 차 조수석 아래에 손을 넣어 헤집었는데 손끝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랫입술을 말아 씹으며 인상을 찌푸린 하민이 좀 더 깊숙이 손을 집어넣었다.

“아 씨. 여기 뒀는데? 어디- 아! 찾았다.”

못 찾으면 어쩌나 싶었던 물건은 핫핑크색 상자에 빠진 물품 하나 없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민은 그 상자를 보물단지라도 되는 양 품에 꼭 안고 조심스레 걸었다. 뜨거운 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핫핑크색 상자를 들고 걷자니 그 처지가 처량하다 못해 비굴해 보였다.

하민은 여태껏 겪은 기나긴 일을 곱씹던 걸 멈췄다. 지금에 와서 궁상맞게 떠올려 봤자 착잡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쪼르르 길을 따라 올라가는 짐도 원치 않게 눈에 밟혀 한숨이 절로 샜다.

“날씨 미쳤네. 진짜 덥다. 정말 한여름이잖아.”

지게차를 타고 줄줄이 올라가는 짐들을 바라보던 시선 위로 강렬한 여름빛의 태양이 내리쬐었다. 영영 끝날 것 같지 않은 이삿짐 행렬을 보니 혼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민은 자신이 어울리지도 않는 장소에서 이물질처럼 끼어 있었다.

올해의 여름은 너무나도 뜨겁고 강렬했다. 에어컨을 설치하려 기사를 불렀으나 초장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겨울부터 예약이 밀렸다며 에어컨은 일주일 후에 설치 가능하다는 끔찍한 말을 들어 버렸다.

“아, 안 돼. 살려 줘, 제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에서 하민이 선택한 것이라곤 고작 뜨거운 바닥에 널브러져 덜덜덜 거리는 선풍기 바람에만 몸을 맡기는 일뿐이었다.

“와, 환장하겠다. 더워 죽겠다고.”

이사 온 곳은 강원도 원주라는 곳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서울과 가깝게 위치한 곳 중 하나로, 이곳에 이사 올 당시에도 광주로 통하는 뻥 뚫린 고속도로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 크나큰 장점이었다.

서울과 크게 멀지 않아서 살기 좋으리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곳에 흥미가 생긴 하민은 내려오는 내내 핸드폰으로 정보를 검색했다. 사전 조사라도 할 겸 살펴봤던 건, 특별한 정보 중 강원도답게 지형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 원주 지역을 가로지르는 치악산이라는 억센 산 근처에서 수확되는 복숭아가 그렇게나 꿀맛이라는 점도 과일 중 복숭아를 좋아하는 하민에겐 더할 나위 없이 정 붙이기에 좋은 요소였다.

애석하게도 6개월뿐인 게 문제였지만.

“복숭아…… 복숭아 먹고 싶어. 이왕이면 단단한 복숭아로. 아니, 말랑한 것도 좋아.”

좋아하는 복숭아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는 표정에서 짜증스러움이 반 정도는 덜어졌다. 먹음직스러운 복숭아가 눈앞에 있다고 상상하니 군침이 돌아 침을 흘릴 뻔했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께 전화할 뻔하다가 놀라서 손을 깍지 껴 제지했다.

그는 곧 자신이 말랑이고 딱딱이고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붉은 입술에 날름 혀를 훔치던 하민이 제 처지가 한심해서 피식 웃다가 짜증이 치밀었는지 순식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근데 짜증 나네? 성하그룹 그 알파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집에서 복숭아 먹으면서 시원하게 뒹굴고 있었을 거 아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가치관이나 연인으로서 고집하는 성향이 별로라고 우울해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열성 알파와 잘 맞아서 호텔을 간다거나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윤하민은 스스로가 오랜 세월을 살았다고 자부했지만, 일평생 제대로 침대 위에서 허릿짓을 해 본 전적이 없어서 쪽팔렸다. 그나마 나중에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저 새끼 입만 살았다.’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귀에 피딱지가 질 정도로 내뱉곤 했다. 더불어 늘 ‘고자 새끼’라는 말도 지고지순 이상형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었는데 이토록 친구들은 하민의 연애 방식에 유독 짓궂게 굴었다.

뒤늦게 우성 알파로 발현한 하민에게 연애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늘어났다. 그래 봤자 상대는 늘 오메가뿐이었다. 발현 전 예쁜 외모로 오메가로 오인을 받아 따돌림을 경험했던 그에게 있어서 오메가란 존재는 달갑지 않은 형질자에 지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그에게 고백했던 오메가가 불현듯이 떠올랐다.

‘넌 왜 아무하고도 안 사귀어?’

안 사귀는 게 아니었다. 못 사귀는 거였다.

알파로 발현했던 건 중학교에서 졸업할 무렵이 되어서였으니 늦깎이었던 터라 그만큼 페로몬 조절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친히 페로몬 조절을 알려 준 이후로는 적응은 했다. 그 이후로 곧잘 오메가가 꼬일 대로 꼬였지만.

‘뭣하면 내가 같이 어울려 줄 수 있어. 어때?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하민은 추억처럼 남은 일을 떠올리곤 피식 웃음을 지으며 돌아누웠다.

“오메가한텐 안 서는데 어쩌라고.”

오메가를 극도로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왕따 요인이 ‘오메가 같아서’였고 오메가로 나중에 발현하는 것인 양 떠들어 대는 새끼들이 더 싫었을 뿐이었다.

그냥 오메가를 볼때마다 다른 알파와는 달리 하체가 불건전해지기보단 건전하고 정직해졌다. 더군다나 오메가라고 오해받고 왕따를 당했을 때도 무던하게 넘길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인드 때문인지, 그 순간에도 오메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진 않았다.

따돌린 새끼들이 나쁜 거지 오메가는 죄가 없으니까.

그냥, 하민은 굳이 만난다면 오메가랑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자식은 잘 지내겠지?”

하민은 스치듯 지나간 첫사랑 베타를 떠올렸다. 왕따를 당했을 때 자신을 도와주고 구원해 준 덩치가 큰 베타. 못생겼지만 웃는 건 제법 괜찮던 베타였다.

‘야, 너 괜찮아? 많이 맞았어?’

첫 대화가 떠올랐다. 역광이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콱 박혀 떠나갈 줄 몰랐다. 중증처럼 번진 베타 때문에 오메가가 눈에 찰 리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민의 머릿속엔 베타가 이상형으로 굳어져 버렸으니까. 알파였음에도 그는 베타가 좋았다.

하민이 반대편으로 몸을 뒤척이며 한숨을 쉬었다. 살면서 여태껏 이상형을 만나 열렬히 사랑하기 위해 여러 번 노력했었다. 그럴 때마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는 걸 깨닫는 순간만이 늘어날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이상형은 만나기가 어려웠다는 것도.

이쯤 되니 역시 포기하는 것이 속 편할 인생이고 알파라면 자고로 오메가를 만나 번듯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평생 자신에게 화를 내는 법이 없던 아버지 또한 이번에는 크게 나무라며 지방으로 보내 버리기까지 했으니 지금은 납작 엎드리며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만 집중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그렇지 아버지는 돈 한 푼 안 주고 쫓아내다니.

“됐어. 내 주제에 뭔 연애야, 연애는.”

그냥 평범하게 살자는 결론을 도출해 내고 기운이 쭉 빠져 버린 하민이 빈틈없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밀려오는 쓴 감정. 무료함. 우울함을 이기고자 몇 번이나 뒹굴다가 끝내는 몸을 완전히 뒤집어 엎드린 채로 더운 숨을 훅훅 뱉어 냈다.

“으윽… 쪄 죽겠어어-”

이놈의 집구석은 정말이지 더워서 살 수가 없다. 그나마 챙겨 온 얼음 냉장고의 힘을 빌릴 심산으로 하민이 비적비적 몸을 일으켰다.

냉장고에 가서 얼음부터 한가득 뽑아 튀지 않도록 투명한 비닐봉지에 옮겨 담아 새어 나가지 않게 단단히 밀봉했다. 차가운 냉기가 손끝에 스미자 하민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급조된 얼음팩을 들고 선풍기 앞에 다가가 앉았다. 선풍기는 강풍으로 맞춰 두고 차례차례 얼굴, 어깨, 가슴, 배를 얼음팩으로 살뜰하게 문질러서 몸에 찬 온도를 내리려 했다. 찬 기운이 피부에 고루고루 머물자 그나마 좀 살 것 같아 열기로 붉어진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바로 그때였다.

쿵쿵.

쿵쿵쿵.

“어, 뭐야?”

무섭게도 천장에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윤하민이 이 빌라로 이사한 지 고작 하루째가 된 날이었다.

편하게 지내야 할 공간에 난데없이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굉음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쿵쿵 울려 대기 시작한 소리는 짧으면 5분, 길면 10분가량 이어졌는데 윗집에서 공사라도 하는가 싶었지만 짐을 옮겼을 당시를 떠올리면 그것도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 두려움도 두려움이었지만 의아함이 더 앞섰다.

우와. 이게 말로만 듣던 층간 소음인가…?

하민은 느릿하게 반쯤 녹아 버린 얼음팩을 몸에 문지르며 천장을 불안한 듯이 힐끔거렸다.

아. 쿵쿵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뭐야.”

소리는 그쳐서 다행이었으나 당장에라도 천장이 다 무너져 내리는 줄로만 알았다. 커다란 망치로 연신 쿵쿵 바닥을 내리치는 소리에 기겁하며 벌렁대는 심장을 움켜쥐기까지. 난생처음 겪는 일에 하민은 기가 질렸다.

세상사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때아닌 날벼락도 이내 사라지고 시간이 좀 지나자 윤택한 안정이 찾아왔다. 어렴풋이 시계를 살피니 밤 9시가 좀 넘은 시각이다. 이따금씩 쿵쿵대는 소리에 온 신경을 다 쏟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부분이 하민을 코웃음 치게 했다.

별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었구나.

그냥 괜한 기우이겠거니 하며 이사한 첫날은 그렇게 흘렀다.

이사한 지 둘째 날. 윤하민이 뉘엿뉘엿 눈곱을 떼고 일어나 기지개를 켰을 때였다.

쿵쿵쿵!

쿵쿵!

“깜짝이야!”

어제 들렸던 그 끔찍한 소리가 또 천장에서 울려온 것이다. 온 신경을 다 긁어 놔서 어제 하루 내내 기분을 잡치게 만든 바로 그 원흉이 또다시 컨디션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하민은 일단 참기로 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넘길 심산이었다.

“오. 멈췄어.”

예상대로 쿵쿵 소리는 또 들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괜한 기우였어. 뒤늦은 안도감을 만끽하게 되자 긴장했던 근육이 풀렸는지 찢어지게 하품이 나왔다. 이때다 싶어 하민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비틀고 아침 기상에 억눌린 페로몬을 느긋하게 풀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하민은 조금 늦은, 혹은 조금 이른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챙길 심산으로 좁아 빠진 부엌으로 걸어갔다. 주변도 익힐 겸 짐을 풀고 난 후로 걷다가 발견한 집 앞 편의점에서 산 음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살면서 편의점이란 걸 접해 본 적이 없었기에 하민에게는 그저 신세계였다. 신이 나서 이것저것 담으려다가 다 먹지 못할 것 같아서 가장 궁금했던 음식 두 가지만 사 왔다. 작은 컵라면 하나와 샌드위치였다.

하민은 이것들을 아침밥 대용으로 먹을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집에서 아주머니께서 종종 만들어 주셨던 샌드위치와 비교하기엔 빈약해 보였지만, 무화과 잼을 넣었다니 맛있을 것 같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잼 종류 중 한 가지가 무화과 잼이었으니까.

접해 보지 못한 포장지를 어설프게 뜯어 나가며 하민은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이윽고 포장이 다 뜯기고 샌드위치가 뽀얗게 모습을 드러내자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우물댔다. 하지만 몇 번 씹던 입이 하관절 운동을 더는 지속하지 않게 되었다. 예상했던 맛과는 전혀 다른 맛이 미각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처음 맛보는 것에 한껏 기대했건만 한입 먹어 보니 생각했던 맛이 아니었다.

맛없어. 금세 어여쁜 미간이 구겨졌다.

“으음…… 사람들은 이런 게 좋나?”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꾸역꾸역 입에 넣으며 포만감을 느끼고픈 수준은 아니었다. 배도 고팠고, 몇 번 더 인심 쓰는 척 샌드위치를 베어 물다가 결국 패대기치듯 샌드위치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몇 번을 먹어 본다 한들 고급스러운 입맛에 길들여진 사람에겐 전혀 맞지 않았다.

“됐고, 컵라면? 그래도 이건 냄새 하난 좋네.”

앞서 공략 대상을 바꿨다. 하민도 라면 정도는 먹어 본 적이 있었다. 전속 셰프가 일일이 반죽해서 정성스레 면을 뽑고 좋은 재료들로만 엄선해서 육수를 내는,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기억하기론 맛도 아주 좋았었다.

하민은 라면 용기에 뚜껑을 찢고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후후 불어 가며 적당하게 잘 익은 면을 입 안 가득 후루룩 넘기려고 했다.

쿵쿵쿵

쿵쿵!

쿵쿵쿵쿵!

“우윽, 뜨것!”

예견할 수 없는 굉음이 또다시 방심한 하민을 습격했다. 혀끝을 감싸는 자극적인 맛이 나쁘지 않았기에 국물까지 야무지게 털어 넣으려던 찰나, 큰 소리에 놀라서 입천장을 다 데 버렸다.

씨발. 참지 못하고 고운 입술 사이로 곱지 않은 말이 터졌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하민이 손에 든 라면을 고이 내려 둔 채 천장을 째려봤다. 올라가서 욕을 퍼붓자니 주기적으로 오래 울리는 소리가 아니었을뿐더러 참지 못하고 짜증 나서 욱할 즈음엔 어김없이 쿵쿵대던 소리가 귀신같이 뚝 끊기기 일쑤였다.

마치 험난한 생활을 예고하듯, 달갑지 않은 환영식에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와- 돌겠네. 내가 억울해서라도 기필코 돌아간다. 딱 6개월만 참자, 6개월.”

윤하민이 원한 느긋한 아침은 얼굴조차 모르는 낯선 이에게 방해받으며 허무하게 지나갔다.

다 불어 터진 라면을 하수구에 버리고 먹다 뱉어 버린 샌드위치 또한 음식물 쓰레기통에 수거했다.

오늘 하민은 어머니의 힘을 빌려 빠르게 임대한, 빌라 앞 큰길가 쪽 꽃집을 정비할 예정이었다. 깔끔한 셔츠와 검은색으로 된 슬랙스를 차려입고 머리는 가볍게 손질한 얼굴은 지나가는 사람마다 힐끔거리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아주 요물이 따로 없었다.

자고로 본인의 미모를 주 무기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사람 꼬시기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하민은 조금만 노골적으로 행동해도 상대방을 곧장 침대로 끌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외모가 수려했고 이것 또한 살아가는 데에 하나의 능력으로 작용하긴 했다. 이토록 조금만 꾸며도 빛이 나니 얼굴 천재라는 말은 다 윤하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익숙한 시선을 한몸에 받은 하민이 한창 인테리어 중인 꽃집 앞에서 멈춰 섰다. 운 좋게도 지금 막 직접 지은 꽃집 상호가 걸리는 중이었다.

앞으로 하민이 운영할 꽃집의 이름은 아망떼(amante)로 연인에게 꽃을 선물하는 의미로 지었다. 꽃은 주로 연인에게 많이 준다고 생각했던 그의 철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군다나 어머니한테 반해서 어머니가 운영하던 꽃집의 꽃을 그날 싹 다 사들였던 팔불출 아버지만 보아도 꽃이란 자고로 연인이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 꽃으로 프러포즈까지 성공했다잖아.’

아버지가 어머니께 ‘수정 씨!’ 하고 건넨 꽃을 ‘어머나 예뻐라.’ 하며 손쉽게 받아들인 두 분의 러브 스토리는 들을 때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지고지순한 사랑이 그런 것이구나, 좋게 좋게 생각하려고 해 봐도 자신의 아버지는 영 그럴 만한 타입이 아니었다는 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든 것이었다.

“그래도 금실은 좋으시니까. 그게 장땡이지 뭐. 음… 아망떼. 나쁘지 않아.”

하민은 아망떼라는 간판을 보며 입으로 웅얼웅얼 곱씹었다.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운영하는 꽃집이었으나 본인 또한 꽃은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좋아한 편이었는데 이는, 플로리스트였던 어머니 쪽 유전자를 강하게 물려받은 덕이었다.

어렸을 적 집 앞마당에 핀 민들레나 개나리만 보더라도 함박웃음을 짓던 꼬꼬마 시절 하민은, 꽃과 있을 때 가장 많은 사랑과 예쁨을 받았었다.

‘아휴~ 우리 아들 왜 이렇게 꽃같이 예뻐?’

정말이지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였다. 어여쁜 외모 때문에 오메가도 아닌데 오메가 취급을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기도 부지기수여서 늘 고초를 겪었더랬다.

다 해져 버린 비싼 브랜드 옷을 툭툭 털고 으리으리한 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우울해진 아이를 반겼던 건 정원에 만발한 탐스러운 꽃들이었다. 오색 빛깔 자태를 뽐내며 오메가 페로몬보다 더 그윽한 향을 뿜어 대는 화려한 꽃들은 어찌 보면 힘들고 그리운 날을 떠올리는 향수처럼 깊었다.

하민은 살면서 항상 꽃에게 위로받았으며 힘들 때마다 스스로 다독이며 꾹 참고 인내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하물며 그랬던 귀한 집 자식은 그 꽃을 이용해서 남에게 환심을 사는 것도 손쉽게 가능했다. 뜻하지 않은 조기 교육인 셈이었다.

아쉽게도 그게 마지막 관문에 들어서면 끝끝내 연인으로서 이어지지 않았던 게 문제였지만.

“아, 오셨습니까?”

“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계속해 주세요.”

상념을 털어 낸 하민이 꽃집에 들어서는 것과 동시에 스캔하듯 사방을 쭉 훑었다. 다른 건 다 괜찮았는데 창틀 때문에 창이 예상했던 것보다 좁아 보여 자꾸만 눈길이 갔다.

장식이 너무 많이 들어갔나? 깔끔한 창으로 고를 걸 그랬어. 별거 아닌 사소한 것에도 나름대로 사업과 수익이 관련된 일이었으니 허투루 넘길 수야 없었다.

“창은 이것보다 더 크게 내 주세요. 아니면 틀을 좀 더 좁은 거로 바꿔 주시거나. 채광이 잘 들어야지 꽃이 예뻐 보여요. 이 부분은 특별히 신경 좀 써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꼭 좀 부탁할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요목조목 따져 가며 내부 인테리어 검수를 마친 하민은 한참을 지시한 끝에 ‘수고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선 다시 집으로 향했다. 찌는 듯한 더위에 가는 길목에 있는 살면서 편의점에 들를 일이 없던 그가 이번에도 또 들러 처음 보는 아이스크림도 몇 개 사들였다. 여러 종류 중 하나는 이미 입에 쏙 문 채였다. 무화과 샌드위치보다는 훨씬 먹을 만해서 만족스러웠다. 몇백 원 하지 않는 값싼 꽈배기 아이스크림이었다.

입 안에 감도는 달달한 딸기 향에 기분이 좋아지자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얕은 페로몬이 흘렀다. 더운 날과 잘 어우르는 시원한 페퍼민트 향이 주위를 자욱하게 감쌌다.

“날씨 좋다. 기분도 좋고.”

사실 날씨는 푹푹 쪘고, 더위에 약한 하민에겐 그리 좋은 기분이 될 수는 없었다. 그치만 빌라로 가는 좁은 길을 지나갈 때마다 주위 사람들이 수근대는 형상이 꽤 마음에 들어 30도를 웃도는 기온에도 대차게 입이 찢어졌다. 대부분이 하민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는 알파와 오메가뿐이라고 해도 주목을 받는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쪽으로 관심을 받으면 행복한 법이었으니.

“저 알파 향 되게 좋다.”

“응, 근데 얼굴도 잘생기지 않았어?”

“잘생겼다기보단 예쁜 쪽인데? 맞아. 방금 저 건물에서 나온 거 같더라. 맞지?”

“그럴걸? 우리 나중에 가 볼래?”

“좋아. 앗, 야야 이쪽 쳐다본다, 조용히 해!”

그래, 이것이 윤하민이지. 아직 나 안 죽었다고.

오늘따라 그의 어깨가 유독 으쓱거렸다.

쿵쿵쿵.

쿵쿵쿵!

“와, 징하다 징해. 또야? 진짜 미친 거 아냐?”

하민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또다시 쿵쿵 울리는 소리와 맞닥뜨렸다. 평소에도 없던 편두통이 일 정도로 이가 갈렸지만 모처럼 기분 좋게 들어왔는데 이 기분을 망치긴 또 싫었다. 그냥 딱 오늘까지만 참기로 하며 하민은 땀에 찌든 몸을 씻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더니 어느새 쿵쿵대던 소리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귀신이 곡할 노릇인데도 속으로는 참으로 다행이라 중얼대었다. 딱, 한 번만 더 쿵쿵거렸으면 성난 마음에 페로몬 조절도 안 될 것 같았는데 타이밍도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렇게 윤하민의 하루는 오늘도 괴상망측하게 마무리되었다.

이사온 지 오늘로써 셋째 날.

아침 댓바람부터 쿵쿵쿵대는 저 미친 소리 때문에 끝끝내 참지 못하고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은 하민이 바짝 열이 올라 씩씩대며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갈 심산으로 옷을 갈아입다가 어느 순간 뚝 행동을 멈췄다.

“아니지? 아주 그냥 엿 됐네, 소리가 절로 나오게 해 줘?”

티셔츠 따위를 고르던 손이 멈췄다. 이후 아무렇지 않게 가장 비싼 옷들로 시선을 돌리던 하민이 이내 알다가도 모를 꽃단장을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싹 치장하고 마무리로 하얀 피부를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 검은 가죽 줄로 된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를 착용했다. 하나에 족히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브랜드 제품이었다.

대개 사람들이 돈이 귀하고 무서운 줄 아는 만큼 명품으로 치장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자에게 굽신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윗집 놈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면 거하게 치장한 자신을 보면 입을 떡 벌릴 것이다. 더 나아가선 윗집 놈이 알파나 오메가라면 기필코 페로몬 분출로 위협을 가하리라.

몸 안에서 얼기설기 난동 치는 페로몬을 가까스로 억누르다가 흉곽이 들썩일 정도로 숨을 내쉬었다. 만족스럽게 전장에 뛰어 들어갈 채비를 마친 하민이 입꼬리를 씩 올라가는가 싶더니만 이내 급격하게 표정을 굳혔다.

“윗집 새끼, 너 아주 잘 걸렸다. 오늘 그냥 제삿날로 만들어 줄게.”

명품을 두르고 찾아가면 상대방이 발밑에서 빌빌댈 거라고 생각한 하민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우성 알파의 독한 페로몬을 방어구 삼아 이중 삼중으로 둘렀으니 형질자라면 더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흡사 전장을 나가는 이순신 장군님의 마음이 이러하였을까.

마지막으로 구두까지 완벽하게 차려 신은 하민이 깃을 칼같이 세우며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며 경쾌하게 구둣발 소리를 울렸다.

긴 다리로 여유롭게 두계단씩 뛰어오르던 하민이 이내 505호에 멈춰서 노려봤다. 자신이 지내는 405호 바로 윗집인 505호가 저곳이렸다. 멎을 줄 모르는 쿵쿵대는 괴상한 소리는 미약하게나마 철로 된 현관문까지 뚫고 흘러나왔다.

낡아 빠진 복도식 빌라에 천둥과 같은 소음으로 진동이 일었는데 이건 결코 벽에 못을 박거나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미친놈. 지가 뭔 고릴라야 뭐야? 가뜩이나 낡은 빌라 다 무너지겠네. 재건축할 심산인가? 이건 순 싸우자는 거나 다름이 없잖아.

쿵쿵대는 굉음에 이에 질세라 하민이 더 크게 발을 굴러 505호 코앞까지 당도했다. 곧바로 문을 두들길까 하다가 멈칫했다. 현관문 바로 옆에서 누리끼리하게 세월에 바랜 초인종을 발견하고선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을 다독였다.

이윽코 하민이 입을 꾹 물며 초인종을 눌렀다.

찌르르르릉.

풀벌레 같은 소리가 505호 안을 가득 매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쿵쿵쿵 소리가 현관 앞까지 더 커다랗게 퍼지는 게 아니겠나? 집주인이 마중을 나오는 게 분명해 보였고, 익숙하다 못해 지긋한 소리가 하민이 서 있는 곳까지 가까워졌다.

쿵쿵쿵

쿵쿵

쿵!

일정하게 쿵쿵거리는 소리에 긴장된 하민이 입가에 고인 침을 마저 삼켰다. 설마 쿵쿵대는 걸 보면 진짜로 고릴라라도 사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저딴 소리가 날 리가 없는-

“잠시 기다리세요, 금방 나갑니다!”

두꺼운 목소리였지만 사뭇 부드러운 중저음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톤이었다.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다가 자존심이 상한 탓에 나머지는 꾹 눌러 삼켰다.

설마하니 성우는 아니겠지? 발음도 정확하고 된소리도 없는 것이 완벽 그 자체처럼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목소리가 취향이라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별 시답지 않은 아저씨나 이상한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던 예상과는 달리, 목소리가 자못 세련된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긴장되게 만들었다.

철컥, 삐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에 하민은 한층 더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턱을 치켜들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둥글고 커다란 어깨와 짧은 옆머리 인영이 어렴풋이 일렁였다.

꿀꺽. 윤하민이 침을 삼켰다. 그리고 긴장을 머금고 마주한 얼굴이 상대방을 확인한 후로 입매 끝으로 긴 호선을 그렸다.

가히 단단한 체구였다. 키는 180은 거뜬히 넘기는 것 같았고, 자신과 별로 차이가 없다고 해도 거대한 상체 때문인지 한층 더 덩치가 있어 보였다.

하민은 눈을 요리조리 굴리며 상대방을 탐색하기에 여념 없었다. 딱 봐도 알파 같은데 아무런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아서 의아했다. 긴장하고 흥분되어 몸 안에 흐르는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한 자신에게 집주인은 너무나도 태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뭐지? 분명 알파인 듯한데 실상은 알파가 아닌가. 만에 하나 이 사람이 오메가라 치더라도 미미하게 새어 나오는 내 페로몬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잖아.

의아함을 견디지 못한 하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설마…… 베탄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하민은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다. 다만, 그 말이 오로지 좋은 일에만 통용되는 말이라면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종종 했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가 사람 잡았다. 매우 기막힌 타이밍으로.

이제 다 끝났다며 자포자기한 사람에게 우연히 등장한 기회는 메말라 버린 감정을 다시금 뒤흔들어 놓는다. 신물 날 것 같은 층간 소음에 시달렸다는 악감정도 싹 다 날려 버릴 만큼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 정도였다. 그중, 가장 설렜던 건 바로 눈앞에 있는 어렸을 적 겪었던 두근거림을 몸소 체험 중이라는 점이었다.

이상형. 그래, 윗집 사람은 딱 윤하민의 이상형과 부합했다.

다른 점이라곤 그때의 베타가 가지지 못했던 미모를 지녔다는 것이었다. 앞에 있는 그는 훨씬 잘생긴 미남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쳤으면 몇 번은 힐끔 되돌아볼 정도의 미남 말이다.

겹겹이 방어막처럼 몸에 감쌌던 페로몬을 거뒀다. 상대방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으니 애써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저기, 처음 뵙는 분이신데…….”

“아.”

사람을 앞에 두고 멀뚱히 서서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난리 통인 속을 쓸었다. 심장은 몸 안에서 난동이란 난동은 다 피워 대고 있었는데도 심장의 주인은 태연한 척 구는 게 고작이라 실소 터지게 우습기도 했다.

대놓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하면 1초도 안 되어 차일 각이다. 이런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건, 무뚝뚝해 보이는 구릿빛 얼굴이 무심한 표정을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이 잘난 얼굴을 보고 저렇게 무덤덤한 사람은 살다 살다 또 처음이었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재차 들려오는 중저음에 하민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층간 소음으로 고통스러워서 찾아왔습니다, 라거나 보상해 달라고 하거나. 또는 당장이라도 싸우자! 하는 말 중에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씩씩대며 계단을 올랐던 모습과는 상반된 상황이었고 대신 엄청나게 꾸밈이 많은 얼굴로 탈바꿈한 것이 아주 그냥 여우가 따로 없었다.

“아, 놀라셨겠다. 그게, 제가 요 며칠 전 아랫집으로 이사 온 사람이거든요. 빌라 건널목 바로 앞에 꽃집 혹시 보셨어요? 그 꽃집 다음 주부터 오픈할 예정인데… 음, 그래서 이웃이 된 기념으로 인사차 들른 거거든요.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시죠? 만나서 반가워요.”

주절주절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하민을 보며 남자가 슬쩍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 네.”

눈을 한번 위로 굴린 후 미소조차 없는 입술에서 나온 말이라곤 ‘아, 네.’가 전부였다. 허탈한 감정과는 다르게 몸 안 페로몬은 원하는 걸 찾았다고 요동쳤다.

편한 나시 차림으로 문을 연 것을 보면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예쁜 자신을 보고서 시선을 피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행동도 전혀 없다.

표정만 봐도 그가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마구잡이로 들이대도 괜찮을까…? 괜찮겠지?

‘좋았어.’

가까스로 페로몬을 억누른 하민은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해 나갈 일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첫술에 배가 부를 리가 없다. 그럼 여러 번 술을 마시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시간이 조금씩 스며들수록 술독이 올라 술이 없으면 안 되게 변할 것이다. 본디 사람이란 그런 생물이었으므로.

날이 급격하게 더워져서 땡볕에 훤히 드러난 빌라 복도는 찜통이었다. 금세 목덜미와 세팅한 헤어라인 위로 땀이 흘렀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자니 이 더운 날에 아직도 에어컨은 사용할 수조차 없었고 또다시 청승맞게 얼음팩으로 몸을 문지르며 신세 한탄을 하는 것도 싫었다.

하민은 열린 문틈 사이를 빼꼼히 살폈다. 에어컨을 틀어 놨는지 찬 공기가 밖에서도 느껴졌다.

이대로 허무하게 돌아간다면 에어컨도 설치되지 않은 집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만 했다. 근처 카페로 나가자니 한참을 걸어야 했고, 짧은 시간 걷는 것조차 찜통 같은 더위를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자신의 이상형을 더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다 포기한 마당에 나타난 이웃사촌이 금쪽같은 이상형이었다. 더는 물러날 구석이 없는 하민은 평소와는 다르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랑이라는 게 이판사판으로 노력해서 얻어 내면 그만이고 까짓거 포기만 안 하면 돼.’

갑작스레 찾아온 운명을 위해 하민은 불도저처럼 밀고 나갈 것이라며 다짐했다. 사랑놀음으로 왜 목숨을 거냐고 한두 마디씩 얹는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할지언정 그대로 체념하는 것이 하민에겐 더 못나 보이는 일이었다.

해답을 얻자 더는 망설이지 않은 입이 머릿속을 지나치기도 전에 밖으로 튀어나왔다.

“저기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상형의 집에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었던 하민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최대의 목적은 이상형과 주도면밀하게 좀 더 말을 나눠 보기 위함이었다.

허나, 이 사람. 눈치가 둔한 걸까? 열심히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본다 한들 상대방은 한결같은 표정을 고수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우도윤입니다.”

“와- 이름 참 멋지시네. 저는 윤하민이라고 해요.”

“아…… 네.”

칭찬에도 대수롭지 않게 답한 얼굴은 여전히 무뚝뚝했다.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흐르고 이런 상황에 면역이 전혀 없는 하민은 일단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민은 철판을 깔며 씩 웃었다.

“와- 오늘 날씨가 무진장 덥네요. 그렇죠?”

“네, 뭐.”

씨이. 사람이 뭐 저래? 원래 성격이 저런가? 하민의 마음속에선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그게 제가 집에 에어컨 설치를 못 했거든요? 설치하려면 며칠은 걸린대요.”

“아… 네. 그렇군요.”

“…….”

말주변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보통은 이쯤 되면 알아먹어야만 했다. 내가 더우니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시원한 집에 출입시켜 달라! 혹은, 이렇게 제 발로 인사하러 찾아왔으니(실제로 인사는 아니었다.) 얼음 동동 띄운 냉수라도 주는 게 사람 된 도리가 아닐까.

‘세상이 각박해진 거야, 아니면 내가 너무한 거야?’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이 얼굴이면 못하는 게 없었건만. 학교 다닐 적엔 줄을 서서 고백을 받았고, 목이 마르다면 음료수를 가져다 바치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어깨가 뭉쳐서 아프다면 안마를 해 주려는 사람도 즐비할 정도로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었는데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걸까.

윤하민은 잘난 얼굴 덕을 보며 예쁨을 받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살아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현실에 망연자실해졌다.

이 사람. 정말 더럽게 눈치가 없잖아.

“저기요. 저 너무 더워서 그런데, 얼음물 좀 한잔 얻어 마시고 가면 안 될까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네?”

불쌍하게 눈썹을 늘어뜨리며 하민이 말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짧게 답한 도윤이 쩔뚝이며 한 발 물러섰다. 위태로운 움직임에 하민은 다시 한번 도윤의 하체를 꼼꼼히 살폈다. 오른쪽 다리에 단단한 석고 깁스가 덧대어져 있는 게 보였다.

“아.”

깨달음에 탄식이 새고 나서야 뒤늦게 의문의 꼬리를 문 답답함이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리를 다쳤구나. 그것도 이 더운 날에 단단한 석고 깁스를 착용하고 걸으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하민은 재차 불편해 보이는 걸음걸이를 살폈다.

쿵.

쿵쿵.

쿵쿵쿵.

도윤이 절뚝이며 걸을 때마다 바닥이 요란하게 울렸다.

‘와, 이거다. 이거였어.’

층간 소음의 정체를 드디어 찾았다. 다름 아닌 다리를 다친 이웃사촌의 애처로운 움직임에서 비롯된 소리였다.

도윤을 따라 들어간 집은 얼음장처럼 추워서 남의 집이 이리도 부러울 수가 없다. 집 내부 구조는 하민의 집과는 정반대였는데 창가에 붙어 있는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오른편에 부엌이 보였다. 조금만 더 걸어 나오면 현관이었고 그 왼편에는 화장실이 위치했다.

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대충 봐도 집주인이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 거창한 가구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쿵쿵.

쿵쿵쿵.

연신 바닥을 찧어 가며 걷는 도윤의 뒷모습은 매우 단단해 보였다. 키는 하민과 비슷했으나 워낙 좋은 몸집은 집 안으로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다 가리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여기에 잠시 앉아 계세요.”

부엌 옆 아일랜드 식탁 의자로 안내받은 하민이 쭈뼛쭈뼛 자리에 앉았다. 도윤이 움직일 때마다 여전히 쿵쿵대는 소리가 들렸는데 분명 몇 시간 아니, 몇십 분 전만 하더라도 저 소리가 영 거슬렸건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멀쩡하다 못해 정겹게 들렸다.

‘콩깍지가 빨리도 씌었어. 초단기간 아닌가?’

팔꿈치를 식탁에 댄 하민의 입가엔 턱을 괸 상태로 피식 웃음이 샜다. 눈은 도윤이 움직이는 족족에 머물렀다. 엉성한 움직임으로 뻘뻘거리며 돌아다니는 꼴이 보는 이를 하여금 불안해 보이게 했는데 도와줄까 하다가도 막상 나서자니 고민만 쌓였다.

“음-.”

취향인 뒷태에 시선을 떼지 못한 하민은 도윤의 쓰리 사이즈를 눈대중하고 있었다. 여지껏 만난 사람 중 가장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자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짧게 머리를 친 뒤통수가 흡사 밤톨 같았고 더한 망상의 나래를 펼쳐 보자면 사랑을 나눌 때 손으로 적당히 받쳐서 한껏 끌어안기 좋아 보였다.

맴맴거리는 매미 소리와 신나게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가 맞물려 계절이 바뀌었다는 것에 실감이 났다. 짧디짧은 올해의 봄도 다 가서 무더운 여름에 새로 닿은 인연은 행복에 취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지도 몰랐다.

조용함을 만끽하기보단 울림이 좋았던 도윤의 목소리를 또 듣고 싶었다. 이런 순간에도 하민의 입꼬리는 귀에 걸려 내려올 줄을 몰랐는데 도윤의 목소리를 떠올리자니 기쁨을 감추기가 어려웠던 탓이었다.

큼큼 목을 가볍게 가다듬은 하민이 넌지시 말했다.

“실례지만, 도윤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달그락거리며 손님에게 내어 줄 음료를 준비하는 손길이 멈췄다. 갑자기 받게 된 질문에 머뭇거리다가 반쯤 돌아본 45도 각도의 옆모습이 힐끔 질문을 한 사람을 살폈는데, 그 모습마저 가히 예술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상당한 미남이었다.

“스물아홉입니다.”

“어? 저보다 형이시네요.”

“그렇군요.”

“네.”

명쾌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도윤의 고개가 끝까지 돌아봤다. 무덤덤한 눈동자에 하민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고 살짝 도윤의 동공이 떨리는 듯이 보였다. 하민을 본 후로 처음으로 당황함을 비춘 것이었다.

답을 한 상대방의 모습이 예뻐도 너무 예뻤던 것도 영향이 있진 않을까.

‘그랬으면 처음부터 단번에 알아봐야 하는데… 많이 둔한가?’

아무렴 어때. 지금이라도 알아봐 줬으면 됐다.

눈꼬리를 예쁘게 휜 채로 불그스름한 입술을 떼는 얼굴을 도윤은 한시도 눈에서 떼어 내지 못했다. 윤하민의 얼굴이 신경 쓰였던 건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이 확고해졌다.

“저는 스물여섯이요. 제가 동생이니까 말 편히 하셔도 괜찮은데……. 저희 이것도 인연이잖아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형.”

“…….”

‘형’이라는 호칭에 도윤은 쟁반을 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쟁반 위에 놓인 두 개의 컵이 파르르 떨렸다.

형이라는 그 한마디가 돌보다도 단단한 무감의 감정을 일깨운 듯했다. 달그락대며 컵이 쟁반에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부서지는 가운데 침착함을 잃어버린 도윤은 더듬대며 말을 채 못 잇다가 입을 꾹 다물어 모든 걸 숨겼다. 익숙지 않은 사람과 살갑게 말을 섞고 무언가를 내보이기란 감정 표현이 서툰 사람에겐 여간 어렵고 버거운 일거리였다.

우도윤은 예전부터 그랬다. 무뚝뚝해서 말주변도 없고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시절을 오래 겪었다. 그냥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내치지도 않고 잡지도 않아서 그의 옛 별명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그걸 당연하게 물 흐르듯 지내는 세월이 길어지다 보면 원랜 빠릿했던 사람도 어리숙하게 변해 버리기 마련인데 그게 당사자가 고치고 싶다고 해도 쉬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설마 형이라는 호칭 별로예요?”

“아뇨. 괜찮아요.”

도윤은 절뚝거리며 바로 코앞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까지 기어가듯이 발을 질질 끌었다. 바닥을 쿵쿵 내리찍어 가며 걷는 것도 슬슬 버거워서 깁스를 덧댄 다리 사이에 조금씩 땀이 차올랐다. 에어컨은 빵빵하게 켜도 긴장과 아픔으로 흐르는 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최대한 팔을 뻗으며 식탁에 쟁반을 놓으려 하자, 위태로워 보였는지 재빨리 하민이 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제야 다그락거리던 마찰 소리가 부서지며 사라졌다.

“와, 색깔 진짜 예쁘다. 이거, 과일 홍차를 탄산수에 탄 거죠? 냉침인가, 뭔가 하는 거.”

“네.”

“저 이거 말로만 들었지 마셔 보는 건 처음인데 맛있어요? 형이 타 준 거니까 뭐든 맛있게 먹겠지만요.”

“꽤 마실 만합니다.”

“역시 그렇죠? 잘 마실게요. 형, 고마워요.”

도윤은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만 단정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소리였지만 그는 잘생긴 사람만 보면 눈을 어디에다가 두어야 할지 늘 갈팡질팡 헤매기 바빴다. 이게 좋다 싫다를 떠나서 그냥 부담스럽고 대하기가 껄끄러웠던 부분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형질이 오메가인 친동생만 보더라도 곱상한 외모를 가졌는데, 도윤은 그런 동생과도 종종 눈이 딱 마주칠 때면 시선을 멀리 흘기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동생은 배려한답시고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아 내기 바빴다. 고친다고 노력해도 나아지는 법도 없거니와 동생도 뭐 어떠냐며 넘어가서 그 후로는 고칠 생각도 버린 지 오래됐다.

그런데 동생보다 더한 사람이 앞에 나타나니 증세가 더…….

‘됐어.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러고 보니 연락 안 해 본 지도 좀 됐네. 재윤이는 잘 지내고 있나.’

몇 개월간 만나지 못한 동생을 떠올리자 급격한 침울함이 들어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지탱할 곳을 찾으려고 두리번대다가 바로 앞엔 하민과 눈이 마주치자 앉지도 그렇다고 서지도 않고 어정쩡하게 무릎을 구부려 선 도윤이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하민은 이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말할 기회를 엿보던 끝에 땀에 젖어 젖꼭지가 얼핏 도드라져 보이는 도윤의 가슴팍에 시선을 고정하며 감상평을 읊었다.

“근데 도윤 형 몸 무진장 좋다. 혹시 뭐 운동이라도 해요? 아니면 하시는 일이 운동이랑 연관되었다거나. 엄청 멋지다.”

“아. 전…….”

도윤이 입을 재차 다물자 하민은 더 말을 잇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 땅이 꺼지도록 아쉬운 감정을 쉽사리 내비쳤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 감돌았다. 시원하게 뿜어 대는 에어컨 바람 소리만 윙윙거리며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 주었다.

무뚝뚝한 도윤과는 달리 하민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선뜻 말을 잘 붙이는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다. 이 기나긴 정적을 깨부숴 버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윤하민밖에 없었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뻘한 공기마저도 불사를 의지가 충만했으니까.

생각에 잠긴 하민은 턱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덩치만 컸지 숙맥인가. 여태 봐 왔던 덩치 큰 사람들과는 또 다른 성격 때문인지 오기가 들어 억눌린 연애 세포가 스르륵 기어 올라왔다. 페로몬을 흘려도 맡지 못하는 상대방 때문에 흥분하여 새어 나오는 향을 억누르는 데 구태여 힘을 빼지 않아도 되는 건 좋은 징조였다.

그가 만나 왔던 대부분 덩치 큰 사람들은 붙임성도 좋았고 말도 많았다. 겪었던 상황과는 다르다는 것이 그린라이트 신호가 아닐까?

칼칼한 목을 가다듬던 하민은 멀겋게 웃으며 긴 정적을 깨부쉈다.

“아까 대충 말했지만 다음 주쯤? 저 앞에 새로 꽃집 하나 오픈하거든요. 제가 운영하는 곳이라 언제든지 오셔도 환영인데, 시간 되시면 형이 꼭 놀러 와 주셨으면 좋겠거든요. 음…… 역시 안 되실까요?”

말을 멈추던 시선이 깁스로 감긴 다리로 꽂혔다.

“다리 때문에 바로 오긴 불편하겠네요. 안 그래도 집에 쿵쿵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뭔 일 났나 했거든요.”

“잠시만요, 설마 그것 때문에?”

“네, 뭐.”

일부러 눈을 부드럽게 휜 하민이 멋쩍어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마음에 둔 상대방이 미안하다며 원하는 바를 좀 들어주지 않을까 헛된 희망을 품으면서도 속으로는 오만 가지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이상형과 부합하는 상대의 잣대를 재보려고 해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 때문에 겉으로는 침착하게 눈웃음을 치며 별도리 없이 지고지순하게 굴 수밖에 없는 현실이 하민의 입장으로선 답답했다.

“다리는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하필 더운 날에 땀 차겠네. 힘드시겠다.”

“그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아… 사정.”

더 뭔가 이으려고 하면 할 말만 하고 싹둑 이음새를 잘라 버리는 것이 썩은 동아줄을 타고 오르다가 곤두박질처지는 기분을 초 단위로 만끽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옛말이 지금 상황과 적당히 부합하는 속담이라고 여길 정도로.

‘이러면 오기만 생기잖아.’

하민은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둔감해 보이는 저 사람을 한 번쯤 꼭 넘어뜨리겠다는 목표로 점찍으며 앞으로 할 일을 촘촘히 구상하고 떠올렸다.

일단은 친하게 지내야지. 그러면서 점점 접근하다가 경계선이 허물어질 찰나가 되면 바로 한 번에 중심점을 무너트리면 된다. 매우 단순한 방식이어도 이 점이 가장 효과적이고, 손쉬울 것 같으니. 조만간 꽃가게를 오픈하고 나면 하루에 한 송이씩 꽃까지 가져다 바치면 이 계획이 좀 더 완벽해질 수도 있다.

두뇌 회전을 빠르게 마친 하민은 일단 웃으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전 형이 정말 마음에 들거든요. 우리 친하게 지낼래요? 저 성격 엄청 좋아요. 다들 저보고 친구 삼기 딱 좋다더라고요. 친구 말고도 다른 것도 괜찮고.”

하민이 의미 가득한 끝말까지 흘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한번 꽂히면 무조건 지르고 보는 성미라서 계획이 수포가 되지 않게 행동거지 하나부터 세세하게 신경을 써야만 했다.

하민은 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느긋하게 꼬아 각선미를 뽐냈다. 우직한 바위를 깨트릴 회심의 첫 단추는 이미 채워졌다. 스물여섯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지만, 원하는 사랑을 얻기 위해선 나이는 그다지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이 지역은 처음 와 봤어요. 친구도 하나도 없어서 온 지 며칠 안 됐는데도 벌써 쓸쓸하더라고요.”

“아, 네.”

우물쭈물 답한 도윤은 이 상황이 머쓱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처음 보는 사람이 살갑게 굴다 못해 저돌적으로 다가오니 저런 스타일은 쥐약일뿐더러 살면서 딱히 엮여 본 적도 없는 부류였다.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걸 왜 말하는 걸까. 도대체 자신의 무얼 보고? 아무런 형질도 타고나지 않은 사람과 누가 봐도 우월한 형질로 보이는 사람은 엮이려야 엮일 수가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살면서 한번은 운 좋게 알파와 엮여 봤지만 뼈아픈 기억만이 남았고, 결국엔 이득이 되거나 호감을 가지고 연을 계속 이어 가기에도 버거운 마지막만이 존재했다.

형질자와 아닌 자 사이에서는 서로가 원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건 친구도 연인도 일맥상통하게 들어맞았다. 오메가나 알파나 형질자라는 존재 자체가 도윤에게 있어선 끝이 늘 안 좋았다. 이별이라는 씁쓸함만 남았었으니까.

당연한 소리겠지만 도윤은 하민이 형질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만약 그가 형질자라 치더라도 알파가 아닌 오메가로 보였고 그래선지 제 친동생이나 고등학교 때 함께 합을 맞췄다가 오메가로 발현한 바람에 자취를 감춘 후배 녀석이 떠올랐다.

최근에는 친한 친구가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오메가로 발현한 전적도 있었다. 자신이 다리를 다쳐 이러고 있는 주된 이유 중 하나였다.

좋다. 잘 봐 줘서 알파라고 치자. 그래도 껄끄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운동부 시절 자신의 주전 자리를 알파라는 이유만으로 빼앗아 간 놈이 떠올랐고, 한 부모 가정이라 신경이 쓰여 잘 대해 줬던 옛 알파 연인이 특별한 설명 없이 차고 도망갔던 일도 떠올랐다.

형질자는 베타인 도윤에겐 매번 불편한 존재였다.

매우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고. 힘겹고. 바라만 보기에도 불안한 존재.

도윤의 시선이 하민에게로 향했다. 세상 편하게 웃는 미소가 곱게 자란 사람처럼 보였다. 하민은 베타였던 자신보다 밝아 보였다. 그럼 그는 형질자가 아닌 걸까? 그게 아니라면 오메가라도 곱게만 자라 온 걸까? 전혀 알파 같지 않아 보여. 역시 알파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심란한 베타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하민이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뜻인 줄은 알지만, 일부러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자 한술 더 떠서 뻗은 손을 빨리 잡아 달라며 투정을 부리듯이 팔을 휘적거렸다.

“형,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 잘 지내보면 안 돼요? 저 손 좀 잡아 줘요. 네?”

“…….”

잡을까 말까 고민하던 끝에 하는 수 없이 내민 손을 잡았다. 생각보다 맞잡은 손은 컸고 뜨거웠기에 체온에 취한 기분이 들었다. 고민만 하고 끄집어내지 못한 내면의 흠이 허물어졌다. 방어적인 태세를 취한 마음이 지금이라면 다 끄집어내도 괜찮을 것 같은 안정이 밀려온 것이다.

도윤은 마주 잡은 손을 놓고선 잘 지내자는 부탁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해 주었다.

“제가 사람들과 잘 지내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아- 낯가리는 편이에요?”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낯을 가린다기보단 불편했다. 만약 그랬다면 그를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무뚝뚝한 성격 탓에 은연중 상처받는 사람도 많았으니 늘 적정선을 유지하며 지내 줬으면 했다.

적당한 관계가 서로 맺고 끊기도 좋았으니까.

“그냥 말을 바로 놓기는 좀 어려운데…….”

빼거나 꾸미지 않은 솔직한 대답 때문인지 하민은 뜻밖에 웃음을 터트렸다. 실은 씁쓸하고 아쉬워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고 여과 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이를 보기만 하던 도윤이 한숨을 푹 쉬다가 어설프게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죠. 존댓말이 편해서 안 될 수도 있어요. 크게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래요, 그럼.”

노력이라는 말로 곱게 포장한 거리감 유지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희망 고문에 가까운 말을 해도 내어 준 음료만 평안히 마시는 상대방의 유들유들한 웃음에 도윤은 오히려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다쳐서 불편한 다리 사이로 땀인지 물인지 모를 무언가가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덥다. 샤워하려던 타이밍에 하민이 들이닥쳤고 여태 씻지도 못한 몸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올라올까 봐 다가서기조차 꺼려졌다.

도윤은 둘 사이에 최대한 거리를 둔 채로 말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바로 이런 말 하긴 죄송한데요, 날이 더워서 제가 지금 씻어야 할 것 같은데 그만 이쯤에서….”

“형, 그럼 씻고 오세요.”

“……계속 계시려고요?”

“어? 안 돼요? 아무래도 불편한가…….”

하민의 말에는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지만 표정은 그러지 못했다. 불쌍하리만치 옅게 산이 있는 눈썹을 축 늘어뜨린 모습이 이대로 쫓아냈다가는 대역죄인이 될 것만 같았다.

도윤은 쫓아내려고 했던 좀 전 행동을 아주 약간 후회했다. 이에 쐐기를 박아 맞다, 불편하다 나가라고 하기에는 말주변이 없는 성격으로는 무리수였다.

“저도 염치없는 거 알아요. 근데, 주신 음료도 많이 남았고 몇 시간만 더 신세 좀 지고 싶은데…… 안 될까요? 저 지금 집에 돌아가면 에어컨도 없어서 정말 덥거든요. 진짜로 부탁 좀 할게요, 형. 저… 정말 안 될까요? 제발요.”

“아,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요, 그럼. 아시겠지만 제가 다리가 불편해서 씻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다녀오세요! 정 심심하면 저는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으면…… 어, 맞다. 근데 텔레비전 보는 건 괜찮죠?”

“그 정돈 괜찮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와… 저 지금 좀 감동한 거 알아요? 형 정말 너무 좋다.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전 역시 형이 마음에 들어요. 형도 그랬으면 좋겠다.”

“…….”

눈꼬리를 예쁘게 휘어 웃는 얼굴에 도윤은 대답은 하지 않고 등을 졌다. 처음 보는 사람을 두고 씻으러 들어가려니 이래도 되는가 싶었지만 더위에 흘린 땀 냄새의 찝찝함을 벗고 싶었고 이를 제거하는 방법은 씻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도윤은 화장실에 딸린 욕실 문 앞까지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평소엔 혼자였으니 들어가기에 앞서 옷을 다 벗고 들어가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단순 상의만 벗어 문 앞에 놓아둔 라탄 바구니에 휙 던져 넣었다.

탁.

욕실 문이 닫혔다. 하민은 이 모든 광경을 보지 않으려고 애쓰듯 꾸며 행동했어도 사실은 도윤이 화장실 앞으로 걸어가는 순간부터 웃통을 벗어 던지는 마지막 장면까지 힐끔거리며 염탐하던 중이었다. 하민이 더는 단단한 상체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에 느릿느릿 양손으로 입을 가려 숨을 골랐다.

“후…… 이거 미치겠네.”

더위 때문인지 아쉬운 감정 때문인지 모를 후끈한 열기에 빠져 하민의 귀 끝은 어느새 빨갛게 물들었다. 러트 시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감추지 못한 나머지 미세한 양의 페로몬이 도윤의 집에 얕게 깔렸다.

진즉 해답은 나와 있었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어쩐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귀 끝부터 심장 안쪽까지 붉어져 흥분한 페로몬이 불규칙하게 뒤섞였다. 이는 페로몬을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컨트롤할 줄 아는 우성 알파에게 있어선 매우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건 모두 다 저 사람 때문이다. 저 사람 때문.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는 상황에 따라 사람을 설레게도 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 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샤워하는 소리를 듣는 건 시원하다는 단순한 생각 대신 뜨거운 페로몬만 생성하는 동기가 되었다. 여태 연애에 굶주린 알파에겐 화끈 일어나는 페로몬을 더 거칠고 극악으로 밀어 넣는 동기.

하민은 양팔을 엑스 자로 꼬아 어깨를 꽉 부여잡고 띄엄띄엄 숨을 골랐다. 몇 분 동안 조용히 숨을 죽이다가 홍채 색이 노랗게 변하다가 원래의 색을 되찾을 무렵이 되어서야 웅크린 새우등을 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붉게 오른 귀 끝에 열이 빠졌다.

낯선 집에 바닥을 근처로 일렁였던 페로몬 또한 걷혔다. 흥분하면 할수록 향이 고약하게 짙어지는 건 실로 오래간만이었는데, 여름을 나타내는 푸릇한 하민의 페로몬은 상쾌한 종류였기에 페로몬 주인에게도 종종 답답했던 머릿속을 뻥 뚫리게 해 주었다.

진정도 됐으니 집주인이 나오기 전에 홀로 심심함을 달래 볼 심산으로 몸을 일으켰다.

제일 먼저 하민은 넓게 난 창 앞을 반쯤 가리는 오크색의 낡은 장식장에 시선을 두었다. 그 안에는 크리스털과 황금빛, 또는 은색으로 물든 트로피들이 정갈하게 줄지어 진열되어 있었다. 트로피에 새겨진 문구들을 살피니 음각으로 깊게 파인 글자는 <세계청소년야구 선수권>, 그 위론 <우승> 단어에만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밖에도 <올해의 포수상>과 <올스타 수비상> 등등 상당한 수상 경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야구 선수였어?”

하물며 포지션은 포수. 마운드에서 가장 거친 몸싸움이 끊이질 않는 홈을 든든하게 버티며 지키고 선 포지션이라니 도윤의 몸집과 인상을 떠올리자면 그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고 적합한 자리였다. 묵직하게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중심을 잡고 좋은 목소리로 크게 소리치는 모습을 떠올리자 황홀하다 못해 전율이 일었다.

“그래서 막 헐벗고 다녔구나.”

운동선수들은 다 같이 벗고 샤워도 하고 합숙도 한다고 했으니 얇은 티셔츠에 가벼운 옷차림이었던 그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운동선수들은 끝나고 나선 다 같이 샤워도 하고 그런다던데. 이 사람도 그랬겠지? 아. 몸 본 사람들 진심 부럽다.”

입맛을 다시던 하민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경찰 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눈에 밟혔다.

뭐지? 야구 선수가 아니야…?

야구 선수였다가 경찰이었다가. 집주인의 정체를 파고들려던 행동에 사소한 오류가 생겼다.

“제복도 잘 어울려.”

하민은 여태 핏에 홀려서 경찰 제복을 입은 사진을 손끝으로 쓸던 걸 멈췄다.

“좋아. 직접 물어봐야겠다.”

뭐 어때? 어차피 친해지면 직업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많아질 순간이 올 건데. 급발진해서 무작정 치고 들어온 집을 이 이상 휘젓고 돌아다녀 봤자 이미지도 마이너스가 될 테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가장 적당할 것이다.

호기심을 쉽게 포기한 하민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텔레비전이 보였다. 그래, 차라리 이쪽으로 흥미를 돌리는 편이 나았다.

하얀색 리모컨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동안 요즘 텔레비전에서 무슨 프로가 재미있더라? 하며 눈이 굴려졌다. 6월이 가고 7월이 오는 시기였으니 이맘때 전 세계 축제인 하계 올림픽에 대한 정보로 시끌시끌했던 걸 떠올렸다.

이번에는 어느 나라였더라. 바로 옆 동네였던 것 같은데.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하민이라고 해도 전 세계적으로 축제처럼 즐기는 올림픽은 모를 리가 없었다. 가장 재미있고 흥미로워하는 종목은 수영 혹은 배구. 그리고 유도 같은 종목이었는데 이유는 별거 없이 종종 시선이 머물다 보면 해당 종목에다 몇 번 더 선수들을 눈여겨보기 쉬웠던 탓이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에서 경기를 중계하는 날이면 엉덩이를 방구석에 붙이고 앉아 집중해서 관람하는 날이 늘었다.

자신이 유독 좋아하고 챙겨 봤던 종목들을 떠올리다가 하민은 다시금 오크색 장식장에 각 맞춰 진열된 트로피들을 돌아봤다.

아. 누구 덕분에 어쩌면 야구도 챙겨 볼지도.

도윤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결국 텔레비전을 켜니, 예상대로 올림픽에 대한 소식을 전하며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나운서가 한껏 상기된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자막으로는 올림픽 마지막 티켓을 딴 종목들을 깔끔한 굴림체로 나열됐는데, 그중 대한민국 야구팀도 올해 올림픽 예선에서 열두 개의 팀에게만 주어지는 티켓을 손에 거머쥐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정말 여름이구나. 한껏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너나 할 것 없이 피서를 떠나고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는 무더운 여름. 그러고 보니 강원도 근처에는 동해가 위치했고, 유명한 해수욕장도 있었던 걸 기억해 낸 하민은 연신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면서도 입으로는 ‘흐응-’ 하는 가벼운 울림을 내뱉었다. 햇빛은 싫지만, 그래도 바다는 좋았으니 태풍이 오기 전에 해수욕은 즐기고 싶었다.

-올해도 올림픽으로 향하는 예선 티켓 전쟁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속속들이 좋은 소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4년 동안 피땀 흘려 준비한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의 금빛 메달 행진이 벌써부터 기대되는데요, 그중 단연 각광을 받는 종목으로써 양궁과 태권도. 그리고 올해는 여자 배구와 야구도 꽤 많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우리나라 야구 대표팀은….

“야구가 그렇게 재밌나.”

우리나라에서 야구의 인기는 실로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정규 시즌마다 빠지지 않고 이슈로 떠올랐다. 각 구단 선수들이 입는 유니폼과 똑같은 옷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야구장으로 향하는 행렬을 하민도 익히 보아서 알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행복하고 설렘 가득한 표정을 짓고 서서 야구 모자와 작은 응원 풍선을 들고 있는 모습은 볼 때마다 뭐가 저리 좋을까 싶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 사이에 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대로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야구장 데이트는 한 번쯤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여태 운명과도 같은 깊은 연애를 해 본 적 없던 하민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데이트라고 해 봤자 고작 레스토랑에서 밥 한 끼 먹거나 클럽에서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는 게 다였고, 그마저도 마음에 든다 치면 노골적으로 하민의 우성 알파 형질 때문에 달려드는 경우가 뻔히 보였다.

그 속에서 급격한 무료함과 실증이 연애를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페로몬을 흘리며 유혹하는 형질자들은 우성이라 누구보다도 민감했던 하민에게는 곤혹이 아닐 수가 없다. 수차례 달아나고 또 달아나다가 결국 짝이고 뭐고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지낸 세월이 상당수일 정도로의 곤혹.

윤하민은 지난날의 삶을 떠올리며 멍하니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뜨거운 여름이 될 것이고 그 뜨거움이 설레는 연애와 맞물리길 간절히 바랐다.

텔레비전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문 열리는 소리에 하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 씻었어요?”

“네.”

대답 후 가볍게 한숨을 지은 도윤의 모습이 제일 먼저 보였다. 속살이 다 비치는 얇은 반팔티와 고무줄로 된 트레이닝 반바지만 제대로 챙겨 입었을 뿐, 상체는 물기가 흐르는 채로 내버려 둔 모습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던 하민의 페로몬을 날뛰게 만들었다. 기껏 억눌러 뒀는데 다 소용없게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페로몬의 제어 시스템은 오류투성이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저 사람이 취향이라 하더라도 명실상부 우성 알파 집안에서도 페로몬 제어는 착실히 해냈던 하민이 여지껏 만났던 사람들 중, 집착처럼 도윤에게만 반응하는 페로몬은 이상할 정도였다.

혈액을 전신으로 뿜는 쿵쿵대는 심장을 움켜쥐며 단순히 숨 고르는 행위만 지속하고. 이후 상체를 움츠리며 새어 나가는 페로몬을 응축하듯 잡아채는 집중력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도윤과 대화를 매끄럽게 이끌어 내려니 더없이 버거웠다. 흡사 몸이 고장 난 것처럼 그랬다.

‘역시 운동선수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훌렁훌렁…….’

에어컨 덕분에 냉기가 감도는 몸 위로 얇게 페로몬이 둘렸다. 남을 홀리려는 형태가 아닌, 그저 자신을 보호하는 목적으로 두른 페로몬 방어 행위였다.

“기다리시느라 지겨우셨죠.”

“아뇨, 괜찮았어요. 텔레비전에서 올림픽 어쩌고 하길래 그거 보느라고. 맞다, 형도 운동 좋아하세요?”

떠보듯 말한 내용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기보단 그저 하나라도 더 정보를 습득한다면 이득이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리고 굳이 답을 해 주지 않아도 능청맞게 그렇구나, 하며 넘어갈 재간으로 툭 던진 말이었기에 딱히 답을 받는다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도윤의 낯빛에서 씁쓸하게 변하는 감정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네. 좋아합니다.”

“그래요? 좋아하시는구나. 형이랑 잘 어울려요.”

역시 그는 운동선수가 맞는 것 같다. 담담한 대답에 하민의 마음이 미치도록 설렜다. 밑도 끝도 없이 치고 들어온 낯선 집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집주인이 처음 내보인 담백한 긍정의 의미가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설렌 감정은 하민의 귀 끝에 붉게 색소를 입혔다.

아플 정도로 두근대는 심장을 호흡으로 누르며 입과 코를 동반한 숨을 천천히 내던 중, 따로 묻지 않았는데도 그다음 대화를 이어 가는 도윤의 행동은 기껏 억누른 호흡을 아예 멈추게 했다.

뭐지? 홀린 건가.

끊이지 않게 시선을 마주친 하민의 동공에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학교 다닐 때 야구를 했었어요.”

과거형으로 끝나 버린 한마디에 고개를 갸웃대다가 하민은 좀 더 대화를 이끌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지금은 안 하세요?”

“네. 사정이 있어서. 그러고 보니 아까 답을 못했는데 제 직업 하민 씨가 궁금해하셨죠?”

“네. 친하게 지내자고 했는데 그런 것부터 알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일단 저도 뭐 하는지 알려 드렸으니까 형 직업도 알고 싶었는데, 안 말해 주시니까… 역시 좀 제가 실례를 범했나 봐요.”

“아뇨, 괜찮습니다. 하민 씨도 말해 주셨는데 오히려 제 쪽에선 말을 안 했으니 제가 더 예의가 없었죠.”

가볍게 픽 웃은 도윤의 얼굴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오늘 처음 만난 관계였다고는 하나 예의상으로도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흘린 웃음은 애타는 마음을 더 열렬한 마음을 가지도록 몰아넣었다.

여전히 티 한 장 제대로 챙겨 입지 않은 도윤은 하민이 앉아 있는 곳을 스치듯 지나, 오크색 장식장으로 발길을 멈췄다. 장식장 유리로 손을 뻗자, 둥글고 큰 어깨에 아슬아슬 걸쳐 둔 흰 수건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두꺼운 손가락으로 세세하게 장식장 안에 진열된 트로피 행렬을 손가락으로 더듬던 행동이 멈추니 하민은 긴장되어 입 안에 모인 침을 꼴깍 삼켰다. 원하던 답이 들려온 건 구릿빛 피부에 맺힌 덜 닦은 물기가 다 사라질 무렵이다.

도윤이 슬며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시선이 맞닥뜨린 곳엔 여유로운 척하는 하민이 있었다.

“지금은 경찰입니다. 보시다시피 다리가 다쳐서 휴직한 상태인데.”

말을 하다 만 얼굴 위로 그늘이 짙어졌다. 탐탁지 않은 눈이 한 번 더 트로피를 훑더니 이내 돌이킬 수 없는 체념으로 바뀌었다.

“다시 복직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어서요. 말하기 좀 그랬네요.”

상대방의 기색을 읽어버린 하민은 태연한 척 굴었던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어째서 복직을 고민하는 걸까?

하민은 나름대로 고민해 보았으나 그저 웃고만 있는 도윤 앞에서 의문만 상기할 뿐, 아쉽게도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반응을 찾지 못했다.

복직이란 단어는 잘 먹고 잘 살며 일하지 않아도 돈 걱정 없을 만큼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하민에게는 잘 와닿지 않는 말 중 하나였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일 한번 해 본 적도 없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실상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혹독한 세상을 자신은 참 편하게 살아왔구나, 알아차린 건 다 친구들이 신랄하게 비판을 빙자한 비난을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줄곧 은연중 따돌림을 당했었던 하민이 겨우 사귄 친구들이라고 하면, 안타깝게도 지옥의 주둥아리들뿐이었다.

수저 잘 물고 태어나서 고생도 한 적 없다며 하민의 인생을 구구절절 술안줏거리 삼듯 심심치 않게 씹었던 놈들. 진심을 담아서 흉을 본 것은 아니었으나 종종 취한 놈 중 실언을 하는 녀석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눈치 빠른 몇몇 놈들의 기지로 어색해질 뻔한 술자리는 빠르게 무마되곤 했다.

자자, 오늘은 이쯤 파할까? 하며 손뼉을 두 번 치고 나면, 취기도 달아날 만큼 냉기가 흐르는 분위기가 된다. 그때마다 하민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피식 웃곤 했었는데 그래야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고 그 점이 더 편했던 탓이었다. 친구들의 이러한 행동들이 나쁜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민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원수 같은 친구 놈들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리고 복직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려고 애쓰던 것도 끝내 갈무리했다. 아무리 남을 위해서 고민하고 이해한다고 한들 100% 그 사람과 살아온 환경이 똑같지 않으면 그저 수박 겉핥기 수준으로 그칠 것을 알았다. 형질자로 발현한 이후론 흠잡히지 않기 위해 약삭빠르게 살았으니까.

이게 다 늦게 발현한 탓이다. 어렸을 적 알파답지 않게 살아온 환경 때문인지 하민은 눈치가 남들보다 빨랐으며 분위기에 따라 행동을 밀고 가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어렵지 않게 잘 터득할 수 있었다.

그나마 하민 곁에는 좋은 부모님이 함께였다. 괴롭힘을 받아도 부모님 곁에서 따스한 애정을 받으면서 남모르게 곪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겪었다. 본인조차 모를 정도로 마음의 상처는 결코 치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분명히 상처가 되었을 텐데도.

어쨌거나 지금은 익숙한 감대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넘기면 되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그 이후 말은 먼저 말할 소재를 꺼낸 당사자가 이끌어 주는 게 일반적이었으므로.

도윤이 서랍을 뒤적이다가 물기에 다 젖은 얇은 티셔츠가 아닌 제대로 된 티셔츠 한 장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다리를 다친 것도 복직할지 말지 고민하는 것에 일조하는 중이라서요. 하민 씨가 여기까지 찾아오신 걸 보면 층간 소음이 심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말하긴 늦었지만 하민 씨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실은 괜찮지 않다는 말이 입가에 근질근질 맴돌았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하자니 사람이 다쳐서 그런 건데 생색을 내며 사과를 바라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라면 확실히 응징하고 욕을 했겠지만, 도윤도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것은 아니었을 거라 층간 소음에 관한 일은 해프닝이라 여기며 접을 생각이었다.

하민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까지 가끔씩 울컥하는 모난 성격을 꺼내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후 어색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서 또 다른 화젯거리를 떠올렸다. 이대로 얼굴만 봐도 배부른 도윤이긴 해도 쇠뿔도 당길 때 빼라는데 굴러 들어온 기회를 그대로 내치기에는 아쉬웠다.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눠 볼까? 도윤에 대해서 처음 느꼈던 부분이나 그걸 계기로 자연스레 본인을 어필할 수 있는 방식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은데.

“형은 사귀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하민이 대범하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도윤은 여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 거 없구나…….”

하민의 입꼬리가 반듯하게 올라갔다. 심장이 쿵쿵대어 억눌러 둔 페로몬이 새어 나가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더 많은 대화를 이끌어 나가고 싶었다. 우도윤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다.

어떤 내용이 가장 행복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애인이 없는 걸 알았으니 자신과 도윤이 사귀었을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얼까 고민했다.

하민은 정신 사나운 머릿속에서 도윤에 대한 첫인상을 떠올렸다. 페로몬을 대놓고 흘려도 무덤덤했던 모습 가장 먼저 기억에 남았다.

그러면 형질자 관련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떨까…? 베타들은 형질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다 보니 그의 취향을 미리 파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저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만 질문해도 돼요?”

“네.”

“형은 베타예요?”

“…….”

베타라는 말 한마디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던 도윤의 인상이 슬로 모션 효과를 적용한 듯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 순간, 하민은 뒤이어 하려던 말을 더는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사람마다 눌려서는 안 되는 스위치가 존재했고, 하필이면 운 없게도 단 한 마디로 도윤이 가진 최악의 스위치를 건드린 것 같았다.

베타란 뭘까. 소위 사람들이 떠들어 대는 말은 알파와 오메가처럼 형질을 타고난 사람들에게 전혀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라고들 말한다.

형질자라고 해서 모두 우월한 존재는 아니었다. 형질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구성원에서 최하위로 전락하며 은연중 따돌림을 당하기도 하고, 반대로는 그 누구보다도 편안한 삶을 누리며 사람이라는 존재를 자기 입맛대로 다루는 것 또한 가능하다. 대체로 여기서 알파라는 존재는 후자로 나뉘는 편임에도 하민은 살면서 이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그저 그런 존재였다.

알파이긴 해도 발현하기 전엔 꽤 많은 고초를 겪었고, 외모만으로 오메가 취급을 받으며 그저 눈요깃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지냈다.

지금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하민의 존재도 딱 그 정도 수준에 그친 것이었다.

고작 베타냐 묻는 한 마디에 냉기가 이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지만, 조급과 욕심에 눈이 멀어 한순간에 일을 그르친 자신이 더 이해가 되지 않고 화가 났다.

그가 형질자를 차별하는 사람일 수도 있을 테니까.

고심해서 꺼낸 말 뒤에 숨어 자연스레 저는 알파예요. 하려던 말이 무산되어 버린 걸 깨닫는 시간까지는 허무하게도 짧았다. 흡사 다이어트처럼 살 빼는 건 힘든 반면 찌는 건 매우 쉬운 것처럼, 우도윤은 윤하민에게 다이어트 성공을 목전에 둔 듯이 손 닿기 어려운 존재였다.

답답하다가도 오기가 생긴다. 이 지역에 와서 도윤을 만나 단시간 내에 느낀 감정은 모조리 집어삼킬 불처럼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타올랐다.

자신의 얼굴을 적극 활용해도 넘어오지 않는 상대방 때문인지 하민은 분통함에 손을 움켜쥐었다. 턱밑까지 ‘첫눈에 반했어요.’라는 말이 차올라도 애써 감추며 태연한 척, 대수롭지 않은 척, 인형인 척, 미소만 지었다.

능청스럽게 사과부터 건네야지 하려다가 도윤의 얼굴이 무표정하다는 걸 깨닫고 그마저도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하민을 향해 느긋하지만 조금 화가 난 목소리가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나섰다. 그 말을 듣게 된 하민은 불과 몇 분 전, 아니 몇 초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다면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하게 해 주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에둘러 말한 목소리가 너무 단호해서 하민은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다. 너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겠노라 선전포고를 받은 것 같았다.

시간이 늦었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밖은 밝은 하늘과 찌는 듯한 더위로 한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하민은 떨어지지도 않는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래요,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진심이에요. 저희 또 봐요, 잘 자요 형.”

처음으로 건넨 작별 인사는 서운한 마음과 더불어 계속 보자는 의지가 동시에 담겼다. 못 먹는 감을 쳐다만 보지 않고 열 번 찍어 그 감나무를 쓰러뜨리면 그만이다.

하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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