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외전 4. 오키나와
상당히 많은 양의 음식이 차려져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의 대부분을 먹어 없앤 후였다. 서하윤은 부른 배를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한숨을 몰아쉬었다.
허기를 채우고 나니 그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실내는 열대 지방 특유의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식탁 바로 옆에 있는 전면 창 너머로 풀장이 보였다. 찰랑이는 새파란 물은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청량해졌다.
“소화 좀 시키고 나서 물에 들어갈까요?”
서하윤은 그때까지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있던 가운을 정리해 끈을 여미며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러려고 온 거니까.”
최상혁이 대꾸했다. 풀장에서 시선을 돌려 최상혁을 본 서하윤은 금세 눈을 가늘게 떴다. 남의 핸드폰은 빼앗아 간 주제에, 자신은 또 핸드폰을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일 때문임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술을 좀 부려, 말어?
잠시 고민하던 서하윤은 자신을 위해 온 이 여행을 생각해 너그러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좀 씻어야겠다.”
작게 중얼거린 서하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욕조의 수도꼭지와 마찬가지로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는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짰다.
칫솔을 입에 물고 양치를 하고 있으려니 잠시 후에 최상혁도 욕실로 들어왔다. 급한 일은 마친 모양이었다. 양치하는 모습을 본 최상혁 역시 나란히 옆에 서서 칫솔에 치약을 짜고 입에 물었다. 둘은 나란히 선 채 이빨을 닦고 세수를 했다. 어제 샤워하고 바로 누워 잠을 청한 바람에 머리가 엉망이었지만, 어차피 곧 물에 들어갈 거라 신경 쓰지 않았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욕실 밖을 향해 몸을 돌리던 찰나였다. 휙-, 어깨가 잡혀 몸이 돌아가더니 최상혁이 다짜고짜 입을 맞추었다. 혀와 혀가 얽히자 방금 이를 닦은 상큼한 치약 향이 물씬 느껴졌다. 서하윤은 막 이를 닦은 후에는 늘 그렇듯 조금 까슬까슬하게 느껴지는 혀를 적극적으로 빨고 얽으며 양팔을 최상혁의 목에 둘렀다.
가볍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모닝 키스였다. 하지만 수면욕과 식욕을 차례로 충족한 육체에 자극이 가해지니, 이번에는 성욕이 슬그머니 치밀어 올랐다. 서하윤은 키스하며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 독립된 풀 빌라 안에서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다. 먹고 자고 수영하고 쉬고 섹스하고. 할 거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뭐, 어젯밤에는 안 하고 그냥 잤으니까.’
서하윤은 금방 마음을 정하고는 최상혁의 가운 속으로 손을 슬그머니 밀어 넣었다. 단단한 가슴 근육을 쓸며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가 불룩하게 솟은 속옷 위를 더듬자니 성욕이 짜릿하니 치솟았다.
“으음… 음….”
슬슬 제대로 할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야시시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를 눈치챈 최상혁도 가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서하윤의 엉덩이를 의미심장하게 주물렀다. 둘은 혀를 깊게 얽으며 서로의 가운 끈을 풀어헤치고 드러난 몸을 쓸고 만지기 시작했다.
욕실에서 이대로 한판하게 되는 걸까, 아니면 침실로 이동해야 할까. 열심히 최상혁을 애무하며 고민하던 찰나였다.
“얼씨구?”
이곳에서는 절대 들릴 수 없는,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울렸다.
얼마나 놀랐던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서하윤은 눈을 댕그랗게 뜨며 최상혁을 확 밀어냈다.
후다닥 가운을 여미며 욕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서하윤은 기겁했다.
“주, 준서 형?!”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곳에 있을 수가 없는 하준서가 떡하니 욕실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여유로운 자태로 서 있었다. 심지어 그는 반바지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머리 위에는 선글라스를 걸친 바캉스 차림이었다!
“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최상혁이 험악하게 물었다. 평소라면 바로 말리거나 중재할 서하윤이지만 지금만은 하준서에게 똑같은 걸 묻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트로트 음악 한 자락이 흘러가고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너도 여기 있고, 하윤이도 여기 있는데. 내가 여기 못 올 이유라도 있어?”
하준서가 태평하게 물었다. 씨익 웃는 얼굴이었지만 서하윤은 알 수 있었다. 하준서는 지금 단단히 골이 난 상태였다. 한마디로 자신에게 말도 없이 잠적해 버린 두 사람에게 단단히 빡친 상태였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준서 형. 연락 없이 없어져서 많이 걱정했죠?”
서하윤은 조심스레 말하며 하준서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한 걸음 떼기도 전에 최상혁에게 손목을 잡혔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최상혁이 짜증스레 물었다. 하준서가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하나 꺼내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집 침대에 던져 놓고 온 서하윤의 핸드폰이었다.
“왜? 이거 버려 놓고 가면 내가 추적 못 할 줄 알았나 보지?”
정곡을 찔렀는지 최상혁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그걸 본 하준서가 입 꼬리를 올려 제법 비열해 뵈는 표정으로 웃었다.
“하윤이 핸드폰만 핸드폰이고, 네 핸드폰은 벽돌이냐? 하윤이 핸드폰이 추적 안 되면 네 핸드폰을 추적하면 되지.”
“새끼가 겁도 없이 내 걸 추적해?”
최상혁이 기가 막힌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하윤이 핸드폰을 버려 놓고 갔으니 네 거라도 추적해야지. 왜? 네 핸드폰은 추적하면 안 되는 성스러운 성역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하준서가 이죽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서하윤은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하준서는 어지간해서는 최상혁을 한계까지 열받게 하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느낌이었다.
“오냐오냐하니까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하준서.”
최상혁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그가 진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하준서의 표정에서도 가식적인 웃음이 사라졌다.
“첩년 흉내 좀 내 줬더니 너야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최상혁. 내가 웬만한 일이 고분고분 첩년 놀이 해 주는 건 어디까지나 우리가 하윤이를 공유한다는 전제하에서 얘기야. 그런데 나한테 허락은 불구하고 통보조차 없이 애를 들고 해외로 날라 버려? 나한테 연락 못 하게 하윤이 핸드폰까지 이렇게 남겨 놓고? 이건 네가 선을 넘은 거지. 그렇게 생각 안 해?”
“시끄럽고, 여긴 네가 있을 곳 아니니까 빨리 꺼지기나 해.”
최상혁이 잘라 말했다. 하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꺼지면? 어쩔 건데? 한 대 치기라도 할래? 여기서 한판 붙어?”
하준서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최상혁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서하윤은 속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여기서 한 사람 편을 드는 건 나머지 한 사람 얼굴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그렇다고 한껏 화가 난 두 사람에게 무조건 화해하라고 권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어쩔까. 하윤아. 나 진짜 이대로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
하준서가 이번에는 서하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지간해서는 서하윤을 곤란하게 하지 않은 하준서였다. 하지만 그도 이번만은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서하윤에게 대답을 재촉하는 눈길을 빤히 보내고 서 있었다.
하준서에게 가라고도, 가지 말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
가라고 하는 건 하준서의 뺨을 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가지 말라고 붙잡는 건 최상혁의 싸대기를 갈기는 일이었다.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만약 서하윤이 둘 중 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세 사람의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되었을 리도 없다.
“준서 형…. 상혁 씨….”
서하윤은 초조한 얼굴로 두 두 사람의 이름을 웅얼거렸다.
최상혁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만연한 서하윤을 힐끗 보았다. 서하윤은 저도 모르게 간절히 호소하는 눈으로 최상혁을 응시했다. 그리고 눈을 돌려 하준서에게도 간절한 눈길을 쏘아 보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었다.
“……. 씨발.”
최상혁이 턱에서 힘을 풀며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주먹질까지 갈 일은 없다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서하윤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최상혁의 손을 슬그머니 붙잡았다. 그리고 고맙다는 눈길로 올려 보았다.
“칫-.”
그 모습을 본 하준서가 흥이 깨졌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하준서가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도 나름대로 머리끝까지 올랐던 열을 식히는 기색이었다. 몇 번 그렇게 긴 숨을 몰아쉰 하준서가 이내 눈을 휘어 씩 웃었다. 그리고 서하윤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나 환영 안 해 줄 거야, 하윤아?”
서하윤은 최상혁을 힐끗 올려보며 잡은 손에 힘을 밀어 넣었다. 최상혁은 짜증스런 눈으로 쯧, 혀를 차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짜증 섞인 허락에 서하윤은 겨우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하준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가 벌리고 있는 팔 안으로 쏙 들어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서 와요, 준서 형. 나 갑자기 전화 안 받고 연락 안 돼서 많이 놀랬죠?”
“당연히 놀랬지. 나 없이 둘만 노는 거 재밌었나 보네. 얼굴이 반질반질한 거 보니.”
하준서가 양팔로 서하윤을 칭칭 끌어안은 채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심통을 부렸다. 서하윤은 작게 하하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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