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외전 4. 오키나와
서하윤은 남은 맥주 캔을 단번에 꿀꺽꿀꺽 삼켜 비워 버리고는 양손으로 최상혁의 목을 칭칭 감았다. 다리도 그의 허리에 감고 마치 나무늘보처럼 최상혁에게 대롱대롱 매달렸다. 물속이라 전혀 힘들지도 않았다.
“아… 이런 거 너무 좋다.”
서하윤은 좋다는 말을 또 중얼거렸다. 그냥 너무 좋아서 좋다는 말만 계속 나왔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 알았으면 시간을 좀 더 빨리 빼 볼 걸 그랬네.”
최상혁이 물속에서 서하윤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됐어요. 왔으면 됐죠, 뭐.”
서하윤은 최상혁의 단단한 어깨에 턱을 괸 채 나른히 대꾸했다. 항상 맞대는 몸이지만 이렇게 시원한 풀장 속에서 맞닿는 몸은 또 한층 색달랐다. 물에 젖은 최상혁의 단단한 근육질 몸이 전에 없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선탠을 좀 시켜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섹시한 이 몸을 햇볕에 조금만 그을려 놓으면 눈이 아찔할 정도로 섹시해지리라.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데다 어린 나이도 아닌지라 물놀이래 봐야 별 건 없었다. 그냥 이리저리 개구리 수영을 하다가 둘이 엉겨 붙어 뽀뽀나 키스, 가벼운 더듬기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배가 좀 출출해지면 선 베드에 나란히 누운 채 피자와 햄버거, 맥주와 칵테일 따위를 시켜서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천국도 이런 천국이 없었다.
적절히 찬 위장에 알딸딸한 술 기운이 더해져 선 베드에 늘어져 있던 서하윤은 문득 테이블 위를 보았다가 아차 했다. 최상혁의 핸드폰을 보자, 누군가 생각난 탓이었다.
자신의 핸드폰은 압수당한 서하윤이었다. 회사에야 최상혁이 이미 손을 써 놨겠지만, 문제는 하준서였다. 그에게는 여행을 간다는 말은커녕 아침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이리로 실려 왔다. 그러니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에게 연락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하루, 아니, 한나절만 연락이 안 되어도 걱정할 사람이다. 그런데 며칠이나 연락 두절인 채 걱정시켜야 한다니. 그 생각을 하니 뒷골이 확 당겼다.
이 일을 어쩐담….
서하윤은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동자를 슬그머니 돌려 나란히 누워 있는 최상혁을 보았다. 지금 손이 닿는 연락 수단이라고는 최상혁의 핸드폰뿐이었다. 그의 핸드폰으로 몰래 하준서에게 문자를 보내 놓고 발신 내역을 지워 버리면 감쪽같을 것이다.
선글라스 아래 눈꺼풀이 조용히 감겨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과연 햇볕을 음미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잠든 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서하윤은 숨을 조용히 몰아쉬며 고뇌했다. 연락 두절인 채로 하준서를 며칠이나 걱정시키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최상혁 몰래 그의 핸드폰으로 하준서에게 연락하는 것도 도저히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서하윤은 소리 없이 기지개를 켜며 최상혁의 동정을 살폈다. 이리저리 팔을 뻗으며 기지개를 켰음에도 최상혁의 눈꺼풀은 감긴 채였다.
정말 잠든 건가?
서하윤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숨을 한껏 죽인 채 느릿하게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손이 허공을 소리 없이 지나 막 핸드폰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안 잔다.”
최상혁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서하윤은 말없이 핸드폰으로 뻗었던 손을 조용히 거둬들였다. 그리고 선 베드에 벌렁 드러누우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몰래 핸드폰으로 하준서에게 연락을 전하는 일은 일단 물 건너갔다. 하지만 혼자 애달아할 하준서를 생각하니 마음이 못내 심란했다. 조금 전까지 천국에 있는 양 느껴지던 기분 역시 희미해져 버렸다. 한참을 선 베드에 누운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서하윤은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우리 여행간다는 말, 준서 형한테 안 했죠?”
“…….”
고민 끝에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뜻이었다. 세 사람의 오묘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고 있지만 최상혁과 하준서가 서로를 싫어하는 것은 여전했다. 아마도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사라지면 걱정할 텐데. 꼭 내가 연락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상혁 씨라도 준서 형한테 한 마디 언질만 좀 해 줘요.”
“…….”
최상혁은 대답은커녕 감은 눈도 뜨지 않았다.
“싫으면 그냥 내가 하고.”
서하윤은 퉁명스레 말하며 테이블 위에 있는 최상혁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하지만 집어 들기 무섭게 손목이 잡혔다.
“그 새끼가 걱정 조금 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걸려? 하준서가 등신도 아니고, 너랑 나랑 동시에 사라지면 당연히 같이 어디 갔으려니 하겠지. 뭘 그렇게 안달복달해?”
“그래도 걱정할 테니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연락 두절하면 미안하잖아요.”
“그런 게 싫었으면 첩 놀이는 때려치우고 진작 너랑 끝냈어야지.”
최상혁은 유감이 상당히 실린 어투로 말했다. 요즘 들어서는 하준서에 대해 크게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싶었는데, 속으로는 여전했던 모양이었다.
“한창 바쁜데 시간 뺀다고 고생했어. 근데 여기까지 와서 그 새끼한테 꼭 연락을 해야겠어?”
최상혁이 선글라스 너머로 깊은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짙은 선글라스지만 그의 강한 눈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알죠. 상혁 씨가 얼마나 바쁜지, 이번 여행 때문에 시간 빼려고 얼마나 애썼을지 내가 왜 몰라요. 다 알지. 그래도 준서 형한테 문자 딱 한 통만 보내요, 우리. 만약에 입장 바꿔서 준서 형이 나 홀랑 데리고 놀러 가 버린 데다 연락도 안 되면 얼마나 걱정되겠어요. 안 그래요?”
“걱정이 되는 게 아니라 분통이 터지겠지.”
분통이 터진다는 표현이 어쩐지 조금 우스웠다. 서하윤은 저도 모르게 가볍게 웃었다. 그러고는 선 베드에서 일어나 최상혁이 누운 선 베드에 꾸물꾸물 기어 올라갔다. 1인용인 선 베드가 부서지거나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살짝 긴장했는데, 다행히 두 사람의 체중을 잘도 견뎌 주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문자 한 통만요. 응?”
서하윤은 최상혁에게 몸을 바짝 밀착한 채 콧소리를 내며 졸랐다. 다 큰 남자가 징그럽게 이렇게 애교까지 부릴 일이냐며 속으로 약간의 현타가 왔지만, 어쨌든 목적을 달성하는 게 중요했다.
“안 돼. 돌아갈 때까지 그 새끼한테 연락하는 건 둘째 치고 그 새끼에 대해 생각도 하지 마.”
최상혁이 생각 이상으로 강경하게 나왔다. 적당히 콧소리 좀 내며 애교를 떨면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서하윤은 조금 당황해 버렸다. 속으로는 슬그머니 성질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최상혁이 평소에 하준서의 존재를 용납해 주는 것만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임을 알기에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상혁 씨 말대로 우리 둘이 동시에 사라졌으니까 같이 어디 놀러 갔으려니 짐작하겠죠.”
서하윤은 더는 미련을 떨지 않고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섰다. 최상혁이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더니 손을 올려 서하윤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나름 칭찬인 것 같았다.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서하윤은 들으란 듯 작게 투덜거리고는 최상혁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어 던진 채 다시 풀장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
아침이 되니 자동적으로 눈이 뜨였다. 핸드폰 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회사원으로서 본능적으로 눈을 뜨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졸린 눈을 끔뻑이고 있자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어제 실컷 물놀이를 한 몸은 나른하다 못해 아직도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행복해졌다. 서하윤은 잘 말라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운 침대 시트의 감촉을 마음껏 음미하며 다시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눈을 뜬 것은 인기척 때문이었다. 코가 희미하지만 맛있는 냄새를 잡아챘다. 아직도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환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언제 일어난 건지, 최상혁이 어느새 바지와 셔츠를 입고 걸어왔다.
“일어났으면 밥 먹어.”
최상혁이 침대 곁으로 다가와 크고 단단한 손으로 서하윤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밥….”
서하윤은 늘어져라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희미하게 나는 맛있는 냄새에 금세 식욕이 솟구쳤다.
“안아다 주면 안 잡아먹지.”
가운을 주워 대충 팔을 꿰어 입은 서하윤은 양팔을 최상혁을 향해 뻗었다. 평소에는 잘 부리지 않는 어리광을 본 최상혁이 피식 웃더니 서하윤을 번쩍 들어 안았다. 서하윤은 달랑달랑 들린 채 식탁이 있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넓은 식탁 위에는 서하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 맛있겠다.”
맛있겠다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서하윤은 얼른 스푼을 들어 수프를 한 수저 떠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걸쭉할 정도로 진한 수프가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수프를 연신 떠먹으며 나머지 손으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어 한입씩 왕왕 베어 물었다. 어제 물놀이를 하면서 중간중간 요기한 데다 저녁도 거나하게 먹었건만, 마치 어제 하루 굶은 것처럼 허기가 졌다.
서하윤은 연어를 듬뿍 넣은 부들부들한 오믈렛과 버터 향이 진하게 나는 빵, 진하게 내린 커피를 번갈아 가며 양껏 먹어 치웠다. 그러다 문득 정면을 보니 최상혁이 깔끔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음식을 먹어 치우는 게 보였다. 최상혁 역시 적잖이 허기가 졌던 모양이었다.
“진짜 맛있다. 그죠?”
“그러네.”
커피를 꿀꺽 삼키며 묻자, 최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윤은 샌드위치를 깨끗이 먹어 치운 최상혁의 손가락에 소스가 묻어 있는 걸 발견하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최상혁의 손을 잡아 당겨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빼내기 전에 의미심장하게 혀로 한번 휘감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탕하기는.”
최상혁은 작게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서하윤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자중하라는 뜻이었다. 서하윤도 딱히 지금 당장 엉겨 붙을 생각은 없어서,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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