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외전 3. 서하윤
“…머리…. 아… 내 머리…….”
서하윤은 몸을 콩벌레처럼 말고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웅얼거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쯧-.
머리 위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눈을 떠서 쳐다보니 최상혁이 생수병을 든 채 서 있었다.
“상혁 씨…. 나 머리가 너무 아파요.”
서하윤은 두통을 호소했다. 최상혁이 침대에 걸터앉더니 뚜껑을 딴 생수병과 하얀 알약 두 개를 건넸다.
“먹어.”
최상혁의 말에 그의 손에서 약과 생수병을 건네받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우, 나 죽을 것 같아요. 머리 아파 죽어….”
“그러게 누가 술을 그렇게 무식하게 퍼마시래?”
최상혁이 구박했다. 안 그래도 머리도 아파 죽겠는데 최상혁의 구박까지 들으니 괜히 서러웠다.
“상혁 씨랑 둘이 여행 오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거죠.”
서하윤은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와중에도 꿍얼거렸다. 최상혁이 다시 혀를 쯧, 찼다.
“그러고 보니 나 속도 너무 쓰려요.”
서하윤은 쥐어짜는 것 같은 위장을 부여잡으며 호소했다.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복지리….”
“뭐?”
“해운대에 유행한 복집이 있거든요. 거기 복지리가 엄청 시원하고 맛있는데.”
“…그럼 대충 씻고 나와. 해장하러 가게.”
“네….”
서하윤은 침대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을 보니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고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맙소사. 또 이런 꼴을 보이다니.
서하윤은 속으로 절망하며 얼른 세수와 양치를 했다. 샤워하면 정신이 좀 맑아질 것 같았지만, 그럴 정도의 힘이 없었다. 물론 뒤틀리는 속을 빨리 달래 주고 싶은 욕망이 깊기도 했다.
씻는 동안 약효가 좀 돈 모양이다. 두통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 허기는 점점 더 강해져서 눈앞에 복지리만 오락가락했다.
“빨리 가요, 우리. 나 너무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서하윤은 최상혁을 졸랐다. 다행히 최상혁은 외출할 준비를 모두 마친 채였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복집으로 향했다. 유명한 복집은 이미 손님으로 만석이었다. 그래도 안쪽에 자리가 있어 다행히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서하윤은 앉기 무섭게 복지리를 외치고는 테이블 위에 시들시들 엎드렸다.
엎드려 있으려니 최상혁이 테이블을 세팅하는 게 느껴졌다. 서하윤은 눈만 빼꼼 들어 최상혁을 보았다. 어제 분명 둘이 실컷 마신 걸 기억하고 있는데, 최상혁은 취기의 여운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상혁 씨, 주량이 대체 얼마예요?”
“몰라. 취해 본 적이 없어서.”
최상혁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서하윤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어떻게 된 게 하준서도 그렇고 최상혁도 그렇게 주량이 너무 세다. 이래서야 같이 술 마시는 재미가 없다. 상대방이 술에 취한 모습도 보이고 술주정도 좀 해 줘야 같이 어울려 마시는 재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행히 음식은 금방 나왔다. 서하윤은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으로 맑은 국물을 연신 들이켰다. 시원한 복지리를 좀 마시고 나니 속이 편안해졌다.
“크…. 역시 최고.”
서하윤이 중얼거리며 국물을 꼴깍꼴깍 삼키자 최상혁이 옅은 코웃음을 쳤다.
배를 빵빵하게 채우고 나니 이제 슬슬 정신이 좀 맑아졌다. 최상혁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후였다.
“커피. 커피 마시러 가요, 우리.”
서하윤은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걸 느끼며 말했다. 다행히 최상혁은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카페로 향했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어제 그 카페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자리가 거의 차 있어서 창가 자리에는 앉을 수 없었다. 그래도 앉을 자리가 있는 게 다행이었다.
서하윤이 따듯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최상혁이 두 잔을 모두 시켰다. 둘 다 먹으면 된다는 논리였다.
최상혁의 선택은 훌륭했다. 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입을 적셔 주고, 그 다음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속을 다스려 주니 매우 흡족했다.
“역시 상혁 씨가 최고예요.”
서하윤은 엄지를 치켜올리며 최상혁을 칭찬했다.
둘이 그렇게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려니 사람들의 시선이 적잖이 느껴졌다. 주말이라 가뜩이나 사람이 많은데, 그중에 끼어 앉아 있으니 유난히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서하윤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그냥 그렇다 치고, 최상혁에게 쏟아지는 시선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 외치고 싶은 심정이랄까.
“사람들이 상혁 씨 엄청 쳐다봐요.”
서하윤은 최상혁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어제 취한 너한테 쏟아지던 시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최상혁이 대꾸했다.
“어제요?”
서하윤은 눈을 깜빡이며 어제의 기억을 되돌렸다. 포장마차에서 엄청나게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그다음은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아, 나 필름이 끊겼구나.”
서하윤은 그제야 깨닫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최상혁에게 물었다.
“나 어제 뭐 실수했어요?”
조심스레 묻자, 최상혁이 까만 눈으로 빤히 그를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길바닥 한가운데서 나랑 자고 싶다고 떠들긴 했지.”
“…뭐라고요?”
“해운대에 있을 때 나 생각하면서 혼자 엄청 했다고도 떠들었고.”
“…헐….”
“그리고 내 어깨에 매달린 채 호텔까지 가면서 내 엉덩이도 만져 댔고.”
“…맙소사…!”
“마지막엔 내 걸 문 채로 잠들었지.”
“윽…!”
서하윤은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술주정을 아주 제대로 부린 것이다. 그것도 해운대 길바닥 한가운데서! 게다가 최상혁의 것을 문 채로 잠들다니. 이대로 수치사할 것 같았다.
“내가 못 살아.”
서하윤은 벌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제의 추태를 듣고 나니 사람들의 시선이 또 다르게 느껴졌다. 어제의 추태를 본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일 수도 있었다.
“나 좀 말리지 그랬어요.”
서하윤은 괜히 최상혁을 탓했다. 최상혁은 난 모르는 일이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아이고….”
서하윤은 테이블에 이마를 댄 채 어제의 과한 음주를 반성했다. 앞으로는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절대로 과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렇게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하윤아.”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준서 씨?!”
고개를 든 서하윤은 바로 옆에 서 있는 하준서를 보고 작게 외쳤다. 하준서를 보는 최상혁의 얼굴에는 똥 씹은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서하윤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하준서가 의자를 빼서 앉으며 말했다.
“나만 쏙 빼놓고 단둘이 여기까지 놀러오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보지?”
“아니, 그건 그렇게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서하윤이 재차 묻자, 하준서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서하윤의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던 서하윤은 잠시 후에야 그 뜻을 깨닫고 입을 쩍 벌렸다.
“준서 씨도 내 핸드폰에 앱 깔아 놨어요?!”
“하도 도망을 잘 다니니 그 정도는 해 놔야 안심이지.”
하준서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자신이 사온 캐러멜 마키아토를 한 모금 삼켰다.
“연습은 어쩌고요.”
“쨌어.”
“연습을 째요?”
놀란 듯한 물음에 하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맙소사….
서하윤은 어째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는 것 같아 이마를 짚었다.
“좋네. 모처럼 바닷가 오니까.”
하준서가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응시하며 말했다. 연습을 째고 왔다는 사람치고는 너무 여유로워 보였다.
뭐…. 쨀 만하니까 쨌겠지.
서하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에 힘을 풀었다. 최상혁은 다리를 꼰 채 잔뜩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변이 왁자지껄했다. 휴일을 맞아 바닷가 카페에 앉은 사람들의 수다가 괜히 정겹게 들렸다. 서하윤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두 남자를 응시했다. 열심히 일하다가 이렇게 두 사람이랑 부산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으려니 대단히 여유롭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서하윤은 테이블 위로 슬그머니 손을 뻗어 인상을 쓰고 있는 최상혁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이자, 주름져 있던 미간이 조금 풀어지는 게 보였다.
“나도 잡아 줘야지.”
그 모습을 본 하준서가 자신의 손을 척하니 내밀었다. 서하윤은 반대쪽 손으로 하준서의 손도 잡았다.
세 남자가 손을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몇 명이 이쪽을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하윤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서하윤은 대신 재밌는 생각이라도 났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우리 같이 해변 산책 나가요.”
“뭐?”
“셋이서?”
두 남자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두 남자가 저렇게 나오면 눈치가 보이고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서하윤은 양손으로 두 남자의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셋이 이렇게 모였으니까 같이 바닷바람 좀 쐐요. 아니면 같이 유람선이라도 탈까요?”
유람선을 타자는 말에 두 남자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서하윤은 그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까불지, 서하윤.”
“그런 걸로 놀리는 거 아니야, 하윤아.”
두 남자가 정색하며 말했다.
결국, 세 사람은 같이 해변을 산책했다. 나란히 서서 가는 건 극구 반대하기에 결국 셋이 쪼르륵 한 줄로 서서 가는 걸로 타협을 보았다. 번듯한 외모의 남자 셋이 해변을 걸으니 사람들 시선이 적잖이 쏠렸다. 특히나 하준서를 알아본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두 남자와 해변을 함께 걸으며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너무 기분 좋았다. 행복감이 마음에 잔뜩 차올랐다. 서하윤은 결국 두 남자를 각자 양쪽에 팔짱 껴서 잡은 채 해변을 산책했다. 서하윤이 굳이 고집을 부리니 두 남자도 결국 양보를 해 주었다.
“너무 좋다.”
서하윤은 바닷바람을 가슴속 가득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하윤을 본 두 남자도 구기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서하윤은 양쪽으로 팔짱 낀 남자들을 자신에게 바짝 끌어당겼다. 행복이 양팔 가득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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