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외전 3. 서하윤
“그 새끼는 주말에 뭐 한대?”
최상혁이 물었다. 서하윤은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최상혁의 팔에 매달렸다.
“주말 내내 협주 연습이래요. 그래서 내일 상혁 씨 집으로 놀러 가려고 했죠.”
“퇴근하지 말고 기다려. 같이 퇴근하게.”
최상혁이 말했다. 서하윤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엉덩이는 이미 들켜 버렸으니 불금부터 시작해 주말을 통째로 최상혁과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근데 우리 주말에 뭐 해요? 나 어디 놀러 가고 싶은데.”
최상혁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늘 집이나 회사에서만 보는 것도 반복하면 별로 좋지 않을 듯싶었다. 연애에는 이따금 색다른 시도가 필요했다. 짧은 여행도 좋은 시도 중 하나였다.
“어디 가고 싶은데?”
최상혁이 물었다. 아마도 놀러 갈 마음이 있는 모양이었다.
서하윤은 최상혁의 근육질 팔뚝을 끌어안은 채 곰곰이 생각했다. 오늘 밤부터 시작해서 일요일 저녁에는 올라와야 한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면….
“해운대. 해운대 어때요?”
“해운대?”
최상혁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에게 해운대는 별로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 한동안 해운대에서 지냈잖아요. 오랜만에 한 번 더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같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바다에서 산책도 하고… 호텔 방에서 같이 바다 해 뜨는 것도 보고.”
“…….”
“거기 있을 때 혼자 바다 거닐면서 생각했단 말이에요. 상혁 씨도 같이 산책하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상혁 씨 집이랑 사무실만 오가면서 일만 하잖아요. 이번 기회에 콧속에 바닷바람도 넣고 머리도 좀 식히고 하면 좋잖아요.”
창밖을 보며 잠시 생각하던 최상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전 중인 김 실장에게 말했다.
“해운대에 호텔 하나 잡아 놓고, 지금 바로 출발하지.”
“알겠습니다. 이사님.”
김 실장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지, 지금요? 나 출근해야 해요.”
“서하윤 휴가 처리도 해 놔.”
“예, 이사님.”
대답한 김 실장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서하윤은 김 실장이 자신을 휴가 처리하는 걸 들으며 숨을 죽였다. 이래서야 영영 낙하산이라는 소문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다.
월요일에 출근하면 또 사람들이 묘한 눈으로 보겠지?
서하윤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긍정 회로가 돌아갔다. 어차피 낙하산인 거 뻔히 아는데, 하루 급하게 휴가를 뺐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최상혁과 함께 해운대에 놀러 간다는 게 중요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도 챙겨 올걸. 해변에 정장 입은 사람 둘이 걸어 다니면 얼마나 이상하겠어요.”
“옷이야 가서 사면 되지.”
“그건 그러네요.”
서하윤은 금세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상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설레는 기분을 만끽했다. 예전에 해운대로 떠날 때의 심정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꿈일까 봐 겁나네요.”
서하윤은 문뜩 중얼거렸다.
“겨우 이걸로?”
“네. 겨우 이걸로도요.”
저번에 내려갈 때 자신은 스스로를 김민석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인격이 완전히 합쳐진 건 아니다. 하지만 꾸준한 최면 치료와 스스로의 다짐 덕분에 자신이 서하윤이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서하윤으로서의 기억도 제법 많이 돌아왔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 이게 진짜 현실일까 하는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두려움은 주로 너무 행복하고 즐거울 때 찾아왔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사람인가. 이렇게 인생이 즐거워도 되는 건가. 진짜 이렇게 좋은 일만 있을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지금이 혹시 꿈은 아닐까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눈을 뜨면 혹시 좁은 고시원 천장이 보이는 건 아닐까. 눈을 떴을 때 혹시 누추한 여인숙의 이불 위에 널브러져 있는 건 아닐까. 눈을 뜨고 나는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런 두려움은 찾아오는 횟수가 더뎌지긴 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바보 같기는.”
최상혁이 서하윤의 어깨를 감싸 제게 더 기대게 했다. 서하윤은 고개를 틀어 최상혁의 입에 입술을 맞대었다. 입술과 입술이 벌어지고 혀와 혀가 얽혀들었다. 최상혁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이렇게 존재감을 강하게 느낄 때면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 절대 놓지 마요.”
서하윤은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최상혁이 마치 응답하듯 잡은 손을 단단히 깍지 껴 쥐었다.
둘은 해운대에 도착하자마자 쇼핑몰에 들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쇼핑몰에 간 김에, 라면서 이것저것 쇼핑을 했다. 최상혁은 눈썰미가 좋아서 대충 슥 보고 고르기만 해도 서하윤에게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본인은 뭘 사 입혀도 다 잘 소화해 냈다.
호텔에 잔뜩 산 짐을 내려 두고 둘은 곧바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해운대 부근 맛집이야 싹 꿰고 있었다. 오랜만에 단골집에 들렀는데도 아주머니는 서하윤을 금세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최상혁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힐끗힐끗 느껴졌다. 내 남자가 이렇게 잘났다니까. 서하윤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뿌듯해했다.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은 해운대 해변을 거닐었다. 오랜만에 오는 해운대는 예전 그대로였다. 한가로이 해변을 거니는 사람들과 한껏 멋을 부리고 놀러 온 젊은이들, 그리고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갈매기 떼가 곁을 스쳐 지났다. 하나같이 낯빛이 밝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어때요? 바다 보면서 바람 쐬니까 기분 좋죠?”
최상혁은 별반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그냥 바다가 보이고 바람이 부는가 보다 하는 눈이었다.
“넌 이런 게 좋은 모양이지?”
최상혁이 물었다. 딱히 비꼬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냥 진짜 단순히 묻는 거였다.
“당연하죠. 바다 구경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긴, 그러니 맨날 휴양지 타령이지.”
최상혁이 중얼거렸다. 바닷가 휴양지에 대한 로망이 깊은 서하윤은 툭하면 하와이니 오키나와니 괌이니 하며 바닷가 여행 타령을 하기는 했다.
“그냥 바다가 좋은 게 아니라 이런 게 좋은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여유롭게 바닷가 산책하면서 시간 보내는 거.”
서하윤은 사람들 눈 때문에 부러 잡지 않았던 최상혁의 손을 살며시 붙잡으며 말했다.
최상혁이 걸음을 멈추고 서하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는 말했다.
“원하면 한동안 해외에 나가서 지내다 와도 되고.”
서하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자 그가 천천히 되풀이했다.
“둘 다 회사에 장기 휴가 쓰고 같이 하와이든 어디든 몇 달 지내다 오자는 거야. 그렇게 지내고 싶다는 얘기 아니야?”
“엇… 몇 달이요?”
서하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여튼 이 사람, 뭔가 한다고 하면 끝장을 보고야 만다. 그냥 며칠 같이 놀고 싶다는 건데 그게 왜 몇 달이 되는 거란 말인가. 회사는 어쩌라고! 간간이 며칠씩 휴가 쓰는 거야, 낙하산 빨이라고 넘어가면 된다지만 몇 달이나 휴가를 주는 회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왜? 싫어?”
최상혁이 물었다. 서하윤은 잠시 생각했다. 생각해 보니 뭐… 좋기는 했다. 하와이에서의 여유로운 몇 달간의 생활이라니. 상상만 해도 흥분됐다.
“좋아요. 완전 좋긴 한데… 지금 당장은 말고요.”
“왜?”
최상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물었다.
“상혁 씨 일 바쁜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나도 그렇죠.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몇 달이나 회사를 쉬어요. 아무리 내가 눈치 없다고 해도 몇 달은 너무 심하죠. 연차가 좀 쌓였을 때면 모를까.”
“눈치 주는 사람 있으면 말해. 잘라 버리면 되니까.”
최상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서하윤은 괜히 애먼 사람 밥줄 끊길까 싶어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그런 사람 없어요.”
최상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지간히 없겠다는 얼굴이었다. 서하윤은 최상혁이 사람이라도 지목할까 싶어 얼른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 커피 마시고 싶어요. 나 맨날 가던 카페에 같이 가요. 지금 가면 창가 자리 있을지도 몰라요.”
오늘은 역시 운이 좋았다. 서하윤이 즐겨 찾던 카페의 창가 자리가 마침 남아 있었다. 둘은 단란하게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소 항상 나누던 이야깃거리여도 여행지에서 해서 그런지 더 재밌었다. 최상혁과 무슨 공통 화제가 그리 있겠느냐마는, 가끔 반응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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