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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112화 (112/125)

112화

외전 2. 하준서

아침부터 눈이 번쩍 뜨였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 1분 전이었다. 회사에 매일 출근하는 버릇이 들어서 그런지, 휴일에도 똑같은 시간에 눈을 뜨게 됐다. 서하윤은 알람을 끄고 기지개를 쭉 켰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어 가며 기지개를 한참 켜고 나서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핸드폰 화면에 찍힌 날짜가 눈에 틀어박혔다. 오늘은 바로 하준서의 생일이었다. 이전 생일에 어떤 선물을 줄지 약속한 바가 있기에, 오늘은 하준서에게도 그렇지만 서하윤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오죽하면 오늘이 걱정되어서 밤에 잠을 못 자고 한참 뒤척였을 정도다. 괜히 그런 약속을 했나 후회도 되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해 버린 거,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다.

서하윤은 일단 욕실로 들어가 샤워기를 켰다. 세수와 양치를 마친 다음 온몸을 정성들여 씻기 시작했다. 하준서의 플레이가 어떤 것이든 간에 옷을 홀딱 벗게 될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어떤 플레이를 준비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한참이나 온몸 구석구석을 씻고 나서야 샤워가 끝났다. 욕실 밖으로 나온 서하윤은 거울 앞에 서서 로션을 듬뿍 발랐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꼼꼼히 말렸다. 머릿결이 좋아서 그냥 대충 말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기 좋은 머리가 되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꾸준히 받는 최면 치료가 제법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치료 때문이라기보다는 서하윤으로 산 세월이 길어지며 자연스레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드레스 룸으로 간 서하윤은 공들여 옷을 골랐다. 오늘은 하준서의 생일이니 모두 그가 선물해 준 것으로 고를 생각이었다. 바지와 셔츠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고르고, 시계와 액세서리도 몇 번이나 바꿔 껴 보았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모습은 자신이 보기에도 제법 볼만했다.

옷차림 점검을 마친 뒤, 며칠 전 주말을 이용해 산 선물을 꺼냈다. 혹 하준서가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도 발견 못 하도록 깊이 숨겨 둔 쇼핑백 안을 살폈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보였다. 몇 달 치 월급을 아끼고 모아서 산 선물이었다. 몇만 원짜리 선물을 건네든 분명 엄청나게 기뻐해 주겠지만, 역시 씀씀이야말로 마음의 크기 아니겠는가. 자신의 능력이 닿는 한에서 최고의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어제 미리 사 두었던 케이크를 냉장고에서 꺼내 들었다. 케이크와 비장의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서는 길. 콧노래가 절로 났다. 감동하는 하준서의 얼굴을 얼른 보고 싶었다.

하준서의 집까지 가는 길은 간단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서 내려 옆 동 엘리베이터를 타면 끝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벨을 누르기 전, 서하윤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켰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벨을 눌렀다.

딩동-.

벨 소리가 한 번 울리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문을 당기고 들어서자 이미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하준서의 미소 띤 얼굴이 보였다.

“어서 와. 오라는 대로 일찍 왔네?”

하준서가 반갑게 맞이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빵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거 케이크….”

서하윤은 케이크 상자를 내밀었다. 그러면서 선물 든 쇼핑백은 등 뒤로 슬그머니 숨겼다. 하준서가 예쁜 눈웃음을 치더니 케이크 상자를 받아 냉장고에 갖다 넣었다. 서하윤은 그사이에 쇼핑백을 얼른 현관문 구석에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섰다.

식탁에는 이미 아침 식사가 거의 준비되어 있었다. 직접 와플기로 만든 크로플과 생크림, 따뜻한 아메리카노였다. 아침은 가볍게 빵으로 때우길 좋아하는 서하윤의 식성 그대로였다. 특히 요즘 서하윤은 크로플에 푹 빠져 있어서, 하준서가 아예 와플기를 사서 매일 만들어 주고 있었다.

“오, 크로플이네요? 냄새 너무 좋다.”

서하윤은 하준서가 빼 준 의자에 앉으며 신난 표정을 지었다.

하준서가 커피 잔에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잔도 채운 다음 자리에 앉았다.

“어서 먹어.”

하준서가 권했다.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한 서하윤은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크로플을 통째로 집어 들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술에 잔뜩 묻은 생크림을 핥아 먹어 가며 우물우물 씹어 먹는 맛이 기가 막혔다. 그러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씩 먹어 주면 그 맛이 배가 되었다. 하준서는 포크와 나이프로 크로플을 잘라 한입씩 먹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우아해서 너무 보기 좋았다.

크로플을 또 한입 베어 물어 우물우물 씹고 있을 때, 하준서가 엄지로 서하윤의 입술에 묻은 생크림을 훑어 가져가더니 할짝 핥아먹었다. 그러면서 눈웃음을 살살 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몰랐다. 하준서는 분명 일부러 서하윤을 꼬시고 있었다. 서하윤은 지금은 아니다 싶어 얼른 눈을 돌려 커피를 마시는 척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칠 때쯤 서하윤은 조금 긴장했다. 이제 치우고 나면 하준서가 바로 방으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식사한 것을 대충 치운 하준서는 서하윤을 거실 소파에 앉혀 놓고 과일을 손질해 내왔다. 그리고 준비 중인 연주곡을 몇 곡 내리 들려주었다.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서 피아노를 치는 하준서는 그야말로 그림과도 같았다. 색소 옅은 갈색 머리에 부딪힌 햇살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고, 선반 위를 나비처럼 노니는 하얗고 예쁜 손의 움직임은 마치 마법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어때?”

하준서가 물었다. 그는 요즘 공연 연습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이런 쪽으로 문외한인 서하윤의 귀에는 그저 모든 곡이 훌륭하고 멋지게만 들렸다.

“좋아요. 완전 좋아요.”

서하윤은 아낌없이 박수를 치며 찬사를 보냈다. 하준서가 빙긋이 웃었다.

하준서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이제 그 방에 들어가게 되는 걸까? 서하윤은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긴장이 무색하게도 하준서는 서하윤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티브이를 켰다.

티브이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예능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예능 재방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준서는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려 서하윤의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그리고 팔을 껴안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지쳤어요?”

서하윤은 한숨에서 느껴지는 무거움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냥… 오랜만에 하는 공연이라 그런가. 손이 뜻대로 안 움직이네. 연습을 너무 게을리했나 봐.”

하준서가 약한 소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서하윤은 하준서도 이렇게 낙담할 때가 있구나 생각하며 다른 팔을 들어 그를 꽉 감싸 안았다.

“준서 씨 약한 소리 하는 건 처음 듣네요.”

“왜? 내가 약한 소리 하니까 이상해?”

“음… 조금? 아무래도 처음 보는 거니까…. 난 준서 씨가 항상 자신만만하고 완벽하게만 보였거든요.”

서하윤은 평소의 하준서를 떠올리며 말했다. 언제 어떤 모습을 떠올려 보아도 하준서는 다정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견고했다. 티끌 같은 결점 하나 떠오르질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실망스러워?”

하준서가 물었다. 서하윤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요. 그냥 준서 씨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싶어서…. 나도 준서 씨한테 뭐 도움 될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항상 준서 씨만 나한테 뭘 해 줘서 난 받기만 했잖아요. 나도 준서 씨한테 뭔가 해 주고 싶거든요.”

서하윤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그래서 내 선물 사 온 거야?”

“…봤어요?”

“손에 떡하니 들고 들어오는데 못 볼 리가 없지.”

그 말에 서하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하준서를 잠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에 숨겨 둔 쇼핑백을 들고 와 자리에 앉자 하준서가 눈을 반짝였다.

“원래는 케이크에 불 켜고 노래 불러 주면서 주려고 한 건데, 벌써 봤으니 미리 줄게요. 생일 축하해요, 준서 씨.”

“고마워, 하윤아. 하윤이가 직접 고른 거야?”

“당연하죠. 이거 고른다고 몇 시간이나 매장에서 어슬렁거리면서 고민했다고요.”

서하윤은 백화점 매장들을 몇 시간이나 싸돌아다니며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던 때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남에게 뭔가 선물하는 일이 그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풀어 봐도 돼?”

하준서가 물었다. 서하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핑백을 내밀었다. 하준서는 그것을 받아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가 나왔다.

하준서는 조심조심 포장을 풀기 시작했다. 묶인 리본조차도 풀기 아깝다는 듯이 머뭇거렸다.

“확확 찢어서 풀어요. 선물은 원래 그렇게 뜯는 거래요.”

서하윤의 말에 하준서가 한 번 씩 웃더니 이내 포장을 시원하게 잡아 뜯었다. 포장지가 완전히 벗겨지자 나온 것은 시계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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