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109화 (109/125)

109화

외전 1. 최상혁

“아저씨 완전 거지꼴이니까 좀 씻어. 그 꼴로 이불 위에 못 눕혀.”

욕실에 덩그러니 던져진 최상혁은 잠시 망설이다 옷을 벗고 몸을 씻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샤워기 물살에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핏물과 피딱지, 먼지 따위가 씻겨 내려갔다. 뜨거운 물줄기는 상당한 통증을 유발했지만 최상혁은 몸을 씻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나가자, 욕실 문 앞에 허름한 옷가지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옷이 그런 거밖에 없어. 오, 근데 아저씨 몸에 문신도 없네? 조폭 아니었어? 아니면 다행이고.”

작은 밥상을 들고 욕실 앞을 지나치던 소년이 조잘거렸다.

“옷 입었으면 이리 들어와. 밥 먹어.”

최상혁은 젖은 머리에 수건을 올린 채 절뚝절뚝 걸어 소년이 부른 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티브이가 켜진 방 안에는 촌스러운 무늬의 이불이 깔려 있었다. 작은 밥상은 그 위에 놓였다.

“이것밖에 없으니까 대충 먹어.”

소년이 젓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최상혁은 말없이 밥상 앞에 앉았다. 앉는 동작조차 엄청난 고통을 유발했다. 겨우 자리에 앉으니 소년이 다시 젓가락을 내밀었다. 최상혁은 젓가락을 받아 쥐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냄비를 보았다. 노란색 낡은 냄비에는 라면이 한가득 끓여져 있었다. 신김치를 잔뜩 썰어 넣어서 김치 냄새가 폴폴 풍겼다.

“얼른 먹어.”

권한 소년이 먼저 냄비 속에 젓가락을 집어넣었다. 라면 줄기를 집어 냄비 뚜껑에 올리고 후루룩 삼키는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최상혁은 자신의 앞에 놓은 그릇을 보았다. 그래도 손님이랍시고 냄비 뚜껑 대신 그릇을 준 모양이었다.

잘못 맞아서 삐끗한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쥐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상혁은 티 내지 않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쥐고 냄비 속 라면 줄기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 그릇에 덜어 낸 다음 입속으로 가져갔다.

온통 찢기고 터진 입 안에 김치가 들어간 라면은 상당한 고통을 유발했다. 하지만 최상혁은 라면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소년이 끓인 라면은 호랑이굴에서 먹던 그 어떤 기름진 음식보다 따뜻하고 맛있었다.

라면을 다 건져 먹고 나니, 소년이 찬밥을 가지고 와서 국물 가득 말았다. 그리고 숟가락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최상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따라 했다. 처음 먹어 보는 라면에 만 밥은 제법 맛있었다. 최상혁이 잘 먹는 모습을 보는 소년의 눈에 만족감이 차올랐다. 낯선 이에게 뭘 먹이는 것이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모를 일이었다.

밥을 모두 먹고 나자 소년이 밥상을 들고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소년의 손에는 또 빨간 약이 들려 있었다. 샤워하느라 모두 지워진 약을 다시 발라 주려는 거였다. 최상혁은 자신보다 작은 소년이 약을 바르기 수월하도록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 얼굴을 들이댔다. 소년은 뭐가 그리 진지한지 숨을 색색 몰아쉬며 얼굴에 빨간 약을 떡칠했다. 그리고 후후 불어 주기까지 했다.

“됐다. 이제 누워서 자.”

소년이 명령하듯 말했다. 최상혁은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촌스러운 무늬의 이불 위에 몸을 뉘었다. 고통 때문에 비치적대며 드러눕는 모습을 보고 있던 소년이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옆에 와서 덜렁 드러누웠다. 최상혁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 같은 소년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눈을 감았다. 낯선 소년에 낯선 집이었다. 하지만 생모가 죽은 이후 있었던 그 어떤 장소보다 안락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복수할 거야?”

어둠 속에서 불현듯 소년이 물었다.

“아저씨 두들겨 팬 그 자식한테 복수할 거냐고.”

소년은 옆으로 누워 최상혁을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복수?

최상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며 자신을 응시하는 소년의 눈빛을 보는 순간, 기묘한 무언가가 가슴속에 뜨거운 불길을 피워 올렸다.

“꼭 복수해. 때려 팬 놈들. 괴롭힌 놈들. 못살게 구는 놈들. 전부 다 복수해서 확 다 짓밟아 버려.”

소년이 마치 부추기듯 열정적으로 말했다. 기묘하게 불타오르는 눈빛이었다. 최상혁은 알 수 있었다. 소년 역시 누군가에게 짓밟힌 경험이 있다고. 소년은 복수하고 싶어 했다. 복수심으로 마음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너는?”

최상혁은 소년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성대를 긁고 나오는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건조했다.

“나? 나도 복수할 거야. 지금은 못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할 거야. 진짜야. 아저씨는? 복수할 거야?”

“……그래.”

최상혁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복수를 열망하는 소년의 강렬한 눈빛은 마치 성화 같았다. 그의 마음에 뜨거운 불길을 옮겨 활활 태워 일으켰다. 건조하고 무디기만 하던 가슴에 감정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굴욕감, 고통, 분노, 수치, 앙심, 복수심 따위가 가슴을 벌겋고 뜨겁게 물들였다.

소년은 그 후에도 쓰잘데기없는 말들을 한참이나 조잘거렸다.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 이야기. 세간에 떠도는 가십. 학교에서 주워들은 소문 따위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최상혁은 퉁퉁 부은 눈을 깜빡이며 소년의 말을 경청했다. 소년이 그렇게 계속 떠드는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매우 외로웠고, 짧은 순간이나마 자신의 외로움을 덜어 줄 상대로 최상혁을 고른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떠들던 소년이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다 잠들었다. 최상혁은 낡은 벽지로 도배된 방 천장을 올려 보며, 소년이 가슴속에 지핀 불길을 더욱 뜨겁게 태웠다.

가장 약한 개체로 찍혀 괴롭힘당하고 또 당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무력감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도 이제 더 이상 무력하고 힘없는 새끼 호랑이가 아니었다. 덩치를 키울 대로 키운 성체였다.

‘복수할 거야?’

‘꼭 복수해. 때려 팬 놈들. 괴롭힌 놈들. 못살게 구는 놈들. 전부 다 복수해서 확 다 짓밟아 버려.’

“그래.”

최상혁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허공을 보는 최상혁의 눈빛이 검고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제 포효할 작정이었다. 움츠리고 있던 몸을 펼 준비가 되었다.

최상혁은 그 상태로 날이 훤해지기 시작할 때까지 조용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 새벽빛이 창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자 소리 죽여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그때까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의 외로움을 잠시라도 덜기 위해 행했던 짧은 변덕이 잠든 호랑이 한 마리를 깨웠음을 영영 모를 것이다. 최상혁은 소년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흔적도 없이 집을 나섰다. 아마 다시는 볼 일이 없겠지만, 소년은 그의 은인이었다. 기억 속에 아주 깊이 남게 될 터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최상혁은 어느 술집 거리 좁은 골목 안에 쪼그린 채 울고 있는 소년을 다시 보았다.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눈물점이 인상적인 소년은, 어릴 때와 다름없이 욕설을 서슴없이 씹어 가며 울고 있었다. 훌쩍 자란 소년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예뻤고, 우는 모습조차 사람 눈길을 붙들어 맸다.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한눈에 소년을 알아봤다는 사실에 최상혁은 어쩐지 올 게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년과 자신은 인연이 깊은 게 틀림없었다.

“뭐야, 씨발. 사람 쳐 우는 거 처음 봐?”

몇 년 만에 만난 소년은 예전보다 조금 더 사나워져 있었다.

“같이 갈래?”

최상혁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뭐래. 너도 나한테 꼴리냐? 변태 새끼야?”

말버릇은 한층 더 더러워져 있었고.

“그래. 꼴리는군.”

“씨발. 오늘 운수 좆같네.”

소년이 최상혁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비싼 시계며 구두에 꽂힌 눈이 반짝였다. 최상혁은 소년이 제법 속물적으로 자랐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뭐, 좋았다. 돈 따위는 넘치게 있었다.

“당신 부자야?”

“그래.”

“같이 가면, 어떻게 되는데?”

“일자리를 주지.”

“일자리는 나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월 천.”

“…천…만 원?”

“그래.”

“무슨 일인데. 난 호스트 같은 건 안 해. 더럽게 생겨 먹은 것들이랑 붙어먹는 상상만 해도 토 나와.”

“내 집에 도우미가 마침 그만둬서. 집안일 해 줄 사람이 필요해.”

“…진짜 집안일만 시키는 거 맞아? 그 핑계로 나 건들려는 거 아니야?”

“강제로 하는 취미는 없어.”

“진짜로 그런 거라면… 좋아.”

최상혁은 소년에게 먼저 손을 뻗었다. 소년이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수년 전, 누더기 꼴을 한 자신의 손목을 잡아끌던 새하얗고 작은 손이 손안에 들어왔다. 어쩐지 마음이 술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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