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욕실을 나서는 하준서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서하윤은 식탁에 식기와 접시, 컵 등을 챙겨 올리고, 하준서가 부탁하는 자잘한 심부름을 했다.
구운 빵과 버터, 잼과 수프, 간단한 샐러드가 차려졌다.
“상혁 씨, 와서 아침 먹어요.”
서하윤은 최상혁을 불렀다. 그래도 움직일 줄 모르는 그에게 다가가 태블릿을 쏙 빼앗아 들었다. 최상혁이 또 눈으로 욕을 했다. 하지만 거기에도 이제 너무 익숙해져 버린 서하윤은 태블릿을 등 뒤에 감춘 채 식탁을 가리켰다.
“아침 먹고 나면 돌려줄게요.”
“…까불기는.”
최상혁이 작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윤은 태블릿을 소파에 내려놓고 최상혁을 따라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셋이 앉아서 하는 식사는 조용했다. 하지만 어색함은 예전보다는 덜했다.
서하윤은 상큼한 샐러드를 먼저 한 입 먹고, 빵을 잘라 수프에 적셔 먹었다. 그다음에는 빵에다 버터와 잼을 듬뿍 발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것이 매우 맛있었다.
열심히 식사를 하던 서하윤은 문득 하준서와 최상혁을 보았다. 둘은 각자의 성격답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준서는 손짓 하나 움직임 하나가 부드럽고 우아했다. 귀한 집에서 곱게 자란 도련님 같았다. 반면 최상혁은 뭘 하든 시원시원하고 남자다운 데다 각이 잡혀 있었다. 먹는 것만 봐도 남성적인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둘 다 워낙 잘생긴 외모이다 보니 쳐다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잘생긴 남자들이 자신의 애인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혼자 턱을 괸 채 비실비실 웃으며 미남들을 관찰하고 있자, 두 남자가 시선을 보내왔다.
“왜, 내가 그렇게 잘생겼어?”
“밥이나 먹어.”
말하는 것도 각자 너무나 달랐다. 서하윤은 가슴 가득 들어차는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이런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또 한없이 평범한 일상이 너무 행복하고 감사했다. 자신이 이런 걸 누릴 만한 자격이 되는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의 인생이었다. 서하윤은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며, 그것들을 담뿍 누리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두 사람에게도 아주 잘할 것이다. 내 인생도 열심히 살 거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한테 부끄럽지 않은 애인이 될 거다. 자신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 줄 예정이었다.
‘사랑해요. 두 사람 다.’
서하윤은 속으로 가만히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속이 행복으로 충만해졌다.
“우리 밥 먹고 뭐 할까요?”
서하윤이 묻자, 두 남자가 동시에 인상을 썼다.
“우리?”
“우리라고?”
두 남자가 동시에 질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서하윤은 저도 모르게 흐흐거리며 웃고 말았다.
무엇을 하며 주말을 보낼까 했던 고민은 쓸데없는 것이었다. 서하윤은 아침을 먹고 소파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제 치른 격한 섹스의 영향일 터였다.
소중한 주말을 잠만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억지로 눈가를 문질러 가며 참았지만 결국에는 졸음에 굴복했다. 아예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자고 있으려니 누군가 서하윤을 안아다 침대로 날랐다. 서하윤은 눈을 뜰 힘도 없어서 덮어 주는 이불 속에 기어들어 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꿈을 꿨다. 꿈인데도 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서하윤은 가방을 든 채 절뚝절뚝 걷고 있었다. 여름인지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훤히 내보이는 종아리에 회초리 자국이 가득했다. 신발주머니를 든 손바닥도 발갛게 변한 채 퉁퉁 부어 있어서 매우 아팠다.
거리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주택 지붕을 붉게 물들였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집으로, 혹은 학원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며 사람들이 바삐 곁을 스쳐 지날 때마다 서하윤은 한층 더 외롭고 고독해졌다. 마치 한 장소에 두 세상이 있는 것 같았다. 평범하고 즐거운 사람들의 세상과 서하윤의 세상. 이렇게 두 가지 말이다.
마침내 집 앞에 도착했다. 집 대문을 보면 으레 평안한 안도감을 느껴야 하건만, 서하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집 대문은 보는 것만으로도 어둠 속에 끌려들어 갈 것 같은, 혹은 질식할 것 같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하윤은 한참이나 대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다.
꼬르륵-
배가 고팠다. 서하윤은 꼬르륵거리는 배를 쓰다듬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방 안에는 시험지가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백 점을 맞지 못했으니 아마 저녁은 없을 것이다.
서하윤은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서야 체념한 얼굴로 집 대문을 넘어섰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 안의 풍경이 펼쳐졌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다… 다녀왔습니다.’
목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안방 문이 열리더니 엄마가 나왔다.
‘시험지는?’
엄마가 대뜸 손부터 내밀었다. 서하윤은 머뭇거리며 가방을 벗어 발치에 내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시험지를 꺼내 엄마에게 내밀었다.
시험지를 낚아채 점수를 확인한 엄마의 표정이 당장에 사나워졌다.
‘따라 들어와!’
엄마가 사납게 외치며 서하윤의 방으로 들어갔다. 서하윤의 방에는 늘 회초리가 있었다. 서하윤은 울먹이며 주춤주춤 안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서하윤이 서 있는 곳은 좁은 고시원 방이었다. 작은 책상과 침대, 그리고 벽에 걸린 옷걸이가 가구 전부인 싸구려 고시원 방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서하윤은 아르바이트에 지친 몸을 좁은 침대 위에 던졌다. 낡고 오래된 형광등이 달린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좁은 방의 천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도배지는 얼룩덜룩 더러웠고, 한쪽 모서리에는 작은 거미가 집을 만들고 있었다. 서하윤은 거미의 움직임을 구경했다.
서하윤에게 있어 잠자는 공간은 더 이상 공포의 공간이 아니었다. 대신 사무치는 외로움의 공간이 되었다. 좁은 고시원 방 안에서 서하윤은 조용히 숨만 몰아쉬는 번데기가 된 기분을 느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다. 어려서도, 그리고 커서도, 서하윤의 세상은 똑같았다.
‘좆같은 세상.’
서하윤은 좁은 고시원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머릿속에 펼쳐지는 미래에는 희망이라는 게 없었다. 그저 암울하고 컴컴할 뿐이었다.
조용히 숨만 몰아쉬는 서하윤의 귓가에 문득 조용한 부름이 들렸다.
“하윤아.”
굉장히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군가 정말 자신을 저렇게 다정하고 애정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불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에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자게 내버려 둬. 한 끼 거른다고 안 죽어.”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저음이었다. 서하윤은 그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래도 먹을 건 먹고 다시 재워야지.”
부드러운 목소리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서하윤을 불렀다.
“하윤아. 잠깐만 일어나 봐. 응? 점심은 먹어야지. 먹고 다시 자자.”
다정한 목소리는 서하윤을 부르는 게 틀림없었다.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누구일까. 이렇게 다정한 목소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더 불러 줘, 내 이름.’
서하윤은 속으로 외쳤다.
“많이 피곤했나, 눈을 못 뜨네. 하윤아. 하윤아?”
살짝 몸을 잡아 흔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좁고 삭막하고 외로움으로 가득하던 고시원 방 천장에 쩌적 금이 갔다.
“그래서 눈이 떠지겠어? 서하윤,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자. 서하윤.”
단단한 손이 볼을 톡톡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천장에 간 금이 쩌적 소리를 내며 더 크게 갈라졌다.
서하윤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느껴지는 손길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항상 바라던 것들이었다. 한번 느낀 이상 놓칠 수 없었다. 서하윤은 죽자 살자 매달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했다. 천근만근 같은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주변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하윤은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였다. 어느샌가 차올랐던 눈물이 눈가를 타고 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윤아?”
“왜 울어?”
두 남자가 동시에 물었다. 서하윤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두 남자의 얼굴에 깊이 안도했다. 그리고 동시에 꿈속에서 느꼈던 그 사무치는 외로움과 허무함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이게 현실이죠?”
서하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두 남자가 각자 손을 뻗어 볼을 감쌌다. 서하윤은 양손으로 두 남자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따뜻했다. 이게 현실이었다. 확실히 현실이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니 치밀어 오르는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런….”
하준서가 혀를 차며 서하윤이 상체를 일으켜 끌어안았다. 그리고 조심조심 등을 토닥거렸다.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꿈 꿨어?”
“네….”
서하윤은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저런. 가엽게도.”
하준서가 중얼거리며 이마에 입술을 쪽쪽 눌렀다.
“얘가 애야? 저리 비켜.”
최상혁이 인상을 찌푸린 채 하준서를 강제로 잡아 뜯어냈다. 그러고는 양손을 뻗어 서하윤을 번쩍 들어 안았다.
“우왓-!”
허공으로 붕 뜨는 몸에 놀라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최상혁은 그렇게 서하윤을 어깨에 둘러메고 저벅저벅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탁 앞 의자에 답삭 앉혔다.
“어리광 그만 부리고 밥 먹어. 나이가 몇인데 악몽 좀 꿨다고 눈물 바람이야?”
최상혁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 튕겼다. 뒤따라온 하준서가 그런 최상혁의 종아리를 발끝으로 가볍게 걷어찼다.
“왜 우는 애를 구박하고 그래. 악몽 때문에 놀라서 좀 울 수도 있는 거지.”
“시끄러워. 앉아서 밥이나 먹어.”
“그 밥 내가 한 거거든?”
“내가 하랬어? 네가 좋아서 한 거 아냐.”
“너 먹이려고 한 거 아니거든? 하윤이 먹으라고 한 거거든?”
두 남자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서하윤은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며 웃고 말았다. 티격태격하던 두 남자가 그런 서하윤을 보더니 동시에 물었다.
“왜 웃어?”
“왜 웃어?”
묻는 말까지 똑같았다. 입가에 웃음이 한층 더 진해졌다. 서하윤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티격태격하는 게 보기 좋아서요. 꼭 친한 친구 사이 같아요. 친척이라면서요. 혹시 둘이 어릴 때 되게 친했던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들은 두 남자의 얼굴에 똥 씹은 표정이 떠올랐다.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그것마저 똑같아서 서하윤은 결국 소리 내 웃음을 터트렸다. 악몽의 여운이나 눈물 따위는 어느 사이엔가 깨끗이 날아간 뒤였다.
“자, 자. 얼른 밥 먹어요. 우리. 밥 먹고 같이 팝콘 튀겨서 영화 보는 거 어때요?”
서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두 남자의 손에 각자 수저를 쥐여 주었다. 두 남자는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서하윤은 보란 듯이 밥을 크게 한 스푼 떠서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그제야 두 남자도 표정을 추스르고 밥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하윤은 각자 밥을 먹는 두 남자를 보며 진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것을 절대 잃고 싶지 않다고. 절대 잃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상혁 씨. 준서 씨.”
서하윤이 문득 부르자 두 남자가 시선을 보냈다. 서하윤은 두 남자를 보며 아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요.”
서하윤의 말에 두 남자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서하윤은 그런 두 남자를 두고 다시 수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밥이 아주 꿀맛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