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욕실로 들어간 최상혁이 서하윤을 변기 뚜껑 위에 앉혀 놓고 옷을 벗어 던졌다. 나체가 된 그는 다시 서하윤을 안아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물 온도를 맞춘 다음 함께 샤워기 물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씻겨 주기 시작했다. 술기운과 격한 섹스로 인한 탈력감으로 몸이 휘청였다. 다리도 후들후들 떨렸다. 최상혁은 그런 서하윤을 자신에게 기대게 하고 샴푸와 비누칠을 해 주었다.
“화… 안 났어요?”
서하윤은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최상혁은 서하윤을 씻기는 데 전념할 뿐, 말이 없었다.
“실망했어요? 나 너무 변태 같아서…. 미안해요.”
서하윤은 시무룩한 얼굴로 사과했다. 일이란 일은 다 저질러 놓고 사과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됐으니까 양치나 해. 이 변태야.”
서하윤 씻기기를 완료한 최상혁이 엉덩이를 툭 치며 말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 행동에 서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나도 씻겨 줄게요.”
서하윤은 얼른 샤워 타월을 들어 바디 워시를 짰다. 그리고 거품을 내어 최상혁의 몸을 열심히 문질렀다. 안 그래도 기력이 딸려 가만히 있어도 팔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그래도 자신이 씻겨 주고 싶었다.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무리 열심히 문질러도 그냥 살짝 거품만 바르는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래도 최상혁은 어디 해 보라는 듯 가만히 손길을 받으며 서 있었다. 앞부분을 모두 칠한 서하윤은 뒤로 돌아가서 넓디넓은 등에 비누칠을 하다가, 문득 최상혁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뭐 하는 거야. 더 해 줘?”
최상혁이 물었다.
“아뇨. 그냥 안고 싶어져서.”
팔 안에 가득 들어차는 근육질 몸이 괜히 사랑스러웠다.
“있잖아요, 상혁 씨.”
“말해.”
“…사랑하는 거 알죠?”
서하윤은 쑥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최상혁이 자신의 가슴에 꼭 매달린 손을 풀더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하윤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살짝 달라붙었다 금세 떨어진 가벼운 키스였지만, 그 어떤 진한 키스보다 살갑게 느껴졌다.
***
아주 오랜만에 셋이 함께 보내는 주말이었다. 어젯밤에 그렇게 술을 퍼마시고 섹스를 했음에도, 어쩐지 일찌감치 눈이 반짝 떠졌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최상혁이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하준서의 잠든 얼굴이 보였다.
‘헐….’
서하윤은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기겁했다. 어젯밤에 어쩌다가 이렇게 셋이 한 침대에서 잠들게 된 걸까.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분명 씻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서하윤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포기했다. 뭐, 어찌어찌하다가 같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어차피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 아닌가. 셋이 같이 잠든다 한들, 별달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가 아니잖아!!!
이러다 둘이 눈을 뜨면 아침 댓바람부터 또 십 원짜리 욕을 하며 싸울 게 뻔했다. 서하윤은 눈을 오른쪽 왼쪽으로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 마음을 정했다. 정자세로 누운 그대로 몸을 번데기처럼 슬슬 움직여 소리 없이 아래로 조금씩 내려갔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서하윤은 두 남자를 깨우지 않고 침대 끝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침대에서 조심히 내려서서 발소리를 죽인 채 안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두 남자는 깨지 않았다. 서하윤은 안방 문턱에 서서, 마치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잠든 모양을 한 두 남자를 감상했다. 두 남자가 나란히 잠든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명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보던 서하윤은 문득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을 놓치기가 너무 아까웠다. 고민하던 서하윤은 살금살금 걸어가 거실에 있는 핸드폰을 챙겨 돌아왔다. 그리고 나란히 잠든 두 사람의 얼굴만 나오도록 각도를 잘 잡아 그대로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사진 찍는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화면 속의 두 남자가 눈을 번쩍 뜨는 게 보였다. 눈을 뜨자마자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장면에, 두 사람의 얼굴이 거의 동시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씨발…!”
“씹….”
두 남자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방 문턱에 서 있던 서하윤은 흠칫 놀라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하지만 찰칵 소리를 그냥 넘어갈 두 사람이 아니었다.
“서하윤!”
“하윤아!”
두 남자가 동시에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두 남자의 표정이 무시무시했다. 최상혁이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채 갤러리를 열었다. 그러자마자 뜨는, 서로 얼굴을 맞댄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서하윤, 너…!”
“맙소사. 이런 토 나오는 사진을 왜 찍어, 하윤아.”
두 남자가 동시에 서하윤을 노려보았다. 예전에 서창섭에게 찍힌 사진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 서하윤은 곧바로 반성 모드가 되었다. 아무리 나 보기 좋은 거라도 허락 없이 함부로 사진을 찍다니. 정말 나쁜 짓을 해 버렸다.
“미안해요. 너무 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지, 지금 당장 지울게요.”
서하윤은 얼른 핸드폰을 받아 사진을 삭제했다. 그리고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향해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사과하고 반성하면서도 조금 아까운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 사진은 각자 가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이 동시에 찍힌 사진은 없었다. 차마 찍겠다고 말도 못 할뿐더러, 찍게 놔두지도 않을 터였다. 아까 그 모습, 정말 보기 좋았는데….
서하윤이 자신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두 남자의 눈길이 더욱 뾰족해졌다. 서하윤은 깨깽한 심정이 되어 핸드폰을 소파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목이 마르다며 부엌으로 서둘러 도망갔다.
다행히 최상혁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간단히 씻고 나오더니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침마다 태블릿으로 메일과 뉴스를 확인하는 게 그의 습관이었다.
“도망은 잘 간다니까, 하여튼.”
하준서가 다가와 볼을 살짝 꼬집었다. 서하윤은 반성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른 씻으러 가자.”
하준서가 어깨에 팔을 감아 욕실로 인도했다. 둘은 나란히 욕실로 들어가 번갈아 가며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칫솔 여분이 안 보여서 서하윤의 것으로 같이 사용했다.
“어제 어땠어? 좋았지?”
하준서가 닫힌 욕실 문을 힐끗 보며 물었다. 서하윤은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힘이 실리지 않은 손으로 하준서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몰라요. 뭐 그런 걸 묻고 그래요.”
“모르는 게 어딨어. 좋았으면 좋은 거고, 싫었으면 싫은 거지. 솔직히 말해 봐. 좋았어?”
서하윤은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볼이 발갛게 익는 게 느껴졌다.
“나 너무 변태죠.”
서하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제 너무 좋아 죽던 자신의 작태가 기억나서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생판 모르는 남들이랑 붙어먹은 것도 아닌데.”
하준서가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어제 그거… 준서 씨 화풀이보다는 내 판타지에 맞춰 주려고 그런 거죠?”
“뭐, 겸사겸사.”
하준서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서하윤이 예전 최상혁에게 보이고 있다는 상상에 잔뜩 흥분했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제 화 많이 났을 텐데, 그 와중에도 내 판타지까지 챙겨 준 거예요? 준서 씨는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요?”
“왜 그렇겠어. 사랑하니까 그렇지.”
사랑한다는 말을 매번 스스럼없이 해 주는 하준서가 너무 고마웠다. 그는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었다. 늘 그랬다.
“준서 씨.”
“왜?”
“조금 있으면 준서 씨 생일이잖아요.”
“오,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인터넷에 치면 프로필 다 뜨잖아요.”
“아, 그렇지. 그래도 기억해 주니 고맙네.”
“준서 씨 생일날, 나 휴가 신청해 놨어요.”
하준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랑 같이 있어 주려고?”
“네. 그리고 그날….”
말끝을 흐린 서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들어 하준서에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생일 축하 선물로 우리… 그 방에 들어가서 놀아요.”
까치발을 거두고 하준서를 바라보자 그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이라면… 그 방?”
하준서가 확인하듯 물었다. 서하윤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만나면서 하준서의 집에는 자주 놀러 갔지만 그 방에는 결단코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하준서가 자신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을 보니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어졌다. 물론 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래 만나면서 그가 자신을 언제나 다치게 하거나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도 굳건해졌다.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갈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정말 괜찮겠어? 무섭지 않겠어?”
하준서가 다시 확인했다.
“네. 그거 있잖아요. 세이프 워드. 그러니까. 준서 씨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도 좋아요.”
서하윤의 말에 하준서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마치 꽃이 만개하는 걸 보는 기분이었다.
하준서가 고개를 숙여 가볍게 키스했다. 애정이 담뿍 담긴 키스에서는 치약 맛이 났다. 그런데도 달콤하게만 느껴졌다.
“기대하고 있을게.”
하준서가 귓가에 속삭였다. 서하윤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