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벼운 XX씨-102화 (102/125)

102화

탁자에 턱을 괸 채 한숨을 몰아쉬려니 알코올 냄새가 폴폴 풍겼다. 서하윤은 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인 빈병들을 눈으로 대충 세었다. 확실히 제법 마시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기분이 좋아서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좋다….”

서하윤은 턱을 괸 채 나른하게 말했다.

“뭐가 그리 좋아?”

최상혁이 다시 빈 잔을 채워 주며 물었다.

“그냥… 이거요. 아침에 출근하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퇴근해서는 이렇게 애인이랑 영화도 보고 불금을 즐기고…. 상혁 씨랑 술도 한잔하고. 얘기도 나누고. 이런 거 너무 좋아요. 하루하루가 충만한 기분이랄까.”

“그래서, 행복해?”

최상혁이 물었다. 행복하냐니. 굉장히 큰 질문이었다.

서하윤은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네. 행복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최상혁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래서 고마워요.”

서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최상혁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크고 단단하며 굳은살이 많이 박인 손이 그렇게 든든하고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과거의 서하윤이든, 지금의 서하윤이든…. 상혁 씨 아니었으면 이런 일상의 행복 같은 거 꿈도 못 꿨을 거예요. 이거 다 상혁 씨가 준 거잖아요. 그래서 너무 고맙고… 또 고맙고….”

거기까지 말한 서하윤은 최상혁의 손을 만지작거리다 깍지를 껴서 잡았다.

“그래서 나도 상혁 씨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요.”

깍지 끼느라 살짝 앞으로 당겨진 최상혁의 손목에서 손목시계가 반짝였다. 그가 평소에 끼던 것만은 못하지만 제법 값이 나가는 손목시계는, 서하윤이 석 달 치 월급을 모아 선물한 것이었다. 최상혁은 다른 값비싼 시계들을 모두 놓아두고 요즘 들어 항상 그것만 차고 다녔다.

그의 손목에 감겨 있는 그 시계를 볼 때마다 서하윤은 괜히 마음이 흐뭇해졌다. 최상혁이나 하준서가 자신에게 이것저것 선물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사 준 선물을 지니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즐겁고 흐뭇했다.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상혁 씨 옷도 사 주고 구두도 사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아무튼 호강시켜 줄게요.”

서하윤은 월급쟁이 주제에 큰소리를 빵빵 쳤다. 최상혁이 비록 코웃음을 쳤지만 눈매가 느슨한 것이, 그 말이 제법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럼 열심히 돈이나 모아. 쓸데없는 데 돈 쓰고 다니지 말고. 내가 생활비 하라고 카드 준 건 왜 안 써.”

서하윤의 지갑에는 여전히 최상혁과 하준서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돌려주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절대 돌려받지 않고 있었다.

“나도 돈 버니까 내 생활비는 내 돈으로 써야죠.”

“벌어 봐야 얼마나 번다고. 까분다.”

최상혁이 자꾸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가끔 쓰고 있어요. 그걸로 점심도 사 먹고 커피도 사 먹고….”

서하윤의 말에 최상혁이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문자 창을 하나 골라 띄우더니 읊기 시작했다.

“**커피 1,500원. **식당 7,500원. **커피 1,500원. 일주일간 쓴 게 고작 이거야? 커피는 어디 자판기 커피라도 빼 먹은 거야? 1,500원? 금액이 이게 뭐야?”

“카페에서 파는 커피라고 다 사오천 원 넘어가는 것만 있는 거 아니에요. 테이크아웃 전문점 커피가 얼마나 좋은데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1,500원밖에 안 하고, 심지어 양도 많고 맛있다고요.”

최상혁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그는 카페에서 파는 커피에 1,500원짜리가 있다는 걸 영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적어도 엄청나게 싸구려 커피를 사 먹는다고 오해하고 있는 듯했다.

“어쨌든, 이사님은 모르시는 그런 서민들의 세계가 있답니다.”

서하윤은 더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대충 말을 마무리했다.

“이런 싸구려 사 먹지 말고 제대로 된 걸 사 먹어.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최상혁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잔소리를 했다.

“네- 네-”

서하윤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술을 홀짝거렸다. 최상혁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하지만 모른 체했다.

회사에는 이미 서하윤이 부잣집 아들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파다했다. 회사에 취직했다는 소리에 최상혁과 하준서에게 번갈아 끌려다니며 값비싼 정장을 몇 벌을 맞췄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 차고 다니는 손목시계는 모르긴 몰라도 제일 싼 게 몇백만 원대일 터였다.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몸에 기본적으로 장착한 것부터가 그런데, 몰고 다니는 차는 하준서가 사 주었던 BMW다. 아반떼 정도로 바꿔 달라고 했다가 차 바꾸는 데 돈이 더 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타고 다니게 되었다.

고작 스물세 살짜리 고졸 사원이 그렇게 휘황찬란하게 하고 다니니, ‘나는 뒷배가 있습니다.’ 하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최상혁의 입김이 들어간 낙하산이라는 소문까지 합하면…. 뭐, 더 할 말이 뭐가 있으랴.

때문에 서하윤은 평소에 회사에서 최대한 사람들과 비슷하게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월급쟁이답게 새로 생긴 제일 싼 테이크아웃 전문점 커피를 사서 마시고, 점심도 가성비를 따져 가며 찾아 먹으러 다녔다. 가끔 선배들이 밥이나 커피를 쏘면 쌍수 들고 만세를 외치며 얻어먹었다. 하다 보니 진짜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말 안 듣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 서하윤.”

최상혁이 볼을 꼬집으며 타박했다. 서하윤은 살짝 꼬집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야아야 아픈 척을 잔뜩 했다. 최상혁이 어디서 연극을 하느냐는 듯이 눈으로 욕을 했다. 서하윤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툭하면 눈으로 욕하는 게 너무 귀여웠다. 이 묵직한 남자가 날이 갈수록 귀엽게 보이니 큰일이었다.

“귀여워.”

서하윤은 저도 모르게 속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합, 하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뭐? 귀여워?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최상혁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큰일 났다. 서하윤은 얼른 턱을 괴고 있던 팔에 힘을 풀며 탁자 위로 흐물흐물 늘어졌다.

“아… 나 너무 취했나 봐요.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까분다, 서하윤.”

“아우… 너무 취해….”

서하윤이 계속 취한 행세를 하자, 최상혁은 더는 추궁하는 것을 관두고 혀를 찼다.

“됐고, 집에 가자.”

최상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서하윤을 부축해 일으켰다. 서하윤은 취한 척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좀 취하기는 해서 그대로 최상혁에게 기댄 채 비틀비틀 술집을 나섰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내가 쏜다를 연발하며 자신의 카드로 당당하게 계산을 마쳤다.

대리 기사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서하윤은 최상혁의 어깨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내쉬는 숨에서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겨 그 냄새에 다시 한번 취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마침내 집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없어야 할 집 안에 누군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었다.

***

“하준서?”

“준서 씨?”

거실 소파에 버티고 앉아 있는 인영을 본 최상혁과 서하윤이 거의 동시에 그를 불렀다.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던 하준서가, 최상혁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하며 들어온 서하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에 어쩐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준서 씨, 그게….”

갈비찜을 해 놓고 기다리는 하준서에게 거짓말을 하고 바람맞혔다. 지은 죄가 있는 서하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최상혁이 그 말을 자르고 나섰다.

“남의 집에서 멋대로 뭐 하는 짓이야. 죽고 싶어?”

“그러는 너야말로, 우리 협의는 이제 기억도 안 나나 보지? 나랑 선약 있는 거 뻔히 알았을 텐데 그걸 낚아채 가다니, 너야말로 죽고 싶냐?”

둘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서하윤은 지은 죄가 있는지라 하준서와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중간에 낀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시끄럽고, 빨리 내 집에서 꺼져.”

“누군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하윤아, 가자.”

하준서가 소파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서하윤을 잡아끌었다.

“새끼야. 어딜 손대. 애 취한 거 안 보여?”

최상혁이 서하윤을 잡아끄는 하준서의 손을 거칠게 내쳤다. 하준서의 얼굴이 무표정해졌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서하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하준서는 정말 화가 난 것이다.

“상혁 씨. 저 이제 가 볼게요. 원래 준서 씨랑 선약이 있었는데… 제가 약속을 어겼어요. 내가 잘못한 거니까 준서 씨랑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서하윤은 최상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하준서의 손을 잡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준서 씨. 맘먹고 속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했어요. 일부러 나 먹으라고 갈비찜까지 준비했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서하윤이 몇 번이고 사과하자, 하준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조금 느슨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풀린 기색은 아니었다.

“애보고 뭐라 하지 마. 내가 사무실로 불러올렸어. 상사가 올라오라는데 어쩔 거야. 오라면 오는 게 사원들 하는 일이지.”

최상혁이 서하윤의 난감한 상황을 덜어 주려는 듯 그답지 않게 대신 변명을 해 주었다.

“너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똑같이 갚아 주는 수가 있어. 나라고 너랑 하윤이랑 둘이 놀 때마다 파투 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안 그러는 건 줄 알아?”

하준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상혁이 험악한 얼굴로 뭐라 내뱉으려다, 자신의 옷을 잡아당기는 서하윤을 보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준서 씨. 오늘은 내가 진짜 잘못했어요. 적어도 사실대로 말했어야 하는 건데. 정말 미안해요. 화 풀어요. 네?”

이번에는 정말 서하윤이 잘못한 게 맞았다. 하준서와 선약이 잡혔으면, 좀 난감해지더라도 최상혁의 부름은 거절했어야 했다. 아니면 적어도 사실대로 말하고 약속을 깼어야 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 많이 참고 있을 두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중간에서 잘못하는 바람에 싸움이 난 것 같아 두 사람을 볼 면목이 없었다.

하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잠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하윤을 빤히 응시하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정말 미안해?”

“네. 정말 미안해요.”

“아까 벌충하겠다는 말, 진심이었어?”

“물론이에요.”

서하윤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 너 오늘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

어쩐지 엄청난 걸 하자고 할 것 같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서하윤은 하준서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과, 그가 절대 자신을 해치거나 상처 입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믿었다.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 알았어요. 하자는 대로 할게요. 그럼 화 풀 거죠?”

“그래.”

하준서의 대답에 서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뭐야. 잘못한 것도 없는 애한테 뭘 시키겠다는 거야. 하준서, 지금 내 앞에서 얘를 데리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최상혁이 서하윤의 어깨를 끌어안아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말했다. 하준서가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안 데려가.”

“뭐?”

“안 데려갈 거라고. 여기서 같이 놀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꺼지기나 해.”

최상혁이 험악하게 말했지만 하준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하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하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손을 맞잡았다. 하준서가 서하윤의 손을 잡은 채 방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준서!”

최상혁이 성난 목소리를 내며 따라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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