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하윤 씨. 이거 앞뒤로 카피 30부만 떠 줘요.”
“네.”
“3시 회의니까 빨리 처리해 주고, 회의실에 회의 준비 좀 세팅해 놓고요.”
“네. 대리님.”
서하윤은 얼른 파일을 받아 들었다. 이제 30대 중반인 윤 대리가 그 파일 위에 홍삼 스틱 하나를 올려 주며 말했다.
“우리 하윤 씨는 얼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니까. 우리 남편이 하윤 씨 1/10만 닮았어도 얼마나 좋을까?”
서하윤이 알기로 윤 대리는 결혼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신혼이었다. 그런데도 서하윤을 볼 때마다 이렇게 말장난을 쳤다. 대충 농담으로 받아들이면 될 정도였다. 물론 윤 대리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으면 기분이 영 별로였겠지만 말이다.
“자, 얼른 가 봐요.”
윤 대리가 손짓했다.
“이거 잘 먹겠습니다.”
서하윤은 윤 대리가 건넨 홍삼 스틱을 들어 보이며 깍듯이 인사했다. 그런 다음 몸을 돌리고 시계를 확인했다. 복사하고 회의 준비까지. 다행히 제법 시간이 남았다.
서하윤은 일단 파일을 들고 복사실로 향했다. 복사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사용하게 된 복사기를 세팅하고 복사를 시작했다.
복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하윤은 복사기 앞에 있는 거울을 힐끗거렸다. 검은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했다. 목에 걸린 사원증에는 총무팀 서하윤이란 글자가 박혀 있었다. 정장 차림에 사원증을 건 자신이라니. 볼 때마다 가슴이 뿌듯해졌다. 서하윤은 살짝 미소를 머금어 호감이 가는 표정을 연습했다.
최상혁의 회사에 들어온 지 어느덧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하윤은 3달간의 인턴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처음에는 어리바리했던 회사 생활에도 많이 익숙해졌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회사 내에서 친근한 대화를 나눌 사람도 제법 생겼다. 로망이라면 로망이었던, 점심시간에 사원증을 목에 걸고 아메리카노를 빨며 거리 걷기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하윤은 자신을 속으로라도 더는 김민석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서하윤으로서의 기억이 완전히 다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요즘 다니는 병원에서는 최면 치료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두 개의 인격을 천천히 합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치료라고 했다.
그 치료 덕분인지, 아니면 조금씩이나마 되찾고 있는 기억들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면 서하윤으로 산 시간 덕분인지…. 자신이 서하윤이라는 사실에 더 이상 거부감이나 어색함, 거북함 따위를 느끼지 않았다. 자신을 완전히 서하윤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지잉-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힐끗- 복사실 입구를 한번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꺼냈다.
난 연습 끝나고 쉬는 중. 연습하느라 점심시간 지난 줄도 몰랐네. 하윤이는 점심 잘 먹었어?
하준서의 문자였다. 그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기분이었다. 서하윤은 슬그머니 웃으면서 답 문자를 썼다.
맛있게 먹고 커피도 얻어먹었어요. 연습 바빠도 끼니는 챙겨요. 그러다 몸 상할라.
문자를 보내자 잠시 후 다시 답이 왔다.
알았어. 안 그래도 이제 챙겨 먹으려고. 저녁은 갈비찜 해 둘 테니까 기대해.
오케이.
마지막 문자를 보낸 서하윤은 핸드폰을 얼른 주머니에 돌려 넣었다. 근무 시간에 핸드폰 쓰는 걸 보여서 좋을 일이 없었다. 막 복사가 끝난 따끈따끈한 서류를 챙겨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러고서 복사실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앗… 죄송….”
문을 벌컥 열자마자 눈앞에 서 있는 시커먼 벽에 콩 부닥치고 말았다. 습관적으로 사과하던 서하윤은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최상혁이 거기에 우뚝 서 있었다.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김 실장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 이사님. 여기는 웬일로….”
회사에서는 모른 척하며 지내기로 했으므로 이렇게 마주칠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마주쳐도 꾸벅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 최상혁이 이렇게 들이닥칠 때가 있었다. 서하윤은 그것에 질색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다.
최상혁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복사실로 밀고 들어왔다. 그의 몸에 밀리다시피 해서 복사실 안으로 뒷걸음질 친 서하윤은, 최상혁이 문을 잠그는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저 회의 준비하러 가야 해요.”
“누가 시켰는데?”
“윤 대리님이….”
“그럼 나는 누군데?”
“이사님이시죠….”
“그럼 누구 말이 우선이지?”
“그거야 이사님….”
서하윤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답하자, 최상혁이 손가락으로 서하윤의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명령했다.
“그럼 입이나 열어.”
“안… 읍…!”
최상혁이 그의 뒤통수를 낚아채며 바로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곧장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를 의미심장하게 잡아 주물렀다.
“으읍… 으응… 응….”
처음에는 반항을 시도하던 서하윤도 이내 키스에 푹 빠져들었다. 복사실 안에 둘의 혀가 엉키는 질척거리는 소리와 가쁜 숨소리가 울렸다.
뚜벅. 뚜벅.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최상혁의 목에 팔을 감은 채 적극적으로 키스에 응하던 서하윤은 그 소리에 흠칫 몸을 굳히고는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최상혁이 불만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이러다 들켜요, 진짜. 빨리 가세요!”
서하윤은 그렇게 낮은 소리로 외치며 벽에 걸린 거울 앞에 섰다. 붉게 물든 채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문질러 닦고 흐트러진 옷차림을 정리하고 나서 뒤돌아서자, 최상혁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을 한 채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알고 있다. 그는 회사에서 항상 바빴다. 그런 그가 이렇게 틈을 내고 사람들 눈을 피해 올 정도면 엄청나게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게 고마우면서도 엄청나게 곤란했다.
“이거 봐 봐. 이러고 나가면 큰일 나요.”
서하윤은 얼른 다가가 최상혁의 젖은 입술을 닦고 옷차림을 정돈해 주었다. 그 손길에 최상혁의 불만스러운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오늘 바로 퇴근하지 말고 남아 있다가 7시까지 내 사무실로 와.”
최상혁이 서하윤의 허리를 낚아채며 말했다. 서하윤은 아까 문자로 나눈 하준서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흠칫했다. 그걸 귀신처럼 알아챈 최상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그 새끼랑 약속 있어?”
“같이 저녁 먹기로 해서… 갈비찜 해 놓는다고 했는데….”
최상혁이 또 눈으로 욕을 했다.
“갈비찜이 중요해, 회사가 중요해?”
“아니, 회사 일이 아니라 상혁 씨가 남으라고 한 거잖아요.”
“내가 바로 회사야.”
최상혁이 거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어제도 그제도 그 새끼 집에서 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첩년이랑 놀아나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첩년이라뇨…. 준서 씨한테 실례잖아요.”
서하윤이 조심스레 나무라자, 최상혁이 콧방귀를 뀌었다.
“첩년을 첩년이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됐고, 7시까지 내 사무실로 와.”
멋대로 다시 통보한 최상혁이 서하윤의 엉덩이를 한번 꽉 주무르더니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붙잡기도 전에 복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서하윤은 그를 잡아 안 간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혹시 회사 사람들 눈에 띌까 싶어 따라 나가지는 못했다.
“완전 제멋대로….”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던 서하윤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 기겁했다. 회의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서하윤은 재빠르게 복사한 서류를 챙겨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서하윤 목에서 사원증이 나풀나풀 휘날렸다.
회의실에 생수와 다과를 배치하고 장비를 세팅했다. 복사한 서류를 각자 자리에 각 잡아 세팅하는 것까지 마친 서하윤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시간이 남았었는데, 회의 시간까지 아슬아슬해져서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을 해치웠다. 이게 전부 다 최상혁의 잘못이었다.
회의는 제법 길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니 이미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다름 아닌 불금. 일이 남은 소수만 제외하고 모두 신나는 얼굴로 칼퇴근을 했다. 서하윤은 일이 남은 체하며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책상 앞에 앉아 시계를 확인한 서하윤은 한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한참 망설이다가 하준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회사에 일이 좀 남아서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요. 이미 음식 다 했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내가 다음번에 꼭 벌충할게요.
문자를 보낸 서하윤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기다리자 하준서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회사 일이면 어쩔 수 없지 뭐. 일 잘 마무리하고 퇴근 조심히 해.
네. 미안해요.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문자를 보낸 서하윤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엎드려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최상혁이 낚아채 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 하준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모른 척해 주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조금 남은 시간 동안 서하윤은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고 책상 위도 정리했다. 청소는 아주머니가 따로 있어서 신입이 부러 할 필요 없었다. 그렇게 거의 7시가 다 되어 갈 때쯤,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빨리 와.
최상혁이었다.
하준서와의 약속을 억지로 깨뜨린 것과 회사 사람들 눈에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복사실까지 찾아온 것. 두 가지 때문에 짜증이 좀 났었다. 하지만 막상 이사실에 간다고 하니 짜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은밀한 기대감이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