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서하윤은 망설였다. 최상혁과는 어젯밤 회포를 풀었으니 이제 하준서 차례이기는 했다. 그런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어젯밤 이야기가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게다가 오랜 섹스로 지친 몸 때문에 오늘은 딱히 성욕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섹스하려고 가자는 거 아니에요. 그냥 내 구역에서 하윤 씨랑 단란하게 시간 보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하준서가 속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말했다.
“아, 그걸 걱정한 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표정 보면 빤한데. 어제 밤새도록 최상혁한테 기를 쪽쪽 빨려서 더는 못 하겠죠? 더는 나올 정액도 없죠?”
서하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만 살짝 굴렸다.
“최상혁 그 새끼, 치사해 빠져서는.”
하준서가 최상혁 욕을 하더니 이내 서하윤의 어깨에 다정하게 팔을 두르며 졸랐다.
“우리 집 가서 오손도손 시간 좀 보내요. 석 달이나 못 만났는데, 어젯밤에는 최상혁 새끼한테 양보씩이나 했잖아요. 이제 내 차례 아니에요? 나랑 맛있는 것도 해 먹고, 재밌는 것도 보고, 피아노도 쳐 줄게요. 철이랑 순이랑도 놀아 줘야죠.”
하준서의 말에 석 달간 했던 상상이 다시 떠올랐다. 밤 시간, 홀로 모텔 방에서 외로울 때면 항상 두 사람을 떠올렸다. 하준서를 생각할 때면 항상 그와 보냈던 단란한 시간이 떠올랐다.
“그 방….”
“그 방?”
“네. 그 방에만 안 데려간다고 약속하면.”
서하윤은 얼른 조건을 내걸었다. 하준서의 눈웃음이 진해졌다.
“그때 일이 그렇게나 충격이었어요? 내 집 생각하면 그 방 먼저 생각날 정도로?”
“그럼요. 얼마나 놀랐는데요. 오죽하면 소변을 못 봤겠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그 방은 당분간 안 쓰는 거로 해요. 내가 그랬잖아요. 바닐라 대하듯이 하겠다고.”
“그럼 좋아요.”
서하윤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준서가 그의 볼에 뽀뽀를 쪽 했다.
“자, 그럼 우리 짐 챙겨요. 하룻밤이라도 같이 놀러 가는 것처럼 짐도 챙기고 해서 가요.”
하준서가 신나서 일어났다. 그렇게 들떠 하니 서하윤도 괜히 놀러 가는 기분이 되었다.
둘은 드레스 룸으로 가서 속옷과 잠옷, 양말을 골라 적당한 가방에 챙겨 넣었다. 몇 박 며칠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데 짐 싸는 것 자체가 재밌었다. 금방 끝나 버린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어서 가요.”
하준서가 가방을 들고 재촉했다. 서하윤은 그를 잠시 잡아 앉혀 놓고 최상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rrrr----
통화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하자 괜히 긴장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상 하면서도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쉽게 지워지질 않았다.
-여보세요.
최상혁이 전화를 받았다.
“나예요.”
-알아.
최상혁은 늘 그렇듯 말이 짧았다. 서하윤은 빨리 말하라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하준서의 손을 밀어내고는 없는 용기를 끌어 올려 입을 열었다.
“저 이제 준서 씨 집에 놀러 가려고요. 가서 오늘 하룻밤 자고 오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말해 놓고 나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핸드폰 너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역시 안 된다고 할까. 화를 낼까? 당연히 화가 나겠지. 어제 그렇게 좋은 시간을 보내고 사랑한다는 말까지 했는데, 바로 다음 날 하준서의 집에 가서 외박하겠다니 기가 막히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그럴 만한 일이었다.
-후우….
핸드폰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서하윤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런 일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 없어. 이미 합의가 끝난 일이야. 하준서 그 새끼에 대해서만큼은 터치 안 할 테니까 그렇게 눈치 보고 다니지 마.
의외로운 말에 서하윤은 눈을 크게 떴다. 최상혁이 이렇게 너그러운 말을 하다니….
“고마워요.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걱정할지도 모르니 어디 나가거나 놀러 갈 때는 꼭 얘기하고 다닐 거예요.”
-그래. 그게 좋지. 그건 꼭 그렇게 해.
“네.”
-재밌게 놀고 와. 물론… 재밌게 놀아날 힘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엑….”
뚝. 전화가 끊겼다. 역시… 최상혁도 뒤끝이 있긴 있었다. 어젯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는 자신을 붙들어 기어코 정액 방울이 찔끔찔끔 겨우 나올 때까지 짜내더라니. 이런 속셈이 있었던 거다.
“벌써부터 첩 단속한다 이거지.”
통화 내용이 거의 다 들렸던 모양이다. 옆에 붙어 앉아 있던 하준서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그 와중에 미소는 짓고 있어서 괜히 무서워 보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준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서하윤을 일으켰다.
“얼른 가요.”
“네.”
두 사람은 바로 옆 동에 가면서도 소풍 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철이야~ 순이야~”
서하윤은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고양이 두 마리부터 찾았다.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녀석들은, 서하윤의 모습을 확인하고 살랑살랑 걸어왔다. 서하윤은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녀석들의 환영 인사를 받았다. 머리를 콩 부딪치고 종아리에 온몸을 비비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 보고 싶었어? 나도 보고 싶었어.”
서하윤은 한 마리씩 잡아 볼때기에 뽀뽀를 쪽쪽 했다. 귀여운 생물을 대할 때 무릇 그렇듯 목소리 톤이 한껏 올라가 있었다. 하준서는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소파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하윤 옆에 같이 쪼그리고 앉더니 환영 인사 대열에 합류했다.
“나도 좀 예쁘다 예쁘다 해 줘 봐요.”
하준서가 고양이들이랑 나란히 앉은 채 말했다.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엉덩이로 고양이들을 슥슥 밀어내며 하는 말에, 서하윤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예요. 이제는 고양이한테도 질투해요?”
“그럼요. 고양이가 좋아요, 내가 좋아요?”
하준서가 장난스레 물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서하윤은 하준서의 얼굴을 잡아 고양이들한테 했던 것처럼 쪽쪽 뽀뽀를 했다.
“당연히 준서 씨가 더 좋죠.”
서비스성 발언에 하준서가 눈웃음을 치며 서하윤을 꽉 끌어안았다.
둘은 나란히 부엌에 들어가 간식거리를 준비했다. 영화 볼 준비를 하는 거였다.
본격적으로 팝콘도 전자레인지에 돌려 튀기고 반건조 오징어에 나초, 맥주까지 완비했다. 그렇게 거실 테이블에 세팅을 마친 둘은 아예 잠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같이 무릎 담요를 덮고 영화를 신중하게 골랐다.
둘은 영화를 보면 주로 시리즈물을 보기 때문에 첫 시작에 신중했다.
이번에 고른 것은 〈쏘우〉 시리즈였다. 워낙 시리즈가 많아서 인터넷으로 보는 순서를 검색해야 했다. 그렇게 차례를 확인한 다음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가 시작하자 둘은 자동적으로 딱 달라붙었다. 하준서는 서하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서하윤은 하준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자세가 되었다. 그 자세는 매우 편안해서, 마치 베개를 베고 있는 기분이었다.
시원한 맥주를 몇 모금 마시고 나초에 살사 소스를 듬뿍 찍어 와작와작 씹어 먹으며 보는 영화는 정말 재밌었다. 긴장감에 입이 마를 때마다 맥주로 입 안을 축여 주는 것이 묘미였다. 심하게 극적인 장면이 나오면 서로 손을 꽉 잡고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변을 맴돌며 애옹애옹 울어 대던 철이와 순이도 곧 소파에 각자 자리를 잡고 몸을 동그랗게 만 채 잠을 자기 시작했다.
“좋네요, 이런 거.”
내용이 느슨해졌을 때쯤, 하준서가 문득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서하윤은 기대고 있던 하준서의 어깨에 쪽,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 다시 머리를 기대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게요. 좋네요, 이런 거…. 해운대에 있을 때 생각 많이 했어요. 준서 씨랑 이렇게 나란히 앉아서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철이랑 순이는 옆에서 그르릉거리고…. 이런 게 그렇게 그립더라고요.”
옆에서 그윽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들자, 하준서가 조심스레 입을 맞춰 왔다. 부드럽고 상냥한 키스였다. 키스로 전해지는 마음이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서하윤은 손을 뻗어 하준서의 머리칼에 손을 파묻었다. 결 좋은 갈색 머리칼이 손안에서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보고 싶었어요.”
하준서가 입술을 떼어 내며 속삭였다. 그리고 물었다.
“하윤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죠. 많이요.”
서하윤의 대답에 하준서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둘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키스에 골몰했다. 그 바람에 덮고 있던 담요가 스르륵 떨어졌다. 하준서가 서하윤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뒤로 드러누웠다. 서하윤이 하준서 위에 올라 누운 모양이 되었다. 서로의 몸이 바짝 맞닿고 다리가 얽혔다. 두 사람은 부드러운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상대의 몸을 연신 쓰다듬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고 상냥했던 키스에 점점 욕망이 깃들었다. 서로의 몸을 쓰다듬던 손길도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바짝 맞닿은 몸 덕분에 서로의 변화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하윤은 잠옷 너머로도 뜨거움이 느껴질 만큼 팽팽하게 발기한 그의 성기를 매만졌다. 손 아래 느껴지는 단단함과 뜨거움에 자신도 모르게 몸에 열이 올랐다.
“하윤 씨 것, 섰어요.”
하준서가 속삭였다. 새벽까지 있는 정액 없는 정액을 다 짜냈는데도, 서하윤의 것은 또 발기하고 있었다.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세운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 사실이었다.
“말해 봐요. 하고 싶어요? 너무 힘들면 내가 참을게요.”
하준서는 성기를 우뚝 곤두세운 채로도 상냥하게 속삭여 물었다. 서하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손안에 만져지는 우람한 성기의 단단함과 뜨거움에 이미 몸속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그렇게 해대고 더는 죽어도 못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또 하고 싶었다. 손안에 만져지는 이 뜨거운 것을 몸속 가득 품고 싶었다.
“하고… 하고 싶어요.”
서하윤은 부끄러움을 내비치면서도 솔직하게 말했다. 하준서가 예쁘게 눈웃음 지었다.
“나도 너무 하고 싶었어요. 솔직히 어제 해운대 카페에서 하윤 씨 본 순간부터 덮치고 싶어 죽을 뻔했어요. 느껴지죠? 내가 얼마나 하고 싶은지.”
마지막 말을 속삭이며, 하준서가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서하윤의 몸에 대고 슥슥 문질렀다. 그것만으로도 배 속 깊은 곳이 찡해졌다. 마치 빨리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뒤가 멋대로 입을 오물거렸다.
“진짜 하고 싶은가 보네. 하윤 씨 눈가가 발갛게 변한 거 알아요? 완전 섹시해요. 나 너무 꼴려서 이대로 쌀 것 같아.”
“안 돼요. 싸려면… 내 안에 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