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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XX씨-96화 (96/125)

96화

“다녀오지.”

최상혁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돌아섰다.

“다녀오세요….”

서하윤은 꽉 잠긴 목소리로 최상혁을 배웅했다. 그리고 제 할 일을 겨우 다 해냈다는 듯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정신이 다시 까마득한 어둠으로 추락했다.

간신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한낮이었다. 코끝으로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흘러들어 혼몽 중에도 입에 침이 잔뜩 고였다. 눈꺼풀이 하도 무거워서 여기가 꿈속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하윤 씨. 하윤 씨?”

부드러운 목소리와 손길이 비몽사몽 중인 서하윤을 연신 깨웠다. 그렇게 한참 이름을 불린 다음에야 겨우 눈이 떠졌다.

“어우….”

눈을 뜬 서하윤은 일단 앓는 소리 먼저 냈다. 마치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허리와 엉덩이는 아프지,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지, 온몸에 힘은 안 들어가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 수 있었다.

“어젯밤에 대단했나 보네요?”

하준서가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눈에 심술이 뽁뽁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서하윤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부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오느라 피곤했었나 봐요.”

물론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고작이라 치기엔 뭐하지만, 어쨌든 몇 시간 차를 타고 올라오는 걸로 이렇게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해질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들은 하준서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는 이내 빙긋이 웃으며 서하윤을 부축해 일으켰다.

“보아하니 새벽까지 시달린 것 같은데, 배가 얼마나 고프겠어요. 얼른 밥 먹어요.”

밥이라는 말에 흐물흐물 늘어지던 몸에 힘이 조금 돌아왔다. 코끝을 스치는 맛있는 냄새가 창자를 쥐어짰다.

“밥….”

서하윤은 그리운 사람을 부르듯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간신히 내려섰다. 그리고 하준서의 부축을 받은 채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움직였다.

식탁 앞에 서하윤을 앉힌 하준서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아까부터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하던 것의 정체는 역시나 김치찌개였다. 서하윤은 황홀한 눈으로 김치찌개와 김, 계란말이와 볶음 멸치 따위를 훑어보았다. 어떻게 보아도 꿀 조합이었다.

하준서가 김치찌개를 그릇에 덜어 주고는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어서 먹어요.”

하준서가 권했다. 숟가락을 쥔 손이 어찌나 기력이 없는지 약하게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을 본 하준서가 쯔쯔 혀를 찼다.

“잘 먹겠습니다.”

서하윤은 서둘러 인사하고 숟가락을 움직였다. 김치찌개를 한 수저 떠서 입 안에 넣는 순간, 모두가 알 그 맛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

감탄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린 서하윤은 따뜻한 밥을 한 그릇 푹 떠서 후후 불어 김에 싼 뒤에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계란말이를 반으로 잘라 입에 밀어 넣고 김치찌개 국물을 떠서 호로록 마셨다. 입 안에서 아름다운 오페라가 울려 퍼졌다.

“너무 마시떠요.”

서하윤은 뜨거운 밥을 호옥호옥 식혀 가며 말했다. 하준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침. 아니, 점심 식사는 그렇게 허겁지겁 이루어졌다. 어찌나 맛있는지 먹는 내내 행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일 줄 아는 사람이 내 애인이라니. 난 무슨 복이 이렇게도 많은 걸까. 서하윤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식사를 마쳤다.

“잘 먹었습니다.”

밥알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그릇을 비운 서하윤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숨을 몰아쉬었다.

“나야말로 잘 먹어 주니 고맙네요.”

하준서가 다정하게 말하며 티슈로 서하윤의 입가를 슥슥 문질러 닦아 주었다.

그제야 눈앞의 하준서가 제대로 보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서하윤은 자신이 아직 세수와 양치도 하지 않은 상태임을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애인에게 이런 더러운 모습을 보이다니,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씻고 올게요!”

서하윤은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다행히 마지막에 샤워하고 잠옷을 껴입었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곯아떨어졌으면 큰일 날 뻔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서하윤은 마지막에 샤워실에서 이사님을 연신 부르며 시달렸던 기억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최상혁이 그런 데 꽂힐 줄이야. 정말 의외였다. 물론 그러는 자신도 함께 불타올라 열심히 이사님을 외쳤지만 말이다.

서하윤은 폭풍 양치와 세수를 하며 간밤, 아니지. 새벽의 기억을 잊으려고 애썼다. 한참이나 찬물로 세수하고 나서야 얼굴에 올랐던 열이 좀 가라앉았다. 서하윤은 내친김에 샤워도 해 버렸다. 씻고 바로 자는 바람에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샤워하고 옷까지 골라 입고서야 거실로 나갔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어느새 과일과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준서 씨는 정말 부지런한 것 같아요.”

서하윤은 하준서 옆에 앉으며 말했다. 생각해 보면 하준서는 늘 먹을 것을 준비하고, 입을 것을 준비하고, 옆에서 다정한 말을 건네주는 걸 잊지 않았다.

“내가요? 내가 얼마나 게으른데요. 나 요즘 피아노 연습도 안 해요. 하루 종일 우리 하윤 씨 볼 생각 하느라.”

“그래도 연습은 해야죠. 피아니스트인데 연습도 일이잖아요?”

“그렇죠. 일이죠. 근데 하윤 씨 때문에 나 일도 못 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하준서가 은근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서하윤은 몇 시간 전까지 최상혁과 뜨거운 섹스를 한 뒤라 하준서의 접근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이러다 분위기가 뜨거워지기라도 하면 큰 문제였다.

“일하니까 생각난 건데….”

서하윤은 서둘러 말을 꺼내며 하준서를 슬쩍 밀어냈다. 그리고 주스 잔을 들어 접근을 막으며 말을 이었다.

“저 오늘부터 자격증 공부하려고요.”

“자격증이요? 무슨 자격증이요?”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을 알면서도 하준서는 순순히 넘어가 주었다.

“컴활이요.”

“아하.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요?”

“저 취직하기로 했거든요. 상혁 씨 회사에 채용해 준대요. 대신 조건이 컴활 자격증 따 오는 거였어요.”

“최상혁 회사에요?”

“네.”

하준서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왜 그래요? 상혁 씨 회사에서 일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요?”

서하윤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하준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자식 회사에 취직하면 하루 종일 그 자식이랑 같이 있을 거 아니에요. 밤이고 낮이고 그 자식이랑 붙어 있겠다는데, 그게 좋을 리가 있겠어요? 우리 둘 다 끼고 살겠다면서요. 그럼 공평해야죠. 아무리 그 자식이 본처라지만 나한테 너무한 거 아니에요?”

하준서가 이렇게까지 반발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이렇게 나올 만도 했다. 서하윤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냥 그 회사에 취직하는 거지, 상혁 씨랑 하루 종일 붙어 있고 그런 거 아니에요. 원래는 비서로 오라고 했는데… 그건 너무 붙어 있게 될 것 같아서 내가 거절했어요. 나는 그냥 그 회사 고졸 인턴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더구나 상혁 씨는 이사님이니까 말단 인턴 직원이랑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어쨌든 같은 회사에 출근하고 퇴근하겠다는 거잖아요. 뭣보다 말단 직원이면 이사가 까라면 까야 하는 위치 아니에요? 막말로 그 새끼가 심심할 때마다 이사실로 불러올려서 이런 짓 저런 짓 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준서의 말은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변했다. 이사실에 불려서 연신 이사님을 부르며 이런저런 야한 짓을 당하는 장면이 절로 떠올랐다.

“하윤 씨, 설마 지금 상상하는 거예요?”

하준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서하윤은 흠칫하며 고개를 열심히 내저었다. 하지만 하준서는 확신한 듯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추궁하는 눈빛을 보냈다.

“아니… 준서 씨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나도 모르게….”

서하윤은 깨깽하는 심정이 되어서 웅얼거렸다. 가뜩이나 어제 최상혁과 먼저 거사를 치른 바람에 하준서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더 미안한 마음이 되었다.

“나한테 미안해요, 안 미안해요?”

하준서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미안해요….”

서하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도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그 회사는 들어가고 싶어요. 솔직히 내가 학력이 있어요, 경력이 있어요. 나 같은 사람 써 줄 회사는 거의 없을 거예요. 일한다고 해 봐야 아르바이트나 전전하겠죠. 그런데 상혁 씨가 회사에 정식 직원 될 기회를 주겠다는 거잖아요. 인턴으로 들어가서 열심히 하면 정직원도 될 수 있을 거고…. 나도 제대로 된 회사에서 사회인으로서 일해 보고 싶어요. 돈도 내 힘으로 벌고 싶고요.”

하준서가 생각하는 눈으로 서하윤을 빤히 응시했다. 잠시 그렇게 서하윤을 바라보던 하준서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뭐…. 고졸에 아르바이트 경력밖에 없으니 지금 와서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하기는 힘들겠죠. 이게 좋은 기회라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나한테 부탁해도 되는 거잖아요. 나도 그럭저럭 사회인 노릇 할 일자리 정도는 알아봐 줄 수 있어요. 좋은 자리에 꽂아 줄 능력도 되고요. 왜 날 놔두고 최상혁한테만 기회를 주는 거예요? 내가 못 미더워요?”

“그건 상혁 씨가 먼저 얘기를 꺼내서….”

“뭐야. 지금 최상혁이 본처라고 편들어요?”

“그, 그게 아니고요….”

서하윤은 정말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곤란한 마음에 등에서 진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하준서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서하윤의 이마를 가볍게 콕콕 찔렀다.

“이거 봐. 이거 봐. 이렇게 착하고 맹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 거야. 사람이 좀 그렇게 따지고 든다고 곧장 사과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 어떡해요. 이래서 회사 생활 할 수 있겠어요?”

“엑…. 장난친 거였어요? 너무해요. 내가 얼마나 곤란했는데요.”

“반만 장난이었어요. 나머지는 진심. 뭐, 어쨌든 서운하긴 하니까요. 그래도 그렇게 너무 착하게 굴지 말아요. 차라리 옛날처럼 싸가지 없는 편이 안심되겠네요. 아니, 그렇게까지 성격이 나쁘면 사회 생활을 못 할 테니. 한 반 정도만? 아니, 그것도 많다. 한 1/5 정도만.”

서하윤은 자신이 본래의 서하윤처럼 싸가지 없이 구는 것을 상상해 봤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기억이 많이 돌아올 즈음에는 성격도 원래대로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지금 이 성격 그대로 기억만 떠올리게 될까. 답은 그때가 되어 봐야 알 것 같았다.

“아무튼 나한테 미안한 건 맞죠?”

“맞죠.”

“그럼 대신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자요.”

“준서 씨 집에서요?”

“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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