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최상혁은 돌려 말하는 법 없이 딱 잘라 대답했다. 그렇다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외로움 많이 타는 건 진즉 알고 있었어. 시도 때도 없이 같이 있어 달라고 매달리는 거 떨쳐 내는 마음도 편하지는 못했고. 하지만 서하윤이 아는 최상혁은 해 달라는 건 뭐든 척척 해 줄 수 있는 부자였고, 그 위치를 고수하려면 해야 할 일이 산재해 있었지.”
“상혁 씨….”
“몇 년간 쉴 새 없이 일한 덕분에 이제 쉬엄쉬엄해도 회사가 웬만큼 돌아갈 만큼 자리 잡았어. 좀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같이 휴일도 보내고 여행도 다니자.”
최상혁에게 일을 줄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일지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더 감동적이었다.
“내가 이런 복을 누려도 되나 모르겠어요.”
“복?”
“네. 복이요. 이렇게 사랑도 받고 애정도 받고… 아낌도 받고…. 서하윤은 좋은 사람 아닌데. 착한 사람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이런 복을 누리나 모르겠네요.”
“서하윤은 확실히 좋은 사람도 아니고 착한 사람도 아니지.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을 거야. 본인만 모를 뿐이지.”
최상혁의 말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는 찰나, 최상혁이 말했다.
“당장은 나도 힘들고, 올여름에 오키나와에 가자.”
함께 여행 가자는 말에 꿈속에서 잔뜩 부풀었던 기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여름까지는 아직 조금 남았지만 벌써부터 소풍 전날 아이처럼 기대감이 잔뜩 부풀었다.
“좋아요! 완전 좋아요!”
서하윤은 신이 나서 외치며 최상혁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살갗에서 느껴지는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이 순간을 만끽했다. 생각만 해도 너무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준서였다. 며칠이나 여행을 가는데 그가 혼자 빠지려고 할까? 무조건 따라오려고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최상혁을 올려다보다 눈이 딱 마주쳤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그 새끼는 안 돼.”
역시나, 꿰뚫어 보고 있었다. 최상혁이 단번에 잘라 말했다.
“무, 물론이죠. 우리 둘이 가는 여행에 준서 씨가 끼면 안 되죠. 우리 두 사람만의 여행인데요.”
서하윤은 재빨리 최상혁의 비위를 맞추었다. 눈으로 욕을 쏟아 내려던 최상혁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서하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최상혁 앞에서는 생각조차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 참. 저요….”
또 떠오르는 생각에 서하윤은 입을 뗐다. 그리고 최상혁의 팔을 베고 있던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친 채 말을 이었다.
“저 취직해 보려고요.”
“취직?”
“네. 이렇게 멀쩡한데 허구한 날 놀고먹을 수는 없잖아요. 나도 어엿한 어른인데요. 해운대에서 아르바이트해 보니까 의외로 꽤 할 만하더라고요. 물론 고졸에 별다른 경력도 없어서 제대로 된 회사에 들어가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번 찾아볼래요.”
거기까지 말한 서하윤은 최상혁이 말릴까 싶어서 얼른 덧붙였다.
“월급 받으면 내가 밥도 사 줄게요. 선물도!”
예상대로 최상혁이 코웃음을 쳤다. 되지도 않는 게 까분다는 얼굴이었다.
하긴, 엄청난 부자인 최상혁의 눈에는 한 달 월급 200만 원 겨우 벌까 말까 하는 직장을 다니겠다는 서하윤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엄연한 성인이자 남자로서의 인생이 달린 문제였다. 언제까지 애인에게 생활비를 타 먹으며 살 수는 없었다.
“상혁 씨 버는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어쨌든 내 생활비 정도는 스스로 벌어야죠! 언제까지 집에서 놀고먹기만 하겠어요.”
서하윤이 연신 주장하자 최상혁이 눈썹을 까딱 올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한번 일해 봐. 똑똑하니까 일머리도 제법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럼요! 저 아르바이트할 때 얼마나 칭찬받았는데요. 정직원으로 채용해 주겠다는 제안도 몇 번이나 받았었다고요.”
서하윤이 자랑스레 턱을 추켜올리자 최상혁이 낮게 웃었다. 옅은 웃음이 번진 그의 얼굴이 왜 그리 멋지고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하윤은 고개를 숙여 최상혁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굉장히 따뜻하고 정다운 기분이었다.
“내일 바로 이력서에 붙일 증명사진부터 찍어야겠어요. 면접 보려면 정장이 필요한데, 드레스 룸에 정장이 있나 모르겠네.”
“쓸데없는 데 시간 쓰지 말고 그냥 우리 회사로 출근해.”
구직 활동에 필요한 것을 이리저리 따져 보던 서하윤은 뜬금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혁 씨 회사요? 거기 조폭들…. 아니, 거기 대부업…. 음… 아무튼 금융 회사잖아요. 나는 그런 쪽으로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 데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내 비서나 하든지. 커피는 탈 수 있잖아.”
최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머릿속에 어떤 상상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사무실에 카리스마를 풍기며 앉아 있는 이사님과, 그런 이사님의 무릎 위에 앉아 키스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비서라는 전문 직종을 생각하며 이런 불미스러운 상상을 하다니. 전국의 비서들에게 미안할 일이었다. 하지만 둘이 붙어 있다가는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매우 컸다.
“비서는 안 돼요. 그렇게 붙어 있다가는 분명히….”
“분명히 뭐?”
최상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의 눈 속에 음흉함이 떠올랐다. 그도 서하윤과 비슷한 상상을 한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안 돼요. 난 낙하산 같은 거 싫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진짜 열심히 해 보고 싶다고요.”
최상혁이 낮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서하윤의 엉덩이를 잡아 주무르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럼 고졸 인턴으로 들어와. 복사나 스캔, 간단한 엑셀과 심부름 정도는 배우면 금방 할 수 있을 테니까.”
“복사, 스캔, 엑셀, 심부름이요?”
“그래.”
서하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복사기… 쓸 줄 모른다. 스캔… 할 줄 모른다. 엑셀… 할 줄 모른다. 심부름은… 시키면 열심히 할 자신 있다.
“심부름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네. 와, 나 정말 쓸모없네요. 복사나 그런 거 배우면 금방 익힐 수는 있는 거죠?”
“해 볼 생각 있어?”
“어차피 내 학력이랑 경력으로 제대로 된 직장 잡기는 힘들 거잖아요. 그렇다고 이제 나이도 먹어 가는데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 전전할 수도 없고. 고졸 인턴으로 들어가는 거면 낙하산도 약한 낙하산이니까 그 정도 혜택은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들어가면 진짜 열심히 해서 낙하산 소리 안 듣게 할게요.”
서하윤은 정장을 입고 목에는 사원증을 건 채 점심시간에 아메리카노를 빨며 길을 누비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힘이 불끈 솟았다.
“좋아. 그럼 책 주문해서 컴활 자격증 먼저 따 봐. 그거 따 오면 바로 인턴으로 채용해 주지.”
“엑… 바로 일하는 거 아니었어요?”
서하윤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최상혁이 코웃음을 쳤다.
“적어도 엑셀이 뭔지는 알고 들어와야 할 거 아니야. 복사나 스캔 같은 잡무야 금방 배운다지만 엑셀까지 잡아 놓고 가르쳐 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 없어. 다 자기 일이 있으니까.”
“음… 알겠어요. 자격증이 필요하면 따야죠.”
서하윤은 금방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협탁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가져다 컴활 책을 검색했다. 그중에서도 판매 내역이 높은 것으로 골라 주문했다. 주문이 완료되자 내일 도착한다고 떴다.
“나도 드디어 할 일이 생기네요.”
서하윤은 뿌듯한 마음으로 말했다. 뭔가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못내 좋았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사님.”
신이 난 서하윤은 최상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장난을 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잠잠하던 최상혁의 눈에 갑자기 확 열기가 피어올랐다.
“다시 말해 봐, 그거.”
“사, 상혁 씨?”
“한번 말해 봐. 얼른.”
서하윤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다 다시 각을 잡고 말했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사님.”
또박또박 말하자, 최상혁이 허리를 확 끌어당기며 키스를 했다. 서하윤은 그 짧은 사이에 완전히 발기해 버린 최상혁의 성기를 보며 기겁을 했다.
“안 돼요. 나 더 할 힘 없어요.”
“누가 뭘 하랬어? 넌 그냥 가만히 누워서 숨만 쉬고 있어. 내가 다 할 테니까.”
“아니, 그런 게 어디 있…. 아앗!”
따져 묻는 사이, 최상혁의 성기가 녹진녹진하게 풀려 있는 입구를 꿰뚫고 들어왔다. 끝까지 푹 파고든 성기의 묵직함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조용히 사그라들었던 몸속의 열기가 대번에 확 솟구쳤다. 깊은 곳을 정확히 찌른 성기의 감촉에 달콤하고 짜릿한 쾌감이 척추를 내달렸다.
“…아흣….”
서하윤은 최상혁의 목을 끌어안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다리가 마치 최상혁을 반기듯 저절로 활짝 벌어졌다.
“아앗, 이사님….”
서하윤은 자기도 모르게 최상혁을 이사님이라고 불렀다. 최상혁의 턱이 꿈틀하더니 그가 허리를 마구 놀리기 시작했다.
침실에 다시금 뜨거운 열기와 달콤한 신음이 가득 차올랐다. 그야말로 뼈와 살이 불타는 밤이었다.